아리고 사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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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18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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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 ||||
58대, 61대 |
82대 |
아리고 사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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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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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고 사키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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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前 축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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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아리고 사키 Arrigo Sacch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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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6년 4월 1일 ([age(1946-04-01)]세) | |
이탈리아 왕국 푸시냐노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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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0cm | |
직업 |
축구 선수 (
수비수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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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푸시냐노 CF (1964~1977) AC 벨라리아 (1977~1979) |
감독 |
리미니 칼초 (1982~1983) ACF 피오렌티나 유스 (1983~1984) 리미니 칼초 (1984~1985) 파르마 AC (1985~1987) AC 밀란 (1987~1991) 이탈리아 대표팀 (1991~1996) AC 밀란 (1996~1997)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8~1999) 파르마 AC (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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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레알 마드리드 (2004~2005 / 기술 고문) |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감독.토탈 풋볼의 창시자 리누스 미헬스, 카테나치오의 창시자 엘레니오 에레라와 더불어 이른바 사키이즘(압박 축구)을 탄생시키며 현대 축구 전술의 근간을 마련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AC 밀란에서 밀란 제너레이션을 이끌면서 유러피언컵 2회, 세리에 A 1회 등 총 8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 지도자 경력
사람들은 종종 결과만 중요하다고 하면서, 미래에 남는 건 커리어뿐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사람의 기억에 남는 것은, 축구의 위대함을 찾아 나설 때 얻어지는 느낌이다. 가령, 비록
파비오 카펠로의
AC 밀란이 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우리는 아리고 사키의
AC 밀란을 더 생생하게 기억한다.
호르헤 발다노[1]
호르헤 발다노[1]
2.1. 세리에 C1, 세리에 B
감독으로 성공했던 그도 원래는 축구 선수를 꿈꾸었으나, 19살이 되던 해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축구 선수로서는 성공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다가 23세의 나이로 은퇴했는데, 세리에 D의 작은 팀 수비수로 뛰면서 낮에는 신발 판매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전술 공부를 하며 불과 26세에 고향의 아마추어 팀 바라카 루고에서 첫 감독 생활을 했지만 베테랑 선수들과의 마찰로 오래 머물진 못한다.이후 AC 벨라리아, AC 체세나를 거쳐 레가 프로 프리마 디비시오네[2]의 리미니 칼초에서 첫 프로 감독직을 맡게 되나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한다. 이후 피오렌티나의 유스 감독직으로 활동하다 1년 만에 다시 리미니 칼초로 돌아와 팀을 상위권으로 이끌며 당시 3부 리그의 파르마의 러브콜을 받는다. 파르마의 감독직을 수락하며 팀을 세리에 B 승격으로 이끌고, 당시 명문가 부활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공격적인 선수 영입을 하며 강팀으로 재도약하던 전통의 명문 AC 밀란을 코파 이탈리아 예선과 16강전에서 각각 1:0으로 이기면서 주목을 받게 된다. 결국 간발의 차로 세리에 A 승격에 실패하지만 코파 이탈리아의 경기를 보고 그에게 반한 AC 밀란의 구단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당시 풋내기에 불과했던 그를 당시 밀란 감독인 스웨덴 삼총사이자 밀란의 전설이었던 닐스 리드홀름을 경질해가면서 감독에 임명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2.2. AC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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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론들은 사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신발 판매원 출신의 무명 감독이 하루아침에 명문 팀 감독이 된 신데렐라 스토리는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고 언론은 매일같이 신발 판매원 출신인 그가 영입한 검증 안 된 젊은 선수들을 까면서 그를 조롱했지만[3] 사키는 오히려 "기수(騎手)가 되기 위해서 말(馬)이 될 필요는 없다"라고 응수하며 자신이 영입한 카를로 안첼로티,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등과 함께 부임 첫 해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며 언론들의 의심을 불식한다.
1988/89 시즌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합류하면서 훗날 전설로 회자되는 오렌지 삼총사를 완성하고, 기존의 필리포 갈리, 마우로 타소티, 로베르토 도나도니, 프랑코 바레시 등의 활약과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알베리고 에바니,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등 유스 출신 선수들의 포텐이 빵빵 터져주면서 모든 퍼즐이 맞춰졌고, 사키의 전술이 버무려져 세리에 A 우승과 동시에 20년 만의 유러피언컵[4] 우승까지 견인한다. 부임 기간 4년 동안 리그 1회 우승, 유러피언컵 2회 우승, 유러피언 슈퍼컵 2회 우승,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회 우승, 인터컨티넨탈컵[5] 2회 우승을 견인하며 유럽을 호령한다. #
이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 제의를 수락하고 밀란 감독직을 파비오 카펠로에게 넘겨주고 사임한다.
2.3.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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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시절 1994 미국 월드컵 도중 바조와 망중한을 보내는 사키.[6] |
다만,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생각보다 저조한 편이다. 게다가 까다로운 성격과 독단적인 팀 운영 방식으로 여러 선수들과 마찰을 빚어 평은 그다지 좋지 않다. 대표적인 선수로는 로베르토 바조, 주세페 베르고미, 주세페 시뇨리 등이 있다.
유로 1992 예선전에서 세간의 평가와 달리 소련에게 밀려 2경기를 남기고 아첼리오 비치니가 물러나고 사키가 취임하였는데 이탈리아는 이미 유로 본선 진출조차도 자력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조별 리그에서 광탈한다.[7]
이후 절차부심하여 참가한 1994 미국 월드컵에서 AC 밀란 수비진을 통째로 뽑아오는 등 만전을 가하지만, 이번에는 공격진이 골을 넣지 못해 골골대다가 각 조 3위 간 와일드 카드 경쟁 끝에 가까스로 조별 리그를 통과하고 이후 바조가 16강부터 4강까지 5골을 넣는 클러치 능력으로 팀을 결승전까지 인도한다.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지만, 바레시, 마사로, 바조가 실축함으로써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8][9]
직후 야심차게 준비한 유로 1996에서 또다시 독일, 체코 등에게 밀려 조별 리그 광탈을 당했고, 이후 1996년 11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친선 경기를 끝으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생활도 막을 내린다.
2.4. 그 후
1996년 이탈리아 감독직을 사임한 뒤 후임 감독이었던 파비오 카펠로에 이어 다시 AC 밀란에 복귀하게 되지만 리그 11위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 한 시즌 만에 사임한다. 다음 시즌인 1997-98 시즌에 카펠로가 다시 사키의 후임으로 밀란에 복귀하지만 카펠로 역시 리그 10위를 기록하며 한 시즌 만에 사임하게 된다. 이후 라리가 무대로 발을 돌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하지만 성적이 부진하여 시즌 도중에 경질되었다. 2001년 잠시 파르마의 감독직을 역임했고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난 뒤, 2004년 레알 마드리드의 기술 고문으로 한 시즌간 재직했다. 이때 세르히오 라모스를 보고 플로렌티노 페레스에게 "회장, 새로운 말디니가 나타났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2007년 11월, 핌 베어벡 사임 후 공석이 된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직을 두고 대한축구협회에서 사키에게 감독직을 제안했다는 기사가 떴다. # 그러나 사키는 "더 이상 감독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라며 명시적으로 거절했다고 한다. 어떤 기사에서는 "감독직 제의는 큰 영광이지만 감독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후에도 감독직은 맡지 않으면서 실제 은퇴하였다.
3. 전술 철학: 사키이즘
지금은 당연시되는 지역 방어와 압박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리고 사키는 이 생소한 개념들을 지금의 축구 전술에 있어서 필수적인 개념으로 정착시킨 장본인 중 한명으로 취급받는다.사키이즘의 가장 큰 쾌거는 리누스 미헬스가 제창한 토탈 풋볼을 더욱 효율적으로 완성한 데에 있다. 토탈 풋볼의 신봉자였던 아리고 사키는 이 개념을 당시 이탈리아 축구판에 맞게 현지화할 필요가 있었는데, 특히 "압박 축구는 마라도나를 견제하기 위해서 만든 전술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던 아리고 사키는 당대 세리에 A를 평정하던 디에고 마라도나를 견제하기 위해 4-4-2 포메이션을 확립하고, 각각의 포메이션을 3선 혹은 4선으로 나눠서 각각의 선수가 그 지역을 커버하는 개념을 제창했다.
예를 들어 밀란 제너레이션의 AC 밀란과 당시 마라도나의 나폴리가 붙었고, 마라도나가 나폴리 진영에서 공을 잡은 경우를 상정해보자.
- 1차적으로 전방의 반 바스텐- 도나도니- 굴리트-콜롬보가 마라도나를 압박한다.
- 그런데 마라도나가 이 압박을 뚫어내고 밀란의 왼쪽 진영으로 파고든다면, 2차로 도나도니- 안첼로티-굴리트- 레이카르트가 마라도나를 압박한다.
- 그런데 또 마라도나가 그것을 뚫고 밀란의 왼쪽 진영으로 들어간다면, 3차로 안첼로티-레이카르트- 말디니가 마라도나를 압박한다. 거기다 뼛속까지 토탈인 굴리트까지 압박에 가담할 수 있다.
- 그런데 마라도나가 이것마저 뚫고 밀란의 후방 중앙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레이카르트/안첼로티-말디니-바레시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코스타쿠르타까지 가담하여 마라도나를 압박한다. 물론 뼛속까지 토탈인 굴리트는 여기에 또 낄 수도 있다.
이렇게 3선, 4선에 걸쳐서 상대방의 공격 전개를 방치하지 않고 계속해서 강하게 압박하는 축구는 사키이즘의 절대 명제였다. 물론 혼자 그걸 다 뚫는다면 할 말 없지만, 마라도나급 축구도사가 아닌 딴에야 아니 그 마라도나조차도 혼자선 웬만큼 컨디션 좋지 않고선 뚫을 수 없는게 압박 축구였다.
그리고 이런 압박 축구의 효율성이 입증되자, 여러 팀에서도 이 개념을 차용하면서 현대 축구에선 다소간 수준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적용하고 있는 개념이다. 참고로 위에서는 수비적 압박만 언급했지만 밀란 제너레이션은 공격적 압박도 역대에 손꼽힐 만한 팀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공격적으로도 수비적으로도 강한 팀이 될 수 있는 전술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3.1. 영향력
축구계에서 사키가 남긴 발자취는 크다. 상기했듯 사키이즘이라 불리는 압박 축구 전술을 구사해 이후 현대 축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2000년대 후반 당대 최강의 팀이자 크루이프즘의 후계자로 평가받는 펩이 이끌던 바르사마저 사키의 전술을 많이 차용했고[10], 위르겐 클롭 감독의 게겐 프레싱도 사키이즘에서 사실상 진화한 개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키의 제자로 꼽히는 감독으로는 프랑크 레이카르트,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카를로 안첼로티, 로베르토 도나도니 등이 있다. 한편, 제자는 아니지만 2003-04 시즌 PL 무패 우승 당시 아르센 벵거 감독의 아스날이 사용한 4-4-2도 당시엔 사키이즘의 극대화로 평가받기도 했다.
4. 감독 기록
4.1. 대회 기록
- 파르마 AC (1985~1987, 2001)
- 세리에 C1: 1985-86
- AC 밀란 (1987~1991, 1996~1997)
- 세리에 A: 1987-88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88
- 유러피언컵: 1988-89, 1989-90
- 유러피언 슈퍼컵: 1989, 1990
- 인터컨티넨탈컵: 1989, 1990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1991~1996)
- FIFA 월드컵 준우승: 1994
4.2. 개인 수상
- 유럽 올해의 축구 감독[11]: 1989
-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1989-90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1989
- 세미나토레도로: 1988, 1989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1
- UEFA 역대 최고의 감독 10인: 2017
- UEFA 회장상: 2022
- 프랑스 풋볼 역대 최고의 감독 3위: 2019
-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역대 최고의 감독 2위: 2019
4.3. 수훈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3등급: 2012
5. 인종차별 논란
인종차별성 발언을 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제일 호되게 당한 케이스가 2015년 2월 했던 "이탈리아 국대에 흑인이 너무 많다"라는 말이었는데 당연히 주변에서 많은 비판을 했고 거물 축구 에이전트 미노 라이올라는[12] "이런 인간들 때문에 세리에가 이 모양이야… 이런 말 볼 때마다 부끄러워 죽겠어"라면서 사키를 깠고 심지어 제프 블라터마저 사키를 대차게 깠다.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다 보니 아리고 사키도 변명을 했는데 그 변명이라는 게 "내가 코치였을 때 흑인 선수들 많이 썼다. 그러니까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난 그저 이탈리아 국대에 흑인 선수들이 너무 많아서 대표팀의 아이덴티티가 흐려지는 게 걱정되었을 뿐"이라는 발언이어서 오히려 욕을 더 바가지로 먹었다. # 물론 사키가 뭘 걱정한진 알겠지만 이미 국적 시대로 글로벌 추세가 바뀌는 시점에 인종, 민족으로 정체성을 따지는 것부터가 구시대, 선천적인 요소만 가지고 하는 편견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6. 여담
-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 F조에서 벌어진 대한민국과 독일의 최종전을 시청한 후 "( 대한민국 대표팀은) 투지와 결정력에서 승리할 자격이 충분했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
- 2021년 10월, 인터뷰를 통해 현대 축구에서 본인의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감독이 누구인 거 같냐는 물음에 리버풀의 위르겐 클롭 감독과 맨체스터 시티의 펩 과르디올라 감독을 꼽았다. 이어서 "펩과 클롭은 축구를 진보하게 하는 위대한 이들이며, 그러한 감독들이 없다면 축구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또한 사키는 클롭의 리버풀을 보고 걸작이라는 표현과 함께 진정한 팀이라는 극찬을 남기기도 했다. 자신의 다음 생에는 PL 감독이 되어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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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단을 보면 알겠지만 사키 시절 밀란의 우승 기록은 카펠로 시절의 밀란보다 챔스 우승만 1번 더 했을 뿐, 리그 우승부터 4 대 1로 차이가 크다. 더구나 카펠로는 밀란에서 리그
무패 우승까지 달성했다.
[2]
흔히 세리에 C1이라 한다.
[3]
네덜란드 리그에서 날아다닌 반 바스텐이나 굴리트나 그때 당시엔 의문부호가 붙었다. 같이 영입된 안첼로티는 20대 후반이었다.
[4]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
[5]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
[6]
각각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과 선수이지만, 둘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다.
[7]
마지막 키프로스와의 경기를 2-0으로 승리하며 간신히 2위를 기록했다.
[8]
특히 바조는 승부차기 실축 때문에 영웅에서 역적으로 추락해 이탈리아 팬들에게 온갖 욕을 얻어먹었으며, 은퇴할 때까지 그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본인은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한 때 세계 최고의 선수였지만, 월드컵 이후 신예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에게 밀려
유벤투스를 떠나고 방랑 생활을 거듭한다.
[9]
그러나 이는 사키 감독의 실책도 없지 않은데 승부차기에서 1번 키커로 주장인
프랑코 바레시를 투입했는데 바레시는 연장 종료 직전에 다리 경련으로 실려나가기까지 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4번 키커인
다니엘레 마사로의 경우 대회 내내 제 몫을 못하며 부진한 선수여서 승부차기로 투입할만한 선수도 아니었다. 바조 또한 대회 내내 햄스트링 통증으로 고생했으며, 전반전에도 통증이 올라와 실려갔다가 들어오는 등 경기 내내 부상을 안고 뛰었다. 바조의 실축이 임팩트가 강해서 그렇지 실제 패배 원인은 사키 감독의 키커 선정 탓이 더 큰 것.
[10]
다만 상기했듯 두 개념 모두 토탈 풋볼에서 영향을 받은 개념이긴 하다. 크루이프즘은 대놓고 적자고, 사키이즘은 토탈 풋볼의 압박 개념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크루이프즘이 숏 패스와 주도권 축구로 대표된다면(다만 사키이즘에 비교되면서 압박 개념이 마치 없는 것마냥 매도되기도 하는데, 애초에 토탈 풋볼 시절부터 압박은 중요한 개념이었다. 크루이프 역시도 공을 뺏기면 바로 되찾아오기 위해 압박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키이즘은 지역 방어와 압박 개념을 접목시켰다.
[11]
제프 헤르베르거 어워드
[12]
이탈리아계 네덜란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