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시마 시게오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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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 |||||||||||||||||||||||||||||||||||||||||||||||||||||||||||||||||||
1961 | 1963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1970 | 1971 | 1972 | 1973 | 1994 | 2000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 |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 결번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rowcolor=#ccac00> No.1 | No.3 | No.4 |
오 사다하루 | 나가시마 시게오 | 쿠로사와 토시오 | |
<rowcolor=#ccac00> No.14 | No.16 | No.34 | |
사와무라 에이지 | 카와카미 테츠하루 | 카네다 마사이치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000> |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4번 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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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49c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나가사와 후지오 (永沢富士雄) |
이토 켄타로 (伊藤健太郎) |
나카지마 하루야스 (中島治康) |
츠츠이 오사무 (筒井修) |
마에카와 하치로 (前川八郎) |
|
1936夏 | 1936夏-1943 | 1936夏-1948 | 1936秋 | 1937秋 | |
<rowcolor=#f49c00>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미즈하라 시게루 (水原茂) |
카와카미 테츠하루 (川上哲治) |
아오타 노보루 (青田昇) |
키구레 리쿠조 (木暮力三) |
나카무라 마사미 (中村政美) |
|
1937秋 | 1939-1958 | 1943-1952 | 1943 | 1943-1944 | |
<rowcolor=#f49c00>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스다 히로시 (須田博) |
콘도 사다오 (近藤貞雄) |
카와바타 히로시 (川畑博) |
쿠로사와 토시오 (黒沢俊夫) |
코마츠바라 히로키 (小松原博喜) |
|
1944 | 1944 | 1944 | 1946 | 1947 | |
<rowcolor=#f49c00>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히라야마 키쿠지 (平山菊二) |
우노 미츠오 (宇野光雄) |
미나미무라 후카시 (南村不可止) |
테즈카 아키하루 (手塚明治) |
미야모토 토시오 (宮本敏雄) |
|
1948 | 1951-1953 | 1951-1952 | 1953-1954 | 1955-1961 | |
<rowcolor=#f49c00>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
히가사 카즈오 (樋笠一夫) |
후지오 시게루 (藤尾茂) |
카시와에다 분지 (柏枝文治) |
요나미네 카나메 (与那嶺要) |
나가시마 시게오 (長嶋茂雄) |
|
1955 | 1955-1961 | 1955 | 1958 | 1958-1974 | |
<rowcolor=#f49c00>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
사카자키 카즈히코 (坂崎一彦) |
쿠니마츠 아키라 (国松彰) |
오 사다하루 (王貞治) |
이케자와 요시유키 (池沢義行) |
모리 마사아키 (森昌彦) |
|
1959-1962 | 1960-1968 | 1962-1980 | 1963 | 1964-1965 | |
<rowcolor=#f49c00> 제31대 | 제32대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
아이바 요시히로 (相羽欣厚) |
요시다 카츠토요 (吉田勝豊) |
타나카 쿠스오 (田中久寿男) |
타카쿠라 테루유키 (高倉照幸) |
모리나가 카츠야 (森永勝也) |
|
1965 | 1965 | 1967 | 1967 | 1967 | |
<rowcolor=#f49c00> 제36대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시바타 이사오 (柴田勲) |
스에츠구 토시미츠 (末次利光) |
야나기다 마사히로 (柳田真宏) |
장훈 (張勳) |
아와구치 켄지 (淡口憲治) |
|
1969 | 1970-1975 | 1974 | 1976-1979 | 1976 | |
<rowcolor=#f49c00>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제45대 | |
데이비 존슨 (ジョンソン) |
존 시핀 (シピン) |
야마모토 코지 |
로이 화이트 (ホワイト) |
나카하타 키요시 (中畑清) |
|
1976 | 1978-1979 | 1979-1980 | 1980-1982 | 1981-1988 | |
<rowcolor=#f49c00> 제46대 | 제47대 | 제48대 | 제49대 | 제50대 | |
게리 토마슨 (トマソン) |
마츠바라 마코토 (松原誠) |
하라 타츠노리 (原辰徳) |
레지 스미스 (スミス) |
워렌 크로마티 (クロマティ) |
|
1981 | 1981 | 1982-1995 | 1983-1984 | 1984-1990 | |
<rowcolor=#f49c00> 제51대 | 제52대 | 제53대 | 제54대 | 제55대 | |
루밍쑤 (呂明賜) |
코마다 노리히로 (駒田徳広) |
요시무라 사다아키 (吉村禎章) |
마이크 브라운 (ブラウン) |
필 브래들리 (ブラッドリー) |
|
1988 | 1988-1992 | 1990-1998 | 1990 | 1991 | |
<rowcolor=#f49c00> 제56대 | 제57대 | 제58대 | 제59대 | 제60대 | |
로이드 모즈비 (モスビー) |
제시 바필드 (バーフィールド) |
오카자키 카오루 (岡崎郁) |
오쿠보 히로모토 (大久保博元) |
오치아이 히로미츠 (落合博満) |
|
1992-1993 | 1993 | 1993 | 1993 | 1994-1996 | |
<rowcolor=#f49c00> 제61대 | 제62대 | 제63대 | 제64대 | 제65대 | |
히로사와 카츠미 (広沢克実) |
마츠이 히데키 (松井秀喜) |
셰인 맥 (マック) |
키요하라 카즈히로 (清原和博) |
이시이 히로오 (石井浩郎) |
|
1995-1998 | 1995-2002 | 1996 | 1997-2005 | 1997-1999 | |
<rowcolor=#f49c00> 제66대 | 제67대 | 제68대 | 제69대 | 제70대 | |
타카하시 요시노부 (高橋由伸) |
도밍고 마르티네스 (マルティネス) |
로베르토 페타지니 (ペタジーニ) |
코쿠보 히로키 (小久保裕紀) |
이승엽 (李承燁) |
|
1999-2014 | 1999 | 2003-2004 | 2004-2006 | 2006-2008 | |
<rowcolor=#f49c00> 제71대 | 제72대 | 제73대 | 제74대 | 제75대 | |
니오카 토모히로 (二岡智宏) |
아베 신노스케 (阿部慎之助)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小笠原道大) |
알렉스 라미레스 (ラミレス) |
초노 히사요시 (長野久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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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 2007-2019 | 2007 | 2008-2011 | 2011-2016 | |
<rowcolor=#f49c00> 제76대 | 제77대 | 제78대 | 제79대 | 제80대 | |
무라타 슈이치 (村田修一) |
호세 로페스 (ロペス) |
존 보우커 (ボウカー) |
레슬리 앤더슨 (アンダーソン) |
프레데릭 세페다 (セペダ) |
|
2012-2017 | 2013-2014 | 2013 | 2014-2015 | 2014 | |
<rowcolor=#f49c00> 제81대 | 제82대 | 제83대 | 제84대 | 제85대 | |
오오타 타이시 (大田泰示) |
사카모토 하야토 (坂本勇人) |
나카이 다이스케 (中井大介) |
카메이 요시유키 (亀井善行) |
개럿 존스 (ジョーンズ) |
|
2014-2015 | 2015~ | 2015 | 2015 | 2016 | |
<rowcolor=#f49c00> 제86대 | 제87대 | 제88대 | 제89대 | 제90대 | |
루이스 크루즈 (クルーズ) |
케이시 맥기 (マギー) |
알렉스 게레로 (ゲレーロ) |
오카모토 카즈마 (岡本和真) |
마루 요시히로 (丸佳浩) |
|
2016 | 2017-2018 | 2018 | 2018~ | 2020 | |
<rowcolor=#f49c00> 제91대 | |||||
나카타 쇼 (中田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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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 |||||
1) 연도는 해당 선수가 4번 타자로 1경기 이상 출장한 해. 2) 볼드체는 일본야구전당 헌액자. |
195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신인왕 | ||||
후지타 모토시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나가시마 시게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구와타 다케시 ( 다이요 웨일스) |
196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 ||||
아키야마 노보루 ( 다이요 훼일스) |
→ |
나가시마 시게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무라야마 미노루 ( 한신 타이거스) |
196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 ||||
무라야마 미노루 ( 한신 타이거스) |
→ |
나가시마 시게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오 사다하루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6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 ||||
오 사다하루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나가시마 시게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오 사다하루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6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 ||||
오 사다하루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나가시마 시게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오 사다하루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7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 ||||
오 사다하루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나가시마 시게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호리우치 츠네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63년 일본시리즈 MVP | ||||
도바시 마사유키 다네모 마사유키 ( 도에이 플라이어스) |
→ |
나가시마 시게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조 스탠카 ( 난카이 호크스) |
1965년 일본시리즈 MVP | ||||
조 스탠카 ( 난카이 호크스) |
→ |
나가시마 시게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시바타 이사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69,70년 일본시리즈 MVP | ||||
다카다 시게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나가시마 시게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스에츠구 다미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나가시마 시게오의 기타 직책 역임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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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 ||||||||||||||||||||||||||||||||||||||
오타가키 고조[1] ( 2000 시드니) |
→ |
나가시마 시게오 ( 2004 아테네 예선) |
→ |
나카하타 키요시 (2004 아테네 본선)[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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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미우리 자이언츠 No.3 | |
<colbgcolor=#fd5a1e> 나가시마 시게오 長嶋 茂雄 / Shigeo Nagashima |
|
출생 | 1936년 2월 20일 ([age(1936-02-20)]세) |
치바현 인바 군 우스이 정[3]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포지션 | 3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학력 |
우스이마치 교리츠 중학교 (졸업) 사쿠라 제1고등학교 (졸업) 릿쿄대학 경제학부 (경영학 / 학사)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8~1974) |
지도자 |
요미우리 자이언츠 플레잉코치 (1972~1974)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1975~1980, 1993~2001) |
[clearfix]
1. 개요
Mr. 자이언츠
일본의 前
야구선수이자
감독.[4]2. 선수 시절
현역 시절[5] |
릿쿄대학의 중심 선수로 도쿄 6대학 리그에서의 맹활약했던 것을 발판 삼아 입단 당시부터 '골든 보이(ゴールデンボーイ)', 또는 '허리케인(ハリケーン)'이라는 별명이 붙여지는 등 많은 기대를 받았다. 1958년 4월 5일, 개막전인 고쿠테츠 스왈로즈와의 경기에서 3번 타자로 선발 출장해 개막전 데뷔를 완수하였지만, 고쿠테쓰의 에이스 투수인 가네다 마사이치로부터 4타석 연속 삼진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고[6], 다음날의 경기에서도 역시 상대 투수였던 가네다에게 삼진을 당했다. 그러나 2일 후인 4월 7일 고쿠테쓰전에서 첫 안타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4월 10일의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첫 홈런을 기록하여 본래의 힘을 발휘했다. 시즌 도중부터 현역 시절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은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대신하는 4번 타자가 되면서 팀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9일에 행해진 히로시마 카프전에서 신인 신기록(당시)이 되는 28호 홈런을 때렸지만, 1루 베이스를 실수로 밟지 않은 바람에 결국 홈런이 취소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당시 기록은 투수 땅볼이었다). 만약 1루 베이스를 밟았다면 신인으로서의 「트리플 스리(타율 3할, 홈런 30개, 30 도루)」의 기록이 달성될 수 있었다. 덧붙여 나가시마는 다음 9월 20일에 있은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 28호 홈런을 기록하여 신인 신기록을 달성했다.[7][8]
이로써 데뷔 첫 해인 1958년 시즌의 타격 성적은 홈런 29개, 92타점, 3할 5리의 타율과 153안타였다. 타격왕 타이틀 자리를 놓고 오사카 타이거스의 타미야 겐지로와 경쟁하였지만, 타미야는 시즌 종반에 결장이 잦았고 전 경기 출장을 계속하던 나가시마는 타율을 까먹으며 최종적으로 타격 2위인 3할 5리에 그쳤다. 그러나 나가시마는 시즌 최다 안타를 기록하는 한편 도루 부문에서도 리그 2위인 37개를 기록하여 신인왕 타이틀을 석권했다. 153안타는 2019년 한신 타이거즈의 신인 외야수 치카모토 코지가 159안타로 갱신하기 전까지 반세기 넘게 센트럴리그 신인 최다안타 기록이었다. 34개의 2루타 역시 센트럴 리그 신인 최다 2루타 기록이었으나 2021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마키 슈고가 35개로 경신했다.
1962년에는 팀 내 절친한 사이이자 동고동락을 하며 지내온 오 사다하루가 홈런왕과 타점왕 등 연거푸 타이틀을 기록하여 오 사다하루와 함께 팀 타선의 주축이 된 일명 ON포(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의 영문 이니셜)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메이저 리그인 뉴욕 양키스의 미키 맨틀과 로저 매리스가 MM포에 비유되기도 했다. 나가시마는 이 애칭의 표현대로 요미우리의 간판 4번 타자로 맹활약을 했다. 1965년~1973년에는 오 사다하루, 다카다 시게루, 시바타 이사오, 가네다 마사이치, 호리우치 츠네오, 모리 마사히코 등과 함께 팀의 일본 시리즈를 9년 연속 우승(일명 V9)하는 쾌거를 이루어내 팀의 우승 멤버 중 한 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71년에 통산 6번째의 타격왕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이듬해인 1972년에 갑작스런 타격 부진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타석수를 늘리는 등 부진을 극복하려고 생각한 카와카미 감독은 나가시마의 타순을 1번으로 하는 등 특단의 대책을 세웠지만, 결과적으로 타격 21위인 2할 6푼 6리의 타율과 2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또, 14년간 팀의 감독을 맡은 카와카미의 후계자로서의 기대가 커지면서 코치를 겸임하는 등 현역 은퇴 후의 진로가 정해졌다.[9] 1972년~1973년에는 2년 연속 골든 글러브 상을 수상했고, 프로 선수로서의 나가시마는 타격뿐만 아니라 3루수로서의 수비도 큰 주목을 받았다.
1974년 10월 12일, 주니치 드래곤즈가 리그 우승을 제패하면서 팀은 10년 연속 리그 우승과 더불어 일본시리즈 진출-우승에 실패했지만 나가시마는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10] 그 후 10월 14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리그 우승팀 주니치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홈런을 기록, 이것이 자신의 현역 생활 마지막 홈런(통산 444호)이었다. 은퇴 기념식에서 "저는 오늘 은퇴하지만 나의 거인군은 영원히 불멸입니다!(私は今日引退をいたしますがわが巨人軍は永久に不滅です)"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은퇴전 전체영상 또, 대졸 출신으로서의 통산 2471안타는 일본 최다 기록을 수립해 개인 통산 2186경기 출장, 2471안타, 444홈런, 1522타점, 타율 3할 5리의 통산 성적을 기록해 선수 생활을 은퇴하여 가와카미 감독의 사임으로 차기 감독으로 취임했다. 선수 시절 센트럴 리그 최우수 선수(MVP)를 5차례 석권한 것을 포함해 1959년~1961년에는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인 3년 연속 타격왕에 등극하는 위업을 달성, 일본 시리즈 MVP를 일본 프로 야구 사상 4차례를 석권하는 등 요미우리의 대표적인 간판 타자로서의 숱한 대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2.1. 총평
팀 동료이자 잠재적 라이벌이었던 오 사다하루, 카와카미 테츠하루와 함께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이자 인기로는 그들조차도 넘어서는, 일본 야구 사상 최대의 슈퍼 스타였다. 그의 대중적 인기는 놀라울 정도여서[11]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 받고 있다. 그의 등번호 3번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이다.[12] 통산 성적은 오 사다하루에 이은 WAR 역대 2위로서[13] NPB 역대 2인자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고 최고 명문팀의 중심 타자로 높은 인기를 누렸으며, 박수칠 때 떠나는[14] 은퇴를 했다는 점에서 조 디마지오와 비슷한 점이 많다. 별명은 ''미스터 베이스볼'. 위 별명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전설, 스탠 뮤지얼의 별명이기도 하다. 또는 '미스터 자이언츠'. 이 별명은 요미우리 사상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그를 기념하는 말이다.[15]195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데뷔 첫 해에 153안타, 29홈런, 92타점으로 타격 3관왕에 오르며 신인왕을 수상.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3루 수비는 발군이었고, 1974년까지 타격왕 6회, 홈런왕 2회, 타점왕 5회, 베스트 나인(한국으로 따지면 골든글러브) 17회를 수상했다. 베스트 나인 17회도 대단한 기록이지만,[16] 타격왕 6회는 충격과 공포 수준. 한국프로야구에서 장효조와 양준혁이 4회, 이대호가 3회인 것에 비교하면 대단한 기록. 그러나 장훈이 7회, 특히 이치로가 7년 연속 타격왕을 달성하면서 이 기록은 깨졌다. 물론 장훈과 이치로는 홈런왕은 한 번도 달성한 적 없다.
3. 은퇴 이후
1974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뒤, 이듬해인 1975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취임해 두 차례에 걸쳐 감독을 지냈고, 5번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2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뒤 2001년 은퇴했다. 이 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다가 2004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야구계를 떠났다.다만 1970년대의 1기 감독 시절 땐 각각 6-1-1-2-5-3의 성적을 찍었는데, 그 V9으로 대표되는 자이언츠의 전성기에 비하면 그닥 좋다곤 볼 수 없었다. 특히나 취임 첫 해인 1975년의 창단 이래 최초의 리그 꼴찌는 그야말로 나가시마에겐 빼도박도 못하는 흑역사. 덤으로 이 해 10월 15일엔 홈구장에서 4-0으로 떡실신당하며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첫 리그 우승을 허용한다.[17] 이게 어느 정도나면 1975년 말 일본 언론사들이 꼽은 올해의 10대 뉴스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사이공 함락, 킬링필드의 시작, 지명타자 제도 도입, 한큐 브레이브스의 일본시리즈 V1,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센트럴리그 V1를 모두 묻혔다.[18] 즉 나가시마는 교진의 역대 감독 중 유일하게 최하위를 기록했다[19]. 게다가 이는 간사이의 경쟁팀이자 안 죽이고 못 사는 앙숙 관계인 한신 타이거스보다도 더 먼저였다[20]. 그 덕택에 이 해엔 여러 모로 안 좋은 기록을 많이 찍었다. 양대 리그 이래 구단 역사상 최악의 승률이자 유일한 3할 승률인 .382와, 구단 사상 최고 기록인 우승팀과의 게임차 27게임, 무엇보다도 이해 찍은 팀 안타 987안타'''는 현재까지 마지막 일본 프로 야구의 3자릿수 팀 안타 기록이다
그래도 다음해와 그 다음해인 1976~1977년 2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문제는 일본시리즈에서 과거 V9 시절 5차례나(67~69, 71~72) 일본시리즈 우승의 제물로 삼았던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2년 연속으로 깨졌다. 그 뒤론 재임 기간 내내 한 번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고, 거기다가 지휘력에 관한 논란과 여러 구설수까지 나오게 되며 결국 나가시마는 1980년에 해임된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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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한 나가시마 자이언츠[22] |
1975~1980 1기 감독 시절에는 등번호로 90번,[28] 1993년부터의 2기 감독 시절에는 자신의 현역 시절 영구 결번 3번이 두 개 들어간 33번을 사용했다.[29] 2000년부터는 히로시마에서 강타자 에토 아키라를 영입할 때 그가 히로시마에서 쓰던 33번을 넘겨주고 자신은 현역 시절의 3번을 사용했다. 스프링 캠프에서 현역 시절과 똑같은 3번이 박힌 유니폼을 점퍼 속에 최대한 숨기다가 3번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보고 싶다는 여론이 고조될 때 '짠~' 하고 공개를 해서 당시 전 일본이 장안의 화제였다. 나가시마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올드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감격 두 배의 순간.[30]
2001년까지 감독직을 은퇴함과 동시에 종신 명예 감독[31]으로 승진했고, 수석 코치로 후계자 수업을 받은 하라 타츠노리가 나가시마로부터 감독을 물려받아 2002년부터 2003년, 2006년부터 2015년, 2019년부터 현재까지 감독을 맡고 있다[32] 2016년 시즌부터 2018년 시즌까지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교진군의 감독을 맡았다.
2013년, 제자인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일본 최대의 영예인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나가시마가 22호고 마쓰이가 23호다.
실명으로 타이거 마스크 II세에 등장한 적이 있다. 또한 사무라이 자이언츠에도 카와카미 감독과 왕정치 그리고 가네다 마사이치와 더불어 등장한 적이 있다.
2021년에는 2020 도쿄 올림픽 개막식에 오 사다하루,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성화 봉송자로 나섰는데, 거동조차 불편한 모습이어서 많은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한국 나이로 86세의 고령인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나가시마보다 불과 4살 연하인 오 사다하루는 상대적으로 정정해 보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성화를 전달하기 위해 이동할 때도 마쓰이 히데키의 부축을 받고 이동했다.
4. 기타
현역 시절 한신 타이거즈의 에이스 무라야마 미노루와는 불꽃 튀는 라이벌 관계로 유명했다. 나가시마는 무라야마를 상대로 통산 302타수 85안타, 타율 0.281, 21홈런, 39삼진을 기록했는데, 무라야마에게 프로 통산 1500 탈삼진(1966년 6월 8일), 2000 탈삼진(1969년 8월 1일)을 헌납하기도 했다, 사실 이 라이벌 관계는 무라야마가 고교 졸업 후 릿쿄 대학이 자신의 영입을 거부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은 것을 릿쿄대의 스타인 나가시마에게 발산한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정작 나가시마는 당초 무라야마에게 아무런 해코지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가시마와 무라야마는 인간적으론 서로 호감을 넘어서 존경하는 사이였고, 무라야마는 평소에 나가시마를 언급할 때 언제나 이름에 "상(さん)"을 붙이며 예우하였으며, 나가시마 또한 무라야마에 대해 "그는 나에게 한 번도 빈볼이나 위협구를 던진 적이 없다. 무조건 정면 승부였다"라면서 대놓고 그의 인간성을 칭찬하길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8년 8월 22일, 무라야마가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나가시마는 원정 경기 중임에도 먼 길을 마다않고 빈소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인을 애도한 바 있다.요미우리뿐만 아니라 프로야구계에서 큰 형님 격이다 보니 선수들부터 코칭 스태프까지 물론 무슨 고민이 생기면 나가시마에게 먼저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나가시마가 하는 말이 거의 맞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호시노 센이치에게 일본 프로 야구 인기 상승을 위하여 한신 감독 자리를 권유한 사람이 바로 나가시마 시게오.
나가시마 등장 이후 일본 만화나 게임에서 '3루수=장타자'라는 등식이 자주 나온다. 대표적인 예로 터치의 닛타와 H2의 히데오.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2016의 파워페스모드에서도 체감할 수 있다. 3루 강타자는 오오조라, 반도, 토죠, 후쿠야, 라이고우, 사장 등등 무수하게 나오지만 1루 강타자는 결승전인 서강대학에 나오는 키요모토와 타키모토밖에 없다. 그마저도 이 둘의 서브 포지션의 3루수. 1루 자원의 부족은 후속작인 2018에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폭발! 온천 부글부글 대작전 사건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해당 항목 참조.
소년 선데이의 창간호 표지를 장식하였다.
김일융을 삼성에 입단시킬 때 도움을 줬는데, 삼성이 고마움의 표시로 진돗개를 선물을 줬다고 한다.
G-SHOCK 최상위 모델 MR-G에서 나가시마를 기리는 모델을 200개 한정으로 2019년 11월에 출시했다. #
요미우리의 상징과 같은 사람이지만 의외로 어렸을 땐 오사카 타이거즈의 팬이었다고 한다. 후지무라 후미오 플레이를 보고 야구 선수가 되기를 결심했다고 한다. 어릴 때 팬심이 담긴 채 똑같이 한신 빠돌이로 자랐던 호시노에게 한신 감독 수락을 권유했으니 흠좀무.
2021년 3월 2일, 도쿄돔을 방문하여 선수들과 만났다.
음반 레코딩에 참여한 적이 있다. 1993년에 발매된 ZYYG, REV, ZARD& WANDS의 싱글 '果てしない夢を'에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 것인데 후반부의 후렴구만 반 소절 정도 불렀다. 당시 니혼 테레비가 자사 야구중계 주제가를 이 노래로 바꾸게 되었는데 때마침 나가시마의 감독 복귀와 기간이 겹치면서 게스트 보컬에 참여하게 된 것. 그 덕인지 싱글 앞표지 구석에도 조그맣게 사진이 실렸다.
스포츠토토의 도입에 반대했다.
4.1. 기행
야구 선수 외적으로도 독특한 캐릭터성으로 유명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건망증과 기상천외한 언어 생활, 그리고 4차원적인 성격을 꼽을 수 있다. 건장한 체격, 호남형의 외모와는 정반대인 하이톤의 목소리로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것도 이미지가 깨는 것이었지만, 말의 내용도 정체불명의 의성어와 의태어, 상황에 맞지 않는 외국어의 남용, 앞뒤 안 맞는 문장들로 범벅되었기 때문에 그의 언어는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이용되곤 했다. 그의 기행들을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수 시절 팀의 대선배 출신인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에게 "헤이 보스!"라고 했다가 크게 혼난 적이 있다.
- 위의 카와카미 감독과의 또 다른 일화. 카와카미 감독이 선수들에게 프로 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선수단에게 스모 경기를 보게 하고 감상문을 쓰게 했다.[33] 다른 선수들은 경기에 대한 감상 등을 빼곡히 적었는데, 나가시마는 꼴랑 "알겠습니다" 한 문장만 적었다고 한다(...) 카와카미 감독은 후에 절대 안 잊혀지는 감상문이라고 술회했다고..
- 폐차 사건 이후 구단에서 선수 보호 차원으로 나가시마에게 운전을 금지시키고 선배의 차를 타고 출퇴근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의 차를 타고 귀가하던 나가시마는 집에 도착하자 운전을 해준 선배를 보며 " 얼마에요?"라고 말했다.
-
경기를 마치고 집으로 가야 하는데 자기 집을 몰라서 당황한 나머지 공중전화로 자기 집 가정부에게 우리 집 주소가 뭐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 와중에 자기 집 전화번호는 기억한 게 신기하다.
- 후배에게 1만엔짜리 지폐를 주고 음료수를 사오라고 하고, 후배가 음료수를 사오고 거스름돈을 주자 "어? 잔돈이 있었어? 내가 1천엔짜리 주지 않았던가?"[34]라고 놀랐다고 한다.
-
팬과의 대화를 하다가 한 열혈 팬이 "저는 나가시마 선수와
생일이 똑같습니다."라고 말하자 "생일이 몇월 며칠이신데요?"라고 물어봤다.
음력, 양력을 따로 셀 것이라 생각했던 건가
- 생일에 홈런을 친 동료 선수에게 '난 생일에 홈런를 친 적이 없어'라며 부러워했다. 그러나 위 프로필에 나와있듯 나가시마의 생일은 비시즌 기간인 2월이라 생일에 벌어진 경기에서 홈런을 칠 일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이 일화는 기행이라기보단 비시즌이 생일이라 팬들 앞에서 생일날에 홈런을 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에 가깝다.
- 경기 중 타임을 요청하고 고토 코지[35]를 대타로 출장시키기 위해 "대타 고토!"라고 외쳤다. 문제는 고토가 이때 이미 루에 나와 있는 주자였다. 주자를 대타로 내보내려 한 셈(...)
-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고 13년 뒤인 1993년에 다시 요미우리 감독에 올랐을 때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 "나는 12년 간 누전하고 있었습니다." 정황상 충전을 잘못 이야기한 듯.
-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 때 일본 대표팀 감독임에도 한국 대표팀 선수들의 타격을 봐준 적이 있다. 나가시마의 건망증 탓에 팀을 혼동해서 한국 팀 선수들을 가르쳤다는 얘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우스갯소리이고, 애초에 나가시마는 자기 팀이건 다른 팀이건 가리지 않고 타격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을 좋아하는 야구인이었다. 타격 지도 시에는 매우 열성적으로 가르쳐 줬는데, 문제는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는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의성어를 써가며 자신만이 갖고 있는 감각을 전달해주려 한 탓에 지도 받는 타자는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대충 예시를 들자면 타격 지도에 관한 지론에 대해 "공이 '븃(휙)' 하고 날아오면 '바싱(깡)' 하고 친다."라고 가르쳤는데, 그냥 의성어만 가지고 감각적인 설명 정도만 하는 수준이니 당연히 못 알아들을 수밖에(...) 다만 마에다 토모노리와 나카지마 히로유키는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용케도 나가시마의 가르침을 깨달았다고 한다.
- 불펜에서 투수에게 몸을 풀라고 하고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투수 교체를 하지 않아, 불펜에 있는 투수가 주구장창 연습볼만 던지다 어깨에 과부하가 걸려 실신. 나가시마는 그제서야 자기가 투수 교체를 준비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소개된 일화.
- 어느 경기에서 투수에게 포크볼을 던지라는 지시를 했는데, 문제는 상대팀도 보란 듯이 검지와 중지를 벌려 포크볼 던지는 시늉을 하며 투수에게 "포크야 포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포크볼을 노리고 들어온 상대팀 타자에게 홈런을 맞았고, 홈런을 맞자마자 나가시마는 분을 못 참고 덕아웃에서 사라져버렸다.
- 번트 작전을 실행한답시고 대놓고 번트하는 흉내를 내며 "대타! 타카다![36]"를 외쳤다. 당연히 상대팀이 이런 어이없는 작전에 넘어갈 리 없었고 결국 번트 실패. 그러나 나가시마는 자기가 대놓고 번트 흉내를 냈다는 것도 눈치채치 못했는지 "사인이 읽히고 있는 건가!"라고 진심으로 경악했다. 거의 똑같은 일화로 대타를 내세우면서 "번트! 도이[37]!"라고 외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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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을 때 팀이 위기에 처하자 투수 교체를 시도. 누가 나갈까 코치들에게 물어보며 덕아웃을 둘러보던 중
오노 유타카[38]가 눈에 띄자 "음, 오노, 오노 나가라!"고 외쳤다. 그런데 오노 유타카는 대표팀의 투수코치였다. 전임 코치에게 선수로 등판하라고 외친 것.
등판 지시를 받은 오노는 당연히 "감독님, 전 던질 수 없습니다."라 대답했는데 이 대답을 들은 나가시마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오노 아직 준비 안 됐냐?"라고 답변,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있던 오노가 다시 "미스터, 저는 코치라서.."라고 대답하자 나가시마는 "코치는 못 던지는 거야?"라고 재답변하며 오노를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의문의 플레잉코치 선임
- 사이토 마사키, 쿠와타 마스미와 함께 1990년대 쿄진의 중심기둥으로 평가받은 마키하라 히로미가 1994년 5월 18일, 후쿠오카 돔에서[39] 열린 対 히로시마 도요 카프 전에서 퍼펙트 행진을 벌이자 선수들을 불러서 "마키하라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 퍼펙트 게임 얘기는 하지 말자."고 말했다. 그런데 나가시마는 마키하라까지 불러서 마키하라가 보는 앞에서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40]
- 대학교에서 영어 시험을 보는데 "I live in Tokyo(나는 도쿄에 살고 있다.)"를 과거형으로 바꾸는 문제가 있었다. 나가시마가 쓴 답은 "I live in Edo. (나는 에도에 살고 있다.)" live의 과거형인 lived를 써야 하는데, 메이지 유신 이전 도쿄의 이름이던 에도를 쓴 것(...) 한국식으로 하자면 'I live in Seoul'을 'I live in Hanyang(Hanseong)'으로 쓴 셈이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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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의 일화로,
어린이날 때
코라쿠엔 구장에 아들 카즈시게를 데리고 갔는데, 집에 와 보니 아내가 "카즈시게는 어딨어요?"라고 물었다.
아들을 데려온 것을 잊어먹고 야구장에 두고 와 버린 것. 경기장으로 돌아가 보니 아들은 다행히 심판실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42]
카즈시게에겐 어린이날이 트라우마로 남을 뻔했다
- 매일 가던 사우나를 아침 8시에 감. 참고로 그 사우나의 개점 시간은 오전 11시. 그리고 사우나에서의 또 다른 일화로 샤워를 한 뒤 거품 씻는 걸 잊고 그대로 욕탕에 들어가는 바람에 욕탕을 거품 범벅으로 만드는 민폐를 저질렀다(...)
-
일본인들 사이에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기행이라면 일명 나가시마 먹기로 불리는 그의 묘한 식습관.
수박을 사서 자른 다음에 양 손에 수박을 들고서 끝부분만 한 입 먹고 버리는
천벌 받을 법한엉뚱한 짓을 했었다고 한다.
- 1기 감독 시절 원정 경기 출장차 우에노역에 차를 끌고 갔는데, 차 시동을 끄지도 않고 내려서 그대로 가버린 것도 모자라 집에 올 때도 차를 타지 않고 돌아오는 사고를 친 적이 있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시동을 끄지도 않은 채 차를 두고 온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 발언 도중 뜬금없는 의성어, 외래어를 남발하는 걸로 소문났지만, 그 중 '하나(ひとつ, 히토츠)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남발한 걸로 유명해서 어떤 행사에 참석했을 당시 질문 시간 때 한 꼬마에게 "그건 말버릇인가요?"며 일침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나가시마는 "제 흉내를 내는 분이 계시네요. 그 분의 하나의(ひとつの).."라고 화답했고,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흐뭇한(?) 후문.
그 외 다양한 일화는 이곳을 참조. 그야말로 건망증과 기행의 최고봉이다 싶은 일화들이 많다.
5. 가족 관계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으며, 장남인 나가시마 카즈시게(長嶋一茂)도 야구선수로 활동했었다. 아버지를 따라 릿쿄대학을 졸업하고[43] 1987년 드래프트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1순위로 지명되었으나 나쁜 컨택과 불성실한 훈련 태도로 노무라 카츠야 감독에게 찍혀 백업만 전전하다 1993년 아버지가 감독으로 다시 부임한 요미우리에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요미우리에서도 센트럴리그 3만호 홈런을 친 것 외엔 활약이 미미했고 1996년 수비 코치였던 도이 쇼조에게 폭언을 하는 등[44] 아버지 이름에 먹칠만 하다가 결국 1996년 시즌 종료 후 아버지에게 직접 방출 통보를 받으면서 그대로 은퇴했다.
은퇴 후엔 야구 평론가 및 배우로 활동 중이다. 특이사항으로 2002년 3월에 개봉한, 한신 타이거스를 소재로 한 '미스터 루키(ミスター・ルーキー)'[45]란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또 다른 사건은 2012년 12월에 터졌는데(2014년 8월 말 주간문춘에 의해 공개), 카즈시게의 딸이 여배우 에스미 마키코(江角マキコ)의 딸과 불화가 있어 마키코가 매니저에게 지시해 휴가를 간 카즈시게의 집에 온통 낙서를 하게 한 일이 있다. 이 일은 이전에도[46] 구설수로 말이 많았던 마키코의 몰락의 결정타가 된다. 여담으로 유명 드라마인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 역에 기용될 예정이었으나, 원작자 쿠스미 마사유키가 난색을 표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카즈시게는 가톨릭 신자이다. 세례명은 바오로[47]로, 2018년 예능 프로에 출연하면서 밝힌 사실이다.
MAGIC KAITO 11화에 출연해 홈런을 때려낸 일이 있다.
차남인 마사오키는 환경문제 연구가, 딸인 미나는 스포츠 캐스터를 맡고 있다.
자녀들간의 불화가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폐렴, 황달로 입원한 아버지를 두고, 장남인 카즈시게(55세)와 차녀 미나(53세)의 대립이다. 미나가 병실을 지킬 동안 카즈시게는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주변인으로부터 듣고 회복됐다고 판단하여 하와이로 출국했다고 한다. 남매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은 2009년으로, 아버지의 기념품과 추억의 물건들을 카즈시게가 마음대로 매각한 것에 미나가 격노했고, 카즈시게가 대표를 맡고 있는 회사에서 '나가시마 시게오' 상표권을 가족 몰래 등록했던 것이 발각되었다. 남매의 관계는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으며, 이런 소동이 일어난 뒤 미나는 "내가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나가시마 집은 안된다"며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한다. 카즈시게는 "원래 우리 집은 제각각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집에서 살지 않았고 동생도 미국으로 갔습니다. 동생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동생(장녀)도 1년에 한 번 만날 뿐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제각각이므로 원래의 가족과는 단절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6. 선수 성적
나가시마 시게오의 역대 NPB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AR |
1958 |
요미 우리 |
130 | 550 | 153 | 34 | 8 | 29 | 89 | 92 | 37 | 36 | 53 | .305 | .353 | .578 | .931 | 10.4 |
1959 | 124 | 526 | 150 | 32 | 6 | 27 | 88 | 82 | 21 | 70 | 40 | .334 | .426 | .612 | 1.038 | 10.9 | |
1960 | 126 | 524 | 151 | 22 | 12 | 16 | 71 | 64 | 31 | 70 | 28 | .334 | .422 | .542 | .964 | 8.8 | |
1961 | 130 | 543 | 158 | 32 | 9 | 28 | 84 | 86 | 14 | 88 | 34 | .353 | .456 | .652 | 1.108 | 11.8 | |
1962 | 134 | 584 | 151 | 38 | 5 | 25 | 69 | 80 | 18 | 51 | 61 | .288 | .354 | .522 | .876 | 8.6 | |
1963 | 134 | 577 | 163 | 28 | 6 | 37 | 99 | 112 | 16 | 86 | 30 | .341 | .437 | .657 | 1.094 | 12.1 | |
1964 | 133 | 566 | 144 | 19 | 6 | 31 | 81 | 90 | 13 | 96 | 34 | .314 | .433 | .584 | 1.017 | 9.6 | |
1965 | 131 | 560 | 151 | 23 | 5 | 17 | 70 | 80 | 2 | 50 | 42 | .300 | .363 | .467 | .830 | 6.1 | |
1966 | 128 | 543 | 163 | 31 | 3 | 26 | 83 | 105 | 14 | 58 | 39 | .344 | .413 | .586 | .999 | 8.9 | |
1967 | 122 | 515 | 134 | 25 | 3 | 19 | 65 | 77 | 3 | 37 | 37 | .283 | .334 | .468 | .802 | 4.7 | |
1968 | 131 | 569 | 157 | 21 | 4 | 39 | 80 | 125 | 8 | 66 | 74 | .318 | .398 | .613 | 1.011 | 8.2 | |
1969 | 126 | 546 | 156 | 23 | 3 | 32 | 71 | 115 | 1 | 38 | 58 | .311 | .359 | .556 | .915 | 6.9 | |
1970 | 127 | 525 | 128 | 22 | 2 | 22 | 56 | 105 | 1 | 40 | 52 | .269 | .320 | .462 | .782 | 3.2 | |
1971 | 130 | 547 | 155 | 21 | 2 | 34 | 84 | 86 | 4 | 59 | 45 | .320 | .395 | .581 | .976 | 7.5 | |
1972 | 125 | 520 | 119 | 17 | 0 | 27 | 64 | 92 | 3 | 63 | 34 | .266 | .352 | .484 | .836 | 3 | |
1973 | 127 | 530 | 130 | 14 | 0 | 20 | 60 | 76 | 3 | 37 | 35 | .269 | .318 | .422 | .740 | 3.4 | |
1974 | 128 | 476 | 108 | 16 | 1 | 15 | 56 | 55 | 2 | 24 | 33 | .244 | .288 | .387 | .675 | 0.5 | |
NPB 통산 (17시즌) |
2186 | 9201 | 2471 | 418 | 74 | 444 | 1270 | 1522 | 190 | 969 | 729 | .305 | .379 | .540 | .919 | 124.4 |
7.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정규시즌 | 포스트시즌 |
1975 | 요미우리 | 130 | 47 | 76 | 7 | .382 | 리그 6위 | - |
1976 | 130 | 76 | 45 | 9 | .628 | 리그 1위 | JS 패배 | |
1977 | 130 | 80 | 46 | 4 | .635 | 리그 1위 | JS 패배 | |
1978 | 130 | 69 | 49 | 16 | .570 | 리그 2위 | - | |
1979 | 130 | 58 | 62 | 10 | .483 | 리그 5위 | - | |
1980 | 130 | 61 | 60 | 9 | .504 | 리그 3위 | - | |
1993 | 131 | 64 | 66 | 1 | .492 | 리그 3위 | - | |
1994 | 130 | 70 | 60 | 0 | .538 | 리그 1위 | JS 우승 | |
1995 | 131 | 72 | 58 | 1 | .554 | 리그 3위 | - | |
1996 | 130 | 77 | 53 | 0 | .592 | 리그 1위 | JS 패배 | |
1997 | 135 | 63 | 72 | 0 | .467 | 리그 4위 | - | |
1998 | 135 | 73 | 62 | 0 | .541 | 리그 3위 | - | |
1999 | 135 | 75 | 60 | 0 | .556 | 리그 2위 | - | |
2000 | 135 | 78 | 57 | 0 | .538 | 리그 1위 | JS 우승 | |
2001 | 140 | 75 | 63 | 2 | .543 | 리그 2위 | - | |
총계 | 1982 | 1034 | 889 | 59 | .538 | JS 2승3패 |
8. 관련 문서
[1]
사회인야구
도시바 감독. 이 때까지만 해도 일본 야구계는 아직 프로와 아마추어 간의 감정의 골이 깊고 서로의 영역에서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을 때였다. 대표팀과 올림픽 출전을 주관하는 것은 아마추어 쪽인 일본야구협회 쪽이었고, 프로는 일본 야구계의 숙원인 올림픽 금메달 획득을 위해서 일종의 조력자로서 선수들을 파견하는 형태로 대표팀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감독은 아마추어 쪽에서 선발했다. 그러나 사회인 야구 중심에 선수 차출을 거부한 센트럴리그를 제외하고 퍼시픽 리그 6팀 중에서 1명씩 차출해서 어정쩡하게 프로아마 혼성팀을 구성해서 출전했던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은 커녕 에이스라고 믿었던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이승엽에게 역전타를 맞는 등 프로 주도로 대표팀을 구성한 한국 대표팀에게조차 패하면서 노메달에 그치자, 다음 대회부터 대표팀 구성 체계를 일신하고 완전히 프로 주도로 대표팀을 구성하게 된다.
[2]
일본 국내에서는 여전히 나카하타는 감독 대행 취급이고 나가시마 시게오를 감독으로 간주하고 있다.
[3]
현재의
치바현
사쿠라시. 정작 사쿠라시는
닛폰햄의 2군 구장인
카마가야 파이터즈 스타디움과 가깝다.
[4]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종신 명예 감독이기도 하다.
[5]
풀스윙하다 헛스윙 후 스텝이 꼬인 모습이다. 굉장히 유명한 사진으로, 이 사진을 모티브로 한 스태츄도 발매된 바 있다.
모자는 클리어 부품으로 고정시키고 찍은 후 포토샵으로 지운 거다. [6] 가네다 마사이치는 귀화한 재일교포 선수인데, 당시 언론에서 '가네다도 나가시마에게는 상대가 안 될 것'이라며 나가시마를 띄워준 데 열 받아서 '그런 애송이한테 당하면 이 가네다의 이름이 운다. 전 타석 삼진으로 때려잡아 프로의 매운 맛을 보여 주겠다.'라고 말했다. 그의 호언 그대로 그대로 나가시마는 자신의 프로 데뷔전을 4연타석 삼진으로 즈려밟혔다. 가네다는 경기 전 인터뷰에서 패스트볼만으로 나가시마를 상대해주겠다고 해 놓고 경기에선 커브로 삼진을 낚는 약간의 꼼수를 부리기는 했다. [7] 현재 NPB 신인 홈런 기록은 1959년의 쿠와다 다케시와 1986년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각각 기록한 31개. [8] 나가시마 이후 현재까지 센트럴 리그에서 30개 미만의 홈런을 쳐서 홈런왕을 수상한 선수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9] 다만 메인 타격코치는 야마우치 카즈히로. 87년에 다시 재부임해서 89년 일본시리즈 역스윕에 일조한다. [10] 같은 해 포수 모리 마사히코도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11] 일본에서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 중 웬만하면 한 번씩은 등장한다. [12] 흥미롭게도 미국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 베이브 루스의 등번호이기도 하다. [13] 3위는 노무라 카츠야 [14] 은퇴 당시 나이가 39세로 빠르게 은퇴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선수 말년의 그의 성적이나 기량은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15] '미스터 OOO(팀명)' 같은 별명은 다른 팀에서도 20세기 그 팀을 대표했던 프랜차이즈 스타에 붙는 별명이지만, 일본 야구계에서 보통 다른 수식어 없이 그냥 '미스터'라고 하면 나가시마를 일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가 일본 야구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16] 그것도 현역이었던 17년의 기간 동안 매년 획득한 것이다. 데뷔 때부터 은퇴 때까지 전부 베스트나인을 수상한 건 나가시마가 유일하다. [17] 참고로 이 날 패전투수는 다름아닌 니우라 히사오(김일융)였다. 사실 이 날 성적은 5.2이닝 1실점으로 꽤 호투했지만 물방망이 타선 때문에 결국 패전투수가 되었다. [18] 굳이 최하위에 대해 이해를 해주자면 당시 거인은 나가시마 본인과 명포수 모리 마사히코, 유격수 구로에 히로유키의 은퇴로 인해 내야진이 오 사다하루를 제외하고 모두 물갈이가 불가피했는데, V9으로 인한 드래프트 하위 순번 배치+"유구치 사건"(상세 내용은 카와카미 테츠하루 문서에 기재) 등으로 인해 내야진이 급속도로 헐거워졌다는 것이다. [19] 그리고 메이크 드라마를 찍은 1996년 시즌의 다음 해인 1997년, 제대로 폭망하면서 8월말까지 최하위를 찍었다가 9월 이후 클로저를 훗날 닛폰햄의 GM이 되는 기다 마사오에서 조성민으로 갈아치워가며 분전하면서 주니치, 한신을 제치고 간신히 4위로 올라섰는데 이때 감독도 나가시마였다, [20] 한신은 1978년 고토 츠구오 감독이 41승 80패 9무 승률 .339를 찍으며 구단 사상 최초로 최하위로 전락했다. 그러나 한신은 이후 1987년~2002년까지 암흑기를 겪으면서 이 기간 동안 10번이나 최하위를 찍으며 안 될 팀은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21] 이것은 모회사인 요미우리 신문에 위기를 불러온다. 나가시마의 해임에 격분한 팬들이 요미우리와 스포츠호치를 불매하는 운동을 벌였기 때문. 아래서 설명할 종신 명예 감독직은 이 때 학을 뗀 요미우리가 고심 끝에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 [22] 뒤의 55번 선수는 마쓰이 히데키. [23] 이 시기에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 세이부 라이온즈, 야쿠르트 스왈로즈, 치바 롯데 마린즈 등 간토 지역 구단의 감독직 제의를 한 차례씩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24] 굵은 글씨 1은 일본시리즈 우승년도의 성적. [25] 1994년 일본시리즈 우승은 주니치 드래곤즈와 리그 우승을 걸고 치른 10.8 결전이 유명하다. [26] 특히 2000년 일본시리즈 우승은 오 사다하루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4승2패로 무찌르고 달성했는데, 이 일본시리즈는 나가시마와 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전에서 감독으로 맞붙은 것으로( 교류전은 2005년부터 도입되었고, 나가시마는 2001년 은퇴) 일본 대중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일명 ON 시리즈. [27] 그러나 1996년엔 스즈키 이치로, 다구치 소, 히라이 마사후미 등을 필두로 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4승 1패로 깨지며 우승 실패. 참고로 오릭스 블루웨이브는 바로 한큐 브레이브스가 오릭스에게 팔린 뒤 바뀐 이름. [28] 현역 때 3번을 단 3번 타자 3루수로서 이 숫자를 모두 더하고 0을 붙인 것으로, 아들인 나가시마 가즈시게의 아이디어로 달았다고 한다. [29] 이승엽의 제70대 4번타자 시절 때 백넘버이기도 하다. 이승엽은 33번 달던 시절 때는 한때 홈런왕을 바라볼 정도로 팀 타선을 혼자서 이끌었다. 하지만 25번 달고는 먹튀 테크를 제대로 밟고 말았다. 그 기믹은 이승엽과 홈런왕 경쟁을 했던 무라타 슈이치가 이어받았는데, 이승엽보다는 나았으나 먹튀 취급 받는 건 똑같았다. 현재는 요미우리 2군 타격코치로 재임 중이다. [30] 하지만 안티 거인 팬들로부터는 스프링 캠프에서 선수들의 모습은 안 전하고 매일같이 "오늘은 벗을 것인가 아닐 것인가"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미디어들을 겨냥하여 "벗나 안 벗나가 뉴스 거리라니 무슨 포르노 배우냐?"라면서 비아냥 대기도 했다. [31] 정확한 직책 명칭은 현재 구단 운영 법인인 ㈜요미우리 교진군 전무취체역 종신 명예 감독이고, 2001년 감독직을 은퇴함과 동시에 임명되었다. 임명 당시에는 당시 구단 운영 법인이었던 ㈜요미우리(현재 해당 법인은 그룹 재편을 거치면서 소멸되었다.) 소속이었고, 2002년 7월 1일자로 모기업인 ㈜요미우리 신문 그룹 본사가 그룹 재편을 단행하면서 구단 운영 법인이 ㈜요미우리 교진군으로 재편되었으나, 이전에 임명된 직책은 재편된 구단 운영 법인으로 그대로 승계되었으며, 2024년 현재도 해당 직책을 맡고 있다. [32] 2003년 물러난 후, 호리우치 츠네오가 2년간 감독을 맡았고, 호리우치가 물러난 2006년부터 다시 감독을 맡았다. [33] 다소 작은 키로 요코즈나에 등극했던 49대 요코즈나 도치노우미의 경기로, 25세라는 꽤 젊은 나이에 요코즈나에 등극했지만 팔 부상 때문에 재위 기간이 3년 남짓에 불과했다. (3년 동안 17개의 바쇼를 참가했는데, 그나마도 9개 바쇼는 15일간 집중적으로 출장한 것이다.) 2021년 사망. [34] 지금도 1만엔은 고액권이지만 나가시마가 현역으로 뛰던 60~70년대에는 이보다도 더 큰 액수를 자랑했다. 당시의 1만엔은 현대의 2만엔~3만엔 가량으로, 그나마 일본이 근 40여년 동안 물가상승 폭이 한국에 비해 적어서 이 정도. 원화로는 대략 20-30만원. [35] 2024년 현재 두산 베어스의 코치를 맡고 있는 그 고토다. 현역 시절엔 주로 대타로 활약했다. [36] 타카다 시게루. V9 시대의 주전 좌익수로 1968년 신인왕, 1971년 도루왕 등을 수상했다. 은퇴 후엔 닛폰햄과 야쿠르트에서 감독, DeNA에서 GM을 역임했다. [37] 도이 쇼조. V9 당시의 주전 2루수로 훗날 오릭스 블루웨이브 초대 감독을 거쳐 요미우리의 주루 코치가 된다. 오릭스 시절 신인 시절의 스즈키 이치로의 타격폼을 탐탁지 않아했다는 일화나 나가시마의 아들인 나가시마 카즈시게가 요미우리에 입단한 뒤 당시 코치였던 도이에게 폭언을 한 사건 등으로 유명하다. 2009년 사망. [38] 항목에도 나와있듯 동년배들이 거의 다 은퇴한 1998년까지 만 43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뛰었고 은퇴 1년 전엔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까지 수성했던 노익장이었다. [39] 일본프로야구에서는 가끔씩 팬서비스나 홈구장 일정 등의 문제로 다른 팀 홈구장에서 홈 경기를 갖는 경우가 있다. [40] 다행히 마키하라는 그 날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는데 성공했고, 그 퍼펙트 게임은 20세기 최후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센트럴리그 퍼펙트 게임으로 남아 있다. 이후 28년 뒤인 2022년에 사사키 로키가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41] 비슷한 개그로, 푸른거탑 시즌1 34화에서 말년 최종훈이 "나는 한국에 살았다."라는 문장을 과거형으로 쓴답시고 "I live in Chosun."이라 적는 기행을 보여주었다. [42] 여담으로 나가시마는 그 해 시즌 중 퇴근길에 괴한들에게 납치당할 뻔했는데, 평소 가지 않은 길을 이용해서 납치에 실패한 데다 범인 중 한 사람이 마음에 변화가 생겨 경찰에 자수하여 납치는 미수로 끝났다고 한다. [43] 릿교대 시절에는 아버지가 나가시마란 이유로 1학년때부터 4번타자 자리를 받았다. 물론 본인도 아버지보다 더 많은 11홈런을 쳤을 만큼 대학 무대를 풍미할 거포로서의 실력은 갖고 있었으나, 문제는 이때부터 이미 타율이 2할 2푼대에 그칠 만큼 공갈포 기질이 다분했다. [44] 당시 도이가 카즈시게에게 2시간 동안 번트 연습을 할 것을 지시했는데, 카즈시게가 그 지시를 듣자마자 갑자기 급발진해서 대놓고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벌금 50만엔을 내는 징계를 받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V9을 견인했던 레전드에게 감히 폭언을 내뱉는 대형사고를 터뜨렸으니 아버지의 얼굴에 제대로 똥을 퍼부은 셈. [45] 당시 야기 히로시, 코마다 노리히로 등의 현역 선수나 OB들이 영화에 나왔다. 노미 아츠시가 프로 데뷔 전 이 영화에 한신 소속 중간계투로 나오기도 했는데, 훗날 노미는 정말로 한신에 입단했다. [46] 2003년에 터진 연금 미납 소동이 대표적으로, 당시 마키코가 국민연금 납부 캠페인 CM에 출연했는데 정작 본인은 연금을 체납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의 중심에 섰던 적이 있었다. [47] 일본에서는 파울로(パウロ)로 표기하나, 나무위키는 한국어 위키이기 때문에 한국 가톨릭의 명칭대로 번역해 바오로로 서술한다.
모자는 클리어 부품으로 고정시키고 찍은 후 포토샵으로 지운 거다. [6] 가네다 마사이치는 귀화한 재일교포 선수인데, 당시 언론에서 '가네다도 나가시마에게는 상대가 안 될 것'이라며 나가시마를 띄워준 데 열 받아서 '그런 애송이한테 당하면 이 가네다의 이름이 운다. 전 타석 삼진으로 때려잡아 프로의 매운 맛을 보여 주겠다.'라고 말했다. 그의 호언 그대로 그대로 나가시마는 자신의 프로 데뷔전을 4연타석 삼진으로 즈려밟혔다. 가네다는 경기 전 인터뷰에서 패스트볼만으로 나가시마를 상대해주겠다고 해 놓고 경기에선 커브로 삼진을 낚는 약간의 꼼수를 부리기는 했다. [7] 현재 NPB 신인 홈런 기록은 1959년의 쿠와다 다케시와 1986년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각각 기록한 31개. [8] 나가시마 이후 현재까지 센트럴 리그에서 30개 미만의 홈런을 쳐서 홈런왕을 수상한 선수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9] 다만 메인 타격코치는 야마우치 카즈히로. 87년에 다시 재부임해서 89년 일본시리즈 역스윕에 일조한다. [10] 같은 해 포수 모리 마사히코도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11] 일본에서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 중 웬만하면 한 번씩은 등장한다. [12] 흥미롭게도 미국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 베이브 루스의 등번호이기도 하다. [13] 3위는 노무라 카츠야 [14] 은퇴 당시 나이가 39세로 빠르게 은퇴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선수 말년의 그의 성적이나 기량은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15] '미스터 OOO(팀명)' 같은 별명은 다른 팀에서도 20세기 그 팀을 대표했던 프랜차이즈 스타에 붙는 별명이지만, 일본 야구계에서 보통 다른 수식어 없이 그냥 '미스터'라고 하면 나가시마를 일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가 일본 야구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16] 그것도 현역이었던 17년의 기간 동안 매년 획득한 것이다. 데뷔 때부터 은퇴 때까지 전부 베스트나인을 수상한 건 나가시마가 유일하다. [17] 참고로 이 날 패전투수는 다름아닌 니우라 히사오(김일융)였다. 사실 이 날 성적은 5.2이닝 1실점으로 꽤 호투했지만 물방망이 타선 때문에 결국 패전투수가 되었다. [18] 굳이 최하위에 대해 이해를 해주자면 당시 거인은 나가시마 본인과 명포수 모리 마사히코, 유격수 구로에 히로유키의 은퇴로 인해 내야진이 오 사다하루를 제외하고 모두 물갈이가 불가피했는데, V9으로 인한 드래프트 하위 순번 배치+"유구치 사건"(상세 내용은 카와카미 테츠하루 문서에 기재) 등으로 인해 내야진이 급속도로 헐거워졌다는 것이다. [19] 그리고 메이크 드라마를 찍은 1996년 시즌의 다음 해인 1997년, 제대로 폭망하면서 8월말까지 최하위를 찍었다가 9월 이후 클로저를 훗날 닛폰햄의 GM이 되는 기다 마사오에서 조성민으로 갈아치워가며 분전하면서 주니치, 한신을 제치고 간신히 4위로 올라섰는데 이때 감독도 나가시마였다, [20] 한신은 1978년 고토 츠구오 감독이 41승 80패 9무 승률 .339를 찍으며 구단 사상 최초로 최하위로 전락했다. 그러나 한신은 이후 1987년~2002년까지 암흑기를 겪으면서 이 기간 동안 10번이나 최하위를 찍으며 안 될 팀은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21] 이것은 모회사인 요미우리 신문에 위기를 불러온다. 나가시마의 해임에 격분한 팬들이 요미우리와 스포츠호치를 불매하는 운동을 벌였기 때문. 아래서 설명할 종신 명예 감독직은 이 때 학을 뗀 요미우리가 고심 끝에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 [22] 뒤의 55번 선수는 마쓰이 히데키. [23] 이 시기에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 세이부 라이온즈, 야쿠르트 스왈로즈, 치바 롯데 마린즈 등 간토 지역 구단의 감독직 제의를 한 차례씩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24] 굵은 글씨 1은 일본시리즈 우승년도의 성적. [25] 1994년 일본시리즈 우승은 주니치 드래곤즈와 리그 우승을 걸고 치른 10.8 결전이 유명하다. [26] 특히 2000년 일본시리즈 우승은 오 사다하루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4승2패로 무찌르고 달성했는데, 이 일본시리즈는 나가시마와 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전에서 감독으로 맞붙은 것으로( 교류전은 2005년부터 도입되었고, 나가시마는 2001년 은퇴) 일본 대중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일명 ON 시리즈. [27] 그러나 1996년엔 스즈키 이치로, 다구치 소, 히라이 마사후미 등을 필두로 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4승 1패로 깨지며 우승 실패. 참고로 오릭스 블루웨이브는 바로 한큐 브레이브스가 오릭스에게 팔린 뒤 바뀐 이름. [28] 현역 때 3번을 단 3번 타자 3루수로서 이 숫자를 모두 더하고 0을 붙인 것으로, 아들인 나가시마 가즈시게의 아이디어로 달았다고 한다. [29] 이승엽의 제70대 4번타자 시절 때 백넘버이기도 하다. 이승엽은 33번 달던 시절 때는 한때 홈런왕을 바라볼 정도로 팀 타선을 혼자서 이끌었다. 하지만 25번 달고는 먹튀 테크를 제대로 밟고 말았다. 그 기믹은 이승엽과 홈런왕 경쟁을 했던 무라타 슈이치가 이어받았는데, 이승엽보다는 나았으나 먹튀 취급 받는 건 똑같았다. 현재는 요미우리 2군 타격코치로 재임 중이다. [30] 하지만 안티 거인 팬들로부터는 스프링 캠프에서 선수들의 모습은 안 전하고 매일같이 "오늘은 벗을 것인가 아닐 것인가"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미디어들을 겨냥하여 "벗나 안 벗나가 뉴스 거리라니 무슨 포르노 배우냐?"라면서 비아냥 대기도 했다. [31] 정확한 직책 명칭은 현재 구단 운영 법인인 ㈜요미우리 교진군 전무취체역 종신 명예 감독이고, 2001년 감독직을 은퇴함과 동시에 임명되었다. 임명 당시에는 당시 구단 운영 법인이었던 ㈜요미우리(현재 해당 법인은 그룹 재편을 거치면서 소멸되었다.) 소속이었고, 2002년 7월 1일자로 모기업인 ㈜요미우리 신문 그룹 본사가 그룹 재편을 단행하면서 구단 운영 법인이 ㈜요미우리 교진군으로 재편되었으나, 이전에 임명된 직책은 재편된 구단 운영 법인으로 그대로 승계되었으며, 2024년 현재도 해당 직책을 맡고 있다. [32] 2003년 물러난 후, 호리우치 츠네오가 2년간 감독을 맡았고, 호리우치가 물러난 2006년부터 다시 감독을 맡았다. [33] 다소 작은 키로 요코즈나에 등극했던 49대 요코즈나 도치노우미의 경기로, 25세라는 꽤 젊은 나이에 요코즈나에 등극했지만 팔 부상 때문에 재위 기간이 3년 남짓에 불과했다. (3년 동안 17개의 바쇼를 참가했는데, 그나마도 9개 바쇼는 15일간 집중적으로 출장한 것이다.) 2021년 사망. [34] 지금도 1만엔은 고액권이지만 나가시마가 현역으로 뛰던 60~70년대에는 이보다도 더 큰 액수를 자랑했다. 당시의 1만엔은 현대의 2만엔~3만엔 가량으로, 그나마 일본이 근 40여년 동안 물가상승 폭이 한국에 비해 적어서 이 정도. 원화로는 대략 20-30만원. [35] 2024년 현재 두산 베어스의 코치를 맡고 있는 그 고토다. 현역 시절엔 주로 대타로 활약했다. [36] 타카다 시게루. V9 시대의 주전 좌익수로 1968년 신인왕, 1971년 도루왕 등을 수상했다. 은퇴 후엔 닛폰햄과 야쿠르트에서 감독, DeNA에서 GM을 역임했다. [37] 도이 쇼조. V9 당시의 주전 2루수로 훗날 오릭스 블루웨이브 초대 감독을 거쳐 요미우리의 주루 코치가 된다. 오릭스 시절 신인 시절의 스즈키 이치로의 타격폼을 탐탁지 않아했다는 일화나 나가시마의 아들인 나가시마 카즈시게가 요미우리에 입단한 뒤 당시 코치였던 도이에게 폭언을 한 사건 등으로 유명하다. 2009년 사망. [38] 항목에도 나와있듯 동년배들이 거의 다 은퇴한 1998년까지 만 43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뛰었고 은퇴 1년 전엔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까지 수성했던 노익장이었다. [39] 일본프로야구에서는 가끔씩 팬서비스나 홈구장 일정 등의 문제로 다른 팀 홈구장에서 홈 경기를 갖는 경우가 있다. [40] 다행히 마키하라는 그 날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는데 성공했고, 그 퍼펙트 게임은 20세기 최후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센트럴리그 퍼펙트 게임으로 남아 있다. 이후 28년 뒤인 2022년에 사사키 로키가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41] 비슷한 개그로, 푸른거탑 시즌1 34화에서 말년 최종훈이 "나는 한국에 살았다."라는 문장을 과거형으로 쓴답시고 "I live in Chosun."이라 적는 기행을 보여주었다. [42] 여담으로 나가시마는 그 해 시즌 중 퇴근길에 괴한들에게 납치당할 뻔했는데, 평소 가지 않은 길을 이용해서 납치에 실패한 데다 범인 중 한 사람이 마음에 변화가 생겨 경찰에 자수하여 납치는 미수로 끝났다고 한다. [43] 릿교대 시절에는 아버지가 나가시마란 이유로 1학년때부터 4번타자 자리를 받았다. 물론 본인도 아버지보다 더 많은 11홈런을 쳤을 만큼 대학 무대를 풍미할 거포로서의 실력은 갖고 있었으나, 문제는 이때부터 이미 타율이 2할 2푼대에 그칠 만큼 공갈포 기질이 다분했다. [44] 당시 도이가 카즈시게에게 2시간 동안 번트 연습을 할 것을 지시했는데, 카즈시게가 그 지시를 듣자마자 갑자기 급발진해서 대놓고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벌금 50만엔을 내는 징계를 받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V9을 견인했던 레전드에게 감히 폭언을 내뱉는 대형사고를 터뜨렸으니 아버지의 얼굴에 제대로 똥을 퍼부은 셈. [45] 당시 야기 히로시, 코마다 노리히로 등의 현역 선수나 OB들이 영화에 나왔다. 노미 아츠시가 프로 데뷔 전 이 영화에 한신 소속 중간계투로 나오기도 했는데, 훗날 노미는 정말로 한신에 입단했다. [46] 2003년에 터진 연금 미납 소동이 대표적으로, 당시 마키코가 국민연금 납부 캠페인 CM에 출연했는데 정작 본인은 연금을 체납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의 중심에 섰던 적이 있었다. [47] 일본에서는 파울로(パウロ)로 표기하나, 나무위키는 한국어 위키이기 때문에 한국 가톨릭의 명칭대로 번역해 바오로로 서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