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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3:40:11

율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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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3. 각국의 제도
3.1. 중국
3.1.1. 당나라3.1.2. 송나라3.1.3. 명나라3.1.4. 청나라
3.2. 한국
3.2.1. 고구려3.2.2. 백제3.2.3. 신라3.2.4. 발해3.2.5. 고려3.2.6. 조선
3.3. 일본3.4. 베트남
4. 기타5. 같이보기

1. 개요

율령제()는 수나라 · 당나라에서 정립되어 동아시아 문화권의 국가들로 확산된 법계이다. 기원은 진ㆍ한의 율법이 기원이며, 위진남북조시대의 국가들이 변형하다가 수나라ㆍ당나라 때 이들의 통치제도를 변형하면서 율령격식의 형식이 정립되었다. 근대화를 거치며 현재는 모두 폐지되어 역사 속에만 남아있다.

2. 내용

정확히는 율령격식의 4가지가 있다. 율령제는 에서부터 기원한다. 이때만 해도 율은 기본법, 령은 추가법을 의미했다. 이후 서진 사마염 시대인 268년에 태시율령(泰始律令)을 제정, 반포해 율과 령으로 구분했으며, 남북조시대 국가는 격과 식을 보완하여, 당나라 때인 7세기 초에 율령격식의 체계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 우리나라로 수입되었다. '율령을 반포했다'는 내용이 보이면 법치국가로서 준비를 갖추고 나아갈 것을 선언했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민법은 따로 없었고, 민사재판은 통치행위의 일환으로 여겨졌다.

3. 각국의 제도

이 문서도 참조

3.1. 중국

3.1.1. 당나라

의 율령은 당현종 개원(開元)년간의 율문(律文) 12권, 당육전 30권과 당률소의를 그 범위로 잡을 수 있다. 당의 율령은 건국 초부터 계속해서 개정을 거쳐 738년 당육전이 편찬되고, 이후 율을 해석한 당률소의를 통해 완성되었다. 이후 당육전은 동아시아 율령제의 기본 법전 모델이 된다.

3.1.2. 송나라

송나라는 율령보다는 칙령이 우선되어 칙령격과 서식의 법체계가 주류가 되었다. 판례도 법제화되어 같이 쓰였다.

3.1.3. 명나라

명나라는 다시 칙령보다 율령이 우선되었고, 대명률 대명회전이 편찬되었다.

3.1.4. 청나라

청나라는 령, 격, 식이 사라지고 율만 남았으며, 칙령과 율이 주류가 되었다.

3.2. 한국

3.2.1. 고구려

고구려 중국 율령제의 영향을 받았지만 뿌리는 부족국가 시대 이래의 법제를 계승, 발전시킨 형태의 고대법으로서 삼국사기 소수림왕이 시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의 율령은 모두 중국이 모델이었고, 토착화하여 최적화를 시킨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독자적이었으며 수나라, 당나라의 성립이 오히려 고구려 고유의 율령체제를 무너뜨리게 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3.2.2. 백제

백제의 율령에 대해서는 기록에 남아있는 율령 반포 기록이 없는데, 아직 연구가 많이 진전되지 않았기에 확실하게 아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가 반포한 율령이 백제만 없었을 가능성은 낮으며, 무령왕릉 지석에서 반포 흔적을 찾을 수 있기도 해서[1] 고이왕, 근초고왕 무렵 또는 5~ 6세기쯤 반포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불분명하다거나 이런 부분은 그냥 생략하고 고이왕 때 율령 반포라고 가르치던게 통설이었다. 삼국사기 고이왕 29년에 '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장물의 3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금고하게 하라고 명령했다.'라는 기록을 율령 반포의 근거로 본 것이다. 하지만 근거가 부실하다고 판단했는지, 2015 개정 교육과정부터는 백제의 율령 반포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3.2.3. 신라

신라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쓰인 내용을 바탕으로 법흥왕 때 율령이 반포되었다고 보고 있다. 역사는 여러 해석이 있는 학문인 만큼 조금 더 지나서 신라가 한반도 통일할 때쯤 중국과의 교류에서 율령이 전래되어 신라만의 율령이 완성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주류는 아니다.

태종 무열왕은 즉위하자마자 율령을 개정했고 문무왕의 유조를 통해 율령격식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곧 개정하라고 명령한 것을 보아 신라의 율령은 법흥왕의 원형으로부터 꾸준히 개량되었으며, 통일신라에 들어서는 법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관청 율령전(律令典)을 설치해 6명의 율령 박사를 두어 율령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3.2.4. 발해

발해는 백제보다 더 기록이 미미하여 선왕, 대이진 시기에 율령 구축에 힘썼다는 내용 외에는 알 수 없으나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독자적으로 운용한 3성 6부제를 보았을 때 당의 제도와 발해 고유의 제도를 적절히 섞어 운용했을 가능성은 있다.

3.2.5. 고려

고려의 율령제는 고려사 형법지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신라의 율령제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송나라의 영향도 받은 것 같다.

3.2.6. 조선

조선의 율령제는 대명률 대명회전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변형을 하고 고려로부터 내려오는 관습법 등을 기반으로 경국대전을 편찬하여 집대성하였다. 후에 속대전, 대전회통 등을 추가로 편찬하여 보충하였다.

3.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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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율령은 668년 덴지 천황(天智) 치세에 오미 령(近江令)이 제정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일본서기에 해당 기사가 없고[2] 궁 후대인 8-9세기에 편찬된 후지와라씨 가전이나 3대 격식[3] 중 하나인 홍인격식의 서문에만 언급되어 그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대해 홍인격식 등의 책이 당시 천황인 덴지 천황의 계통을 중시해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란 견해가 있다. 후에는 덴무 천황이 제정을 명하고 지토(持統) 3년(689)에 완성된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飛鳥爭御原令)이 시행된다. 이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에 대해서는 실존이 인정되며, 현재 일본사학계는 덴무 천황의 이 령이 율령 반포의 중요한 초석이었을 것으로 본다. 내용에 대해서는 호적 작성 주기에 대한 것, 지방 제도에서 50호를 1리로 정한다는 것, 반전수법의 기초 등이 들어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다이호 율령의 실질적인 예비 단계였다는 것이다. 이때 율령체제를 설명함에도 오오미 령과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에 대해서, 율령이라 하지 않고 령이라고만 하였다. 즉 율은 없고, 령만 있었다는 의미이다.

몬무(文武) 연간인 701년 다이호 율령(大寶律令)이 완성되면서 일본에는 처음으로 율과 령이라는 두 가지 법전이 갖춰지게 된다. 그 후 718년 요로 율령(養老律令)이 반포되었다.

일본에서는 율령제가 오래 정착되지 못한 채 섭관 정치, 원정, 막부 등 율령제로부터 일탈된 정치 형태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율령제라는 말을 중근세의 막부 정권과 대비하여 천황의 권한이 비교적 강했던 고대 일본의 체제를 일컫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3.4. 베트남

베트남 최초의 본격적인 성문법은 대월 리 왕조 태종 1042년에 반포한 《형서》(刑書)였다. 《형서》에서는 당률을 따라 태장도유사 오형을 규정하고 있다. 율과 령이 모두 갖춰진 베트남 최초의 율령은 리 왕조 후기인 1157년, 영종이 반포하였는데, 여기에는 상속 백성 생활에 대한 보다 상세한 규정이 있었다. 쩐 왕조 초기인 1226년에도 개정된 율령이 반포되었으며, 쩐 왕조 시기에는 리 왕조 시기와 비교하여 훨씬 다양한 법전이 만들어지고 내용도 세분화되었다. 후 레 왕조 응우옌 왕조 시대에도 법률은 당시의 실정에 맞게 고금의 문헌을 참고하여 작성·반포되었다.

베트남의 법은 중국의 것을 기본으로 하여 지역의 실정에 맞게 조금씩 변화하여 갔는데, 특히 후 레 왕조 성종 대의 《국조형률》(國朝刑律)은 당률을 참고하기는 하였지만, 중국과 다른 베트남의 전통에 따라 부인의 독립적인 재산권을 인정하고 제사 상속권, 여성의 이혼 청구권 등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이처럼 수백 년 동안 독자적인 법 전통이 이어져 왔으나 중국의 영향력은 전통 왕조 시대 후기까지 짙게 남았다. 응우옌 왕조 초기 1815년의 《황월율례》(皇越律例)를 보면 청나라의 《대청률》을 상당 부분 그대로 계수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교화가 가속화된 응우옌 왕조 시대에는 레 왕조 시대보다 여성의 법적 권리가 축소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는데, 가령 《황월율례》에서는 남편이 부인의 재산을 포함한 가족 재산 전체를 처분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가졌다.

4. 기타

율령제의 근간은 중국이지만 일본학계에서 유독 율령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고대국가'가 율령제의 성립으로 완성되었다는 시각 때문인데 실제로 이는 일본 역사에서는 상당히 합리적인 해석인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일본사의 사례를 일반화시키고자 한국, 중국의 경우에도 율령제의 존재유무로 고대국가 성립여부를 판정하려 든다는 점. 그러나 이미 율령제 성립 한참 전인 기원전 3세기에 국가를 넘어 제국을 성립시킨 경험이 있는 중국 학계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한국 학계에서는 한동안 심도있게 논의되었으나 현재는 국가형성론과 관련하여 일본의 율령제 연구를 참고하는 정도.

5. 같이보기


[1] 무령왕릉 지석에 새겨진 기록 중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고 율령을 언급한 구절이 있다. [2] 조정(朝庭)과 행로(行路)에 대한 예절을 반포한 기사가 670년에, 조정의 관위와 법도를 선포한다는 기사가 671년에 있을 뿐이다. 이것조차 율령이라기보다는 그저 예를 선포한 것에 불과하다. [3] 율령의 보조 법령을 격식이라 한다. 즉 보조법들을 규정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