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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5 18:58:35

양정(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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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지 前仇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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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구지 後仇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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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파 단아 단료 단란 단감
제11대
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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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A4B2D><colcolor=#ece5b6>
후구지 초대 군주
양정 | 楊定
출생 불명
전구지 무도군 구지산
(現 간쑤성 룽난시 청현)
사망 394년 10월
서진 천수군 평천
(現 간쑤성 톈수이시 자링강 부근)
능묘 없음
재위기간 구지공(仇池公)
385년 11월 ~ 389년 10월
농서왕(隴西王)
389년 10월 ~ 3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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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A4B2D><colcolor=#ece5b6> 성씨 양(楊)
정(定)
부친 양불노(楊佛奴)
배우자 부씨
자녀 없음
불명
작호 농서왕(隴西王)
시호 무왕(武王)
}}}}}}}}}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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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의 장수이자 후구지의 초대 군주.

선소제 부견의 딸과 혼인하여 전진의 황실과 인연을 맺었지만, 비수대전 이후로 전진이 패망하고 부견이 사망하자 독립하여 후구지를 건국하였다. 다만 그 당시 독립했던 여느 세력들과는 달리 전진의 부씨가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배반하지 않았다.

2. 생애

영화 11년(355년) 정월, 양초에게 살해당하고 구지공 자리를 찬탈당한 양의의 동생 양송노(楊宋奴)가 외조카 양식왕(梁式王)을 교사하여 구지공 양초를 살해하였다. 이에 양국(楊國)은 양송노와 양식왕을 모두 제거하고 스스로 구지공에 올랐다. 양송노의 두 아들 양불로와 양불구(楊佛狗)가 전진으로 도망쳐 천왕 부견에게 투항하니, 부견은 양불로의 아들 양정에게 자신의 공주를 시집보내 사위로 삼는 동시에 상서에 임명하였다. 이후 영군장군으로 옮겨졌다.

건원 21년(385년) 3월, 비수대전에서 완패한 천왕 부견이 도읍 장안에서 서연 모용충과 치열하게 승패를 주고 받다가, 기근이 들어 성 안의 양식이 다하였고, 오랜 전투로 인해 병사들도 피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양정은 장안성 밖으로 출격하여 모용충을 공격해 대파하고, 선비족 10,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들어왔다. 이에 천왕 부견은 양정이 잡아온 선비족 포로를 모조리 갱살하였다.

건원 21년(385년) 5월, 모용충이 아방성에서 재정비를 마치고 다시 공격을 감행해오자 양정이 나가서 싸웠지만, 이번에는 도리어 패하여 모용충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모용충은 양정의 용맹하고 날렵함을 사모하여 살려주었고, 모용충의 측근 고개(高蓋)가 그를 자신의 양자로 들였다.

경시 원년(385년) 11월, 거기대장군 고개가 강족 요장을 토벌하라는 모용충의 명령을 받고 정벌에 나설 때 그와 함께 종군하였다가, 신평(新平)에서 고개가 요장에게 패하여 사로잡히자 양정은 전장을 빠져나와 농우(隴右)로 도망쳤다. 농우에 도착한 양정은 옛 구지의 무리를 소집하면서 농우의 여러 군벌들에게 사자를 파견해, 진양(晉陽)에 있는 애평제 부비를 영접해 요장을 무찌르자 설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애평제 부비가 조서를 내려 양정을 옹주목(雍州牧), 표기대장군으로 삼으니, 양정은 구지에서 북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역성(歷城)으로 치소를 옮겨 100경의 구지 일대를 확보하였다. 그러자 이민족, 한족 백성 1,000여 호가 양정에게 귀부하였고, 마침내 어느정도 세력을 갖춘 양정은 용양장군, 구지공(仇池公)을 자칭하였다.(후구지 건국)

태초 2년(387년) 3월, 전사한 애평제 부비의 뒤를 이어 전진의 황제로 즉위한 고제 부등이 사자를 보내 양정을 익주목(益州牧)•대장군으로 삼았다.

태초 2년(387년) 4월, 양정이 진주(秦州)를 진수하던 후진의 정서장군 요석덕을 압박하자, 요석덕은 경양(涇陽)으로 물러나 굳게 지켰다. 이에 양정은 노왕 부찬(苻纂)과 군세를 합쳐 경양에서 요석덕을 대파하였다.(경양 전투) 이때 요장이 음밀(陰密)에서 나와 요석덕을 구원하러 달려오자, 양정과 부찬은 부육(敷陸)으로 잠시 후퇴하였다.

태초 2년(387년) 9월, 요장이 진주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사촌동생 요상을 농성(隴城), 요형노(姚邢奴)를 기성(冀城), 요상(姚詳)을 약양(略陽)에 각각 배치시켜 지키게 하였다. 양정은 진군하여 농성에서 요상(常)을 격파해 참수하고, 기성을 함락시켜 요형노를 붙잡았다. 농성과 기성이 모두 순식간에 양정의 손아귀에 떨어지자, 약양을 지키던 요상(詳)은 음밀로 달아나버렸다. 이로써 진주 일대를 장악한 양정이 진주자사•농서왕(隴西王)을 자칭하니, 전진 조정에서 그가 칭한 관작을 그대로 인정해주었다.(진주 탈환)

태초 2년(387년) 10월, 고제 부등이 사자를 보내 양정을 좌승상(左丞相)•상대장군(上大將軍)•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진양2주목(秦梁二州牧)으로 삼고, 함께 후진을 공격하기로 약조하였다.

연초 원년(394년) 10월, 고제 부등이 후진과의 전투를 벌이다 사로잡혀 참수당하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황제 부숭이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쫓겨 양정에게로 도망쳐왔다. 양정은 사마 소강(邵彊)을 남겨 진주를 수비케 하고, 자신은 부숭과 20,000 군사를 이끌고 천수군을 침구해 걸복건귀를 공격하였다. 이에 걸복건귀도 기병 30,000기를 나누어 양주목(凉州牧) 걸복가탄(乞伏軻彈), 진주목 걸복익주(乞伏益州), 입위장군 월질힐귀(越質詰歸)로 하여금 양정을 막게 하였다. 양정과 부숭이 평천(平川)에서 걸복익주를 패주시키자, 걸복가탄과 월질힐귀가 두려워 후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걸복가탄의 사마 적온(翟瑥)이 칼을 뽑아 걸복가탄을 협박하는 수준으로 반대하여 그만두고, 기병을 거느려 평천으로 나아가 양정과 격돌하였다. 그때 월질힐귀와 도망쳤던 걸복익주도 달려와 걸복가탄을 도우니, 양정의 구지군은 결국 패하여 전멸하였고, 양정, 부숭을 포함해 17,000여 명이 전사하였다.(평천 전투) 걸복건귀는 승세를 타고 후구지의 영역인 농서(隴西) 일대를 모두 빼앗았다.

양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그의 사촌형 양성이 스스로 구지공을 칭하며 남은 무리를 이끌었고 동진으로 사자를 파견해 칭번하였다. 그리고 전사한 양정은 '무왕(武王)'으로 추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