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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남자는 없다

<colcolor=#333> 도서명 그런 남자는 없다: 혐오사회에서 한국 남성성 질문하기
발행일 2017년 9월 4일
저자 허윤, 손희정 기획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편집
김영희 외 12인 공저
출판사 도서출판 오월의봄
ISBN 9791187373247
#교보문고

1. 소개 및 출간 배경
1.1. 공저자
2. 목차3. 작가의 주장
3.1. 한국 남성성의 분화와 변화
3.1.1. 보이지 않았던 남성들
3.2. 군사화된 남성성
4. 비판
4.1. 학계의 반응4.2. 남성성을 죄악시함4.3. 기타 의문점
5. 둘러보기

1. 소개 및 출간 배경

다수의 인문학자들과 페미니스트들, 문화비평가들이 모여서 한국 남성성에 대해 저마다의 의견을 논의한 핸드북.

이 책은 2015-2016년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속콜로키엄 시즌1~시즌3 내용을 토대로 구성된 것이다. 해당 연구소는 2007년에 설립되었으며, 학내 젠더 정책을 개발하고 여성학 연구 지원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본서에 따르면, 2017년 현재는 각종 콜로키엄과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백문임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장에 따르면, 2015년 이후로 남성성에 관련된 학내 콜로키엄이 청중의 호응과 높은 수요를 보였기 때문에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남성성은 곧 보편성으로 가정되어 왔으며, 그 보편됨에 대한 이의제기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만의 다수의 고유한 남성성들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그 문헌적 의의를 가진다. 특히, 이 책은 《 남성성/들》 에서처럼 남성성이 여러 종류이며 시간에 따라 변화해 갈 수 있다고 전제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책의 분석에 따르면 ① 1940년대 해방기에서부터 유신 정권에 이르는 기간을 패권적 남성성(hegemonic masculinity)의 성립 기간으로 분석할 수 있고, ② IMF 이후의 신자유주의 사회를 남성성의 균열 및 변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분야에서 젠더는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관점이 지배적이며, 젠더학계에는 남성적 젠더 표현에 대한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물론, 본서에서 직접 명시한 것은 아니지만, 남성성 연구자들에 따르면 패권적 남성성 역시 얼마든지 다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술의 목적은 명백히 남성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허윤(2017a)은 서문에서 본서의 기획 배경을 " 나쁜 남자 판타지" 라고 정리했다. 그에 따르면, 남성들은 여성들이 "나쁜 남자" 를 좋아할 거라고 가정하지만, 실상 나쁜 남자 캐릭터의 주 소비자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며, 이 사실을 모르는 남성들이 남성다워지기 위해, 혹은 동성사회적 친교의 수단으로 나쁜 남자를 내면화하여 여성에 대한 폭력을 학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사회는 다양한 사회적 변화를 겪으며 패권적 남성성에서 탈락한 남성성들이 결집하고 있고,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남성성의 문화적 구성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해외에서 유사한 남성성 서적으로 잭슨 카츠(J.Katz)의 《 마초 패러독스》 가 있고, 국내에서 한국인만의 남성성을 논의한 다른 책들로는 《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 한국, 남자》 등이 있다. 국내 담론의 한계점이 있다면 현재까지의 남성성 논의들은 대부분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남성성을 객체화시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남성성 논의는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즈 류의 일부 여성학자들이나 마스큘리스트들의 "위기에 처한 남성성" 이라는 한 축과, 페미니즘- 사회학-문화비평 분야의 " 패권적 남성성" 이라는 다른 한 축이 존재하는데, 본서와 함께 상기된 저서들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1.1. 공저자

공저자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소개된 학력은 출판 당시의 기준이다.

2. 목차


본서는 챕터마다 저자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제부터 각 장을 거론할 때에는 위에서 표기한 바와 같은 내주 인용 스타일을 따르기로 하겠다. 이 중에서 3장의 경우, 이미 학술지에 냈었던 논문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사례이며,[1] 따라서 학술지를 인용할 것이다.

3. 작가의 주장

본서가 전반적으로 남성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부 챕터들은 각 저자들의 관심사에 따라 논의주제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이런 챕터들에서는 남성성 자체를 논의하기보다는 남성성에 관련된 다른 이슈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예컨대 8장에서는 남성성에 영향을 끼치는 국가주의에 대한 사회구조적 분석을 다루고 있으며, 11장에서는 역사적 주체로서의 남성의 위치와 비체로서의 여성의 위치를 비교하는 전통적인 페미니즘 분석을 담고 있고, 12장에서는 루저문화라는 공감대를 나누는 남성들 간의 동성사회성에 대해 인터넷 농담을 중심으로 거론하고 있다.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몇 종류로 추려서 하단에 다시 챕터의 순서와 무관하게 소개할 것이다. 먼저 한국 남성들의 남성성이 어떻게 다변화되어 왔는지를 종류별로 설명하고, 특히 그 동안 잘 논의되지 않았던 성 소수자들의 남성성과 장애인 남성들의 남성성을 살펴본다. 다음으로 한국 남성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논의되는 주제인 군사화된 남성성을 언급한다. 마지막으로 본서에 대한 비판으로서 학계의 서평 몇 건을 인용하고, 본서가 남성성에 대해 갖고 있는 비관적 관점을 지적한 후, 기타 몇몇 비판점들을 정리할 것이다.

작가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3.1. 한국 남성성의 분화와 변화

본서가 남성성의 본질에 대해 어떤 관점을 견지하건 간에, 본서에서는 한국의 남성성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이 다양성을 파악하는 것 자체는 큰 의의를 가진다. 래윈 코넬(R.W.Connell)은 《 남성성/들》 에서 남성성이 복수라는 것을 이해하기만 하더라도 변화가 시작된다고 낙관하였는데, 실제로 여기서는 패권을 잡았던 남성성들과 잡지 못했던 남성성들의 많은 분류가 가능함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국내에서 나타나는 여러 남성성들을 본서에서 일부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중요한 것들 위주로 거론한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2장에서 허윤(2017b)은 서북청년단에서 일베저장소를 잇는 우익적 및 호전적 남성성을 제시한다. 이 남성성은 과거 1940년대의 해방 후 혼란기에서 이승만 정부에 이르는 시기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여 나타났다. 이 남성성은 "조국을 재건할 대한의 역군" 이라는 이름으로 추앙되었으며, 과감히 무력을 사용할 줄 아는 '건강함' 및 적들에게는 무자비한 '용맹함' 이 대표적인 가치라고 대중에게 찬사를 받았다. 이 남성성은 국가에 의해 콘트롤되고, 국가를 위해서 충실히 봉사하는 역할을 위해 청년의 혈기와 완력이 쓰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믿음의 소산이었다. 실제로 해방기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던 우파 정치단체들을 보면 청년 남성의 야성성에 호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다음으로 3장에서 류진희(2015)에 의해 언급되는 남성성은 탈/식민적 남성성이다. 이 남성성의 역사적 배경 역시 해방 후 혼란기이나, 그 기원은 일제강점기 식민화의 경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식민지 시절에 조선 남성들은 주로 언론이나 문학을 통해서 일본 제국에 저항해 보려 했지만, 대부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이들은 문약(文弱), 즉 펜을 가지고는 강해질 수 없다는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탈/식민적 남성성은 그 반작용으로 "맨몸으로 고국을 일구어내자" 는 육체 중심의 남성성을 띠게 되었으며, 이후 군사독재 정권에서 이를 받아들여서 아예 국가 차원에서 규범화해 버렸다는 것이다. 류진희(2015)는 이런 건설적이고 근면해 보이는 '대한의 건아' 남성성일지라도, 그 한편에는 그만큼 "방종하고, 허영심 많으며, 문란한 여성은 단속되어야 한다" 는 메시지가 확산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9장에서 부찬용(2017)은 중년의 남성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주문한다. 물론 기존에도 우리나라 특유의 중년기 남성성에 대한 논의는 늘 있어 왔으며, 이 시기의 남성성을 묘사하기 위해 흔히들 "고개 숙인 가장",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 같은 수사들을 동원해 왔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는 IMF로 인한 대량해고와 중산층 가정들의 광범위한 붕괴를 논의할 때 항상 강조되어 왔었다. 부찬용(2017) 역시 IMF 이후의 세태를 다루는 데서 논의를 시작하나, 90년대말~2000년대초 조폭 영화들의 범람에 대한 반작용이 나타났음을 추가로 설명한다. 2000년대 중엽부터 우리나라의 중년은 속칭 '나와바리' 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뭐라 정체성을 규정하기 어려운 신비함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찬용(2017)은 중년기의 남성성의 신비함이 사실은 '하드 바디' 와 '소프트 바디' 의 불안불안한 공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한민국 중년 남성들은 양복 혹은 군복으로 상징되는 하드 바디를 통해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외감을 주지만, 사실 한꺼풀 벗겨 보면 그 속에는 부드럽고 연약한 육체가 존재하여, 그것의 관찰자들에게 탐구욕과 분석욕을 불러일으킨다. 이 불안정한 공존은 마침내 하드 바디가 붕괴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 그에 따르면 이를 가장 잘 표상하는 영화배우가 바로 백윤식 씨로, 〈 지구를 지켜라!〉, 〈 그때 그 사람들〉, 〈 범죄의 재구성〉, 〈 타짜〉, 〈 싸움의 기술〉 에서 보듯이, 일견 초국가적이고 신비하거나 범접하기 어려운 캐릭터처럼 보였던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 그도 별 것 아니었다" 는 식의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부찬용(2017)의 제안은 중년의 남성성은 강한 겉과 약한 속의 공존이 자아내는 불안정성이라는 것이다.

10장에서 백문임(2017)은 현대에 들어 새롭게 변화하게 되는 남성성의 가능성으로서 브로맨스(bromance)를 거론한다. 브로맨스 장르가 대중문화에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현대에 들어 남성 간 사회적 관계( 동성사회성)와 성적 관계( 동성애) 사이의 엄격한 분리가 약화되어 왔으며, 이로 인해 남성 간에도 인간적 친밀함이 나타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부터 이런 분리가 약했던[2] 여성 관객들이 남성 캐릭터 간에도 동일한 유대감을 나누는 장면을 원했다는 점도 있다. 브로맨스라는 장르는 2005년 영화 〈 40살까지 못해본 남자〉 를 계기로 대중화된 미국 신조어에서 출발했는데, 〈알러뷰, 맨〉, 〈 행오버〉, 〈 신세계〉 등의 영화가 그 사례라고 한다.

브로맨스의 특징은 두 가지 + 이로 인해 발생하는 또 하나의 특징으로 정리된다. ① 서로가 이성애자라는 것을 전제하고 확인하며, 브로맨스 관계를 통해 이성애적 지향을 강화하므로, 동성애적 관계인 BL과 달라진다. ② 그럼에도 언뜻 동성애로 오인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이는 동성애로 오인 받는 행동을 금기시하는 동성사회성과 달라진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통해서, ③ 브로맨스는 성적 관계처럼 보이지만 성적 관계는 명백히 아니라는 모순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며, 인간의 성애적 지향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브로맨스에서 가치 있게 여겨지는 남성성은 그 캐릭터들이 정말로 "인간적" 이며 "진정성 있게" 동성 간에 대인관계에 임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으로, 이런 장르에서는 남성의 신체 역시 대상화(objectification)가 나타나는데, 람보 식의 패권적 남성성이 반영된 신체가 아닌, 무슨 옷을 입어도 "핏이 살아나는" 탄탄하면서도 매력적인 신체로 대상화된다고 한다.

유의 개념으로 버디물이 있으며 브로맨스는 버디물과도 달라지는 지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브로맨스는 서로 마주보는 장면이 많지만, 버디물은 서로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다는 것, 브로맨스는 가정적이지만 버디물은 사회적 성취와 관련이 있다는 것, 브로맨스는 버디물보다 멜로드라마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것, 브로맨스의 경우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더 많지만 버디물은 주로 남성 캐릭터들 위주로 내용이 진행된다는 것 등이 있다. 〈 친구〉, 〈〉 같은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백문임(2017)은 한국식으로 재해석된 브로맨스는 한 마디로 "의형제 맺기" 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결국 한국문화답게 나이와 서열에 기초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므로, 브로맨스 장르 역시 이를 반영한 변형된 형태로서 환원된다는 것이다. 남성 간의 서열과 위계를 확인하여 한쪽이 다른 쪽을 "지켜 주고", "교육시키고", "이끈다" 는 점에서는 오히려 버디물에 더 가깝다. 반면 〈 마이 웨이〉 처럼 서열을 무시하는 정통 브로맨스는 결국 국내에서는 실패하게 마련이라고 하며, 대개 의형제가 맺어지는 대상은 외국인보다는 북한 군인으로 설정된다고 한다. 백문임(2017)에 따르면, 이런 새로운 남성성의 양상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려면, 이것이 기존의 남성성에 대한 성찰과 변혁을 이끄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반대로 브로맨스가 만일 변화하는 대중적 수요에 적응하려는 시도일 뿐이라면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3.1.1. 보이지 않았던 남성들

국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남성성들을 논의할 때, 지금껏 수면 아래에 가려져 왔던 성 소수자들의 남성성과 장애인의 남성성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본서에서 김대현(2017)과 나영정(2017)은, 이런 주변화된 남성 집단들이 실천해 온 고유의 남성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이들 집단에게까지 다양하게 영향을 끼친 패권적 남성성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이런 제한적인 논점이기는 하지만, 4장과 5장은 이런 사회적 소수자 이슈에 대해 학술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4장에서 김대현(2017)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성 소수자들이 이해한 패권적 남성성의 권력 행사에 초점을 맞춘다. 그럼 왜 70년대 이후의 논의는 생략되었느냐 하면, 정부에서 1971년 일체의 소수자 관련 대중매체 묘사를 금지해 버려서(…).[3] 어쨌거나 이 시기의 성 소수자 문제는 매우 불명확하게 정의되어서, 게이 호모 같은 표현은 고사하고 그저 "성도착자" 로 싸잡아 불렸으며, 레즈비언이나 트랜스남성 같은 사람들은 그냥 " 남장 여자" 로 싸잡아 불렸다. 언론만 그런 게 아니라 본인들도 그렇게 정체화했기 때문에 세부적인 정체성 논의를 하는 게 의미가 없을 지경. 어쨌거나 이들 정체불명의(?) 소수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패권적 남성성을 이해했다. 예컨대, 첩을 들이거나[4] 가문에 대한 책임감을 어필하거나 생계부양을 도맡으려는 등의 젠더적 실천을 본받으려 하면서 자기들이 나름대로 젠더 규범을 따르려 했다. 이는 당시에도 이들이 참조할 수 있었던 패권적 남성성이 의미 있게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5장에서는 상이용사들의 남성성과 패럴림픽 영웅들의 남성성을 통해 장애인 문제와 연결시킨다. 여기서도 역시, 장애인들이 실천하는 남성성보다는,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이들의 남성성을 어떻게 이용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국내에서 상이용사 및 참전군인들은 흔히 "거룩한 희생, 애국심, 영광스러운 생명의 소유자" 찬사를 받으며 추앙 받곤 했지만, 실상은 반공주의 선전의 전시물로 이용당했을 뿐이었다. 이들을 통해 국가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는 남성이 되어라" 라는 남성성을 강화했다. 패럴림픽 역시 선의에서 시작했을지는 모르나 국가주의적 혐의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나영정(2017)은 패럴림픽을 통해 국가가 일부 장애인들에게 "너희들의 신체는 비정상이지만 그래도 특별히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해 줄게" 를 약속한다고 한다. 즉, 메달리스트들은 금메달 등을 획득함으로써 자신의 훼손된 남성성과 정상성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3.2. 군사화된 남성성

우리나라의 남성성을 논의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바로 군사화된 남성성으로서, 일제강점, 6.25 전쟁, 남북분단, 군사독재 등의 경험들과 엮어서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진중권(2007)이나 박노자(2014) 등이 "전국의 병영화는 비공식적 국시처럼 보인다" 와 같은 표현들을 동원하여 해병대 캠프 등을 거세게 비판했으며, 사회학자 오찬호 씨 역시 《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에서 해병대 캠프가 집필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상당량의 지면을 할애하여 한국 남성들 특유의 군사문화적 성격을 지적하고 있다. 멀리 본다면 국내의 사이버 젠더 전쟁의 효시라고 알려진 저 월장 사건 역시 군사화된 한국 남성들을 비판하면서 시작된 것이기도 했다. 결국, 한국 남성들을 이해하려면 징병제 예비군 문화, " 까라면 까" 같은 군대식 사고에 대한 이해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게 많은 논자들의 지적이다.

그런데 오찬호 씨가 지적했던 것처럼, 현대 한국 남성들은 군생활에 대해 이중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남성을 남성답게 사회화시키는 교육적 의미로서의 군대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다가, 또 한편으로는 남성들에게만 괜히 희생을 요구하는 억울한 고통이라며 군생활을 욕하는 것이다. 어쩌면, 오찬호 씨의 이런 의문점에 대해서 6장의 저자 조서연(2017)이 나름의 답을 내놓을 수도 있어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1999년 군 가산점 제도 폐지 사건을 기점으로 상황을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1999년 이전까지, "남성들은 전방에서 목숨을 내걸고 희생하고, 여성들은 후방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대신, 이 희생에 대한 보답으로 남성들은 사회로부터 다양한 보상을 받는다" 는 도식이 성립했다. 따라서 이때의 남성들은 군대에 다녀오는 대신, 그 대가로 사회적인 혜택이나 여성들로부터의 위안과 성적 서비스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99년 이후, 세상이 바뀌었다. 군 가산점 제도 폐지 후, 남성들의 고생스러운 시간을 갚아 줄 보상이 없어져 버렸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남성들 사이에는 "억울하게 끌려간다" 는 느낌이 만연해졌다는 것이다.

한때 군사문화의 여성 타자화는 여성들에게 성적 서비스를 강요하는 식으로 나타났지만, 현대에는 더 이상 남성들이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선진적 공교육을 통해서 그건 안 될 짓이라는 상식과 교양이 확산되었고, 사회가 점차 여성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 주는 쪽으로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이제 이 타자화는 "여자들도 고생 좀 해 봐야 한다" 는 쪽으로 나타난다는 게 조서연(2017)의 제안이다. 자신의 과거의 문헌을 들어,[5] 저자는 〈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 여군특집에서 이런 심리가 잘 드러난다고 한다. 문제는, 남성들이 여군특집을 통해 군대 경험의 가치를 부각시키면서도, 여성들이 정말로 군대에 다녀와서 그런 가치를 획득하는 것까지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여자들도 군대에 가서 고생하는 꼴을 보고 싶다, 하지만 그것을 통과의례로 삼아서 남자들과 동등해지는 건 허락하지 않겠다" 는 것이다.[6] 저자는 이것이 미디어를 바탕으로 분석한 것이며, 현실의 군사화된 남성성은 병역기피 사례에서 보듯이 미디어에서만큼 선망되지는 않을 수 있다고 선을 긋는다. 그럼에도 미디어 분석이 주효한 이유는, 그것이 이상적인 남성성의 요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런 군사화된 남성성이라도 과연 변화한다고 볼 수 있을까? 7장에서 김엘리(2017)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는 새롭게 하이브리드 남성성(hybrid masculinity)을 제시하며, 이는 근대의 군사화된 남성성과는 서로 대비될 수 있다. 기존의 군사화된 남성성은, 다양성을 지닌 개인들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집단에 소속되게 하며, 이를 통해 개인을 획일적, 위계적, 응집적, 균질적, 효율적인 존재로 만든다. 군사화된 남성성은 근대 이후로 패권적 남성성을 확대 재생산하고, 동성사회성을 강화한다고 여겨진다. 일각의 관점에서는 가히 만악의 근원으로 취급할 수도 있을 정도. 그러나,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전혀 다르다. 이것은 도시적, 현대적, 기술적, 자기계발적, 수평적, 소통적인 남성성으로, 기존에는 늘 타자화되고 비체(abject)화되었던 여성성의 특성을 취하여 남성 정체성을 구성한다. 현대사회에서 종종 거론되는 메트로섹슈얼(metrosexual)[7] 이나 위버섹슈얼(ubersexual)[8]이 바로 그 사례라는 것이다.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버락 오바마의 리더십으로도 잘 표상되며, 이라크 전쟁 당시 군인들이 보여준 탈근대적 모습들, 예컨대 현지 주민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거나 현지 소녀에게서 꽃을 건네받고, 민간인 사상자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 또한 이에 해당된다. 근대 시절의 군인들로서는 상상도 못 할 "계집애 같은" 종속적 남성성의 모습들이 이제는 아름답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위의 브로맨스와 유사하게도,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초콜릿 복근과 같이 남성의 몸도 성적으로 재현할 수 있으며,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의 논리에 따라 남성에게도 몸을 가꿀 것이 요구된다.[9] 이런 자기계발의 풍조는 물론 신자유주의 사회에 들어서면서 강조된 것으로, 래윈 코넬 역시 신자유주의가 종속적 남성성에 대한 거부감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예견했던 바 있다. 그 외에도 군인상이 이처럼 변화하게 된 데에는 여러 사회적 환경이 동시에 작용했는데, ① 징병제에서 지원제로의 전환, ② 백병전에서 정보전으로의 전환, ③ 인도주의적 군사외교의 확대가 거론될 수 있다. 김엘리(2017)는 이러한 변화가 타자와의 관계를 맺는 방식의 변화로까지 이어진다면, 그때는 정말로 전쟁, 폭력, 남성성의 연결고리가 깨질 것이라며 낙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이 여성성의 단순한 차용에 그칠 경우 이는 소비사회의 한때의 유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결국 젠더 권력의 불평등을 거짓으로 가리게 된다고도 우려한다.

4. 비판

4.1. 학계의 반응

먼저 학계에서 소통되는 서평 두 건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소속으로서 한국 근대사 전공자인 이정선(2018)은,[10] 이 책이 역사학 서적은 아니지만 역사학적인 접근방식을 공유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본서의 1장에서 국문학 교수인 김영희(2017)가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를 들어서 전근대 사회의 여성혐오를 설명한 것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다. 왜냐하면, 전근대 사료를 들어서 여성혐오의 ' 원죄' 가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여성혐오의 심각성을 강조하기에는 그럴듯할지 몰라도) 가부장제가 인류 보편적이고 역사적으로 불변하는 것이라는 비역사적 접근으로 회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 이정선(2018)은 역사학자로서, 근현대 젠더 규범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점에 존재했던 우리 민족만의 성 담론과 실천들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와 같은 관점은 여성혐오가 실상은 근대의 산물이라는 우에노 치즈코의 관점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4장을 저술하여 남성성에 대해 이미 논의했던 경력이 있는 엄기호(2017)의 서평이 있다.[11] 그에 따르면, 본서 서두의 몇 개의 챕터들을 한데 묶는 키워드는 다름아닌 "비장미" 가 될 것이라고 한다. 해방기 및 군사독재 시절의 우리나라의 패권적 남성성은 "가진 것 하나 없는 맨몸으로 나라를 위해 분연히 들고일어나 제 한 몸 바치는 의로운 희생" 이라는 비장미를 품고 있다는 것. 어디서 갑자기 60년대 TV 남성 앵커 목소리가 들려도 기분 탓이다. 문제는, 이것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혐오 문화는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희화화하고 기꺼이 망가지는 방식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데, 이런 남성성의 변화가 많은 챕터들에서 반영되지 않았다고 그는 비판하였다. 특히 11장에서 오혜진(2017a)은 한국 남성들이 오늘날까지도 근현대사의 덧없음을 비장하게 회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는데, 엄기호(2017)는 이런 제안들이 일베저장소 류의 남성성은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반대로, 그는 12장의 김학준(2017)의 분석을 칭찬하면서, 혐오발언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이라고!" 의 식으로 대답하는 경향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엄기호(2017)는 또한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한국 남성들의 ' 아비투스' 에 대한 문화연구를 하려면 이제는 문예 텍스트를 분석할 게 아니라 남성들의 일상으로부터 탐색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문예 텍스트는 남성들의 삶을 서사적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결국 서사의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는데, 오늘날 남성들의 일상은 그런 서사를 "조롱" 하는 방식으로 서사화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문예 텍스트와 같은 재현 매체들의 패권은, 심지어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종언을 고한 시대" 가 되었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 에 갇히지 않은 문화연구"(이상 p.404)라고 말함으로써, 문화비평가들의 현대사회 분석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4.2. 남성성을 죄악시함

많은 국내외 남성성 관련 문헌들을 보면, 하나같이 언급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성성은 정상성으로 여겨져서 문헌이 부족하다" 는 것으로, 본서에서도 서문에서 이미 백문임 연구소장이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며, 도서관에서 여성성에 관련된 책들을 찾아보면 서가의 몇 칸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남성성에 관련된 책들은 서가 맨 아래쪽 한 칸도 다 채우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남성이 무엇이며 남성이 남성답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나마 존재하는 문헌들의 메시지 중에서 "남성성은 전부 유해하다" 식의 주장이야말로 가장 일차원적인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Toxic Masculinity' 담론은 젠더학계의 남성성 연구자들이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공공연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실제로 그나마 남성성의 다양성을 이론화했다고 평가되는 《 남성성/들》 이나, 국내의 남성성 관련 문헌인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에서도 (패권적) 남성성이 마치 만악의 근원처럼 묘사되었다는 비판이 가해지기도 했다.[13] 이런 활동은, 그것이 단지 자기들의 공격대상에 대해 이름붙이기를 해서 식별하려는 것일 뿐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단순히 욕할 대상이 필요해서 남성성을 연구한다면 그것 자체로도 굉장히 병적인 접근이 되고, 만에 하나 그것이 그 분야 연구의 과반수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가 된다.

하지만 남성성은 알려진 바와 같이 매우 다양하고, 변화 가능하며, 때때로 전복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이 문서의 'take-home message' 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유념하면서 남성성에 관련된 문헌들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남성성 문헌을 읽을 때에는, 남성성 내부에 다차원적이고 동적인 속성이 탐지되고 있는지 찾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남성성이 단일한 부정적 속성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가능성을 찾으려는 논의는 남는다. 여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주변부로부터의 기획(planning)과 실천(practicing)이 언급되고 있는지, 어떤 대안이나 탈출구가 제시되어 있는지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14] 이런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남성성이란 곧 인류의 폐기물 내지는 말살해야 할 무언가가 되고 만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하술될 몇몇 챕터를 제외하면, 본서는 남성성을 문제시하고 죄악시한다는 점에서 뚜렷하게 그 한계를 드러낸다. 남성이 남성 그 자체이기에 충분히 이슈가 된다는 식의 일관된 논조는, 남성성이 곧 골칫거리이자 문젯거리라는 공통된 인식이 저자들 사이에 (그리고 예상 독자들과도) 공유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짧게 말해 이 책이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을 바라보는 시각은 "저놈들 정말 연구대상이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는 학술연구의 맥락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불평등 문제, 다시 말해 연구를 명목으로 연구자가 연구대상을 타자화하고 사물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서에서 남성성의 다양성과 가능성에 대한 고찰이 누락 혹은 생략된 사례는 다음과 같다.

반면, 남성성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직접적 고찰이 포함된 사례도 일부 있다.

또한, 몇몇 챕터에서는 남성성의 다양성에 대한 직접적 고찰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본서의 상당수가 마치 남성성을 잡아죽여야 할 무언가(…)로 취급하는 듯한 의심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일부 (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이상의 비판에 대해서 "남성성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은 남성성의 알리바이다, '눈물겨운' 변호다!" 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으로 뒤집어서 본서의 공저자이기도 한 손희정(2017)이 즐겨 쓰는 표현을 동원할 수도 있겠다. 왜 유독 남성성에 대해서만큼은 "외부를 상상" 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사실 이런 'Toxic Masculinity' 메시지는 본서의 부제인 "혐오사회에서 한국 남성성 질문하기" 에서부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작금의 여성혐오에 대해 책임져야 할 누군가 내지는 무엇인가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책임을 묻기 위해서 남성성의 유해함을 본서에서 지목하려는 것이다. 결국,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책을 썼으니, 그 타깃이 여러 개라고 논의해 버리면 또 다시 책임소재가 모호해지게 된다. 이런 집필동기는 남성성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지나치게 평가 절하할 수 있으며, 남성성의 본질 그 자체에 대한 공통적 가치판단을 암묵적으로 유도한다. 물론 남성성의 다양성은 남성성의 획일성에 비해서 인식론적으로 좀 더 부담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페미니즘 배경의 연구자들은 여성성의 젠더적 실천의 다양성은 어렵지 않게 인식하면서도, 남성성의 젠더적 실천의 다양성은 유독 인식론적으로 힘겨워하는 경향을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나올 수 있다.

4.3. 기타 의문점

우선 3장에서, 애석하지만 류진희(2017)의 글은 학술적 글쓰기의 관점에서 보면 '구조 수준에서' 썩 잘 쓰지는 못한 글에 속한다. 가독성은 좋지만, 전반적인 글의 얼개가 뭔가 잘못된 듯한 인상을 준다. 저자는 p.100에서의 언급에 따르면 탈/식민 남성성과 개발주의적 남성성을 새롭게 고려할 두 축으로 제시한 것으로 보이나, 본문에서는 전자는 논의하되 후자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누락하였다. 즉, 결론 파트에서 개발독재라는 새로운 논제가 갑작스럽게 등장함으로써 아직 해방기 이야기에 머물러 있는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게 된다.

다음으로 6장에서도 의문이 드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 장에서 조서연(2017)은 〈 태양의 후예〉 드라마에 얽힌 논쟁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 드라마가 군사주의적이라는 몇몇 비판이 "애매한 지점" 이 많음을 인정하며(p.165) 다른 지점에서도 "억측에 가깝겠지만"(p.166)이라거나 "온당하지 않다"(p.168)고 회의하면서도, 한겨레 기고문에 실린 주요 논리들을 여럿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설득력 없는 주장을 왜 굳이 2페이지 이상의 지면을 할애하여 장황하게 실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른다. 몰입해서 읽던 독자들의 기운을 빠지게 할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학술적인 글에서는,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굳이 소개해야만 하는 이유가 제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성들이 군사주의 문화의 강화에 동참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나, 우선 이 작품이 군사주의 문화를 선전함을 입증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12장에서 김학준(2017)이 인터넷 유머 코드의 잠재적 요인을 개드립 어그로의 두 축으로 설명한 것은 통찰력이 있다. 그러나, 일베 구 주갤에서 통하는 개드립, 어그로의 유머 코드가 "인터넷 커뮤니티 전반에 걸친 문화적 의례"(p.284)라고 볼 수 있는가, 그런 유머의 소비가 인터넷 전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한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질타하는 이들"(p.295), 즉 (저자가 빌려온 표현에 따르면) ' 씹선비' 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에 대해 답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했던 일베 세월호 어묵 사건은 어째서 논란이 되었고, 일베는 어째서 사이버 세계에서도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았던 것일까? 일베의 문제를 사이버 공간 전반의 문제로 일반화하려면, 일베의 문제적 속성이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문제시되지 않은 채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12장은 오히려 일베의 비정상적인 영향력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능성도 제기할 수 있다.

13장에서 최태섭(2017)은 게임업계에 만연한 여성혐오 성향을 드러내기 위한 예시로서 서든어택2의 선정성을 들고 있다. 그런데, 그 선정성에 대해 남성 게이머들 역시 항의에 참여했다는 점은 본문 중에서 누락하였다. 그 결과 전후문맥 상 마치 여성들은 섹스어필에 대해, 남성들은 게임적 완성도에 대해 제각기 다른 포인트를 두고 비판했다는 식으로 읽힐 여지가 생겼다. (최악의 경우, 본문이 그렇게 읽히도록 저자 본인이 인위적으로 텍스트를 배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저자에 따르면 서든어택2의 서비스 종료를 "여성 소비자들이 적극 항의한 것으로 효과는 주효"(pp.307-308)했다고 설명하나, 이 서술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게임산업이 표준적인 소비자를 10대에서 30대까지의 남성으로 상정" 했기에 "회사들 입장에서는 여성들의 항의와 문제 제기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p.308)다는 서술과 상반된다.

또한 상단에서 잠깐 언급한 것으로, 최태섭(2017)은 남성들의 행동에 대해서 가치판단적으로 오도하는 형용사들을 자주 동원하며, 이는 논의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일 수 있다.[15] 물론 사이버공간의 남성들에게 비판이 가해져야 할 지점이 있다면 여기에는 가감없는 비판이 분명히 가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흥분한 수사들은 논의를 건설적으로 이끌기보다는 도리어 악화시킨다. 이런 적나라한 표현들은 학술문헌의 일부로 취급되기도 어려운 표현들이고, 그렇다고 사회운동가의 대자보라고 보기도 어려운 글이다. 오히려, 이것은 젠더전(戰)에 임하는 어떤 '장군' 이 휘하 넷페미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쓴 격문에 가까워 보인다.

저자가 결론에서 "오늘날의 남성청(소)년을 (예비) 범죄자나 이해할 수 없는 괴물로 바라보는 것은 이들이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p.324)이라고 신중하게 말한 것과는 달리, 본론에서 저자의 전반적인 논조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괴물로서의 남성" 을 지목하고 있다. 본서에서 저자가 동원했던 표현에 따르면, 온라인의 남성들은 강박적이고, 인지부조화에 빠져 있으며, 은밀한 욕망에 동기화되고, 신경질적이며, 폭력적이고, 유아적이며, 과시적이고, 보는 이를 황당하게 하며, 가녀린 믿음에 지배당하고, 십자군과 같으며, 비겁하고, 비이성적인 인구집단이다. 이런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대화와 타협을 하자는 점잖은(?) 제안이 저자 스스로 보기에도 대관절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최태섭(2017)의 본 문헌이 서구의 남성성 개혁 운동가들인 마이클 킴멜(M.S.Kimmel), 패트릭 홉킨스(P.D.Hopkins), 토니 포터(T.Porter) 등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이 사람들은 남성에 대한 따뜻한 연대의 시선을 견지하면서, 남성들에게 변화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예컨대 국내에는 《 맨박스》 의 저자로 유명한 토니 포터의 경우, 자신의 저서들과 강연들을 통해 "우리 선한 다수 남성들의 힘으로 악한 소수 남성들을 물리치고 여성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 고 호소한다. 그러나 최태섭(2017)의 문헌을 읽다 보면, 행간에서 마치 사이버공간의 남성들을 불가해한 타자로서의 존재로 취급하는 듯한 전제를 발견하게 된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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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류진희. (2015). 무기 없는 민족의 여성이라는 거울. 문화과학, 83, 48-61. [2] 이를 다른 말로 레즈비언 연속체(Lesbian continuum)라고도 부른다. 요컨대, 여성 간의 친밀한 동성사회적 관계는 레즈비언 간의 성적인 친밀감과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 여성학자 이브 세지윅(E.K.Sedgwick)은 레즈비언 연속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은 권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동료 여성과 유대감을 쌓기보다는 남성과 유대감을 쌓는 편이 더 이익이므로 레즈비언 연속체를 발견하기 힘들 것이라고 본다. [3] 이는 10월 유신 직전에 공포된 "퇴폐풍조정화세부시행계획" 의 일환으로서, 이 이후부터 90년대 즈음에 이르기까지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의 비규범적 젠더에 관련된 공적 언론보도나 문헌들이 아예 싹 증발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개인적 구술 정도야 가능하겠지만, 소수자 연구에 있어서는 거의 암흑시대나 다름없게 된 것. [4] 이건 실제로 당시 한 레즈비언 커플 사이에 있었던 실화라고 하며, 한 쪽이 몰래 첩을 들이는 바람에 다른 쪽이 칼을 들고 쫓아가서 찔러죽였던 사건이다(…). [5] 조서연 (2015). '진짜 사나이'와 '여자 군인', 신자유주의 시대의 젠더화된 군사주의. 문화과학, 83, 122-141. [6] 조서연(2015)은 여군특집에서 가장 뛰어난 성취를 보인 여성 출연자들이 하나같이 "남자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줄은 몰랐다", "이런 생활을 매일같이 하다니 남자들은 정말 대단하다" 는 발언을 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장면을 들고 있다. 군복무가 남성들 말처럼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라면 여성들도 그런 고생스러운 경험을 통해 그 시민성을 획득하는 것이 온당하겠지만, 그 경우 남성들은 더 이상 그 '대단한 존재' 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여성들은 그 고생을 맛보기만 해 보고 남성들의 고생을 인정해 주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7] 《인디펜던트》 에 마크 심슨(M.Simpson)이 1994년에 기고한 칼럼에서 유래했다. 도시적이고 세련되며 스스로를 잘 관리하는, 감수성 많고 외모 반듯한 남성을 지칭한다. 이는 2000년대에 인기를 끄는 신조어가 되었으며, 대중적인 의미의 꽃미남이나 훈남과도 의미가 통한다. [8] 메리언 살츠먼(M.Salzman) 등이 《남자의 미래》 에서 제시한 신조어로, 남성의 전통적 강함을 유지하면서도 여성적 소통방식을 가진 남성들을 말한다. [9] 예컨대, 근대의 패권적 남성성은 남성의 비만에 대해서도 "남자가 배 좀 나올 수도 있지, 남자 배는 인격 배야" 라며 정상 범주에 넣었다면, 탈근대의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어휴, 대체 얼마나 나태하고 무능한 등골 브레이커길래 저렇게 파오후가 되는 거야?" 라는 반응이 나오게 만든다. 이것이 군사화된 남성성에서 나온 논의라는 전후맥락을 고려한다면, 똥배가 나온 군인과 복근 있는 군인 중 어느 쪽이 더 환영받을지 생각해 보면 쉬울 것이다. 전투력이야말로 군인들이 가장 자기계발을 해야 하는 덕목이기 때문. [10] 이정선. (2018). 그런 페미니스트/남자는 없다!. 역사문제연구, 39, 405-419. [11] 엄기호. (2017). 한국 남성성의 미학의 변화. 황해문화, 97, 398-404. [12] 보기에 따라서는, 1장, 8장, 9장, 10장, 11장처럼 문예비평 분야에서 사회분석을 하려는 시도를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차단하려는 학문 간의 영역싸움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13] Demetriou, 2001; Jefferson, 2002; 오혜진, 2017b. [14] 대개 이런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성 소수자 담론이나 교차성 담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패권적 남성성을 버리고자 하는데 자신이 그 대신에 의지할 대안적 남성성이 전혀 제시된 바 없다면, 그들의 노력은 처음부터 무의미한 것이 된다. [15] 예컨대 "강박적이고 자의적인 주장", "적극적으로 인지부조화를 '선택' 한 것", "가장 은밀한 욕망"(이상 p.311),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인 대응"(p.312), "유아적인 형태의 논리로 퇴행", "폭력의 과시행위"(이상 p.313), "가장 황당했던 것", "가녀린 믿음이 이 남성 사이버 전사들의 머릿속을 지배"(이상 p.315), "수많은 자경단과 십자군들", "이 비겁한 자들의 행렬"(이상 p.317), "비이성적인 행렬"(p.324)과 같은 표현들이 있다. [16] 이듬해 벌어진 YES24 한국 남성 비하 마케팅 사건에서 그는 " 애니프사" 라는 표현을 멸시의 의미로 활용했는데, 사실 이 역시 남성성을 연구하는 논객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피상적인 시각이다. 왜냐하면 가칭 " 오타쿠 남성성" 은 종속적이면서도 공모적이고, 그와 동시에 주변화된 남성성이라고 볼 수도 있는 꽤 특이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 애니메이션 좋아하는 남성' 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남성성의 어떤 독특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닌, 그저 '찌질함' 에만 꽂힌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