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스트 이탈리아 두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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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토 무솔리니 |
국가 파시스트당 당수 ·
공화 파시스트당 당수 이탈리아 왕국 총리 · 이탈리아 공화국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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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토 무솔리니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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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제27대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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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초대 두체
베니토 안드레아 아밀카레 무솔리니 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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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 1883년 7월 29일 | ||
이탈리아 왕국
로마냐 포틀리체세나도 (現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 프레다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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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년 4월 28일 (향년 61세) | ||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귀리노 (現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밀라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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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에밀리아로마냐 프레다피오 산 카시아노 묘지 | ||
재임기간 | 파시스트 이탈리아 두체 | ||
1921년 11월 19일 ~ 1945년 4월 25일 | |||
제50대 외무부 장관 | |||
1922년 10월 30일 ~ 1929년 9월 12일 | |||
제27대 총리 | |||
1922년 10월 31일 ~ 1943년 7월 25일 | |||
제52대 외무부 장관 | |||
1932년 7월 20일 ~ 1936년 6월 9일 | |||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초대 두체 | |||
1943년 9월 23일 ~ 1945년 4월 25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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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알레산드로 무솔리니 어머니 로사 무솔리니[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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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남동생 아르날도 무솔리니 여동생 에드비제 무솔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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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마르게리타 사르파티[3] 이다 달세르 (이혼) 라켈레 귀디 클라라 페타치 (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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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에다 무솔리니[4] 비토리오 무솔리니[5] 브루노 무솔리니[6] 로마노 무솔리니 애나 마리아 무솔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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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
이탈리아 사회당 (1901 ~ 1914) 파시스트 혁명 행동 (1914 ~ 1919) 이탈리아 전투 파쇼 (1919 ~ 1921) (1921 ~ 1943) 공화 파시스트당 (1943 ~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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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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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68cm, 85kg, O형[7] | ||
종교 | 가톨릭 ( 냉담자) → 무종교 ( 무신론) → 가톨릭?[8] | ||
복무 | 이탈리아 왕국 육군 | ||
최종계급 | 제국원수(Primo Maresciallo dell'Impero)[9]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알바니아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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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 정치인, 두체, 독재자.아돌프 히틀러, 도조 히데키와 함께 추축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파시즘의 창시자다. 아돌프 히틀러가 젊은 시절 그의 팬이었고,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아 집권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무솔리니는 은근 언짢아했어도 나중에는 히틀러를 친구로 받아들였고, 히틀러 역시 중간중간 그의 무능을 질책하고, 무솔리니가 상심하자 비판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그를 유일한 친구로 여겼다.[10]
1922년부터 1943년까지 장장 21년을 이탈리아 왕국의 수상으로 재임했다. 첫 7년 (1922년 ~ 1929년), 중간 4년간 (1932년 ~ 1936년)은 외무장관 겸직. 짧게나마 죽기 전까지 11년 이상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북 이탈리아에 위치한 괴뢰정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수장도 역임했다. 이탈리아 왕국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대원수( 제국수석원수, Primo Maresciallo dell'Impero). 별개로 '명예 수석 상병'(Primo caporale d'onore)이라는 명예 계급도 가지고 있었다. 무솔리니의 제복 왼팔에 부착된 삼각형 패치가 이 상징이다.[11]
일명 일 두체(Il Duce).[12] 동의어인 독일어 퓌러(Führer)도 지도자(Leader)이라는 뜻. 직접으로는 도제(Doge)에서 유래했다. 원래의 뜻은 "이끌다, 통솔하다"의 뜻인 라틴어 Ducere에서 파생된 것이다. 같은 어원으로 파생된 언어로는 영어의 Duke( 공작)와 프랑스어의 Duc(공작), 라틴어 Dux(지휘관) 등 모두 Duce와 어원이 같다.
2. 생애
베니토 무솔리니는 평생 ‘장엄함과 소극(笑劇)’(grandeur and farce) 사이를 불안하게 떠돌았다.
폴 존슨 #
자세한 내용은
베니토 무솔리니/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폴 존슨 #
3. 어록
타인을 믿는 것은 좋지만, 안 믿는 것은 더 좋다.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어떤 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적 그리고 교리적 관점에서 나는 영원한 평화 따위는 믿지 않는다.
내게는 오직 나를 승리자로서 평화 회담에 출석시킬 수 있는 수천 명의 희생이 필요하다.
다른 나라가 역사를 쓸 때 수수방관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누가 이길 지는 문제가 아니다.
인민을 계몽하려면 그들을 자극해 전투로 내몰아야 한다.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백 년을 양으로 사는 것보다 하루를 사자로 사는 것이 낫다.
파시즘은 수출품이 아니다.[13]
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는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오류일 뿐이다.
4. 평가
자세한 내용은 베니토 무솔리니/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 여담
[navertv(43995629)] |
( NHK 다큐멘터리) 영상의 세기 PREMIUM 제09부 - 독재자 3인의 "광기" 中[14] |
- 베니토 무솔리니에겐 애인이 많았는데 그중 베니토 무솔리니를 전폭 지원했던 첫 애인 이다 달세르가 꽤 유명하다. 이다 달세르는 무솔리니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버려졌고 무솔리니에 대항하다가 정신병자로 몰려 결국 죽는다. 2009년에 이탈리아에서 개봉한 마르코 벨로키오가 감독한 영화《 승리》가 이다 달세르를 다룬다.
- 흔히 인터넷상에서 " 피자 도우를 돌리는 두체"라고 알려진 무솔리니 움짤. 원본은 1937년 팔레르모 항구에서 연설중인 무솔리니를 촬영한 AP 통신의 영상이다. 연설을 하면서 손을 계속 돌리는 것 때문인지 해외 밈에서는 무솔리니 헬리콥터로 불린다. 원본 영상
- 그는 연설의 질적인 측면에선 히틀러를 압도하는 엄청난 연설가였다. 히틀러의 연설은 워낙 강렬한지라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긴 했지만, 퍼포먼스를 제외한 연설 내용 자체는 "여기 있는 몇 명은 공산당을 박멸한 나를 용서 할 수 없겠지만, 난 다른 정당들도 없애버렸다!" 등의 앞뒤가 안 맞거나 견강부회로 가득차 있어서 정신병자의 히스테리라고 혹평받기도 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와는 달리 묵직한 바리톤 목소리로 "문장이 되는" 깔끔한 연설을 했다. 이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성 차이로 환원될 수 있다. 히틀러는 고교 중퇴, 무솔리니는 고졸이라서 별 차이는 없었다. 그런데 무솔리니는 그래도 스위스 로잔 대학교를 다니며 대학 공부는 해봤고 볼로냐 대학교에서 교사 자격증을 딸 정도로 지적 수준이 비교적 높았으며, 독서량이나 문필력 그리고 정치활동이나 사회경력 모두 히틀러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풍부했다. 당대 기준 지식인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인 초등학교 교사도 해봤으며 잡지 편집장, 신문사 사장 경력도 있었다.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연구로
볼로냐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마키아벨리로부터 배운 것은 ‘이기적인 인간 본성’과 ‘힘에 대한 찬양’이었다."[15]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 연구소 공동소장.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 연구소 공동소장.
- 집권 후의 명예박사 같은 것처럼 보이고, 원래 명예박사 학위는 논문 심사 없이 사회적 평판 등으로 수여되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무솔리니는 자기가 직접 쓴 논문으로 심사를 받았다. 게다가 무솔리니는 명예박사 학위를 주겠다는 볼로냐 대학 측 제안을 거부하고 일부러 제대로 된 박사 학위 심사과정을 통과하여 정식 학위를 받아냈다. 물론 심사 과정에서 독재자의 눈치를 교수들이 안 볼 수는 없었을 테고, 그의 부하들이 알아서 심사관들을 압박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은 어쩔 수 없이 사고 있다. 볼로냐 대학과 별개로, 1937년 그가 재학했던 로잔 대학교에서 설립 400주년 기념으로 수여한 명예박사 학위는 딱히 거절했다는 말은 없다.
-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어 특유의 빠른 속도와 억양에 담기는 음악성을 잘 활용했다. 그래서 무솔리니의 연설도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독일어 외에는 일자 무식인 히틀러와는 달리, 외국어 실력도 월등해, 독일 방문 때 나치 집회에서 독일어로 유창하게 연설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어 억양이 상당히 심하지만 영어도 꽤 잘했다. 스위스의 로잔 대학교를 다니며 독일어, 프랑스어 등을 익혔던 덕분이다.[16] 뮌헨 협정 당시 영국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독일의 히틀러는 전부 모국어를 쓴 반면 마침 무솔리니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해당 자리의 특성상 최고의 통역관 역할을 했을 정도라고 했다.
무솔리니 독일어 연설 |
무솔리니 영어 연설. 연설은 미국과 이탈리아가 친선 관계를 가지자는 내용이다.[17] |
무솔리니가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는 영상. [18] |
- 이탈리아인 답게 패션 감각도 제법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무솔리니가 정말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히틀러가 1934년 베니토 무솔리니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를[19]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히틀러는 노란색 비옷(레인코트)에[20] 줄무늬 바지를 입고 에나멜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무솔리니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근엄해 보이는 제복에 허리에는 제례용 단검을 차고 은빛 박차가 달린 검은 부츠를 신고 나타났다. 이 모습을 본 히틀러는 굉장히 창피했는지 이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제복을 챙겨 입었다. 다만, 게으른데다 위생 관념이 당대인들의 평균치 미만이라, 목욕이나 샤워 등을 덜 했다고 한다.
- 집권하기 전에도 무솔리니는 화려한 모습을 보이고 다녔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교사가 되려는 임용고시를 치르면서도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고 입에 담배를 문 채 등장했으며, Il popolo d'italia의 기자로 활동할 당시에는 수류탄을 서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 자신의 '두체'로서 이미지를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사진을 찍을 때는 근엄한 이미지를 위해 무조건 밑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각도로 찍었고 키가 크게 보이게 키높이 구두를 신는 등 안간힘을 썼다. 무솔리니는 심지어 자신이 하루에 4시간만 자면서 이탈리아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로마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 불만 20시간씩 켜놓기도 했다. 물론 이는 연기였기에, 이렇게 하고선 자신은 낮잠까지 다 잤다고 한다.
- 집권 11년차인 1933년에 실행된 기동훈련에서의 모습을 보면, 상의는 흰색 나비넥타이를 매고서 흰색 셔츠를 입은 연미복이고 하의는 기병 바지와 기병 장화, 손에는 선원들이 즐겨 쓰는 모자가 들려 있었다. 그야말로 균형에 맞지 않는 코디인데, 이것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당시 상류층과 중산층 이하 계층 모두에게 호감을 사려고 취한 것이라고 한다.
- 히틀러가 나치당을 대상으로 한 통제권과 국내 자본가들을 대상으로 한 통제권을 하나씩 절차를 거쳐가면서 확실히 장악한 반면, 무솔리니의 권력기반은 불안정한 편이었기에, 일사불란한 전체주의적인 통치가 불가능했다.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가 히틀러 치하의 독일보다 그나마 사람 살만한 곳이라고 평가받는 데에는, 무솔리니에게 히틀러만큼의 똘끼가 있지 않았다는 점도 물론 작용했지만, 무솔리니 권력의 불안정성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아나키즘도 상당히 세력이 있는 사회주의 사상이었고 혁명을 지향한 사상으로 마르크스주의 못지 않은 파급력이 있던 사상이었던 데다가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보다 잘 조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나키즘의 "개인의 단체를 대상으로 한 일사불란하게 자발하는 단결"이라는 부분이 파시즘의 협동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으므로, 아직 혁명을 지향한 인민주의가 분화하지 않은 시절에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아나키즘다운 코드를 차용하는 게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무솔리니는 딱 잘라서 아나키즘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으로 분류될 수 없는 "혁명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베니토 무솔리니의 운동 자체가 혁명을 지향하는 보수주의이기도 하다. 나치의 군복 놀이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를 따라한 것이다. 무솔리니는 나타나는 행사의 종류에 맞게 여러 종류의 군복과 모자를 공들여서 코디했다. 군복 및 양복과 같이 두세 종류 정도의 제복에다가 정모 하나로만 나타나던 히틀러에 비해 훨씬 패셔너블한 편이다.
- 수많은 애인을 거느렸지만 공처가였고 미신을 잘 믿어 죽이고 다니면서도 누군가 사형당하면 그 사람이 유령이 되어 자신에게 보복한다고 굳게 믿는 겁쟁이였다. 지금까지도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사상가로 계속 회자되는 안토니오 그람시도 감방에 가둬놓기만 했을 뿐 처형하지는 않았다. 물론 혹독한 감옥살이로 그람시는 거의 옥사할 때쯤 석방되었고 석방되자마자 사망한다.
- 피아트의 자동차보다 장인들이 만드는 알파 로메오의 자동차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알파 로메오 공장을 견학 중 신형 자동차를 애무하듯 어루만지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했다고 한다. 알파 로메오의 임원진이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무솔리니는 반드시 돈을 지불하겠다고 우겼고 임원진이 의논 끝에 5 리라만 받기로 하였다. 무솔리니는 10리라를 건네주었는데, 임원진들이 잔돈으로 줄 5리라짜리가 없어서 한참을 당황해하자 '두 대 팔면 되잖소?'라고 소리치고는 두 대를 가져갔다고 한다.
- 말을 무서워해서 탄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무솔리니가 말을 타고 있는 선전용 사진은 앞에서 말이 움직이지 않게 잡아놓고서 촬영한 뒤 잡아준 사람은 합성으로 지운 것이다. 실제로 보면 앞부분이 어색하다.
- 마오쩌둥은 에드거 스노우와의 인터뷰에서, 히틀러를 대상으로 해서는 경멸스럽게 반응했지만 무솔리니를 대상으로 해서는 꽤 높게 평가했다.[21] 다만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서구권에서도 이런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개척한 새로운 사상가, 혼란에 허덕이던 이탈리아를 단결시킨 정치인, 전쟁 위기 속에서 대타협을 이끌어낸 중재자 등으로 좌우익을 막론하고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많았고, 히틀러는 그런 무솔리니를 따라하는 짝퉁 정도로 폄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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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일기에 히틀러의 반유대정책을 두고 "무솔리니 흉내나 내는 조잡한 복제"라고 깐 부분이 있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러브크래프트 본인은 당대 기준으로도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자였지만 결혼은 또 유대인과 했었고, 히틀러에 대해서도 무솔리니와 마찬가지로 호감을 표한 적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도 히틀러식 인종주의가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세세하게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또 왜 인종차별만큼은 끝내 버리지 못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
문서 보면 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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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토 무솔리니의 손녀이자 로마노 브루노 무솔리니의 딸인
알레산드라 무솔리니도 정치인이다.
1962년생으로 키가 174cm에 달해 지금 기준으로도 늘씬한 장신이며, 젊은 시절 뛰어난 미모로 각광받아 유럽판
플레이보이의 표지 모델을 하기도 했다.
# 하지만 할아버지 때문에 아직도 논란 중인 인물이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유훈을 이어받아 대놓고 극우 성향을 보여 예전에 쌓았던 이미지를 스스로 깎아먹고 있다. 정치 활동으로는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적이 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전진 이탈리아 소속이다. 알레산드라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모가 바로
이탈리아 전설적인 여배우
소피아 로렌이다. 알렉산드라의 아들이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증손자인
로마노 플로리아니 무솔리니는
축구선수로서 2021년
SS 라치오와 프로 계약을 맺었다.
SS 라치오?#
- 괴벨스, 도조 히데키와 히로히토 등 단신들이 은근히 많았던 추축국 지도자 중에서는 169cm로 키가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장신인 편이였다.[22] 무솔리니보다 키가 큰 추축국 지도자는 루마니아의 콘두거토르 이온 안토네스쿠(170cm), 호르티 미클로시(177cm), 아돌프 히틀러(175cm), 고노에 후미마로(180cm) 등이 있다. 반대로 최단신은 153cm의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였다.
- 베니토 무솔리니는 1928년, 자신의 정권이 공고화된 시점에서 자서전을 남겼다. 제목은《나의 자서전》으로, 국내에 번역, 시판되어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찾아보길. 특유의 수사법과 박력있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일설에는 3년 전에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을 보고 그 정도는 나도 쓸 수 있다면서 자서전을 썼다고 한다. 무솔리니의 자서전은 대필 작가 없이 무솔리니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히틀러의 자서전보다 문장이 간결하고 가독성도 좋다. 히틀러와 달리 학교 성적도 우수하고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듯 하다. 그에 비해 나의 투쟁은 히틀러 혼자만이 작성한 것이 아닌 그의 심복이었던 루돌프 헤스가 대필해서 완성된 자서전이었음에도 문장력과 가독성 면에서는 평이 나쁘다.
- 북아프리카 전선의 독일군에게 지급되던 전투식량 중 이탈리아군이 만든 쇠고기 통조림을 독일군들이 부르던 별명이 ‘멍청한 무솔리니(Arme Mussolini)’ 혹은 ‘무솔리니 궁둥짝(Arsch Mussolini)’였다고 한다. 통조림에 AM(Amministrazione Militare)이라고 적혀있었는데, 통조림이 하도 맛이 없어서 붙은 별명이었다. 이 외에도 ‘늙은이(Alte Mann)’라는 별명도 있었다.
- 아돌프 히틀러처럼 이슬람교와 무슬림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이슬람교를 존중했다. 이슬람 공포증을 가진 현대의 이탈리아 극우와는 차이점을 보인다. 사실 무솔리니 시대인 1930년대에는 서유럽, 남유럽에 거주하는 무슬림이 거의 없었고 이로 인해 대부분 별 감정이 없었다. 서유럽, 남유럽에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아랍 지역의 정치적 불안이 커짐과 함께 인력난을 겪던 유럽 상황 때문. 물론 이슬람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과는 별개로 리비아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혹독한 탄압을 가했으며, 독립운동 진압과정에서 8만여 명 이상의 리비아인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혹독한 환경에서 죽어나가야 했다.[23]
- 두체컵에서의 막장 운영으로 FIFA 월드컵 자체가 지구에서 하마터면 사라질 뻔 했다. 온갖 주작으로 이탈리아가 우승하자 기분이 매우 좋았는지 앞으로도 영원히 월드컵을 이탈리아만의 전유물로 삼으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겉멋과 뽀대를 굉장히 중시하던 무솔리니 입장에서 이는 매우 아까운 일이였다. 그런데 웃긴 건 4년 후 월드컵은 프랑스에서 치러졌는데 이탈리아가 우승하면서 2연패를 기록했다는 거다. 즉, 주작 안 해도 이길만한 실력이었던 것인데, 당연히 그간 온갖 야매질을 해오던 자국 대표팀의 실력에 노심초사하던 무솔리니는 매우 기뻐했다.
-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파시스트들의 아이돌로 여겨 처음부터 끝까지 극렬히 짝사랑[24]하고 참견했지만, 무솔리니는 자신을 따라하는 수많은 아류들 가운데 똘끼 좀 넘치는 바보로 보아 수 많은 양산형 ㅇㅇ셔츠단이나 철모단, 철위대에 더 관심을 보일 정도였고, 히틀러가 독일의 총통이 될 때까지 멀리하였다.[25]
- 의외로 노르웨이 출신의 위대한 극지 탐험가 로알 아문센과 악연이 있는데, 여기엔 무솔리니의 똥고집도 있긴 했다. 아문센이 북극 횡단 비행을 위한 비행선을 이탈리아에서 구하려고 했는데 처음엔 이탈리아에서 공짜로 제공하려다가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국기 안 붙이면 제공 안 한다고 억지를 부려서 아문센은 할 수 없이 자국 왕실에 하소연한 끝에 비행선 구입 비용을 간신히 제공받았다.[26] 결정적인 문제 요소는 로알 아문센과 동행한 이탈리아 출신의 비행선 제조 기술자 움베르토 노빌레 육군 대령이었다. 이탈리아인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 노빌레를 지원했으나 노빌레는 원체 성격 자체가 안하무인이라 아문센, 심지어 무솔리니조차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 때문에 자신의 북극 탐험대를 조난시켜버리고 그들을 내비둔 채로 먼저 구조됐는데, 이 과정에서 그를 구하려 행동한 대인배 아문센은 정작 그를 구하려다 숨졌다. 1차 비행에서는 둘 다 무사히 살아왔는데 여기서 노빌레는 본인이 이탈리아군 장교이고 비행선의 엄연한 선장임을 내세워 아문센과 자주 충돌하고 노르웨이인을 차별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1차 비행 후 아문센 쪽이 아무래도 더 잘 알려지다 보니 노빌레가 순간 열폭해서 아문센 없이도 가보겠다고 무솔리니도 말리는데도 기어코 강행했다. 그래서 무솔리니는 그가 실종되자 관심을 꺼버렸는데, 정작 노빌레와 사이가 제대로 틀어진 아문센은 무리를 해서라도 노빌레를 구하려다가 실종되었다. 그렇게 관심을 껐다가 노빌레의 귀환 소식을 보고받았는데, 탐사대장이란 작자가 두체한테 고집부리는 걸 보니 보나마나 버럭버럭 고집부리다 탐사대원은 대부분 실종되었고, 거기에 아문센도 구조를 서두르려다 실종. 비록 아문센과 얼굴 붉힐 일은 있었어도 그는 이래봬도 남극을 정복한 노르웨이 출신의 세계적인 탐험가였다. 노빌레는 가지 말라고 막는데도 고집부려 출발했고, 팀원들 대다수와 타국의 위대한 탐험가까지 죽게 만들었으니 무솔리니의 감정이 멀쩡할 수가 있나? 이에 무솔리니는 노빌레를 법정에 세워 노빌레 때문에 탐험대가 조난당하고 그들을 두고 구조됐다는 경위까지 밝혀 영혼까지 털었다. 거기에 자국 언론도 그를 '이탈리아의 수치'로 내세워 결국 육군에서 불명예 제대당하고 그의 가정도 파탄을 맞았다. 북극점 도달 실패는 둘째로 치더라도 자국의 이름을 딴 '이탈리아 호'를 그의 실책으로 추락시켰고 인명피해도 발생한데다 순전히 선의로 그를 도운 전 대장 아문센까지도 죽게 만들었으니 이탈리아 입장에선 본국의 체면에 똥칠을 한 자였다. 우습게도 욕을 실컷 먹었는지 노빌레는 그러고도 93살로 장수했다. 물론 가정적으로 무너지고 죽을 때도 극소수 지인들이나 참가한 장례식이 열릴 정도로 비참한 장수였다. 그는 이 사태로 이탈리아에서는 발을 맘놓고 붙이기 어려워져서 소련으로 이주해서 살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등 풍파를 상당히 많이 겪었다. 그리고 아문센의 조국 노르웨이는 무솔리니가 손대지 못했지만 대신 그의 동맹 파트너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 독일을 통해서 1940년 4월 침공을 강행하면서 독일의 점령지가 되었다. 무솔리니 입장에서는 동맹국이 대신 아문센의 조국을 점령해준 셈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 과거에 무려 대영제국 정보 기관에서 공작원으로 잠시 근무했던 전력이 있다. 1917년에 매주 무려 100파운드씩이나 받고 일했다고... 말이 100파운드지 당시 기준으로 100파운드면 오늘날의 기준으로 8875파운드, 원화 가치로 무려 대략 1400만 원 이상을 받고 일했다는 소리이다.[27] 이탈리아 왕국의 전쟁 지지도를 올리는 공작에 투입되었으며, 비용 문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대규모 반전 파업 파괴 계획도 세웠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영국과 이탈리아가 같은 협상국이었던 제1차 세계 대전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육군 정예 부대 베르살리에리에 복무했으며 히틀러와 같이 계급은 상등병이었다. 또한 복무했었던 부대는 제11베르살리에리연대로 이 부대는 지금도 현역 부대로 존재한다.
- 그리스와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금기시되고 증오스러운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았다가 반격으로 이탈리아군을 몰아냈지만[28] 동맹국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으며[29] 에티오피아는 1935년 무솔리니의 명령하에 본국이 점령당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남부를 기습 공격하도록 명령하였기에 프랑스에서도 히틀러와 더불어 증오와 금기시되는 인물이다.
- 당초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를 동맹이자 추축국 멤버로 끌어들이려고 할 때 이를 반대한 적이 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반도 동북부 지역의 확장을 위해 눈엣가시로 보이는 유고를 침공하여서 영토 획득에 몰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침공 때도 히틀러가 반대했지만 멋대로 강행하는 바람에 그리스에게 반격을 당하게 되자 결국 히틀러의 지원을 요청하며 그리스 침공을 유도하게 되었다.
- 잦은 연착으로 국민의 불만을 사던 이탈리아 국영철도를 제 시간에 운행하게 만들어 정적마저 “기차가 제 시간에 도착하게 만들었다”고 호평했다는 “신화”와 함께 “전체주의의 효율성”의 대표 사례로 유명한데, 이는 무솔리니 정권과 관광객들[31] 그리고 후대의 추종자들이 퍼트린 선전이다. 실제 대부분의 개선 작업은 무솔리니 정권 이전에 계획 및 진행되고 있었으며, 밀라노 같은 몇몇 정치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노선에 추가적인 자원이 투자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32] 게다가 이 모든 일이 있고서도 이탈리아의 기차들은 여전히 잦은 연착으로 국민의 불만을 샀다.
- 적국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무솔리니를 두고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말한적이 있다고 한다. 자기 사위도 총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다만 이는 진지한 정치적 평가가 절대로 아니다. 팔불출인지 사위를 몹시 싫어하던 처칠에게 이쁨받고 싶었던 사위가 자꾸 친한 척 애교를 떨며 "장인어른께서는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 누구세요?"와 같은 소소한 질문들을 던지자 바로 그 사위에게 "무솔리니"라고 대답했다는 것. 이에 깜짝 놀란 사위가 "그렇지만 그 사람은 파시스트잖아요?"라고 반문하자 "맞아. 하지만 자기 사위도 단번에 총살시켜버릴 수 있었던 놈이거든!"이라고 받아쳤다는 일화이다. 즉, 어디까지나 사석에서 얄미운 사위를 골탕먹이기 위해 뼈있는 농담으로 한마디 쏘아붙인 것이고 일종의 영국식 유머로 한 이야기일 뿐이지 정말로 처칠이 '가까운 가족까지 처형대에 올릴 정도의 냉혹비정함'을 정치인으로써 존경스러운 덕목으로 봤다는 차원의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게다가 실제로 무솔리니는 사위 치아노 백작이 처형되었을 때 형을 취소할 수 없는지 독일에 문의했지만 아무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막을 수 없었다고 하므로,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어차피 농담거리였던 이상 이런 사실관계가 그리 중요했던 것도 아닐 것이다.
- 베니토 무솔리니는 "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집권했다. 집권 기간 동안 공을 많이 들여 로마 시내의 여러 유적을 대규모로 발굴했다. 현대 로마 시내에 남은 여러 유적은 대부분 무솔리니 정권 시절에 발굴된 것이다. 하지만 이 로마 유적을 발굴하려면 그 위에 자리 잡았던 여러 건물을 일단 철거해야 했는데, 무솔리니는 독재자답게 이 과정에서 생긴 모든 마찰들과 반발들을 다 기각하고 오로지 유적 발굴에만 집중해서 르네상스 시대 이후 건립된 다른 가치 있는 여러 건물들도 많이 철거했다. 그러면서도 포룸 로마노 등의 로마 유적 사이에 길을 뚫어놓고는 황제의 거리(Via dei Fori Imperiali)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길 때문에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고 남은 유적들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 토목과 건축으로 로마와 이탈리아의 모습을 완벽하게 뒤바꿔 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뚫어둔 화해의 길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광장, 이탈리아 최초의 고속도로 등 이 모든 걸 무솔리니가 만들었다. 로마 관광의 중심가에 가면 "베니토 무솔리니가 만든..."이란 말을 빼놓고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을 정도다. 또한 도시계획에도 관심을 가졌는지 현대 로마에서 에우르(EUR)라는 신도시 구역을 계획해 만들고 이곳에 "로마 문명박물관"과 함께 파시즘을 상징하는 "노동 문명궁"을 만들었다.
- 긍정적 평가로는 무솔리니에 의해 이탈리아의 혼란이 해결되고 경제도 발전했다는 점도 있다.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해 바티칸 시국과의 오랜 문제를 해결한 사람도 무솔리니였고, 그가 집권한 기간 동안 마피아 세력이 크게 약화되기도 했다. 특히 마피아의 본진 시칠리아를 북부 정권에 반항하는 남부 사람들의 기질을 제압하고자 더욱 공들여 탄압했다. 전쟁 후에도 한동안 시칠리아에 파견되는 사법 공무원들은 무솔리니 시절의 후광을 입기 위해 당시 시칠리아에서 근무한 공무원들의 자손들 위주로 뽑았다고 한다. 또한 말라리아가 창궐하던 낙후된 남이탈리아에서 말라리아를 몰아낸 것 역시 무솔리니 치세의 일이다.
- 무솔리니의 경제 정책은 강력한 보호 무역과 국책 사업 투자를 통한 자급자족 지향이었다. 때문에 침략 전쟁을 하지 않으면 망하는 수준이었던 나치 독일이나 일본 같은 다른 추축국들에 비하면 거품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경제 체제 역시 기본적으로 오래 유지되긴 힘든 것이었으며,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내실을 다질 돈과 시간을 에티오피아 침공이나 스페인 내전 개입 등 공격적인 대외 정책으로 불필요하게 낭비했다.
- 이탈리아가 현재와 같은 전세계적 축구 강국이 된 것도 베니토 무솔리니의 공헌이라고 볼 수 있다. 1898년에 시작한 세리에 A가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리그로 전환된 것은 무솔리니의 공로이며,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의 성공적 개최도 무솔리니의 공로가 크다. 그 후로 이탈리아는 유럽, 나아가 전세계에서 정상권의 축구 강국이 된다.
- 무솔리니 집권 전후의 이탈리아의 혼란 상황과 경제 업적, 탁월한 개인숭배화 능력과 우민화 정책을 생각하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만 않았어도 종신 독재를 했을 정도의 능력은 있었다. 실제로도 20년 넘게 장기 집권했고 전후에도 파시스트 잔당들은 꽤나 잔존했다.
- 생전에 마늘을 자주 즐겨 먹었는데, 잠들기 전에도 보약마냥 생마늘을 매일 먹었고, 가족들은 마늘 냄새때문에 따로 잘 정도였다.
6.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베니토 무솔리니/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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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인은 총살 (흉부 관통)
[2]
혼전성은 '말토니(Maltoni)'다.
[3]
Margherita Sarfatti, 참고로
유대인이다.
[4]
갈레아초 치아노의 배우자이기도 하며, 장녀로 1995년까지 천수를 누리며 살다가 죽었다. 반면 남편인 치아노는 디노 그란디와 함께 무솔리니를 실각시켰으나, 무솔리니가 구출되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건국되며 사형을 선고받았다.
[5]
공식적인 장남으로 영화 제작자 및 평론가로 일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병역특혜는 커녕 공군 조종사로 입대해 싸웠다. 1997년까지 살며 천수를 누렸다.
[6]
차남으로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으나 1941년
P.108 폭격기 프로토타입을 시험하다가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7]
출처
[8]
그가 실각한 후 사르데나 근처에서 잡혀있었던 동안에 그는 서서히 종교에 복귀하기 시작했으며 1943년 12월 14일에 다시 참회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 있다.
또한 1924년 6월 2일에 비오 11세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이 가톨릭 신앙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P. 101 of “Aiutatemi Tutti a Portare La Croce” by Malateta Enrico) 또한 가톨릭 복자인 에드비지 카르보니(Edvidge Carboni)의 말에 따르면 죽기 며칠 전에 불길에 휩싸여 있을 때 무솔리니는 그녀에게서 고해성사를 하였고, 연옥에 가기도 하였으며 1951년 미사에서 영성체를 한 후에 그의 영혼이 천국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P. 79, Edvige Carboni: The Perfume of God)
[9]
#
[10]
그리고 이 때문에 무솔리니가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주유소에서 형체를 알아보지 못 할 정도로 맞아 죽은 것을 보고 히틀러는 충격에 빠져 부하에게 자신이 죽으면 시체를 없애달라고 부탁했다.
[11]
'명예 상병'은 당시 파시스트당 집권에 공을 세운 인원들에게 수여된 일종의 훈장과 같은 칭호로 구 이탈리아군의 V자 상병 계급장 아래
파스케스를 새긴 형태였다. 그중 무솔리니의 것만 등급을 높여서 'Primo'(첫 번째, 제1, 수석)라는 수식어가 추가로 붙으며 파스케스 대신
아퀼라가 들어간다. 종전까지 총 30여 명이 수여받았으며, 히틀러도 1938년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이 명예 상병 계급을 받았다.
[12]
지도자 또는 영도자
[13]
히틀러도 비슷하게
국가사회주의는 수출품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어디까지나 그 민족과 국가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유래해야하는 것이지 다른 민족의 파시즘을 어느 고찰없이 있는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파시스트 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14]
2018년 6월 16일 방영. 영상 매체의 탄생 이후 20세기의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대표적인 3명의 "독재자"의 민낯을 그린 다큐멘터리이다. 무솔리니의 최후도 후반부에 다루어지고 있다.
[15]
흥미로운 점은 무솔리니의 사상적, 정치적 맞수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상가도 마키아벨리였다는 점이다. 상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16]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독일에서 주로 활동했다가 유창한 언어 실력으로
할리우드로 진출한 배우
크리스토프 발츠도 무솔리니처럼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 학창 시절에
라틴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언어는 배우기가 쉽다는 게 당사자의 설명. 이렇게 따지면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화자들도 다 해당되는 사례지만 당연히 모두가 다 발츠처럼 모국어 수준으로 잘 구사하진 않는다. 즉, 발츠는 정말 언어의 천재가 맞다.
[17]
그러나 이탈리아 억양이 너무 강한데다가 피플을 오줌을 뜻하는 피(pee)로 발음해서 영미권에서는 엄청난 코미디 영상이 되었다. "나는 위대한 미국 국민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가 "나는 위대한 미국인의 오줌에 경의를 보낸다."로 들리기 때문이다.
[18]
댓글창에 들어가보면 "Saluto al duce!(두체(영도자)께 경례!)" "Heil!(독일어로 '만세!')" 이
"달걀독재!" "알!" 로 들린다는 반응이 가득하다.
[19]
회담 장소는
베네치아.
[20]
물론 당시의 레인코트는 현대
한국인이 익숙한 빤딱빤딱한 1회용 비닐옷이나 아웃도어 활동용 의류는 아니고, 방수성이 있는 천으로 만들어진 코트로써 정장의 일부로 취급될 수 있는 옷이었다.
트렌치 코트 등을 참고하자.
[21]
《
중국의 붉은 별》中
[22]
지금이야 남자는 이 키면 단신이라고 놀림받지만, 당시에는 이 키도 장신에 속했다.
[23]
리비아 독립운동가
오마르 무크타르의 저항운동을 강경진압하고, 그를 처형당한 시기도 무솔리니 치세였다.
[24]
이 오랜 짝사랑은 무솔리니가 쫒겨나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야 히틀러에게 구출되고 최측근이 됨으로써 이루어졌지만 자신의 아이돌과 행복한 한때를 즐기기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25]
심지어 총통이 된 후에도 그리스 산악사단에 무솔리니의 공격이 막힐때까지 자신이 히틀러보다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고자
이런 저런 시도를 하였다.
[26]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아문센이 남극점 다녀온 후다.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유럽의 약소국 노르웨이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리게 만든 사람이니 기꺼이 특별히 대준 것.
[27]
다만 무솔리니는 군대 가기 전에도 신문사 편집장을 지냈고, 전역 후에는 여러 신문에 사설을 싣는 등 언론계에 입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친영 사설을 싣기 위해서라면 영국도 그 정도 돈을 낼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소리.
[28]
그것도 역으로 이탈리아령인 알바니아로 진격했다.
[29]
본래 히틀러는 그리스 등의 발칸 지역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또한 당시 그리스 수상 메탁사스가 독일 유학파 경험이 있는 친독 성향의 인물이기도 하여서 독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메탁사스가 급사하고 친영반독 성향의 그리스 왕실이 득세하면서 이 때를 계기로
유고슬라비아 다음 타깃이 되어서 침공하게 되었다.
[30]
히틀러도
본의는 아니지만
마약중독자였다.
[31]
당대에는 “독재야말로 이탈리아인들에게 어울리는 체제”라는 여론이 있었고, 외부인으로서는 자세한 전후사정을 모르니 독재자가 들어서니 좋아졌다, 고로 이는 참이다로 전개된 것이다.
[32]
이 추가 자원은 효율 따위가 아닌 역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등의 “보기에 좋게 만드는” 일에 투입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