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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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으로 표기한 민족이 5호(胡)[1]이고, 네모 안의 나라들이 16국(國)이다. 물론 5호 16국이 한 시기에 흥하고 멸망한 것은 아니다. 이 시대에는 여러 나라가 해당 지역을 통치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
304년 ~ 439년 |
1. 개요2. 국가 일람3. 평가4. 한국사와의 관련5. 오호십육국의 역대 군주
5.1.
전량(前涼)의 군주5.2.
전조(前趙)의 군주5.3.
성한(成漢)의 군주5.4.
후조(後趙)의 군주5.5.
전연(前燕)의 군주5.6.
전진(前秦)의 군주5.7.
후연(後燕)의 군주5.8.
후진(後秦)의 군주5.9.
서진(西秦)의 군주5.10.
후량(後涼)의 군주5.11.
남량(南涼)의 군주5.12.
북량(北涼)의 군주5.13.
남연(南燕)의 군주5.14.
서량(西涼)의 군주5.15.
북하(北夏)의 군주5.16.
북연(北燕)의 군주
6. 16국 이외7. 기타 창작물에서1. 개요
五胡十六國時代 / Sixteen Kingdoms중국의 역사 시대 중 하나로 크게는 위진남북조시대에 속한다. 오호십육국이라고 불리는 시대는 팔왕의난 초기, 5부部 흉노의 맹주 유연이 한왕漢이라고 칭한 서진 건무 원년(304)부터 439년 북위의 세조 태무제의 화북 통일까지 135~136년 동안을 말한다. (수나라 통일 이전)
5호는 흉노, 선비, 갈, 강, 저 등의 다섯 이상의 오랑캐[2]들을 뜻하고 16국은 이들과 한족을 포함해서 화북 지방에 세운 수많은 나라들 중 주요 16국을 뜻한다. 16국 중 전량, 서량, 북연은 한족 왕조에 속하며 나머지 13국이 이들 다섯 이민족이 세운 국가다.
흔히 착각을 해서 부가적인 설명을 하자면 '16국'은 화북 지방, 다시 말해 '북조'의 수많은 국가들을 묶은 것이고 이 시기 강남 지방, 다시 말해 '남조'는 한족 왕조인 동진이 있었다. 삼국시대를 끝내고 천하통일을 했으나 급속히 무너진 서진이 화북에서 세를 잃고 강남 지방으로 내려간 사이, 다른 민족들과 한족들이 화북에서 세운 나라들을 칭하는 명칭이 바로 오호 십육국이다.
사실 '16국'은 이 가운데서도 어느 만큼 지속하고, 영향력이 있었던 상대적으로 큰 나라만 넣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세운 나라는 16개국을 훨씬 넘는데, 선비족의 대(代)나라와 나중에 이를 부흥시켜 이어진 북위(北魏)는 16국에 안 넣고, 십육국에 안 끼워넣는 단명한 왕조도 아주 많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시작은 보통 유연(劉淵)이 뒷날 전조(前趙)로 바뀌는 한(漢)을 건국한 304년,[3] 끝은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하는 439년으로 본다. 북위의 화북 통일로 난세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오호십육국시대 만큼의 단명 왕조가 넘쳐나는 개막장까지는 아니었고 북위도 150년 정도는 지속되었다. 북위의 화북 통일 이후는 남북조시대로 따로 분류하는 편. 완전한 중국 통일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수나라가 이룩한다.
이 시기 중원(화북)은 말 그대로 난세였고, 한때 전진(前秦)이 화북을 통일도 했으나 비수대전의 패배로 다시 혼란스러워 졌다. 이때 1년도 못 버티고 무너진 왕조가 있을 정도로 수많은 왕조들이 흥망성쇄를 반복했다.[4] 전진을 기준으로 16국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기도 한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전개상의 특징은 화북 지역을 차지한 유목민 왕조들의 대립양상이 대체로 관중과 관동의 지역을 차지한 두 패권국들의 동서(東西) 대치상태로 이어지곤 했다는 점이다. 예컨데 초기(320년대)에는 흉노족의 전조와 갈족의 후조가 대립했고, 이후(350~360년대)에는 저족의 전진과 모용선비족의 전연이 대립했으며, 그 다음(380~390년대)에는 강족의 후진과 모용선비족의 후연이 대립했다. 마지막으로는 420년대에 이르러 흉노족의 북하와 탁발선비족의 북위가 대립했다.[5]
또한 이 시기에 강남 지역로 쫓겨내려간 동진 왕조 또한 수차례 북벌을 시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동진의 권신이었던 환온은 성한을 정벌하여 촉한 일대를 수중에 넣었으며, 비록 고토회복의 야망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수차례의 군사원정으로 화북의 이민족 왕조들을 크게 위협하였다. 또한 동진이 낳은 불세출의 명장 유유는 모용선비족의 남연, 강족의 후진을 멸망시키고 일시적으로 한족의 고도였던 장안과 낙양을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이 공로를 바탕으로 동진 왕조를 무너뜨리고 유송 왕조를 개창하기도 했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전개된 오대십국시대와 이름은 비슷하지만 시기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대중적으로는 중국사에서의 남북조시대에 대한 인지도가 적어 삼국지 이후 300여 년의 분열기를 모조리 오호십육국시대로 설명해버리는 오류가 빈번하게 보인다.
2. 국가 일람
흉노匈奴 | 선비鮮卑 | 저氐 | 갈羯 | 강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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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춘추전국시대와 함께 중국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혼란기이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 자치통감》이나 《 진서》를 읽으면 좋다.정말 많은 영웅들과 많이도 세워진 국가들, 그리고 수많은 막장 군주들이 있던 파란만장한 난세였다. 삼국시대처럼 잦은 전쟁으로 중원의 인구가 많이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많은 종족들이 강제 이주도 겪었다. 서진이 천하통일에 성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팔왕의 난 등 내분이 일어났고, 영가의 난으로 대표되는 유목민족의 침입과 민족 대이동, 무능한 내정 때문에 수많은 왕조와 민족이 난립하던 혼란기였다. 분열된 중국은 수나라(隋)가 성립한 뒤에야 다시 통일 왕조를 이뤘다.[6]
이 당시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운데다가 하필이면 이 앞 시대가 삼국시대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시대이다 보니 과거 삼국지를 모르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던 시절에도 오호십육국시대를 모른다고 쓴소리를 듣진 않을 정도로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가 중국 역사에서 가지는 중요성은 상당하다. 왜냐하면 과거 후한 시대부터 이민족들은 꾸준히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었고, 서진 시대에 이르면 "관중 인구 절반은 이민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사실 한나라 시대부터 한족과 중화사상의 원형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 순간부터 바로 중국 대륙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을 한족이라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한족들도 자국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 한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단 혈통 문제만이 아니라 언어적 문제 같은 점들도 있었다. 사실 명나라 시기까지 북족 같은 소수 민족들도 기록에서 확인이 된다. 명나라 시대에 사천과 운남 지방을 한족화하기 위하여 인구를 이주시키기도 했다.
한나라 시대에 정복된 남방 영토나 이전 시대의 초나라만 봐도 월계 민족이나 묘족들이 상당히 있었고 한족의 개조라 할 수 있는 한 고조 유방도 초나라에서 출발한 집단 중 하나로 한나라를 세우고 한족의 근원이 되었음을 사서에서도 보여주고 있다.[7] 실제로 초나라는 남방의 비한족계 민족 국가였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당시 장강 이남은 밀림으로 뒤덮인 다양한 민족들의 영역이었고, 고고학적 연구 결과 초나라의 유적이나 유물들은 초나라가 묘족의 나라로 출발하였음을 반증하고 있다.
물론 신화시대까지 가면 고대 중국 국가들을 민족, 혈통적으로도 연결을 할 수도 있으나 신화시대 이야기는 고대 중국의 학자들도 사실이라 믿지 않았다. 사마천도 삼황의 존재를 허구로 단정했다. 한족이나 중화사상도 혈통적 집합이라기보다 문물이나 문화적 요소가 강했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중화를 받아들이고 기준만 맞으면 한족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화북지방이 더 혼란했지만, 이 시기만 하더라도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단계에 불과했던지라 국력은 남조 쪽이 열세였다. 생산력과 인구가 평균적으로 2배 이상 화북지방이 높거나 많았기 때문에 북조가 남조보다 더 우월했고, 이 밑천은 북조인 수나라가 통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기존의 역사학 연구에서는 이 시대의 유목민 왕조들을 원· 청 같은 정복 왕조들과 구분하는 뜻에서 침투 왕조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중국[8] 체제를 바꾸기보다는 거기에 침투하여 흡수되었다는 의미로, 기존의 체제에 의존하고 독자적인 체제를 세우지 못했다는 용어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이들 유목민 왕조들도 후대의 수나 당 같은 세계제국이 성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호한체제론(胡漢體制論)[9]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4. 한국사와의 관련
오늘날 현대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한반도의 삼국시대의 구도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정립되었다.후한의 붕괴 - 위ㆍ촉ㆍ오의 대립 - 서진의 통일ㆍ 붕괴로 이어지는 연이은 혼란은, 한군현에 의해 통치되던 한반도 서북 지역에 대한 중국의 통제력도 약화시켰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고구려가 이 지역을 틈틈이 털기는 하였지만, 이 지역이 결정적으로 몰락했던 때가 바로 5호 16국 시대였다. 그리고 310년대에 고구려 미천왕은 대방군과 낙랑군을 멸망시켜 가야의 경제도 악화시켜 버렸다.
그리고 고구려의 한군현 침공 당시 백제가 대방을 돕는 과정에서, 양국은 처음으로 군사적 충돌을 하게 된다. 낙랑과 대방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가 대립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과의 싸움에서 전사하게 된다.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설립해 유교를 불교와 같이 통치이념으로 삼는다.
한편 대방과 낙랑의 몰락은, 진한 지역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본래 진한은 경주의 도시 국가 사로국을 맹주로 하는 소국 연맹체였으나, 사로국은 진한의 구조를 '금성(서라벌)'을 도읍으로 하는 영역 국가 신라로 재편시킨다. 이 재편이 완료된 것은 내물 마립간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몇 년 안 가 신라는 백제, 가야, 왜가 신라를 계속해서 침공해 오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구원으로 삼국 연합군이 섬멸되고 그 댓가로 주한미군처럼 장수왕 때까지 고구려의 내정간섭을 받는다.
그리고 변한 지역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는데, 중원의 혼란과 낙랑 및 대방의 몰락은 그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부를 축적하던 가야에도 경제적 타격을 준다.
즉 이 시기에 낙랑 및 대방에서 한군현이 사라지고, 고구려와 백제가 처음으로 직접적인 군사적 대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시 국가 사로국이 영역국가 신라로 발전하고, 가야는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때 고구려 + 신라 VS 백제 + 가야 + 왜의 연합 구도가 형성되었다.
또한 고구려의 경우, 북중국의 왕조들인 전연ㆍ후연과 충돌하였다. 선비족의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이 강성해짐에 따라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어머니와 부인을 볼모로 내주고 아버지인 미천왕의 능이 파헤쳐지며 수도였던 환도산성이 불타는 수모를 겪었다. 간신히 전진(前秦)이 이들을 병합하면서 살 만하자 앞서 언급했듯 대방 및 낙랑 지역에서 남쪽의 백제와 충돌했는데 당시 백제의 태자였던 근구수왕에게 역관광을 겪더니, 끝내 평양에서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전연ㆍ후연은 5호 16국 초기, 다른 민족보다 중국의 문화를 깊게 받아들인 나라였고, 이 힘을 바탕으로 화북의 패권을 쥘 수 있었다. 이 힘에 참패함으로써 중국 문명의 선진성을 깨달은 고구려는 불교, 율령, 유교 등 중국 문화 수용에 적극적인 태도를 지니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북연ㆍ후연을 부수며 중국 문화 수용의 선진성을 또 한 번 입증하게 된다. 이 고구려의 성공을 시작으로 백제ㆍ신라ㆍ가야ㆍ왜에서도 중국 문물 수용에 열을 올리게 된다.
얼마 뒤 전진이 붕괴하자 다시 후연이 나타났으나 이번엔 선조들의 원수를 갚을려고 복수혈전을 다짐한 광개토대왕에게 발려버리고, 그 후 북연이 만들어지는데, 북연의 풍홍이 북위의 침공을 받고 장수왕에게 백성들이랑 같이 망명 후 장수왕한테 까불다가 가족들과 함께 죽임을 당함으로써 삼연은 없어져 선조들의 원한을 완전히 갚는다. 이후 요동을 완벽하게 장악한 고구려는 강성해지면서 남북조시대 내내 그 세력을 떨친다. 이때 신라 사신도 고구려 사신과 같이 방문하고 왔다.
한국의 삼국시대를 연구에 있어 이 시대에 대한 이해가 도움이 된다. 이 당시 중국 북부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유민들의 이주행렬이 있었고, 양쯔강 이남 개발도 이때 유입된 유민들에 의해 본격화 된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가깝고 육로로도 연결된 한국에도 많은 유민들이 이민, 또는 침략의 형태로 넘어왔다. 한편 최근 서양과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도 이 시대에 대한 연구가 많은 편이다. 이런 연구를 통해 한국사와의 연결 고리인 당대 고구려와 삼국시대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뤄지길 희망하는 이들이 많다.
5. 오호십육국의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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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匈奴 | ||
전조 (304년 ~ 329년) |
북량 (337년 ~ 443년) |
북하 (407년 ~ 431년) |
|
선비 鮮卑 | |||
전연 (337년 ~ 370년) |
후연 (384년 ~ 407년) |
서진 (385년 ~ 431년) |
|
남량 (397년 ~ 414년) |
남연 (398년 ~ 410년) |
||
저족 氐族 | |||
성한 (304년 ~ 347년) |
전진 (351년 ~ 394년) |
후량 (386년 ~ 403년) |
|
갈족 羯族 | 강족 羌族 | ||
후조 (319년 ~ 351년) |
후진 (384년 ~ 417년) |
||
한족 漢族 | |||
전량 (301년 ~ 376년) |
서량 (400년 ~ 421년) |
북연 (407년 ~ 4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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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지 前仇池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양무수 | 양난적 | 양의 | 양초 | 양국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비정통 | ||
양준 | 양세 | 양찬 | 양통 | ||
후구지 後仇池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양정 | 양성 | 양현 | 양보종 | 양난당 | |
제6대 | 제7대 | ||||
양문덕 | 양보치 | ||||
탕창 宕昌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양근 | 양미홀 | 양호자 | 양미지 | 양미기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양미박 | 양미힐 | 양미승 | 양미합 | 양미옹 | |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
양미태 | 양헌정 | 양미정 | 양노감 | ||
등지 鄧至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상서치 | 상서자 | 상굴탐 | 상서팽 | 상남제 | |
등지 鄧至 | 염위 冉魏 | ||||
제6대 | 추존 | 추존 | 초대 | 말대 | |
상첨함 | 원제 | 고제 | 평제 | 해빈후 | |
환초 桓楚 | 서연 西燕 | ||||
항목 참조 | 항목 참조 | ||||
대 代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목제 | 보근왕 | 대왕 | 평문제 | 혜제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부흥 | |
양제 | 열제 | 소성제 | 헌명제 | 탁발규 | |
초촉 譙蜀 | 적위 翟魏 | 선우조 鮮于趙 | 왕씨 정권 王氏 | ||
초대 | 초대 | 초대 | 추존 | 초대 | |
성도왕 | 하남공 | 선우걸 | 태상황 | 태평제 | |
우문부 宇文部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보회 | 막나 | 막괴 | 보발 | 구불권 | |
제6대 | 제7대 | ||||
막규 | 실독관 | 걸득귀 | 일두귀 | ||
단부 段部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일륙권 | 걸진 | 무목진 | 취륙권 | 섭부진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말파 | 단아 | 단료 | 단란 | 단감 | |
제11대 | |||||
단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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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북방 '오랑캐' 왕조의 군주들은 생전에 황제 칭호 대신 천왕 칭호를 썼다가 사후에 시호를 올릴 때 황제라고 하거나, 치세 중에 천왕과 황제를 번갈아가며 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런 경우 편의상 '황제'로 통일해서 정리한다. 상세한 내용은 천왕 문서를 참고할 것. 단, 천왕이 아닌 제후 '왕'은 왕으로 표기한다.
5.1. 전량(前涼)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1대 | 태조(太祖) | 무왕(武王) | 장궤(張軌) | - | 301년 ~ 314년 | 건릉(建陵) |
2대 | 고조(高祖) | 명왕(明王) | 장식(張寔) | 영안(永安) 314년 ~ 320년 | 314년 ~ 320년 | 영릉(寧陵) |
3대 | 태종(太宗) | 성왕(成王) | 장무(張茂) | 영원(永元) 320년 ~ 324년 | 320년 ~ 324년 | 평릉(平陵) |
4대 | 세조(世祖) | 문왕(文王) | 장준(張駿) | 태원(太元) 324년 ~ 346년 | 324년 ~ 346년 | 대릉(大陵) |
5대 | 세종(世宗) | 환왕(桓王) | 장중화(張重華) | 영락(永樂) 346년 ~ 353년 | 346년 ~ 353년 | 현릉(顯陵) |
6대 | - | 애공(哀公) | 장요령(張耀靈) | - | 353년 | - |
7대 | - | 위왕(威王) | 장조(張祚) | 화평(和平) 354년 ~ 355년 | 354년 ~ 355년 | 민릉(愍陵) |
8대 | - | 충왕(沖王) | 장현정(張玄靚) | 태시(太始) 355년 ~ 363년 | 355년 ~ 363년 | 평릉(平陵) |
9대 | - | 도공(悼公) | 장천석(張天錫) | 태청(太淸) 363년 ~ 376년 | 363년 ~ 376년 | - |
5.2. 전조(前趙)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 | - | 한왕(漢王) | 유연(劉淵) | 원희(元熙) 304년 ~ 308년 | 304년 ~ 308년 | 영광릉(永光陵) |
1대 |
고조(高祖) 태조(太祖)[10] |
광문황제(光文皇帝) | 유연(劉淵) |
영봉(永鳳) 308년 ~ 309년 하서(河瑞) 309년 ~ 310년 |
308년 ~ 310년 | 영광릉(永光陵) |
2대 | - | 폐제(廢帝) | 유화(劉和) | - | 310년 | - |
3대 | 열종(烈宗) | 소무황제(昭武皇帝) | 유총(劉聡) |
광흥(光興) 310년 ~ 311년 가평(嘉平) 311년 ~ 315년 건원(建元) 315년 ~ 316년 인가(麟嘉) 316년 ~ 318년 |
310년 ~ 318년 | 선광릉(宣光陵) |
4대 | - | 효은황제(孝隱皇帝) | 유찬(劉粲) | 한창(漢昌) 318년 | 318년 | - |
5대 | - | - | 유요(劉曜) | 광초(光初) 318년 ~ 329년 | 318년 ~ 328년 | - |
6대 | - | - | 유희(劉煕) | - | 328년 ~ 329년 | - |
5.3. 성한(成漢)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 | 시조(始祖) | 경황제(景皇帝) | 이특(李特) | 건초(建初) 303년 ~ 304년 | 303년 | - |
- | - | 진문왕(秦文王) | 이류(李流) | - | 303년 ~ 304년 | - |
- | - | 성도왕(成都王) | 이웅(李雄) | 건흥(建興) 304년 ~ 306년 | 304년 ~ 306년 | 안도릉(安都陵) |
1대 | 태종(太宗) | 무황제(武皇帝) | 이웅(李雄) |
안평(晏平) 306년 ~ 310년 옥형(玉衡) 311년 ~ 334년 |
306년 ~ 334년 | - |
2대 | - | 애황제(哀皇帝) | 이반(李班) | - | 334년 | - |
3대 | - |
폐제(廢帝) 유공(幽公) |
이기(李期) | 옥항(玉恒) 335년 ~ 338년 | 334년 ~ 338년 | - |
4대 | 중종(中宗) | 소문황제(昭文皇帝) | 이수(李壽) | 한흥(漢興) 338년 ~ 343년 | 338년 ~ 343년 | 안창릉(安昌陵) |
5대 | - | - | 이세(李勢) |
태화(太和) 344년 ~ 346년 가녕(嘉寧) 346년 ~ 347년 |
343년 ~ 347년 | - |
- 소문제가 국호를 성(成)에서 한(漢)으로 바꿈.
5.4. 후조(後趙)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 | - | 조왕(趙王) | 석륵(石勒) | 태화(太和) 328년 ~ 330년 | 319년 ~ 329년 | 고평릉(高平陵) |
1대 | 고조(高祖) | 명황제(明皇帝) | 석륵(石勒) | 건평(建平) 330년 ~ 333년 | 330년 ~ 333년 | 고평릉(高平陵) |
2대 | - | 해양왕(海陽王) | 석홍(石弘) | 연희(延熙) 334년 | 333년 ~ 334년 | - |
3대 | 태조(太祖) | 무황제(武皇帝) | 석호(石虎) |
건무(建武) 335년 ~ 348년 태녕(太寧) 349년 |
334년 ~ 349년 | 현원릉(顯原陵) |
4대 | - | 초왕(譙王) | 석세(石世) | - | 349년 | - |
5대 | - | 팽성왕(彭城王) | 석준(石遵) | - | 349년 | - |
6대 | - | 의양왕(義陽王) | 석감(石鑒) | 청룡(靑龍) 350년 | 349년 ~ 350년 | - |
7대 | - | 신흥왕(新興王) | 석지(石祗) | 영녕(永寧) 350년 ~ 351년 | 350년 ~ 351년 | - |
5.5. 전연(前燕)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 | 고조(高祖) | 선무황제(宣武皇帝) [11] | 모용외(慕容廆) | - | - | - |
1대 | 태조(太祖) | 문명황제(文明皇帝) [12] | 모용황(慕容皝) | - | 337년 ~ 348년 | 용평릉(龍平陵) |
2대 | 열조(烈祖) | 경소황제(景昭皇帝) | 모용준(慕容儁) |
원새(元璽) 352년 ~ 357년 광수(光壽) 357년 ~ 360년 |
348년 ~ 360년 | 용릉(龍陵) |
3대 | - | 유제(幽帝) [13] | 모용위(慕容暐) | 건희(建熙) 360년 ~ 370년 | 360년 ~ 370년 | - |
5.6. 전진(前秦)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 | 태조(太祖) | 무혜황제(武惠皇帝) [14] | 부홍(苻洪) | - | 350년 | - |
1대 | 고조(高祖) | 경명황제(景明皇帝) | 부건(苻健) | 황시(皇始) 351년 ~ 355년 | 350년 ~ 355년 | - |
2대 | - | 여왕(厲王) | 부생(苻生) | 수광(壽光)355년 ~ 357년 | 355년 ~ 357년 | - |
3대 | 세조(世祖) | 선소황제(宣昭皇帝) | 부견(苻堅) |
영흥(永興) 357년 ~ 359년 감로(甘露) 359년 ~ 364년 건원(建元) 365년 ~ 385년 |
357년 ~ 385년 | - |
4대 | - | 애평황제(哀平皇帝) | 부비(苻丕) | 태안(太安) 385년 ~ 386년 | 385년 ~ 386년 | - |
5대 | 태종(太宗) | 고황제(高皇帝) | 부등(苻登) | 태초(太初) 386년 ~ 394년 | 386년 ~ 394년 | - |
6대 | - | - | 부숭(苻崇) | 연초(延初) 394년 | 394년 | - |
5.7. 후연(後燕)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 | - | 연왕(燕王) | 모용수(慕容垂) | 연원(燕元) 384년 ~ 386년 | 384년 ~ 386년 | 선평릉(宣平陵) |
1대 | 세조(世祖) | 성무황제(成武皇帝) | 모용수(慕容垂) | 건흥(建興) 386년 ~ 396년 | 386년 ~ 396년 | 선평릉(宣平陵) |
2대 | 열종(烈宗) | 혜민황제(惠愍皇帝) | 모용보(慕容寶) | 영강(永康) 396년 ~ 398년 | 396년 ~ 398년 | - |
3대 | - | 창려왕(昌黎王) | 난한(蘭汗) | 청룡(靑龍) 398년 | 398년 | - |
4대 | 중종(中宗) | 소무황제(昭武皇帝) | 모용성(慕容盛) |
건평(建平) 398년 장락(長樂) 399년 ~ 401년 |
398년 ~ 401년 | 흥평릉(興平陵) |
5대 | - | 소문황제(昭文皇帝) | 모용희(慕容熙) |
광시(光始) 401년 ~ 406년 건시(建始) 407년 |
401년 ~ 407년 | - |
5.8. 후진(後秦)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 | 시조(始祖) | 경원제(景元帝) [15] | 요익중(姚弋仲) | - | - | - |
- | - | 위무왕(魏武王) [16] | 요양(姚襄) | - | - | - |
- | - | 진왕(秦王) | 요장(姚萇) | 백작(白雀) 384년 ~ 386년 | 384년 ~ 386년 | 원릉(原陵) |
1대 | 태조(太祖) | 무소황제(武昭皇帝) | 요장(姚萇) | 건초(建初) 386년 ~ 394년 | 386년 ~ 393년 | 원릉(原陵) |
2대 | 고조(高祖) | 문환황제(文桓皇帝) | 요흥(姚興) |
황초(皇初) 394년 ~ 399년 홍시(弘始) 399년 ~ 416년 |
394년 ~ 416년 | 우릉(偶陵) |
3대 | - | - | 요홍(姚泓) | 영화(永和) 416년 ~ 417년 | 416년 ~ 417년 | - |
5.9. 서진(西秦)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1대 | 열조(烈祖) | 선열왕(宣烈王) | 걸복국인(乞伏國仁) | 건의(建義) 385년 ~ 388년 | 385년 ~ 388년 | - |
2대 | 고조(高祖) | 무원왕(武元王) | 걸복건귀(乞伏乾歸) |
태초(太初) 388년 ~ 400년 경시(更始) 409년 ~ 412년 |
388년 ~ 400년, 409년 ~ 412년[17] | 원평릉(元平陵) |
3대 | 태조(太祖) | 문소왕(文昭王) | 걸복치반(乞伏熾磐) |
영강(永康) 412년 ~ 419년 건홍(建弘) 420년 ~ 428년 |
412년 ~ 428년 | 무평릉(武平陵) |
4대 | - | 여무왕(厲武王) | 걸복모말(乞伏暮末) | 영홍(永弘) 428년 ~ 431년 | 428년 ~ 431년 | - |
5.10. 후량(後涼)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 | - | 주천공(酒泉公) | 여광(呂光) | 태안(太安) 386년 ~ 389년 | 386년 ~ 389년 | 고릉(高陵) |
- | - | 삼하왕(三河王) | 인가(麟嘉) 389년 ~ 396년 | 389년 ~ 396년 | 고릉(高陵) | |
1대 | 태조(太祖) | 의무황제(懿武皇帝) | 용비(龍飛) 396년 ~ 399년 | 396년 ~ 399년 | 고릉(高陵) | |
2대 | - | 은왕(隱王) | 여소(呂紹) | - | 399년 | - |
3대 | - | 영황제(靈皇帝) | 여찬(呂纂) | 함녕(咸寧) 399년 ~ 401년 | 399년 ~ 401년 | 백석릉(白石陵) |
4대 | - | - | 여륭(呂隆) | 신정(神鼎) 401년 ~ 403년 | 401년 ~ 403년 | - |
5.11. 남량(南涼)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1대 | 열조(烈祖) | 무왕(武王) | 독발오고(禿髪烏孤) | 태초(太初) 397년 ~ 399년 | 397년 ~ 399년 | - |
2대 | - | 강왕(康王) | 독발리록고(禿髪利鹿孤) | 건화(建和) 400년 ~ 402년 | 399년 ~ 402년 | 서평릉(西平陵) |
3대 | - | 경왕(景王) | 독발녹단(禿髪傉檀) |
홍창(弘昌) 402년 ~ 404년 가평(嘉平) 408년 ~ 414년 |
402년 ~ 414년 | - |
5.12. 북량(北涼)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1대 | - | 문왕(文王) | 단업(段業) |
신새(神璽) 397년 ~ 399년 천새(天璽) 399년 ~ 401년 |
397년 ~ 401년 | - |
2대 | 태조(太祖) | 무선왕(武宣王) | 저거몽손(沮渠蒙遜) |
영안(永安) 401년 ~ 412년 현시(玄始) 412년 ~ 428년 승현(承玄) 428년 ~ 431년 의화(義和) 431년 ~ 433년 |
401년 ~ 433년 | 원릉(元陵) |
3대 | - | 애왕(哀王) | 저거목건(沮渠牧犍) | 영화(永和) 433년 ~ 439년 | 433년 ~ 439년 | - |
5.13. 남연(南燕)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1대 | 세종(世宗) | 헌무황제(獻武皇帝) | 모용덕(慕容德) | 건평(建平) 400년 ~ 405년 | 398년~ 405년 | 동양릉(東陽陵) |
2대 | - | - | 모용초(慕容超) | 태상(太上) 405년 ~ 410년 | 405년 ~ 410년 | - |
5.14. 서량(西涼)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1대 | 태조 |
무소왕(武昭王) 흥성황제(興聖皇帝)[18] |
이고(李暠) |
경자(庚子) 400년 ~ 404년 건초(建初) 405년 ~ 417년 |
400년 ~ 417년 | 건세릉(建世陵) |
2대 | - |
- ,<후주(後主)>, |
이흠(李歆) | 가흥(嘉興) 417년 ~ 420년 | 417년 ~ 420년 | - |
3대 | - | - | 이순(李恂) | 영건(永建) 420년 ~ 421년 | 420년 ~ 421년 | - |
5.15. 북하(北夏)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1대 | 세조(世祖) | 무열황제(武烈皇帝) | 혁련발발(赫連勃勃) |
용승(龍昇) 407년 ~ 413년 봉상(鳳祥) 413년 ~ 418년 창무(昌武) 418년 ~ 419년 진흥(眞興) 419년 ~ 425년 |
407년 ~ 425년 | 가평릉(嘉平陵) |
2대 | - | - | 혁련창(赫連昌) | 승광(承光) 425년 ~ 428년 | 425년 ~ 428년 | - |
3대 | - | - | 혁련정(赫連定) | 승광(勝光) 428년 ~ 431년 | 428년 ~ 431년 | - |
5.16. 북연(北燕)의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1대 | - | 혜의황제(惠懿皇帝) | 고운(高雲) | 정시(正始) 407년 ~ 409년 | 407년 ~ 409년 | - |
2대 | 태조(太祖) | 문성황제(文成皇帝) | 풍발(馮跋) | 태평(太平) 409년 ~ 430년 | 409년 ~ 430년 | 장곡릉(長谷陵) |
3대 | - | 소성황제(昭成皇帝) | 풍홍(馮弘) | 태흥(太興) 431년 ~ 436년 | 430년 ~ 436년 | - |
6. 16국 이외
- 단부
- 대 - 뒷날의 북위
- 등지
- 서연
- 선우조[19]
- 염위: 한족인 염민이 업군에서 세운 나라. 단명 왕조였지만 민족 구성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나 했는데, 염민의 명령(살호령: 오랑캐를 죽여라)으로 후조의 지배 민족이던 갈족을 제노사이드시켰다. 며칠 동안 20여만 명이 죽었는데, 눈이 깊숙이 패이거나, 눈동자가 조금이라도 푸른 사람들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 우문부
- 적위
- 구지
- 탕창
- 초촉
- 환초
7. 기타 창작물에서
삼국지의 시대 때문에 철저히 묻힌 시대다. 후삼국지가 오호 십육국 시대의 초반기를 다루지만, 전조의 흉노족 유요는 촉한 북지왕 유심의 아들이고 후조의 갈족 석륵이 조운의 손자라는 괴작. 설사 괴작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 취급은 삼국지 연의에 종속된 2차, 3차 창작이다. 저 요소 때문에 오나라의 멸망까지 다룬 스토리 플롯의 2차 창작물에서 우스갯소리로 이어서 5호 16국도 다뤄달라는 독자들의 개드립도 자주 보인다. 국내에선 대표적인 케이스가 삼국전투기인데 실제 진나라의 막장화를 암시하면서 끝난 완결화 댓글 보면 진짜 저런 개드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또한 화이사상 등 중국인의 기준으로 오호십육국시대보단 삼국시대가 더 감정이입하기 쉬운 시대여서 그렇기도 하다. 오호십육국은 중국사에서 한족보단 소수 민족들이 주류가 되었던 정말 몇 안 되는 시기이다. 그 당시에도 선민 사상이 강했던 한족이 대다수였던 중원 일대에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발심을 가져왔고, 이들보다는 과거 영광스러운 한나라 시기의 말미였던 삼국지의 인물들에게 더 호의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삼국지 인물들은 기존 정의의 투사처럼 보여줄 수 있었던 유교 사상으로 해석되기 쉬운 사람들이다. 반면 '오랑캐'라고 불리는 소수 민족들은 이러한 중국의 사상, 관점이 그다지 깊게 뿌리내리지도 않았으며 이러한 전통을 지킬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한나라의 문화, 제도, 사상 등이 다른 이방인이라 그들만의 기준으로 중국을 대하였고 필연적으로 나타날 차별과 심한 모멸감을 한족들에게 줬던 것이다. 즉 한족 민중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기 힘든 시기이기에 창작물에서 자주 다루지 않았다. 후삼국지조차 중국인이 아닌 어느 일본인 소설가가 삼국시대와 과하게 엮은 것이었고, 삼국지평화가 있던 시기에도 소수 민족들을 자신들과 동격의 영웅으로 생각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해서 삼국지연의가 끝나는 시점도 유연의 한나라가 승리하는 것이 아닌 진의 통일까지만 다뤘다. 마찬가지로 이런식으로 어둠의 시대로 폄하한 것에 익숙한 한국인들도 중국 한족의 관점으로 평가하기에 이 시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사역사학 등 환빠들이 생각보다 이 시기를 자주 다루는데 이 시대에 대한 무지가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기도 하다. 기본적인 지식조차 없으니 중국의 혼란기였고 제대로 기록을 안 한 것은 우리가 지배한 시기였기 때문 ㅇㅇ이라는 얼토당토한 논리로 자신들의 판타지로 이 시대를 곧잘 다루는 편이다. 마침 한국사, 특히 고구려의 전성기와 동시대라 엮이기도 쉬우니.. 이 시대가 얼마나 중국인들이 원하지 않는 내용들로 가득차있는지 알아보지도 않는 듯. 그 외 고구려, 부여와 엮이는 선비족도 있고, 무엇보다 선비족이나 흉노족조차 한민족의 형제 및 한민족의 조상급으로 취급하는 환빠도 있어서 그렇다. 그 외 백제가 중국 대륙에 진출하여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는 요서경략설의 영향도 있다. 문제는 이걸 확대해석하거나 자신들 입맛에 유리하게 해석한다는 게 문제점이다.
[1]
한족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다섯 오랑캐라는 뜻.
[2]
오행과 연관시켜 '다섯' 오랑캐로 정리를 한 것이지 분류하기에 따라서는 종류가 줄어들 수도 늘어날 수도 있다.
[3]
전량이 건국된 301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전량 초기는 반독립적인 국가 형태라서 다소 애매한 편.
[4]
고우영 십팔사략에서 감수를 맡은 쓰촨대학 역사 교수가 "그걸 다 외우려들었다간 끝이 없으니 그냥 그런 게 있었다 정도로 넘어가라."라고 말했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중국사를 뱀으로 표현한 그림에서는 외피가 으스러진 초한시대, 깊게 베인 삼국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살까지 뜯겨나가 뼈까지 드러날 정도의 상처로 혼란상을 묘사한다.
[5]
이 구도는 이후인
남북조시대에도
서위와
동위,
북주와
북제로 반복된다.
[6]
다만 수나라도 2대 양제의 실책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수·당 교체기의 군벌 할거가 이어졌다.
[7]
다만 유방의 선조는 본래 진(秦)과 위(魏)의 국경 근처에 살았으며 유방의 고향인 패국도 사수 일대로 장강과는 거리가 멀다.
[8]
지리적으로는 중원, 민족적으로는 한족
[9]
서울대학교 박한제 교수가 주창한 이 이론은 한국 역사학계가 세계 역사학계에 기여한 사실상 유일한 업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호한체제론은 동진-남조사를 도외시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고 박한제 교수는 이에 대해 1995년에 '교구체제'라는 이론 아래 동진-남조사를 바라보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한편 유목민족사를 꾸준히 연구해 온 정재훈 경상국립대학교 교수는 2023년에 발간한 저서 <흉노유목제국사>의 말미에서 호와 한의 '대결'과 '융합'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난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0]
유요가 추증
[11]
경소제 추증
[12]
경소제 추증
[13]
남연(南燕) 헌무제 추증
[14]
경명제 추증
[15]
무소제 추증.
[16]
무소제 추증.
[17]
400년 ~ 409년 사이 후진(後秦)에 복속
[18]
당고조 추증
[19]
그
1년 왕조의 정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