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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22:47:12

다른 목소리로

도서명 In a Different Voice: Psychological Theory and Women's Development(英)
다른 목소리로: 심리 이론과 여성의 발달(韓-1st)
침묵에서 말하기로(韓-2nd)
발행일 1982년(원서)
1994년(역서-1st)
2020년(역서-2nd)
저자 캐롤 길리건
(Carol Gilligan)
허란주 역(역서-1st)
이경미 역(역서-2nd)
출판사 Harvard University Press(원서)
도서출판 동녘(역서-1st)
(주)도서출판 푸른숲(역서-2nd)
ISBN 9788972973782(역서-1st)
9791156758501(역서-2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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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및 출간 배경2. 목차 및 주요 내용
2.1. 챕터별 내용 정리2.2. 남녀의 도덕은 서로 다르다2.3. 길리건의 도덕발달 이론: 돌봄의 윤리 3단계
3. 쟁점들
3.1. 남성 억압에 대한 공모?3.2. 본질주의 내지 생물학적 결정론?3.3. 보편윤리로서의 돌봄?
4. 한계점5. 둘러보기

"여성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은 남성들이 추구하는 가치들과는 다른 경우가 많다 ... 대다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남성적인 가치들이다."
- 버지니아 울프(V.Woolf), 《A Room of One's Own》, p.76

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세상에 도덕의 기준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로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돌봄의 윤리(ethics of care)라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발달심리학 이론에 포함시킬 것을 강조한 도서이다. 짧게 줄이자면, 본서의 가치는 "도덕이 아니라, 도덕들이다" 를 최초로 강조했다는 데에 있으며, 로런스 콜버그(L.Kohlberg)의 대표 이론인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이론 저격하는 목적을 띠고 출판되었다. 1994년에 제정되었던 교육의 젠더형평법(Gender Equity in Education Act)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

학문적 배경이 심리학인 만큼, 본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에서 장 피아제, 그리고 로런스 콜버그로 이어지는 기존의 발달 이론이 남성중심적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1] 이들은 공통적으로, 남성들의 "타인과 분리되는" 자아를 바탕으로 도덕발달 이론을 만들었으며, 이것을 여성에게까지 적용하려 시도했고, 그 결과 여성들의 도덕발달이 남성보다 뒤떨어지는 '열등함' 이 있음을 보고했다. 따라서 도덕이론 체계 속에 여성들의 '목소리' 가 들리게 하여, 그들 역시 도덕적인 존재임을 인식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남성들이 추구하는 도덕과 여성들이 추구하는 도덕이 사뭇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본서는 저자가 강조하듯이 " 기존 심리 이론의 구성에서 제외된 집단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 인간 발달관을 확장하는 것"(p.46)이 목적인 진행중 연구(research in progress)의 보고라는 성격을 갖는다. 본서의 기초가 되는 연구는 면접법을 통해 확보된 데이터의 질적 해석에 있으며, 20~30명 가량의 중산층 백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면접이다.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반구조화된(semi-structured) 형태로 짐작되며, 적극적인 프로빙(probing)이나 기타 "interrogative" 한 테크닉들이 동원되고 있다.

본서의 내용에 대해서 풍월로 들어본 사람들은 이 책이 " 여성들은 원래 남성들보다 더 섬세하고 배려하고 보살피는 데 뛰어나니까 밖에서 일하지 말고 집에서 애나 키우는 게 낫다" 고 주장하는 책인 줄로 알기도 하...지만 전혀 그런 메시지가 아니다. 이건 책을 안 읽어봤다는 셀프 인증밖에 안 된다. 그런데 실제로 하단에서 소개되겠지만 당시의 많은 페미니스트들과 사회 운동가들이 본서의 메시지를 크게 오독하거나 피상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굉장히 많은 소모적인 논쟁이 있었다. 현대에는 많이 사그라들거나 쟁점의 포커스가 바뀌거나 했지만, 똑같은 몰이해가 계속 반복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사회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경력이 있으며, 그 이전에는 영문학 임상심리학을 전공했던 바 있다. 학문적으로는 발달 이론의 정립에 있어서 정신분석학의 한 갈래인 대상관계이론, 그리고 낸시 초도로우(N.Chodorow)의 양육 이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2] 이후 길리건은 《교차로에서의 만남》(Meeting at the Crossroad: Women's Psychology and Girls' Development)라는 책의 저술에 참여했는데, 이 책은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좀 더 사회학적이고 거시적인 측면을 고려하였다고 평가된다. 여기서 길리건은 돌봄의 윤리를 갖고 있는 소녀들이 청소년기 초기에 들어서면서 남성적인 정의의 윤리라는 사회화 압력 앞에서 목소리를 잃고 단절의 위기(crisis of disconnection)를 겪게 된다고 주장했다.

본서는 국내에는 1994년에 꽤 발빠르게 번역되었는데, 처음에는 부제만을 따와서 《심리 이론과 여성의 발달》 이라고 제목을 지었다가, 이후 1997년에 개정판을 내면서 원제까지 모두 포함시키게 되었다. 이후 절판되었다가 2020년에 (주)도서출판 푸른숲의 인문ㆍ심리 브랜드인 심심에서 《침묵에서 말하기로》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본서의 본문을 읽다 보면 저자가 수행한 3건의 연구들을 거론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97년 역서에는 저자가 1993년에 덧붙인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가 따로 존재한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복잡하지 않으며,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본서 자체보다는 본서가 촉발한 쟁점이 살펴볼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이를 세 종류로 나누어서 각각 후속연구와 평론을 찾아볼 것이다. 즉, 본서가 남성지배적 억압구조에 종속될 것을 주장한다는 논변, 길리건의 젠더 관점이 본질주의(essentialism) 내지는 생물학적 결정론(biological determinism)이라는 논변, 그리고 길리건이 돌봄의 윤리를 특수윤리에서 보편윤리로 확대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논변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본서의 한계점으로서, 인구학적 다양성을 포괄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양적 연구로 재조명했을 때 재현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살펴보겠다.

2.2. 남녀의 도덕은 서로 다르다

이하의 내용을 읽기 전에, 먼저 하인츠 딜레마와 이를 토대로 한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이론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본서는 그 이론을 저격하는 논리를 담고 있으므로, 잘 모르겠다면 해당 문서를 먼저 읽고 오는 것이 좋다.

본격적으로 돌봄의 윤리의 발달을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기존의 하인츠 딜레마 연구가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초 이 딜레마를 가지고 소녀들과 여성들에게 질문을 하던 길리건은, 유독 여성들의 응답은 기존의 발달이론을 가지고 설명하기 힘들다는 난관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론이 예측하지 못하는 식의 답변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자 연구자들은 답답한 나머지 반복적으로 캐물었고, 그 결과 이 여성 응답자들은 자신이 의사전달에 실패했거나 뭔가 '정답에서 틀린' 답을 내놓았다고 여겨서 갈수록 기가 죽고 자신 없어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론으로 더 잘 설명되는 응답 방식은 늘 소년들과 남성들에게서만 나타났다.

이하는 서로 거의 동일한 사회경제적 지위(SES)와 IQ를 갖고 있는 초등학교 6학년 남녀 어린이들이 하인츠 딜레마에 대해 응답한 방식의 차이이다. 여자아이(F)는 과학을 좋아하고 남자아이(M)는 수학을 싫어하는 대신 국어를 좋아한다는, 조금은 일반적이지 않은 특징이 있었다. 그런데 하인츠 딜레마 상황에서 둘은 매우 전형적인 남녀의 차이를 드러냈다. M은 이를 " 재산권 범죄의 문제" 로 규정하고, 본인의 말에 따르면 " 수학 방정식 같은 질문" 이라면서, "합리적인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것" 이라고 말했다. 반면 F는 이를 "약사와 병든 아내 사이의 문제" 로 규정하고, 인간관계에 관련된 하나의 스토리텔링과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였다. 아니, 애초부터 F는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며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응답하기 힘들어하는 듯했다.[3]
연구자: "왜 하인츠 씨가 약을 훔쳐야 한다는 거지?"
M: "사람의 생명은 돈보다 소중하니까요."
연구자: "왜 생명이 돈보다 중요하지?"
M: "돈이야 나중에 부자들한테서 벌면 되지만, 하인츠 씨는 나중에 다시 아내를 얻을 수 없으니까요."
연구자: "하인츠 씨가 감옥에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M: "네, 그건 감수해야 해요.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법을 만들 수는 없지만, 질서를 위해서 법을 따라야 해요. 하지만 판사님도 상황을 이해한다면 가장 가벼운 벌을 내릴 거예요."
연구자: "왜 하인츠 씨가 약을 훔치면 안 된다는 거지?"
F: "왜냐하면... 그건 옳지 않기 때문이에요."
연구자: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볼래?"
F: "약사에게 좀 더 상황을 잘 설명해 줄 수도 있었잖아요."
연구자: "약사가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F: "그래도 훔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길리건이 보기에 이러한 차이는 기본적으로 남녀가 갖고 있는 인간관과 사회관, 세계관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남성들은 자기 자신을 남과 "떼어놓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남성은 자립하기를 원하고, 남과 이어지기보다는 명확히 선긋기를 하기를 원하며,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율적으로 활동하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들은 그 '경계선' 이 깨어지게 되는 것을 염려한다. 세상에 만연한 개인 간의 대립과 균열을 막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칙이 각자를 제약할 필요가 있고, 자신도 이에 따라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반면 여성들은 자신을 남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성들은 상호 의존하기를 원하고, 남과 이어진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며, 자신의 의사가 결국 남들에게 파급효과를 끼칠 수 있음을 고려한다. 세상의 여성들은 서로의 돌봄 행동에 대해 일정한 기대가 존재하므로, 자신도 이에 따라서 남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짧게 말하자면, 남성들의 부도덕은 타인에게 없을 수도 있었던 (-) 를 발생시키는 것이고, 여성들의 부도덕은 타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 를 발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층위에서 말하자면, 길리건은 대상관계이론과 초도로우의 양육 이론에 입각하여, 신생아기~영아기 시절의 부모의 양육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현실적으로 어머니 유모, 보모를 비롯한 대다수의 양육자들은 여성이라는 것이다. 우선 남자아이들의 경우, 처음에는 이들 양육자들과 의존의 관계를 맺기는 하지만, 점차로 나이가 들고 성장하면서 성별이 자신과는 다른 양육자와 이질감을 느끼고 심리적인 단절을 하게 된다. 반면 여자아이들의 경우, 처음에도 양육자들과 의존의 관계를 맺으며, 나중에도 여전히 양육자가 자신과 연속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여 심리적 연결감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를 짧게 정리하자면 남성들은 양육자가 이성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심리적인 홀로서기의 과정이 있고, 여성들은 양육자가 동성이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4] 그리고 이 차이가 개인의 일평생의 대인관계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길리건은 당시 폭넓게 활용되던 연구방법론이었던 주제통각검사( TAT)를 통해서, 남녀가 서로 생소하게 느끼는 대인관계의 측면에 대해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상황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도 발견했다. 즉, (응답자의 %를 바탕으로 비교할 경우) 남성들은 친밀한 사적 관계가 묘사된 그림 카드를 보면 그것을 유달리 폭력적으로 인식했고,[5] 여성들은 경쟁적인 공적 관계가 묘사된 그림 카드를 보면 그것을 유달리 폭력적으로 인식했다.[6] 이런 경향은 비단 TAT가 아니더라도 가상의 시나리오를 활용한 연구에서도 나타났다.[7] 심지어 명백히 위험요소가 드러나더라도, 여성들은 그 사진 속의 인물들이 친밀한 관계로 묘사되어 있다면 그 위험요소를 자의적으로 제거하기까지 했다.[8]

남녀가 생각하는 게 이처럼 다르니, 하인츠 딜레마에 대해서도 반응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런데 여기서 길리건은, 하인츠 딜레마가 유독 남성들이 이해하기 쉽고, 추론하기 쉽고, 판단하기 쉬운 유형의 딜레마라고 지적한다. 전후맥락 없는 완전한 가상의 시나리오, 각각의 인물들의 역할과 이해관계는 언급되지만 서로간의 대인관계는 전혀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은 설정,[9]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할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이야기. 남성들은 이 상황을 '거대한 사회 속에서 법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각자의 권리가 침해된 상황' 으로 인식하고, 쉽사리 기본 원칙과 이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서, 더 우선시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여성들은 우선 자신들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되새겨 보았지만, 도무지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적이 없었다. 딜레마를 풀려면 적어도 그 약사와 병든 아내가 서로 친했는지 아닌지라도 알아야 했지만, 판단의 단서는 전혀 없었다. 하인츠 씨가 감옥에 들어간 뒤 병든 아내를 돌봐줄 사람들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절도를 하거나 하지 않는 선택에 각각 어떤 대가가 따르게 되는지, 결과적으로 누가 불행해지게 되는지 모든 맥락을 고려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앞서의 여자아이처럼, 나이가 어린 응답자들은 당황해하며 움츠러들었고, 나이 많은 여성들의 경우에도[10] " 글쎄요, 상황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이상으로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본 로런스 콜버그 왈...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잘 발달된 것 같은데?"

결국 길리건은 기존의 하인츠 딜레마 시나리오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고, 여성들의 핵심적인 고려점인 '인간관계 문제' 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더 나은 시나리오를 찾기로 했다. 그리고 여성들은 현실적인 전후맥락을 전부 계산에 넣는다는 점 때문에,[11] 내친김에 가상의 이야기를 상정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당면한 현실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소재로 하기로 했다. 이런 고민의 결과로, 길리건은 낙태 결정 딜레마를 새로 제시했다. 임신 첫 3개월 동안,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이 여성들이 낙태를 할 수 있는 이 유일한 기간에, 낙태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아이를 출산해서 키울 것인지의 도덕적 판단을 어떻게 도출하는지 살펴본 것이다.[12] 그리고 낙태에 있어서, 여성들의 도덕적 판단의 기준은 3가지로 나뉘게 되었고, 이것이 시간적 흐름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발전하거나 퇴행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여성들이 경험하는 고유의 발달단계가 가시화된 것이다.

2.3. 길리건의 도덕발달 이론: 돌봄의 윤리 3단계

먼저 전체적인 큰 그림부터 그리고 시작하자면, 길리건의 도덕발달 이론은 자신에 대한 돌봄과 타인에 대한 돌봄 사이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을 어떻게 강조하는가에 따라서 여성들의 도덕의 발달은 3단계의 양상을 띠게 되며, 단계적 전환에 있어서 두 차례의 큰 전환점을 상정한다. 이 전환점에서 일정한 조건이 갖춰진다면 여성은 도덕성의 발달을 이루어내지만, 만일 결격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면 오히려 도덕성의 퇴행을 겪을 수도 있다. 아무튼 3단계 + 2차례의 전환점이라는 구조 때문에, 일부 문헌들에서는 길리건의 이론을 5단계 발달로 보기도 한다. 하단에 별도의 표 형태로 정리해 놓았으니, 필요하다면 먼저 스크롤을 내려서 표를 본 후에 이후의 설명을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돌봄의 윤리 발달 1단계부터 살펴보자. 이때 여성들의 도덕적 목표는 생존(survival)의 원칙을 따른다. 이 여성들은 순전히 자신의 사적인 이해관계와 실용성에 입각하여 도덕적 판단을 하며, 관심의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필요에만 국한된다. 마치 길고양이나 야생동물처럼, 그저 내가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고, 남들이 다치건 힘들건 간에 알 바 아니라는 식이다. 길리건은 남자친구 불장난을 저지른 많은 십대 청소년들이 1단계의 윤리 발달을 보임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하술될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하면 이후 단계에서도 1단계로 퇴행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든, 1단계에서 여성들은 타인과의 연결을 고려하지 않거나 불신하는 상태이다.

1단계 발달 수준에서 각각의 입장에 따라 가능한 답변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낙태를 해야 한다: "임신을 원하지 않아요. 아이를 낳기도 싫어요. 저 내년이면 3학년이라고요. 학교는 졸업해야 하잖아요."
낙태를 하면 안 된다: "이 참에 애 낳고 집구석을 뛰쳐나가는 거예요. 그럼 부모님의 잔소리도 없겠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상기된 바와 같이, 여성들은 타인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어렵다. 2단계로의 전환점에서, 여성들은 타인을 도외시하고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스스로의 모습을 자아비판하게 된다. 즉, 자기 자신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1단계의 자신의 모습은 그저 자신과 연결된 타인을 모른 체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눈 가리고 귀를 막는다고 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설령 자신이 이기적으로 굴더라도, 남들이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는 더 이상 생존에만 의지할 수 없게 된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개인이 자신의 '독트린' 을 바꿔야 한다는 내적인 압력을 느끼는 것이다.[13]

이 전환기를 안정적이고 모범적으로 극복하여 성숙해지려면, 먼저 이 여성이 긍정적 자기개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을 할 능력이 있다는 것,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될 자질이 있다는 것, 도덕적인 사람으로 타인에게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해야 한다. 여기서 자기 자신에게 불확실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불확실함을 느낀다면 2단계로 넘어설 수 없다. 일단 성공적으로 극복이 이루어진다면, 그 여성은 호혜성의 돌봄의 윤리에 설득된다. 즉, 자신이 상대방을 돌봄으로써 상대방 역시 그만큼 자신의 필요를 돌볼 것이라고 전제하고 기대하며, 마찬가지로 자신이 돌봄을 받는 만큼 자신도 남들을 돌봐주는 것이 도의적으로 옳다고 느낀다.

이제 돌봄의 윤리 발달 2단계를 살펴보자. 콜버그의 이론에서 대략 3단계 정도에 막연히 대응하긴 하는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사회학자들이 그렇게나 비판하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여성의 종속적 역할" 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때 여성들의 도덕적 목표는 착함(goodness)의 원칙을 따른다. 이 여성들은 일종의 '모성적 도덕으로서의 책임감' 을 느끼며, " 착한 여자아이가 되어야 해" 라는 전통적 메시지에 부응하고자 노력한다. 1단계와는 달리, 이제 이들은 정반대로 관심의 대상을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인의 필요에만 쏟는다.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면서까지 끝없이 희생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뒷바라지를 하고, 수발을 드는 것으로서만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무의미하다. 타인이 원하는 것에만 수동적으로 따르면 착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며, 어차피 자신의 필요는 남들이 알아서 돌봐 줄 것이니까.

2단계 발달 수준에서 각각의 입장에 따라 가능한 답변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낙태를 해야 한다: "낙태를 하지 않으면 남자친구를 다시 볼 낯이 없어요. 애 지우라고 늘 다그치는걸요. 달리 어쩌겠어요?"
낙태를 하면 안 된다: "낙태를 하면 부모님과 어른들을 실망시키게 될 거예요. 저는 제 태아를 보호할 책임을 지고 있고요."

하지만 2단계가 매우 흔함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여성들은 3단계로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일부 여성들이 "뒤늦게 또 사춘기가 왔다" 고 말하듯이, 이들은 자신의 대인관계 그 자체에 대해 심각하고도 근본적인 재고를 시작한다. 과연 자기희생이란 늘 선한 것인가? 남들이 착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던가? 내가 남들을 위해 희생하는 만큼 남들도 나를 위해 희생해 주던가? 내 주변에서 날 이용하려 하는 사람들은 뭐란 말인가? 이제 더 이상 기브 앤 테이크는 설득력이 없다. 타인에 대한 책임이라는 미명 하에 저질러진 자기희생은, 알량한 도덕적 만족감 이면으로 내면적 불만족과 분노를 남겼다. 결국 이들은 2단계 발달수준에서 잠시 묻어두었던 질문을 다시금 끄집어내어 곱씹게 된다. "내가 내 필요를 챙기는 것이 '그렇게나' 이기적인가?"

이 전환기를 안정적이고 모범적으로 극복하여 성숙해지려면, 이번에는 이 여성이 (타인에 대한 책임감에 더해서) 자신의 진정한 감정과 필요 역시 솔직하게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남이 나를 착하다고 인정해 줄까?" 에 일희일비하고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는 진정한 나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한 것을 채우는 것 역시 책임의 일부이고, 그 책임을 져야 할 사람 역시 나인 것이다. 여기서 기존의 착함의 원칙을 포기하지 못하는 여성은 3단계에 진입하지 못한다. 일단 성공적으로 극복이 이루어진다면, 그 여성은 자신을 대등히 포함하는 돌봄의 윤리에 설득된다. 즉 자신이 상대방을 돌보는 것이 중요한 것만큼이나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 역시 온당하다는 것이고, 설령 착하다는 소리는 못 듣더라도 자기 스스로에게는 떳떳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길리건이 그토록 강조했던 돌봄의 윤리 발달 3단계를 살펴보자. 이제 여성들의 도덕적 목표는 진실(truth)의 원칙을 따른다. 이 여성들은 자신이 돌봐야 할 대상이 자신이건 타인이건 간에 신중하게 선택하여 그 돌봄에 대한 책임을 진다. 2단계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자신과 타인이 상호 연결된 존재임을 인정하지만, 자신을 돌보는 것이 한편으로는 타인을 간접적으로 돌보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신중한 고민 끝에 (만일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 역시 일체의 자아비판을 하지 않고서 편한 마음으로 할 수 있게 된다.

3단계 발달 수준에서 각각의 입장에 따라 가능한 답변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낙태를 해야 한다: "물론 남편은 실망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완벽하지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저는 스스로에게 당당할 만큼 고민했어요."
낙태를 하면 안 된다: "등 떠밀려 낙태하는 건 옳지 않아요. 저는 남들의 조언과 제 아이에 대한 제 감정을 공정하게 견주어 봤거든요."

즉, 최종적 발달단계에 도달한 여성들은 지금껏 그들을 괴롭혀 왔던 이기심과 이타심 사이의 갈등적 관계를 아예 개념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그 고민으로부터 탈출한다. 일부 응답자들은 면접 과정에서 이를 "내 이기심과 남의 이기심 사이의 경합" 이라고 정리하기도 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결국 "모두를 돌보라" 라는 포괄적인 방식으로 돌봄의 윤리를 보편윤리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은 무조건 도덕적인 것이 아니고, 타인이 돌봄을 받을 자격이 있듯이 자신도 자신에게 돌봄을 받을 자격 내지는 '권리' 가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기브 앤 테이크를 위함이 아니고, 서로의 선택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가능한 한 모두를 돌보는 길을 심사숙고하여 찾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본서에서 소개하는 면접 내용의 일부는 이러한 3단계 도덕발달 수준을 매우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연구자: 도덕적 결정을 하는 올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Sharon: 제가 아는 방법은, 될 수 있으면 항상 깨어 있도록 노력하는 거예요. 마치 어디에 갈 때 목적지를 잘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감정이 어떤지, 그리고 관련된 모든 것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하지요.
연구자: 귀하가 따르는 원리들이 있습니까?
Sharon: 아마도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책임과 관련이 있을 거예요. 자기 자신과 남들에 대해 보살펴야 하는 책임 말이죠. 하지만 이 원리에 따랐을 때, 어떤 경우에는 책임이 있고 다른 경우에는 무책임해도 되는 것은 아니에요. 모든 경우에 자신의 결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요.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이 원리에 따른다는 것은 한번 결정하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이 원리가 실제로 적용된 후에도 갈등은 남을 수 있는 거죠.
- pp.191-192, 응답자 "Sharon" 응답 녹취록 中 (굵은 글씨는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그렇다면 대체 어느 시점에서 이런 전환점이 닥쳐오게 되는 것일까? 길리건은 "인간은 위기 속에서 성장한다" 는 발달심리학의 전통에 따라,[14] 낙태와 같은 중대한 대인관계적 네트워크 상의 문제를 통해서 여성들이 도덕적 성숙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여성들이 위기에 직면해서 꼭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성장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감을 잃고 절망에 빠지고 패배하게 되며, 자신이 '책임져야 할' 돌봄의 세계를 좁히는 도덕적 허무주의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성장한 사람들이 마냥 행복한 것만도 아니다. 저자의 종단적 추적조사에 따르면, 설령 3단계에 대응하는 성숙한 판단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후 몇 개월 동안은 내내 몸도 야위고 밖에도 안 나가고 부모님과도 자주 싸우면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고 한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그런 슬픔의 기간이 끝나고 나면 내적으로 성장하여 규칙적인 운동을 하거나 대입을 준비하거나, 교내 클럽활동에 참여하는 등의 자기발달 활동이 증가한다는 것.

이상의 내용이 바로 길리건의 이론의 전반적인 내용이다. 이를 표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5] 모바일에서는 열람이 어려울 수 있으니 주의.
길리건의 도덕발달 단계
단계 자신의 돌봄 타인의 돌봄 인간관계의 인식 기본 원칙
1 O X 연결의 불신
고려하지 않음
생존
(survival)
위기
(전환점)
▼     ▼
문제제기: 타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이기적이지 않은가?[16]
▼     ▼
2 X O 무제한적 이타성
호혜적 자기희생
착함
(goodness)
위기
(전환점)
▼     ▼
문제제기: 내 자신을 돌보는 것이 정말로 이기적인 것인가?[17]
▼     ▼
3 O O 상호연결의 재해석
책임 있는 선택적 돌봄
진실
(truth)

위와 같은 이론을 전개한 뒤, 길리건은 마지막으로 희망 섞인 예측을 내놓는다. 남성 여성 모두, 성인기에 충분히 성숙하게 되면 상대방이 사용하는 윤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윤리와 통합하게 된다는 것. 아동기에서 성인진입기에 이르기까지, 남성들은 독립성의 발달을 강조하며 그것을 권리의식을 통해 정당화해 왔다. 하지만 삶의 연륜이 쌓임에 따라, 이들도 연애, 결혼, 양육, 기타 등등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타인에 대한 선긋기에서 벗어나 타인을 돌보는 관계로 전환할 수 있다.[18] 한편 아동기에서 성인진입기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타인에 대한 친밀한 헌신만을 강조하며 그것을 돌봄의 책임으로 정당화해 왔다. 하지만 삶의 연륜이 쌓임에 따라, 이들도 자신의 필요에 솔직해야 함을 깨닫게 되고, 이로써 비로소 타인의 필요 외에도 자신의 필요 역시 고려될 '권리' 를 주장함으로써 균형을 맞추어 가게 된다. 마침내 남녀 모두가 어느 정도는 독립적이고, 어느 정도는 관계적인 방향으로 도덕성이 수렴된다는 것이다.

3. 쟁점들

길리건이 본서를 쓰고 나서 일차적으로 불거졌던 논쟁들에 대해, 길리건은 당초 〈Reply to Critics〉 라는 글을 통해서 대부분 해명을 한 바 있다.[19] 실제로 길리건과 동료 학자들,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다양한 최초 논쟁은 이 핸드북에 대부분 정리되어 있는데, 여기서 길리건은 자신의 본서 저술 목적이 어디까지나 도덕성과 자아의 서로 다른 구성 방식이 존재함을 알리는 것에 있으며, 남성들이 생각하는 보편성은 사실 보편성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음을 해명했다.

이하에는 1990년대 이후로 학계에서 길리건의 이론을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세 가지 갈래로 나누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3.1. 남성 억압에 대한 공모?

위의 이론의 정교함과는 무관하게, 본서는 출판되자마자 일군의 페미니스트들을 발끈하게 만들었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배려하고 보살피며 돌보는 경향이 있다" 는 식으로 본서의 메시지가 요약됨으로써, 결국 사람들에게 "그것 봐, 여자들은 바깥 일을 하는 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잖아" 라는 식으로 오독될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사회 운동가들이 보기에, 이런 메시지는 가부장제에 공모하는 것으로, 여성들을 집 안에만 묶어두고 전업주부로서의 종속적인 역할을 강요하며,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는 못 하는 존재" 로 규정지어서 그들의 가능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할 위험이 있었다.

유명한 여성학 개론서를 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로즈마리 통(R.Tong)은 이 문제에 관련하여 우선 교통정리를 시도했던 바 있다. 처음에는 길리건 옹호파의 입장을 여성적 접근(feminine approach)으로, 길리건 반대파의 입장을 여성주의적 접근(feminist approach)으로 정리했다. 그러다가, 1993년에 쓴 책에서[20] 기존의 입장을 다시금 정리하여, 이를 돌봄초점적 접근(care-focused approach) 대 권력초점적 접근(power-focused approach)으로 수정했다. 즉 통에 따르면, 넬 나딩스(N.Noddings)나 새라 러디크(S.Ruddick)처럼 현대사회의 병폐가 남성중심적인 윤리관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대안으로서 길리건의 관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돌봄초점적 접근을 취하고 있는 것이며, 앨리슨 재거(A.Jaggar), 새라 호글랜드(S.Hoggland)처럼 길리건의 이론이 자기희생과 헌신 등 여성억압이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여성적' 속성들을 강조한다고 비판한 사람들은 권력초점적 접근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적 구분이 명확히 지켜지지 않으면, "여성들은 남성들과 그 어떤 점에서도 다르지 않다!" 는 주장과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배려하고 보살피며 돌본다!" 는 주장이 페미니즘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서로 뒤섞이는 모순을 일으키고 만다.

이와 관련하여 조주영(2009)의 문헌에서는[21] 돌봄이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강요해 온 종속적 역할이라는 주장에 대해 수전 헤크만(S.Heckman)의 《Moral Voices, Moral Selves》 를 빌어서 반론한다. 헤크만에 따르면, 도리어 길리건의 작업은 두 가지의 대등한 도덕윤리 중 유독 남성의 도덕에만 권위를 부여하는 남성중심적 패권을 폭로하는 역할을 했고, 따라서 길리건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조주영(2009)은 길리건이 '하나의 올바른' 행위를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도덕철학을 무너뜨림으로써 '근대적 주체의 마지막 보루' 까지 부정했다고 호평했다.

사실 위에서 소개한 이론체계를 이해했다면 짐작하겠지만, 길리건 본인부터가 여성들에게 문화적으로 부과되는 무조건적인 자기희생과 자기소멸, 무제한의 헌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이미 논의했듯이, 길리건은 그런 '수준 낮은' 돌봄의 윤리는 결국 자기 자신의 필요와 불만을 묵살해 버리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 반드시 흔들리게 되어 있다고 예견했다. 길리건은 오히려 여성들이 스스로의 필요에 대해 더 많은 "권리의식" 을 당당히 주장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적이기도 하다. 타인의 필요와 자신의 필요를 대등하게 놓고 '충분히 고민해서' 선택했다면, 길리건의 관점에서는 그 선택이 타인을 돌보는 것이더라도 바람직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이더라도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다면 길리건에게 ' 가부장제의 공모자' 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상황일 것이다.

3.2. 본질주의 내지 생물학적 결정론?

다음으로, 많은 사회학자들과 젠더 연구자들이 지적했던 것은, 길리건의 작업이 일종의 본질주의, 즉 "남녀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라는 주장이 아니냐는 것, 그리고 생물학적 결정론, 즉 "이 차이는 사회적인 것이 전혀 아니라 생득적으로 '타고 태어나는' 것이다" 라는 주장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들은 길리건이 본서에서 두 윤리 체계를 지속적으로 남성의 윤리와 여성의 윤리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 식의 주장은 자칫 사회화의 힘을 무시하고, 남녀가 '그렇게 타고 태어난 이상' 전혀 변화나 개전의 여지가 없다는 식의 속단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린다 커버(L.Kerber)라는 인물을 위시하여 길리건이 본질주의자라는 많은 공격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 크레시다 헤이에스(C.J.Heyes)라는 인물이 인문학 저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중재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22] 헤이에스에 따르면, 길리건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펼치고 있다는 불만에는 반대하지만, 길리건의 연구에도 한계가 있다고 한다. 즉, 결정론자라는 불필요한 말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자신의 연구에 젠더 정체성에 관련된 권력의 관계를 반영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꾸 이런 생트집(?)을 잡아서 물고뜯게 되는 데에는 "무엇이 생물학적 결정론의 혐의를 받는가?" 에 대한 철학적인 엄밀한 합의가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보았다. 쉬운 말로 바꾸자면, "길리건 당신은 왜 젠더 권력에 민감하게 연구를 안 해서 괜히 꼬투리 잡힐 여지를 만드나? 그리고 비판론자 당신들은 왜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죄다 본질주의자라고 몰아가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유년기의 양육자와의 성별 일치 여부가 남녀의 차이를 만든다는 대상관계이론 및 초도로우의 양육 이론이 문제의 배경이다. 헤이에스가 보기에 이런 접근은 어떻게 보더라도 생물학적 결정론도 아니요 본질주의도 아니었다. 심지어 헤이에스는 길리건이 본서에서 생물학의 생 자도 꺼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향후에는 길리건도 연구를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게 헤이에스의 제안이었다. 즉, 권력의 복잡한 역동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심층 면접법(IDI)이 아닌 초점집단면접법(FGI)과 같은 다른 질적 연구방법론을 활용하고,[23] 최소한 응답자와의 라포(rapport)를 제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면접의 타당화(validation) 방법으로서 길리건은 참여자 검토(member check)[24]를 택하지만, 이는 최초 반응을 중시하는 길리건의 연구 방침과는 맞지 않으니 향후에는 참여자의 관여(engagement)를 더 보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헤이에스는 한편으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본질주의라고 공격하는 일부 인문학계를 위해서도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무엇이 생물학적 결정론 내지 본질주의라고 판단하게 할 수 있는 명확한 철학적 지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반대자들은 길리건이 '여성 전체에 대한 일반화' 를 한다는 이유에서 여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이라고 판단해 왔다. 하지만 헤이에스는 "일반화를 하느냐"(whether to generalize)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고, "어떻게 일반화를 하느냐"(how to generalize)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길리건은 이미 본질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그 라벨링 때문에 이론의 현실적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쉽사리 무시되거나 경시받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설령 길리건이 본질주의자가 맞다고 하더라도, 본질주의는 강력한 정치적 효능성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이는 페미니즘의 제2물결에 대립각을 세우는 제3물결 세력이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라고 하였다.

같은 해에 국내에서 나온 서평에서,[25] 강수영(1997) 역시 길리건이 정의와 돌봄의 윤리를 지나치게 성별에 기초하여 적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비록 길리건 본인이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해명하긴 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길리건이 성별의 차이를 (마치 본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지나치게 강조했고, 그러면서도 돌봄의 윤리와 여성성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공격 받을 만한 건덕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강수영(1997)은 이 서평에서 본서가 "기존의 과학적 심리학 연구방법론에서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 라는 당연하고 단순한 것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고발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는 요지의 호평을 남겼다.

이처럼 현대 여성학자들의 중론은 "길리건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괜히 까일 여지를 남겨서 까였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위에서 소개했던 조주영(2009) 역시, 모든 여성들의 도덕적 관점이 본질적으로 돌봄의 윤리에 있다는 식의 독해는 명백히 저술 의도와 다르다고 못박았으며,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도덕적 기준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리기 위해 부득이 양성을 끌어다 설명했을 뿐이라고 했다. 또한 같은 해에 나온 또 다른 문헌에서도,[26] 대상관계이론과 초도로우의 양육 이론에 입각하기 때문에 생물학적 결정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해명하면서도, 한편으로 이정은(2009)은 본서가 양육자를 아버지로 교체할 때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를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본질주의라는 공격을 받게 되었다고 아쉬워한다. 즉 동성의 양육자가 현재의 차이를 만들어냈다면, 같은 논리를 따라, 예컨대 소위 '라떼파파' 처럼 육아를 전담하는 아버지에게서 자란 아들들은 돌봄의 윤리를 내면화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서는 남성 양육자가 자녀에게 갖는 효과의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3.3. 보편윤리로서의 돌봄?

1993년, 《돌봄 민주주의》 라는 저서로도 국내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린 바 있는 조운 트론토(J.Tronto)라는 정치학자는 《Moral Boundaries》 라는 책에서[27] 보편적 윤리로서의 돌봄의 윤리를 강조했다. 트론토는 돌봄의 4가지 윤리적 요소, 즉 주의깊음(attentiveness), 책임감(responsibility), 유능성(competence), 반응성(responsiveness)을 설정하고, 이들 요소들은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수많은 영역들과 도처의 분야들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남성들의 정의의 윤리는 '도덕적 최소한의 의무' 인 반면, 여성들의 돌봄의 윤리는 그보다 상위적인 의무이기에, 정의가 돌봄의 특수한 종류로서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돌봄은 어디에나 있고, 무엇에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매 순간 돌봄의 제도의 영향을 받고 있는 뭇 사람들이 제 자신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라고 '착각'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수많은 분야들의 연구자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 맥락에서 연구자들은 돌봄의 사회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허라금(2006)은 자신의 논문에서[28] 길리건의 돌봄의 윤리가 가구 내에서의 여성의 노동을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도용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안전망의 한 종류로 인식되어야 하며, 우리 사회 전체가 제도적이고 체계적으로 서로를 돌보아야 할 당위를 제시한다고 하였다. 여성들이 사적 영역에서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인식하고 돕는 것처럼, 공적 영역에서도 우리 사회가 각 구성원들의 필요를 인식하고 돕자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공동체주의, 복지 제도에 대한 정치철학적 관점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어서, 많은 관련 연구자들이 손을 대기도 했다. 예컨대 수전 오킨(S.M.Okin)은 존 롤즈가 가정한, 보편윤리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쓴 합리적 존재조차도, 그가 가진 정의감은 결국 아동기 가정에서의 돌봄이 없었더라면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내 연구자들은 상당히 큰 난관에 봉착해야 했다. 타 분야의 연구자들이 본서의 통찰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돌봄의 윤리가 남성의 그것만큼 "보편적" 이라는 것이 본서에서 따로 확실히 논증되어야 했다. 하지만 당초 길리건은 남성의 정의의 윤리에 대등하게 존재하는 또 다른 윤리로서 여성의 돌봄의 윤리를 제안했다는 전후맥락을 갖고 본서를 썼었다. 이 때문에, 길리건의 작업만으로는 돌봄의 윤리를 여성들만의 특수윤리 이상으로는 끌어올리지 못했다는 불만이 제기되었다. 즉, 돌봄의 윤리가 보편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길리건처럼 "서로 대등하다" 고 말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정의의 윤리도 결국에는 돌봄의 윤리의 한 종류라고 해석될 수 있다" 고까지 말해야 했다. 같은 문제의식에서, 상단에서 소개한 조주영(2009) 역시 정의의 윤리와 돌봄의 윤리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불명확하다고 비판했다.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헌으로서, 상단에서 소개한 이정은(2009)은 길리건이 지향했던 돌봄의 윤리의 보편윤리화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를 남성들에게서 나타나는 돌봄의 경험을 소개하지 않았다는 데서 찾고 있다. 실제로 본서에서 남성들에 관련된 면접 기록이 일부 소개되기는 하지만, 길리건은 남성들이 '얼마나 돌봄에 관심이 없는지' 내지는 '얼마나 돌봄의 윤리와는 차이가 나는지' 에 초점을 맞추어서 소개한 바 있다. 설령 남성들에게 "귀하는 가까운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고 계십니까?" 라고 질문하더라도, 이들은 대체로 "글쎄요, 저는 의사니까 늘 환자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하지요" 라고 하거나, "제가 열심히 일해서 처자식들 먹여살리는 게 돌보는 거지요" 라는 식으로 직업활동에 입각해서 생각할 뿐이라는 것이다.[29] 하지만 이런 측면들을 부각한다면, 돌봄의 윤리는 결국 '그들의 일부 특수한 윤리' 로만 남게 되고, 남성들은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길리건이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이 이런저런 철학적 논변들을 덧붙이고 보강하면서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정은(2009)의 지적이다.

길리건의 본서는 일차적으로 ( 발달) 심리학계와 철학, 윤리학 정도를 상정하고 작성되긴 했지만, 오늘날 많은 분야의 학자들은 본서를 읽으면서 그것이 자신들의 분야에도 그럴듯한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사회복지학이나 정치학 분야에서는, 돌봄의 윤리를 여성들 간의 사적 네트워크가 아니라 아예 제도화하고 정책화된 형태로 이해함으로써 사회적 안전망의 확충, 복지정책의 정당화, 더 나아가서는 심지어 복지국가의 기본철학 및 운영원리로 삼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심지어 간호학 분야에서도, 간호사들의 직업윤리가 환자들을 돌보며 소모적으로 일하다 과로로 쓰러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건강과 환자들의 건강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데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논증이 가능한 데에는 돌봄이 단순히 "여성들에게 한정된" 윤리가 아니라 "남녀 모두의" 보편윤리라는 트론토의 주장이 별도로 뒷받침되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4. 한계점

우선, 주디스 스테이시(J.Stacey)나 수전 팔루디(S.Faludi) 등의 논자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헤이에스, 많은 사회심리학자들, 발달심리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본서의 경험적 근거는 대학교 2학년 여학생들 중에서 통계적으로 큰 의미가 없을 만큼 소수의 중산층 이성애 백인 여성들의 경험만으로 뒷받침되며, 저소득층 여성, 유색인종 여성, 저학력 여성, 성소수자 여성들의 경험까지 포괄하지는 못한다. 결국, 본서의 메시지 역시 이들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이상한"(weird) 메시지일 뿐이며, 이들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목소리" 가 필요해지게 된다. 본서에서도 이런 한계점을 간접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다음으로, 많은 심리학자들은 본서가 제시하는 내용을 위의 2번 쟁점과 연결하여, 추구하는 도덕성의 기준의 차이가 개인의 젠더 여부에 따라 예측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쉽게 말해서, "남자는 정의, 여자는 돌봄" 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는지를 메타 분석과 같은 통계적 방법으로 검증해 보았다. 하지만 많은 연구들은 재현성이 부족함을 보고했으며, 심리적 성차가 실제로는 생각보다 작게 나타나거나, 정의의 윤리에서 여성이 평균적으로 더 높은 점수를 받거나, 정의의 윤리가 높아질수록 돌봄의 윤리에도 함께 민감해지게 되는 등의 예상치 못한 발견들이 있었다.[30] 물론 길리건 본인도 이 점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서, 자신의 연구의 의의는 어디까지나 '단일한 하나의 도덕발달만이 존재한다는 인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에 있다고 해명해 왔다. 하지만 양적 연구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세 건의 면접법을 활용한 연구의 결과가 통계적으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논증의 힘이 많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두 윤리 체계는 젠더와는 아무래도 무관한 것이 되며, 남성/여성의 윤리가 아니라 그저 윤리 A 대 윤리 B 정도의 의미를 갖게 될 뿐이다.

사실 현대에 들어서 도덕심리학 영역에서는, 콜버그든 길리건이든 이제 인간의 도덕발달이 선형적인 단계를 따라서 열위 수준에서 우위 수준으로 이동해 간다는 식의 논리가 구식이 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학술적 영향력이나 기여도는 아직 막강하지만, 90년대 이후로 점차 도덕적 추론의 메커니즘 그 자체, 그리고 도덕적 추론의 다양성이 더 많은 관심을 끌어모으는 "트렌디" 한 연구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조너선 하이트(J.Haidt)의 도덕성 기반 이론(MFT; moral foundations theory)은 이 도덕적 기준과 저 도덕적 기준 사이에 더 낫거나 더 나쁜 것은 없으며, 그저 사람마다 서로 다른 도덕적 판단의 "기반" 을 갖고 있을 뿐이라는 식으로 설명하여 환영을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유명한 보수주의 논객인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C.H.Sommers)는 자신의 저서 《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에서 본서가 연구투명성이 보장되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인터뷰 응답자 중 일부만을 거론하고 나머지는 숨겨 놓았으며, 그 숨긴 자료를 열람하려 해도 어째서인지 공개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질적 연구가 그만큼 개인의 사적인 측면을 많이 노출하다 보니 생기는 문제에 가깝다. 양적 연구의 원천자료(raw data)는 숫자 가득한 엑셀 시트로만 존재하는지라 오늘날 전면적 공개 여론이 힘을 얻고 있지만, 질적 연구는 한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부분이 면접법 도중에 가감없이 전부 드러나기 때문에 섣불리 공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대부분의 연구사례들은 논문이나 단행본 내에서 최대한 응답 내용을 발췌해서 오픈하는 식으로 이 문제를 보완하는데, 문제는 본서의 경우 소머스도 지적했듯이 대화록 발췌가 약하다는 것. 이 문제에 더하여 소머스는 상기된 통계적 방법에 대한 비판까지 추가하고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냉담한 총평을 내렸다.
"캐럴 길리건이 침묵당하는 여자아이들과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 규범들' 의 한계, 서구 문화의 위험성에 관해 쓴 내용들은 과학도 아니고 학문도 아니다. 아무리 양보해 봐야 기이한 사회 평론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C.H.Sommers), 《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p.189

여하튼 상기한 여러 이유들로 인하여, 오늘날 본서는 아주 '과학적으로 유효한 연구' 같은 취급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자아내고 동료들과 후학들에게 영감을 준, 역사적 의의를 갖는 연구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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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서는 70년대의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논의가 전개되고 있으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발달심리학계는 정신분석학의 영향력을 굉장히 강하게 받고 있었다. 사실 이들을 비롯하여 몇몇 분과들은 꽤 늦게까지 정신분석학에게 지적인 빚을 진 바 있으며, 오늘날에도 발달심리, 교육심리, 아동심리, 성격심리 등의 분야들에서는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날선 대립각을 세우진 않는다. [2] 소년들은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격려받기 때문에 자율적 자아를 형성하는 반면, 소녀들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것을 격려받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중심적 자아를 형성한다고 본다. [3] 예컨대 그녀는 "약을 훔치면 안 돼요... 그렇다고 아내를 죽여도 안 되는 거죠" 와 같은 말들을 반복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F는 실제로는 높은 지능을 갖고 있었으며, '선택' 이 무엇이냐는 추상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들어서 능수능란하게 그 ' 가지 않은 길' 의 기회비용을 예시화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수준을 드러냈다. 이런 똘망똘망한 여학생이 어째서 당황한 나머지 이 말 저 말 주워섬기게 되었는지도 길리건이 설명을 내놓았으며, 이는 하술한다. [4] 물론 현대에까지 이 주장이 이때만큼이나 고스란히 권위를 갖고 반복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리고 오늘날의 더 세련된 정신분석 학파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상당한 지지를 받아 왔다. [5] 한 남성은 '호젓한 겨울 강둑 벤치에 남녀가 다정하게 함께 앉아있는 모습' 을 보자, 다음과 같은 비참한 NTR 이야기를 만들었다(…). "...철수와 영희가 벤치에 함께 앉아 있다. 영희는 원래 길동의 여친이었다. 철수는 영희를 놓고 길동과 경쟁하던 놈팽이였다. 그러나 길동은 철수의 모략에 빠져서, 저기 얼어붙은 강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본 것은, 철수와 함께 행복하게 앉아서 자신의 죽어가는 모습을 미소 띠고 지켜보는 영희의 얼굴이었다." [6] 한 여성은 '실험실에서 흰 가운을 입은 두 여성이 시험관을 들고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 을 보자, 다음과 같은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갑순과 영자는 같은 연구실에 속한 상급자와 하급자 관계다. 예전부터 갑순은 영자가 보는 앞에서 공공연히 다른 하급자인 옥자를 편애하고 추켜세워서 영자를 서운하게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영자는 갑순이 마실 커피에 넣을 치명적인 독극물을 몰래 합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순은 영자가 무엇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7] 예컨대 Horner(1968)는 여성들이 "의학 시험에서 의대생인 앤(Ann)은 자신이 1등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는 가상의 성취 시나리오에 대해 감정이입할 경우, 뜻밖의 불안과 공포 심리를 호소한다는 것을 발견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그 이후 상황을 예상해 보라고 하자, 여성들은 앤이 1등을 한 대가로 불행한 결말에 처할 거라고 걱정했다. 예컨대, 한 여성은 "1등을 하여 기고만장해진 앤은 곧 그녀를 질투하는 동료 여성들에게 집단으로 폭행을 당했고, 그 결과 불구가 되어서 자신의 꿈을 접게 되었다" 는 이야기를 예상했다. 이런 경향은 성취에 대해 뿌듯해하며 자부심을 느끼고 더욱 자신감 넘치게 될 거라는 남성 응답자들의 일반적인 반응과는 정반대의 패턴이었다. [8] 예컨대 TAT에서 '아찔한 공중곡예를 펼치는 두 남녀가 굳게 손을 잡고 마주보고 있는 모습' 의 그림 카드를 본 여성들은, 그 상황이 심지어 '남성 홀로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 의 상황보다도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들은 이야기를 설명할 때 카드에는 보이지 않는 안전 그물망의 존재를 자의적으로 추가하거나, 위험한 곡예를 요구하는 서커스 단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일을 그만둔 뒤 둘이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9] 예컨대 하인츠 딜레마에는 하인츠 씨가 자기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응답자 여성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지점이 이 부분이기도 하다. [10] 응답자들 중에는 심지어 여성 변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직업적 특성을 생각하자면 변호사들만큼 하인츠 딜레마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들도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성' 변호사들은, 하인츠 딜레마에 대해서 어떠한 법적 해석을 내놓기를 매우 주저했다. [11] Haan, 1975; Holstein, 1976. [12] 유의할 점이 있다. 본서는 낙태라는 행동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내리지 않고 있다. 단지 그런 도덕적 문제들로 인해 염려하고 있는 여성들의 '선택' 을 조명할 뿐이다. 어떤 여성들은 낙태를 선택했다가 불행해지기도 하고, 또는 행복해지기도 했으며, 또 어떤 여성들은 출산을 선택해서 행복해지기도 했고, 또 일부는 불행해지기도 했다. 본서에서 긍정하는 것은, 어느 쪽으로 최종적인 결정을 했든 간에, 그 결정이 길리건 자신이 제시하는 도덕발달 이론의 최종단계의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13] 1~2단계의 전환기를 경험하는 여성들은 적지 않아서, 실제로 많은 대중매체에서도 여성향 등의 작품들을 보면 여성 등장인물들이 이런 맥락의 대사를 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예컨대, 한 여성 인물이 다른 여성 인물에게, "...날 그렇게 동경하지 말아 줘. 나는 네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기적인 사람이야" 라고 괴롭게 말하는 장면은 꽤 흔하다. [14] 본서에서는 Coles(1964)의 문헌을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 발달심리학계에서 한때 청소년기의 정체성 위기니 중년의 위기니 하는 표현들이 나왔던 적이 있다. 현대의 중론은 대략, 그것이 실제로 경험될 수도 있지만 모두가 '단계적으로' 경험하고 넘어가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15] 다시 언급하지만 상기된 도덕발달의 양상은 대중매체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나무위키에 한정하여 예를 들어 보자면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를 거론할 수 있다. 참 뜬금없는 장르 일본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본서의 이론으로 심도있는 문예평론이 가능할 만큼 명쾌한 해설이 나온다. 해당 작품의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성과 작중 행적들, 주요 사건들, 주요 문제의식과 내외적 갈등들이 사실상 전부 다 위의 3단계 발달과 2가지 전환점으로 정리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남성 인물들이 주축이 되는 작품 중에서도 콜버그의 도덕발달 이론이 짙게 드러나는 사례가 있으리라는 짐작도 가능할 것이다. [16] 자신이 타인을 돌볼 만큼 도덕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2단계로 발달, 그런 확신이 없다면 1단계로 퇴행. [17] 자신이 스스로의 필요를 직시할 만큼 솔직하다면 3단계로 발달, 그런 진실함이 없다면 2단계로 퇴행. [18] 저자가 언급한 사례를 조금 각색한다면, 여자친구와 함께 낭만적 관계를 영위하는 남성이 자신의 여친과 깊은 대화를 나눈 뒤 "충분히 눈치채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친의 생각과 느낌은 내가 짐작한 것과는 많이 다르더라" 면서 놀라워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19] Gilligan, C. (1986). Reply to critics. In M. J. Larrabee (Ed.), An ethic of care: Feminist and interdisciplinary perspectives (pp.207-214). Psychology Press. [20] Tong, R. (1993). Feminine and feminist ethics. Wadsworth Publishing. [21] 조주영 (2009).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 도덕윤리로서의 보살핌. 여/성이론, 21, 72-84. [22] Heyes, C. J. (1997). Anti-essentialism in practice: Carol Gilligan and feminist philosophy. Hypatia, 12(3), 142-163. [23] 말인즉슨, 기존의 일대일 심층면접법은 연구자와 참가자 사이의 권력불균형 문제로 인해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연구윤리적인 비판을 받아 왔다. 연구자가 억지로 "이렇다는 거죠? 이렇다는 거네요?" 라고 몰아붙이면 연구 참가자는 속으로는 '그... 그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더라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어어어 하면서 끌려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점집단면접법은 연구자 1명에 응답자 다수의 형태로 구성되므로, 여기서는 응답자들에게 좀 더 많은 발언권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24] 피면접자의 진술에 대해 연구자가 해석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즉석에서 "요컨대 그 말씀은 ~라는 것이로군요, 맞나요?" 라고 피드백을 주고, 그것에 피면접자가 맞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만 그 해석을 논문에서 보고하는 것이다. 만일 피면접자가 회의적이거나 혹은 생각을 바꿀 경우에는 이후의 새로운 의견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해석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여기에는 윤리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25] 강수영 (1997). 다른 목소리에 귀기울이기 (캐롤 길리건 지음 「다른 목소리로」, 동녘, 1997). 창작과비평, 98, 355-358. [26] 이정은 (2009). 현대 여성주의 철학에서 보살핌 윤리--실천적 판단에서 특수 윤리와 보편 윤리의 전환 가능성. 한국여성철학, 11, 143-171. [27] Tronto, J. C. (1993). Moral boundaries: A political argument for an ethic of care. Psychology Press. [28] 허라금 (2006). 보살핌의 사회화를 위한 여성주의의 사유. 한국여성학, 22(1), 115-145. [29] 이를 뒤집어서 해석한다면, 남성들은 예컨대 "제 친한 친구가 최근에 실연을 겪어서 새벽에 전화를 걸었길래, 둘이 같이 울면서 몇 시간 동안 통화하면서 위로해 줬습니다" 같은 식의 대답은 잘 안 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30] Snarey, 1985; Walker, 1984; Walker, De Vries, & Trevethan,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