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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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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후조 제7대 황제
석지 | 石祗
출생 불명
후조 위군 업성
(現 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사망 351년 4월
후조 광평군 양국현
(現 허베이성 싱타이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7대 황제
350년 3월 ~ 35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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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성씨 석(石)
지(祗)
부황 태조 무황제
형제자매 13남 중 11남
불명
작위 신흥왕(新興王)
연호 영녕(永寧, 350년 ~ 3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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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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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후조(後趙)의 제7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2. 생애

태녕 원년(349년) 12월, 양국(襄國)을 진수하던 석지는 황제 석감이 곤화전에서 석민(石閔) 이농 제거에 실패해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섭두(灄頭)의 강족 요익중, 방두(枋頭)의 저족 부홍과 함께 군대를 합쳐 석민과 이농을 주살한다는 명분으로 격문을 뿌렸다. 이에 석민은 여음왕 석곤(石琨)을 대도독으로 삼아, 태위 장거(張擧), 시중 호연성(呼延盛)과 함께 군사 70,000명을 거느리고 석지를 토벌케 하였다.

청룡 원년(350년) 정월, 석민이 국호를 "위(衛)"로 고치고, 자신의 성씨를 "이(李)"로 고쳐 대사면령을 내렸다. 태재 조서(趙庶), 태위 장거, 중군장군 장춘(張春), 광록대부 석악(石鍔), 무군장군 석녕(石寧), 무위장군 장계(張季) 등 후조의 공경대신들은 양국으로 달아나 석지에게 의지하였다. 여음왕 석곤은 기주로 가 할거하기 시작하였고, 부구(滏口)의 무군장군 장침(張沈), 석독(石瀆)의 장하도, 여양(黎陽)의 건의장군 단근(段勤), 상벽(桑壁)의 영남장군 양군(楊群), 양성(陽城)의 유국(劉國), 진류(陳留)의 단감, 섭두의 요익중, 방두의 포홍 등은 제각기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며 이민을 따르지 않았다.

영흥 원년(350년) 2월, 이민이 황제 석감을 살해하고 국호를 "대위(大魏)"로 고치고 연호를 영흥으로 개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성 또한 "염(冉)"으로 바꾼 후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청룡정변)

영녕 원년(350년) 3월, 업성에서 황제 석감이 염민에 의해 살해된 것을 알게 된 석지는 양국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는 영녕(永寧)으로 개원하니, 각지에서 주와 군을 점거하던 6종족의 이민족들이 모두 석지에게 호응하였다. 석지는 조서를 내려 기주의 여음왕 석곤을 상국, 요익중을 우승상, 친조왕(親趙王)으로 삼아 예우를 더하였다. 또, 요익중의 아들 요양을 표기장군, 예주자사로 임명하고 신창공(新昌公)에 봉했으며, 부홍의 아들 부건을 도독하남제군사(都督河南諸軍事), 진남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연주목으로 임명하고 악양군공(略陽郡公)에 봉했다.

영녕 원년(350년) 4월, 여음왕 석곤으로 하여금 군사 100,000명을 이끌고 위나라의 수도인 업성을 치게 하였다.

영녕 원년(350년) 6월, 석곤의 군대가 업성 북쪽 한단(邯鄲)을 점령하며 남하하였고, 양성(陽城)에서 염민에게 저항하던 진남장군 유국 또한 석곤을 돕기 위해 무리를 모아 번양(繁陽)에서부터 치고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염위의 위장군 왕태(王泰)가 한단을 공격하자, 석곤은 대패하여 전사자 10,000여 명을 낸 채 패주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유국은 다시 번양으로 돌아갔다.(한단 전투)

영녕 원년(350년) 7월, 진류에 있던 단부의 단감이 후조를 배반하고 광고(廣固)에서 제왕(齊王)을 자칭하며 독립하였다.

영녕 원년(350년) 8월, 석독의 장하도, 여양의 단근, 번양의 유국, 근돈(靳豚)이 창성(昌城)에서 연합하여 업성을 공략할 계획을 꾸몄다. 이에 염민은 친히 출정하여 창정(蒼亭)에서 장하도 등을 대파해 28,000명을 죽이고, 음안(陰安)까지 추격하여 근돈을 참살한 뒤 남은 무리를 전부 포로로 사로잡았다.(창정 전투)

영녕 원년(350년) 11월, 염민이 보•기 100,000명을 거느리고 양국을 쳤다.

영녕 2년(351년) 정월, 부홍 사후 저족 무리를 이끌던 부건이 장안을 점령하면서 옹주와 진주를 장악하고 전진을 세워 후조로부터 독립하였다.(전진 건국)

영녕 2년(351년) 2월, 염민이 양국을 포위한지 100여 일이 지났을 때, 위급한 상황에 몰린 석지는 황제 칭호를 스스로 포기하고 조왕(趙王)을 칭하였다. 석지는 태위 장거를 보내 전국옥새를 전연의 연왕(燕王) 모용준에게 바침으로써 구원군을 청하는 동시에, 중군장군 장춘을 보내 요익중에게도 구원을 청하였다. 요익중은 곧바로 요청에 응하여 아들 요양에게 기병 28,000기를 주면서 염민을 반드시 죽이고 올 것을 당부하였고, 전연의 모용준 역시 어난장군 열관에게 30,000 군사를 주어 양국을 구원케 하였다. 염민은 대사마 종사중랑 상위(常煒)를 파견해 모용준을 설득하려 했지만, 이번 기회를 이용해 염위를 무너뜨릴 생각이었던 모용준은 상위를 용성(龍城)에 억류시켰다.

영녕 2년(351년) 3월, 여음왕 석곤도 기주에서 다시 병력을 모아 양국을 구원하였다. 염민은 거기장군 호목(胡睦)을 보내 장로(長蘆)에서 요양을 막게 하고, 장수 손위(孫威)를 보내 황구(黃丘)에서 석지를 막게 하였으나, 둘 모두 패하여 병력만 잃은 채로 귀환하였다. 분노한 염민은 왕태의 반대를 뿌리치고 양국을 포위하던 병력까지 거두어 요양과 석곤의 군대를 요격하였다. 요양, 석곤, 열관은 3면으로 염민을 공격하였고, 석지 또한 성에서 나와 염민의 후방을 급습하니, 결국 염민은 대패하여 기병 10여 기과 함께 겨우 전장을 빠져나와 업을 도망쳤다.

이 전투로 염민의 10만 병력을 궤멸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고, 참전했던 석박, 노심 등 수많은 장수들도 난전 중에 전사하였다. 염민에게 항복했던 이민족 율특강(栗特康)이 염민의 차남인 태원왕 염윤(冉胤)과 상서좌복야 유기(劉琦)를 붙잡아 석지에게 바치면서 목숨을 구걸하니, 석지는 투항을 받아주고 잡혀온 이들을 전부 살해하였다.(양국 전투)

양국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석지는 이 기세를 몰아 염위를 멸망시키고자 유현에게 70,000 군사를 주어 업성을 침공하였다. 유현의 군대가 업에서 23리 떨어진 명광궁(明光宮)에 주둔하자, 염민은 업성의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친히 유현을 요격해 대파하였고, 도망치는 후조군을 양평(陽平)까지 추격해 30,000여 명을 참수하였다. 이에 유현이 두려워 염민에게 석지를 죽이고 항복하겠다 청하니, 그제서야 염민은 추격을 멈추고 돌아갔다. (명광궁 전투)

영녕 2년(351년) 4월, 양국으로 돌아온 유현은 이내 조왕 석지를 비롯해 낙안왕 왕병(石炳), 태재 조서 등 후조의 대신 10여 명을 살해하고, 석지의 수급을 업으로 보냈다. 염민은 석지의 수급을 업의 대로변에서 불태우고, 유현을 상대장군, 기주목, 대선우로 삼았다. 이로써 후조는 건국 32년만에 멸망하였다.(후조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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