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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B190F><colcolor=#ece5b6> 우문부 말대 수령 북주 추존 황제 우문일두귀 | 宇文逸豆歸 |
|
묘호 | 세종(世宗) |
시호 | 소무황제(昭武皇帝) |
성씨 | 우문(宇文) |
휘 | 일두귀(逸豆歸) |
부친 | 우문씨(宇文氏) |
생몰 | ? ~ ? |
재위 | 우문부 수령 |
? ~ 3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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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문부의 추장.2. 생애
동부대인을 지내다가 333년에 우문걸득귀를 쫓아내고 우문부를 차지했으며, 모용황이 병사를 인솔하여 그를 토벌하기 위해 광안에 주둔하자 우문일두귀는 두려워져 화친을 요청했다.336년 여름 6월에 단료가 모용황을 공격하자 안진을 공격해 단란을 구원했지만 단부의 군대는 격파되었고, 모용황이 안진으로 오자 치중을 버리고 도주했다가 봉혁의 추격을 받아 격파당했으며, 모용황의 견제로 단부로 망명했던 모용한이 단부의 몰락으로 귀순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명성과 재주를 시기해 꺼렸는데, 이를 안 모용한이 거짓으로 미친 척을 해서 우문부의 관원들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전연에서는 시기와 혐의를 받은 모용한이 달아나 다른 나라에 있었지만 전연을 위해 계책을 세운 것을 알아서 사람을 파견해 모용한을 불러들였는데, 340년 2월에 모용한이 탈출하면서 우문일두귀가 가지고 있었던 유명한 말을 가져갔고, 동시에 아들 두 명이 전연의 인질이 되었다.
우문일두귀는 날랜 기병 100여 명을 시켜 추격하게 했지만 놓쳤으며, 343년에 막천혼을 시켜 전연을 공격했으나 패배했고 단란을 잡아 후조에 보냈다. 344년에 모용황의 공격을 받아 섭야간을 시켜 막게 했지만 섭야간은 전사했으며, 우문부의 군사들이 저절로 무너지자 우문일두귀는 사막의 북쪽으로 달아났고, 이로 인해 우문부는 흩어져서 없어졌다.
묘비명에 따르면 묘호는 세종(世宗)[1]이며, 시호는 소무황제(昭武皇帝)[2]라고 전해진다. 북주 건국 이후 추존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