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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후탈스

레몽 후탈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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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파일: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6대
클럽
파일: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로고.svg

55대, 57대, 59대
}}} ||
벨기에의 前 축구감독
파일:external/www.leaguemanagers.com/raymond-goethals_17.max-740x444_1.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레몽 후탈스
Raymond Goethals
출생 1921년 10월 7일
벨기에 브뤼셀수도권지역 포레
사망 2004년 12월 6일 (향년 83세)
벨기에 브뤼셀수도권지역 브뤼셀시
국적
[[벨기에|]][[틀:국기|]][[틀:국기|]]
신체 179cm
직업 축구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다링 클뤼프 브뤼셀 (1940~1947)
라싱 클뤼프 브뤼셀 (1947~1948)
RFC 앙뉘 (1948~1952)
AS 허네지엔 (1952~1957)
감독 RFC 앙뉘 (1957~1958)
스타드 와헤미엔 (1958~1959)
상트롱 VV (1959~1966)
벨기에 대표팀 (1966~1968 / 수석 코치)
벨기에 대표팀 (1968~1976)
RSC 안데를레흐트 (1976~1979)
FC 지롱댕 드 보르도 (1979~1980)
상파울루 FC (1980~1981)
스탕다르 리에주 (1981~1984)
비토리아 SC (1984~1985)
라싱 브뤼셀 (1985~1987)
RSC 안데를레흐트 (1988~1989)
FC 지롱댕 드 보르도 (1989~1990)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1)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1~1992)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2~1993)

RSC 안데를레흐트 (1995)
1. 개요2. 선수 경력3. 감독 경력
3.1. 초기 커리어3.2.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3.3. RSC 안데를레흐트 시절3.4. 유랑기3.5. 스탕다르에서의 짧은 전성기3.6. 비토리아 SC/안데를레흐트 시절3.7. 리그 앙 시절3.8. 말년
4. 은퇴 후의 삶5. 수상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벨기에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95년 RSC 안데를레흐트 감독을 맡았다.

선수 시절엔 평범한 골키퍼였지만 감독 경력을 시작한 후 벨기에와 프랑스를 오가며 유럽 축구에 족적을 남길 만큼 많은 업적을 쌓았다. 특히 1993년 마르세유를 이끌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 것은 그의 감독 경력 중 최고의 업적이다. 1993년 마르세유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오늘날까지 리그앙 축구 클럽들의 유일한 챔피언스리그 우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1]

별명은 '과학자 레이몬트(Raymond la science)'.

2. 선수 경력

1933년, 후탈스는 11살에 다링 클뤼프 브뤼셀에 입단해 6년간 아카데미 교육을 받고 1940년 프로에 데뷔했다. 그는 1947년까지 다링 클뤼프 브뤼셀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 라싱 클뤼프 브뤼셀로 이적해 1년간 활동했다. 그후 RFC 앙뉘에서 1948년부터 1952년까지 활동했고 뒤이어 AS Renaisiènne로 이적해 1952년부터 1956년까지 뛰다가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코치 연수를 받은 후 본격적으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3. 감독 경력

3.1. 초기 커리어

1956년, 후탈스는 RFC 앙뉘의 선수 겸 코치로 부임했고 이듬해엔 Stade Waremmien로 옮겼다. 그는 이 팀을 이끌고 3부 리그로 승격하고 이듬해에도 잔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후 후탈스는 1959년 상트롱 VV로 이적했다. 상트롱 VV는 그가 부임하기 전만 해도 대부분의 세월을 하부리그에서 전전했고 몇년 전 벨기에 1부리그로 승격한 후 매 시즌은 힘겹게 버티는 약소팀이었다. 후탈스는 이런 팀을 맡은 지 몇년 만에 여러 어린 선수들을 길려냈고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전술을 도입해 상대팀들이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1965-66 시즌, 상트롱 VV는 후탈스의 지휘에 힘입어 리그 준우승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상트롱 VV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였다. 또한 이 시즌에 치러진 안데를레흐트전(상트롱 VV가 2:0으로 승리했다)에서 2만 2천여 명의 관중들이 몰려들었는데, 이 역시 클럽 역사상 가장 많은 관중 기록이다.

3.2.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Raymond_Goethals_1977.jpg

1966년, 후탈스는 벨기에 축구 구가대표팀의 부름을 받고 코치직을 맡았다. 그는 2년간 수석코치 역할을 수행하다가 1968년 정식으로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의 첫번째 임무는 1970 멕시코 월드컵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대표팀을 성공적으로 70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1970년 6월 멕시코로 향한 벨기에 대표팀은 악재에 직면하고 말았다. 주전 스트라이커 폴 반 힘스트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이 향수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벨기에 대표팀은 일단 엘살바도르를 상대로 3:0 승리를 거두었지만[2] 소련에게 4:1로 패하고 뒤이어 멕시코에게 1:0으로 패해 본선 조별리그에서 조3위 대회 10위를 기록하면서 아쉽게 8강 진출에 실패했다.

2년 후, 벨기에 축구 대표팀은 유로 지역예선 조별리그에서 1위를 차지한 후 지역예선 8강에서 전 대회 우승국 이탈리아와 맞붙어 2:1 승리를 거두어 개최국 자격을 얻고 4강 본선 유로 1972에 진출하였고, 본선 4강전에서 서독과 만나 2:1로 패해 결승전 진출은 좌절되었다. 그래도 벨기에는 3,4위전에서 헝가리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며 전체 순위 3위를 확보하며 유종의 미를 이루었다.

이후 후탈스는 1974 서독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을 노렸다. 그가 이끄는 벨기에 대표팀은 유럽예선 4승 2무에 12득점 무실점이라는 대단히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유럽예선에서 1위를 차지해야 74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네덜란드에게 골득실에서 밀려나 2위로 기록하는 바람에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벨기에 축구협회는 운이 없었다고 보고 후탈스에게 대표팀 감독직을 계속 맡겼다. 후탈스는 벨기에를 이끌고 유로 1976 지역예선에서 승승장구하며 프랑스, 동독, 아일랜드를 잇달아 격파했다. 그러나 이후 부진하더니 급기야 최대 라이벌인 네덜란드에게 5:0 대패를 당했다. 결국 그는 네덜란드에게 대패한 것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경질되었으며 벨기에는 혼란에 휩싸이다가 결국 4강 본선 유로 1976 진출이 좌절되었다.[3]

3.3. RSC 안데를레흐트 시절

파일:external/1.bp.blogspot.com/02-Raymond+GOETHALS+Paniin+Anderlecht+1979.jpg

벨기에 대표팀 감독직에서 쫓겨난 뒤, 후탈스는 벨기에의 명문 클럽 안데를레흐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안데를레흐트 보드진 측은 벨기에 리그 우승은 물론이고 유럽대회에서도 지난 시즌(1975-76 시즌)에 유로파 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한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선전해주기를 기대했다. 그가 안데를레흐트 감독을 부임한 이래 첫번째 경기는 유로파 슈퍼컵 매치였다. 안데를레흐트는 지난 시즌 유로피언 컵 우승팀인 바이에른 뮌헨과의 슈퍼컵 1차전에서 2:1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후탈스는 좌절하지 않고 선수들을 독려해 4:1로 뒤집어엎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안데를레흐트는 바이에른 뮌헨을 최종 스코어 5:3으로 격파하고 UEFA 슈퍼컵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뒤이은 시즌에서 안데를레흐트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리그에서는 준우승을 거두었고 벨기에 컵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서 함부르크에게 2:0으로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1977-78 시즌은 좀더 성공적이었다. 비록 리그는 또다시 준우승에 그쳤지만 유로파 위너스컵에서 결승전까지 진출해 오스트리아 빈을 상대로 4:0 완승을 거두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또한 안데를레흐트는 1978년 여름에 열린 UEFA 슈퍼컵에서 유러피언 컵 우승팀인 리버풀 FC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슈퍼컵 우승 트로피를 획득했다.

1978-79 시즌에서 후탈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몇몇 특정 선수들을 편애하는 경향을 보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프랑키 페르카우테런[4]라는 선수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기용되었고 부진하는데도 끊임없이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려 "후탈스의 아들"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을 획득했다. 반면에 그에게 선택받지 못한 선수들은 그의 지도력을 의문시하며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다. 결국 1978-79 시즌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안데를레흐트 보드진은 그와 체결했던 계약을 해지하기로 결정했다.[5]

3.4. 유랑기

후탈스는 1979-80 시즌 도중에 프랑스의 축구 클럽 보르도의 감독을 부임했다. 당시 보르도는 레알에서 성공적인 감독 경력을 쌓았던 Luis Carniglia를 1979년 여름에 선임했지만 이후 성적이 강등권으로 추락하자 책임을 물어 그를 경질하고 후탈스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그는 보르도의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리는 데 성공하고 시즌을 6위로 마감해 잔류에 성공시켰다. 그후 후탈스는 1980년 브라질의 축구 클럽 상파울루로 부임해 1981년까지 이끌었다.

3.5. 스탕다르에서의 짧은 전성기

파일:external/1.bp.blogspot.com/goethals+1982.jpg

1981년, 후탈스는 벨기에의 최고 클럽으로 손꼽히는 스탕다르에 부임했다. 그는 이 스탕다르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첫 시즌인 1981-82 시즌에 안데를레흐트를 제치고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유로파 위너스컵에서도 결승전까지 진출했지만 바르셀로나에게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후탈스는 다음 시즌인 1982-83 시즌에도 승승장구하여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그런데 1983-84 시즌이 진행되던 도중에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수사관들이 벨기에 축구계에서 검은 돈이 오가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하고 조사한 결과 1982년 스탕다르가 리그 최종전 상대인 Waterschei 선수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덕분에 스탕다르는 Waterschei를 격파하여 리그 우승을 달성할 수 있었다. 후탈스는 자신은 이런 사실을 몰랐으며 절대로 이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Waterschei 선수들이 승부조작을 시인함으로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후탈스는 감독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3.6. 비토리아 SC/안데를레흐트 시절

스탕다르를 떠난 후탈스는 포르투갈의 축구 클럽 비토리아 SC로 부임해 1984-85 시즌을 이끌었고 뒤이어 라싱 브뤼셀의 감독을 맡아 1985년부터 1987년까지 2시즌을 이끌었다. 그후 1988년 2월 성적이 부진하던 안데를레흐트의 부름을 받고 감독 자리를 맡아서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데 성공해 1988년 벨기에컵 우승을 달성했으며 1989년에도 벨기에 컵 우승을 차지해 컵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3.7. 리그 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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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후탈스는 지난날 감독을 맡은 바 있던 보르도로 돌아왔다. 그는 1989-90 시즌에 보르도를 이끌고 리그 준우승을 달성했다. 이에 1991년 1월, 프랑스 최고의 축구 클럽 중 하나인 올랭피크 마르세유가 그를 전격 선임했다. 후탈스는 마르세유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도 진출시켰다. 하지만 아쉽게도 츠르베나 즈베즈다와 승부차기를 벌인 끝에 3:5로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1990/91 시즌이 끝난 직후 토미슬라프 이비치에게 감독직을 넘겼으나 그해 10월에 복귀한 그는 1991/92 시즌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유러피언 컵 2라운드에서 스파르타 프라하에게 4:4 동률을 이루었으나 원정 다득점에서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시즌이 끝난 뒤 후탈스는 장 페르낭데 코치에게 또다시 감독직을 물려주다 그해 11월에 돌아온 그는 마르세유 선수들을 이끌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해 챔피언스리그의 최강팀 중 하나인 AC 밀란을 1:0으로 격파하고 고대하던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획득했다. 이 우승은 현재까지 프랑스 리그 축구 클럽들의 유일한 챔피언스리그 우승 기록이다.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후탈스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기여했다. 팬들은 그에게 마술사, 과학자 같은 명예로운 명칭을 붙이며 그의 지도력을 격찬했다.

그런데 얼마 후 스탕다르에서 겪었던 승부조작 스캔들이 재현되고 말았다. 1992-93 시즌 마지막 경기 상대인 발랑시엔 FC와의 경기 때 마르세유 선수인 장 자크 에들리가 발랑시엔 선수들에게 경기에서 져주고 부상 위험을 줄여달라며 뒷돈을 건넨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 마르세유는 5월 20일에 발랑시엔과 경기를 치르고 엿새 뒤에 챔스 결승전을 치르고자 했다. 이로써 이들은 손쉽게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유럽 정상을 노리겠다며 검은 돈을 사용한 것이다. 급기야 마르세유 전 회장 베르나르 티피가 승부조작에 깊이 관여했다는 게 드러나면서 마르세유는 1994년 2부리그로 강등되었다. 후탈스 본인은 챔피언스리그 우승 직후 팀을 떠났지만 그 또한 승부조작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인해 장기간 시달려야 했고 나중에서야 그는 승부조작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겨우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8. 말년

1993년 마르세유를 떠난 후탈스는 이후 2년간 승부조작 가담 및 방조 혐의로 인해 수사를 받느라 감독 생활을 지속시킬 수 없었다. 그러던 1995년 초 안데를레흐트의 임시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이후 그는 감독 커리어를 완전히 은퇴하고 야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4. 은퇴 후의 삶

감독 인생을 정리한 뒤, 후탈스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축구 논평가로 활동했다. 그러던 2004년 12월 6일, 후탈스는 장암에 시달린 끝에 8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5.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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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한 후탈스는 역대 챔피언스리그 최고령 우승 감독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2] 월드컵 사상 첫 승. [3] 합계 1:7로 패했다. [4] '어린왕자' 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로 82년 86년 월드컵 그리고 유로 대회에 나설 정도로 80년대 초중반 벨기에 대표팀을 책임졌던 특급 윙어였다. 현재는 벨기에 축구협회에서 스포츠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5] 1978-79 시즌 당시의 페르카우테런은 어린 나이대 부터 소속팀에서 맹활약 하며 소속팀에게 두번(벨기에컵, UEFA 컵위너스컵)이나 우승컵을 안겨다 준 맴버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위에 소개한 것처럼 본인의 최전성기를 본격적으로 알린 시기(1975~1987)인 상황에서 후탈스 감독과 함께 하였고 또 후에 선수 본인도 80년대 초중반 벨기에를 대표했던 특급 윙어로 이름을 떨쳤던 걸 보면 감독의 입장에서는 승리가 절실한 상황에서 투입되는 그의 모습이 흡사 믿을맨 수준 이상으로 느껴져서 기용을 한 거 였으니 감독의 무조건적인 잘못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단지 선수가 부진한 상황에서 계속 기용한 것이 감독으로서 보여야 할 대처를 잘 못한 것이기에 이 부분만 놓고 본다면 비판 받아 마땅하다고 볼 수 있다, 여담으로 페르카우테런은 1987 시즌까지 소속팀에 머물렀으며 그 기간동안 팀은 벨기에 국내 리그와 유럽 무대에서 맹위를 떨치며 유럽에서 알아주는 팀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