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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인조 ~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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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심기원 沈器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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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87년( 선조 20) |
사망 |
1644년
5월 3일 (향년 56 ~ 57세) (음력 인조 22년 3월 27일) |
참수형 | |
봉호 |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1] |
본관 | 청송 심씨 |
자 | 수지(遂之) |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었으나 잇다른 호란을 겪었고, 결국 역모를 꾸미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2. 생애
2.1. 초기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의 도당으로 몰려 유배를 갔다가 복위되어 통례원(通禮院)[2]의 좌통례(左通禮)[3]를 지냈던 심달원(沈達源)의 고손자로 선조 20년(1587)에 태어났다. 선조 시기 학자이자 작가였던 권필(權韠)[4]의 문하생이기도 했으나 그 때까지만 해도 벼슬 하나 없던 유생의 신분이었다.2.2. 인조반정
광해군이 명-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하고, 재위 5년(1613) 계축옥사로 조정 안팎이 뒤숭숭해졌다. 궁궐 증축 및 토목 공사가 잦고 매관매직 등 혼란이 발생하자 신경진, 김류, 이귀, 김자점, 최명길 등은 광해군의 패륜을 이유로 들며 반정을 일으켰는데, 당시 유생이었던 심기원 역시 동참하였다.반정군은 군사 2천여 명을 이끌고 창의문으로 진격해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에서는 미리 포섭된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이 내응해 궁궐 문을 열어준 덕에 궁궐 안으로 진입했다. 광해군은 반정군이 궁문을 부술 때 사다리로 담을 넘어 달아나[5] 의관(醫官)[6]이었던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다가 결국 붙잡혔고 반정은 성공하였다.
직접 뛰어들어 반정군을 이끈 보상인지 몰라도 심기원은 정육품 형조좌랑(刑曹佐郞)에서 정오품 사헌부 지평(地坪), 정삼품 동부승지(同副承旨) 순으로 연달아 승진하다가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2.3. 이괄의 난 시기
인조 2년(1624)에 종이품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으나 그 해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심기원은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로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괄이 왕으로 세우려 했던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가 소천(昭川)으로 내려가 숨었다가 현감 안사성(安士誠)에게 붙들려 압송되었다. 그런데 심기원이 신경진 등과 짜고 흥안군을 국문하지도 않은 채 창덕궁 돈화문에 목을 매달아 죽여버리는 악수를 두었다. 원래 조선은 사형도 임금에게 재가를 받아서 집행한다. 공신이라고는 하지만, 신하가 임금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왕족을 죽임은 심각한 월권행위였기에 인조의 눈 밖에 나서 돌아오자마자 하옥되었다.[7] 다만 흥안군이 반역에 동참하려 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던지라 사형을 내리거나 하지는 않았다.이렇게 반란 세력이 차기 국왕으로 옹립한 왕족을 임금의 허락 없이 멋대로 죽인 점은 전대 고려 시대에서 삼별초의 난 당시 승화후 왕온을 죽였던 홍다구와 같다.
2.4. 정묘호란 시기
이괄의 난의 여파가 대외적인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고[8] 결국 인조 5년(1627) 후금의 군대가 침공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심기원은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의 도감찰사(都檢察使)로 임명된 후 소현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난을 간 뒤 분조를 도왔다. 이후 소를 보내 풍정연(豊呈宴)[9] 및 왕이 정전(正殿)에 머무르는 것을 즉각 중단하고[10] 분위사(奔慰使)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세자를 모시고 분조를 한 공을 인정받았는지 이듬해 인조 6년(1628)에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에 임명되었다가[11] 인조 12년(1634)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2.5. 병자호란 시기
후금의 군대는 홍타이지의 지휘 하에 산해관 이북의 명나라 영토와 몽골 고원 일대를 장악하고는 마침내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인조 14년(1636) 음력 12월에 청의 군대가 침공하자 인조는 심기원을 수도를 방어하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았다.한편, 도원수로서 서북쪽의 방어를 담당했던 김자점이 이끄는 군대는 정방산성(正方山城)[12]에 주둔해 청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청군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는 달리 수도 한양을 노렸기에 김자점의 군대를 우회해 진격했다.[13] 인조는 본디 소현세자와 함께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청군이 신속하게 한양 외곽까지 진격해오자 하릴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김자점은 부랴부랴 남한산성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도르곤 등이 이끄는 청군과 마주쳐서 토산에서 전투를 벌여 작은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난전으로 타격을 심하게 받아 양평(楊平)의 미원(迷原)에 주둔한 이후 호란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질 않았다. 그 사이 한양은 8일 만에 함락되었다. 김자점이 양평에서 움직이질 않자 인조는 심기원을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로 삼고 남쪽의 근왕군을 지휘하도록 했으나, 심기원은 직위가 무색하게도 남쪽 근왕군을 만나지도 못한 채 김자점이 군대를 주둔한 미원으로 이동했다.
이후 강원도에서 패배한 근왕군이 합류했으나, 인조가 김자점을 삭탈한 뒤 심기원을 임명한 게 아니라 그냥 도원수에 임명하였기에 한 군대에 도원수가 둘인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포위를 뚫자는 김자점과 아직 그럴 상황이 아니라며 반대하는 심기원의 의견이 충돌해 서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군대는 이도 저도 못한 채 도원수들이 방침을 결정하기를 기다렸다.
남한산성은 원래 피난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임금이 조정을 이끌고 장기간 버틸 만한 식량 등이 없었고 겨울의 혹한은 매서웠다. 그런 열약한 상황에서 각 지역의 근왕군들은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청군의 포위를 뚫지 못했고, 정예군은 지휘관이 2명인 채로 양평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강화도까지 손쉽게 함락되자 결국 인조와 대신들은 견디지 못하고 성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항복하니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인조 15년(1637) 음력 1월,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고작 한 달 20여 일 만이었다.
심기원은 수도를 지키는 유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한양을 지키지 못했고, 제도도원수로 임명했으나 지휘권 혼란으로 아무것도 못했기에 불신을 받았는지 한동안 중용되지 못하였다.
2.6. 호란 이후
병자호란이 끝나고 3년이 지나 인조 18년(1640) 호위대장으로서 다시금 기용되었다가 남한산성의 수어사(守禦使)[14]가 되었고 정2품 병조판서와 종1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인조 20년(1642)에 우의정, 21년(1643)에 좌의정이 되었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다.좌의정이 된 해에 성절사(聖節使)[15]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인조 22년(1644)에는 그간의 경력 덕분인지 심기원이 좌의정을 유지하면서 남한산성의 수어사를 겸임하는 파격적인 인사조치가 단행되었다. 조정의 높은 자리를 유지하면서도 남한산성의 군사력까지 쥐자 슬슬 딴 마음을 먹었는지 장사들을 차출해 호위대를 결성했고 예전 지사(知事)였던 이일원(李一元), 남한산성의 행정권을 쥔 광주부윤 권억(權澺) 등과 모의했다.
이들은 인조의 측근인 장수 및 대신들을 초청해 술에 취하게 한 뒤 모두 죽여 인조의 정치적인 팔과 다리를 끊어내어 상왕으로 물러나게 하고, 본래는 소현세자를 임금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계획을 수정해서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16]을 추대하려 했는데, 수하 중에 황헌(黃瀗), 이원로(李元老) 등이 훈련대장이었던 구인후(具仁垕)에게 밀고하여 탄로가 나버렸다.
그 즉시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고 죄를 자복한 뒤 처형당했다. 반역죄로 처형된 만큼 심기원의 시신은 팔방에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지만 심기원의 가족들로 하여금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 인조는 심기원을 좋은 벗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반역하려는 마음을 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심기원에게 크게 실망하는 듯한 말을 하였다 #. 이 역모 사건에는 임경업도 얽혀서 심문을 받다가 옥사했다. 인조가 의도적으로 죽인 건 아니고, '심기원이 먼저 일을 일으킨 뒤에 따로 임경업을 포섭하려 한 거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임경업의 혐의에 대해 대신들과 논의하던 도중 임경업이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것.
조선 시대의 야사집인 《 청성잡기》에는 김자점이 능지형을 공개적으로 제안하여 산 채로 사지가 토막난 후 죽었으며, 심기원은 "김자점도 나와 똑같이 죽을 것"이라며 저주했고 결국 김자점 역시 김자점의 난으로 같은 방식으로 처형된 후 능지형이 폐지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 연려실기술》에서는 김자점이 따로 집행담당관을 불러 개인적으로 지시했다고도 한다. 실제로 심기원의 사형 방식에 대해 논쟁이 오가느라 사형이 지연되긴 했는데, 공신이자 대신의 체통을 지켜 비공개로 사약을 내릴 지, 아니면 공개처형할 지 조율 중이었기 때문에 능지형이나 거열형 같은 형벌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김자점 역시 능지형이나 거열형을 받은 적이 없다. 심기원은 결국 공개처형이 결정되었고, 이것이 어느새 능지형으로 둔갑되어 세간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청성잡기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업보나 인과응보에 대한 내용이 많으며, 이 이야기도 단두대의 발명자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와 유사한 종류의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심기원의 동생 수원부사 심기주(沈器周)는 형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역모에 참여하길 거부하고 등창에 걸려 죽었는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심기원에게 연좌된 무리들은 모두 절도(絶島)로 귀양보냈으나 평소 심기주의 행실을 잘 알고 있던 인조는 반역에 참가하지 않은 심기주를 기특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히 심기주의 아들만은 섬이 아닌 육지에 유배 보냈다고 한다 #.
3. 대중매체
- 2008년 SBS 드라마 < 일지매>에서는 배우 양재성이 연기했다. 좌의정으로 나오는데 이원호의 오랜 벗으로 인조반정 때 인조를 왕위에 올리는데 1등 공신을 한 인물이며 천우회의 핵심 인물 중 1명으로 가슴에 천우회 문양 중 일부분이 새겨져 있다. 어느 날 이원호의 역모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원호의 아들인 겸이를 찾는데 용이가 겸이임을 알고 그에게 어느 정도의 진실을 알려주기까지 한다. 심기원이 이원호의 역모 사건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는 인조가 심기원을 역모죄로 몰고, 겸이에게 이원호 역모 조작 사건의 모든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죽는다.
- 2013년 JTBC 드라마 <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는 배우 김규철이 연기했다. 인조와 김자점을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며 입만 열면 반란을 암시하는 말을 주변 돌아가는 상황이나 분위기 파악 못하고 기회를 엿보면서 김류에게 동참하자고 가벼이 내뱉는다. 가담자 중 훈련대장 구인후의 밀고로 발각되어 국문을 받다가 김자점에 의해 사지가 칼에 찢기고 나중에는 목이 베어 전국 8도에 각각 보내지는 사지절단형으로 죽는다. 죽어가기 전 심기원은 "김자점도 사지절단형으로 죽을 것이다."라며 저주를 퍼붓고 죽었는데 진짜로 저주 약빨이 들었는지 김자점도 훗날 역모 사건에 가담자로 지목되어 사지절단형으로 똑같이 죽는다. 전체적으로 역사와 비슷하게 묘사되나 너무 악랄하게 묘사된 부분도 있다.
[1]
심기원의 옥으로 인한 삭탈.
[2]
고려에서부터 계승되어 온 관청으로서 조정의 조회(朝會) 때 적용되는 모든 관례를 총괄했다.
[3]
정삼품에 해당된다.
[4]
송강 정철의 문하생이었는데 벼슬에 연연하지 않아 제술관(製述官)으로 지냈고, 한 선비와 두 여인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전기소설 <주생전(周生傳)>을 집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척인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류희분(柳希奮)의 악행을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짓는 바람에 결국 유배를 갔고 그 곳에서 숨을 거뒀다.
[5]
이 때 반정군이 횃불을 잘못 버려서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 건물이 타고 말았다.
[6]
의료에 종사하던 관료
[7]
흥안군은 이괄의 난 직전에도 대신들이 이괄과 내통했단 의혹을 이유로 가둬둘 것을 주청했으나 인조가 그 말을 듣질 않았을 정도로 아꼈던 인물이다. 흥안군이 인조와 함께 공주로 이동했다가 달아나 이괄의 진영으로 간 이후에야 분노했을 정도.
[8]
이괄의 난에 참여했던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韓潤)과 한윤의 사촌동생 한택(韓澤)이
후금으로 달려가 광해군이 폐위된 사실을 알렸다.
[9]
왕실의 연회
[10]
동아시아에서 정전은 왕이 머무르며 정사를 보는 정식 공간이기 때문에 궁궐의 중심건물이고, 따라서 공격세력이 제일 먼저 노린다.
[11]
강화도는 정묘호란 당시 인조와 대신들이 피난을 간 곳이다. 강화도에 설치된 유수부(留守府)는 해당 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통괄하는 행정기관인데, 그 책임자로 심기원을 임명했을 정도라면 이괄의 난 이후 잃었던 신임을 다시 회복한 모양이다.
[12]
오늘날의
황해도
사리원시의 정방산 부근이다.
[13]
사실 '적군이 보급을 확보할 주변지역을 장악하지 않고 수도로 바로 진격하면 어찌하느냐.'는 논의는 이미 광해군 시절에도 있었지만, 섬으로 피난을 하거나 산성에 의지해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 말고는 뾰족한 방법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광해군 시기는 명나라가 아직은 건재했고 일본에는
에도 막부가 들어섰으며 중립외교로 침공 위험도 적었기에 괜찮았다. 그러나 인조 즉위 이후로는 후금과 관계가 험악해졌기 때문에 이 문제에 반드시 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반정과 이괄의 난을 수습하느라 그러질 못했다.
[14]
인조가 정묘호란 직전에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수어청(守禦廳)의 장관직으로, 주로 군사적인 업무를 맡았고 종2품에 해당했다. 수어사의 행정직은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맡았으나 호란 전후로는 전란 때문인지 행정과 군사 모두를 담당할 정도로 권한이 강해졌다.
효종,
숙종 시기에는 수어사와 광주부윤을 하나로 통합하려 했지만 그로 인한 폐단이 발생하자 다시 분리했고
영조 시기에 다시 통합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15]
명나라나 청나라 황제 혹은 황후의 탄신일이 되면 정례적으로 보내는 사절이었다. 원단(元旦/설날 아침)에 보내는 원단사(元旦使),
동지에 보내는 동지사(冬至使)와 함께 삼절사(三節使)라고 불렸다.
[16]
성종의 차남인 계성군(桂城君) 이순(李恂)의 넷째 손자 정양군(正陽君) 이회(李誨)의 아들이며 병자호란 당시 세자를 따라 강화도로 피신했다가 종친의 노비 및 강화도 수비병 200명을 거느리고
강화도 방어전에서 강화성의 동문을 수비하기도 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인조 15년(1637), 18년(1640)에 사은부사(謝恩副使)의 직책을 받아
심양으로 이동해 종실 포로들의 본국 송환을 교섭하는 등 유능한 인물이었다. 회은군이 늦은 나이에 낳은 딸이 절색의 미모라 청 태종이 반해 데려가 6번째 황후(혹은 시녀)로 삼았다가 이후 공신인 피파이(皮牌)에게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야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