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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14:11:38

왕가의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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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계곡 전경 사진(上)과 지도(下)[1]
وادي الملوك
Valley of the Kings

1. 개요2. 조성 사유3. 도굴4. 예상 밖의 보존 사례5. 결과6. 배치7. 매체에서의 등장8. 여행 정보
8.1. 하트셉수트의 장제전8.2. 멤논의 거상8.3. 메디넷 하부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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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왕가의 계곡 상형문자.png
왕가의 계곡의 고대 이집트어 표기. 직역하면 '서부 테베 파라오의 위대하고 장엄한 묘지, 수백만 년의 삶, 힘 및 건강'이다.

1. 개요

이집트 남부 룩소르, 즉 과거 테베 나일 강 서쪽편에 위치한 거대한 무덤군. 작은 구덩이부터 거대한 대무덤까지 총 65개의 무덤들이 이 계곡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2] 당시 고대 이집트인들이 부르던 공식적인 명칭은 '서부 테베 파라오의 위대하고 장엄한 묘지, 수백만 년의 삶, 힘 및 건강'이다.

과거 고대 이집트 고왕국, 중왕국 파라오의 묘역인 피라미드가 도굴을 안 당한 경우가 없을 정도로 도굴과 훼손이 심해 미라의 안전을 절대 보장할 수 없는 데다가, 수많은 인력과 재원이 낭비되고 오랫동안 혼란기로 피라미드를 짓지 않아 건설기술까지 실전되자 신왕국 때 파라오들을 장사지내기 위해 새로 조성한 비밀 묘역이다.

왕가의 계곡을 선정한 가장 큰 이유는 도굴꾼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룩소르 반대편인 나일 강 서안지대에[3] 왕가의 계곡이 있지만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계곡처럼 보인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지상에 노출되는 구조물을 건설하면 도굴꾼에게 털리므로 계곡에 굴을 파서 묘실을 만든 다음에 파라오의 장례가 끝나면 입구를 봉인해서 위치를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 이곳의 엘쿠른(El-Qurn) 산꼭대기가 피라미드형이라[4] 당시 기준의 명당이라는 점, 나일강에서 멀리 떨어져 범람으로 훼손될 위험이 없고[5] 사암지대라 터널식 석굴이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도 여기에 비밀묘역을 조성하는 데 영향을 줬다고 한다.

건설시기는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으로 대략 500여 년간 이용되었다. 신왕조 제18왕조의 제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가 왕가의 계곡에 파라오로서 최초로, 제20왕조의 람세스 10세가 마지막으로 묻혔다. 제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람세스 11세가 마지막으로 무덤을 조성하긴 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고 미라도 안치되지 않았다. 다만 주인을 알 수 없는 KV39가 있어서 아직까지 확정된 것은 아니다.[6] 그리고 KV39는 말 그대로 왕가의 계곡(Kings Valley) 39호 무덤이라는 의미로 일괄적으로 매긴 번호를 말한다. 왕가의 계곡은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하는데 동쪽에 대부분의 무덤이 있다. 다만 서쪽의 무덤은 따로 WV로 매기기도 한다.

그리고, 파라오의 묘역이라고 하지만 왕비, 왕자, 공주를 비롯한 왕족들과 왕이 총애하던 신하들은 물론 심지어 왕들의 애완동물들도 묻혔다. 동물까지 묻힌 이유는 이집트 신화에서 , 악어, , 원숭이, , 고양이 등 동물은 신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19왕조 이후로는 파라오를 제외하면 왕비, 왕자, 공주들은 인근 왕비들의 계곡에 묻히기도 했다.

2. 조성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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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티 1세의 무덤 조성도 투탕카멘의 무덤 조성도. 옆 세티 1세의 무덤에 비하면 확연히 초라해 보인다.
당시 파라오와 그 친인척들은 당시에도 횡행하던 도굴꾼들 때문에 중왕국 때까지 유행하던 피라미드같이 눈에 띄기 쉬운 건축물 대신, 인적이 드문 오지의 한적한 계곡 바위 틈이나 벼랑에 자기 무덤을 조성하기로 했다. 당시 이집트의 사후관에 따르면 먼 훗날 언젠가 자신의 신체( 미라)에서 되살아날 수 있지만, 그 전까지는 영혼도 제사로 제공되는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하므로 제사를 바치는 신전에 주기적으로 오가야 했다. 이런 믿음을 고려하면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짓기로 한 것은 상당한 결단이었다.

신전은 수요나 후원을 감안하면 대도시에 만들어야 하는데, 왕가의 계곡은 이런 대도시와 한참 떨어져 있다. 즉 당시 이집트 고위층들은 자기 영혼이 이런 거리를 매번 왕복하는 고생을 각오한 셈이다. 한마디로 신체가 탈탈 털려 바닥에 오체분시[7]되거나 후환을 없앤다고 불태워질 바에야 그런 고생이 낫다는 셈. 또한 무덤 건설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노동자들은 외부 출입이 통제되는 마을에 모여 살게 한 대신 아주 많은 임금을 주어 입을 막았다. 이 마을도 현재는 관광지가 되어 있으며 노동자들의 신전과 무덤들도 공개되어 관광객을 받고 있다.

이런 덕분에 이곳 파라오들의 무덤은 비교적 늦게 도굴당했다. 물론 당시 고대인 관점에서는 충분히 도굴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한 지형이었다.

3. 도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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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노력했음에도 재물을 노리는 작자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왕국 말기에는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는 바람에 무덤 노동자들에게 임금 체불이 일상화되었고 그동안의 후한 대우에 익숙해 있던 노동자들은 빡쳐서 무덤을 털어버렸다. 나중에는 아예 몰래 무덤 입구와 도굴로를 동시에 만드는 상황까지 벌어졌고 장례식이 끝나면 도굴로를 열어서 전부 털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일은 파라오뿐만이 아니라 왕비, 왕족, 귀족, 평민들까지 가리지를 않았다. 심지어 어느 귀족의 경우 장례식을 하는 동안에 몰래 침입해서 보석으로 치장한 데스마스크를 털어가는 사례도 있었고 람세스 3세의 왕비 이시스의 경우에는 무덤 노동자들이 몰래 뒤에 굴을 파고 털어버리는 사례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값비싼 부장품들이 시중에 공공연히 유통되면서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이집트 경제는 더욱 나락으로 추락하는 악순환이 여전했다.

사실 이런 심각한 사실은 그 당시에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제20왕조 말기의 파라오 람세스 9세 때 대대적으로 조사를 했다. 제11왕조부터 제20왕조의 무덤 16개를 조사했으나, 그중에 제18왕조 2번째 파라오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과 11왕조 인테프 2세의 무덤을 제외하면 모두 털렸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실 당시에는 사제들과 귀족, 도굴꾼이 한패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재정이 부족해진 21왕조 파라오들은 선왕조의 무덤을 털어 재정을 보충하는 등 막장이었다. 예를 들면 21왕조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람세스 9세의 반지와 19왕조 파라오 메르넵타의 관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전 왕조의 무덤을 털어 재정은 물론 부장품으로 재활용했다는 좋은 증거이자 일례다.

이 당시 도굴꾼을 처벌한 기록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는 17왕조의 파라오 소베켐사프 2세와 그의 아내 누브카스 왕비의 피라미드 무덤[8]을 도굴꾼 아멘파누퍼와 그 일당들이 약탈한 사례가 있다. 왕가의 계곡 부근에 있었던 탄광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던 아멘파누퍼는 이전에도 도굴을 하다가 잡혀서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고 풀려났었는데, 또다시 고위 공직자들과 결탁하여 도굴을 하다가 기원전 1111년에 람세스 9세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도굴꾼들은 이 무덤을 약탈하여 부장품들을 싹쓸이하고 왕과 왕비의 관에 불을 질러 관에서 금 14.5kg을 녹여 훔쳐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에 불을 지른 이유는 미라를 불태워서 저주를 막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도굴꾼들은 미라가 부활할까봐 겁을 먹고 미라를 불태워버리거나 훼손하기도 했고 땅 속에 파묻거나 심지어 기념품(!)으로 챙겨가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1왕조의 파라오 세누스레트 3세의 피라미드의 경우에는 도굴꾼들이 무덤을 털고 무덤 벽에 파라오를 조롱하는 그림과 낙서까지 하고 갔을 정도다.

람세스 10세 재위기인 기원전 1118년경에 이미 도굴꾼들을 사로잡은 기록이 남아 있다. 도굴꾼들이 훔친 물건들을 나누는 과정에서 작은 싸움이 벌어졌다고. 이후 잡힌 도굴꾼들이 어떻게 처벌당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왕의 무덤을 도굴하는 건 반역에 버금가는, 당시 지을 수 있는 최악의 중죄였으므로 아마 사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외국인 네사문(Nesamun)이 우리를 데리고 람세스 6세 왕의 무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무덤을 여는 데에 4일을 보냈고, 5일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우리는 무덤의 봉인을 깨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청동 가마솥 1개와 청동 대야 3개를 발견했다...

4. 예상 밖의 보존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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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6세의 무덤 세티 1세의 무덤[9]
그나마 그중 하나 비교적 멀쩡히 살아남은 것이 바로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발견한 18왕조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도굴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무덤의 봉인을 보면 2번 정도 도굴당한 흔적이 있다. 그러나 가볍고도 가치가 높은 귀금속류와 귀한 연고류가 주로 분실되었고 관리자 마야가 후속 조치를 잘해서인지[10] 그 후에는 도굴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20왕조 파라오 람세스 6세의 무덤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그의 무덤 위에 오두막을 만들고 시간과 세월이 흐르면서 모래가 쌓이고 잊히면서 20세기 초에 와서야 발견되었다. 하워드 카터는 여러 증거들을 통해 이곳을 발굴했다. 자세한 것은 투탕카멘의 무덤 문서 참조.

참고로 피라미드의 전성기였던 이집트 고왕국 시대도 후기에 들어오면 피라미드 중 도굴꾼에게 안 털린 피라미드가 없었다. 따라서 파라오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털린 피라미드를 수선하고 미라를 수습하며 재봉인하는 것일 정도였다. 게다가 이 임무도 나름 돈과 수고가 많이 들어가서 나중에는 임무를 포기한 후, 아직 멀쩡하게 남은 미라를 한 곳에 모아서 땅 속에 석실을 세우고 그냥 공동묘지처럼 한 곳에 묻어버렸다. 사제들이 이 일을 맡았는데 남은 부장품들은 대부분 거둬들여 재정으로 썼다. 이들은 왕가의 계곡과 인근 무덤들을 다니며 남아 있던 파라오, 왕비, 왕족, 기타 인물들의 미라를 거둬들이고 다시 염습한 다음 소량의 부장품과 함께 2곳의 은신 무덤에 재매장했다.

이런 식으로 공동묘지화된 곳은 2군데가 발견되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부장품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묻혔으므로 누구도 도굴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세월이 지나면서 진짜로 잊히는 바람에 근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단 두 곳 중 전자는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위쪽에 있던 TT320 무덤으로 본래는 이집트 제3중간기인 제21왕조 때 테베의 아문 대신관이었던 피네젬 2세가 자기 자신과 가까운 가족들을 위해 조성한 가족묘였다. 그런데 이 무덤의 출입통로가 수직이라서 도굴꾼들의 출입이 어려웠기 때문에 피네젬 2세는 당대 파라오인 시아문의 명을 받아 진행하던 파라오들의 미라를 수습해 재염습하고 안치할 장소를 자신의 가족묘로 정했다. 이 무덤은 제22왕조까지 미라가 안치되었다가 통로가 막히면서 그대로 잊혀져 도굴을 피했는데, 1860년대에 인근에 살던 압드 알 라술 가족이 우연히 발견한 뒤 부장품과 미라를 빼내 팔다가 지역 관리들에게 적발되어 1881년에 공식적으로 재발견되었다. 나머지 한 곳은 고대 이집트 시절에 이미 도굴당한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인 KV35로, 역시 이집트 제3중간기 떄 테베의 아문 대신관이었던 피네젬 1세(앞서 언급한 피네젬 2세의 할아버지다)가 이미 도굴을 당했으니 또 도굴당할 가능성이 적다고 보고 이 무덤에 파라오들의 미라를 재안치했다.
파일:TT320_tomb.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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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T320 무덤 KV35 무덤
그리고 후자는 1896년 3월 프랑스의 빅토르 로레가 발견했다. 이 무덤에서는 무덤 주인 아멘호테프 2세, 아멘호테프 3세를 비롯해 15구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물론 미라들이 이미 도굴당한 무덤에서 수습된 미라라서 상태는 좋지 않다.[11] 예를 들면 DNA 검사로 아멘호테프 3세와 티이의 딸이자 아케나텐의 여동생이며 투탕카멘의 어머니인 것으로 확인된 여자 미라는 입이 찢어지고 오른팔이 없어지고 흉벽이 무너져 내부가 드러나 있다. 이것은 도굴꾼들이 보물을 찾으려고 마구잡이로 유린한 흔적이다.[12]

그러나 귀중품 따위는 없고, 부장품도 거의 없이 묻혔기 때문에 대량의 미라가 장기간 보존될 수 있었던 좋은 방법이었으며, 그래서 의외로 많은 수의 미라가 현재도 박물관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파라오의 미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파라오/미라 문서 참조.

사실 이집트 파라오 중에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파라오는 현재 21왕조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뿐이다. 이 무덤은 투탕카멘 무덤 발굴에 맞먹을 엄청난 고고학적 성과이나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무덤이 아니라 나일 강 삼각주 지역에 있는 타니스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고 나일 강 삼각주라는 지형의 특성상 부장품들이 대부분 박살나고 훼손되었으며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마저 습기가 많은 환경 때문에 훼손되어 해골만 남은 상태였다. 따라서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하고 묻혔다. 그래도 프수센네스 1세의 부장품은 많이 남았는데 원래 메르넵타의 것이었던 삼중관 중 가장 바깥쪽의 관, 가장 안쪽의 은으로 만든 관, 투탕카멘의 마스크보다는 솜씨가 떨어지지만 순금으로 만든 데스 마스크 등이 나왔다. 물론 현재까지 나머지 파라오들은 죄다 도굴당하거나 무덤 자체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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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지는 왕가의 계곡의 전경.

결국 왕가의 무덤도 도굴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털린 무덤들의 미라를 한 곳에 모아 놓은 공동묘지는 근대까지 무사했다는 것을 볼 때 무덤을 엄청난 비용과 수고를 들여서 비밀스럽게 마련하느니, 차라리 반짝거리는 귀금속과 보석 등 값비싼 부장품을 일절 무덤에 넣지 않는 편이 더 좋았다는 것이다. 물론 부장품이 상식이던 그 시절 높으신 분들이 쉽사리 그들이 사용하던 고급 명품을 다 버리고 미라만 달랑 혼자 어두운 석실에 묻히기는 싫었으므로 그렇게 되진 않았지만.

결국 왕가의 계곡도 안전하지 않음을 절감한 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람세스 11세는 기껏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만들었으나, 정작 그는 이곳에 묻히지 않았다. 이렇게 람세스 11세가 만들고 버린 그의 무덤 KV4는 이후 제3중간기 때 테베의 아문 대신관이었던 피네젬 1세가 자신의 무덤으로 재활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전 파라오들의 무덤에서 미라를 회수하여 재단장하면서 나온 부장품들을 재활용하기 위한 작업장으로 쓰이다가 중세에는 콥트교 수도자들의 은거지로 쓰였다.

이집트 제3중간기가 시작되면서 왕가의 계곡에는 더 이상 파라오들이 묻히지 않았다. 이 당시 파라오들의 근거지는 나일강 삼각주 유역의 타니스여서 왕가의 계곡은 너무 멀었고, 중부와 상이집트 지역은 테베의 아문 대신관이 사실상 독자적으로 통치했기 때문. 파라오와 아문 대신관들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진 않았지만 서로의 영역을 존중한 이유도 있다. 제21, 22왕조의 파라오들은 수도인 타니스 인근에 무덤을 건설하여 묻혔으나 현대에 재발견된 곳들은 이미 다 도굴당했고 무덤의 위치가 불명인 파라오도 많다.

그 후에는 공식적으로 왕가의 계곡에 묻힌 파라오는 없었지만 일부 무덤에 투장하는 사례는 종종 있었다. 대표적으로 KV64가 있는데 원 주인은 제18왕조 시기의 여성으로 추정되지만, 안치된 미라는 제21왕조 시기 아문 대신관의 딸로 '여가수' 직책을 맡았던 네메스-바스테트라는 이름의 여성 것이었다.

6. 배치

왕가의 계곡 내부에는 총 65개의 무덤들이 있어, 모두 번호를 매겼는데, 그 앞에 'King's Valley'의 약자인 'KV'를 붙여서 부른다. 예를 들어 람세스 2세의 무덤은 KV7이라고 부르고,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은 KV62라는 번호가 붙여져 있다. 내부가 가장 아름다운 무덤으로 꼽히는 세티 1세의 무덤은 KV17이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제외하면 모든 무덤들이 도굴꾼들에게 신나게 털려나갔고, 이미 오래전부터 텅텅 비어버린 상태로 남아있었다. 왕가의 계곡 내부에는 파라오 뿐만 아니라 왕비, 왕자, 대귀족들의 무덤도 많지만 하단에 서술할 무덤들은 오직 파라오들이 묻혔던 무덤만을 소개한다.

참고로 파라오들을 위해 지어진 무덤과 귀족들을 위해 지어진 무덤은 격이나 규모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대귀족들의 무덤들은 파라오들의 무덤에 비해서 규모도 훨씬 작고, 안에 새겨진 장식이나 벽화들도 파라오의 것들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게다가 귀족들의 무덤들은 유난히 파손된 정도도 심하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보통 파라오들의 무덤만을 둘러보고 가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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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1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람세스 7세의 무덤. 고대에 이미 도굴당했지만[13] 1984년에 들어서야 에드윈 브록에 의해 완전히 발굴되었다. 통상적인 신왕국 시대의 왕릉 형식으로 지어져 있으며, 벽에는 '대지의 서', '관문의 서', '동굴의 서'의 내용들이 그려져 있다. 참고로 KV1 무덤은 워낙 오래 전부터 개방되어 관광지로 쓰였는데, 심지어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이 다녀가며 낙서를 남긴 자국들도 있다. 중세에는 콥트 교회의 수사들이 은거하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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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2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람세스 4세의 무덤. 왕가의 계곡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위의 KV1 무덤과 마찬가지로 이미 고대에 도굴당했으며 그 이래 개방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관광 차원에서 다녀갔다. 무덤의 주인 람세스 4세는 작업장의 인부들을 2배로 늘리면서까지 제 무덤 건설에 열을 올렸고, 때문에 KV2는 상당히 크기가 큰 편이다.[14] 그러나 워낙 일찍 도굴당한 탓에 고대부터 관광지가 되어버렸다. KV2는 KV9[15] 다음으로 고대인들이 남긴 낙서가 많은 무덤으로, 그리스도교 수도자나 심지어는 나폴레옹의 부관들이 다녀가기까지 했다.
파일:kv04_45274.jpg
KV4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람세스 11세의 미완공된 무덤. 신왕국 최후의 파라오 람세스 11세를 위해 지어졌지만, 그의 미라가 이곳에 묻히는 일은 없었다. 이후 제21왕조나 제22왕조 시대에는 인부들의 작업장으로 쓰였고, 아니면 왕실 미라들을 임시로 안치해두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피네젬 1세 등을 비롯한 일부 파라오들이 제 무덤으로 쓰려 했지만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콥트 교회의 수사들이 은거했으며, 현재까지도 무수한 사람들이 관광을 하며 다녀갔다. 참고로 왕실 부장품들을 세공하는 작업장으로 쓰였기에 이 무덤에서는 투트모세 1세, 투트모세 3세, 하트셉수트 등 다른 파라오들의 이름이 새겨진 보물들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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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6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람세스 9세의 무덤. 장식이나 벽화의 디테일들을 보면 무덤이 완공되기 이전에 람세스 9세가 세상을 뜨면서 대충 공사를 마무리한 티가 난다. 계곡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계곡 사면으로부터 무려 105m나 안쪽으로 들어가 있다. 3개에 달하는 통로를 지나면 중간에 4개, 끝쪽에 3개의 방들이 있지만 이 중 장식까지 완전히 마감이 끝난 방은 2개밖에 없다. 파라오의 관이 놓여 있던 안치실 내부에는 하늘의 여신 누트의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고 벽에는 대지의 서와 동굴의 서의 내용들이 새겨졌다. 물론 이미 오래전에 도굴당해 현재는 부장품이나 보물들을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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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7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람세스 2세의 무덤. 고대 이집트 최고의 명군답게 규모도 매우 큰 편에 속한다. 그러나 하필 자리를 골라도 나일 강이 홍수날때마다 물에 잠기는 장소에 지었기에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는 상태. 워낙 오랫동안 물이 빠졌다 다시 차올랐다를 반복하면서 벽화도 내부도 딱히 볼 만한 것이 없다. 만일 남아있었다면 이집트 왕릉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지녔을 무덤이 확실했기에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람세스 2세의 무덤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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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8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메르넵타[16]의 무덤. 계곡 사면 안으로 160m나 깊숙이 들어가 있는 무덤이다. 무덤 내부에는 무려 4겹에 달하는 초대형 석관이 놓여져 있었는데, 워낙에 이 관이 커서 복도 일부를 뜯어내고 관이 들어갈 공간을 확장해야 할 정도였다. 물론 관을 안치한 후에는 다시 복도에 돌들을 쌓고 회반죽을 발라 정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모조리 도굴당해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가장 바깥쪽 석관 일부를 빼고는 별다르게 볼 것이 남아있지 않다. 석관 중 하나는 제 21왕조 시기의 파라오인 프수센네스 1세의 관으로 재활용되어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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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9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람세스 5세 람세스 6세의 무덤. 원래 람세스 5세의 무덤으로 제작되었으나 후임 파라오인 람세스 6세가 빼앗아 자신의 무덤으로 삼아버렸다. 전체적인 배치 형식은 신왕국의 보편적인 왕릉의 배치를 따랐으나 그 장식이나 정교함은 현재 보존된 무덤들 중 가장 뛰어난 수준이다. 일단 들어가는 기나긴 진입로부터 양쪽에 석회암 기둥이 세워져 장엄한 느낌을 주고, 천장과 홀에는 천체와 하늘의 신들을 묘사한 생생한 벽화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2개의 홀과 통로를 지나치면 마침내 관이 안치된 봉안실로 들어갈 수 있다. 봉안실 안에는 람세스 6세의 석관이 재조립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17] 참고로 그리스 시대에는 사람들이 이곳을 영웅 멤논의 무덤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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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10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아멘메세스의 무덤. 세티 2세 때 상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파라오를 자칭했었는데, 정통성에서 밀리고 세력도 미약해서 곧 진압되었다. 아멘메세스는 그 전에 죽어 매장되었으나, 세티 2세가 반란을 진압한 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서 남아있는 게 없다. 그나마 로제타석을 해독한 샹폴리옹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것 정도가 얼마 안되는 내세울 점이다. 무덤 내부의 장식이나 규모도 다른 무덤들보다 확실히 격이 떨어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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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11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람세스 3세의 무덤. 제20왕조의 초대 파라오인 세트나크테가 처음 짓기 시작한 무덤이지만 공사 도중 앞서 말한 KV10 무덤과 부딪히는 대참사가 일어나면서 결국 공사가 중단되었다.[18] 이후 람세스 3세가 다시 공사를 재개했고, 축을 틀어서 규모를 더욱 확장했다. 길이가 188m에 달하는 무덤 내부는 왕가의 계곡 내부 왕릉들 중에서도 상당히 아름다운 편으로, '관문의 서', '라의 찬가', '사자의 서' 등의 내용들이 4개의 통로와 2개의 홀에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8개의 기둥들이 떠받치는 매장실에는 붉은 화강암으로 깎은 파라오의 석관이 있었다.[19] 이집트 최후의 명군이었던 람세스 3세의 명성답게 무덤 내부에 부장품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미 고대에 다 도굴당해서 알려진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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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14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세트나크테의 무덤. 원래 제19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투스레트의 무덤이었지만 세트나크테가 빼앗아 자신의 무덤으로 전용했다. 이미 고대에 도굴꾼들에게 도굴당해 개봉된 상태로 유지되었지만, 정작 제대로 된 고고학적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무려 1983년에 이르러서였다. 2개의 방이 있으며, 길이는 약 112m 정도로 왕가의 계곡에서 상당히 큰 크기의 무덤에 속한다. 원래 여성 파라오 투스레트의 무덤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세트나크테가 이를 모두 회반죽을 발라 지우고 자신의 모습을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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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15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세티 2세의 무덤. 거의 수직에 가까운 계곡 사면을 깎아 만들었기에 매우 접근이 힘든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덤 내부의 입장로에는 오시리스의 모습들이 정교히 그려져 있으며 죽음의 신 아누비스와 다른 신들의 모습들도 새겨졌다. 이 통로를 지나면 4개의 기둥들이 떠받치는 큼직한 홀이 나오고, 이 홀을 지나면 마침내 관이 있었던 매장실로 들어갈 수 있다. 세티 2세의 이름이 지워졌다 다시 쓰인 것을 보면 후대의 파라오가 자신의 무덤으로 쓰려다가 포기했을 가능성이 크다.[20] KV15 무덤 역시 이미 고대에 도굴당했으며, 그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KV15의 매장실에는 무려 59개에 달하는 고대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이 남긴 낙서들이 있다고 한다. 현재는 전등, 전기, 바닥공사를 마친 채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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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16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람세스 1세의 무덤. 람세스 1세가 2년 정도도 안 돼서 세상을 떠버렸기 때문에 그의 무덤도 별 볼 일 없다. 무덤 자체는 1817년 이탈리아 고고학자인 지오반니 벨조니가 발견했다. KV16은 길이도 29m 정도밖에 안되고 2개의 하강 통로와 1개의 수평 홀, 1개의 안치실로만 이루어져 있다. 내부에는 '관문의 서'의 내용이 그려져 있고, 끝쪽에 위치한 안치실에는 붉은 화강암으로 깎은 석관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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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17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세티 1세의 무덤. '벨조니의 무덤',[21] '황소의 무덤'이라는 독특한 별칭을 가지고 있다. 길이도 137.19m에 달해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긴 무덤일 뿐더러 내부 장식도 제일 화려해 굉장히 아름답다. 그러나 보존 문제 때문에 거의 관광객들에게는 폐쇄된 상태이다. 워낙에 보존이 잘돼있는 무덤이라 벽화도 굉장히 생생한 느낌을 주고, 바닥에는 심지어 화가들의 붓질 자국들마저 남아있을 정도다. 다만 안타깝게도 1824년에 영국이 내부의 관을 떼어가버렸고,[22] 1828년에는 샹폴리옹[23]이 벽 한쪽의 부조를 통째로 뜯어갔으며 1845년에는 프로이센 왕국 원정군이 또 유물들을 약탈해갔다. 자세한 내용은 세티 1세의 무덤 문서 참조.[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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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18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람세스 10세의 미완공된 무덤. 제20왕조의 쇠퇴기에 지어져서 크기도 크지 않고 매우 협소하다. 람세스 10세가 자신의 무덤으로 짓기는 했지만 중간에 공사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내부 공사나 미장이 확실이 미완된 상태로 남아있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전혀 정교하지 못한 상태다. 실제 무덤으로 쓰인 적이 없기에 안에서 부장품이나 미라가 발견된 적도 없다. KV18 무덤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으며, 현재는 자갈이나 낙석 때문에 위험해 관람객들의 입장이 금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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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20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하트셉수트 투트모세 1세의 무덤. 원래 투트모세 1세를 위해 만든 무덤이었지만 버려졌다가 그의 딸 하트셉수트가 묘를 합장하기 바라며[25] 투트모세 1세, 하트셉수트 두 명이 쓰는 합장묘로 변했다.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에도 이미 알려진 무덤이었지만 제대로 된 고고학적 조사는 1903년에 하워드 카터가 등장한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보기드문 합장묘답게 그 배치도 굉장히 독특하다. 5개에 달하는 통로들과 홀들이 꾸불꾸불하게 이어져 있으며 길이도 무려 210m에 달하여 굉장히 길다. 1903년에 자갈과 모래를 치운 결과[26] 투트모세 1세, 하트셉수트 각각의 관과 화병, 접시, 석판[27] 등 일부 부장품들이 발견되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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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22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의 무덤이다. 계곡의 서쪽 계곡에 위치하고 있어서 'West Valley'의 약칭인 WV22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티예 왕비와 시타멘[29]의 간소한 무덤이 양옆의 작은 방에 만들어져 있는 것이 특징. 1799년 8월 나폴레옹의 학자들이 최초로 공식 발견했으며 하워드 카터가 1900년대 초에 재조사했다. 안에는 아케나텐이나 투탕카멘의 무덤에 그려진 것과 비슷하거나 더 화려한 벽화들이 많이 남아있다.[30] 석굴 깊숙한 곳에 있는 관은 현재 사라졌으며, 두 토막난 관뚜껑만이 겨우 남아있다.[31] 이미 고대에 도굴당한 지 오래이며, 무덤 속에 있던 황금 세공품이나 부장품들은 현재 아예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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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23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아이의 무덤이다. 계곡의 서쪽 계곡에 위치하고 있어서 'West Valley'의 약칭인 WV23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1816년 지오반니 벨조니가 발견했고, 규모가 다른 파라오들에 비해서 꽤 작은 축에 속한다. 독특하게도 사람들이 낚시를 하거나 농사짓는 모습이 벽화에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파라오들의 무덤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대귀족이나 평민들의 무덤에서만 주로 등장하는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후대에 아이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지면서 그의 무덤 역시 파헤쳐졌고, 그의 이름 대부분은 지워졌으며 얼굴 부분은 훼손되었다. 그의 미라를 안치했던 관은 뚜껑이 쪼개졌고 미라는 불태워지거나 따로 처리당한 것으로 추정된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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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34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투트모세 3세의 무덤. 높은 절벽에 나있는 입구를 따라 길게 이어진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사다리꼴 모양의 홀이 하나 나온다. 홀 뒤에는 관이 안치된 매장실이 있으며, 매장실 주위에는 4개의 딸린 방들이 있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일반적인 무덤들의 형식과 굉장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무덤의 장식도 일반적인 경우와 상이하다. 매장실의 천장은 아름다운 푸른색으로 치장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투트모세 3세의 관이 있지만 이미 고대에 도굴당했다. 도굴 이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지만 1898년에 빅토르 로렛이 재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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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35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 원래는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만이 묻혀 있었으나, 주위의 무덤들이 연달아 도굴꾼들에게 털려나가자 신관들이 아직 멀쩡한 상태였던 KV35에 다른 파라오들의 미라까지 한꺼번에 묻으면서 의도치 않게 합장묘가 되어버렸다. 독특하게도 관이 있는 매장실이 기둥이 떠받치는 천장으로 인해 상하로 나뉜 것이 특징이다. 이곳에 함께 묻힌 파라오들에는 투트모세 4세, 아멘호테프 3세, 메르넵타, 세티 2세, 십타, 람세스 4세, 람세스 5세, 람세스 6세, 티예 왕비,[33] 영거 레이디[34], 그 외에 더 있을 정도로 꽤나 많은 미라들이 이곳에서 은신하며 안식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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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38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투트모세 1세의 무덤. 투트모세 1세를 위해 지어진 나름 장대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후임 파라오인 하트셉수트는 자신의 미라를 아버지 투트모세 1세와 함께 묻어주기를 바랐고, 결국 투트모세 1세의 미라를 꺼내 상술한 KV20 무덤에 함께 묻으면서 버려졌다. 이후 방치된 KV38 무덤은 연이은 홍수와 자연재해 때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완전한 돌무더기 수준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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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43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투트모세 4세의 무덤. 전형적인 제18왕조 시대의 왕릉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1903년 하워드 카터가 발견했다. 입구를 들어가면 계단과 수평 통로를 지나서 홀을 만나게 되고, 이 홀에서 ㄱ자로 꺾어져 또다시 통로를 따라 이동하고 다시 한번 꺾으면 마침내 매장실이 나온다. 매장실에는 4개의 석조 기둥이 떠받치고 있으며, 중앙에는 붉은색 관이 놓여있다. 관은 황색 상형문자와 장식으로 뒤덮여 있으며, 네프티스 이시스의 상이 관을 수호하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고대에 이미 도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하워드 카터는 발굴작업 도중 도굴꾼들이 사용한 야자수 밧줄을 발견하기도 했다. 도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재 가구나 일부 청금석 샤브티 등 소소한 부장품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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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47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십타의 무덤. 1905년 12월에 에드워드 아이르통이 발견했다. 그러나 불안정한 치안 때문에 1907년에 발굴이 중단되었고, 1912년에 해리 버튼의 주도로 다시 발굴 작업이 재개되었다. 조사 결과 KV47 내에 적혀진 십타의 이름이 모두 지워졌다가 다시 복구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아마 제19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투스레트가 자신의 무덤으로 쓰려 했다가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별 존재감이 없던 파라오 십타였지만 무덤 내부는 상당히 화려하고 보존 상태도 깔끔하다. 복도에는 날개를 뻗친 매의 모습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고, 천장에는 암청색 바탕에 노란 별을 새겨 마치 밤하늘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인부들이 사용한 횃불 때문에 생긴 그을음이나 발자국들까지 그대로 남아있을 정도로 굉장히 옛 모습이 잘 남아있는 무덤들 중 하나로 꼽힌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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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57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호렘헤브의 무덤. 1908년 2월에 에드워드 아이르통이 발견했다. 그러나 계곡 바닥에 위치한 탓에 잦은 홍수와 침수에 시달렸고, 그 탓에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 아니다. 호렘헤브의 붉은 화강암 관이 안치실 중앙에 있고, 관뚜껑이 도굴꾼들 때문에 부서진 것을 제외하면 관의 상태는 양호한 축에 든다. 내부에 있던 부장품들 대부분은 박살난 채 파편이나 일부만이 발견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무릎 아래만이 남은 수호신상과 카노푸스 단지 조각, 암사자의 머리가 조각된 왕좌 조각들이 KV57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옆의 방에서는 여성 2명의 유골이 발견되어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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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62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 단연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유명한 무덤이다. 1922년 하워드 카터가 거의 도굴당하지 않은 상태의 무덤을 발견하면서[36] 세계적인 유명세를 탔다. 사실상 투탕카멘이 수많은 이집트 파라오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유. 다른 무덤들에 비해 규모는 매우 작지만 그 속에 수많은 보물들이 담겨 있었으며, 황금 마스크를 포함해 귀중한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특히 몇 겹에 달하는 황금 관, 카노푸스 단지 등이 그대로 발견되어 이집트 고고학의 역사를 새로 쓴 엄청난 무덤이기도 하다.[37] 현재는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관광 명소지만 하루에 400명으로 관람객 수를 제한한 상태다.

7. 매체에서의 등장

이 왕가의 계곡을 소재로 쓰여진 《빛의 돌》이라는 소설이 있다.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의 작품. 왕가의 계곡에서 무덤을 파고, 안을 장식하고, 각종 부장품들을 제작하는 장인들의 마을 '진리의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의 창작소설이라고는 하나 실제 발견된 문헌에 어느정도 근거하고 있으며 등장인물들도 그 문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특징을 가져다 쓴 것. 당시 이집트의 생활상이나 과학, 의학 등의 높은 지식수준을 엿볼 수 있다. 크리스티앙 자크는 소르본 대학에서 이집트학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로, 베스트셀러 《 람세스》를 시작으로 《 투탕카멘》《검은 파라오》[38]《오시리스의 신비》같은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유희왕 DM에서는 아무래도 주인공 파라오이기 때문에 등장할 수 밖에 없다. 1960년대에 무토우 스고로쿠가 궁극의 게임을 찾아 발을 들인 곳으로서 처음 등장한다. 이후에는 주인공 진영과 도적왕 바쿠라 진영의 격전지로도 나오며, 마지막에는 아템이 명계로 돌아가느냐 마냐가 걸린 결전이자 유우기 아템이 진정한 최강을 가리기 위한 의식인 '싸움의 의식'을 치른 곳으로 나온다.[39] OCG에서는 왕가의 골짜기-네크로밸리란 카드가 왕가의 계곡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왕가의 계곡이라는 이름의 게임이 있다. 왕가의 계곡(게임) 참조.

게임 타이탄 퀘스트에서는 액트 2 이집트 미션의 던전 중 일부로 등장한다. 특히 람세스 2세의 무덤이 중요하게 나온다.

문명 5에서 이집트 문명의 고유 건물로 나온다. 정확히는 매장식 무덤(Burial Tomb)이라는 이름이긴 한데, 게임 내 설명으로 왕가의 계곡이 나온다. 사원을 대체하는데, 유지비를 먹지 않고 행복을 제공한다. 대신 이 건물이 있는 도시를 점령당하면 적에게 금을 2배로 내주지만, 도시를 뺏긴다는 것 자체가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많은 도시를 확보하는 전략을 세웠을 경우 무척 유용하며, 빠르게 지을 경우 일찍부터 신앙을 많이 확보해 우수한 종교관과 종교 교리를 선점할 수 있다.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의 DLC 파라오의 저주에서 등장한다. 네페르티티, 아케나텐, 람세스,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갈 수 있고, 이곳을 통해 사후세계인 아아루, 아텐, 헤브 세드, 두아트로 갈 수 있다.

8.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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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 일대 관광 지도

8.1.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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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셉수트의 장제전의 모습.

아비도스에 남아있는 세티 1세 장제전의 모양이 하트셉수트 장제전의 1층과 비슷하다. 단, 크기는 하트셉수트 장제전이 더 크다.

8.2. 멤논의 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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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아멘호테프 3세 장제전 앞에 세워져 있던 조각상이다. (기원전 1400년경 건설) 그리스인들이 전설 속의 에티오피아 왕 멤논의 것이라 여겨 이렇게 명명되었다. 기원전 27년 지진으로 붕괴하였다. 붕괴 당시 생겨난 틈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면서 노래와 비슷한 소리가 발생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멤논의 노래라고 불렀다. 서기 199년 로마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멤논의 거상을 보수하였고, 더 이상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8.3. 메디넷 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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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계곡 앞에 있는 많은 제전들 역시 볼 만하다.

9. 기타

왕가의 계곡에 있는 유적지 중 내부 모습을 VR뷰로 제공하는 곳이 있다.
[1] 가운데의 KV62 무덤이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이다. [2] 65개의 무덤들이 모두 파라오의 무덤인 건 아니다. 파라오가 총애하던 귀족들, 왕족들도 여기에 묻히곤 했다. 파라오가 실제로 묻힌 무덤은 20여 개에 불과하다. [3]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묘지를 태양이 지는 서쪽으로 정했다. 카이로 부근에 있는 피라미드도 나일 강 서안에 위치해 있다. 반면 나일강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므로 생존을 위한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4] 고대 이집트어로는 '타-데헨트(Ta Dehent)'로 불렸는데, '산봉우리'란 뜻이다. 하토르 여신과 관련있는 곳이며, 엘쿠른의 바위가 코브라 형상을 하고 있는 점에서 왕가를 수호하는 코브라 여신 메렛세게르의 성소로도 간주되었다. [5] 이집트 제3중간기에 속하는 제21왕조, 22왕조의 파라오들은 당시 수도였던 타니스 인근에 왕실묘지를 조성했는데 나일강과 너무 가까워서 현대에 재발견되었을 때 손상이 심했다. [6] 투트모세 1세의 선왕인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으로 추정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7] 이는 도굴꾼들이 이왕 온 김에 체내에도 있을지도 모를 귀중품들을 찾으려는 것 때문. [8] 17왕조는 중왕조와 신왕조 사이의 혼란기였던 제2중간기였다. 고왕조와 중왕조 사이에도 제1중간기라는 현시창 시기가 있었으나, 이때 파라오의 권력이 추락하고 많은 무덤들이 도굴되었다. 제2중간기는 이민족이었던 힉소스의 침입을 받아 남북 대결을 하던 시점이었는데 당시 무덤은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무덤이 아니었다. 암굴을 만들거나 땅에 매장해서 위에 작은 피라미드를 세워 표시하는 무덤이었다. [9]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들 중 하나로 꼽힌다. [10] 무덤 벽화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 [11]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만 멀쩡한데 그나마 무덤 발견 후 도둑이 들어 관에 부장되어 있던 활과 배모형 등 일부 부장품을 도난당했다. [12] 최근에 실행된 검사에 따르면 팔과 가슴의 손상은 도굴꾼들의 소행이 맞지만 입가의 구멍은 살아있을 때 생긴 상처라고 한다. 해당 미라는 The Younger Lady라는 별칭으로 검색해볼 수 있다. 약 25세 정도의 젊은 여성이며, 입가에 있는 그 상처로 인해 사망했을 거라고 한다. 상처가 아문 흔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BBC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The Younger Lady의 상처는 아마도 말발굽에 차인 듯하다고 한다. [13] 람세스 7세의 미라는 현재 발견되지 않았다. [14] 다만 그 장식이나 배치는 거대한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단순하다. [15] 람세스 5세의 무덤이었으나 훗날 람세스 6세가 빼앗아 자신의 무덤으로 썼다. [16] 람세스 2세의 후계자. [17] 원래 저 석관은 250개가 넘는 수많은 파편들로 쪼개져 나뒹굴고 있었으나 고고학자들이 하나하나 끼워맞춘 것이다. [18] 세트나크테는 KV14 무덤에 안장되었다. [19] 현재 이 석관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고, 석관 뚜껑은 케임브리지에 있다. [20] 참고로 세티 2세의 미라는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인 KV35로 옮겨졌다. 따라서 KV15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관뚜껑만이 남아있다. [21] 1817년 10월 이 무덤을 발굴한 지오반니 벨조니의 이름을 땄다. [22] 이 관은 런던에 전시되었으나 공해 때문에 어둡게 변색되어 버렸다. 영국의 문화침탈이 낳은 문화재 파손의 대표적 사례. [23] 로제타석의 해독자인 그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맞다. [24] 현재 세티 1세의 무덤에서 훔쳐간 부조나 벽화들은 피렌체 베를린의 박물관에 있다. [25] 엘렉트라 콤플렉스였다는 설이 있다. [26] 이 자갈과 모래들이 이미 굳어 반쯤 암석화되어버려서 치우는 데에 골치를 썩였다고 한다. [27] 신화 내용을 붉은색과 검은 색료로 새겨놓았다. [28] 참고로 투트모세 1세와 하트셉수트 여왕의 미라 자체는 이 무덤이 아니라 DB320이라고 하트셉수트 장제전 뒷쪽의 암벽 석굴무덤에서 발견됐다. [29] 아멘호테프 3세의 딸이자 아내였다. [30] 다만 프랑스인들이 벽화에 그려진 파라오들의 얼굴을 떼가서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하면서 일부 훼손되었다. [31] 제3중간기 시절 관리들이 미라를 옮기다가 떨어뜨려 깨진 것으로 추정. [32] 아마 호렘헤브나 람세스 왕조 시대의 파라오들이 해치웠을 가능성이 높다. [33] 아멘호테프 3세의 왕비다. [34] 이 여성 미라의 정체를 두고 갑론을박이 거세다. 일부는 이 미라가 바로 네페르티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000년대의 DNA 조사결과 투탕카멘의 어머니였다고. [35] 벽의 부조나 벽화들이 훼손이 안되었다 뿐이지 이미 고대에 도굴당한 무덤이다. 정작 십타의 미라는 KV35에서 발견되었다. [36] 아예 도굴이 안된 무덤은 아니었다. 무덤 완공 직후 2차례 정도 소규모 도굴이 있었으나, 신관들이 무덤을 재정리하고 닫은 이후로 1922년까지 그대로 봉인된 상태로 있었다. [37] 20세기 고고학계 최대의 발견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은 대단한 성과였다. [38] 고대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던 누비아 인들이 잠시나마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었던 제25왕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39] 정확히는 왕가의 계곡에 있는 '운명의 석판'이 잠든 지하신전에서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