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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강점기
1.1. 개관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1930년 13살이 되던 해 집안 사정이 어려워 홀로 경성에 올라왔다가 거지패에 잡혔다거나, 교동보통학교에 다녔으나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거나, 아니면 졸업을 간신히 했다거나 원씨 노인 원영기[1]이라는 사람이 데려가 운동만 시켰다거나 등의 잡다한 내용이 있지만, 정확한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사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연구자 또한 없으므로 앞으로도 밝혀내기 어려울 것이다.어쨌든 매우 어렸을 때부터 종로와 파고다공원 근방에서 특출난 싸움 실력[2] 하나만으로 입지를 다졌으며, 18세가 되던 1935년부터 1940년대 후반까지 경성에서 큰 조직을 가진 구마적, 신마적 등의 20대 두목들을 어린 나이에 죄다 두들겨 패서 차례로 항복시키는 파란을 일으키며, 약관의 나이에 경성 최대 극장인 우미관 일대를 제패하여 경성 폭력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패권자가 되었다. 1940년 종로 2가의 다방을 거점으로 깽판을 쳐오던 김두한이 검거된 사건
나중에 본인 및 본인을 따르던 이들, 친지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종로 일대에서 일본 야쿠자의 침입에 맞서 대항했던 민족적인 주먹패라고 선전했다. 심지어 일부 창작물에서는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했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어쨌든 가장 주요한 행적은 조선인 상인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보호"라는 것에는 당연히 "보호비"가 따라오기 마련이며 이것도 불법이고 말 그대로 갈취한것이다. 즉, 결국 김두한은 단순한 건달패거리의 우두머리로, 그저 자신의 구역을 관리한 것일 뿐이라고 보는 평가도 있다.
그런데 사실 김두한 본인은 '보호'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보호 운운은 후대의 창작자들이 자기네들 물건 팔아먹기 위해 핑계거리로 댄 것에 불과하다. 김두한 본인은 대놓고 '세금 받았다'는 표현을 썼던것만 봐도 갈취한것을 잘 알수 있으며, 자기가 조선인 상인을 위해 보호 따위를 벌인 활동을 특별히 이야기 한 내용도 없다.
무엇보다 김두한이 활약하던 시기에는 깡패나 조직폭력배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으며, 김두한 본인에 따르면, 당시에 어깨나 건달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협객이라는 표현은 이보다 한단계 높은 것으로 일본 야쿠자의 극도(極道)와 동격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특히 김두한은 거짓말을 많이 했다. 김두한의 거짓 가득한 자서전과 자기 회고를 가지고 후대 사람들이 창작물을 만들면서 생겨나게 된 문제점을 2가지 꼽아볼 수 있다.
하나는 김두한이 아무렇게나 말해댄 덕분에, 자기는 대단한 일 했다고 생각한 일들이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인간이 왜 저렇게 미쳐 날뛰었나' 싶은 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어떤 이유에서든 그 김두한의 증언을 가지고 더 미화하고 뻥튀기시켜서 아예 신화 유사하게 만들어 놓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이 분야의 최고봉은 야인시대의 작가 이환경이다.[3] 김두한이 되지도 않는 자기 자랑을 많이 하기는 했어도, 해방 전에 독립운동을 했니 조선인 보호를 했니 하는 택도 없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경성 밖을 벗어나면 체포되는 요시찰 인물로 규정되어 경찰의 치밀한 감시를 받은 것도 드라마 상의 과장이며, 김두한 본인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요시찰 인물로 규정된 건 사실이지만, 한국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정도였지 경성 밖으로도 못 나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김두한이 동년배 중에서 싸움실력으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것은 분명하다. 김두한의 회고에서 사실상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대일 대결인 구마적, 신마적과의 대결이 있었던 때가 10대 후반이었다니, 있었다면 대략 1935년 전후의 일로 보인다.[4]
장군의 아들에서 묘사된 김동회와의 대결은 불명확한 편인데, 김두한과 김동회의 관계는 김동회가 주장한 내용 외에는 별다른 증거나 기록이 없다. 김동회 본인은 김두한과 친분을 강조하긴 했으나 대결이 있었음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두한은 자기 회고에서 김동회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때문에 현재 김동회는 김두한을 팔아 자신의 이름을 알린 일종의 사기꾼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김동회는 1999년에 TV의 모 프로그램에서 김두한 관련 이야기들을 하기는 했는데,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나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것 같은 이야기들을 늘어놓고는 했다. 하야시가 일본 야쿠자의 대부 도야마 미츠루의 제자인데 술먹다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부르면 정무총감이 달려 올 사이라느니 구마적이 김두한에게 지고 만주로 떠났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김두한의 회고를 바탕으로 한 야인시대의 경우, 김두한의 회고에 빠져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김동회라는 인물 자체를 아예 등장시키지 않고 있다.
이러한 완력에 관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김두한이 윗세대 거물들을 차례대로 꺾어 주먹계의 지존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식의 생각은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의 영역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인데,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후술한다.
구마적이니 신마적이니 하는 사람들 자체가 사실 생업이 따로 있는 사람들로, 사실은 생업 없는게 생업인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저 전형적인 유흥가 건달들이지 기업형 범죄조직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5] 저 유흥가 건달이라는 것도 현대 조폭들 같이 유흥가 운영하면서 보호비나 운영비 받고 이권 노리고 이런 것이 아니라, 유흥가 술집에서 술 취한 손님들한테 협박하여 삥 뜯고 가게에서 가게 주인을 협박해서 공짜 술 얻어 먹으며 노는 그런 건달이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때는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가 제2차 세계 대전에 뛰어든 시기라서, 1940년대가 되자 대부분의 건달, 깡패들은 일제의 집중 단속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저 위의 신문기사들도 그 결과물이었던 것이다.[6] 결국 김두한의 윗세대들은 김두한에게 져서 밀려난게 아니라 시대가 어수선해지자 자연스럽게 생업에 복귀하거나, 군대에 끌려가거나, 그냥 나이가 차서 정신을 차렸다는 식으로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두한은 별다른 생업도 없었고 징용 문제도 어영부영 해결되어 남들 다 군대로 끌려가는 판에[7] 끝까지 경성에 남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구마적이니 김기환이니 하는 윗세대 양아치들도 사라진 게 아닌 것이, 일제 말 기사들에 여전히 김기환은 김두한의 보스로 나오고 있으니 김두한이 유독 태산북두와 같은 위치로 살아남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김두한이 저런 시대 상황에 따라서 어부지리로 자기 세력을 유지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김두한 나름의 능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전술했듯 구마적, 김기환도 사라지지 않고 청년단 활동 등에 계속 이름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니 어떤 종류의 능력이었던 간에 김두한이 분명 뭔가 두각을 나타낸 부분이 있었기에 몇 년 사이에 저들과 최소한 호형호제 정도는 할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야쿠자 등 일본 폭력 조직과 갈등이 있었다는 부분도 애매했다. 김두한에 따르면 일본인 조직과 몇 차례 분쟁이 있었던 뒤, 양쪽이 조정하여 화해했다고 한다. 형식상으로는 김두한이 하야시를 형님으로 대접하고, 실제로는 하야시 쪽에서 김두한에게 돈을 줬다는 것. 김두한이 일본인 밑으로 들어갔다 어쨌다는 이야기가 꾸준하게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인데, 이는 일본인과 조선인 문제를 떠나서 그냥 전형적인 조폭 간의 갈등 조정 방식이다.
각종 창작물에서도 등장한 일본 제국 육군 헌병들과의 트러블은 실제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술 마시다 시비가 붙은 사건'[8]에 불과하며 사실 그 사건에서 황병관을 구해 준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도 큰 의문이다. 훗날 태릉선수촌 선수들이 쓴 자서전 비슷한 책에 보면 황병관의 회고도 나오는데 황병관이 음식점에서 김두한과 만나 발차기를 하던 김두한을 쓰레기통에 쳐 넣었고 “국회의원이 될 줄 알았으면 아예 묵사발을 내줄 걸 그랬다”는 일화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황병관의 일화는 1954년 김두한의 정계 진출 이전인 1952년 부산에서 황병관이 사망했으니 사실일 가능성이 낮지만 저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자기를 구해 준 사람에 대해서 저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테니 오히려 황병관이 김두한을 싫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김두한은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당시 사건에 쓰인 폭약이 자기 쪽에서 흘러나온 것이라 일제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허나 해당 폭탄은 의거의 주역 중 유만수, 조문기가 간신히 고생하여 구한 것으로 김두한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라고 여러 차례 조문기의 인터뷰 등을 통해 언급되었다.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항목에서도 나와있지만, 이 사건은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벌어진 대형 사건으로, 김두한이 리얼타임으로 목격한 항일 의거는 이것이 유일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해방 20일 전에 벌어진 사건인 탓에 일제가 제대로 된 수사결과를 내거나 법정 기록을 남길 여유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시간이 지난 뒤 김두한이 유명한 항일 의거에 슬쩍 숟가락을 얹은 것이다. 김두한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지 "나도 그 폭탄을 거기에 쓸 줄은 전혀 몰랐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긴 했다.
어쨌든 결론은 창작물에서 묘사된 김두한의 행적은 상당히 미화되고 과장되었다는 것.
1.2. 행적의 신빙성 문제
김두한의 일제강점기 행적에 대해서 큰 줄기를 따라가자면....1. 고아로 자라다가 원노인이라는 사람에게 자식처럼 키워졌다.
2. 원노인이 죽고 나서 거지촌에서 다시 지내다가 모종의 계기로 우미관에서 일 하면서 건달 세계에 끼어들었다.
3. 구마적을 이기고 신마적이 물러나면서 경성 주먹의 황제가 되었다.
4. 하야시 등의 일본 야쿠자와의 대립, 마루오까와의 결투와 브로맨스, 평양축구단과의 다대 일의 싸움 등의 일화가 있었다.
5. 해방이 되면서 자기를 괴롭혀 온 미와 경부를 끌고가서 죽였다.
정도인데, 문제는 저 사건들이 죄다 1963년 김두한의 자서전과 1969~1970년 사이 방송된 김두한의 '노변야화' 에서 김두한 입으로 말한 것들을 후대 사람들이 살을 붙이고 미화를 해 가면서 더 크게 만들어 버렸던 사건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증언의 시점 상 교차검증이 어려워져 버린게 문제가 된다.단 노변야화는 김두한의 증언을 방송국 작가가 다시 창작하여 인터뷰를 끼워 넣은 것이다.
우선 김두한 외의 사람이 일제강점기 김두한의 행적을 증언한 것 중 대표적인 게, 김동회와 이상욱이 1999년 MBC 다큐멘터리 '깡패와 건달로 본 100년' 이란 프로에서 증언한 것, 그리고 야인시대가 한참 인기있었을 때 쯤 김동회가 한 번 더 이빨을 턴 것과 미국에 있던 김영태[9]를 만나서 인터뷰 할 때 김영태가 했던 말 정도가 있는데, 이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의 증언이라는 건 둘째치고 미묘한 문제가 있다. 우선 김동회나 이상욱의 경우는 김두한이나 김두한 다른 패거리들의 입에서 그의 이야기가 단 한 번도 안 나왔다는 게 문제다. 김두한의 입에서도 그렇고, 훗날 김두한에 대해서 증언한 청년단 같이 한 게 신문기사나 판결문 등으로 어느 정도 증명이 된 신영균이나 박용직의 입에서도 그렇고, 저 사람들의 이름 자체가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종로꼬마 이상욱은 김두한이 자기보다 2살 어리다고 이미 이야기한 상태.
따라서 김두한이 유명해진 이후에야 그에 편승해서 한 몫 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있는 판이다. 김영태의 경우, 김두한의 입에서 이 사람 이름이 나온 적은 없어도, 해방 후 김두한과 연관된 사건들에서 이 사람 이름이 같이 등장하고 있고, 신영균이나 박용직의 이야기도 있기는 하니 김두한과 연관이 있는건 사실인데, 야인시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김두한보다 두 살 연하인 1920년 생인데다가 고등보통학교까지 나왔다고 하니, 김두한 패거리에 끼어들어갔을 때가 빨라야 1940년 전후로 여겨지는데[10], 저 때라면 김두한과 신마적 구마적 마루오까 등등의 그 일화들이 진짜 있었던 건지 볼 수 있는 시기는 아니다. 구마적과의 싸움 이야기는 김두한 외에 김동회의 증언이 있지만 저 여섯가지 중 팩트가 어느정도 증명된 5번을 제외하고는 그 외에는 김두한의 증언 이외에는 저 사건들에 대해서 교차검증 하도록 이야기 해 준 사람이 없다(?).
우선 1940년 이전의 김두한의 모습을 교차검증이 가능하도록 신뢰성 있게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최소한 노변야화 시점에서는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헌병과의 일화의 황병관이 1952년 사망한 것은 기사 등으로 확인된 확실한 사실이다. 구마적 역시도 1960년대에 죽었다고 하니 저 시점에서는 고인이 된 사람이다. 신마적은 한국 전쟁 이후에는 1961년에 사망했다는 소문을 제외하면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었고, 이정재는 청년단 시절 이후에나 인연이 있던 사람인데다 역시 저 시절에는 고인이 된지 오래다. 선우영빈이 하야시가 맞다면 저 시대에 살아는 있었겠지만 김두한은 한 번도 선우영빈을 하야시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선우영빈이 하야시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면 선우영빈은 저 이야기를 남 이야기 듣듯 했을테니 설령 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도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김두한이 처음 주먹패에 들어왔을 때를 봤을 만한 사람이 김무옥과 김기환 정도인데 그들도 이미 1950년대 이전에 고인이 된 사람들이니 저 일화들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냥 현재 있는 몇 안 되는 김두한에 대한 일제강점기 기사들과 순전한 당시 시대상황에 따른 상식으로만 저 사건들을 유추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정도로도 어느 정도 저 사건들에 대해서 엄밀한 진위는 아니더라도 신뢰성을 어느 정도판단할 수 있는 근거들은 마련이 된다.
1번인 원노인과의 이야기야 어느 정도 이빨이 섞였을 것이라고 판단하나, 진실이 어떻든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일이다.
우선 3번. 구마적과의 대결은 진위여부야 불분명하나, 분명한 건 '사상에 관한 정보(경찰서장), 경종고비 제1721호의 1, 1942.04.07 16쪽' 에서, '同年2月19日自宅において被疑者金斗漢の紹介により其親分俗称旧馬賊こと高時亨(京)改め高山勲を知り、前掲両名に対する如き好言を述べて獲得し : 동년 2월 19일 자기 집에서 피의자 김두한의 소개로 그의 두목인 속칭 구마적(旧馬賊), 곧 고시형(高時亨, 京)을 알게 되어 위의 두 사람에게 한 것과 같은 감언으로 획득했다.' 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모 신흥종교들과의 알력다툼 와중에서 김두한이 예배당을 사무실로 빼앗는 사건에서 있었던 일인데, 저 사건 보고서에서 분명 구마적이 김두한의 두목으로 나온다는 게 문제다. 싸움에서 이겼지만 그냥 구마적 밑에 들어갔던 건지, 아니면 구마적의 상징성을 이용해서 김두한이 붙어먹은 건지, 그도저도 아니면 그냥 구마적과의 싸움 이야기가 거짓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던 구마적을 두목으로 모셨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즉, 주먹의 1인자는 아니었단 것이다.
하야시 등의 일본 야쿠자와의 대립은 하야시= 선우영빈 썰은 김동회가 증언한 게 유일하기는 한데, 위에서도 말했지만 김동회의 말이 신뢰가 안 가는 부분들이 많은 게 문제다. 어쨌든 일본 야쿠자 패거리들과 대립을 했던 건 이상욱 등이 증언한 바도 있고, 김두한 역시도 엄청나게 기름칠을 하기는 했어도[11] 그의 증언에서 최소한 조선인을 위해 종로를 지키겠다느니 하는 따위로 입을 털지는 않았다. 김두한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더라도 그냥 조폭간에 이해관계 조절에 불과하다. 사실 저걸 엄청나게 미화한 건 후세 창작자들의 문제가 더 큰데, 김두한의 일화라면 그런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니 뭐.... 하야시라는 사람 자체가 그냥 김두한 등의 뇌피셜이라는 견해도 있는데, 지나치게 김두한에게 비판적인 사람이기는 한데 그 나름의 근거가 있는 면도 있으니 판단은 알아서 하자.
마루오까와의 이야기는 경부보 이상이면 총독부 인명록 등에 기록이 죄다 남아있는데, 마루오까라는 사람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는 점에서 전혀 확인이 안 되는 이야기다.
5번은 우선 미와가 종로로 다시 온 건 퇴임 후 1940년대의 일이며 미와가 과연 김두한을 알았을까 하는 점에서 좀 문제가 있는데다가 김두한이 고등계에 얼마나 의미 있는 조사대상자였는지도 의문이다.
2.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
그러나 위의 내용, 즉 깡패짓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1943년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의용정신대)를 조직했다는 친일 의혹이다. 한마디로 일제의 독립 운동가 사냥을 보조해주는 단체를 설립한 것이다. 이는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볼 수가 있으나, 이 배경에는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고자 어쩔 수 없이 참가했어야 했다는, 즉 또 다른 친일 행위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해서 했던 사소한 친일 행위였다는 이유로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로도 이 단체에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어 결국 김두한의 이름은 각종 친일부역자 명단에 등재되지는 않았다.이 단체는 군대 보내기도 뭐하고 가만 놔두기도 뭐한 전국의 골치거리 깡패들을 적당히 처리하기 위해 조선 경시청이 만들고 지원한 어용단체였으며, 거기에 더해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 점을 이용한 상당한 선전효과까지 고려하여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지만 이 문제는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걸려들었다. 김두한은 아니지만, 전직 헌병이자 전직 대구 경찰서 고등계경찰로서 이 단체를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던 장명원[12]은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반민특위의 장명원에 대한 조사 자료. 참고로 장명원은 여기서 매우 황당한 주장을 하는데, 헌병이 된 것은 일제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거나, 경찰이 된 것은 일제의 내막을 탐지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일단 장명원의 변명에 따르면, 이 단체는 미와 경부 등이 당시 골칫거리였고 어차피 군대 보내기도 뭐했던 깡패, 불량배를 조직하여 뭔가 쓸모 있는 짓을 해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장명원 자신은 낙하산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장명원은 "명칭상 정신대였을 뿐 실상은 깡패들에 대한 감화운동이었고, 의료비나 피복비 외에 비밀활동자금 같은 것은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관련자 전원이 철도 건설 작업에 참여한 것 외에는 다른 활동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한편 이 조직은, 비록 확실한 조사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으나, 당시 빼도박도 못할 친일단체였던 일진회, 시천교와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웃긴 건, 당시 반민특위에서 조사할 때 이들이 일진회와 시천교의 건물을 강제로 빼앗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장명원은, 일진회나 시천교와의 연결은 경찰 쪽이 아닌 김두한 측에서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주장했다. 또한 징역, 징용기피자들을 구타 고문, 심지어 살해했다는 소문이 있었는고, 깨알같이 총독부에서 자금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개인 용도로 착복한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당연히 이러한 의혹들에 대해 장명원은 전부 부인했다. 이에 대한 뚜렷한 증거 역시 발견되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장명원을 조사하는 과정 중에 불려나온 증인들은 모두 이 단체 관련자들이었다. 즉, 반대 증언이 전무하다는 것. 그리고 김두한은 훗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당시 반민특위의 검사들은 장명원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린다. 당시 기소유예 결정서. 단체장인 장명원이 불기소였으니 김두한 등의 관련자도 당연히 자동적으로 무혐의 처리됐다. 기소유예를 내린 이유는, "명칭상 정신대일 뿐, 실상은 불량배를 교화하여 선량한 청년으로 육성하려고 한 것이며, 징용기피처가 되어 일제에게 주목 받은 사람들의 피신처가 되었다. 또한 불법 감금, 고문 등에 대한 증거가 없다." 는 것이다.
특히 '징용 기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핵심적인데, 그렇다면 총독부, 경시청과 붙어 먹지 못해서 군대로 끌려간 다른 사람들은 대체 뭐가 되냐? 이런 식으로 친일 행위를 비호하면, 모든 친일행위가 사실은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당연하지만, 당시 조사위원들 역시 이 병맛 돋는 기소유예에 대해 반대 의견을 냈다. 당시 불기소 반대 의견서. 반대 의견이 문제로 삼은 내용은, 첫째, 경시청과 붙어먹고 돈까지 받았다는 점이다. 둘째, 고문과 학대, 어쩌면 살인 행위까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런데, 반민특위 조사위원들 역시 뭔가 핀트 자체를 잘못 맞춘 감도 있고, 몇가지 사항을 놓친 감 또한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돈 문제다. 장명원에 따르면, 단원 가입은 부장인 김남산, 김기환, 김원옥 등에게 전권을 가졌다는데, 이들 깡패 우두머리들이 과연 순수한 선의만으로 단원을 모집했을지? 당연히 단원을 모집하고 추가인원을 받는 과정 중에 금품 수수, 권력 남용 등의 행위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단체가 조직된 시점이 1943년임을 주목해야 하는데, 조선에서 본격적인 징병제가 실시된 것은 바로 다음해인 1944년이며, 이 사실은 1942년에 이미 결정된 내용이었다. 이 시점에 깡패들이 반도의용정신대를 결성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뒤늦게 이 단체에 가입한 사람들은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이 단체에 가입한 것인지? 그리고 단체의 간부들이 가입자들을 걸러내기 위해 어떠한 기준을 적용했을지? 또한 이 단체는 민간업자에 기탁하여 철도 공사에 투입되었다는데, 순수한 봉사정신만으로 땅을 팠을 가능성은 당연히 없다. 업자 및 작업 선정은 어떤 기준으로 됐으며, 공사대금이나 임금은 어떻게 처리되었을지?
또한 조사위원들은 '경시청의 비밀자금'에 집착하고 있는데, 비밀이건 나발이건 간에 경시청에서 돈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장명원도 피복비 등의 명목으로 만원을 받았다는 점은 순순하게 인정했다. 그런데 이 당시 만원이면, 현재 시세 1억 5천만 원 정도의 거액이다. 비밀 자금 여부를 떠나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거리가 된다. 또한 후세 연구에 따르면, 이 단체는 총독부의 협조를 얻어 금속 회수 운동, 즉 일제의 공출제도에 참가했고 수집한 대금을 헌납하는데 참여했다고 한다.
이정재의 행적을 통해서도 몇가지 미심쩍은 점을 추론해낼 수 있다. 이정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정재는 이 단체에 가입한 것을 인연으로 하여 경찰에 투신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곧, 이는 당시 깡패 - 경찰 간에 뭔가 불투명한 유착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정재는 반민특위의 특경대 요원으로 활동하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의자 심문서에서 분명 이정재 이름이 거론되는데, 정작 당사자인 이정재는 반민특위에 참여 중이었다는 기가 막힌 아이러니가 성립된다. 그런데 과연 이정재 이외에 이 단체에 연루된 다른 경찰은 없었을까?
마지막으로 이 단체는 이후의 역사에 상당히 안 좋은 선례를 남겼다. 이 단체에 참여했던 깡패들이 이때 완장질에 맛을 들여 해방 이후 이런저런 정치단체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는 것. 이로 인해 정치깡패 문제를 연구할 때 반도의용정신대는 반드시 그 기원으로서 언급된다.
문제는 확실히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사실상 밝혀진 것은 깡패들이 핑계대고 모여 빈둥거리며 건설현장에서 삽질한 것 뿐. 이들에게 당했다는 피해자도 특별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이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이미 군대로 끌려가버려 전사했거나, 살아있더라도 여전히 거리를 활보중인 김두한과 깡패들에게 또 걸려들까 두려워 나서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반민특위에서 조사한 증인들은 전원 이 단체 가입자였거나 이권에 관련된 인물이었는데, 당연히 모든 증인이 이 단체에 유리하게 증언했다. 그나마 불리한 증언조차 단체의 지도부장이었던 김남산이 장명원과 경찰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행한 카더라 수준의 증언뿐이다.
하여간 일제와 협력했다는 점 때문에, 김두한을 극도로 미화한 야인시대에서도 이 부분만큼은 주인공의 입을 통해 자아비판을 했다[13]. 단체를 만든 덕분에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강제징용에 끌려가지 않아 결과는 좋았지만, 어쨌든 일제와 협력한 꼴이니 올바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작품 속 김두한마저도 하야시랑 가까이 지내는지라 애초에 전제가 틀리기도 했다.
김두한이 변명을 하기는 하지만 어쨌던 분명 있었던 일이고, 종로꼬마 이상욱이 1999년 MBC 다큐멘터리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저게 친일 논란이 되느냐 아니냐는 다른 판단의 문제로 밑에서 넘어가기로 하고, 다만 김두한이 그냥 건달에서 어느 정도 조직과 세력을 갖춘 건달이 되는 데 일종의 계기나 기회가 된 사건이 아니냐는 추측은 가능한 정도의 사건이기는 하다. 다만 종로꼬마 이상욱이 정말 김두한의 최측근이었나 하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인데, 김동회 만큼이나 이상욱도 김두한이 회고에서 언급한 바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3. 광복과 이후 6.25 전쟁
사실, 김두한은 청년기의 주먹깡패 시절보다는 8.15 광복 직후의 중년기부터가 김두한의 진짜 리즈 시절이었다. 이 당시 김두한은 그냥 종로 우미관의 주먹깡패 오야붕에서 정치깡패로 변신했다. 단지 위의 내용 뿐이라면, 별다른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인물도 아니었겠지만 김두한이라는 인물이 거물급 정치깡패로 성장하여 대한민국의 역사에 이름 석자나마 남길 수 있게 된 것은, 정치깡패로서 국회의원까지 역임한 행적 때문이다.어쨌든 해방 직후 복잡한 정국 하에 이런저런 단체를 오가다가 활동했다. 본인에 따르면,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고 한다. 건준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이 단체는 여운형이 대표로 나선 중도적 단체이다. 덧붙여서 역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무리들이 훗날 "김두한이 일제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식의 단순한 이야기를 떠벌렸는데, 1999년에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도 일제 해군무관부를 습격했다는 김두한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증언을 감안하면, 해방 직후, 건준에 소속된 김두한이, 건준이 일제의 무기를 접수받는 일에 참여했다 정도로 볼 수 있다.
일단 건준의 성격상 이야기 자체는 그럴듯하다. 단지 김두한이 주변에서 주워 들은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로 바꿨을 가능성이 높을 뿐. 어쨌거나 결론은 김두한이 무기고를 습격한 항일 영웅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극우로 전향, 극우 테러 활동의 대표적인 기수가 되었다. 일단 김두한 본인에 따르면, 극우 활동을 한 이유에 대해 자신의 부친 김좌진 장군이 좌익계열에게 암살당한 일의 자세한 속사정을 그때 알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김두한은 일자무식한 사람답게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같은 사상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에 개성에 있을 때 동네 아이들이 “네 아버지는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청국에 있는데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사회주의자이다. 나도 열 네 살만 되면 아버지를 따라가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대답하곤 했다고 이야기가 있다.
사실 시대 정황상 일반 대중에게 사회주의란 '뭔가 위험하지만 정의롭다' 정도의 이미지였으므로, 어린 김두한으로서도 충분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법하다. 게다가 앞에서 설명했듯이 건준에 참여한 전적 또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두한이 우익 쪽으로 전향한 까닭은, 사상이나 뚜렷한 복수심보다는 그저 인맥과 시류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결과였다고 봐야 한다.
일단 김두한 본인은 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이규갑과 윤치성이 자신을 적극 설득한 결과라고 하는데, 이규갑은 김좌진과 같은 충남 사람이기는 하지만 김좌진의 사망 당시 조선에 있었고, 심지어 윤치성은 1936년에 사망한 사람이므로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단, 김두한은 ' 윤치영의 형님이었는데 아마 윤치성이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윤치영에게는 형이 다섯이나 있었으므로 헷갈렸다고 해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뒷부분에서는 자신을 설득한 것은 장덕수와 김구라며 딴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럴듯한 명분의 문제일 뿐 진실이 무엇인지고 누가 그것을 말해주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명은, 이범석 혹은 이범석 쪽 인물과의 인맥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일단 이범석과 김좌진의 관계는 두말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당연히 김두한은 해방 이후 자연스럽게 이범석 및 그쪽 계열의 사람들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범석이 1930년대부터 나치를 대놓고 찬양할 정도의 극우 반공주의자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14] 또한 이범석 계로서도 김두한은 그야말로 땡큐땡큐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김두한에게는 10여 년간의 건달, 깡패 생활을 통해 그를 따르는 힘께나 쓰는 무리들이 제법 존재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이범석 계는 조선민족청년단, '족청'계라는 이름으로 당대 역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는데, 반공 + 민족주의를 앞세우면서 좌우합작운동시기엔 중도파 코스프레를 함으로써 다른 우익청년단과 차별성을 두었고 여러 세력의 인물들을 흡수해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전향한 좌익 인사들도 상당수 족청계로 흡수되었다. 이렇게 족청계는 파시즘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는데, 대중을 동원하여 세를 불리는 동시에 다른 이들처럼 반대 세력을 테러로 박해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러니 제법 세력이 있으면서도 해방 이후 한참 완장질에 맛이 들려있던 김두한의 존재는 그야말로 완소 그 자체였다.
결국 이범석 계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앞세워 김두한을 추켜세워주며 적극적인 스카우트에 나섰고, 김두한 역시 아버지 친구들+좋은 일이라는 명분+ 완장을 찼다는 허영심이 휘리릭 짬뽕되어 이런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다만, 김두한의 행적을 제대로 파고들면, 단순히 이범석계, 족청계라고 꼭 집어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실 김두한과 그의 단체인 대한민청은 이승만, 이범석 중 어느 한쪽에 집어넣기가 애매한 조직. 굳이 당시의 우익청년단 계보를 정리하자면, 이범석의 족청계 vs 이승만의 대한독립청년단(독청계) vs 서북청년단 정도로 말할 수 있는데, 대한민청은 이 중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은 별개의 존재였다. 실제로 김두한 본인은 다른 명사의 이름은 잘 팔아먹었으면서 유독 이범석에 대해선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제3자 정도로 이야기한 것이 전부다. 또한, 나중에 자유당에서 숙청당한 이범석 계가 자기들끼리 재차 분열되는 과정에서도, 김두한은 이범석 계가 아닌 비 이범석 계와 함께 따로 갈라져 나왔다. 그러니 '김두한 = 이범석 족청계'라는 단순도식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김두한의 행적은 이범석과 이범석의 족청계를 빼버리면 논리적인 설명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함정. 실제로 김두한은 자신이 백의사와 매우 가까웠다는 주장을 했는데, 백의사는 빼도박도 못하는 이범석 쪽 조직이다. 또한 김두한은 국회의원에 처음으로 출마했을 때 연설 도중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을 재건했다는 드립을 쳤다는데, 이것은 사실상 이범석 계열의 주장을 복붙한 것. 김두한은 신나게 썰을 늘어놓다가 "부산에서 이범석과 자유당을 만들었다"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얼핏 흘린 적이 있다.
사실 해방 전후 정치인들의 계파 문제는 내로라하는 역사가들조차 골머리를 앓을 정도로 워낙 복잡하고 모호한 면이 있다. 극우단체를 통틀어 이범석 계나 족청계로 구분하는 것은 사실 편의상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일이 따지고 들면 온갖 세부 계파 및 군소단체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김두한 본인으로서는 당시에 딱히 자신이 이범석계라거나 족청계라는 자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김두한과 그의 조직을 장택상의 별동대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것 역시 상당한 부분에서 설명이 들어맞긴 하나, 또 한편으론 들어맞지 않는 점도 있다. 김구의 별동대로 볼 수도 있으나 이것 역시 맞는 부분과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 결국은 보기 나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그런데 이를 설명하기에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게 있다. 그것은 바로 돈과 권력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대의 부자들이나 일제시절 관료 출신들의 대부분은 우파 단체를 지원했다. 이로 인해 콩고물을 노리고 수많은 우파단체들이 난립했는데, 워낙 이름도 비슷한 별의별 정체불명의 우파 단체들이 존재하는 까닭에, 내로라하는 역사가들조차 피똥을 쌀 지경. 특히 군소 단체들의 경우, 특정 정치인의 계파에 속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조직을 꾸려 운영하며 그때그때 들어오는 일을 맡는, 일종의 용병단체로서 존재했다. 김두한의 조직 역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김두한 본인부터가 자서전이나 회고록에서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물론, 김두한 스스로가 자신이 다른 역사적 인물과 맞먹는 수준의 중요 인물이라고 허세를 부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오명을 자기 혼자서 뒤집어 쓰겠다는 의리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다르게 해석하면 원래부터가 용병집단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김두한 본인으로서도 딱히 '누구의 지시'라고 특정할 수 없었던 것으로 봐야한다. 실제로 신영균, 박용직 등 당시 대한민청 소속이었던 이들은 훗날 인터뷰를 통해 "일단 김두한과 조직을 만든 뒤, 낙하산으로 유진산을 회장으로 앉혔다."라고 증언했다.
김두한에 대한 본격적인 후대의 연구가 이상할 정도로 적은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까지 우익행동대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특히 족청계와 서북청년단 쪽에 집중되어 있는데, 김두한과 그가 초기에 속해있던 단체는 족청, 서북청년단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별개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 내용에서 누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1946년 우익청년단체인 대한민청의 주요 인사가 된다. 대한민청은 고문 신익희, 회장 유진산, 명예 회장 김구, 이승만, 김규식이라는 식으로 명망가들이란 명망가들로 온통 도배를 해놓았지만, 결국 실질적인 영수는 이범석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신익희였거나 이범석 계는 아닌 제3의 인물 유진산이었을 것이고, 신익희나 유진산 등이 직접 테러 활동을 벌이고 다닐 것은 아니기에 결국 이 조직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김두한이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김두한은 이범석, 신익희의 비밀 조직인 백의사와도 상당한 관련성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백의사 자체가 비밀 조직이라 행적이 불문명하고 이미 백의사 단장은 염동진이라는 신비의 거물이 별도로 존재하던 상태로, 나이도 어리고 나중에 끼어든 처지인 김두한이 어떻게 비빌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김두한이 백의사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김두한의 대한민청 등의 청년단체가 좀더 표면화된 활동을 했다면, 염동진의 백의사는 좀더 비밀스러운 활동을 한 것으로, 양자는 마치 우익테러의 '빛과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훗날 김두한이 제법 이런저런 내용들을 회고록에 남겼다는 것이다. 그의 회고록은 허풍이나 과장이 많고 교차검증이 힘들어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그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제법 활약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신탁통치 찬성대회를 사보타지한 것, 남로당 전당대회 습격, 박헌영 암살 미수, 신불출 암살 미수, 심영 암살 미수, 여운형 암살 미수[15], 좌우합작을 이유로 김규식을 살해 협박, 좌우합작을 이유로 김원봉 살해 협박 등이 있다. 위의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김두한의 대상은 박헌영과 남로당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좌우합작에 대한 사보타주와 테러 또한 상당히 비중이 높았다. 어디까지가 김두한이 실제로 관여한 사건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남조선로동당의 지도부였던 박갑동은 '경찰이나 미군정에 잡히면 살고 대한민청에 잡히면 죽는다'고 증언했을만큼 당시 극우 단체 중에서도 무자비하기로 악명높았고, 그 대한민청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던 김두한이 이런 테러에 개입했을 가능성은 낮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리 김두한이라 해도 최소한 양심의 가책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우합작은 좌익에 대해 오염되었다는 주장을 열심히 전제로 깔았으며,[16] 김규식에 대해서는 '아버지 친구인데 좌우합작에 속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했고, 여운형에 대해서는 '내가 볼때 여운형은 완전한 좌익은 아니었는데, 좌익에게 둘러싸여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변명을 했다. 또한, 여운형을 협박하는 과정 중에 '내가 선생을 존경하고 있는데, 좌우합작은 잘못되었으니 좌우합작을 탈퇴하지 않으면 죽일 수 밖에 없다'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김두한이라도 김규식, 여운형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존경심 내지 조심스러움 정도는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참여했음이 확실하고, 본인도 자랑스러워했던 일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활동을 방해한 것이다. 특히 1946년 9월 총파업에서 맹활약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마디로 파업 현장에 쳐들어가 노동자들을 두드려 패는 일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김두한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전신인 대한노총의 간부가 되어 활약했는데, 대한노총은 원래 사회주의 계열의 노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족청계에 포함된 전향한 사회주의자들이 브레인이 되었고, 힘쓰는 역할은 김두한 및 김두한과 비슷한 정치깡패들이 맡았다.
또, 형무소 수감 중에 대구 10.1 사건이 일어나자자 높으신 분들이 직접 명령하여 풀려나, 이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행동대를 조직하여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기록에 따르면 9월 30일, 경찰과 경찰 끄나풀들이 노동자들의 농성 현장을 급습하여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장택상은 7~8명의 경관과 수천 명의 노동자가 부상당했다고 기자들에게 발언했는데, 대체로 수십, 수백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두한의 증언은 바로 이 사건에 자신도 동참했음을 의미한다. 장택상은 실제로도 당시 경찰 고위 간부였음에도 우익의 백색테러를 방조 내지는 조장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우익테러의 선봉대장이 되어 맹활약하던 김두한이 미군정에 의해 체포당해 사형까지 선고받는 일이 벌어진다. 1947년 바로 그 유명한 정진룡 살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기사 훗날 몇몇 창작물들에서 이 인물을 정진영이라고 했으나, 진짜 이름은 정진룡이며 재판 기록과 신문 기사로 명확히 남아있다. 이 인물이 곧 야인시대 정진영(야인시대)인데, 야인시대의 내용은 김두한의 자기 변명 + 극작가의 미화가 반영된 것으로 사실상 불쏘시개 수준이므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일단 이름조차 재판 기록의 정진룡이 아닌 잘못 알려진 정진영으로 한 것에서부터, 극작가가 어떤 집필 과정을 거쳤을지는 뻔할 뻔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원래 정진룡은 일제강점기부터 김두한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 오른 깡패로, 김두한과 마찬가지로 해방 초기 완장질을 하기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나 사회주의 단체 등을 기웃거린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두한은 정진룡에 대해 '수표교 아래에서 어머니를 모시던 거지를 부하로 거둬들였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증언들에 따르면 정진룡은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김두한급의 깡패였으며, 반도의용정신대에서도 김두한보다는 한 단계 낮은 급이지만 간부급 직책을 맡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김두한이 우익계로 전향하는 과정에 갈라섰고,[17] 상당한 분쟁과 갈등이 벌어졌으며, 결국 김두한이 수하들에게 명령해 정진룡과 그의 부하들을 납치해 끌고온 뒤 두드려패 살해했다는 것. 간단히 말하면 정치깡패 두 명이 이쪽저쪽으로 나뉘어서 완장질을 해대다가 한쪽이 다른 한쪽을 패죽여버렸다는, 사상 문제만 빼면 아주 전형적인 조폭간 분쟁이다. 단지 훗날의 김두한으로서는 운좋게도 죽은 정진룡이 좌파 쪽 깡패였을 뿐이다.
한편, 김두한은 1970년 라디오 방송에서 회고할 때, 진행자가 '친구 정씨에 대한 사건'에 대해 계속 질문함에도 불구, 대충 죽이고 파묻었다는 식으로 자세한 언급을 회피했다. 그리고 전혀 딴소리를 하며 이 사건이 아닌 다른 사건으로 재판정에 섰다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자신이 사형선고 받은 까닭은 "영등포에 10만명의 좌파가 운집하는 대회가 열렸는데, 목숨을 걸고 1,7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쳐들어가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수백명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원래부터가 위에 적힌 9월 총파업 중 일어난 사건을 살해사건과 교묘하게 바꿔치기하여 설명한 것으로, 김두한이 체포되고 사형까지 받게 된 것은 정진룡 살해사건 때문이지 그 전의 농성자 습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오히려 당시 미군정이 빨갱이 콤플렉스로 인해 파업 현장에 대한 습격을 고의적으로 묵인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을 정도이다.
이후 수사와 재판 과정 중에 여러 우익인사들이 대놓고 개입했는데, 그럼에도 족청계의 병크에 잔뜩 열 받아있던 존 하지가 강경하게 나와 결국 김두한은 사형이 확정됐었다. 그리고 이때 존 하지에게 원한이 생겼는지 회고록에서는 줄곧 존 하지가 좌익에게 편향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존 하지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근대사에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존 하지는 전형적인 반공주의자 미국인이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한편 김두한은 재판 도중에 통조림 깡통 뚜껑으로 할복을 시도했다. 사실 말이 할복이지 전형적인 깡패들의 자해 쇼에 불과했다. 그런데 김두한으로서는 다행인 것이,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따라서 김두한의 형 집행 문제는 자동적으로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었고, 김두한은 1948년 9월 경 얼렁뚱땅 풀려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김두한이 자기 입으로 직접 얘기한 내용만 봐도 그가 과장을 많이 섞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그가 벌인 상해 및 살해 사건이 수두룩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독 이 정진룡 사건으로 김두한이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고 후세에도 널리 알려진 까닭은, 김두한이 살해 현장에서 직접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즉, 빼도박도 못할 정도로 확실한 현행범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의 결과로 대한민청은 해체되었다. 재판 결과는 보스 김두한은 사형, 간부급인 김준경, 신영균, 김영태, 홍만길, 조희창(상하이 조) 등은 종신형을, 조직원인 고경주(휘발유), 김관철, 김두윤, 이영근, 이창성, 양동수, 임일택, 송장환, 박기형 등은 징역 30년, 문화태, 송기현 등은 징역 20년이 선고되었다.
덧붙여서 김두한은 오키나와 형무소에서 흑인 주먹들과 붙었다는 둥, 위에 적힌 1947년 발생한 여운형 암살사건에 개입했다는 둥의 이야기들을 했는데, 당연히 신뢰성은 제로이고, 아무리 김두한을 미화시켜 돈을 버는 극작가들이라 해도 이정도까지 허무맹랑한 내용을 창작물에 반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김두한과 정진룡의 이야기를 '우정을 간직한 두 친구가 사상적으로 갈라서 결국 한쪽이 죽음으로 다다른 비극'으로 각색한 매체는 김두한을 다룬 소설 <인생극장>이고 후대에 제작된 드라마 동양극장과 야인시대는 이 각색을 채용했다. 자세한 내용은 김두한/창작물 참조.
한편, 한국어 위키백과의 김두한 항목을 비롯 각종 백과사전이나 인명사전에서도, 정진룡 살해 사건 자체는 아예 언급조차 안되며, 그나마 기록되어 있는 것들도 '대한민청 관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고 얼버무리듯 서술되어 있다.
어쨌든 1948년 대한청년단이 창단되는데, 이 단체는 당시 우후죽순으로 존재하던 이런저런 우익청년단체들이 이승만과 이범석의 합작으로 하나로 통합된 단체로서, 김두한 역시 대한청년단으로 흡수되면서 이 단체의 건설부장 겸 감찰부국장이 되었다. 단장은 당시 귀국한지 막 한달이 지난 낙하산 신성모. 이후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고 이승만계와 이범석계가 사실상 대한민국 정부 그 자체가 됨으로서, 사실상 대한청년단은 반공을 위한 이승만 정부의 어용단체가 된다.
어쨌든 이 당시 김두한의 활동에 대해서 본인이나 그의 측근들, 몇몇 후세 사람들이 공산당에 대항하기 위한 애국심이라는 주장을 했는데, 분명한 사실은 김두한이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자신의 특기였던 폭력을 바탕으로 테러 활동에 앞장서, 상당한 세력을 쌓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다졌다는 점이다. 또한, 그 당시나 이후에나 김두한과 유사한 행각을 벌인 정치깡패들이 몇몇 있었고,[18] 이 중에선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부와 명성을 거머쥔 작자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김두한만큼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쌓고 국회의원이라는 명예로운 자리까지 차지했으며 대중의 화제가 되어 영화나 드라마까지 만들어진 인물은 대한민국 역사상 김두한 뿐이다.
참고로, 김두한이 당시 벌이고 다닌 짓에 대해서는 그의 측근들도 반박이 거의 불가능한데, 훗날 김두한 본인이 직접 이러한 내용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두한 본인 입으로, 이승만이 "사람 좀 그만 죽이고 다니게."라고 했다고 자랑스럽게 밝혔을 정도다. 재미있는 건 박용직이나 신영균 등의 측근이 ' 비록 사람을 여럿 죽이긴 했지만 이승만과 독대씩이나 하면서 직접 저런 소리 들을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고 반박 아닌 반박을 한 바 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본인은 피난 도중 수원시, 포항시에서 전투에 참여했다는 주장을 했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관련 기록은 전무하다. 다만, 김웅수 장군 회고록에 김두한이 찾아와 전쟁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는 일화가 실려있고, 당시 우익청년단체원 중 일부가 전투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김두한 본인이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김두한 본인이 라디오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태어나 처음으로 전쟁의 공포에 마주친 상태에서 똥오줌을 갈기며[19], 몇날 며칠 동안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김두한이 늘어놓은 거짓말이 워낙 다채롭고 양 또한 많은 탓에 이 이야기 역시 진실인지 허풍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2015년 '김두한 출세기'라는 저서를 집필한 김상구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고 한다. 김두한은 아버님이 꿈에 나타나 남으로 가라고 했다, 과거 별동대의 대원으로 추정되는 4명에게 극적으로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전의가 없는 하사관의 군복을 바꿔 입고 단신으로 북진한 뒤 한강전투를 하고 있는 이종찬 장군 부대에서 만 6일간을 싸웠다는 검증 불가능한 증언을 남겼다.[20] 김두한은 자신이 한국전쟁 당시 포항 전투에 참여했다고 떠들었다. 포항 전투에 대한 김두한의 증언을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포항출전 경비를 비상수단으로 염출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의 자유를 수호하는 전쟁과 아랑곳없이 보화를 싣고 자식들만 데리고 일본으로 피난가려는 가증한 모리배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총 4억 6천만 원을 거둬 출전 경비를 충당했다. 나는 부산에 도착한 이튿날 광복동에 있는 일본 절에 임시 단본부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시내 일대에 격문을 붙여 대한청년단원 학생들에게 전쟁 참가를 호소했다. 나는 이들 학생들과 대한청년단에 파견된 배속장교 60명, 그리고 방위군만 전쟁에 참가하게 했다. 나의 애국에 대한 호소는 많은 청년들을 감동시켜 총 1만 2천 5백 명의 학도의용군을 만들어 대한청년단유격대를 편성했다. 포항작전은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다. 1만 2천 5백 명의 병력을 끌고 들어가서 김석원 장군에게 미약한 병력이지만 전투에 참가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김장군은 아무 말 없이 내손을 1분간이나 꼭 쥐고 있었다. 나는 김석원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적과 싸웠다. 내가 정규군에 배속된 학도의용군을 독전하러 고지에 가 보면 어떤 학생이 실탄 장전을 못해 쩔쩔매고 있어 내가 대신 장탄을 해 주면서 그를 격려했다. 나는 이때 1천 7백 명의 학도병을 희생시켰다. 우리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미 육군 대령 계급장을 단 미군 고문관이 작전지도를 펼치고 있는 김석원 장군에게 왔다. 김 장군은 일본도의 칼날을 돌려서 대령이 쓴 철모를 쳤다. 나는 군인생활 30년 동안 후퇴를 해 본 적이 없다. 절대로 후퇴할 수 없다. 이 작전이 조국을 위해 마지막 전투가 되는 것임을 알라 B-29 편대가 먼저 적의 기지에 가솔린을 뿌려 놓고 폭탄을 투하하니 적진은 일시에 불바다가 되었다. 폭격이 끝난 3시간 후에 우리 척후대가 적진에 가보니 적군은 모두 새까맣게 타 있어 꼭 개를 끄실러 놓은 것 같았다고 보고해 왔다. 나는 포항 작전이 끝나자 의용군을 이끌고 부산에 왔다.
이는 김두한이 쓴 자서전에 나온 내용이다. 부산 앞바다의 귀족선을 털어 4억 6천만 원의 경비를 마련했다거나, 학생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려 12,500명의 학도의용군을 만들어 대한청년단유격대를 편성했다거나, 포항 전투 시기 김석원 장군 휘하에서 1,700명의 학도병을 희생시키는 등 치열하게 싸웠다는 김두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국전쟁 전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김두한의 증언은 일방적인 개인의 주장만 있지 역사적인 기록은 전혀 없다. 즉, 미국, 소련, 중국, 북한, 한국 등에서 한국전쟁을 다룬 어떠한 문서에도 김두한의 활약을 다룬 장면은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한국국방부가 편찬한 <한국전쟁전투사> 중 안강 포항전투 부분에서도 당연히 김두한이 말한 증언을 뒷받침할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참고로 김두한이 참여했다는 포항 전투는 2010년 ' 포화속으로'라는 영화로 제작될 만큼 유명한 실화다. 이 전투는 1950년 8월 10일부터 8월 11일까지 포항으로 남하하는 조선인민군 육군 제12사단과 제5사단, 제766부대와 이를 방어하는 대한민국 제25연대 및 제3사단 학도병 사이에 벌어진 전투다. 전투에 참가한 학도병은 71명으로 이들 중 48명이 전사하고 23명이 부상을 입거나 행방불명 또는 포로가 됐다. 그 당시 전투에 직접 참여했던 김석원이나 유원식 등은 이 전투에 대해 회고록에서 언급했는데, 김석원의 회고록을 봐도 앞서 김두한이 언급한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 외에도 남상선의 <6.25 실전기 3사단 학도의용군>, 차규헌의 <전투>, 이병형의 <대대장>, 최정화의 <그 여름 겨울> 그리고 김석원을 부정적으로 쓴 유원식의 5.16 비망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 등 그 어떤 자료에도 김두한이 의용군을 이끌고 와서 포항전투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에 입각해 보자면, 김두한이 한국전쟁 초기 전투에 참여했다는 얘기는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21]
이후 부산으로 건너갔으며 뚜렷한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본인은 그 유명한 부산정치파동에 대해서는 치질을 앓는다는 핑계로 자신은 일부러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부산정치파동 항목을 가보면 알겠지만, 이 사건은 이승만이 깡패들을 동원해 야당 국회의원들을 억류하고 기습적으로 헌법을 개정한 사건. 즉, 김두한은 이때 일을 벌인 깡패들은 본인이나 본인 세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한 것이며 이때 동원된 깡패들이 이정재 세력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김두한이 정말로 참가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라디오 회고를 통해 '안 걸린 게 나 하나이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이정재 세력이 몰락했을 때, 본인은 이정재와 관련성이 없어 무사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4.19나 5.16 이후에 부산정치파동사건에 김두한이 관련되어 있음이 드러났다면, 아마 김두한은 이정재와 사이좋게 손잡고 형장으로 갔거나 그 정도는 아니어도 국회의원 재선은 꿈도 못 꾸고 몰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부산에서 일어난 철도 파업, 항만 파업을 선동했다는 아리송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역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나 김두한은 알고보면 노동자 편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일단 당시 파업이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나, 전쟁 전에는 파업하던 노동자를 때려잡던 사람이 파업을 선동했다는 점에서 신빙성은 낮다.
4. 국회 초선
휴전 협정 직후 서울에 돌아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는데 이 때의 나이는 겨우 37세에 불과했다. 이 시점에서 김두한은 한마디로 인생의 승리자였다. 참고로 김두한과 유사하게 우익 청년 단체 활동을 했던 인물 중 상당수가 제2대, 제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대표적으로 유진산과 이철승이 있었고 자유당이 형성된 이후 여당에서는 대한민국 국회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자기 편에 속하는 청년단 계열 인사들을 대거 공천시킨 것도 있었다고 한다. 김두한의 국회의원 시절 행적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명물'. 이는 단순히 주관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1950~1960년대 언론에서 김두한을 일컬은 말이다. 젊은 나이에 좌충우돌하는 "김두한 군(君)"의 기사는 소위 신문 박스 기사의 단골 소재거리였다. 굳이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대충 어느 정도 인지도있는 유튜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김두한이 당선된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언변이 큰 역할을 했다. 김두한은 말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두한이 육성으로 남긴 내용만 보아도 물론 원고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게 보통학교도 못 나온 사람인지 의심이 들 정도의 달변이며 그럴 듯한 고급 어휘도 상당수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김두한은 구마적과의 대결을 이야기할 때 제대로 된 용어를 쓰지는 못 했지만 작용 반작용의 개념을 들어 설명했다. 정치권을 떠돌며 남들에게 주워들은 내용을 적당히 짬뽕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보기와 달리 남에게 들은 것을 잘 기억해뒀다가 자기 것으로 써먹는 것 자체가 상당히 능력을 요하는 일이다. 두뇌 회전도 엄청 좋았으며 최소한 현실적인 임기응변에 한해서 만큼은 굉장히 머리가 잘 돌아갔다. 일례로 심영을 저격할 때 심영을 미행했다가 종로구와 중구의 정확하게 경계선 지점에서 저격했다. 김두한이 심영을 저격하면서 노린 게 뭐였냐 하면 종로구와 중구 사이의 수사권 분쟁을 노린 것이었는데, 경계선에서 저격했으니 어느 구에서 담당해서 수사를 해야 할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김두한은 이 점을 노려서 심영을 저격하고도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며 이런 계략을 쓸 정도로 김두한의 머리 자체는 매우 좋았다. 김두한이 해방 공간이라는 이전투구의 아수라장을 헤치고 살아남아 일자무식의 학력으로 국회의원까지 된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도 종로 유흥가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 기자는 김두한이 유세장에서 "이 동네 기생년들이 1표씩만 줘도 내가 뽑히게 되어 있다."고 큰 소리쳤다는 증언을 남겼다.
그 외에도 총선 결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유당과 이기붕을 싫어하는 것이 투표를 통해 밝혀졌다. 자유당이 과반 이상의 의석 수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노골적으로 자행된 선거 부정에 비하면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었으며 서울에서는 16개 의석 중 5개만 차지했으니 사실상 서울에서는 판정패한 셈이다. 자유당의 공천을 못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한 상황에서 당선된 사람들의 수가 무려 67명에 이르렀으며 김두한 역시 반 자유당 정서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종로구 을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2위와 1.5%의 아주 근소한 차이로 당선됐다. 2위는 북에서 월남한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민주당에서 출마한 한근조라는 법조계 거물이었으며 3위는 자유당의 최봉하 후보로 1,2위와 큰 표 차이로 낙선했다. 국회가 열린 첫날 국회의장 및 부의장 선거가 있었는데 부의장 선거에서 김두한에게 1표가 나왔다.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반 자유당파의 기수가 되었는데 이에 대해 김두한의 측근 및 몇몇 후세의 사람들은 김두한이 이승만의 독재화 움직임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실은 자유당의 공천을 못 받자 깽판을 쳐서 자유당에서 제명됐다는 것이다. 이는 김두한조차 쿨하게 인정한 사실이다. 특히 자유당 창당 과정 중에 이범석 및 족청계 세력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이 이들을 자유당에서 대거 숙청했는데 이 과정 중에 김두한 역시 토사구팽 1순위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김두한 본인 스스로가 먼저 판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 나온 것이다.
이후 이범석과 족청계는 공화당이라는 새로운 야당을 만들어 선거에 나설 계획을 세웠으나 이범석이 대한민국 부통령 출마를 고집하여 분열했다. 이로 인해 비족청계가 이탈하며 당이 분열되었으며, 이 때 김두한 역시 비족청계와 함께 딸려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제1 야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은 이범석의 족청계를 포함해 우익 청년 단체 출신 인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일체 거부한 것이다. 사실상 신익희, 조병옥이 야당 인사로 신분세탁을 하면서 옛 동료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린 것이다.[22] 이때는 자유당이 창당된 후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였기에 출마를 위해서는 자유당의 공천 여부가 절대적이었으므로 자유당의 공천을 받기 위해 돈보따리를 싸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상황이니 자유당에서도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상황으로, 김두한 대신 선거에 내보낼 사람이 잔뜩 대기 중이었다. 김두한은 본인부터가 테러로 악명이 높고 나이까지 어렸으며 배운 것도 하나 없는 건달 출신으로 각종 범죄 및 깡패들과 엮인 관계가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이다. 자유당이 김두한 공천이라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뻔한 이야기지만 선거 직후 무소속 당선자들의 상당수는 자유당에 복당했으며 김두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김두한이 그때에도 폭력배 때의 버르장머리를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온갖 곳에서 트러블이 일어났는데 말실수 같은 것쯤이야 거의 매일같이 일어났으며, 당선 직후 부정 선거 혐의 등 선거법 위반 의혹에 부동산 불법 매매 혐의가 있었으며 특히 깡패 동료였던 김관철에 대한 살해미수 의혹까지 연루되었다. 김관철 살해미수 혐의 사건은 밀가루와 설탕 입찰 등 이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국회의원 선거 1달 전인 1954년 4월 발생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김두한이 열받았다고 권총으로 김관철에게 위협 사격을 한 사건'이다. 김두한은 대질심문 중에서조차 또 1차례 김관철을 폭행했다고 한다. 결국 이로 인해 김두한은 당선되자마자 감옥으로 직행했으나 도주 우려가 없다며 불구속 기소하여 일단 풀려났으며 이후 김관철은 고소를 취하했다. 그러나 특수협박은 친고죄가 아니므로 아무 소용이 없었고 이 사건은 법정에서 기묘할 정도로 시간을 질질 끌었다. 결국 1956년에 김두한이 유죄를 받기는 받는데 선고유예[23]였다.
그러다가 사사오입 개헌 이후 개헌에 반대하며 깽판을 쳤다는 이유로 또다시 제명 처리됐다. 김두한은 이 과정 중에 자유당의 브레인이었던 장경근의 옥수수를 몇 대 털어냈다고 주장했고 자유당 세력의 방해로 투표에 불참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불참한 덕분에 1표 차이로 개헌을 일단 막을 수 있었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사사오입 개헌이 처음에 실패했던 까닭은 찬성표가 하나 모자랐기 때문이지, 누가 불참하고 말고는 상관이 없었다. 이게 터무니없는 소리인게 당시 신문 기사만으로 김두한이 회의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진다. 김두한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던 민관식 역시 훗날 인터뷰를 통해 당시 김두한과 함께 투표에 참석하여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김두한이 사사오입 개헌을 반대한 이유이다. 김두한이 개헌 몇 달 전부터 개헌에 반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도 자유당 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직접적으로 개헌을 반대한 사람은 김두한과 민관식 단 2명 뿐이다.[24] 이에 대해 훗날 김두한은 이승만의 독재를 막기 위해서라는 주장을 했으며 후세의 사람들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이지만 애매하기는 하다. 사사오입 개헌 전에 김두한은 "개헌안 중 경제 조항이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지금보면 느닷없어 보이는 이유를 댔다.
사실 대통령 3선 문제를 제외했을 때 사사오입 개헌의 중점은 경제 관련 조항들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자원 및 기간 산업의 국유화, 무역 통제, 민간 기업의 국유화 및 통제 등 계획경제적 조항들을 삭제하거나 완화하여 시장경제 쪽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는데 문제는 자유당이 경제 관련 조항 개헌 도중 갑작스럽게 국무총리 폐지[25]와 이승만의 3선[26]이라는 내용을 끼워 넣으며 경제 조항 문제는 쌈 싸먹는 수준의 '퐈이야'가 일어나버렸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김두한이 사사오입 개헌을 반대한 이유가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해서였는지 그냥 꼬장의 연장성이었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김두한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했고 반대한 의원의 대표주자였다. 사실 김두한이 이런 식으로 반자유당 - 반이기붕 입장에 선 것은 그냥 '자기들을 내쫓은 이기붕이 싫어서'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한 것 역시 대단한 정의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사사오입 개헌 자체가 선거 이전부터 이승만, 이기붕 일파의 지상 최대 목표였기 때문에 단순히 '이기붕 엿 먹이기'였을 가능성도 있다. 사사오입 개헌 이후 자유당에서 쫒겨난 김두한은 남은 회기를 무소속으로 보내며 매일같이 흥미로운 기삿거리를 쏟아내는 무소속 계의 행동대장이자 아이돌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후 이정재가 국회 회관까지 찾아와 김두한에게 결투를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만 이 사건은 이정재의 맞짱 요구에 김두한이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므로 대체적인 여론은 '김두한이도 철이 좀 들었나보다.' 정도다. 사건의 원인은 역시 이기붕 세력과의 불화였으며 이것이 원인이라는 것은 김두한 본인 역시 훗날 인정했다. 단지 여기에 더해 주먹질하는 사람들 특유의 허세가 겹치다 보니 이런 요란한 사건으로까지 발전했던 것인데 어쨌거나 이 둘이 정확히 어떻게 붙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정재는 김두한처럼 선천적인 싸움천재 같은 것도 아니었고, 행동대장 이상급의 조폭들 사이에서는 힘만 센 찐따 취급을 받던 사람이라 항상 부하들을 잔뜩 데리고 갈때만 폭행 사건을 저지르던 사람이니, 단순 결투가 아니라 자객이나 음모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드라마 제1공화국과 야인시대에서는 이정재의 부하[27]가 권총을 준비한 걸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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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ddd> 1956년 7월 27일, 지방선거 입후보 방해에 항의(7.27 데모사건)하는 야당 의원들과 김두한. |
한편 일제에 의해 난장판이 되어 있던 불교계가 정화 운동을 할 때 여기에 개입해 조계종의 출범에 한 역할을 했다. 조계종이 탄생한 일은 불교 및 조계사 문서로. 이로 인해 21세기까지도 불교계 일부에는 김두한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사들이 존재하지만, 사실 이 일은 파고 들어가보면 그렇게 밝고 건전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 불교계에서 난장판이 일어난 까닭은 어느 날 갑자기 이승만이 " 승려가 결혼도 하고 애도 낳으면 이상하잖아? 그거 일제 잔재임"이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단 명분 자체는 대체로 비구승 쪽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대처승 가운데에는 친일 인사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국가 권력이 종교 문제에 개입했다는 것 그 자체.
한편 조계종 일부에서는 알고 보면 당시 법원, 행정부 등은 중립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이 마치 임금이라도 된 양[28] 매일같이 '대처 쪽이 옳다'라며 '종교의 자유'와는 거리가 먼 발언들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는 상당한 이권[29]이 얽혀 있었는데 김두한이 이미 갈라선 이승만 쪽을 따라 비구승 쪽을 편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이 때 상당수의 깡패들이 불교계와 관련을 맺었는데 일부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됨으로써 이후 불교계의 상당한 골칫거리가 되었다. 불교계 일부에서 김두한을 높이고 천도재까지 지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전에 불교계에서 허구헌 날 갈등이 발생하고 머리를 빡빡 깎고 덩치가 좋은 승려들이 짱돌을 던지고 각목을 휘두르는 광경이 TV를 탔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불교계의 깡패 관련 문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5. 재야인사
결국 다음 선거인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해버렸다. 당시 야권은 반 자유당 기치를 내건 민주당으로 재편되는 상황이었는데, 민주당 쪽에서도 국회의 트러블메이커이자 이범석 계, 족청 계의 아이콘이나 마찬가지였던 우파 깡패 김두한을 불러줄리가 만무. 결국 김두한은 위에서 설명한 노농당이라는 군소 정당의 후보로 나설 수 밖에 없었고, 민주당 한근조 후보와 압도적인 표차이로 2위 낙선했다. 덧붙여서 김두한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사세청장 폭행 사건[30]과 선거법 위반으로 감방으로 직행하는데 훈훈하게도 경쟁자였던 민주당 한근조 당선자가 면회를 갔다고 한다.어찌됐든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졌으니 야인 신세였다. 따라서 1958년부터 65년까지 7년 동안 김두한은 그냥 재야인사 비슷한 그 무엇인 상태였다. 이 시기동안 선거에 나왔다 떨어지는 과정 중에 상당한 재산을 까먹었을 듯하다.[31]
물론, 당시 혼란한 상황 속에서 뒤늦게 개나소나 나선 것은 분명히 있었던 일이긴 하다. 게다가 4.19로 이승만이 쫓겨나고 이기붕이 죽는 것을 보면서 김두한이 통쾌해 했을 가능성도 높고.. 한편 몇 년 뒤,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 사건에는 4.19 혁명에 참여했던 운동가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뭔가 미심쩍긴 하다만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한편, 김두한은 4.19 혁명 세력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은 자유당의 남은 세력이 위해를 가할까봐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32]
어쨌든 4.19 직후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당의 몰락으로 사실상 민주당이 제1당이 되어 버린 가운데, 수많은 군소정당들이 난립한다. 노농당의 경우, 이미 창당인인 전진한 스스로가 탈당한 지경인지라 김두한은 그냥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종로구에서 출마하는 것은 부담이 되었던지 아버지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에서 출마했다. 그러나 선거 과정 중에 "김두한이 서울에서 주먹들을 데리고 왔다더라"는 소문이 퍼져[33] 근소한 차이로 무소속 김영환 후보에 밀려 2위 낙선했다. 훗날 본인은 이때 역시 불교 정화 과정 중에 생겨난 개신교 신자들이 안티 김두한 운동을 펼쳐 낙선했다고 주장했으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후 장면 정권이 성립하자 장면의 일제강점기 때 행적이 애매하다는 이유로 국회 방청석에서 난동을 부린다. 아니, 이 정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국민연합전선"이라는 정치조직을 만들어 장면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며 찌라시를 돌리고 시위를 벌였음을 훗날 쿨하게 인정했다. 아버지 때문에 친일파가 싫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아무래도 총리의 친일 의혹을 부추겨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둔 자신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려 했던 행위로 보인다.
덕분에 장면은 친일 의혹 꼬리표가 붙어 고인이 된 이후까지도 그야말로 개고생했다. 장면의 친일 행적 의혹의 핵심은, 그가 신사참배 참여를 독려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어져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장면의 행동을 '소극적인 친일'로 볼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볼지는 결국 각자의 판단. 다만, 장면의 행적을 친일로 본다면, '경성특별지원청년단'이라는 조선총독부의 어용 준군사단체를 조직했던 김두한의 행적은 과연 무엇으로 봐야할까? 어찌보면 이런 김두한의 행위야말로 후안무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괜히 사람은 끝이 좋아야 하는게 아닌 셈.
이런 일 말고도 여전히 깡패로서의 본성을 보여준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으니, 마사이찌 린치 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이야 김두한이 당시 유명한 부산 건달인 고영목, 소위 고 마사이찌라고 불리던 자와 같이 술을 마시다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서 싸운 사건인데, 당시 뉴스 기사들의 이런저런 전말을 종합해서 당시 상황을 훑어보면 웃기지도 않은 몇가지 결론이 나오게 된다.
김두한이 야인생활을 하던 당시, 평소 제법 두터운 친분이 있던 마사이찌 고영목과 술을 마시다가, 요정 기생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고영목을 홀대하자 빡친 고영목이 김두한과 붙은 사건인데, 여기서 김두한은 1대1로 승부가 안 나자 처음엔 고영목을 달래서 화해하는 척 한 다음 다른 졸개들 몇을 데리고 가서 달궈진 연탄집게 등의 연장을 써서 고영목을 집단으로 린치해서 상해를 입히게 된다.[34][35] 여기서 야인시대 시청자들이 '뭥미??' 할 일이 몇 개 생긴다. 우선 야인시대에서 그저그런 중간보스 급이던 황병관에게 개털린 후에 총질을 해서 황병관을 죽인 그 고사이마찌가 바로 저 인물로, 실제 고영목의 진술은 적산가옥 문제로 시비가 붙었다가 '황병관에게 따귀를 여러 대 맞고' 개털리자 홧김에 사살했다고 한다. 당시 목격자였던 이화룡의 증언
6. 국회 재선
1965년, 용산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한국독립당의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다. 이로써 생애 두번째로 국회의원이 되어 8년 만에 국회 재입성한다. 보궐이 아닌 본래의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자체에 출마했는지는 불명확하다. 일단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때 나이 47세로 아직까지는 한창때였다. 그런데 문제는 김두한의 소속과 그의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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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ddd> 1962년 3월 1일, 독립유공자 만찬회에서 만난 김두한과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때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지 3년 뒤로, 정계는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vs 윤보선의 민정당을 중심으로 재편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제3의 세력으로 옛 민주당에서 갈려져 나온 민주당 계의 꼬마 정당들이 있었다. 문제는, 어느 쪽이건 간에 모두 김두한을 꺼렸다. 당시 군부 세력이 들어서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정치깡패들을 청소한 것이다. 사실 정황상 집권세력인 군부가 정치깡패의 대명사였던 김두한 역시 함께 보내버리고 싶어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당시 김두한이 조폭계에서 우두머리였던 이후 김두한을 대신하는 조폭계의 대명사가 된 이정재나 임화수 등은 김두한과 확실하게 대립관계에 있었으므로[36], 엮을 꺼리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37]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여당이건 야당이건 정치깡패의 대명사 그 자체였던 김두한을 받아들이는 것은, 명분에 상당히 좋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전 국회의장 이만섭은 KBS 1TV 인물현대사 차지철 편에서 " 차지철은 권오석 등과 현역 정치인들을 폭행하는 등, 주먹으로 정치활동을 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차지철도 못 건드린 사람이 있었는데[38], 그게 바로 정치깡패로 이미 악명이 자자했던 김두한이었다. 물론 차지철은 그 당시에는 국회의원이었고 경호실장이 되어 본격적으로 권력을 휘두른 건 김두한 사후였지만 그 당시에도 성격이 개차반이었던 차지철도 김두한을 건드리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4.19 혁명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6대 국회에서 김두한의 비서로 지냈던 서용화는 국회 본회의장 안에서 갑자기 김두한이 차지철을 보고는 "당신 힘이 장사라며? 나하고 한 번 붙어볼까?”라며 웃통을 벗어던진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김두한은 40대 후반, 차지철은 30대 초반.
그가 소속되어 출마한 한국독립당 자체가 어떻게 설명하기도 묘할 지경이다. 원래 한국독립당은 1930년, 임시정부의 여당으로써 세워진 정당이였다가 1935년에 민족혁명당에 통합되었다가 이탈한 뒤 1940년에 통합됨으로써 새롭게 세워진 정당이라 볼 수 있는데, 김구가 사망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자연소멸된 상태였다가,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이던 1963년 옛 한독당 소속 인물이었던 김홍일 등을 중심으로 다시 재건된 것이다. 즉, '선거용으로 향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름만 끌어와 급조한 정당'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1960년대라도 이런게 먹힐리가 만무하니 결국 한독당은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사람도 당선자를 배출하지 못했고, 나중에 보궐선거에서 김두한 한 명만이 간신히 당선했다. 신기하게도 이 당에는 4.19혁명에 참가했던 학생운동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어느샌가 사실상 당의 핵심은 이들이 되었다.[39] 그 덕에 김두한의 포지션도 자연스럽게 진보계로 또다시 연결됐다. 당시 김두한의 선전부장이었던 모세원의 이야기 그런데 김두한은 당선되자마자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 수감되어 버린다. 이 사건은 아주 전형적인 국가보안법 용공 조작 사건의 초창기 버전이긴한데, 주범으로 김두한이 껴있다는 매우 특이한 사건이다. 김두한의 비서가 된 모세원의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한 젊은 운동가들[40]과, 말실수라면 일등 가는데다[41] 오랫동안 광산업에 손을 대서 폭약, 화약도 입수하기 쉬웠던데다[42] 어쩐지 이 당시 김종필에게 접근을 시작한 김두한을 엮어 버린 것이다. 그러고서 알고보니 김두한이 자금이랑 폭탄까지 주면서 불순분자 운동가들에게 내란 일으키라고 했다고 만들어낸 것이다. 집권 세력인 군부 입장에선 운동가들도 정리하고 정치깡패도 정리한다는,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기였다. 덧붙여서 이 사건은 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 이전 현역 국회의원이 내란죄에 연루된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어쨌거나 워낙 스토리가 어처구니 없었던데다 당시는 유신 이전으로 아직은 박정희가 여당을 완전히 장악한 것도 아니었고[43] 야당 역시 세력이 약하지 않았던 상태였다. 거기다 간신히 10년 만에 보궐 선거로 당선되어 회기가 1년 정도 남은 상태에서 당선되자마자 감방행이라는 사실이 동정표를 끌어 곧바로 국회에서 석방동의안이 가결되어 풀려난다. 또한 재판정에서도 이 사건으로 최종적으로 기소된 10명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기소된 10명 가운데 한 명은 경찰이 심은 프락치임이 밝혀졌으며, 무죄 확정에 따른 형사보상금은 김 모씨가 일괄수령해 잠적해버렸다고 한다.
7. 말년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
- 사건 당시 김두한의 마지막 발언.
1966년 그 유명한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그야말로 김두한이
국회의원 시절 일으켰던 온갖 좌충우돌의 결정판으로, 이후 영원히 국회의원 김두한의
이미지로 남았다. 김두한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 때문이다.- 사건 당시 김두한의 마지막 발언.
이 사건은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의 항소심이 마무리된지 불과 5일 후에 발생했다. 이로써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으로 감방에서 풀려난지 겨우 1년, 의정 활동을 한지 8개월만에 국회의원에서 물러나[44] 곧바로 감방으로 직행했다. 이 시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 때문에 앞니가 다 빠지는 등 몸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수감 중에 할복을 시도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런 행위는 미군정 당시 정진룡 살인 사건 재판 때도 벌인 짓. 그나마 똥을 뿌린 것 말고는 별로 피해를 주지 않았으므로 1년 뒤 고혈압으로 인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박정희 정권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나빠진 이미지를 반전시키기 위해 김두한을 거세게 몰아 붙였으나 오히려 이미지 세탁을 제대로 한 건 김두한이었다. 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두한이 잘했다고 여겼다.
감방에서 풀려난 후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수원시 선거구에 출마한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의 결과로 이미지가 개선되었고 한국독립당 출신 운동가들이 민주당계이던 신민당에 들어가는 과정 중에 김두한도 함께 영입이 된 것이다.[45] 드디어 그 오랜 세월 끝에 그럴듯한 정당의 소속이 된 것인데 신민당은 바로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정치계의 거목인 YS와 DJ가 몸담고 활동한 민주당 계열의 정당이었기에 우익 깡패 전적이 있던 김두한의 행보와 생애를 사람들이 조사하는데에 더욱 꼬이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YS와 같이 야구 경기를 한 후 찍은 사진도 있고 YS 역시 훗날에 김두한에 관련된 짧은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김영삼의 회고에 의하면 김두한은 종종 부하들과 술을 마실 돈을 달라고 김영삼에게 부탁했으며 김영삼은 그 때마다 흔쾌히 도와주었다고 하며 김두한이 김영삼에게 요청하여 가진 술자리에서도 항상 김영삼이 술값을 지불했다고 한다.[46] # 그 외에도 이만섭 국회의장은 김두한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다. DJ의 경우에는 박정희 정권의 사카린 밀수로 인한 오물 투척 사건 때 김두한의 직전에 연설을 하며 현장에 있었고 신민당으로서 같은 당원이기도 했지만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다만 김을동이 정계입문 초기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의원을 재직하기도 했고 DJ가 대통령이었을 시절에는 김을동 본인이 소속해있던 자민련이 연립 여당이었기에 DJ의 선거 운동을 도와주는 등 인연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이 당시의 김을동은 국회의원이 아니라서 특별히 엮을거리는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득표율은 이전보다 크게 늘었기는 했다만 약간의 차이로 민주공화당 이병희 후보에 밀려 낙선했는데, 이병희 의원은 삼성전자 공장을 수원에 유치했을 정도로 지역 기반이 강한 탓에 수원에 연고가 없는 김두한이 상대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후 유세 도중 연설이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후세의 김두한 찬양자들은 이 사건을 이유로 김두한이 박정희 정권에게 탄압받은 민주투사 쯤으로 위장하려 드는데 사실 이 때 김두한은 투표소 관리위원을 협박 모욕하는 사건도 저지른 상태였다. 즉, 두 사건이 함께 적용되어 수감된 것인데 이번에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두 사건에 대해 다시 팩트에 기반해서 적자면 1) 국가보안법에 의해 탄압받은건 사실이며 박정희와 삼성이병철회장의 사카린 밀수로 비자금 조성을 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이었고 2) 투표소 관리위원을 협박모욕한 사건도 해당 링크의 기사를 보면 투표소 관리위원 측이 부정을 저지른 이유가 먼저다.
5년 뒤인 1972년 11월 18일 김두한은 주먹계의 후배인 조일환을 만난 후 다음 날인 19일에 센추럴호텔 객실에서 심한 두통과 구토를 호소하더니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관련자료 1 관련자료 2 이 때 신원 미상의 인물들이 김두한을 병원까지 옮겨다 주었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했고 결국 다음 날인 11월 20일에 퇴원하여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 3동 769[48] 자택으로 옮겨진 뒤 그 다음 날인 11월 21일[49]에 향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50][51] ( 3·6대 국회의원 김두한씨 별세) 사인은 고혈압.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인 조소앙의 동생인 조시원이 장례위원장이 되어 광복회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장관이나 정치인 등이 조문을 와서 명복을 빌고 그가 생전에 백야 김좌진 장군의 국가유공자 연금 등을 장학금으로 기부해왔던 삼애 고아원 등에서 온 소년소녀 가장들이 참석하는 등 나름대로 사회적인 명사의 장례식의 모습을 갖췄다. 시신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 신세계공원( #)에 안장되었다.
현재까지 김두한에 대한 연구는, 반공콤플렉스 및 김두한보다 우선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인물, 사건이 상당한 탓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대부분의 기록들이 김두한이 직접 남긴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허위, 과장, 왜곡, 축소, 은폐된 부분이 상당하여 어려움을 한층 더하고 있다.
[1]
김두한의 말에 따르면, 김좌진이
형평운동 중에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실제일 가능성은 적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저 아래 친자 논란 항목에서 논한다.
[2]
특기가 상대방 어깨 짚고 양발차기로 발차기 기술이 가히 당대 독보적인 최고였다고 알려져 있다. 본인이나 당대 건달들이 모두 말했던 내용인데, 유연함과 스피드를 모두 갖춘 치명타라서 항상 머리 위주로 노렸는데, 한대라도 맞은 사람들은 전부다 정신을 잃어서 졌다고 한다. 구마적이나 신마적도 다 머리 쪽을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이긴 것이다. 그래서 김두한 발차기 한방이면 다 죽는다고 경성 조폭계 전역에 소문이 나서 별명이 "잇뽕 김두한", 즉 한방 김두한이었다.
[3]
더 대책없이 미화한 인간들도 많기야 한데, 아무래도 그 유명세나 영향력으로는
이환경만한 사람이 없다.
[4]
참고로 김두한은 구마적과 싸울 당시 자신의 체중이 25관(약 93.75kg)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5]
'전우치전설' 이라는 블로그에 보면 이때 경성 건달들에 대한
기사를 모아놓은 포스트가 있다.
[6]
정작 저렇게 체포된 인간들이 몇 달 뒤 또 깽판치다 잡혔다는 기사들이 나오는 걸 보면 당국에서도 크게 처벌하지 않았고, 대단한 일도 없던 만큼 실제로 크게 처벌 할 일들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때의 일제는 사정이 워낙 막장이며 전쟁에서 패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건달과 깡패들을 단속하고 처벌할 여유가 부족했던 것이다.
[7]
사실 원래 일제는 조선인들을 불신하여 절대 군대로 징병하지 않았고, 당시 조선인 공직자나 군인은 출신만 조선인이지 웬만한 일본인보다 더 일본물이 제대로 든 명예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경찰이 일본인 경찰보다 조선인을 더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조선인 징용을 하던 때는 일제의 인력사정이 워낙 막장이기에 그렇게 못 믿던 조선인까지 징병해야 한 것이다.
[8]
김두한이 헌병을 팼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유곽에서 어깨가 맞닿아서 민 적이 있다고 했다. 아울러 유곽 직원들이 숨겨 줬는데 술이 깨고 헌병이 먼저 챙피해서 말을 안했다. 당시 일본 육군 헌병 대위는 급이 있는 직책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김두한 말대로 적당히 사령관과 이빨을 까면서 쇼부를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단, 김두한 말대로 술 취한 상태로 어깨가 부딪혀서 밀고 도망쳤는데 일본 헌병 대위가 술도 취했고 유곽이기도 하고 어떤 놈인지도 잘 모르고 해서 쪽팔려서 안 잡고 넘어간 정도여야지 좀 말이 된다. 아무래도 술집도 아니고 유곽에서 술 취한 상태로 부딪혔다가 밀고 도망친 누군지도 모르는 조선인을 신고해서 찾는다는 것은 면이 좀 상하기는 한다. 일본 헌병 대위가 김두한 같은 입장에서야 범접할 수 없는 존재지만 사실 유곽 가서 생긴 문제를 대위 주제에 자기 마음대로 더 크게 비화시킬 수 있을 정도라고 보기도 어렵다. 비화야 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함부로 비화시켰다가 상급자들에게 불이익을 당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9]
미국에서 만난 것은 사실 이지만 맨 처음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다.
[10]
김영태의 이야기로는 1943년 쯤이라고 했다.
[11]
기름칠 뿐만 아니라 그가 하야시 패거리들과 싸운 이야기 자체가 이야기 할 때마다 달랐던 것도 문제다. 싸울 때 쓴 연장이나 싸움 시간같은 게 다른거야 디테일 기억하기 힘드니 그렇나보다 치더라도 일본인 보스 이름도 바뀌는건 분명 문제가 있다.
[12]
이후 이야기지만, 장명원은 해방이 되자 황급히 김두한과
조선청년전위대를 만들어 신분세탁을 꾀하기도 했다.
[13]
정사와 별개로 작중 김두한은 주먹으로라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주먹패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제에 도움이 되는 근로보국대를 조직했다는 것 자체로 친일을 하게 된 셈이기 때문에 이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14]
실제로 이범석이 중국 군사 시찰단에 있었을 때 독일을 방문한적이 있었고 중국의 남의사와 국민당의 국가주의 레토릭에 영향받았을 공산이 크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방 후 이범석 정치노선의 생격 - 이택선'과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 - 후지이 타케시'.
[15]
여운형 항목에도 간단하게 나와있지만 그의 자택에 수류탄이 투척된 사건이다.
[16]
이러한 주장은 당시 극우 쪽의 전형적인 주장이었다. 당연히 극좌 쪽은 반대의 주장을 했다.
[17]
이에 대해서는, 정진룡과 불화로 인해 김두한이 우익으로 돌아섰다는 주장도 있다. 즉, 인과관계가 반대라는 것이다.
[18]
대표적인 예시가
이정재다. 다만 김두한이 깡패짓을 하던 일제 말~해방 직후에는 이정재는 경찰이었고 이정재가 본격적으로 깡패짓을 한 건 6.25 전쟁 이후였다.
[19]
하루하루가 죽고 죽이는 싸움인 사람이 왜 이랬는지 의문일 수 있는데,
애초에 이건 일반 군인들도 다 이런다.
[20]
김상구, 김두한 출세기 - 정치깡패와 깡패정치인, 책나무, 2015, 282~283쪽.
[21]
김상구, 김두한 출세기 - 정치깡패와 깡패정치인, 책나무, 2015, 285~287쪽.
[22]
야인시대에서 조병옥과 같은 야당 인사들과 김두한이 계속 교류하는 것으로 그려진 것과는 달리 해방 직후에는 백색 테러리스트였던 김두한과 접점이 있었을지 몰라도 이들이 야당 인사로 신분세탁하면서 김두한을 손절했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이들과 접점이 있었다는 것도 김두한의 일방적인 주장이기도 하고.
[23]
참고로 현재 선고유예 기준을 적용하면 김두한은 절대로 선고유예를 받을 수 없다. 일단 총을 갖고 있었고, 그걸 실제로 쏜 시점에서 이미 실형 확정이다.
[24]
이전부터 은근하게 거부 의사를 간간히 내비친 의원들도 있었고 실제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도 있었으며 투표가 끝난 이후에야 돌아선 의원들도 존재하거나 동시에 원래 반대파였는데 위협에 굴복해서 찬성표찍다가 이후에는 돌아선 의원 등 여러 부류가 있었다. 단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반대한 것은 김두한과 민관식 뿐이라는 것이다.
[25]
대신 외무부장관 - 내무부장관 - 재무부장관 순으로 서열 1위의 국무위원이 국무총리의 역할을 당연직으로 맡는 수석국무위원 직책으로 대체했다. 그래서 국무총리가 폐지되기 전부터 이미 외무부장관을 겸임하고 있던
변영태 총리는 국무총리 폐지 후에도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에 그대로 유임했고, 이후
제2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허정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도 헌법 부칙에 따라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에 그대로 유임되었다.
[26]
3선 제한 해제를 헌법 전체에 못박은 게 아니라 부칙에 "이 개헌이 이루어질 당시에 재임 중인 대통령에는 3선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다."라고 하여 이승만에 한해서만 3선을 없앴다. 이후
윤보선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이 부칙 때문에 3선이 막혀 그 유명한
3선 개헌을 단행한다.
[27]
야인시대에서는
유지광으로 나온다.
[28]
당시에는 대통령이 사실상 '선거로 뽑히는' 왕 수준의 위상을 갖고 있었고 사람들의 인식도 그랬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29]
국가 보조금, 사찰 소유권, 종단 운영자금 등.
[30]
해당 폭행의 피해자는
대성학원 설립자 김만기.
[31]
이 때문에
김을동이 개고생하며 컸다는 직접간접 증언들이 존재하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선거는 붙지 못하면 그 경제적 타격이 이만 저만 큰 것이 아니다. 지금이야 낙선하더라도 득표율이 10%를 넘기면 선거 비용 반액을, 15%를 넘기면 전액을 국가에서 보전해주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진산도 부친으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그 재산을 독립운동과 정치 활동에 다 쓴 탓에 죽을 땐 이미 은행에 저당잡힌 집 한 채 말고는 재산이 없었다.
[32]
재야 인사 시절, 이런저런 군소정당을 기웃거리는 과정 중에 진보계 및 학생 운동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 자신에게는 특별한 사상이 없었지만 이런 과정 중에 진보 및 학생 운동 쪽의 이론 약간을 습득하여 그의 행적이나 연설 등에 이러한 것들이 다소 반영되게 되었다.
[33]
김두한이 죽는 날까지 그의 주변에는 그를 형님으로 모시며 콩고물 좀 얻어보려는 건달, 깡패 패거리들이 늘 기웃거리고 있었다.
[34]
물론 둘 다 술에 취해 있었기에 전력을 내서 싸우지는 못했을 것이고, 김두한이 털렸다면 이미 술에 취해 화를 주체못해 싸움까지 한 고영목이 김두한의 달램 따위를 들어줄리가 없다. 고영목 역시 부산의 최강자여서 만만찮은 사람이었고 김두한은 이미 정치인으로 전직을 한지 한참 되었기 때문에 싸움실력 등에서 현역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물론 고영목 역시 몰락하고 감옥도 가고 폐병도 앓고 서울로 올라온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싸움이라 확실히 누가 강하다고 보기 어렵고 사실 그냥 술 취한 아저씨들끼리 허우적대다 무승부가 되는 편이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 그들의 싸움 실력에 대한 한 가지 단서 정도는 될 수 있겠지만 황병관, 김두한, 고영목 등의 싸움 실력을 확정적으로 논할 수 있을 만한 사건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35]
단 김두한 입장에서는 고영목을 린치할 이유는 충분했다. 자기가 부산 간 것도 아니고 서울에서 그것도 세력도 잃어버린 고영목이 같이 술 잘 먹다가 어이없이 김두한이 더 잘나간다고 시비를 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영목은 개인 대 개인으로는 대단한 위험인물로 주먹싸움을 하다 졌다고 황병관을 권총으로 쏴 죽인 장본인이다. 이화룡과 명동패거리나 시라소니도 얽혀 있는 사건이니 김두한도 이 사건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싸움에 지고 화나서 살인까지 하는 고영목이기 때문에 사소한 이유로 시비가 생기고 옥신각신하다 보면 위험해질 수 있으니 집단린치를 통해 기를 꺾는 것이 결코 이상한 판단은 아니며 어떻게 보면 1:1보다 현명한 판단이다. 싸움에 져서 총 쏘는 놈에게 1:1을 할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집단린치를 통해서 누굴 쏴 죽여도 불법 합법을 가리지 않고 단체로 보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또한 깡패무리의 특성상 그리고 고영목의 전적상 여기서 대충 달래서 화해하고 헤어진다면 나중에 고영목이 내가 김두한과 붙어서 무승부였다느니 하는 건 양반이고 김두한이 나랑 싸우다가 나한테 크게 맞을 것 같아서 미리 알아서 기길래 봐줬다느니 하는 썰을 풀어대면서, 부산 짱이 서울 짱을 이겼다느니 하면서 세력을 특히 경남 세력을 모을 가능성도 결코 적지 않다. 어쨌든 묵과하고 가만 놔두기에는 힘들기에 이것은 오히려 김두한이 술 마신 상태에서 짧은 순간에도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린, 머리가 빠르게 잘 돌아간다는 또 하나의 증명일 수 있다. 김두한이 수틀렸다고 매번 린치하다 신문에 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36]
실제로 수사과정 중에 이정재의 암살 대상자 명단에 김두한이 끼어 있었다.
[37]
게다가 부정선거의 주범 자유당과 척을 지는 상황이었고, 사상 초유의 국회 난입 사태도 이정재가 직접 벌인 일이라 어찌됐든 당시 현역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을 여기에 엮어서 처벌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38]
그 외 차지철은
김용채에게
손찌검을 당하기도 했다는 소문도 있다.
[39]
십중팔구 통일지향 여론과 더불어
김구 향수에 낚여 가입한 젊은 혁신계 운동가들이 역으로 당을 접수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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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핵심적인 인물이 당시 서울대생
김중태인데,
인민혁명당 사건과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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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중에 "수 틀리면 청와대를 부수겠다"고 했다. 뭐 김두한이 이런 식의 말실수를 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니 집어내기도 쉬웠을 것이다.
[42]
김두한 본인부터가 입만 열면 해방 직후 모모 사건에 폭탄을 제공했다는 따위의 얘기를 늘어놓았으니, 사실 여부가 어찌되었든 정권 입장에선 그저 차려진 밥상에 숟갈 얹기에 불과했다.
[43]
사실 유신 이전까지 박정희는
3선 개헌 관련해서나
10.2 항명 파동 등 당과 마찰을 겪은 적이 제법 있었다.
[44]
당연히 제명처리 감이다. 제명처리안이 통과하기 직전에 본인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으로 수습되었다.
[45]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으로 김두한과 함께 법정에 선 인물 중에서만 국회의원이 3명씩이나 나왔다.
[46]
<
야인시대>에서 묘사되었듯이 부하들
밥을 사주겠다고 YS에게 돈을 꿔간 일이 많았다고 한다. YS는
거제도의 유지 집안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부유했는데 아버지가 정치와 특별히 관련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47]
다만 후술하겠지만 실제로 오랜 지병으로 쓰러진건 이틀 전인 19일경이며 그 후 의식이 없는채로 병원에 머물다가 다음날인 20일에 자택으로 옮겨지고 21일에 숨졌다.
[48]
검색하면 나오는 주소이나 현재 이 자리에 김두한의 자택이나
주택은 남아있지 않고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가 있으며, 일부는
도로에 편입되었다.
[49]
공교롭게도 이 날은
10월 유신이
엉터리 투표로 가결된 날이다.
[50]
<
야인시대>에서는 '특별한 인물이라고 최후까지 특별한건 아니다'라는 일종의
권력 무상의 느낌을 연출하고 싶었던 것인지 김두한이 길거리 뒷골목에서 쓰러지는 것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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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주
송일국이 갓 첫돌이 지났을 때다. 하지만 당시 기준 남자의 평균 수명은 55세 정도라 요절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