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관련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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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법률상으로는 죽음으로 인정되지 않으나, 의학계에서는 죽음의 기준으로 봄. | }}}}}}}}} |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인 진시황릉[1]
이집트 피라미드 중 가장 규모가 큰 쿠푸의 대피라미드[2].
세종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英陵).
1. 개요
송장이나 유골을 땅에 묻어 놓은 곳. 즉, 죽은 사람이 묻히는 장소. 흙으로 둥글게 쌓아 올리기도 하고 돌로 평평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대개 묘석을 세워 누가 안장되어 있는지 표시한다. 묘석에는 고인과 그 배우자의 생년월일과 사망일자, 가족관계가 주위에 한글이나 한자로 적혀 있다.현대에 잘 쓰이지 않지만, '뫼'라는 동의어도 있다. 단독으로 '뫼'만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묏자리'나 '묏등' 같은 표현은 드물지 않게 쓰이는 표현. 한자로는 묘(墓), 묘지(墓地), 산소(山所)[3], 구묘(丘墓), 구분(丘墳), 구총(丘塚), 만년유택(萬年幽宅), 분영(墳塋), 유택(幽宅), 총묘(塚墓) 또는 분묘(墳墓)[4]라 한다. 문장 내 주어의 입장에서 조상들의 묘는 따로 선영(先塋) 또는 선묘(先墓)라고도 부르며, 이러한 선영들이 모여 있는 산을 '선산(先山)'이라고 한다. 묘가 대량으로 모여 있는 지역을 공동묘지라 부른다. 세는 단위는 장, 기(基), 자리 등이다.
근대기에는 '무덤'이 아닌 '묻엄'으로 쓰인 적도 있다. 백범 김구의 처인 최준례 여사의 묘비명에 묻엄이라고 되어 있다. 사실 '무덤' 자체가 어원적으로는 '묻다'의 어간 '묻-'을 어근으로 하고 '-엄'이라는 접사를 붙인 파생어이므로 (발음은 '무덤'과 같다 하더라도) 원형을 밝혀 쓴 '묻엄'이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엄'은 '-이'나 '-(으)ㅁ'과는 달리 일부 어근에만 붙는 비생산적 접미사이기에 원형을 밝힌 '묻엄'이 아니라 발음대로의 표기인 '무덤'을 표준 표기로 정한 것.[5]
사람에 의한 도굴ㆍ 방화ㆍ 부관참시, 멧돼지ㆍ 뱀 등 야생동물들로 인해 무덤이 훼손된 채 방치되는 사례들이 뉴스와 신문에 보도되고 있는데,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관리하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2. 지역별 인식 차이
죽음, 혹은 시신을 상징하는 무덤은 영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문화권에서 무덤을 딱히 혐오시설로 인지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에서도 반드시 무덤을 멀리 떨어뜨려 놓고 기피하는 풍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교에서는 죽은 사람을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멀리 해서도 안 된다는 원칙이 있어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나 바로 옆에 묘지를 조성하지 않지만, 그래서 이 기준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가까운 마을 뒷산 같은 곳에 묘를 많이 썼다.[6] 산 곳곳에 중구난방식으로 산소가 조성된 경우가 보통이다. 이 경우 산소조성 당시에는 길이 닦여있어도 수십, 백여 년 지나면 수풀이 우거져서 길이 사라지는 일도 흔해서 꽤나 찾아기기 힘들어진다. 한국에서는 직계 조상들의 묘( 무덤)를 따로 산소( 山 所)라고 하며 조상들의 무덤이 자리한 산을 '선산'이라고 부른다. 또한 선산에서 지내는 제사를 '묘제'라고 부르며, 경상도에서는 '묘사'라고도 부른다. 山이라는 한자가 우리가 흔히 아는 산의 뜻이 아닌 무덤을 뜻하기도 하고 산에 묘를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요즘도 한국 농촌에 있는 주택들을 차 타고 지나가다 보면, 아예 묘지가 집 바로 뒷쪽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걸 가끔 볼 수 있다.죽은 조상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조상들의 무덤이 가까이 있는 것을 선호하는 문화권도 꽤나 있다. 심시티 4에서는 도시가 어느 정도 커지면 공동묘지를 지을 수 있는데, 한국인들은 당연히 주택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무덤을 건설했지만, 나중에 공략에 따르면 주택 가까이 있는 곳에 지어야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수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서양에서는 마을별로 묘지를 지키는 사람이 한명은 있었는데 의사들이 시체를 훔쳐가 카데바로 썼기 때문이다. 물론 주로 사회적 소외계층의 무덤가만이 노려졌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 의사들은 중산층들의 묘마저 노렸고 의사폭동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전 세계에도 주택가 옆에 떡하니 공동묘지가 있는 경우가 꽤나 있다. 이 경우는 무엇인가 하면 먼 과거에 마을이 작았던 시절에는 이 공동묘지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나중에는 마을이 공동묘지를 감싸버린 형태가 된 것이다. 좀비물에서 공동묘지에서 좀비가 깨어나면 얼마 뒤 도심 한복판이 좀비로 가득 차는 게 이상한 게 아닌 것.
사실 유럽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문화권이고, 중세 이래로 마을이 그 마을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마을 주민이 사망할 경우 교회 묘지에 묻히는게 당연한 것이었다. 마을의 중심이 되는 본당이 동네 한복판에 있는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그때문에 아직도 공동묘지가 거주지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무덤이 거의 대부분 평평하게 되어 있는데, 산악 지대가 별로 없고 평야 지대가 많아서 많은 흙과 풀들을 쉽게 구해올 수 없기 때문에 봉분 없이 무덤을 만든다. 그러나 미국의 부유층들은 자기 조상님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함과 동시에 자기 조상님들의 시신 훼손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 돌과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무덤을 크게 만들기도 한다. 보통 공동 묘지라면 비석이나 추모 석판이 숙연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나라는 생각과 달리 무덤을 중심으로 주위에 산책로가 준비된 공원같은 분위기인 곳도 많아서 마을 주민의 조깅 코스가 되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유럽 문화의 직접적 영향이 강한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역 한정이며, 미국도 대다수 지역은 인구 밀집지대와 무덤이 멀리 떨어진 경우가 많다. 개신교와 유대교도 무덤을 부정한 공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산악 지대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그 많은 흙과 풀들을 쉽게 구해올 수 있기 때문에 봉분을 충분히 쌓아 무덤을 만든다. 또 중국의 경우 미국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된 나라이다보니, 새 왕조들이 세워질 때마다 역대 군주들의 시신을 모신 무덤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일부러 묘지를 매우 크게 만들어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도록 했다.[7]
프랑스의 경우 더 심해서, 파리의 몽파르니스 지역을 비롯해 여러 곳이 공동묘지를 공원 비슷하게 운용한다. 역병이 창궐하던 시절 죽은 선인들의 뼈를 깨끗하게 씻은 뒤 본래 고대 로마 시대에 탄광으로 사용됐던 지하 통로를 공동묘지로 용도변경하여 차곡차곡 쌓아뒀는데, 이게 현대 시점에서 상당히 그로테스크 하다. 자세한 것은 카타콤 항목으로.
호주인도 묘지를 혐오시설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묻힌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인데, 유령이 되더라도 도움을 줬지 해를 끼치진 않을 거라는 것. 하지만 이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무덤을 완전히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덤은 기본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관련된 괴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다만 워낙 오랜 기간 동안 무덤이 마을과 주변에 형성된 것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있는 것. (+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특별히 비참한 죽음이 아닌 이상 '죽음 자체'가 무서운 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천수를 다 누리고 자연사하는 비율이 오히려 적었고, 더 이전엔 맹수의 습격이나 당시 기준의 불치병 등 끔찍한 죽음이 자연사보다 오히려 더 흔했음을 생각하면.)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흔히 모스크 옆에 위치한 무덤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쪽 동네에서는 왕이나 성자, 고위 성직자의 무덤을 아예 집처럼 지어서 그 안에 관을 안치하는 식으로 만들기도 하며 여기에서 기도하려는 방문객으로 붐비기도 한다.[8] 예언자 무함마드는 죽은 이에 대한 기도를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했지만 시아파가 성자 숭배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을 깊게 받은 튀르키예, 이집트 쪽은 그냥 신경 안 쓰는 중. 튀르키예에서는 오히려 죽은 이를 참배하기 편하다며 모스크 안에 공동묘지를 만들기도 하고, 지금도 고인이 죽은 날에는 고인의 무덤을 찾아서 꽃다발을 바치고 죽은 이에게 쿠란을 읽어주거나, 짤막한 기도를 올리는 풍습이 있다. 물론 튀르크 민족 고유의 풍습이라, 이를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제도권 이슬람에서는 썩 달가워하는 전통은 아니다. 당장 잘랄 웃 딘 루미를 비롯한 성인의 무덤에 가면 튀르키예 종교부 이름으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거나, 묘소의 나무에 소원쪽지를 매달거나, 맑은 물을 떠놓고 기도하거나, 동전을 던지는 행위는 우리 종교의 전통이 금지하는 우상숭배 행위이자 미신이므로 엄격히 금합니다." 라고 써놓은 공지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래도 할 사람들은 한다.
반대로 유대인은 무덤이 가까이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도 보면 알겠지만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시신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게 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굴에 넣고 바위로 막아서 부정타지 않게 했을 정도며, 현재도 이스라엘의 공동묘지는 외딴 사막지역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비상시에는 훌륭한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매장을 했지만, 불교의 영향력이 강력해진 고려 시대에는 주로 화장을 많이 하였다.[9] 그러던 것이 유교의 영향이 강해진 조선 시대에는 다시 매장으로 바뀌고, 풍수지리의 영향 역시 강하게 받으면서 무덤의 위치가 산으로 올라가게 된다. 무덤의 위치 자체가 으슥한 곳으로 바뀌고 일상 공간에서 먼 곳으로 변경된 점이 무덤에 대한 공포심을 증가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아직도 승려가 죽으면 화장을 한 후 부도( 승탑)를 만들어 절의 입구 같은 곳에 안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대중들이 별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인식에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무덤이 무서워서 멀리 떨어진 건지, 무덤이 멀리 떨어지다 보니 무섭게 된 것인지는 연구해 봐야 할 일. 이후 일제강점기에 화장이 다시 생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매장이 대세였고 대한민국에서도 1990년대까지는 유교와 개신교의 영향으로 매장이 대세였지만[10][11] 이 때문에 묘지들이 차지하는 면적이 크게 늘면서 198~90년대에는 '이렇게 묘지들이 늘어자면 미래에는 전 국토가 묘지가 될 것'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는 주장도 나왔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다시 화장이 대세가 되면서 이런 주장은 많이 수그러들었다.
한국에서 무덤이 영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 중 하나가 경부고속도로의 영락IC. 영락공원 설립당시 지역주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를 냈다. 이에 따라 부산영락공원으로 들어가는 차량진입로도 자동차전용도로 취급을 받는 편. 보행자와 이륜자동차는 팔송에서 금정도서관로를 통해 들어갈 수 있지만 장례 관련 차량들은 무조건 고속도로를 타고 들어가야 된다.
북한은 2019년 이전까지는 매장이 대세였으나 김정은이 묘지 부족을 사유로 매장 금지령을 내려서 2021년 현재 화장만 가능하다. 기사
어떤 나라든 무덤을 이전하거나 국가적 사료가치로 인하여 발굴할 때는 유족이나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하며 한국같은 경우는 무덤을 발굴 할 때는 발굴을 시작하기 이전에 제를 올려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을 치른 다음 발굴을 시작한다.
과거에는 무덤에 부장품을 묻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은 무덤에 부장품을 묻지 않는 경우가 많다.
3. 사료적 가치
고대사에서는 오래된 무덤인 고분(古墳)이 지역사,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종 권력자들이 자신이 죽을 때 자신의 소지품 혹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같이 묻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무덤 양식(묘제)의 변화를 지겹게 외웠던 것도 사실 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연히 이런 무덤엔 각종 비싸고 희귀한 물건도 많이 묻혀있고, 무덤을 파서 이런 물건을 훔치는 사람을 도굴꾼이라고 한다. 특히 무덤에 묻혀있는 물건들이 굳이 귀금속같이 엄청 비싼게 아니어도 그곳에 묻혀있는 과거의 편지나 의복 등은 왕릉같이 호화로운 왕족이나 귀족의 삶이 아닌 당시의 서민들의 생활상을 제일 밀접하게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예컨데 요즘 조선 시대의 무덤을 발굴할 때 조선 중기나 근세 때의 한글편지가 발굴되어 한글 창제 이후 한국어와 한글의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12] 이 뿐만 아니라 장례식을 어떤 형식으로 했는지 당시 입던 옷이나 당시의 풍습을 확인할 수 있다.[13] 편지같은 경우, 양반이나 좀 부유한 서민 무덤에 한정된다. 왜 그런가하면 보통 백성들은 거의 몸만 묻어주는 게 많다보니 글이 적혀진 기록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그렇다고 보통 백성 무덤은 무시당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당시 옷재질이 어땠는지 죽은 시신을 부검하여 그땐 뭘 먹었는지 그 시대 생활상 연구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특히 무덤을 만들 때 주위에 생석회를 들이부어 만드는 조선시대 이후 묘제에서는 석회가 물과 반응하면서 고열이 나서 관속을 멸균하는 효과가 나고, 시신이 수백년을 썩지 않고 버티는 미라 상태가 되기도 한다. 400년 이상 된 파평윤씨 유해(미라)가 유명하다. 미라 항목으로.
다른 이야기인데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미라 같이 된 시체가 발굴되었는데 약 4, 5천 년 전 쯤에 누구에게 활을 머리에 맞고 살해당한 남성의 시체로, 발견지의 이름을 따 " 외치"라고 불린다. 이런 시체조차도 부검을 통하여 당시 버섯에서 여러 식물과 새고기 같은 것을 먹었고 신을 묶는 끈이라든지 소지품으로도 당시 생활상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적어도 몇백 년 된 무덤의 가치는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묘제는 그 문화권의 사후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생활상은 서구화되었지만, 무덤의 형식만큼은 여전히 전통적인 봉분이며 화장, 수장, 빙장 등 자연장의 전파도 그다지 빠르지 않다. 세계화된 현대도 그런데 고, 중세라면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무덤의 양식과 그 부장품은 고고학적으로도 그 문화의 계통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역사고고학, 고분문화 문서를 참고하길 바란다.
4. 무덤의 등급
능(陵) | 황제, 황후 | 국왕, 왕후 |
원(園) |
황태자,
황태자비 대원왕[14] |
왕세자, 왕세자빈 |
황제를 낳은 후궁 | 국왕을 낳은 후궁[15] | |
묘(墓) | 후궁 | |
친왕, 친왕비, 공주 |
대군, 공주 왕자, 옹주, 군부인 대원군, 부대부인 |
|
폐위 황제, 폐위 황후 | 폐위 국왕, 폐위 왕비 | |
일반인 |
중국에서는 '림(林)'도 있는데, 공자나 관우 같이 성인(聖人)격으로 보는 인물의 무덤을 공림(孔林), 관림(關林)으로 부른다. 한때 중화제국 황제를 칭했던 위안스카이의 무덤도 원릉이라고 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원림'(袁林)으로 타협을 봤다. 그리고 일부 정치 지도자들의 무덤도 능, 또는 능원이라 부르는데 쑨원의 중산릉, 장제스의 자호능침(慈湖陵寢), 화궈펑의 화릉(華陵) 등이 그 예다.
일본에서는 '원(園)'의 등급이 없고 황태자를 포함한 황족의 무덤은 일괄 '묘(墓)'다.[16]
5. 목록
더 많은 왕릉은 왕릉(무덤) 문서로.5.1. 한국
5.1.1. 상고시대
5.1.2.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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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중하대의 고분과 고분군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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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의 고분과 고분군
5.1.3. 고려시대
5.1.4. 조선시대
5.1.5. 현대
- 납골당
- 재한유엔기념공원
- 4.19 민주묘지
- 5.18 민주묘역 - 국가보훈처에서 조정한 국가묘지외 5.18 당시 조성된 망월동 구묘역이 따로 있다.
- 국립현충원( 국립서울현충원, 국립대전현충원)
- 국립호국원( 국립영천호국원, 국립괴산호국원, 국립산청호국원, 국립이천호국원, 국립제주호국원)
- 망우역사문화공원
- 모란공원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 대성산혁명열사릉
- 애국열사릉
- 금수산태양궁전
5.2. 해외
5.2.1. 중국
5.2.2. 이탈리아
5.2.3. 러시아
5.2.4. 이집트
5.2.5. 그외
6. 종류
7. 구성
8. 문화
9. 직업
10. 창작물
여러 창작물에서 무덤이 등장한다.끝까지 간다: 고건수는 이광민의 시신을 숨기기 위해 무덤을 팠다.
디아블로 2: 플레이어는 2막에서 고통의 대공 두리엘을 치기 위해 탈 라샤의 무덤에 들어간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아웃랜드의 황천의 폭풍 지역에 노바 테라의 이름 알파벳 'N O V A'에 차례로 불빛이 들어오는 무덤이 생겼다.
Starting Point : Area 52 - Netherstorm
Coordinates(좌표) : 33, 64 → 41, 82
Coordinates(좌표) : 33, 64 → 41, 82
코룸 외전 : 이계의 강림자들 편에서 로델 마을의 한 무덤이 파헤쳐졌다. 이는 아처의 어머니(카마엘)가 묻힌 곳인데, 레기나가 정신체가 깃들 육체를 찾기 위해 파헤쳤다. 아처의 어머니도 이계의 고대신과 관계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11. 기타
- 특정 집단이나 계층이 맥을 못추거나 고생을 심하게 하는 곳을 "XX의 무덤"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 별들의 무덤
- 제국의 무덤
- 공무원들의 무덤: 규모가 크고 인원도 많은 공공기관들을[21] 가르키는 말로, 이곳들은 규모가 작은 공공기관들[22]에 비해 공무원들끼리의 선후배 관계가 공적인 면에서만 나뉘어지고 사적인 면에서는 완전히 남남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만큼 물갈이가 자주 된다.
- 원정팀의 무덤: 스포츠에서 홈 텃세가 심하거나 홈에서 펄펄나는 팀의 연고지를 가르키는 말이다.[23]
- 정치권에서도 특정 정당이 일방적인 우세를 보이는 지역구도 반대 정당의 무덤으로 불리기도 한다.
- 20세기 초중반 한국 문학작품에서 쩍하면 들먹이는 “그녀의 무덤”은 유방의 은유이다. 당시엔 신체 부위의 실명(?)을 글로 쓰면 검열당하거나 작가 본인에게 불이익이 가해지는 일이 빈번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여인의 삼각주”, “사나이의 뿌리” 등의 표현을 써서 돌려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박정희 사후인 1970년대 후반부터는 좀 더 직설적으로 ‘“젖무덤”이란 표현도 등장한다.
- 활기나 기쁨 따위가 소진되는 곳이나 그런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 특정 분야 혹은 (이미 고인이 된) 사람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 경우 이미 고인이 된 그 분야의 관계자 혹은 이미 고인이 된 당사자의 이름을 넣어서 "XXX가 무덤에서 튀어나올 소리!"혹은 "XXX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소리"라고 하기도 한다.
-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의 시신을 간이 매장할 때, 그 자리에 비석 대신 사용하던
소총을 꽂고, 그 위에
인식표와
방탄모를 얹기도 한다. 영어로 Battlefield cross라고 불리며, 전쟁 영화나 게임 등에서 자주 사용되는 묘사이다. 사실
군필자라면 알겠지만, 소총은 엄연한
군수물자로 사용자가 사망하더라도 회수한 뒤[24] 다른 병사에게 지급해 계속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고, 수습하지 못한 아군 시신은 인식표를 단단히 결속한 뒤 나중에 수습할 수 있도록 해야지 태평하게 무덤이나 파고 있을 시간은 없다. 뭣보다 적군에게 "우리 여기 주둔했었음."하고 대놓고 광고하는 짓이니 현실에서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전쟁터에서 이짓하면 자기가 죽이고 암매장하는 줄 안다 - 한국에서 무덤의 자리는 대개 양지이므로 이 근처에 집을 지으면 난방비 절약에 도움이 된다. 물론 심리적인 거부감을 극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다만 이는 국가마다 차이가 있으며, 일본의 경우에는 한국과 반대로 무덤이 음지에 있는 경우가 많다.
-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 즉 ' 관념'을 인간이 인지하게 된 계기가 무덤이라는 시각이 있다. 만화
- 프랑스의 악곡 중 tombeau(무덤)라는 제목이 붙은 것들이 있는데(예: 모리스 라벨의 《 쿠프랭의 무덤》(Le Tombeau de Couperin)), 이는 '추모곡'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 법률 용어인 분묘는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일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찾아 보면 관련 문서가 매우 많이 나온다. 왜냐하면 건설 현장 등에서 무연고 묘지를 발견하였거나 공동묘지의 매장 연한이 도래하였을 경우(보통 최장 45년) 관할 지자체에서 홈페이지에 "분묘 개장 공고"를 올리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지자체 발행 관보에 공고를 실었지만 이제는 모두 인터넷으로 게시하며, 기존 무덤이 전국적으로 임야에 아주 많은 데다가 공동 묘지의 매장 기한 만료도 꾸준히 있는 일이라 그 양이 많기 때문에 대부분 게시판을 따로 만들어 올리고 있다. 그 내용은 간단하다. 해당 분묘 위치의 주소와 "언제까지 안 파 가면 임의 개장하여 처분한다."는 내용. 그렇다고 막 파서 아무 데나 묻거나 화장해 버리는 건 아니고, 파 봐서 유해 일부나 부장품이라도 남아 있으면 한지 같은 것으로 싸서 상자에 담아 묻어 주며, 간단하게 술이라도 따르고 재배하는 정도 예우는 갖춰 준다. 누가 묻힌 건지, 왜 안 파가는지 모르더라도 어쨌든 남의 무덤으로서 유교 문화가 있는 한국에서는 그냥 막 치워버리면 고인에 대한 큰 결례인데다 액운이 따를 것이라 믿기 때문에 발굴 현장에서 안 시켜도 알아서 하는 일이다.
-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무함마드 어머니의 무덤이 1998년에 파괴되었는데, 이게 하디스에 근거(무함마드의 언행록)를 두었다고 한다. #
- 다양한 사례가 있지만 무덤을 만드는 이유는 대표적으로 두가지인데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과 고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그를 추모할 수 있도록 세우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옛날에는 그 인물의 힘을 표현한다는 의미도 있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후자 쪽 의미가 강해졌다.[25] 결론적으로 현대에는 죽은자보다는 뒤에 남은 산 자를 위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선산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재산세가 나간다. 그만큼 관리할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1]
그냥 딱 보면 조그만 납골묘로 오해하기 쉬우나, 사실은 기념비 뒤에 보이는 산 전체가 무덤이다.
시안에 위치한 중국 황제들의 무덤은 지하에 크게 구덩이를 만들어 황제의 시신과 기타 부장품, 병마용들을 집어넣은 다음 봉분을 매우 거대하게 쌓았다. 당장 한나라 황제들의 무덤들만 보더라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지만 진시황릉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작다.
[2]
보통
기자의 대피라미드라고 아는 것이 대부분이다. 기자는 지역명이고 피라미드 안에 묻혀 있는 것이 쿠푸 왕이다.
[3]
또는 그냥
'산'이라 하기도 한다.
[4]
이쪽은 법률 용어.
[5]
비슷한 예로 '주검(시체의 순우리말, 죽- + -엄)'과 '
마감(막- + -암)', '마중(맞- + -웅)' 등이 있다. 용언 어간이 아니라 체언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비생산적 접미사가 붙은 말을 발음대로 쓰는 경우는 '지붕(집 + -웅)', '이파리(잎 + -아리)' 등이 있다.
[6]
제주도도 산에 있는 경우가 있으나 예외적으로 밭 한가운데 묘를 쓰는 경우가 많다.
[7]
대표적으로
진시황릉이 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항우가 도굴하고 진시황릉 일부를 불태웠다.(물론 진시황의 묘지는 불태우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다.)
[8]
유럽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도 성직자나 사회 유력 인사들을 교회 안에 매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성 베드로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
[9]
다만 고려도 왕족, 귀족은 매장을 많이 했다.
[10]
다만 이 때의 매장은 삼국, 고려, 조선 시절의 매장과는 많이 달랐는데 삼국, 고려, 조선 때는 석실묘와 회곽묘를 쓰거나 부장품을 곳곳에 넣었음은 물론, 고인이 생전에 입었던 옷을 입혔지만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의 매장은 그냥 땅에 묻고 매장을 했으며, 부장품도 넣지 않았고, 삼베옷을 입고 매장을 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11]
일본, 미국, 유럽은 장례식을 치를 때도 엠버밍을 많이 하며 부장품도 꽤 넣고, 고인이 생전에 입던 옷을 많이 입힌다.
[12]
이렇게 발견된 편지 유물로는
나신걸 한글편지와
이응태 묘 출토 편지가 유명하다.
[13]
조선시대에는 무덤에 피장자의 의복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함께 묻는 경우가 많았다.
[14]
흔히 대원군으로 알려져 있는
흥선대원군은 대한제국 수립 후 '흥선헌의대원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흥원(興園)에 묻혔다. 종래 '흥선대원군묘'로 불려 왔으나 2018년에 본래 명칭인 "흥원"으로 회복되었다.
[15]
희빈 장씨는 경종의 모후지만, 묘에 묻혔다.
[16]
황실전범 제27조 천황·황후·태황태후·황태후가 묻히는 곳을 능, 그 밖의 황족이 묻히는 곳을 묘로 하며 적(籍)에 등록한다.
[17]
신라 고분군일 가능성이 높으나 여전히 백제냐 신라냐 논란인 고분군.
[18]
한국과 일본 모두 해당
[해외소재]
중국과 북한에 소재하지만 편의상 국내로 분류
[20]
전승에 의하면
바티칸은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
[21]
정부중앙청사(국가직), 도청&특별시청&광역시청(지방직)
[22]
지방청(국가직), 읍사무소&면사무소&동사무소(지방직)
[23]
대표적으로
이란
테헤란의
아자디 스타디움,
볼리비아
라파스의
에스타디오 에르난도 실레스,
에콰도르
키토의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아타후알파 등이 있다.
[24]
물론 당시 상황이 급박해서 죽은 사람의 총 같은 것은 거들떠볼 겨를도 없었다면 회수하지 못 하더라도 문제는 없으나, 이 경우 역시 총을 묘비처럼 쓰진 않는다
[25]
그도 그럴게 고대에는 그 사람의 업을 기록하거나 널리 알리는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현대에는 책, 인터넷, 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로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