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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5:24:57

백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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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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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활동
2.1. 테러2.2. 정치인 암살2.3. 6.25 전쟁 참전
3. 출신인물4. 매체에서5. 여담6. 관련 자료7. 관련 문서

1. 개요

白衣社

대한민국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에 있었던 극우, 민족주의 단체. 1945년 11월경에 월남한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여기서 독립운동가 박기수가 임정국내특수공작대 백의사의 공작자재 요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중국국민당 남의사를 모방해 조직한 전문 테러단체로, 백의민족의 조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의사의 영향으로 백의사도 유사 파시즘적 성격이 있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기 시기 혼란한 상황 속에서 수많은 정치인들을 암살하고 각종 테러를 자행했다. 총사령관은 염동진이었다.

백의사는 신익희를 거쳐 김구에 연결돼 있었다.[1] 간부인 이성렬에 의하면 백의사는 김구의 테러조직 소리를 들었는데, 좌익들 사이에서는 이승만의 테러조직은 삼우회, 김구의 테러조직은 백의사라 할 정도라고 한다. 임시정부 국내특파원이었던 백창섭에 의하면 1948년 만주에도 백의사에서 8명과 함께 갔다 왔다고 한다. 조카로 김종진이 있다. 최서면(본명 최중하, 장덕수 암살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감형받았다) 연구소장이 이영신에게 보낸 '京高特秘 第3210號 金九 一黨의 愛國團員 檢擧에 關한 件'[2]에 염동진에 대한 자료가 있는데 이것은 훗날 백의사와 염동진에 대한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백의사 출신 인원들은 후일 북파공작경험을 살려 KLO 부대 창설에 합류, 부대 성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원산에 침투해 북한 실상을 파악해 오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백의사 공작원 10명은 출발에 앞서 1946년 2월 25일 김구 선생을 예방하여 윤봉길 의사처럼 총과 수류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김구 선생과 기념촬영을 했다"[3]는 증언이 백의사가 아니라 KLO 부대원 회고담에서 나오기도 한다. 참고로 이 대북 침투단원들 중 백의사 결사대가 바로 김일성, 강량욱, 김책, 최용건 등에 대한 폭탄 테러를 일으킨 그 백의사 단원들이다.

2. 활동

2.1. 테러

평양 모란봉 아래 영명사(永明寺)라는 절의 박고봉과 함께 조직한 이 단체의 성원인 백관옥[4], 선우봉[5], 박진양 등이 1945년 9월 3일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장인 현준혁[6]을 암살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관련자 대부분은 1945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월남했다.

이영신이 ' 비밀결사 백의사'를 발표하기 전에는 9월 28일에 좌익 장시우가 죽인 걸로 알려져 있었다.

백의사는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야심적으로 조직한 '정치공작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신익희의 '정치공작대'는 주로 북한에서 '반탁, 반공 공작'을 하던 조직이었다. 신익희의 정치공작대에는 해방 직후 신익희와 연계를 갖고 백창섭이 조직한 '임시정부 특파사무국' 관계자들이 참가했다.[7]

관련자의 진술에 따르면 백의사는 이성렬, 김정의, 김형집, 최기성, 백시영, 이희주 등으로 구성된 '대이북집행부서'가 조직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신익희의 '정치공작대'와 연합했고, 1946년 초반 북한으로 밀파되었다.[8]

이들은 여러 가지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게 1946년 3.1절 기념 행사에 나온 북한의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던진 것인데, 노비첸코라는 소련 장교가 대신 부상을 당했다. 당시 김제철(金濟哲)이 김일성을 권총으로 쏘려 했으나, 미행이 붙어서 못했고 김형집(金亨集)이 수류탄을 던졌으나 안전핀을 제대로 뽑지 않았던 탓에 김일성에게 떨어졌을 때는 터지지 않았고, 노비첸코가 그걸 다시 집어서 던지려는 와중에 수류탄이 터져 그의 눈과 한쪽 팔을 잃었다. 이는 나중에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노비첸코는 제대 이후 농사를 지으며 힘들게 살다 김일성이 그를 데려와 생멍의 은인이라며 극진히 대접했고 북한 행사에 잘 불려다니며 인민의 영웅으로 숭배되었다. 그의 아들도 김정일이 연금을 지급할 정도로 고마움을 받고 있다고 한다.

조사과정서 임정 외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된 승차권이 발견되었다고도 하며 북한은 이에따라 김구를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했다. 김책이나 강량웅 가족 사살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자주민보에서도 김일성 수류탄 암살사건이나 강량욱 가족 사살 사건을 김구의 소행으로 보고 있는데 자주민보는 대법원에 의해 폐간당한 극좌 종북계열 매체로 신뢰성을 일절 담보할 수 없는 매체이기 때문에 그냥 북한의 주장이 저렇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해야 한다.

저런 의심을 받은 이유는 권총암살이나 폭탄테러는 이승만보다, 김구와 백의사의 특기였기 때문이다. [9] 이승만은 외교론자이기 때문에 테러를 부정적으로 생각했었고, 실제로 이를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 군정문서에 의하면 이승만도 삼우회라는 테러단체(경찰이 기반)를 운영했다고 한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권(p230)에 의하면, 이 사건은 김구와 신익희의 지시로 저지른 사건이라고 한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의 승차권 외에도 2월 15일에 발급된 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신임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및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는데 이 사건을 통해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이때 체포돼 소련군에 끌려간 백의사 단원 김정의는 심문에서 임정 내무부의 정보국장 박문(朴文)이 증명서를 작성해 주었고,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김구는 이러한 계획을 비준했지만, 자신이 직접 만나지 않아 자신의 북행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언급했다고 한다.[10] 정황상 김구의 승인이 있었음은 분명한듯.

권중희나 미군정 보고서에 의하면,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라고도 하는데 아니라는 말도 있다. 이성렬(李聖烈)씨는"내가 아는 한 안두희는 백의사 사원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게다가 안두희 본인도 자신은 백의사 요원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측의 주장의 근거가 여럿 있는데, 김구가 저격당하자 염동진이 분노했다는 증언이 있고, 한편으로는 애초에 백의사가 김구, 이승만, 한민당, 미국 CIC와 연락망을 갖고 있었던 단체라고 하지만, 소련군정문서에 따르면 백의사는 김구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있었다고 한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이 소련군정문서의 신빙성이다. 해당 문서는 남한의 좌익 단체의 진술에 기반하여 작성된 것인데, 해방 이후 백의사의 테러에는 신익희의 정치공작대, 미국 CIC 방첩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실제로 1946년 3.1절 평양 테러 당시에도 신익희는 거처인 낙산장(駱山莊)에서 본인이 창설한 정치공작대 단원과 함께 테러를 지휘한 바 있다. 아울러 1947년 초에는 신익희는 김구와 사실상 결별하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구가 백의사를 직접적으로 이끈 수장이었다는 주장은 의심쩍은 부분이 많다. 다만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는 주장도 문서 같은 물증은 없는 상황이다. 실리 보고서에 의하면 염 씨는 김구 씨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다. 염씨는 한국군 내부에 존재하는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 씨에게 전달해 주는 매개자 역할을 해 왔다.는 서술이 나오고 신익희에 대한 서술이 나오지 않는 걸로 보아 김구의 하부 조직인 게 맞다.

김구의 비서, 선우진은 안두희는 결코 백의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선우진도 백의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도진순도 염동진은 백범 암살을 사주 안 했을 것이라며 반박했다.

백의사는 임시정부 법통론을 정의라고 여겼으며 임시정부[11]를 부정하는 이들을 암살하였다. 특히 좌익 세력을 소련 공산당과 결탁한 기회주의자로 보는 입장을 견지하여[12] 좌익 세력 척결을 주장하였는데, 이 때문에 좌익만 암살했을 것 같지만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암살했다.[13]

2.2. 정치인 암살

실제로 암살당한 요주 인물 중에서는 좌익보다 우익이 더 많았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암살범들은 백의사와 연관되어 있었는데, 여운형을 제외하고 송진우와 장덕수는 한민당 핵심간부인 데다가 우파였다. 송진우의 경우 반탁운동 방법론을 두고 신중론을 취해서 짚신감발을 해 가면서 반탁하자는 김구와 경교장에서 싸웠고, 여운형은 애초에 임정봉대에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장덕수는 한민당 한독당 통합을 한민당을 임시정부에 바치는 일이라고 반대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인지 한민당 총수 김성수는 한민당 결성시에 임정봉대론을 주장하였고 한민당-한독당 통합에 찬성하는 등 임시정부 세력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척 했다. 그러고는 김구가 법정에 소환되어 입장이 불리해지자 이를 정치적 호재로 이용, 이승만과 손잡아서 떨궈 버렸다. 장덕수는 미국 동부 지역의 한인 유학생들의 리더이며 북미유학생총회의 부회장이었으며 1925년 4월 임정에서 구미위원부 폐지령 내렸을 때 '구미위원부와 이승만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며 이승만을 도와야 되는 이유와, 궁지에 몰린 이승만과 구미위원부의 후원의 정당성을 역설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임정법통론을 고수한 대표적 인물이 김구였다. 다만 김구가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렸다는 증거는 없다고 하지만 죽일 놈이니 처치하길 원했다고 한다. 장덕수 암살로 김구가 법정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되자, 김구는 "자신이 암살하기로 마음먹으면 행동자와 1:1로 대면해서 지시를 내리지 간접적으로 암살을 하도록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법정소환 후 김구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공판록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왔다.
(問) 그러면 검사가 증거품으로 조서한 11호 12·13·14호는 각각 金錫璜 趙尙恒 辛日俊 孫禎秀의 진술서인데 그중 필요한 부분을 읽어드릴 터이니 그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요.
이로부터 전기 4명의 진술서 중 필요한 부분만을 계속해 낭독하였는데 그 내용의 요점만을 적으면 이런 것이다.
결국 4명이 진술한 것 중에서 공동 일치한 점인데 1. 처음에 김석황이가 김구선생은 張씨를 처치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 2. 그의 사실여부를 알아보려고 김석황 이외의 전기 3명이 죽첨장에 김구를 찾아만났더니 장덕수 明濟世 裵恩希 등 사람들은 李박사 밑에서 일하면서 미소공위에 참가한다니 죽일 놈들이다라고 김구씨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분심을 짐작하는 동시에 김석황의 말을 확인했다는 것 주로 이 점이었다. 이에 金重穆의 진술서인 증거품 10호 중 이상에 일치된 요점을 낭독하고 나서 라만검사는 다시 심문하였다.
장덕수 암살사건 제8회 군률재판 증인심문 중 #

실제로 김구는 장덕수를 '죽일 놈' 운운했다고 한다. 해방 이전의 김구는, 장제스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작은 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광복군이 있긴 했으나, 역시 규모가 작았다. 그래서 누군가를 없애기 위해서는 암살자와 1대1로 지시하고, 계획도 짜야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의 김구는 한국독립당이라는 거대 단체를 이끌고 있던 수장이라서, 암살자와 직접 면담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결정적인 차이다. 그리고 장덕수 암살과 연루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던 최서면은 해방 이후 Y대 시절부터 김구 밑에서 학생운동을 했다.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백의사 편에서 나온 백의사 대원들은, 자신들이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자들을 처단하였으므로 옳은 일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동아에서 조사한 백의사 관련기사.

참고로 염동진은 김구의 밀고로 중국공산당에게 고문당했다는데, 이건 허위사실이다. 왜냐하면 김구와 백의사는 해방 이후에도 견고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미군의 CIC 비밀문건에 의하면,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범들이 백의사의 암살특공대라고 주장한다. 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이게 몇몇 장교들의 발언만 근거로 한 거기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자료들을 가지고 판단하면 신뢰성은 떨어지언정 무조건 틀렸다고 볼수는 없다.

이성렬에 의하면,
『광복 후 좌익들이「이승만의 테러조직은 삼우회(三友會), 김구의 테러조직은 백의사(白衣社)」라고 할 정도로 백의사는 백범선생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백범 선생이 염 사령(廉 司令:염동진)을 중국공산당 정보부에 넘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내가 1945년 9월 염 사령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눈이 잘 안 보인다고는 했지만 맹인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38선을 넘어올 때 같이 월남하던 백관옥(白寬玉)에게 염 사령이「눈이 안 보인다」는 얘기를 하더랍니다. 서울에 와서는 아주 맹인 행세를 했지만, 모두 반신반의했어요.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 염 사령이 맹인 행세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여운형 암살배후가 백의사란 건 유명한데, 여운형의 경호원인 박 씨에 의하면 범인이 김구의 전 숙소였던 이 모 씨 집으로 도피한 게 이상하다고 했다. 그리고 한지근은 한현우와도 친했다. 여운형 암살 사건 발생 후 한지근은 권총과 실탄 10발을 한현우 집에 숨겨 두었다고 한다.(...) # 실제로 한현우와 한지근 둘 다 친분이 있었고,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도 김구 쪽과 관계가 있었다. 당시 우익 테러단체에 관계한 인사들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14] 사실 한현우는 최서면(장덕수 암살범)과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개인적 친분관계와 조직적 연결관계가 결합되고 분리되는 경계선을 명확히 설정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여운형 암살배후 가운데 김영철이란 인물의 경우 서북청년단과 백의사를 둘 다 왔다갔다했다. 그런데 실리 보고서에는 백의사가 좌우익 각종 직업의 구성원으로 되어 있는 비밀결사라고 나온다. 장덕수를 암살한 박광옥, 배희범도 교사와 경찰이었지만 실제로는 백의사 조직원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직접적 관련이 있다는 것은 한지근 본인의 실토로 증명된다.
여운형 암살, 송진우 암살과 연결되어 있다. 한지근이 자기는 송진우 암살에 연루된 한현우가 이끄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고 실토
◦ G-2(주한미군 정보참모부) WS(주간정보요약) #98 7-2047 #

참고로 서북청년단은 처음에 김구의 밑에 있었다가 1946년 전후로 이승만 밑으로 간다. 그런데 김영철은 임정특별행동대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운형 암살범중 하나인 신일준은 장덕수 암살혐의로 사형을 판결받았다. 김영철과 신일준의 개입은 여운형 암살의 공소시효 만료 때 암살범들이 자수함으로써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암살 하수인들도 자세한 건 몰랐다(...). 훗날 백의사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는데 송진우를 저격한 한현우의 인터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테러리스트들은 주요정치인들이 암살당했을 때, 마치 '자기가 했다'는 것처럼 되려 범인들을 옹호했고, 따라서 해방정국 백의사를 비롯한 테러리스트들 사이간에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한지근이 김구의 전 숙소에 머물렀다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임정이 조선에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회의가 여운형 사형. 그런데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자들이 임정 휘하의 청년단체들이었다는 게 문제지.

여운형 암살은 1974년 4인 암살가담자들의 기자회견 후의 검찰조사와 1994년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의 일본 인터뷰에서 상세한 윤곽이 밝혀진다.
송진우와 여운형 암살은 1945년 11월-12월 사이 월남한 서북청년들이 만든 격몽의숙이라는 단체가 주도적으로 실행했다. 실제로 주범격인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는 와세대 대학 법과를 중퇴한 보기 드문 엘리트로서 송진우 암살 이전에 여운형 암살을 이미 기획했다고 1994년의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송진우 암살 이후 수사 상황을 보도한 1946년 8월의 동아일보를 보면 이미 한현우가 속한 단체는 박헌영, 여운형을 민족반역자로 처형하려고 계획한 일이 수사결과를 드러나고 있다. 그럼 1947년 2월의 암살도 이들이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4년 한현우의 일본 인터뷰를 보면 당시 월남한 극우파가 박헌영, 여운형 외에도 김규식, 안재홍 등을 암살대상으로 삼으려고 하다가 김규식, 안재홍을 제외했다는 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1974년 4명의 암살범에 대한 검찰조사에서 4명의 암살가담 인물들은 배후를 말한 적이 없다. 1994년 한현우 인터뷰에서도 배후를 부인하고 있다. 1948년 여운형 암살 당시에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실질적인 수사지휘자인 노덕술의 행보는 더 의아함을 준다. 하지만 후술한 장택상의 딸, 장병혜는 장택상이 김구에게 불리한 증거를 없앴다 한다.

미군 장교의 자료를 보면

주한미군 방첩대(CIC), 헌병, 수사기관 요원들이 연달아 몽양 집에 들이닥쳐 압수수색을 벌였다. 이처럼 암살당한 피해자 집에 와서 범행 증거를 찾는 희극이 연출되었는가 하면, 심지어 당시 미군정청의 한 법무장교가 작성한 한 보고서에는 “경찰은 여운형의 동행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체포하지 못 했다. 그들은 몽양의 개인적 또는 정치적 동지들을 체포했을 뿐이다”라고 적혀 있다.
수사를 맡은 수도경찰청은 (사건 발생 5일째인) “7월23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저동 2가에 있는 유풍기업회사 2층에서 범인 한지근(19)을 체포하여 엄중 취조 중에 있다”는 장택상 청장의 담화를 발표했다. 한편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도 같은 내용의 발표문을 내놓았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들어 있었다. “이와 같이 훌륭하고 위대한 수사의 업적은 수도 경찰의 자랑이 됨은 물론 국립경찰사 아니 세계경찰사에 찬연한 한 페이지를 썼다고 나는 생각하며 만족을 느낀다.”(경향신문 1947년 7월25일치) 실로 황당한 말이었다. 더구나 범인 체포 과정을 알고 보면, 신동운이라는 신고자(실은 범행 지휘자)와 경찰(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 간의 협상(?)으로 범인을 한 사람만 내놓기로 하고 검거 현장에서 동석자들과 기념사진까지 찍었다니, 경무부장의 위와 같은 말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허장성세인가를 알 만했다...
경향신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 여운형 암살사건 (上)

조병옥과 장택상은 자타가 공인하는 反김구파의 인물들이었다...는데 증거가 없다. 거기다 미군정? 1946년부터 미군정 수뇌부는 김구일파를 적대시하고 있었는데, 과연 이런 김구를 반대하는 그룹과 협조적인 체계가 가능하겠는가. 유어만 중화민국 총영사의 보고에 의하면 이(장덕수 암살범들 사형선고, 훗날 미군정 하지 중장이 감형해 준다)는 김구로서도 어쩔 수 없었고 이후 김 씨와 미군정 당국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라는 서술이 있는 걸로 봐서 장덕수 암살 재판 선고까지는 미군과 김구의 연결은 있었다.

백의사는 김구와 밀접한 관계로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보면 신익희의 낙산장을 훈련장으로 사용했고, 따라서 신익희 지령의 받아서 행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오히려 신익희와 백의사의 관계가 더 밀접했다.) 더욱이 이들은 미군CIC랑 밀접한 관계였다. 그러나 실리 보고서(한국에는 '김구 암살 관련 미 정보문건 전문(번역)'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의 염 씨는 김구 씨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다. 염 씨는 한국군 내부에 존재하는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 씨에게 전달해 주는 매개자 역할을 해 왔다는 문장으로 알 수 있듯이 김구와 비밀접촉이 있긴 했다.

다만 낙양분교 폭동사건 때 김구는 폭동에 가담했던 염응택(염상진)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환국 후 염응택(염상진)이 신익희와 함께 김구를 방문해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올렸으나 김구는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냉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과 접한 중국지역에 우익군대를 세우는 계획서를 염응택(염상진)이 작성해서 신익희를 통해 김구에게 보여주자 김구는 화를 풀고중국 총통 장개석과 부총통 이종인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 계획은 장개석 군대의 패배로 실패하고 만다.[15]

이 미군 자료(실리 보고서)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문은 염응택과 미군 방첩대(CIC)와의 관계이다. 이 정보보고서를 작성한 실리는 당시 내부정보 유출 문제로 가명을 사용했다. 당시 염응택은 신익희의 부름으로 낙산장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미군 정보국에 몸담고 있는 이순용[16]을 소개받았다.
이순용은 재미교포로 미군에 입대하여 2차대전에 참여했던 CIC소속 중사였다. 그 후 한국 정계에 들어와 이승만 정권 아래서 내무부장관에 기용된 바 있다. 이순용은 하지 장군이 신익희의 대한정치공작대를 해체하라고 하는데 대북 정보를 제공하면 해체를 재검토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신익희가 화를 내고 나가버리자 측근인 조중서가 그 역할을 백의사가 맡도록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그 후 백의사와 CIC와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실리 보고서에서도 이들 요원들의 다수는 1947-1948년 동안에 CIC 임무를 추진하기위해서 활용되었다.라는 서술이 있다.

염응택의 주 채널은 당시 이순용의 상사였던 CIC 서울지구 대장인 미 육군 소령 휘태커. 그는 궁정동 백의사 본부를 찾아와 대북 관련 정보를 제공하면 백의사 활동을 비호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휘태커는 염응택과의 약속에 따라 북한에 파견할 첩보원 훈련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훈련장소는 휘태커의 도움으로 마련한 정릉 골짜기의 외딴집이었다. 일본인 부호의 별장으로 쓰이던 그 저택은 이후 백의사에 의한 아지트로 이용된다. 저택 주변이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은밀한 활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이 집은 9∙28 수복 후 국군 HID 유격대의 비밀훈련장으로 쓰이기도 했다.[17]

여기서 김구와 신익희의 결별 년도와 과정을 보자. 신익희는 1930년대 후반에 백범과 활동을 같이 했지, 애초에 백범과 동고동락을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익희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구는 임정고수파였고, 신익희는 민족혁명당 계열이었다.

환국 직후 해공[18]은 자신의 이런 구상을 실천할 조직이 필요했고, 특파사무국 요원들은 자신들의 조직과 역할 가치를 인정해 줄 인물이 필요했다. 내무부장으로 특파사무국 요원들의 효용가치를 인식하였던 해공은 이들을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여 곧 바로 12월 6일 임정 내무부 산하에 정치공작대를 조직한 것이다. 아울러 일제시기 행정 관료였던 사람들 중에서 건국 일선에서 실제 행정을 담당할 사람들을 선발하여 행정연구위원회를 만들어 施政 자료수집과 연구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정치공작대는 조직되자마자 각급 단위의 조직을 구성해 갔다.

해공은 이미 상해 임정시절에 안창호를 도와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내무부 아래 감독부(道) ->총감부(郡) ->사감부(面)로 系線化된 지방 행정 조직망을 짜본 경험이 있었다. 정치공작대의 조직 방식도 연통제 방식을 따랐다. 비밀 점조직 방식을 채택하여 임정 내무부 산하에 중앙본부 ->도 조직 ->군(부) 조직->면 연락부 ->里·洞 연락반으로 하는 계선조직을 구축한 것이다.

이 정치공작대가 해소되고 정치공작대를 모체로 하여 백의사가 탄생하였다. 정치공작대와 임정의 관계는 1946년에 이미 종료되었다. 김구는 결국 1946년 4월 28일에서 29일 이틀에 걸쳐 집행기관인 정치공작대와 의결기관인 정치위원회의 임시대표회의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거국적인 국민운동이 필요하다는 결정에 따라정치공작대와 정치위원회는 해체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합류하도록 하였다. 때는 이미 우파세력의 반탁운동 통일조직으로 1946년 2월 8일 임정 중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와 이승만 중심의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합류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하 독촉으로 약칭)를 발족시킨 상태였다. 따라서 정치공작대의 역할과 기능은 독촉이 대신할 수 있는 상황에서 미군정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정치공작대를 통해 세력기반을 확장하던 해공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지녔다고 보인다.

김구는 1946년 4월 28일과 29일 양일 간에 걸친 임시대표회의를 통해 정치공작대와 정치위원회를 독촉에 합류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해공은 즉시 정치공작대를 독촉에 합류시키지 않고 오히려 정치공작대를 자신 주도 아래 조직을 확대해 가다가 이때서야 합류시켰다고 한다.(박진희, 해방 직후 정치공작대의 조직과 활동)

그러던 차에 지방순회 중이던 이승만이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해방정국의 또 하나의 파란을 몰고 왔고,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반면에 해공은 이승만의 발언에 찬성함으로써 임정과 결별 수순을 밟기 시작하였다.
특히 해공은 정치공작대와 정치위원회를 해소하여 독촉에 합류시키라는 김구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정치공작대의 조직을 확대하다가 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독촉에 합류하였다. 결국 해공은 정치공작대를 이끌고 1946년 6월 이승만이 주도하던 독촉으로 합류하면서 독촉 전국대표대회에서 부의장에 선임됨으로써 우파진영의 명실상부한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947년의 상황은 김구가 조소앙, 김규식과 더불어서 중도파와 대화를 하거나, 아니면 이승만에게 다시 가는 모습을 보이는 이른바 고민하는 모습이 주로 보인다. 1947년의 정국에서 김구가 거느릴 수 있는 조직의 힘이 축소되고 있었고, 임정에서 상당한 분열이 발생하는 과정이다. 더구나 조병옥, 장택상은 자타공인 반임정파였고,(앞에서도 말했듯이 자타가 공인했다는 증거가 없다)미군정은 김구를 적대시하였다. 장택상 딸 장병혜의 회고에 의하면
2006년 6월 9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단체 모임'의 기자회견 자리에서, 장병혜 박사는 드라마 '서울 1945'에서 1947년 여운형 암살의 배후에 장택상 씨 등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은 사실 왜곡이라고 주장하던 도중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이 자리에서 폭로를 하겠어요. 이건 제 아버지(장택상 당시 수도경찰청장)가 생전에 저한테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선생 암살 사건이 일어날 때 화살이 자꾸 김구(金九) 선생한테로 갔어요. 미군정이 의심을 한 거죠. 그러자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애국자를 미군정 법정에 서게 할 수 있느냐'며 김구 선생과 관련된 사건 자료들을 일체 말소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범인이 아닌 참고인으로 법정에 설 수 있었던 거예요."

기자회견이 끝난 뒤 장 박사에게 가 질문했다.
- 부친으로부터 언제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까?
"아마 내가 여고 2~3학년 때였을 거예요."(장병혜 박사는 1932년생임)
- 그럼 김구 선생이 세 암살 사건의 배후에 있었다는 건가요?
"그야 저는 모르죠. 미군정에서 배후 인물로 의심을 했던 겁니다."
- 부친은 어떤 자료들을 말소했다는 겁니까?
"세 암살 사건의 관련 인물 중에 김구 선생의 부하들이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 이 이야기를 전에 한 적이 있습니까?
"오늘 처음 얘기하는 거예요."
(이하는 그날 기자회견 기사 원문)

이상 장택상의 딸 장병혜 씨의 회고다.
장택상이 김구와 김석황 등 임정 인사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딸들이 쓴 그의 자서전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창랑 장택상 기념 사업회 펴냄) 120~122쪽 "임정 인사의 고자세"에 드러나 있다.
임정 환국 직후 한민당 인사들이 죽첨장으로 김구에게 인사드리러 갔을 때의 일이다. 국내 정치인의 대표로 고 송진우- 김성수 씨를 위시하여 고 조병옥- 백관수- 김준연- 허정 씨 등과 나까지 6인이 이 분들을 만나려고 최창학 씨 집으로 찾아갔다. 그 날 날씨는 영하 15~16도나 되는 몹시 추운 날씨였다. (…) 우리는 추운 날씨에 장구한 시간을 섰기도 어렵고 하여 할 수 없이 문 밖 맨땅 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 약 1시간 반 후에 이 자가 나타나더니 "주석이 바쁘시니 더 기다리라"고 명령하다시피 말하고는 그대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3시간을 추운 날씨에 맨땅 위에 그대로 앉아서 기다렸다. 6시가 좀 지나자 자칭 주석 비서격이라는 김석황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 김이 들어간 지 약 30분이 지나서야 웬 중국옷 입은 자가 하나 나타나더니 우리들을 옥내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자를 따라서 일본식으로 된 최창학 씨 집 2층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석 김구 씨는 좌석에 앉은 채로 요지부동, 우리 여섯 사람의 큰절을 차례로 받았다. (…) 이것이 국내에서 정치에 마음을 두었던 우리들의 임정 인사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나는 인상이 나빴다. 그리고 나의 임정 인사에 대한 그 나쁜 인상은 미군정 3년 간을 통하여 일관하였다.

이렇게 대놓고 첫 인상부터 임정을 적대시한 모습이 나온다.더욱이 1947년 정국이면 김구가 여운형,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고,
한민당을 겨냥하여 친일파 숙청론을 펼치기 시작한 시점이다. 다만 저건 장택상이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쓴 회고록이고(자기가 살인사건 수사기록을 은폐했다고 자서전에 쓰겠는가) 장병혜의 회고는 장택상이 숨겨온 사실이니 다르다.


그런데 여운형의 암살을 보면 경찰, 미군정, 우파단체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초기에 임정 산하단체의 회원들이었지만, 1947년에는 김구의 힘이 약화된 시점에서는 이들이 어떻게 김구의 지령을 받아 여운형을 암살했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 증폭될 수 밖에 없다. 강원용의 회고에 의하면 임정의 귀국 직전 회의의 결론이 여운형 사형이었다고 한다.[19] 백의사 사령 염동진이 김구를 존경했다고 하지만, 위 자료를 볼 때 김구는 염동진을 신뢰하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실리 보고서에서는 오히려 김구와 염동진이 비밀리에 접촉을 하고 있었다 한다. 오히려 김구에 적대적인 미군정과 경찰의 후원을 받고 있던 백의사가 김구의 지령을 받아서 실행할 수 있는 여건은 연결선이 맞지 않는다고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김구와 염동진은 비밀접촉이 있었다.. 차라리 장덕수 암살 건처럼 한독당의 조직이 움직이면 모르겠다. 하지만 1974년 여운형 암살범들의 폭로에 의하면 여운형 암살범의 변호사 비용을 한독당 간부 신일준(훗날 장덕수 암살로 감옥에 간다)이 대 주었다 한다. 미군 문서에서도 한지근은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가 이끄는 그룹의 일원이었다 한다. 1946년초 임정으로 일시적으로 통합된 청년단체들의 윤곽을 보면 1947년 오히려 김구가 고립되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처럼 백의사와 김구와 관련해서는 매우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다.
후술하는 미군 자료(실리 보고서 등)는 백의사가 김구의 조직이라고 단정짓고 있지만, 실리 보고서의 4연대 쿠데타 가능성이 일종의 시나리오였음을 볼 때 1949년 미군이 철수 당시 미대사관의 정보기능이 김구 암살 당시 아예 공백이었다는 평가처럼 백의사 조직에 대한 정보가 미흡해 보인다...고 썼지만 실리 보고서의 저자 실리 소령은 백의사 염동진과 친분관계가 있었다. 실리 보고서는 미군이 운영한 CIC의 정보보고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CIC의 정보는 A~F등급으로 나뉘는데 실리 보고서에 나온 제4연대 쿠데타설이나 경무대 포격설은 거의 시나리오에 가까운 C등급 정보에 가깝다. 당연히 미흡한 정보와 혼재되어 있다...라고 써 놨지만 리처드 로빈슨의 미국의 배반에 의하면 김구 암살 이후, 한국의 고위층이 익명으로 미국 언론에 김구 암살은 김구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었던 결과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7년 여운형 암살 사건의 과정의 배후에 김구에게 있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지만, 반대로 아닐 가능성도 높다. 참고로 '전백'은 한현우가 송진우를 암살한후에 경교장을 찾아갔다. 여운형 암살 당시 백의사의 신동운이 노덕술과 면담을 했다고 한다. 노덕술은 이 당시 수사과장이었고, 당시 암살배후가 누군지 훤히 알고도 남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이 백의사와 서로 짜서 '단독범행'으로 축소시키고 사건을 무마시켰으니 설명이 더 필요한가?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장병혜 박사는 김구가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암살에 개입했다는 문서를 장택상이 없앴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신동운이 노덕술과 면담하고, 그 후에는 신일준이 노덕술과 면담했다고 한다. 그런데 1974년 여운형 암살범들이 자수했는데, 그들을 면담하고 심문한 배명인 검사는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 나오는 최서면도 백의사인데, 46년에 대북반탁 공작대로 북한에 갔다 왔다고 한다.

김두한이 라디오 방송에서 자신이 백의사 소속이라는 걸 밝혔다. (육성녹음) 허세가 워낙 심한 인물이다보니 진위여부를 판별하기는 어렵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온 내용과 증언을 봤을 때 적어도 대한민청-백의사 두 조직이 교류하며 일을 같이 한 것 까지는 아주 거짓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대한민청 감찰부장으로 활동함과 동시에 백의사 단원으로서 활동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외에도 만주나 중국에도 지부가 있다.

2.3. 6.25 전쟁 참전

일부 백의사 단원들은 KLO부대 소속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켈로부대는 민간인들로 구성된 군번 없는 용사들이었으며, 공작 임무 특성상 전사했을 경우엔 신원 파악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3. 출신인물

암살연도순으로 기재
* 한현우 - 1945년 독립운동가를 암살하고 훗날 일본으로 밀항하여 잘 먹고 잘 살았다. 여담으로 이 사람의 사위가 김영삼 정권 당시의 청와대기획수석이던 전병민 씨였는데, 동아일보가 이 사실을 캐 내서 보도하자 그는 사실이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사표를 냈다. 그 뒤 2주 정도 시끄럽다가 이내 잠잠해짐. 관련기사: # [20]
* 한지근 - 1947년 여운형 암살사건의 주범. 개성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6.25 전쟁 와중에 행방불명.
* 최서면 - 장덕수 암살 공범. 본명 최중하.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감형되어 훗날 일본으로 밀항하여 그곳에서 말년을 보내다 사망하였다. 최규하의 사촌동생이라고 한다.

4. 매체에서

야인시대에서는 암살 활동도 많이하는 집단답게 백의사 내의 무명 단원들 조차도 어지간한 주먹패들 수준 혹은 어지간한 주먹패들보다도 강한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5. 여담

백의사의 본부는 궁정동에 있었는데 6.25 전쟁 이후 이인의 자택이 된다. 이를 5.16 군사정변 이후 다시 중앙정보부가 사들여 안전가옥으로 만들었는데, 바로 10.26 사건이 일어난 그곳이다.

야인시대/합성물에서는 의심이 많은 김두한 이후로 허구한 날 막대사탕을 빠는 '백색' 테러 조직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6. 관련 자료

7. 관련 문서



[1] 신익희가 포함된 임시정부의 수장은 김구다. 그러나, 백의사 테러가 문제시되고 있는 해방 이후에는 신익희가 김구와 정치노선을 달리하여 이승만 계열과 주로 손을 잡았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George E.Cilley 소령이 작성한 실리 보고서에 따르면 정보문건이 백의사 염동진을 거쳐서 김구에게 갔다고 한다. [2] 경고특비 제3201호 김구 일당의 애국단원 검거에 관한 건 [3] “제1부 KLO 참전동지회 최규봉 회장 회고담,” 이창건, 『KLO의 한국전 비사: KLO, 켈로 그들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p.32-33. [4] 동생은 백찬옥.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에게 심영의 행방을 알려주는 역할로 등장한다. [5] 나중에 공갈협박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6] 현준혁은 당시 민족통일전선을 표방하던 조선공산당의 노선에 따라 조만식과 함께 평남 건준을 이끌던 자다. 남한에서는 김일성의 사주로 인해 암살된 것처럼 알려졌고,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최대치가 현준혁을 암살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백의사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7] 백의사의 김일성 암살시도를 다룬 북한 영화 <영원한 전우들(1984년 작)>에서도 해공 신익희가 이들에게 작전을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8] 이성렬은 1948년에 수배되었다는데,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한자는 똑같다. 여담으로 이성렬은 1962년에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감옥에 갔다. 백의사 간부라고 나온 걸 보면 동일인물이다. 1962년의 민주당 쿠데타의 경우 당시 미국 대사관에서는 쿠데타가 또 일어날 것 같다고 판단했다 했으며 그래서 조기에 일망타진되었다. [9] 저격 = 김립 피살, 폭탄 = 이봉창, 윤봉길 등이 있다. [10] “소련방 무력정비사령부 제7국 부국장 샤포쥐니코프가 소련방 중앙위원회 수슬로프 동지에게 보내는 전문,” 1946년 8월 22일;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p.79 [11] 한국독립당 [12] 임정 시절부터 사회주의 계열을 대하는 입장이었는데, 해방 후 신탁통치 떡밥 이후로 이러한 입장이 더 강화되었다. [13] 주장한 사람이 사람이다 보니, 진위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김두한이 주장한 바로는 여운형과 김규식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지독한 극우주의자인 김두한마저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암살을 불발시킨뒤 협박만 했다고 말했다. 이후 여운형은 다른 백의사 단원에게 암살당한다. [14] 테러조직들은 대부분 우익청년단체들 [15] 안기석, “인물연구: 白衣社 총사령 염동진, 金日成 간담 서늘케 한 전설적 백색 테러리스트,”『신동아』통권 505호 (2001년 10월), pp.316-323. [16] 정미칠적 이재곤 아들이다. [17] 백의사와 KLO의 활동을 통해서 본 남한 대북 정보활동의 원류 (1945-1953) ▷▷이완범 [18] 신익희의 호 [19] 강원용은 여운형을 직접 찾아가 얘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그 얘기에 따르면 여운형은 김구를 상대로 "임정뿐만이 아니라 다른 독립운동 세력, 사회주의 세력과 함께 협력하여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자"고 설득하러 갔더니 김구는 그와의 대화를 거절했고 몸수색을 지시하였으며, 임정에서 정해진 사안이라면서 문 밖에 글을 붙여 놓는데 다름아닌 '여운형 사형'이었다."고 회고했다. <강원용 저. 역사의 언덕에- 1권,p264 참고> [20] 최규하는 최중하 사촌형이지만 대통령을 맡았었다. 당시 사회적 쟁점으로 올랐는지 여부의 차이로 보면 되겠다. [21] 이승만 김구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까진 백의사와 서북청년회를 자유롭게 오가는 단원들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