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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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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 수많은 파라오의 무덤들 중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이다. 그 투탕카멘의 무덤마저도 고대에 이미 소규모로 몇 차례 털린 적이 있지만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은 한 번도 도굴당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일강 하류 침수가 잘되는 장소에 지은 탓에 수 천년 동안 물이 찼다빠졌다를 반복하며[2] 목재 부장품들이 모두 썩었고, 벽화도 색이 빠져버렸다.부장품도 무덤도 투탕카멘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결정적으로 발견된 시기가 하필이면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이라 세계적 이슈도 되지 못했기에 한국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는 투탕카멘에 비하면 지극히 초라한 수준이다.
고고학계에서는 NRT III 무덤이라고 부른다.
2. 상세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은 1939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피에르 몽테(Pierre Montet)가 발견했다. 원래는 10야드 정도 떨어진 다른 무덤을 발굴하다가 정말 우연히 무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단 한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이었기에 원래라면 당연히 투탕카멘의 무덤 급의 조명을 받아야 했으나, 당시 세계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온통 관심이 팔려있었던 터라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피에르 몽테는 이 무덤에서 은으로 만든 파라오의 관과 그의 미라를 발굴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몽테는 1940년 급히 제 가족들을 챙기러 프랑스로 돌아갔고 그가 발굴한 유물들은 모두 카이로 박물관으로 옮겨졌다.[3] 그 이래로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아직도 카이로 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는 여러 명의 파라오들이 함께 묻혀있었다. 원래는 다른 파라오들도 제각기 묘가 있었지만 이 묘들이 싹 다 침수해버리자 신관들이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멀쩡하던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 함께 묻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무덤에서는 프수센네스 1세, 아메네모페, 셰숑크 2세의 미라가 함께 나왔다. 그 외에도 시아문, 프수센네스 2세의 이름이 적힌 샤브티가 출토되었지만 미라와 관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데 무덤의 환경이 매우 좋지 못했던 데다가 목재관을 썼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르며 다 썩어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 그림을 보면 당시 어떻게 파라오들의 미라가 안치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일단 붉은색으로 표시된 묘실에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가 안치되어 있고, 그 바로 옆에 프수센네스 1세의 아들이자 후계 파라오였던 아메네모페의 미라가 있다. 그리고 묘실 앞의 전실에는 원래 셰숑크 2세, 프수센네스 2세, 시아문 이렇게 총 3명이나 되는 파라오들의 미라가 있었다. 허나 이 셋들 중에 셰숑크 2세의 것만 현대까지 남았고, 시아문과 프수센네스 2세의 미라와 관은 흔적도 없다. 옆에 묻힌 시신들은 프수센네스 1세의 장군들인데, 개중에서 안케펜무트는 프수센네스 1세가 가장 총애하던 장군들 중 하나다.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는 맨 바깥쪽의 화강암 관, 그리고 그 안의 사람 모양의 회색 화강암 관, 그리고 그 안의 은제 관 이 순서로 안치되어 있었다. 가장 바깥쪽의 거대한 석관은 화강암을 깎아만들었고 뚜껑에 파라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새겨놓았다. 사실 이 관은 선대 파라오들 중 하나인 메르넵타[4]의 관인데, 이집트가 혼란해지며 새로 관을 짤 여력이 없어지자 몰래 메르넵타의 관을 꺼내 재활용한 것이다. 그외에 독특한 점이라면 파라오의 머리 부분에 여신 누트가 손을 뻗어 축복을 내리는 듯한 자세로 새겨놓았다는 것. 파라오의 형상 옆에는 히에로글리프들이 줄을 맞추어 새겨졌다.
두 번째 화강암 석관 | 마지막 은제 관 |
은관 안에는 원래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가 있었다. 하지만 워낙에 보존 환경이 좋지 않았던 탓에 이미 피에르 몽테가 관뚜껑을 열었을 때에는 뼈무더기와 회색 먼지가루들만 가득했다고 한다.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나서 미라가 삭아서 아예 가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만 금속으로 만들어진 프수센네스 1세의 황금 마스크와 금 목걸이, 그리고 몇몇 장신구들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파라오의 관 옆에는 도자기와 청동, 청금석으로 만든 샤브티 무더기와 각종 화려한 보석들, 금제 보물들이 널려 있었다. 현재 이 유물들은 모두 카이로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무덤에서는 프수센네스 1세 외에도 아들 파라오 아메네모페와 셰숑크 2세의 미라도 나왔다. 아메네모페의 경우 원래는 아버지의 무덤 바로 옆에 따로 묻혔지만 무덤이 침수되면서 아버지의 묘에 합장되었다. 그의 미라는 금박을 입힌 2겹의 관에 들어있었고 역시 금박을 씌운 마스크 2개를 쓰고 있었다. 제 아버지는 은으로 만든 관에 황금 마스크를 쓰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아버지 프수센네스 1세보다도 장례용품이 열악했다. 아메네모페가 재위 기간이 10년 남짓에다가 권력도 없었던 탓이 컸다. 그의 관 속에는 그의 미라 유해, 목걸이, 팔찌, 반지와 칠보 칼라 따위 등의 유물들이 추가적으로 발견되었다고.
아메네모페의 관 | 아메네모페의 데스마스크 | 셰숑크 2세의 은제 관 |
그 옆에 세 번째 사진이 셰숑크 2세의 은제 관이다. 맨 위 무덤 배치도에서 묘실 앞 전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관이 바로 이거다. 독특하게도 인간의 형상이 아니라 왕권의 신 호루스의 머리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셰숑크 2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워낙에 많지 않아 관도 유명하진 않다. 관 아래에는 식물이 자라났던 흔적이 있다. 원래 셰숑크 2세의 무덤이 침수되자 신관들이 그나마 멀쩡했던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으로 옮긴 것인데, 그 직전까지만 해도 식물이 무성하게 관을 뒤덮고 있었다는 뜻이다. 관의 열악한 보존상태나 곳곳에 간 실금으로 봐서 신관들이 무성의하게 관을 대충 옮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셰숑크 2세의 황금마스크[6] | 아메네모페의 황금마스크[7] | 프수센네스 1세의 유골 |
아메네모페의 유골을 조사해보니 그 역시 아버지를 닮아 장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살아있을 당시에는 상당히 건장한 남성이었고, 아마 두개골에 생긴 감염으로 인한 뇌수막염으로 사망한 걸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셰숑크 2세의 경우 머리 부상으로 인한 폐혈증 감염으로 죽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셰숑크 2세의 관을 여는 개봉식에는 당시 이집트 왕국의 국왕이던 파루크 1세가 친히 참여했다. 다만 관속에는 멀쩡한 미라가 아니라 이미 다 썩어서 뼈만 남은 셰숑크 2세의 유해, 그리고 황금 마스크 등만 남아있었다고.
안케펜무트의 관 | 웬제바우엔제드의 마스크 | 프수센네스 1세의 관을 들여다보는 피에르 몽테 |
안케펜무트 옆에 묻힌 사람은 '웬제바우엔제드'라는 이름의 고위 관리로, 왕자(Iry-pat), 하티아(Haty-a, 지방 지배자나 시장, 주지사등에게 수여된 직함. 통일된 번역이 없어 그냥 로마자 표기한다), 하이집트 왕의 인장 보관자, 신의 아버지, 장군이자 군지도자, 콘수의 고위 집사(후에 고위 사제로 바뀌었다) '멘데스의 군주 오시리스신'의 사제, 모든 신들의 예언자 감독관, 유일한 친구의 감독관이라는 중요한 직함을 여럿 달고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직책을 여러 개 맡고 있었기 때문에 왕실 출신이 아니지만 왕실 무덤에 묻히는 대단한 영예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미라를 분석한 결과 웬제바우엔제드도 50세 언저리에 사망했고 누비아 출신 혈통을 물려받은 걸로 추정된다. 참고로 그가 묻힌 화강암 석관은 제19왕조 시기 아문의 3급 신관인 아멘호테프의 것이었으나 재활용한 것으로 얇게 편 금제 나뭇잎으로 장식되었다. 그 안에는 금도금한 목재 석관이 있었고 또 그 안에 은제 관이 있는 구조의 삼중관인데 보존상태가 좋진 않다. 은제 관 안의 미라는 황금 마스크를 씌웠고 펜던트, 반지, 팔찌, 황금으로 만든 작은 석상 같은 유물이 나왔는데 그 중에 섬세하게 만든 금은제 컵 3개, 라피스 라줄리로 만든 양의 형상을 취한 아문 신상이 유명하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수 백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목조 부장품들의 경우 모두 썩어서 사라졌지만 썩지 않는 금속제 유물들과 보석류들은 모두 보존되어 있어서 그 양이 상당히 많다. 아래에는 대표적인 부장품들만 설명한다.
사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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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수센네스 1세의 가면 프수센네스 1세의 얼굴을 덮고 있던 데스마스크다. 통째로 순금을 녹여서 만들었다. 다만 유명한 투탕카멘의 가면과 비교하면 그 질과 정교함이 확연히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다. 프수센네스 1세가 최고 전성기인 신왕국 시대가 끝나고 들어선 혼란기의 이집트를 통치했던 파라오였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국력과 함께 공예 기술도 함께 쇠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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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목걸이 프수센네스 1세의 부장품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다. 황금으로 만든 정교한 목걸이인데, 아마 남쪽의 누비아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목걸이 끝의 술에 황금으로 만든 꽃 장식이 달려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졌다. 현재는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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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손발가락 보호대 미라의 손발가락에 끼워져 있던 보호대다. 미라는 제작 과정에서 손상되기 쉬운 끝부분이 뭉그러지는 경우가 있어서 보호를 위해 사진처럼 금으로 만든 보호대를 끼웠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미라 역시 이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다만 프수센네스 1세의 손발가락 보호대가 투탕카멘의 보호대보다 훨씬 보존 상태가 뛰어나다. 잘 보면 손톱발톱의 모습까지 그대로 옮겨놓아 정교하게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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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브티 내세에서 프수센네스 1세를 보좌할 샤브티들이다. 청동과 도자기, 청금석 등으로 만들어졌고 발견 당시에는 묘실 한구석에 어질러진 채로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수는 몇 십여개에 달한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샤브티들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지만 청동으로 만든 것들은 물과 닿아서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다. 옆의 샤브티는 푸른 안료를 칠한 도자기 샤브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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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목걸이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가 착용하고 있던 금제 목걸이다. 다만 미라가 가루가 되어 바스러진 탓에 발견 당시에는 가루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원래는 저 칸마다 금조각을 하나하나 박아넣어 만들어진 굉장히 정교한 목걸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박혀있던 금조각들이 다수 빠졌다. 다만 그 아름다움은 여전해서 프수센네스 1세의 대표적인 부장품들 중 하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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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금석 목걸이 프수센네스 1세가 사용하던 청금석 목걸이다. 두 줄로 꿰인 청금석 구슬들로 만들었고 중간의 구슬 2개는 순금으로 만들었다. 맨 끝의 황금 걸쇠 부분에는 프수센네스 1세의 왕명이 새겨져 있고 구슬들 중 하나에는 설형문자로 세 줄의 텍스트가 새겨졌는데 그 의미는 아직까지 해독된 바가 없다. 당시 고대 이집트인들이 청금석을 굉장히 귀중한 광물로 취급했던 걸 생각하면 그 역사적 가치가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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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팔찌 황금으로 만든 팔찌. 고대 이집트에서 스카라베를 부활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도 가벼운 보석류의 경우 이미 도굴꾼들이 훔쳐간 경우가 많아 팔찌가 많이 출토되지 않았는데,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황금으로 제작한 팔찌가 발견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손이 닿던 부분이 닳아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프수센네스 1세가 생전에 착용하던 팔찌일 가능성이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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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펜던트 황금으로 만든 펜던트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펜던트를 만들어 허리띠나 목에 걸고 다니는 경우가 흔했다. 해당 펜던트는 하늘의 여신 누트를 새겨놓은 펜던트인데, 누트의 파란 피부색을 아름다운 옅은 하늘색 청금석으로 표현해서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프수센네스 1세의 부장품들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유물들 중 하나로 꼽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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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팔찌 위의 것과 마찬가지로 황금으로 만든 팔찌다. 차이점이라면 이 팔찌는 상감해서 만든 상대적으로 단순한 모습의 팔찌라는 것.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 출토된 다른 유물들에 비해서 딱히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예술적, 고고학적 가치는 높은 유물들에 속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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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컵 황금으로 만들어 정교하게 상감 장식을 넣은 컵이다. 사진을 보면 의아하겠지만 오목한 컵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이다. 사실 프수센네스 1세의 부장품은 아니고 그와 함께 묻힌 장군 웬제바우엔제드의 부장품이다. 프수센네스 1세를 제외한 다른 미라들의 소유인 부장품들 가운데에서 독보적으로 예술성이 뛰어나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을 소개할 때 항상 등장하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
[1]
위는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 배치도, 아래는 무덤의 실제 내부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침수되는 과정에서 벽화의 색이 모조리 지워졌다.
[2]
아이러니하게도 이 덕분에 도굴되지 않았다.
[3]
몽테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1946년에 이집트로 돌아왔다. 이후 프수센네스 1세 휘하 장군의 묘도 발굴했고, 이후 유명한 이집트학자이자 교수로 살다가 1966년 6월
파리에서 사망했다.
[4]
람세스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다.
[5]
다만 이 은제 관도 공예의 수준이나 화려함, 정교함을 전체적으로 따져봤을때 투탕카멘의 황금관에는 훨씬 못미친다. 투탕카멘의 황금관은 110.4kg의 순금을 통째로 녹여만들었고 색유리와 준보석들을 촘촘히 박아넣어 만들었다. 허나 프수센네스 1세의 은관은 특출난 상감 장식도 없고 그 정교성도 확연히 떨어진다.
[6]
원래 머리 장식까지 있었으나 다 썩어서 없어졌다.
[7]
아메네모페의 관에서는 황금마스크가 2개 출토되었다.
[8]
이집트 파라오의 대명사
람세스 2세 역시 90세 넘게 장수했는데, 람세스 2세도 말년에는 충치, 관절염 등 온갖 질병으로 고생했다.
[9]
제3중간기 들어 미라 제작 기술이 발달해서 생긴 변화다. 그래서 카노푸스 단지는 내장을 보관하는 용도가 없어지고 빈 단지를 시신과 같이 매장하는 부장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