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7:47:34

성 정치학

도서명 Sexual Politics(英)
성 정치학(韓)
발행일 1970년(원서)
2009년(역서-1st)
2020년(역서-2nd)
저자 케이트 밀렛
(K.Millett)
김유경 역[1]
출판사 Doubleday & Co.(원서)
도서출판 이후(역서-1st)
(주)쌤앤파커스(역서-2nd)
ISBN 9788961570220
#Amazon

1. 소개 및 출간 배경2. 목차 및 주요 내용
2.1. 챕터별 내용 정리2.2. 가부장제: 모든 차별의 원흉의 원흉2.3. 성 혁명은 어떻게 나타나서 어떻게 실패했는가2.4. 페미니즘으로 문예비평하기
2.4.1. D. H. 로렌스: 파워 성애자 나르시스트2.4.2. 헨리 밀러: 허세 속의 대상화2.4.3. 노먼 메일러: 폭력 만세, 전쟁 만세2.4.4. 장 주네: 바텀이 바라본 남자들의 세계
3. 반응4. 의문점5. 둘러보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는) ...그 어떤 형태의 인종차별보다 강고하고, 그 어떤 형태의 계급 차별보다 완강하며, 더욱 획일적이고 분명 더 영속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지금 성 차별이 아무리 완화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성의 지배는 우리 문화에 가장 널리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이며, 가장 근본적인 권력 개념을 제공한다.

... 가부장제는 비길 데 없이 뛰어난 이데올로기다. 가부장제가 아닌 다른 어떤 체계도 그렇게 완벽하게 피지배자를 지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 본서, pp.74; 87

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현대 영미 소설들의 문예비평을 통해서 젠더 권력의 존재를 입증하고, 서구문화의 가부장제를 사회적 현상으로서 규정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한, 래디컬 페미니즘의 키 텍스트(key text)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Firestone)의 《 성의 변증법》, 저메인 그리어(G.Greer)의 《 여성, 거세당하다》 가 함께 출판되었는데, 이 세 도서를 함께 묶어서 래디컬 페미니즘 3대장 취급하기도 한다.[2] 한편 가부장제에 대한 본서의 문제의식은, 이후 1986년에 거다 러너(G.H.Lerner)가 고대 인류문화를 주제로 하여 《가부장제의 창조》 를 출판함으로써 이어졌다. 이 책은 본서의 '가부장제는 만들어진 것이다' 에서 더 나아가 '그렇다면 언제, 왜 만들어진 것인가' 에 응답하려 하였다.

본서의 기본 전제는, "성별(sex)에는 정치적 측면이 존재한다" 는 것이다. 이는 본서의 제목과도 관련이 있다. 즉 남성과 여성이 사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 가장 극적인 사례로 섹스 과정에서는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관계의 배치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저자 밀렛은 이 권력관계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정치학이라고 보았고, 이것에 대해서 가부장제라고 이름붙였다. 본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가부장제", 즉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가 결코 아니며, 인간의 문화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삶의 양식이라는 점이다.

본서의 목적은, 위와 같은 성 정치학에 대해 전반적인 서술을 최초로 시도하는 개척으로서 만족할 뿐이다. 특히 성과 같은 자연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문제삼음으로써 그것이 인위적인 것이며 따라서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본서에서도 더 구체적인 문제는 논의하는 것을 피하고 "가부장제는 인위적인 것이다" 를 강조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초점은 가부장제를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때 비로소 남성성과 여성성의 인식에서도 균열이 생기고, 마침내 남성이 여성을 지배함으로써 발생하는 세상의 모든 억압의 구조 역시 바뀌게 될 것이라고 저자가 믿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서는 한편으로, 최초의 페미니즘적 문예비평 작업이라는 학술사적인 의의를 갖기도 한다.[3] 본서의 서두에서 저자는 "이 책은 문학비평과 문예비평을 동시에 수행"하며(p.26) "문학이 구상되고 생산되는 더 큰 문화적 맥락을 비평이 고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p.27)고 판단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장 주네(J.Genet)의 작품을 해설하면서, "실제 남성성 혹은 환상화된 남성성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폐기되지 않는 한, 그리고 생득권으로서의 남성의 우월성에 집착하는 것이 마침내 사라지지 않는 한, 모든 억압 체제는 계속 기능할 것이다"(p.65)라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저자는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가부장제의 존재, 그리고 그 전복의 가능성을 살펴보려 하고 있다.

저자에 대해 소개하자면, 케이트 밀렛은 3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남아선호사상이 있고 저자에 대한 아동 학대가 심했던 아버지는 결국 이혼하고 가족을 떠났다. 대조적으로 어머니 헬렌 밀렛(H.Millett)은 대졸자이며,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운동가이기도 했다. 저자는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우등생으로 수료했지만, 박사논문을 제출하지 않은 채로 한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컬럼비아 대학교 비교문학 전공에서 본서 내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서의 출간 이후로 밀렛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인기인이 되었지만, 여성운동을 자신이 이끌고 지도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등의 지도자적 활동은 가부장제의 억압적 질서와 똑같다고 여겨서 페미니즘 진영의 '이너 서클' 이 되는 것을 고의적으로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로는 여성예술농장(Women's Art Colony Farm)을 설립하는 등 예술활동에만 전념했다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본서는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이면서 동시에 이를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초판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반짝 인기를 끌었지만, 이후 한동안 절판되어 저자를 좌절시켰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0년 일리노이 대학교 출판부에서 재판을 결정한 것. 저자가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 컬럼비아 대학교 인문대학에서 찰스 디킨스의 작품 평론으로 유명한 스티븐 마커스(S.Marcus)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원래 저자의 글쓰기 방식은 사회 운동가적인 '피를 끓게 하는' 수사법이 짙었는데, 그가 "수사는 논리에 굴복해야 한다"(p.28) 면서 저자에게 '증거, 더 많은 증거, 철저한 독서, 연구, 분석'(p.22) 을 요구하여, 비로소 본서가 학술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실제로 《 제2의 성》 이나 《 여성의 종속》 같은 몇몇 페미니즘 도서들은 임팩트 있는 명문장들이 유난히 많은데, 이런 특징들은 글쓰기 목적의 차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는 1976년에 '현대사상사' 에서 과거에 상/하권으로 나누어 번역했던 판본이 있으나 절판된 상태이다. 2009년에 도서출판 이후에서 새롭게 역서를 내놓았으나, 이 역시 절판되었다. 이후 2020년에 (주)쌤앤파커스에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국내 인터넷 상에 불법 스캔 이미지가 유통되고 있는데 이는 워마드 쪽에서 불법으로[4] 올린 것으로 확인된다.[5]

2. 목차 및 주요 내용


초판 서문에 따르면, 전체 내용은 ① 젠더 권력의 사례를 제시하고, 양성 간의 사회적 관계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며, (여기서 정치 제도로서의 가부장제를 지목함) ② 역사적으로 양성 간 관계가 크게 변화하게 된 시기와 이에 대해 반동하는 시기, ③ 그리고 각각의 작가들을 비평함으로써 문화를 설명하는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즉 가부장제가 모든 성차별과 여성억압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라는 점과 그것이 실상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인 것마냥 위장한다는 점을 먼저 살펴보고, 저자가 바라보는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성 혁명 제1기" 의 성패를 이야기하며, 마지막으로 본서에서 네 명의 작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문예비평의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4장에서 '반동기'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원서에 따르면 이는 counter-revolution이라는 단어이지 (혹은 형용사로는 reactionary) backlash는 아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역서에서 '반동' 이라고 불리는 표현들을 '반혁명' 으로 표기함으로써 backlash와 구분하도록 하겠다.

2.2. 가부장제: 모든 차별의 원흉의 원흉

본서의 2장에서 밀렛은 우선적으로, 인간의 성별이라는 것이 진공 속에서 나타나지 않으며, 그것이 처한 정치적 맥락을 반영한다고 전제한다. 즉, 본서를 읽는 독자들이 제일 먼저 던질 법한 질문은 "양성 간 관계를 ' 정치' 라고 볼 수 있는가?" 일 텐데, 이에 대해서 밀렛은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정치학(politics) 내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정의는, "일군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받는, 권력으로 구조화된 관계와 배치"(p.72)이다. 그리고 이러한 젠더 간의 권력은 서구 사회에서 몇 안 되게 순수하게 생득권만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결정되는 기준이라고 한다.

젠더 간에 나타나는 권력의 정치학이 사라지지 않고 영속화되는 원인은, 저자에 따르면,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연장자 남성이 연소자 남성을 지배하는 원칙에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원칙을 " 가부장제" 라고 부르면서, "신분이든 계급이든, 봉건제든 관료제든, 주요 종교들까지 포함한 모든 정치, 사회, 경제제도를 관통할 만큼 깊이 뿌리박고 있는 사회적 상수인 동시에, 역사와 장소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p.75)이라고 정리한다. 즉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가부장제는 우리 사회의 가장 심층부에서 가장 근본적인 작동 원리로서 존재하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되 그 드러나는 징후만이 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예시를 따를 경우, 중동의 가부장제와 북유럽의 가부장제는 서로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또한 개혁을 통하여 역사적으로도 가부장제는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가부장제는 전복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로 매우 긴 지면을 할애하여, 저자는 가부장제가 (즉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거대한 구조가) 우리 사회와 문화 속의 수많은 측면들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6]

저자가 강조하는 위의 "보편적" 이고 "만연한" 가부장제의 존재가 인류 모두에게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가부장제가 자기 자신을 자연의 섭리라고 광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비판이다. 즉, 남성들은 원래 여성들보다 더 우월하게 타고 태어난 존재이기에, 그런 우월함을 바탕으로 사회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메시지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런 우월한 존재들이 열등한 존재를 기사도적으로 챙겨줄 수도 있고, 때로는 열등한 존재들을 마구 짓밟을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역사 속 어떤 시점에서도 "남성이 여성보다 '정말로' 태생적으로 우월한 게 맞나?" 의 질문을 던졌던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2.3. 성 혁명은 어떻게 나타나서 어떻게 실패했는가

저자는 성 혁명(sexual revolution)에 대해서 가부장적 일부일처제에 관련된 전통적 성적 금기들을 종식시키는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동성애 금지, 혼외정사 및 출산 금지, 청소년 성관계 금지, 혼전 순결 옹호, 성매매 금지, 이혼 금지, 낙태 금지 등등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성적인 규범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저자가 생각하는 성 혁명이란 바로 이들 규범들을 없애는 것이다. 이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은 저자가 처음은 아니어서, 이미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1830년~1900년)에 그 논의가 시작되어, 이후로 1870년~1930년 사이에 크게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저자가 "반혁명기"[10]라고 이름붙인 시대 속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적 질서가 다시 견고해지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하여튼 저자는 이렇게 전후 시기구분을 시도함으로써, 오늘날 여성 참정권 운동( 서프러제트), 혹은 페미니즘의 제1물결이라고 불리는 흐름을 성 혁명의 제1기로 부르고 있다.

참정권 운동은, 저자에 따르면, 계몽주의가 제공했던 회의주의 합리주의, 프랑스 대혁명이 제공했던 '통치 받는 자들의 동의를 통한 정부' 와 '양도할 수 없는 인권' 개념으로부터 시작했다. 그 본격적 시초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Wollstonecraft)의 《여성의 권리 옹호》 로서, 이는 여성의 온전한 인간성을 인식하는 최초의 문헌이다. 이 시기 미국은 위선과 가식의 시대라고 오늘날 평가되곤 하는 빅토리아 시대였는데, 이 시기의 경향을 요약하자면 한편으로는 귀부인을 위한 기사도를 낭만적으로 노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혼전연애 때문에 집에서 내쫓긴 여성들이 강에 몸을 던지거나 매춘굴을 만들어 연명하는 기이한 금욕주의의 시대였다. 이때의 도덕관은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하고, 남성은 여성을 지켜주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으로,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을 위한 수동적 삶을 살아가야 했으며, 여성교육은 기초적인 인문학 지식과 예술적 소양만 허용되었다.[11]

이런 배경 속에서 여성들은 노예제 폐지에 공감하면서도 자신들의 참여를 가로막는 남성들로 인해, 처음으로 자신들이 직접 정치세력을 꾸리면서 조직화, 공공집회, 캠페이닝, 청원 등을 경험하게 되었다. 즉, 밀렛에 따르면, 성 혁명의 첫 불씨는 인종차별 문제의 맥락에서 시작되었다.[12] 루시 스톤(L.Stone), 엘리자베스 스탠튼(E.C.Stanton), 수전 앤서니(S.B.Anthony), 프레드릭 더글러스(F.Douglass), 헨리 블랙웰(H.Blackwell) 등이 대표적이었으며, 특히 이 중에서 더글러스와 블랙웰은 남성으로서 여권운동에 참여했다. 괄목할 만한 성과로는, 1848년 6월 19-20일에 있었던 세네카 폴스 집회에서 퀘이커 교도와 힘을 합친 여성운동은 〈여성의 소신 선언〉(Statement of Sentiments)을 발표했고, 존 스튜어트 밀(J.S.Mill)은 《 여성의 종속》 을 출간했으며, 수전 앤서니는 페미니즘을 국제 인권운동으로 발전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이들은 정치적 참여가 절실함을 깨닫고 참정권 운동에 주력했다. 서프러제트는 성과도 있었지만 70년 동안 성 혁명의 에너지를 비효과적으로 낭비해 버린 주범이기도 하다고 밀렛은 비판한다. 그 실제 중요성보다 지나치게 중요한 이슈가 되었으며, 참정권을 쟁취하자 페미니즘 운동은 극도의 피로에 지쳐 와해되었고, '다음 단계' 로 넘어가는 게 지나치게 오래 걸려서 운동 전체가 침몰한 것이라고.[13] 참정권자들이 대체로 부르주아 중산층 여성들이었다는 점, 결혼에 관련된 법적 권리는 얻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는 변화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서, 밀렛은 1기 성 혁명의 한계를 아쉬워한다. 하지만 밀렛의 논리에서 분명한 것은, 이때 가부장제는 역사상 처음으로 공격받는 경험을 했다는 점이다.

이때 특기할 만한 것이 《 여성의 종속》 의 저자인 존 스튜어트 밀과 《여왕의 화원》(Of Queen's Gardens)의 저자인 존 러스킨(J.Ruskin) 사이의 대립이다. 밀렛은 이것이 합리주의 진영 대 기사도 진영의 싸움이라고 정리한다. 양쪽 모두 양성의 이익과 사회의 공공선을 염려하는 입장이라고 자처하지만, 밀이 여성들의 실제 상황에 기초하여 논변을 전개한 반면에[14] 러스킨은 "정숙한 귀부인이라는 빅토리아적 낭만" 에 호소한다.[15] 러스킨과 밀의 대립을 밀렛이 정리한 세 가지 포인트에 맞게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바일 환경에서는 열람이 어려울 수 있다.)
주제 러스킨의 관점 밀의 관점
여성의 본성
  • 여성의 본성은 여왕과 같은 귀족적 우아함에 있음
  • 강인한 남성과 우아한 여성의 상호보완이 필요
  • 지배계급에게만 지배구조가 자연의 섭리일 뿐임
  • 우리가 본성이라고 믿었던 많은 것들이 규범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
여성의 교육
  • 여성의 본분은 남성에게 봉사할 의무를 지는 것으로, 여성이 이 본분을 다하는 데 충분한 수준이면 족함
  • 모든 영역에서 여성들을 전문적으로 교육시켜서 "세계인의 재능을 2배로" 만들어야 함
가정의 역할
  • 선량한 여성의 진정한 공간임
  • 남편으로부터 전폭적 헌신과 보호를 받는 신성하고 순결한 신전
  • 폭력적인 예속 시스템의 최후의 보루
  • 현실의 부부관계는 마치 노예제 내지는 군신관계를 연상케 할 정도임

그 외에도 밀렛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에서 최초로 가부장제를 사회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거론한다. 비록 그 자신은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해서 빅토리아적 정조의식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는 한편으로는 가부장제와 그것에 기초한 가족 체계라는 것이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고 혁파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의의가 있다는 것. 그 외에도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성 혁명에 호응하여, 《Jude the Obscure》 에서 결혼이 여성의 삶의 행복이 아니라는 점을 허무주의적인 시선으로 잘 짚어낸 토머스 하디(T.Hardy), 《The Egoist》 에서 기사도란 결국 남성들만의 이기적인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음을 통찰하여 희극적으로 풍자해 낸 조지 메레디스(G.Meredith), 《Villette》 에서 가부장제가 여성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여성 작가가 여성적 감수성으로 드러낸 바 있는 샬롯 브론테(C.Bronte), 《Salome》 에서 모호한 탐미주의적 분위기 속에서도 여성의 관능성과 섹슈얼리티를 옹호한 오스카 와일드(O.Wilde)가 거론된다. 이들은 저마다 가부장제에 의문을 품었지만, 한편으로는 제각기 그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성 혁명은 1930년대 이후로 어떻게 가라앉아 버린 것일까? 저자는 먼저 정책적인 실패를 들고 있다. 한편에서는 나치 독일이 전면적으로 안티페미니즘적인 노선과 유화 노선을 병행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소련이 엥겔스의 뜻을 따라서 가부장제 철폐를 위해 애썼지만, 결과적으로 1940년대 이후로는 그들도 서구권의 가부장제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 특히 소련의 실패에 대해, 밀렛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서 설명을 시도한다. 1) 모두가 입으로는 가족제도의 철폐를 부르짖었지만, 이를 실천하여 섹슈얼리티의 자유를 얻을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다. 2) 소련 여성들의 대다수는 문맹이었으며, 가족제도의 철폐라는 명분 속에서 자신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남성들에게 순종했다. 3) 서구와의 경쟁 속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산업발달, 군비증강 등의 국가주의적인 의제를 강조했고,[16] 그 결과 다시금 '국가를 대신하는 아버지' 의 권위와 여성의 임신 및 출산의 역할이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줄여 말하면, 가부장제와 그 가족구조는 " 두려운 " 과 맞서 싸우려는 과정에서 다시금 그 힘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정책적이고 국제적인 문제 다음으로, 저자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사상적인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안티페미니즘적인 사상 첫째는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다. 저자는 반혁명기에 가부장제에 설득력을 부여했던 가장 큰 학술적 동력이 바로 정신분석학이라고 지적하면서, 마침내 통속적 수준에서는 거대한 반혁명적 조류가 초래되었다고 비판한다. 그 중에서도 프로이트가 저지른 잘못이 있다면, 논리적으로 여성을 부정적으로 정의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남근 선망(penis envy)의 이론체계, 여성이 처한 조건을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호도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 여성들이 수동적이고 피학적이며 자기애적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성에 대한 설명이라고 한다. 특히 마리 보나파르트(M.Bonaparte)와 헬렌 도이치(H.Deutsch) 같은 후학들은 "남성이 여성을 가학적으로 대하는 것, 여성이 남성에게 학대받는 것은 심리성적으로 건강한 것" 이라는 기괴한 주장을 내놓기도 했으며(…),[17] 1947년에 출판된 《Modern Women, Lost Sex》 라는 정신분석학적인 자기개발서는 아예 대놓고 "페미니즘은 질병, 콤플렉스, 대중 선동물, 가정파괴자" 라며 악평을 내리면서 여성들에게 "발기된 페니스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종속되어야 한다" 고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고.

저자가 지적하는 둘째 사상적 이유는 바로 기능주의(functionalism)이다. 실제로 이는 50~60년대 사회과학 영역들을 휩쓸었던 사상적 흐름으로, 특히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라는 점을 많이 어필했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들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밀렛은 그것이 가부장제와 같은 사회적 현상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에만 관심을 가질 뿐, "언제부터, 어째서 작동하기 시작했는가" 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게다가 무엇이 "기능적이다" 라는 진술은, 기능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결국 그 자체로 불가피하게 가치개입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도 비판한다.[18] 더불어, 기능주의는 결국 현존하는 체계의 안정을 추구하며, "잘 기능하고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이고, 따라서 자연스럽다" 는 논리로 현재 상태(status quo)를 옹호한다는 문제도 있다. 이래서야, 기존에 확립된 체계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 적응 못 한 개인이 문제라는 결론이 얻어진다는 것.

두 사상적 비판 모두 여성운동의 역사에서는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시몬 드 보부아르 역시 이미 정신분석학으로는 "만들어지는 여성", 즉 여성성(femininity)을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한 적이 있고, 베티 프리댄(B.Friedan) 역시 《 여성의 신비》 에서 마거릿 미드(M.Mead)와 같은 성공한 여성 사회과학자들이 자꾸 "여성들이 제 '기능' 을 다할 수 있는 곳은 부엌입니다" 라고 떠들어대는 통에 성 역할이 강화되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계가 실제로 두 사상적 조류에 큰 빚을 지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까지 사회과학자들이 전부 손가락만 빨고 있던 것은 아닌지라(…) 정신분석학을 이리저리 뜯어고친다거나 기능주의의 지향점만을 받아들이고 사회적 변화(social change)를 촉진할 수 있는 연구를 추구하는 등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두 사상들은 여성 운동에 대해 직접적으로 거부하거나 대외적으로 중립을 표방하는 것처럼 굉장히 잘 대조되는 입장을 취했으므로, 이들이 시대가 변하면서 제각기 어떻게 비판받으며 변화되어 왔는지를 따로 검토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2.4. 페미니즘으로 문예비평하기

저자는 본서에서 네 명의 작가들을 대상으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비평을 시도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앞의 세 사람, 즉 D. H. 로렌스 헨리 밀러, 그리고 노먼 메일러는 비판적이고, 마지막 장 주네는 굉장히 호평하고 있는 입장이다. 문제는 저자의 타깃이 된 인물들 중에서 특히 로렌스나 메일러 같은 사람들은 영미권 문단에서도 엄청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로렌스의 경우 《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은 국내에서도 해외명작으로 분류되곤 하는 작품이다. 이런 엄청난 인물들에 대해서 거침없이 남성우월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라고 비판하는 저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인물들이 어떤 양상으로 남성우월주의를 보여주는지는 또 제각기 다르다. 이를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영문학 전공자라면 애초에 본서 자체가 낯설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하단의 서술을 보면서 문단의 거장들을 모욕했다며 분개하거나 (혹은 정반대로) 열광적으로 손뼉을 치며 통쾌해할지도 모르겠다. 특히 로렌스와 메일러는 20세기 초중엽에 "그간 금기시되어 왔던 섹슈얼리티를 솔직하게 드러냈다"[19]면서 평단의 혁명적이라는 찬사와 점잖지 못하다는 세간의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유명한 인물들이라고 하며, 다들 현대 영미문학에 있어서도 가볍게 넘기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프랑스에서 주네의 위상 역시 확고해 보인다.) 그래도 다들 꼴마초스러움이 비범하다 보니[20] 본서로부터 악평을 피하지 못했다.

본서에서 비평 대상으로 적극 동원한 작품들은 각각 다음과 같다.

2.4.1. D. H. 로렌스: 파워 성애자 나르시스트

"이 작품들은 많은 이유에서 몹시 불쾌하고도 혐오스럽다. 특히 귀에 거슬리는 파시즘적 어조나, 점차 폭력을 선호하는 경향이나, 개인적 오만함, 그리고 셀 수 없이 등장하는 인종차별적이고 계급적이며 종교적인 편협성 때문이다. 이 소설들에서 우리는 로렌스가 공식 정치학과 전쟁, 성직계와 예술계, 재계 등 '남자의 세계' 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얼마나 끔찍하게 애썼는지 알 수 있다."
- p.543

로렌스가 오늘날 얻고 있는 유명세와는 무관하게, 저자는 5장에서 로렌스의 주연 캐릭터 설명이나 성애 장면 연출 등에 대해서 혹독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우선 자신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주인공 설정부터 보도록 하자. 한 마디로 말하자면 로렌스 작품들 속의 주인공은 오늘날 창작 활동에서 절대 따라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주인공은 언제나 영웅적으로 묘사되며, 수많은 여성들이 그를 둘러싼 채 그를 위해 봉사할 준비가 완료되어 있고, 어딜 가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그의 성공을 위해 남들이 앞서서 길을 열어주며 대신 희생해 주고, 수많은 '소녀들' 이 끊임없이 선물을 건네주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기쁘게 모여드는 페로몬을 지녔다는 것이다. 설령 주인공이 여성에게 함부로 대하더라도 그 여성은 늘 주인공을 신사 대접하며 전혀 미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Sons and Lovers》 는 로렌스가 자기 자신을 주인공에게 투영한 작품으로, 이와 같은 '터질 듯한 근자감' 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의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 홀로 완전한 존재", "살아 있는 케찰코아틀", " 예수의 형제이자 후계자" 라며 훌륭한 자칭 신 드립을 치는 장면도 나온다고 한다(…). 작품들 내에서 주인공이 무조건적으로 미화되는 양상은, 현대 서브컬처에 비유하자면 가히 시바 타츠야 저리가라 할 정도.

그의 작품들에서 여성 주연이 묘사되는 방식은 실로 대조적이다. 밀렛은 로렌스의 작품들이 시간에 따라서 여성관이 조금씩 변화해 간다고 지적한다. 최초에 그는 어머니를 묘사할 때 그야말로 헬리콥터 부모처럼 묘사해 놓았다. 이 인물은 아들과 이성교제를 하는 사이인데, 그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이라 믿고, 아들의 이기주의를 더욱 부추기고 우상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후 로렌스가 시선을 여성들에게 돌렸을 때, 《The Rainbow》 에서 그는 "여성적 신비, 영원한 여성성, 어머니 대지, 달, 마력, 생명" 과 같은 심상들에 대해 완전히 공포에 압도당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후 《Women in Love》 에서는 지식인 여성을 등장시키며 히스테리적인 증오심을 드러냈다.[22] 하지만 그의 증오는 오래 가지 않았다. 얼마 못 가서 이 여성은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 이후 로렌스가 간절히 원하는 여성상인 칠푼이(…)가 다 되었기 때문이다.[23] 다른 작품에서도 로렌스는 직장에서의 유능한 여성들을 일부러 이용하고 성적으로 착취하다가, 의도적으로 매몰차게 차 버리면서 그녀를 "바다 거품만도 못한 미물" 이라며 조롱한다.[24] 이런 방식으로 로렌스는 여성의 열등함을 단언한다. 그리고 자신이 열등한 줄 모르는 여성들에게는, 적절한 "교육" 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위치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그 이후 《 Lady Chatterley's Lover》 에서의 저 유명한 섹스 장면들에 명확하게 투영되는데, 심지어 여기서 로렌스는 (밀렛이 "독실한 작품" 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우월한 남성 앞에 열등한 여성이 지배받는 장면을 마치 종교적 숭배 의례처럼 그려내는 나르시시즘을 보여주었다. 자신과 독자들이 이입할 남성 주인공은 사실상 신격화하고, 섹스 상대방 여성은 경건한 신도의 황홀한 접신(接神)인 마냥 그려내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남성 주인공은 " 나님이 우월한 걸 인정해라!" 를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이 단지 "당신에게 지배받을 수 있다니, 아아 행복해요!" 의 한없이 다정하고도 굴종적인 대사를 읊을 뿐이다(…). 남성의 잔뜩 발기된 페니스 또한, 여성은 그것을 경외감과 흥분감으로 영접(?)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클리셰적으로 남성의 고압적인 언사와 여성의 '기이한 순종', '묘한 순응', '본능적인 굴복' 이 교차한다.[25] 많은 비평가들은 이 작품에서, 로렌스가 하층계급 남성과 상층계급 여성의 섹스를 묘사함으로써 기존의 계급체계를 전복시켰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밀렛의 관점에서, 실상 그는 계급체계를 전복시킨 게 아니라 단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성의 억압체계로 넘어갔을 뿐이다.

로렌스는 물론 다른 작품들에서 여성의 열등함과 남성의 우월함을 직설적으로 자주 강조했다. 그는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설파할 때마다 매우 자주, 그 특유의 "깊이, 깊이, 충분히 깊이..." 라는 표현을 덧붙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그의 경향은 로렌스가 현실에서 자주 부부싸움을 했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밀렛은 추정한다. 예컨대, 로렌스 사후 몇 해가 지나서 그의 아내 프리다가 회고하길, 한번은 부부싸움 도중에 갑자기 로렌스가 아내를 벽에 몰아붙이고 목을 조르면서 "내가 주인이야, 내가 주인이라고!" 라며 윽박질렀다고 한다. 프리다는 재빨리 "원한다면 그렇게 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라고 대답했고, 로렌스는 제풀에 놀라서 얼른 손을 뗐다. 프리다는 다시금 "그게 다야? 당신은 원하는 대로 주인이 될 수 있어. 난 아무 상관없어."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여성의 복종을 그가 그렇게나 강조하는 것도 어쩌면 현실의 자기 아내가 쉽게 복종하지 않는 불만을 다른 방향으로 표출한 것일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복종하지 않는 신성모독(…)을 저지른 여성에 대해서 로렌스는 자신의 작품세계 속에서 어떻게 보복했을까? 밀렛은 《The Plummed Serpent》 작품을 들어서, 로렌스가 끔찍하기 짝이 없는 방향으로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종교의례" 를 벌였다고 평한다. 짧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남성우월주의자들을 위한 종교 경전이자, 이에 저항하는 여성을 육변기로 차근차근 만들어 가는 조교의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26] 심지어 그 과정에서 무너져 가는 여성의 정신적 상태까지 그 특유의 고급스런 필체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여성의 인격이 파괴되는 장면을 보노라면 문학적으로만 그럴싸한 도전만화코너 아동 강간장면 게시 사건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 밀렛이 이 작품을 괜히 "성적 카니발리즘"(p.565)이라고 정리한 게 아니다. 특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윤간은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치러지는데, 여성의 "섹시함" 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고, 윤간의 목적은 남성들의 쾌락이 아닌 피해자 여성의 인격 파괴에 있다.[27] 한 마디로,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숭배하면 마법과고교의 열등생 테크를 타고, 남주인공에게 저항하면 육노예 조교물 테크를 탄다는 것. 영문학자들 중의 페미니스트의 절반쯤은 이 사람이 만든 게 아닐까?

여성에 대한 관점이 이러하다면, 로렌스의 동료 남성에 대한 관점은 어떨까? 밀렛은 남성에 대한 로렌스의 태도가 형제애(brotherhood)에 입각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로렌스는 거의 동성애에 가까운 묘사를 보여준다. 그의 철학은, 밀렛이 요약한 바에 따르면, 모든 비천한 여성들이 모든 우월한 남성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도리이듯이, 모든 열등한 남성들도 모든 우월한 남성들에게 복종하는 게 옳다는 것이다. 따라서 로렌스는 자신보다 우월한 남성에게 기꺼이 굴복하는 수단으로서 동성애 코드를 채택한다.[28] 그 연출 역시 보통이 아니라서, 《Women in Love》 에서는 한 챕터 내내 근육질의 두 남성이 벌거벗은 채 격투를 벌이는 장면을 포함시켰으며(…), 《Aaron's Rod》 에서는 두 남성이 동거하면서 병간호를 하는 장면, 심지어는 오일 전신마사지(…)를 해 주는 장면까지 꼼꼼하게 묘사해 놓았다. 두 남성을 한데 묶는 것은 물론 남성우월주의다. 이들은 양쪽 모두 "남성들이 힘을 합쳐서 여자들을 전부 끌어내리고 정복하자" 는 선동을 주고받고, 성 혁명의 신여성들에게 동조하는 남성들에게는 "기저귀와 속치마 앞에서 설설 긴다" 면서 욕설을 퍼부으며 공감대를 확인한다.

밀렛은 로렌스의 작품세계에서 특이한 형태의 삼각관계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일반적인 삼각관계와는 달리, 로렌스의 삼각관계는 주인공 남성 - 애정하는 여성 - 애정하는 남성의 삼각관계가 형성되고, 늘 주인공 남성은 애정하던 여성을 걷어차 버리고 애정하는 남성에게 자기 자신을 허락하며 게이 라이프를 즐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애정의 대상이 되는 남성의 캐릭터성이다. 이들은 대체로 ' 백인+ 자본가+ 부유층+지배자+성착취자' 인물형이며, 로렌스가 동경해 마지않으며 본받고 싶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다. 로렌스는 이런 남성의 '정수' 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 우월함을 나누어 받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엉덩이를 내밀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그는 이런 영웅적인 남성을 묘사할 때면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사랑과 애정으로 달아오른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그 남성이 사랑을 받을 만큼 우월하고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간략히 말하면 로렌스는 단순히 여성혐오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파워성애자(…)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앞의 인용구에서도 확인되고 행간에서 조금 암시했지만, 주인공 남성과 동성애적인 상대방 남성을 한데 엮어주는 남성우월주의 혐오발언들은 비단 남녀간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으며, 더 심각한 수준으로까지 나아간다. 로렌스가 '상대방 남성' 의 입을 빌어서 설파하는 "우월한 자가 그만큼의 권력을 갖는 것이 정당하다" 등의 이상한 설교는, 다시금 비유하자면 시바 타츠야 같은 캐릭터는 싸대기를 한 서너번 후려갈길 만큼 극단적인 것들이다. 이 정성스런 장면들에서 독재 옹호, 파시즘 옹호, 노예제 옹호, 인종차별[29] 반유대주의, 반기독교, 반 평등주의, 반 인본주의 등의 개똥철학이 자못 장엄한 분위기(…)로 설교되며, 주인공은 자신의 연인의 설교를 경청하고 나서 그를 '현자' 라고 여기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누군가에게 굴복해야만 한다면 바로 그에게 굴복하겠다고 선언한다. 또한 《Kangaroo》 같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파시스트 남성들이 쿠데타를 꾸민다거나 하는 식의 배경들이 즐겨 쓰이기도 한다. 1920년대에 쓰인 작품들이니만큼 시대적인 분위기에도 분명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래도 역시나 현대의 관점에서는 이뭐병...

2.4.2. 헨리 밀러: 허세 속의 대상화

"밀러의 성적 유머는 남성 공동체의 유머이자, 더욱 정확하게는 남자 공중변소의 유머이다. '내집단'(ingroup)의 유머가 그러하듯, 밀러의 유머는 자신들을 결속하게 해 주는 공유된 전제와 태도, 반응에 근거하고 있다."
- p.590

헨리 밀러는 밀렛에 따르면 당대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던 인물이었으며, 본서에서도 그리 긴 분량을 할애하여 비평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공공연히 로렌스의 '제자' 를 자처했을 만큼 똑같은 남성우월주의자였다. 그의 소설에서도 똑같이 훌륭한 자칭 신의 컨셉이 드러나는데, 예컨대 《Black Spring》 에서 그는 "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넘어서는 존재, 즉 남자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밀렛은 그가 로렌스와는 사뭇 다른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고 본다. 로렌스는 섹스 장면을 거의 종교적 의식에 가깝게 엄숙한 분위기로 그려냄으로써 위대한 남성성을 찬미했다면, 밀러의 섹스 장면은 로렌스의 눈에는 오히려 신성모독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우선 밀러가 묘사하는 남성과 여성을 살펴보자. 밀러는 섹슈얼리티를 인격과 분리시켜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은 그저 '페니스와 궁둥이' 로만 치환된다. 이와 같은 비인격성은 아무 맥락 없는 비개인적인 관계에서[30] 재빠르게 처리하는 섹스에 환상을 부여한다. 결국, 그에게 섹스"잠깐 한 판 하고 버리는 것" 이고, 마치 휴지를 쓰고 버리듯이 여성을 버린다. 대화 한 마디 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전희 후희 같은 것도 있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그는 '인간' 과 함께 '인간다운' 유대감을 나눌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섹스는 마치 "발사 후 망각"(fire and forget)이라는 군사 용어를 떠오르게 할 정도. 그래서인지 그는 로렌스와는 달리 성매매에도 적극 찬동했다고 한다. 여성의 의미를 보지(cunt)로 제한시키고, 아무런 뒷감정 없이 깔끔하게 털고 나오기에는 성매매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밀러의 섹스는 그야말로 대상화된 여성, 날것 그대로 말하자면 " 정액받이 도구" 로서의 여성을 취급하는 방식 그 자체다.

많은 비평가들처럼, 밀렛 역시 밀러의 성 관념을 이해하려면 당대의 청교도 금욕주의와 견주어 보아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다른 비평가들이 "밀러는 청교도적 금욕주의에서 일탈하여 자유롭고 행복한 성생활을 묘사했다" 며 찬사를 보내는 반면, 밀렛은 "청교도적 도덕이 음란을 금지하는 만큼, 밀러는 그것을 달콤하게 생각한다" 고 평가한다. 게다가, 밀러 역시 "성이라는 것은 두렵고 더럽고 역겨운 것" 이라는 청교도적 도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의 많은 작품들에서는 섹스와 배설 행위가 동일하게 더러운 것으로서 결합되어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더러운 행동을 통해서 더럽혀지는 것은 결국 여성일 뿐이다. 주인공이 느끼는 도덕적 죄책감들은 "뻔뻔스러운 여자" 라거나 "만족할 줄 모르는 병적인 색정증 환자"(p.41)라는 식의 비난을 여성에게 퍼부음으로써 해결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밀러의 사고방식 역시 당대의 다른 청교도적인 대중의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밀렛은 이 점에서, 밀러의 작품세계가 "섹슈얼리티와 여성에 대한 비공식적인 남성 판본"(p.576)이라고 정리한다. 밀러는 일탈이 아니라 가장 전형적인 표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밀러가 바라보는 동료 남성들에 대한 시각을 살펴보자. 앞서 로렌스가 우월한 남성성에 대한 동일시를 위해 동성애까지도 불사했다면, 이번의 밀러는 상당히 교과서적인 동성사회성을 드러내고 있다. 밀러의 강박적인 음담패설은 가히 동성의 남성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한 소년들의 무용담에 가까우며, 자신의 활약(?)을 지켜보고 추앙해 줄 가상의 또래 청중들을 상정하고 있다. 밀렛은 "밀러의 산문은 늘 또래 소년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말투와 억양을 가지고 있다"(p.589)고 말한다. 밀러는 또래 '소년' 들에게 여자들이란 모두 남자가 범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당장 덮치는 것도 식은 죽 먹기라고 자랑하며, 일단 덮치고 나면 아무리 새침하게 점잔 빼는 상대방일지라도 꼭두각시처럼 부릴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밀러가 묘사하는 섹스도 결국 "같이 자 봤다, 박아 봤다, 싸 봤다" 정도의 묘사만으로 충분할 뿐이지, 그 이상으로 그녀가 얼마나 열등한 사람이고 자신이 얼마나 우월감을 만끽했는지 같은 로렌스적(?)인 관심사는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밀렛은 이처럼 밀러를 유치한 청소년 같은 허세와 비열함이 가득하다고 정리한다.[31] 즉 결론적으로 밀러는 욕구불만이 가득한 중2병 남자애가 친구들에게 과시적으로 섹스 무용담을 늘어놓는 수준이라는 것이 밀렛의 판단이다.

2.4.3. 노먼 메일러: 폭력 만세, 전쟁 만세

"섹스는 전쟁이므로, 전쟁은 성적인 것이다. '삶의 육체적 핵심' 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섹스와 폭력의 연결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두 현상의 본질에 대한 메일러의 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p.617

밀렛은 메일러가 겉으로는 평화주의자에 반전주의자로 이름나 있지만, 실상은 가장 심하게 성적 폭력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이중적인 작가라고 비판한다. 그는 젠더 억압을 실제 전쟁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에게 폭력성은 남성의 본성이며, 남성들이 주체하지 못하는 창조성의 근원이자 그들이 자기 자신을 증명해 보이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즉, 여성은 남성의 적이고, 침대는 전쟁터다. 밀렛이 인용한 바를 정리하면(p.621) 이혼은 후퇴이며, 별거는 냉전이고, 섹스 행위는 오가는 총성과 폭격의 폭발음이다. 동료 남성들은 전우들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폭력의 희생자는 늘 여성들, 흑인들, 동양인들로, 이들 앞에서 발기된 페니스는 자주 '상대방을 겨눈 권총' 으로 비유된다. 한 예로 《The Naked and the Dead》 라는 소설에서는 2차대전 당시의 태평양 전쟁 중의 미군 부대가 '일본군 사냥' 을 벌이는 전투장면이 나오는데, 여기 등장하는 크로프트 중사는 나약한 부하들에게 '지옥에 떨어질 년' 이라고 윽박지르고, 적을 뒤쫓는 것 역시 '여자 먹잇감을 쫓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순서대로, 메일러가 주인공 남성을 묘사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그가 묘사하는 주인공 남성 역시 악역보다 문제가 더 많은 주인공에 속한다. 하지만 로렌스가 극단적인 페로몬계 메리 수 유형의 징후를 보였다면, 메일러가 내세우는 주인공은 악당 이상으로 악당스러운데다 심지어 승승장구하는 악인으로 묘사된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에서 주인공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폭력을 불사하지만, 극강의 주인공 보정 덕택에 그는 절대로 자신의 업보에 대해서 그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물론 1장에서 밀렛이 언급한 도스토예프스키, 시어도어 드라이저(T.Dreiser), 리처드 라이트(R.Wright)의 귀감이 되는 소설들이나, 피카레스크라고 불리는 장르에서도 주인공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이 나오지만, 결국 이들은 그 죗값을 치르게 되며, 그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최악의 상황을 경고한다. 하지만 메일러의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주인공은 범죄를 저지르며 쾌감을 느끼는 유형이고, 살인을 하고도 처벌받지 않고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법을 보여주며,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창조자(작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만사형통한다. 개념 있는 작가라면 최소한 중립적으로라도 묘사하겠지만, 메일러는 주인공에 대해 "톰 소여와 홀든 콜필드를 유쾌하게 합쳐 놓은 듯"(p.627)한 친근한 분위기를 내비치고 있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An American Dream》 의 스토리가 1장에서 대략적으로 묘사되는데, 이를 정리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은 항문성교 테크닉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기혼 남성이다. 그러나 어느 날, 아내가 다른 남성들과 항문성교를 하며 외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성적인 자부심과 허영심에 타격을 입은 주인공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내를 목 졸라 죽인다. 저항적이고 억센 성격의 아내를 죽이는 것이 매우 힘들었지만, 주인공은 살인 후 시신 앞에서 기진맥진해진 자신에 대해 '명예로운 피로' 라고 생각한다. 그 후,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때마침 자위행위를 하고 있다가 발각된 하녀를 강제로 범하면서 기분전환을 한다. 주인공은 '악마의 속삭임' 을 느끼고, 하녀에게 강제로 항문성교를 하려 한다. 하녀가 거부하지만, 주인공은 하녀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잡아뜯으면서 끝내 항문성교를 관철시킨다. 그러면서도 하녀를 ' 나치' 라고 상상하면서, 자기 자신이 아주 애국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는 뿌듯한 기쁨에 젖어서 자화자찬한다. 주인공은 '고귀한 권력자' 인 자신의 아이를 임신할 영광스러운 기회를 얻지 못한 하녀를 동정하며, 하녀는 주인공의 테크닉에 어느새 온갖 칭송을 늘어놓으며 감격한다. 관계가 끝난 후, 주인공은 아내의 시신을 창 밖으로 던져서 사고사로 위장한다. 이 일 이후 주인공은 하는 일마다 만사형통했으며, 하녀가 그랬듯이 세상 역시 그의 의지에 전적으로 고분고분해져서, 심지어 경찰까지도 그의 남자다움을 동경하게 되어, 아무 문제 없이 손쉽게 멕시코로 도주하여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더라.

이제 이번에는 메일러가 바라보는 여성의 모습을 살펴보자. 1960년대에 메일러의 관점은 프리 섹스를 지지하기는 했으나, 실상 섹슈얼리티에 대한 그의 관점은 근본주의 개신교를 방불케 할 정도로 극단적인 보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여성의 순결을 결사적으로 옹호했고, 남성의 자위행위에 반대했으며[32] 또한 낙태 피임 역시 반대했다. 심지어 그는 여성의 가장 큰 책임이 " 애를 낳고 기를 수 있는 동안만 지상에 살아있는 것" 이라고 여겼다. 이런 여성들과 나누는 섹스는 역시나 폭력성의 연장선에서 이해되는데, 그는 섹스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피해자를 만드는 것으로, 폭력성은 섹스의 본질 중 일부라고 보았다.[33] 그는 폭력성을 참는 것이 남성들에게 유해하다고 주장하며, 〈Deaths for the Ladies〉 라는 제목부터 이미 비범한 자신의 시에서는 " 36시간 동안 모친을 구타하는 걸 있는 힘껏 참고 있었더니 암이 생겼다" 고 노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독 메일러는 여성에 대해 마냥 "약한 사람", "멍청한 사람", "열등한 사람" 으로 묘사하지는 않으며, 도리어 때로는 총명하고 지적인 인물이나 억세고 저항적인 인물을 설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The Time of Her Time》에서는 여성이 T.S.엘리엇을 감히(?) 입에 담았다는 것에 격분한 남성 주인공이 '보복' 이라며 강간을 벌이며, 그 여성에게 가능한 한 모욕을 주고 굴욕감을 느끼게 하려 노력하지만, 여기서는 마지막까지 여성이 무너지지 않으며, 주인공 남성을 동성애자라고 비난하고, 예상치 못하게 사정시키기까지 한다. 이는 메일러가 섹스를 전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는 때때로 "훌륭한 상대이자 뛰어난 계집"(p.634)과 같은 호적수를 배치하기도 하고, 무기력하지 않게 맞서 싸우는 여성에 대해서 칭찬하기도 한다.[34] 강한 적수일수록 더더욱 호승심이 불타오르는 법이고, 억센 사냥감일수록 더더욱 사냥꾼을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전쟁은 승리자가 패배자의 몸, 정기, 영혼, 정력 등을 섭취하는 원시적 상징으로 나타난다. 즉 지적인 여성과의 성교는 그녀의 지성을 자신이 흡수하는 것을 의미하고, 억센 아내를 살해한 후에는 자신이 그녀의 힘까지 전부 흡수했음을 느꼈다고 묘사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메일러가 바라보는 동성의 남성들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자. 요약하여 말하자면 메일러는 현대의 호모포비아적인 두려움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동성애가 남성이 드러내는 여성적 열등함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호모" 라고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한다. 실제로 그의 소설들에서는 한 남성이 상대방 남성을 모욕하기 위해 동성섹스를 하거나 호모라고 비난하는 장면들이 매우 많아서, 예컨대 《The Naked and the Dead》 에서는 "담배꽁초 줍는 장면" 이 등장하며, 《The Presidential Papers》 에서는 권투 경기 중에 상대방을 호모라고 도발한 선수가 링 위에서 그 선수에게 맞아죽는 사건이 묘사되기도 했다. 《Advertisements for Myself》 에서는 미식축구 자세가 고전적인 남색의 자세와 유사하다고 말하면서, 남성들이 서로를 소란스럽게 찌르고 치면서 마음껏 모욕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즉 앞서의 로렌스는 우월한 남성에게 자신을 허락함으로써 자신 역시 우월해진다고 보아 동성애적인 코드를 마음껏 활용했지만, 메일러는 다른 남성에게 자신을 허락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여 극혐하는 차이를 보인다.

실제로 메일러의 메시지는 현대 미국의 뉴라이트를 비롯한 반동성애 진영의 논리와 사실상 동일하다. 그는 미국의 남성들이 지나치게 여성화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남성성을 남성의 타고난 본성이자 미덕으로 규정하고, 이것이 소멸되면 동성애와 중성화가 범람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이 대관절 어째서 소멸 위기에 놓여 있다는 건지는 굳이 메일러에게 물어보지 말자. 따라서 메일러에 따르면, 남성은 남자답기 위해서 (즉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상징적인 전쟁을 해야 하고 희생자들을 만들어야 하며 그들로 자양분을 섭취해야 한다. 남성성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서서히 얻어지는 것이며, 단 한 순간만이라도 지체한다면 그 사람은 남성이 되기에 실패하는 것이다. 본서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메일러는 "남성 커플이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해칠 수 있다고 두려워" 했으며, "섹스라는 전쟁에서 호모는 탈영병"(p.650)이고, 동성애나 여성적인 성격은 남성의 생산력과 번식력의 창조성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는 〈The Homosexual Villain〉 에서 동성애자도 사람이라며 사과하긴 했으나, 밀렛이 보기엔 불충분했다고.

2.4.4. 장 주네: 바텀이 바라본 남자들의 세계

"살아 있는 남성 작가 가운데 주네는 최고의 문학적 재능으로 우리 시대의 성 신화를 초월한 유일한 사람으로 보인다."

"현대 작가 중에 유일하게 주네만이 여성을 억압당하는 집단이자 혁명적 힘으로 간주했고, 스스로를 여성과 동일시하기를 선택했다. 그 자신의 특이한 내력과, 빼앗긴 자들에 대한 그의 분석은 그를 불가피하게 경멸당하고 예속되는 상대적인 존재들에게 감정이입하게 이끌었다."
- p.66; 693

위의 세 사람들을 보노라면 똑같은 남성우월주의자이자 극렬 여성혐오자들인데도 서로가 전부 깨알같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여성을 자신의 숭배자 취급한 로렌스, 여성을 자신의 더치 와이프 취급한 밀러, 여성을 말살해야 할 대상처럼 여긴 메일러라고 나눌 수 있겠다. 심지어 이들은 남성에 대해서도 관점이 다 다르다. 자신보다 우월한 남성에게 기꺼이 엉덩이를 내밀 준비가 된 로렌스, 자신의 섹스 무용담을 들어 줄 청중을 원했던 밀러, 진정 남자다운 남자들과 함께 여성성을 박멸하고 싶어했던 메일러로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밀렛의 관점에서, 위의 세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공유하는데, 모두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에 공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성향과 대조하기 위해, 밀렛은 프랑스에서 작가 한 사람을 데려온다. 그리고 밀렛은 장 주네의 문학세계를 통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어떻게 전복시킬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번에도 앞에서처럼, 먼저 주네가 주인공을 묘사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주네의 작품들 속 주인공은 앞의 세 사람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메일러가 그렇게나 극혐하는 동성애자, 심지어는 그것도 (오늘날 퀴어 진영에서 통용되는 그런 의미의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성애자들이 동성 간 항문성교를 위해 필요로 하는 소위 " 바텀 알바" 인 것이다. 주인공은 그렇게 늘 잔혹한 포주와 손님들에게 등짝을 보이는 삶을 살아가고, 언제나 그들에게 "이 더러운 남창 놈!" 같은 모욕을 듣는다. 따라서 주네의 주인공에게 남성들이란 "동료 남성들" 이 아니라 "그들 남성들" 이 된다. 게다가 주인공은 사회적으로도 보잘것없다. 주인공은 거지에다 노숙자이고, 변변히 내세울 것이라고는 그야말로 괄약근밖에는 없는, 사회의 밑바닥의 밑바닥을 구르는 인생이다. 밀렛은 이런 주인공을 내세우는 주네에 대해, 우리 사회에 남성성이 여성성을 억압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보여준다는 점에서 호평한다. 밑바닥의 시점에서 볼 때, 성 역할은 날것 그대로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진다. 주인공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는 그 어떤 체면도, 점잔도, 예의도, 기사도도 없는, 그야말로 강자가 약자를 거리낌없이 지배하는 거친 논리가 성립한다. 로렌스 식의 빅토리아적인 다정함은 가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주네가 바라보는 여성 및 섹스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자. 밀렛은 주네가 여성성을 묘사할 때 여성들이 남성성의 신화를 조롱하고 배반하며 이를 통해 기쁨을 느끼는 적대적 에로티시즘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한다. 남성성의 억압은 비겁하고도 우스꽝스럽게 연출되고, (로렌스의 엄숙한 분위기와 메일러의 격정에 찬 선전포고에 이를 비교해 보자) 여성 및 여성성을 체화한 주인공 남성은 이를 비굴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면서도 이내 행간에서 시니컬하게 비꼰다. 결국 주네의 작품세계는 상당히 풍자적이고 부조리극에 가까운 방식으로 섹슈얼리티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복수극은 결국 사회 그 자체를 바꾸지 못하며, 작품 내에서도 비극적인 엔딩으로 이어진다. 이 엔딩은 절망적이지만 순교적인 승리로서, 주인공 혹은 여성들이 자신의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열정과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을 잃지 않음으로써 숭고함으로 승화되는 것이다.[35] 때때로 주네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오히려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36]

그런데 밀렛은 주네의 후기 작품 3개, 《Le Balcon》, 《Les Negres》, 《Les Paravents》 를 엮어서 주네의 인식에 변화가 나타났다고 비평을 시도한다. 이전에는 순교 엔딩에서 낙담과 단념, 허탈감이 자욱하게 드러났다면, 이후 주네는 타협하지 않는 혁명가와도 같은 노선을 걷게 되었다는 얘기다. 특히 이 시절에 주네의 관심은 단순히 남성성 대 여성성의 문제를 넘어서서 인종차별, 신분차별, 식민지, 제국주의 등에 대해서까지 확장되며, 억압받는 자들이 어떻게 억압을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까지 통찰한다. 즉, 이때부터 주네의 작품 속 약자들은 상호경멸과 모욕을 멈추고 연대하여 투쟁하게 되며, 이들이 자기 자신의 존엄성, 정의, 분노를 인식하는 데까지 발전해 간다. 특히나 《Le Balcon》 에서 주네는 혁명도 결국 대안적 가치의 체제가 있을 때 성공할 수 있는 것이지,[37] 대안이 없을 때의 새로운 질서는 결국 과거의 질서와도 같다고 말한다. 대안이 없다면 억압받는 자들은 지배자를 그 권좌에서 끌어내린 후 자신이 대신 권좌에 올라앉게 마련이다. 하지만 정녕 혁명가라면, 오히려 그 권좌 자체를 치워 버리는 것이 혁명의 완성이다.

주네의 작품들 중 《Les Paravents》 은 프랑스에 점령된 알제리를 배경으로 하며, 중첩된 식민지 경험 속에서 혁명의 도화선은 알제리의 힘 없는 한 노파에게서 시작되었다.[38] (로렌스가 비슷한 배경에서 파시스트 쿠테타를 꾸미는 군인 남성들을 주요 인물들로 설정했음을 상기해 보자)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알제리 봉기군은 프랑스군과 전면적으로 맞붙게 되는데,[39] 여기서 주네는 봉기군이 가부장제를 깨뜨리지 못함으로써 과거의 질서를 고스란히 답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유곽의 여성들도 봉기에 동참했으나, 이후 봉기군은 이 여성들을 그들의 비참한 자리로 되돌려보냈다는 것. 주네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서 봉기군이 "새로운 우두머리 패거리" 가 되었다고 다시 비판한다. 주네에 따르면, 진정 아름다운 혁명은 남성들의 영웅주의가 아니라 위대한 인간애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소설 속에서, 이 사실을 기억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의 비천한 자리로 돌아가서도 자신이 배운 저항의 영혼을 인내심을 갖고 보존했다는 결말로 이어진다.

3. 반응

먼저 세간의 반응부터 살펴보자. 1970년 8월 31일 《 타임》 지는 본서를 특집 기사로 다루면서 밀렛이 "여성해방의 마오쩌둥" 이라고 보도했다. 동년 12월에는 밀렛이 레즈비언이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져서 "모든 페미니스트들은 레즈비언이다" 라는 통념이 강해졌으며, 당시 NOW의 글로리아 스타이넘(G.Steinem)은 밀렛을 옹호했지만 NOW 뉴욕지부는 동성애자의 소속을 거부하여 밀렛이 퇴출당했다고 한다. 또한 역자에 따르면(본서 p.737), 본서에서 비판 받았던 노먼 메일러는 《The Prisoner of Sex》 에세이에서 자신의 남성우월주의를 해명하면서 본서에 대해 "부정확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방식으로 인용하고, 단순하고 오류투성이인 논리" 라고 치부했고, 밀렛에 대해서도 "문학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마구잡이로 들쑤셔 대기나 한다" 고 짜증을 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 사회과학은 편향됐다고 할 땐 언제고 Masters & Johnson(1966)[40]의 연구를 자기 근거로 삼는 건 또 뭐냐" 고 비판하기도 했다고.

다음으로 학계의 반응을 살펴보자. 중앙대학교 여성학 교수인 이나영(2009)은 자신의 논문에서[41] 본서에 대해 세 가지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첫째, 가부장제를 모든 문화와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내적 식민화" 라고 설명함으로써, 남녀관계를 정치적 영역으로 개념화한 최초의 사례이다. 둘째, 남성의 여성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부장제가 여성성이라는 '젠더' 개념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설명함으로써, 젠더 이론을 가부장제와 연결했다. 셋째, 가부장제는 남녀관계를 사적이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이해하지만, 실상 남녀관계는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정치학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는 저 캐롤 하니쉬(C.Hanisch)의 유명한 슬로건이기도 한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the political)의 메시지를 뒷받침하게 되었다고 본다.

영미문화 연구자 패트릭 브란틀링거(P.Brantlinger)에 따르면,[42] 밀렛은 가부장제가 계급, 인종 등의 다른 것들보다 더 근본적이고 선행하는 억압의 형태라고 주장했다는 데 그 사상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다른 평론가들처럼, 그 역시 본서에 대해서 가부장제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구성물로서, 남녀관계를 결정짓는 불변적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평가한다. 이는 이 무렵의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수정주의를 택하거나[43] 아예 거부하는 두 가지 노선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밀렛의 경우는 그 중의 후자였다. 본서에서 꾸준히 지적했듯이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모두 여성의 억압 문제에 대해 무관심해 왔다고 비판했다.

해외의 사회학 분야에서 확인되는 서평이 한 건 있는데, 패트리샤 클로우(P.T.Clough)는 《Sociological quarterly》 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에서[44] 본서 이후로 문예비평과 사회과학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게 되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현재진행중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본서는 현실과 환상, 역사와 픽션, 키배(…)와 학문적 토론, 비평과 연구 사이의 관계를 바꾸어 놓았다. 자신의 성실한 비판을 통해, 저자는 본서가 "의도치 않게"(inadvertently) 비평의 영역과 사회과학의 영역 사이의 국경을 흐려 놓았고, 자칫 한계가 될 수 있었던 이 문제는 후속 페미니스트들의 많은 작업들로 인하여 이제는 사회현상에 대한 활발한 문예비평적 접근의 길을 열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심지어 이제는 사회학자들도 이런 텍스트의 독해를 통해서 사회를 읽어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제안하기까지 한다.

클로우에 따르면, 이전까지 소설들은 단순히 문학적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그 문학성만이 비평과 판단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지만 밀렛은 소설이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텍스트라고 보았고,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문학은 곧 가부장적 현실을 투명하게 반영하고 박제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밀렛은 문학에서 드러나는 가부장제를 고발하고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회과학을 가져왔다. 가부장제, 즉 남성으로서의 억압적 삶의 양식과 여성으로서의 종속적 삶의 양식은, 밀렛의 사회과학 연구들을 통해서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문화적 소산으로 입증되어야 했다. 하지만 사회과학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담론적 권위(discursive authority)를 갖는데, 밀렛은 이를 연구대상에 대한 무관심한 설명(disinterested explanation)으로서만 휘둘렀다는 것이다. 2부에서 밀렛은 사회과학이 기능주의와 정신분석학으로 인해서 편향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이런 오염된 접근을 어떻게 문예비평의 도구로 삼을 수 있을지에 대한 해명도 필요하다. 하지만 밀렛은 그것 역시 간과했다고 클로우는 지적한다.

밀렛이 이런 문제를 통찰하지 못한 것은 클로우가 보기에 분명하다. 3부에서 문학의 위치와 사회과학의 위치, 서로 간의 관계는 갈수록 불명확해져 가고 서로 섞여든다. 3부에서 밀렛은 밀러와 메일러 등의 작품들을 비평하면서, 이제는 문학이 단순히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더 나아가 반혁명적인 이념의 공고화를 이끈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리고 주네의 문학은 가장 직접적으로 사회과학과 문학의 영토를 서로 흩뜨려 놓고 있기까지 하다. 밀렛의 진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본서를 마지막까지 읽을 경우 독자가 자체적으로(…) 양자의 의미와 역할을 정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문학은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라기보다는 현실이라고 여겨지는 것의 각 단계들 내지 장면들을 조직화하는 것이고, 사회과학은 현실이라고 여겨지는 것 중의 관심 있는 대상을 정당화하고 규범화하는 기능을 한다는 맥락임을 알 수 있으며, 이렇게 본다면 문학과 사회과학은 사실상 차이가 없어지는 셈이다.

이 문제 때문에 클로우는 본서가 나온 이후 인문학 사회과학 양쪽의 여성 이론가들 모두에게 엄청난 숙제가 부여되었다고 회고한다. 사회과학 분야의 여성 이론가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여성들의 "진정한"(true) 섹슈얼리티를 밝혀낼 수 있을지 논의했으며, 인문학 분야는 남성 작가들의 작품세계에서 묘사되는 여성들의 왜곡된 섹슈얼리티를 찾아내어 고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본서는 인문학 분야에서 새로운 활동분야, 즉 사회문화 평론이라는 지평을 열었다.[45] 문학작품의 문화적 맥락은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 이제는 내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따라서 사회과학의 이론적 조망을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자기 고유의 문예 이론이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문헌성"(literariness), 즉 어떤 글쓰기가 그 담론에서 갖는 권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의 발달이나 제3세계 페미니즘의 담론에도 공헌했다고.

클로우는 이상의 논의에 더하여 개념상의 한계점도 함께 지적했다. 본서에서 가부장제는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가부장제라 함은, 즉 아버지(父)가 가장(家長)으로서의 권위를 갖는 가족 제도를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서에서 밀렛은 이를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상태로 모든 "남성 지배"(male domination)의 사례를 전부 가부장제로 치환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가 가장이 아닌' 사례들이 본서에서 일부 섞여들게 되었고, 그로 인해 후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이를 일일이 찾아내어 수정해야 했다(…)는 것이다. 남성의 지배를 만악의 근원으로 간단히 취급하려는 본서의 시도는 학술적인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보기에는 큰 결함이 되어서, 본서는 남성 지배에 대한 학술적 이론화도 실패했으며 이로 인해 이론의 이념적 위치를 명확히 하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4. 의문점

남은 의문점을 들자면, 밀렛은 2부에서 여성운동이 가부장제를 법적, 정책적, 제도적으로 개혁하려 하는 것에 대해 일종의 회의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본서에서 저자는 서프러제트와 같은 참정권 운동이 결과적으로는 "성적 '사회화' 과정이 정교하게 보강됨으로써 새롭고도 교묘한 통제 형태로 재조직될 수 있었다"(p.180)면서, "개혁되었든 아니든 가부장제는 여전히 가부장제" 이고, "일소되었건 부정되었건, 가부장제의 최대 악폐는 실로 전보다 더 안정적이고 확고해졌다"(p.181)고 했다. 이는 성 혁명 1기에서 참정권 획득의 한계점을 묘사하려다가 나온 비판이겠으나, 정치라는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 비중이 높아지는 것이 가부장제에 정말로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할지는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참정권을 가진 시민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전까지 여성들의 재산권이나 법적 지위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으며, 유권자 풀에서 여성들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 그 자체였다. 여성들의 정치 참여가 그 사회의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표출할 기회를 준다는 걸 생각하면, 가부장제는 그야말로 엄청난 양보를 한 것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여성들의 참정권 획득 이후로 가부장제가 "더욱 교묘해지고 안정적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꼭 그 이전의 가부장제로 회귀한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만은 없다. 어설픈 비유이긴 하지만 수정자본주의 하에서 기존의 비인간적인 초기 자본주의의 폐단들은 (비록 질적으로는 동일하다고 할지언정) 양적으로는 개선된 부분들이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부장제가 계속해서 다듬어지고 개선되고 고쳐진다는 것은, 가부장제가 그 사악한(?) 지배와 억압을 지속하기 위해 가면만 바꿔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유독한 부분들을 당장 할 수 있는 만큼은 버려 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혁명을 고대하는 사람들에게 개선이란 곧 변화가 없다는 말과도 동의어가 되겠지만, 실상 인류의 역사는 그런 소소한 점진적 개선을 통해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설령 가부장제 자체가 공격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개선 이전의 가부장제와 개선 이후의 가부장제가 서로 다르다면, 이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가부장제를 만악의 근원으로 규정하여 가부장제만 혁파한다면 세상의 모든 차별과 불의가 사라지고 마침내 근본적인 의미의 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은 개인의 철학에 따른 희망적 예측에 불과하다. 물론 가부장제가 다른 여러 종류들의 불평등과 깊은 관련성이 있고, 가부장제의 혁파가 누락된 혁명이 인구의 절반에게는 제대로 된 혁명이 아닐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가부장제를 무너뜨린다면 정말로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탈가부장적 사회는 가부장적 사회에 비해 "더 진보적" 이라기보다는, 단순히 "또 다른" 종류의 사회라고 볼 수도 있으며, 얻는 것이 있는 만큼 잃는 것도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46] 이 점에서는 파이어스톤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가부장제의 근원성을 강조하려다가 자칫 "모든 나쁜 것은 가부장제 때문이고, 그것만 없으면 한큐에 유토피아로 직행!" 식의 논리로 빠지는 것도 위험해 보인다.

5. 둘러보기

파일:페미니즘 기호 화이트.svg 페미니즘 · 젠더 도서 목록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페미니즘 · 젠더 도서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파일:여성 픽토그램.svg 세계
여성의 권리 옹호(1792) · 여성의 종속(1869) · 제2의 성(1949) · 여성의 신비(1963) · 성의 변증법(1970) · 성 정치학(1970) · 여성, 거세당하다(1970) ·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1975) · 이갈리아의 딸들(1977) · 하나이지 않은 성(1977) · 포르노그래피: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 (1981) · 다른 목소리로(1982) · 백래시(1991) · 페미사이드(1992) · 혐오와 수치심(2004) · 여성혐오를 혐오한다(2010) · 나쁜 페미니스트(2014) ·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15) ·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2018)
파일:여성 픽토그램.svg 대한민국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돼라(1995) · 82년생 김지영(2016) · 그럼에도 페미니즘(2017) · 양성평등에 반대한다(2017) · 페미니즘 리부트(2017) · 근본없는 페미니즘(2018) · 혐오 미러링(2018)
파일:남성 픽토그램.svg 세계
남성성/들(1995) · 남성 페미니스트(1998) · 여성의 남성성(1998) · 마초 패러독스(2006)· 맨박스(2016)· 테스토스테론 렉스(2017)
파일:남성 픽토그램.svg 대한민국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2016) · 그런 남자는 없다(2017)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2017) ·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2018) · 한국, 남자(2018) ·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2018) ·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2019)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페미니즘 비판서 · 비페미니즘 젠더 도서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세계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2000) · 잘못된 길(2003) · 548일 남장 체험(2006) · 남자다움에 관하여(2006) · 소모되는 남자(2010)
대한민국
혐오의 미러링(2016) · 악플후기(2016-7) · 포비아 페미니즘(2017) ·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2018) · 우먼스플레인(2019)
}}}}}}}}}


[1] 구판에서는 김전유경으로 표기되었다. [2] 실제로 본서와 《 성의 변증법》 은 서로 공통점과 차이점이 흥미롭게 나누어진다. 일단 양쪽 모두 래디컬 페미니즘 진영에 서서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가부장제의 질서를 따르고 있기에 이를 때려부수는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관점을 취한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 대해 본서는 비판적이지만 파이어스톤은 꽤 호의적으로 바라보며, 남녀의 생물학적 조건에 대해서 본서는 그것이 허상이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파이어스톤은 바로 그 조건 때문에 남녀차별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의견차에도 불구하고 밀렛과 파이어스톤은 사적으로 서로 친밀한 사이였다. [3] 물론 이전에 이미 시몬 드 보부아르가 《 제2의 성》 에서 비슷한 논의를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본서는 이 책과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D. H. 로렌스는 여기서나 거기서나 일관되게 까였고(…)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보부아르에게는 까였지만 본서에서는 꽤 좋게 평가되었다. [4] 저작권법 제136조 : 저작재산적 권리를 복제, 공연, 공중송신, 전시, 배포, 대여, 2차적저작물 작성의 방법으로 침해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거나 병과할 수 있음 [5] 구글링하면 바로 튀어나오는 캡처본들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관련자료를 아카이빙한 페이지가 필요할 경우에는 다음을 이용할 수 있다. @워마드1 @워마드2 @워마드3 @워마드4 @워마드5 [6] 사실 이 부분은 사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이론적 논증의 수준에서 보면 조금 아쉽기도 하다. 일부는 가부장제가 영속화되는 원인이고, 일부는 결과이며, 또 일부는 원인인 동시에 결과로 분류될 수 있다. 일부는 가부장제의 징후로 분류할 수 있지만, 일부는 가부장제의 존속 메커니즘으로 분류할 수 있다. 또한 가부장제의 '생물학적 측면' 은 마치 인간의 물리적 신체 속에 가부장제가 빌트인되어 있다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표현이다. 저자 본인이 미리 인정하듯이, 본서는 탐색적 성격을 가지며 이론적인 측면은 다소 부족할 수 있음을 고려할 수 있겠지만, 가부장제라는 사회현상이 범문화적이고 보편적인 것임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은 이런 면으로도 억압받고 저런 면으로도 억압받는다" 를 장황하게 예시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접근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7] 이와 관련하여 저자의 각주에 따르면, 궁정의 기사도에 대해 연구한 역사가 모리스 발렌시(M.Valency)는 음유시인들이 노래한 여성숭배가 실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 전혀 공헌한 바 없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8] 여기서 저자는 판도라 이브를 예로 들어, 인간 남성에게 위협을 주는 계기가 되는 존재를 여성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9] 저자가 인용한 바 루이 워스(L.Wirth)의 정의에 따르면, "육체적이거나 문화적인 조건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어,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 소수집단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고 한다. [10] 저자 외에도 파이어스톤, 팔루디 등등이 이 시기의 페미니즘 운동 동향을 돌아보면서 "암울한 시기" 였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11] 당시 사람들은 고등교육이 여성의 덕목을 해칠 것이라며 거부했는데, 특히 장 자크 루소는 《 에밀》 에서 여성교육의 목적은 남성에게 복종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성 혁명의 시기에 이르러서야 최초의 여자대학교 마운트 홀리요크 칼리지가 세워졌다. [12] 이는 페미니즘의 제2물결이 다시금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면서 나타났다는 점과의 공통점으로 엮이기도 한다. 그러나 파이어스톤은 자신의 문헌에서 "그럼에도 여성운동은 자체적인 동력을 갖고 있다" 고 선을 그은 바 있다. [13] 이 점에 대해서는 파이어스톤 역시 자신의 저서에서 "참정권 운동은 페미니즘의 에너지를 완전히 고갈시켜서 이후 50여 년 동안의 침묵기를 유발시켰다" 고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14] 실제로 밀은 《여성의 종속》 을 저술할 때 자신의 아내와 의붓딸에게 직접 하나하나 질문하고 대화한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현대적 자유주의의 시조라고 불리는 당대 최대의 지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삶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아는 척하기보다는 가까운 여성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고충을 알게 된 후, 자신의 합리주의와 철학적 바탕을 활용하여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 통찰한 것이 바로 《여성의 종속》 이다. 어쨌거나 이런 특징으로 인해, 여성계에서는 이 책이 밀 혼자서 쓴 게 아니라 밀 부부의 공저라고 보기도 하는 듯하다. [15] 물론 밀렛은 러스킨 본인이 차분하고 교육 받은 인물이며 고상함을 추구했다고 말하지만, 그가 전통적이고 통속적인 성 역할을 맹신했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16] 이때 국제 공산주의 역시 '자본주의와 맞서 싸우기 위해' 가족을 구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강한 국가와 많은 민족을 만들지 못하면 절멸당할 것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17] 밀렛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유명한 발달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E.Erikson) 역시 "여성들은 월경을 할 때 상실감을 느낀다" 고 주장했으며, 이 때문에 저자 밀렛에게 "여성은 평생 월경을 450번 정도 하는데, 그럼 여성들이 느낄 상실감은 어마어마하겠네" 라며 까이기도 했다. [18] 예컨대 저자는 본서에서 두 건의 사회과학 논문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Barry, Bacon, & Child(1957)의 논문에 대해 저자는 해당 연구자들이 과장된 암호 같은 표현들을 통하여 중립적이고 사심 없는 면모를 보이려 하며, 기사도 정신이나 사회적 구조에 호소하지 않으면서도, 여성들의 고통을 본인들의 책임으로 돌리게 한다고 비판한다. 다음으로, Brim(1958)의 논문의 경우 저자는 남성성의 특징에는 인간의 모든 덕목을 부여한 반면 여성성의 특징에는 인간의 모든 악행을 부여했다고 비판한다. [19] 이들 소설들은 "프리 섹스" 운동이 인기를 끌던 시절에 크게 주목받았던 것도 있다고 한다. 60년대의 성 해방은 억압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섹슈얼리티에서 벗어나서 "프리 섹스" 를 자유롭게 탐험하자는 의도로 시작되었으나, 실상은 "플레이보이" 이성애 남성들이 여성들을 마구잡이로 착취하고 여성들은 무조건 순응해야 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고. 그래서 이때는 남성이 여성에게 아무렇게나 원나잇 스탠드를 제안하는 게 세련되고 트렌디하고 인싸(…)답게 여겨졌지만, 여성은 상황이 반대라서, 남성의 뜬금없는 섹스 제안을 거부할 경우 "어허 이 아가씨야! 아직 '해방' 이 덜 되셨구만!" 하는 식으로 핀잔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현대의 평가는 물론 "그 시절에 해방된 것은 오직 남성들뿐이었다" 정도다. [20] 후방주의도 후방주의지만, 본서에서 5~7장을 한달음에 읽어나간다면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해질 정도로 심리적 충격이 크다. 사람마다 감상이야 조금씩 다 다르겠지만, 실제로 직접 읽어보면 이런 소설들을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좋아하고 옹호하고 찬사를 보낼 수 있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이런 소설들이 팔려나가던 세상이라서 래디컬 페미니즘이 나타났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21] 이 작품은 1999년에 20세기의 100대 근대소설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22] 작중 표현을 바로 빌리자면, 로렌스는 남성 인물의 입을 빌어서 그녀에 대해 "소름끼치는", "역겨운", "끔찍하게 텅 비어 있고 결핍되어 있으며 내면의 무언가가 부족한" 과 같은 험한 악담을 쏟아냈다. [23] 여성 인물의 전공은 식물학이었으며 직업은 교사였는데, 로렌스는 주인공 남성과 그녀가 결혼한 이후 그녀의 상태를 "잠들어 있는 듯한" 상태라고 비유했다. 이 소설에서 이 여성은 그 후로는 가히 세뇌당한 듯이 남성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쓸 사직서를 주인공 남성이 불러주면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상태로 그걸 고스란히 받아적고, 교양 따위 없는 주인공 남성이 식물에 대해서 오히려 식물학 전공자인 여성을 가르쳐주는(…) 장면도 나온다. [24] 이런 장면은 실제로 여러 작품들에서 주인공 남성이 여성에게 일부러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가 놓고는, 여성이 키스를 요청했을 때 이를 냉담하게 거부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클리셰로 나타난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서구의 남성우월주의자들은 흔히 여성에 대해 "여성들은 일부러 남성들을 유혹한 뒤 같이 자자고 하면 냉담하게 거부하는 데서 희열을 느낀다" 는 적개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다수의 사회과학 연구들로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25] 로렌스는 섹스 장면에서 여성의 심리를 묘사할 때 이처럼 남성에게 순종적인 것이 마치 본능에 충실한 것인 마냥 묘사해 놓았다고 한다. [26] 이건 한두 번 나오는 상황설정이 아니라서, 하류층 혹은 유색인종 남성들에 의한 참혹한 강간, 고문, 조교 살해는, 로렌스의 다른 소설들인 《None of That》, 《The Princess》, 《The Woman Who Rode Away》 등에서도 주연 여성 인물이 작중 최후 결말에서 맞이하게 되는 비참한 말로로 활용되어 왔다고 한다. 이때 피해자 여성은 주로 페미니스트나 지적인 신여성 캐릭터였는데, 특히 금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7] 이 남성들은 여성과의 성교를 경멸하며, 심지어 비웃음도 욕망도 희롱도 없이 놀랍도록 순수한 냉담함과 강인함만을 갖고서 여성을 겁탈하고, 최종적으로 여성의 자아를 철저히 파괴하여 그녀의 통제감과 의지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윤간 장면은 무질서한 욕정이 들끓는 난교라기보다는, 오히려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종교적 의식의 이미지에 가까워진다. 특히나 이런 장면들에서는 으레 고드름 등의 날카롭고 크고 뾰족한 물체들이 확고하게 제시되는데, 밀렛은 이것들이 원초적 힘, 억압, 지배, 냉담함, 비인간성, 다시 말해 "페니스" 의 상징일 것이라고 보았다. [28] 남성연대의 본질이 동성애적이라는 여성 이론가들의 논의는 어쩌면 로렌스의 작품을 밀렛이 비평한 데서 큰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29] 특히 로렌스는 그 중에서도 아시아인을 우글거리는 해충에 비유하면서 가장 혐오했다. [30] 굳이 예를 들자면 '윗집 여자', '퇴근길에 만난 여자', '우연히 클럽에서 만난 여자' 같은 식으로 어떤 개인적인 친분도 인연도 없는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31] 훗날 노년의 밀러는 자신의 성 관념에 대해 해명한 《The World of Sex》 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자신의 글 대부분이 프리 섹스 운동의 차원에서 자기해방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그가 해방 이후 어떤 세계에 도달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32] 그 이유라는 것이, 남성의 정액은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고 귀중한 것이므로 이를 여성과의 섹스에 써야지 아무렇게나 낭비하면 안 된다는 것(…). [33] 밀렛에 따르면, 그가 벌이는 전쟁은 사실 "남성성과 용기, 지배력, 발기 능력에 대해 남성이 느끼는 불안함에 대한 정복이기도 하다"(p.637). 다시 말해,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자기 내면의 여성성에게 패배하는 것이다. 그는 남성성을 "끝없이 보충되어야 하고 모든 측면에서 위협을 당하고 있는 위기의 정신 자본"(p.640)으로 이해했다. 즉 남성이 남자다우려면 (즉 강자이고자 한다면) 끝없이 의식적으로 약자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두들겨패야만 한다는 얘기다! 빅토리아 시대의 저 ' 기사도' 를 추앙하던 신사들마저 기함을 하고 넘어갈 법한 불량배의 윤리다. [34] 물론 그의 작품들은 자기 편 군인들(?)에 대한 호전적 선전선동이므로, 아무리 칭찬을 하든 말든 간에 결과적으로 그의 평가는 적개심으로 귀결된다. [35] 예컨대 한 작품에서는 남루한 미청년의 거지인 주인공이 경찰에게 붙잡혔는데, 소지품 검사를 하다 보니 바셀린 로션이 나왔다(…). 경찰관들이 어이없어하며 킬킬거리는 동안, 주인공은 수치스러워하며 움츠러드는 대신 오히려 당당해지기로 마음먹는다. 이때 주인공은 "그 바셀린 로션을 버리느니 차라리 피를 흘리겠다" 고까지 독백한다. [36] 예컨대, 《Journal du voleur》 에서는 자신을 강간하는 상대방 남성의 팔에 입을 맞추고, 상냥하게 보듬어주고, "예쁘다" 고 말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당연히 상대방은 미쳤냐며 기겁하지만, 마침내 그들의 무감동함은 전복되고 주인공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되는, 여성성의 상징적 승리가 나타나기도 한다. [37] 이를 밀렛의 "성 혁명" 에 대입해 보면, 성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 사이에 가부장제 없이도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잘 굴러갈 방법이 있다고 믿고 있어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38] 이 할머니 왈, "지난 천 년 동안 우리 여자들은 너희 알제리 남자들의 행주로 살았다. 그리고 지난 백 년 동안은 너희 남자들 자신이 행주가 되었지. 너희들 덕분에 저 프랑스 신사들의 신발들은 십만 개의 번쩍이는 태양처럼 반짝이게 됐더구나." 물론 밀렛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는 현대에까지도 탈식민주의 배경의 여성 이론가들이 이른바 "식민지성" 을 젠더와 결합하여 논의할 때에도 굉장한 시사점을 주는 대사일 수 있다. [39] 여기서 주네는 봉기군의 폭력은 가능한 것이라고 긍정하지만, 밀렛은 봉기군의 폭력 자체도 사실은 옹호될 수 없는 것이라며 주네와 관점을 달리한다. 혁명 세력이라고 할지라도 폭력은 쓰면 쓸수록 자멸적이게 될 뿐이라는 것. [40] 성의학, 성심리학 관련 연구의 기념비적 성과로, 성 소수자 담론을 파다 보면 피해갈 수 없는 거대한 문헌이기도 하다. 당장 나무위키의 수많은 성 관련 정보들이 이 연구에 빚을 지고 있으며, 오르가즘의 단계 이론이나 여성의 멀티 오르가즘, 애액의 분비 등에 대한 상식들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문헌은 사회적으로는 프리 섹스 운동을 촉발시켰으며, 앤 코에트(A.Coedt)와 같은 여성 운동가들은 "여성의 쾌감은 에서 오는가, 아니면 클리토리스에서 오는가" 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게 되기도 했다. [41] 이나영 (2009).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역사와 정치학의 이론화. 경제와사회, 82, 10-37. [42] Brantlinger, P. (2013). Crusoe's footprints: Cultural studies in Britain and America. Routledge. [43] 예컨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 성의 변증법》 은 마르크스주의를 페미니즘적으로 수정하려는 시도로서, 여성의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이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억압을 출발시켰다고 주장했다. 이 관점은 헤스터 아이젠슈타인(H.Eisenstein) 등에게 "생물학을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는 말이냐" 고 비판받기도 했다. [44] Clough, P. T. (1994). The hybrid criticism of patriarchy: Rereading Kate Millett's sexual politics. Sociological quarterly, 35(3), 473-486. [45] 우리나라에도 프랑스 철학이나 언어철학, 탈식민주의 등을 전공한 인문학자들이 사회현상에 대해 TV프로그램이나 영화, 게임, 광고, 웹 커뮤니티 등을 활용하여 인문학적 비평을 시도하는 사례는 전혀 드물지 않다. [46] 보수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동물" 이다. 핵가족 제도에서 벗어나서 공동육아와 자유동거 등을 현실화한다 해도 그때는 또 다른 종류의 갈등과 차별이 불거질 수 있다. 예컨대, 국내외의 여러 급진적 여성단체들이 완전한 평등의 실현을 위하여 일체의 의사결정 구조를 전원합의체로 하여 운영하려다가 얼마 못 가서 심각한 내분이 발생, 많은 운동가들이 개인적인 상처를 받아 떠나가서 소멸된 사례들이 꽤 있다. 그리고 이들이 그렇게나 비난하던 위계적 구조는, 결국 그런 문제들을 막으려던 선배(선조)들이 씁쓸한 마음으로 채택했었던 것이라고 덧붙여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