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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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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대 국왕 태조 왕건 (877년 ~ 943년) |
조선 초대 국왕 태조 이성계 (1335년 ~ 14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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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와 조선을 비교한 문서로, 대표적인 한국 역사 논쟁거리 중 하나다.2. 대중적 통념
대중적으로는 고려가 후대 왕조인 조선에 비해 자주적인 국가라는 인식을 가지는 등 이미지가 더 좋은 편이다. 고려가 고구려 계승, 외침 격퇴 등 상무적인 이미지와 전반적으로 불교를 숭상하여 문화가 발달했으며 벽란도로 대표되는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한 시기이자 이때 현재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불리는 외교적 이름이 코리아, 즉 고려( 고구려)라는 이미지가 대중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자리잡은 탓이 크다.반면 조선의 이미지는 태조~세종 시대, 성종 시대, 영정조 시대 등 일부 태평성세 시기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대중의 인식이 굉장히 나쁜 편인데 이는 고려 말의 폐단을 바로잡고 발전을 이룬 조선 전기보다 사대주의 성향의 사림파가 득세하고 유교 기반 문치의 폐쇄성, 가부장제의 강화와 여성 인권의 하락, 군사분야 등 대외적인 무능함, 붕당정치의 변질로 인한 지배계층의 극심한 부패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이 주도하는 세도정치로 인해 망국으로 치닫는 민생 파탄의 시대인 조선 말기가 더 많이 부각되는 탓이다. 변질된 유교적 전통 문서에서 보듯 유교 사상이 가부장제나 반동주의의 동의어에 가깝게 인식되는 오해가 널리 퍼져있는 점도 크다. 실제로 한국 공교육에서도 조선 전기보다 조선 말기를 훨씬 상세하게 다룬다.
넓은 땅을 자랑하던 고구려와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주목받다 보니 상대적으로 외세의 침략에 '무력하게 유린당한' 조선이 비교되어 까이는 경우가 많다.[1] 하지만 현실적으로 농업 생산력의 발달, 인구의 증가, 통치 체계의 정비, 목민과 검소를 중시하는 지배사상 등을 보면 국제교역[2]을 제외한 다양한 부문에서 조선도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한 반감에는 서양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조선은 양반 사회를 고수하다 시대에 뒤쳐지다 결국 식민지 신세로 전락하게 된 조선의 지배계층들에 대한 분노[3], 세번의 외침으로부터 제대로 나라를 지키지 못했던 조선에 대한 실망감[4]때문인 경우가 많다. 고려의 경우 중원을 굴복시킨 강대국의 외침을 두번씩이나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동북아의 균형자 노릇을 하던 때가 있었고 외교적으로도 상당한 이득을 보았으며 몽골만큼은 결국 당해내지 못했지만 이는 몽골이 말 그대로 전 세계를 휩쓴 전대미문의 초강대국이었던데다 외교적으로 선방했다고 할만한 여지도 있다보니 불만족스럽게나마 납득할 여지가 있다. 또한 고려 말에는 서쪽에서는 원나라의 군벌들과 군대, 명나라의 홍건적이 북쪽에서는 여진족들이 끊임없이 남쪽에서는 왜구까지 공격해왔지만 모두 격퇴하였다.
하지만 여요전쟁 직후 국력의 정점을 찍었던 고려와 세도정치 ~ 구한말 조선을 비교하는 것은 세종 ~ 문종까지 빛나는 발전을 이룩한 조선과 무신 정권을 거쳐 망국의 길로 향하고 몽골의 부마국이 된 고려를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조선은 고려보다 수백년 뒤의 왕조이며, 그 수백년 동안 인구는 1.5배로 늘었고 기술과 제도들은 정비되고 험지는 개간되었으며 사회는 발전해왔다. 그 과정을 모두 무시하고 사회의 발전상을 단순히 일대일로 비교함은 옳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미지만을 이유로 조선이 고려보다 퇴보한 사회라고 결론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애당초 고려와 조선은 각각 50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갖고 있어 한 왕조 내에서도 시기마다 차이가 컸고 무엇보다도 비록 조선이 고려의 왕실을 엎고 세워졌긴 했어도 정부까지 그대로 계승했다는 강력한 연속성이 있다. 한국사에서 이렇게 정부까지 그대로 계승한 왕조는 태봉-고려와 고려-조선의 경우가 유이하며 태봉은 1대로 단명했으므로 사실상 고려-조선의 경우가 유일하다. 심지어 조선은 처음에는 한동안 고려라는 국호까지 그대로 썼고 수도도 한양이 아닌 개성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는 고려-조선을 잘 구분하지 않고 Korea라는 같은 국체로 인식하기도 한다.[5][6] 따라서 두 왕조를 딱 자르듯이 비교하는 것보단 각 시기마다 배경과 맥락에 근거해 비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려를 더 낫다고 여기는 이들은 고려의 강력했던 국방력과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 외부 세계와 유연하게 소통하던 개방적 이미지와 민족 다양성에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고, 조선이 더 낫다고 여기는 이들은 음서제 약화로 대표되는 능력주의적인 모습, 국가의 전반적인 시스템과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을 것이란 추론 등 소위 먹고사니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서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니 어느 하나가 옳다고 하기 어렵다. 역사를 진보(발전)와 퇴보의 관념으로 바라보는 견해는 더 이상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며, 단지 각자의 시대정신에 맞게 장단점을 가진 국가로 바라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3. 민생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함에 한도가 있었고, 산과 연못에서 나오는 이익을 백성과 같이하였다. 그리고 상업을 유통시켜 장인들에게 혜택을 주었으며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도록 했으니, 나라에는 남아서 저축한 것이 있었고 갑작스런 병화(兵禍)와 상사(喪事)가 있더라도 증세하지 않았다. 그 시대 말기에 이르러도 도리어 삼공(三空)을 걱정하였다. 우리 (조선) 시대는 그렇지 못해 구차한 백성의 세금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절개는 중국과 동등하게 하고, 백성이 낸 세금이 오 푼인데 세금이 나라에 귀속된 것은 겨우 한 푼이니, 그 나머지는 간사하고 사사로운 관리들에게 낭자하게 흩어졌다. 또한 관청엔 여분의 저축해둔 게 없어 일이 있을 때마다 1년에 간혹 두 번이나 세금을 부과하니, 수령과 재상들은 이것을 빙자하여 가혹하게 징수함에 또한 끝이 없었다. 그러므로 백성의 근심과 원망이 왕씨 말기보다 심하다. 그런데도 윗사람이 편안해하며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은 우리나라엔 호민(豪民)이 없기 때문이다.
허균, 「호민론」
허균, 「호민론」
고려 때에는 관에서 축내는 폐단도 없었고 정기적으로 바치는 부세도 백성에게 맡겨서 모두 정도에 알맞게 하였다. 말과 섬도 공사 간에 똑같은 제도로 했고, 혹 흉년을 만나 진휼(賑恤)할 때는 동서로 대비원(大悲院)과 제위포(濟危舖)를 설치하여 질병 환자를 치료하였다. 환과고독(鱞寡孤獨)에 대해서는 모두 관에서 구휼하고 이외에 온갖 불구자에 대해서도 다 국가에서 부양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백성에게 우대하는 정사가 지금에 비해 조금 나을 뿐만이 아니었다.
이익, 「성호사설」
이익, 「성호사설」
고려 전기의 황금기를 지나 고려 후기는 잦은 외침과 자연재해, 농업시설의 상대적인 미비[7]와 권세가들의 고삐 풀린 수탈이라는 삼중고가 중첩되었다. 거기에 더해 높은 세율까지 가중되어 토지의 생산량을 훌쩍 넘어서는 가혹한 조세 부담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귀족들의 노비로 전락하는 극빈층(투탁노비)들과 스스로 자신들의 토지를 버리고 떠돌거나 도망치는 유랑민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심지어 일부는 산속 오지로 숨어들어 화전을 개간하는 화전민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마저도 국가의 손길이 닿으면 다시 도망가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 고려의 꽃이라는 고급 문화를 향유할 수 있던 소수 지배층은 몰라도 적어도 일반 백성들의 생활 수준에 관한 한, 고려는 조선에 비해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다만 고려는 무역을 통해 국가의 부를 축적하였고, 전성기 시절에는 국고에 쌀이 넘쳐났을 만큼 매우 부강한 나라였으며 당시 고려가 떨쳤던 위세는 후세에도 매우 강렬하게 각인되어 조선왕조실록에서조차 경외심과 부러움을 드러낸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한편 나라가 부강했다고 민생이 좋았다고 단정지을수는 없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8]
물론 조선의 백성들의 삶도 전근대 국가의 한계로 고려 말과 같은 고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애초에 고려 후기의 상황과 비교하려면 조선도 최소 세도정치 시절부터 그 이후 각국 열강과 일제로부터 수탈당하던 시절과 비교 해야 하는데 아래도 그렇지만 조선에 대한 서술은 전혀 그렇지 않다. 농업 생산량이 크게 올랐고 정부에서는 유교적 도리에 따라 작은 정부 수준으로 민중들의 조세 부담을 낮춰주려고 노력했고 몸으로 때우는 각종 역을 제외한 조선의 세율은 20~30% 남짓으로 동시대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세율을 적용하였지만 문제는 이건 공식적인 세율이 이렇다는 것에 불과했다. 특히 조선은 국가적으로는 낮은 세율을 적용하였지만 막상 관료의 수가 많이 필요한 큰 정부를 지향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단적인 예로 관리는 아니지만 지방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아전에게 업무는 과다하게 시키면서 정작 국가에서는 녹봉이 단 한푼도 나오지 않았고 관리들의 녹봉이 상당히 적어 국가에서 나오는 녹봉 가지고는 생활이 힘드니 지방 수령과 아전들의 가렴주구가 이어지는 등 모순점이 나오는 바람에 건국 이래 늘 만성적인 재정 빈곤에 시달렸다.[9] 거기다 조선은 후대로 갈수록 국가의 모든 역량을 중앙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이 더욱 심해졌다.[10] 조선 전기부터 임꺽정, 홍길동 같은 대도들이 활개치고 후기에는 가혹한 세금을 견디지 못해 유랑민이 급증하고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난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 때도 민중들의 삶은 고려 후기 때만큼 고통스러웠던 시기가 많았다.
4. 노비
4.1. 노비의 대우
조선의 노비제를 상대적으로 옹호하는 시각에선 고려시대의 향, 소, 부곡의 주민 같은 차별받은 천민집단[11]이나 조선 노비의 대부분을 차지한 외거노비나 생활에선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노비들이 더 나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설령 조선의 노비가 고려의 향, 소, 부곡민보다 생활 수준이 높았다하더라도 이건 사회가 비교적 안정적이고 생산량이 늘어난 덕분이지, 상속 매매 증여의 대상인 시점부터 계급적으론 더 못한 대접을 받은 게 맞다.[12] 물론 고려 또한 노비들이 존재했으니 단지 조선과 고려의 차이는 향, 소, 부곡의 특수 천민지역들이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특히 노비가 좋은 대우를 받은 것을 꼭 긍정적인 쪽으로 해석할 수도 없다. 간과되기 쉽지만 가난한 양인보다 노비가 훨씬 살만한 건 당연한 일이다. 노비는 기본적으로 납세와 군역[13]이 면제되어 노비가 많아지면 국가 입장에서는 재정과 군사력의 약화로 이어졌다. 납세야 상전을 위해 봉사하는 걸로 대신하지만 군역 면제만 받아도 큰 메리트다. 거기다 공노비의 경우엔 하급 기술 관직[14]을 받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남존여비 시대에 여자도 궁녀, 의녀 등이 되어 공직 생활[15]을 할 수 있었다. 현대에 비유하면 일반 양반집 노비들은 중소기업 직원, 끗발 날리는 대감 댁이나 왕족의 노비들은 대기업 직원[16], 공노비는 9급 공무원쯤 되는 셈이다. 그것도 군 면제에 신분 세습이 되는. 물론 이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상전이 성격이 더러우면 오만가지 학대를 당할 수 있고 역모죄를 지으면 덩달아 박살나지만 양인들이라고 탐관오리의 폭정으로부터 안전한 게 아니었고 탐관오리들에게 시달렸기 때문에 충분히 감수할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에서는 나라가 어려워지면 양민이 스스로를 노비로 파는 일이 성행했다.[17] 조선의 사족들이 노비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줬던 건 집안의 중요 자산인 노비를 확충하기 위한 경영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노비에게 최소한의 인간 대접을 해줘야 그나마 열심히 일해서 생산성을 높이고 흉년에 양인들이 자기 집에 몸을 팔러 많이 올테니까. 덧붙여 조선 때는 한 집에 거느리는 노비가 워낙 많아서 도망 노비 문제가 심각했다. 특히 도망 노비를 잡으려고 추쇄도감까지 설치했으나 노비들을 잡는 일은 쉽지 않았고 도망 노비들도 집단으로 저항했으며 노비의 도망이 속출했기에 도망 노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채찍뿐만 아니라 당근을 쓸 필요가 컸다.
물론 양민들이 권문세족들에게 노비로서 위탁하는 일명 투탁노비(양민이나 천민 가운데 군역이나 조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권문세족의 종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행위)의 폭증은 미국의 한국학 대가인 제임스 팔레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고려 말 부터 그 비율이 엄청나게 폭증하였다고 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고려 말의 재정 파탄을 초래했고, 전시과의 붕괴를 가져온 토지겸병 문제가 그 원인으로 지적되는데, 실제로 고려 말의 지배 질서가 문란해지면서 발생한 이 토지 겸병의 문제는 이후 권문세족들의 끝없는 토지 겸병 확대로 이어졌고 그 결과 고려의 권문세족들이 가진 농장의 비정상적인 확대와 함께 토지를 잃은 양민들이 권문세족들에게 노비로서 위탁하는 일명 투탁노비 현상이 폭발적으로 발생하여 노비비율이 폭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 권문세족들이 소유한 토지들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는데 고려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는 산과 강을 경계로 할 정도로 광대했다. 당연히 세족들의 이런 토지확대는 필연적으로 고려 백성들이 먹고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토지들마저도 권문세족들이 몽땅 강탈해가는 바람에 백성들 입장에서는 ‘송곳 꽂을 땅’조차 없는 도탄의 지경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로인해 투탁노비들이 폭증하여 세수도 감소하게 되었고 국가 재정이 궁피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그것이 조선초기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또한 고려나 조선이나 두 왕조의 노비제가 근본적으론 같기 때문에[18] 조선의 노비가 고려의 노비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 게다가 조선과 고려 모두 주인이 노비를 일방적으로 살해하는 것만 금지했을 뿐, 그 외에는 상전에게 거역할 수 없도록 했고 주인이 살인 외의 학대를 저질러도 제대로 된 처벌도 하지 않았다.
주로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고려와 달리 조선은 송나라의 제도를 많이 본받아서 노비에 대한 법적인 처우가 훨씬 괜찮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고려와 조선은 노비제 만큼은 매우 자주적(?)으로 운영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차이가 컸다고 보긴 힘들다. 특히 조선은 노비를 위한 법적 제도를 고려보다 많이 신경 써주긴 했지만 동시에 노비에 대한 주인의 소유권과 상하관계를 보장하는 제도를 고려보다 훨씬 강화했다. 초기부터 노비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했고 나중엔 장례원이라는 노비 전담 관청을 세웠으며 도망 노비를 색출하는 노비추쇄도감도 유명하다.
두 왕조의 국교인 불교와 유교가 노비에 대한 처우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여러가지 의견이 엇갈린다. 사실 둘 다 기본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가치 있다는 걸 인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이걸 국교로 하는 나라들은 노비제가 없는 게 자연스럽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부패한 고려의 승려와 조선의 선비들이 사찰이나 서원에서 많은 노비들을 거느리고 백성들을 수탈한 건 이들 계급과 그들을 처벌하지 않은 국가 권력의 문제로 봐야하지 종교 문제로 지적할 일이 아니다.
다만 조선시대 노비인구의 대다수인 외거노비들은 농노의 성격도 띄고 있으니 노비를 노예가 아닌 농노로 본다면 타지역에 비해 노예비율이 높았다고 보기 어려우며 타지역 백성들은 오히려 조선의 외거노비들보다도 열악한 처지인 경우도 있었는데 일본같은 경우 워낙 극심한 수탈로 마비키같은 악습이 생겨난데다가 16세기때는 다이묘들이 자기 영지 백성들을 포르투갈인들에게 노예(이시기 서구에서 노예들은 최소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라도했던 조선노비들과는 달리 말 그대로 가축취급을 받았다.)로 팔아버리기도 했으며 그렇게 노예로 끌려간 일본인들만 수십만이었다.
4.2. 노비 폭증
고려와 조선 둘 중 어느 나라에서 노비폭증이 시작되었는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서로 갈린다. 이영훈처럼 조선 초기에 폭증했다는 사람도 있지만 미국의 한국학 대가였던 제임스 팔레처럼 고려말 극심했던 혼란기에 권문세족들의 횡포가 겹쳐 투탁노비들이 폭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기 때문이다.일단 조선 시대에 노비 비율이 폭증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19] 이를 조선의 어두운 면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권세가들이 가난한 백성들을 노비로 만드는데 열을 올리기 시작한 건 고려 때부터지만, 그 비율은 조선보다는 훨씬 더 적었다고 추정한다.[20]
하지만 고려 시대에 노비 비율이 폭증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고려 말 귀족들의 수탈과 토지겸병 문제는 조선시대 양반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고, 실제 노비제에 관한 고려의 법률은 조선시대 종모법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고려시대 노비제가 법으로 확실히 규정된 것은 10대 정종 때로, 《 고려사》 〈형법지〉에서는 “정종 5년(1039), 천것은 어머니를 따르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고 했다. ‘천것은 어머니를 따른다’란 문장의 한문 표현인 ‘천자수모(賤者隨母)’를 따서, 학계에서는 이 법을 천자수모법이라 부른다. 고려시대의 천자수모법과 조선시대의 종모법은 뉘앙스의 차이가 약간 있긴 하나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원간섭기 충렬왕 재위시기에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그 자손들도 무조건 노비가 되는 법)의 원리’를 제창하면서 이후 노비 인구가 급증하였는데 여기다 고려말 귀족들의 수탈로 인하여 투탁노비(양민이나 천민 가운데 군역이나 조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권문세족의 종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행위)들의 수 마저 폭증하면서 고려말 때 노비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폭증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나마 중간에 원나라가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의 노비제도에 간섭하여 노비제도를 원나라의 법식대로 고치도록 해서 (고려의 부원배 지배층들은 노비들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원나라는 노비를 오히려 줄이는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노비제도 개혁이 이루어질뻔 하였지만 이마저도 '세조구제'를 내세운 고려 지배층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21]
하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 등이 사전 개혁에 찬성하자 이성계가 토지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여, 중앙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고 도의 양전(量田)을 시작하였으며, 또한 반대하는 자는 탄핵·추방하고, 1390년(공양왕 2년) 음력 9월 공사 전적(公私田籍)을 소각하여 철저한 개혁을 실시했다. 이듬해 음력 5월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科田法)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이로써 강력한 왕권의 부재를 틈타 중앙 조정의 국사를 관장하는 도평의사사(도당)를 좌지우지하며 나라의 권력과 부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부패한 권문세족들의 대농장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세족들에게 속해있던 투탁노비들 상당수 또한 다시 양인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추가로 고려 말 토지제도 문란의 3대 요소로 평가받던 토지겸병과 병작 반수제, 지주전호제는 이후 경국대전에서 이 3가지를 모두 법적으로 금지했는데 이유는 당연히 그만큼 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조선은 세조 때 경국대전에 노비법을 정비하여 고려시대 일천즉천으로 법을 다시 바꾸어서 노비의 자식은 무조건 노비로 만들었고 이후 계유정난에 가담한 공신들에 의해 훈구파가 형성되고 성종 때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가 대지주층들이 되어가서 이들에 의해 삼정의 문란이 발생하자 양인이 줄어들고 노비 수는 꾸준히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신분의 경계가 문란해지는 조선 후기때 양천교혼(良賤交婚)과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奴良妻所生從母從良法)이 시행된 이후에야 영조 시절을 기점으로 조선의 노비 인구 수는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이후 구한말 때 법적으로 완전히 폐지된다.
이렇듯 그나마 조선은 19세기에 들어서는 노비 비율이 한자리수로 떨어지고 19세기가 끝나가기전에 노비제가 폐지 되었으나 태국같은 경우에는 20세기 초기까지도 전국민의 30%가 노예였다가 점진적으로 폐지되었다. # ##
또한 고려시대의 지방 촌락의 양민들은 지방 향리에게 예속당한 존재였으며 분명 법적으로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 양인이어야겠지만, 고려는 지방에 조선에 비해 크게 간섭하지 않았으며 분명히 법제적으로는 자유로운 양민들이 향리의 통치하에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만했기에 단순히 노비 비율만 갖고 신라, 고려가 조선보다 낫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22]
4.3. 노비에 관한 복지
조선의 노비에 대한 정책이 전부 무의미했던 건 아니었다. 공노비에 한해서는 출산 휴가를 비롯하여 다양한 복지 정책을 실행한 조선 쪽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노비들만의 휴일도 있었다. #사노비의 복지는 주인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일상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주인이 있었는가하면 가족 못지 않게 잘 대해준 주인도 있었다. #
박자청, 장영실, 반석평처럼 노비 출신이지만 본인들의 실력을 인정 받아서 출세한 인물들이나 주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양반 앞에서도 거들먹거렸던 노비들의 사례를 거론하며, 조선시대 때 노비의 위상이 생각보다 높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런 사례들은 고려 때도 발견된다. 이의민은 노비 출신으로 권력의 정점에 올랐고 최의는 자기 집 노비들에게 벼슬을 제수하기도 했다. 물론 고려의 경우는 반란 방지를 위한 선심성 벼슬 제수였기는 하지만 말이다.
4.4. 노비 학사(虐使) 처벌
율문(律文)을 참고하여 보니, 노비구가장조(奴婢毆家長條)에 이르기를, ‘만약 노비가 죄가 있는 것을 그의 가장(家長)이나 기복친(朞服親), 혹은 외조부모가 관(官)에 고발하지 않고 구타하여 죽인 자는 장(杖) 1백 대의 형에 처하고, 죄 없는 노비를 죽인 자는 장(杖) 60대에, 도(徒) 1년의 형에 처하며 당해 노비의 처자(妻子)는 모두 석방하여 양민(良民)이 되게 한다. 만약 노비가 주인의 시키는 명령을 위범(違犯)하였으므로 법에 의거하여 형벌을 결행(決行)하다가 우연히 죽게 만든 것과 과실치사한 자는 모두 논죄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은즉, 주인으로 노비를 함부로 죽인 자는 일체 율문(律文)에 따라 시행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노비는 대대로 서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서 명분이 매우 엄중하여 중국의 노비와는 아주 다르니, 그들을 양민으로 만드는 법은 사세가 시행하기 어려우며, 또 노비의 죄있는 자를 그 주인이 처벌하는 법도 실행한 지가 이미 오래된 것이니 갑자기 고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사삿집[私家]의 은밀(隱密)한 곳에서 죄 지은 노비를 그 주인이 어떻게 하나하나 율문을 상고하여 논죄(論罪)할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26년 윤7월 24일
세종실록, 세종 26년 윤7월 24일
주인들이 노비를 학대하고 각종 사적제재가 발생한 것은 조선도 고려와 다를게 없었다. 조선의 경우 세종이 노비에 대한 살해 뿐만 아니라 구타를 비롯한 사적제재와 가혹행위도 금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사족들의 반발과 반대로 실질적인 효력이 없었다. 특히 고려나 조선이나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 없다보니 살인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 노비가 받는 학대가 바깥으로 새어나가기 어려웠고 설령 알려진다해도 학대한 주인이 처벌받지 않는게 다반사였다.
또한 위와 같은 조치가 노비의 권익을 증진시켰다고 해석할수는 없다. 죄없는 노비를 학대하는 것을 금지했을 뿐 죄 지은 노비를 벌 주는 것을 금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얼토당토 않게 노비에게 잔혹한 짓을 한 후 '게으름을 부려 혼을 내었다'같은 말을 하면 그 이상 깊게 팔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노비를 거느렸던 양반 가문들의 기록을 보면 노비들의 군기를 잡는다는 명복으로 태형, 폭행, 고문, 사적제재를 일삼은 게 빈번했다. 게다가 노비가 주인에게 불복종하거나 대들면 관아에 신고해서 관아의 힘을 빌려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었다. 주인의 입장에서 노비의 죄야 만들어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선시대에 노비를 죽인 걸로 처벌 받은 사례의 대부분은 관아에 신고하지 않고 멋대로 죽여서이지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었다. 웬만큼 엄격한 관원이 아니면 주인이 노비를 폭행하고 학대하며 고문하는 사건은 처벌도 하지않고 쉬쉬하며 넘어갔다.
5. 여성 인권
관련 문서: 고려/문화 고려의 여성들이 조선의 여성들보다 월등히 자유로웠다는 인식이 주를 이루는데 고려는 너무 고평가 받고, 조선은 너무 저평가 받는다는 게 정확하다.고려조에는 이혼 및 과부의 재혼이 자유로웠던 반면 조선시대 지배계층은 성종 때 과부의 재혼을 금지시켜버렸다. 사실 재혼 일건으로만 봐도 부녀자의 입장에서는 천지차이다. 현대에 비해 조혼을 하는 풍토였는데 만약 남편이 요절하기라도 하면 천수동안 혼자 살아야하는 처참한 형편이었다.
서민들은 조선시대에도 제한 없이 재혼을 많이 했으며 고려의 이혼 및 재가는 가문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많은 여성들이 가문을 위해 강제로 이혼당하거나 재가하는 일도 많았다. 게다가 고려도 조선처럼 기본적으로는 가부장제 사회이기 때문에 남성중심이었으며 여성들의 지위를 아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무리다.
고려도 여성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고 원 간섭기에는 공녀로 끌려가는 등 편히 산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한글의 보급 덕분에 여성의 문화 참여는 조선시대 때가 더 많았고[23] 경제권은 고려나 조선이나 양반은 남편과 아내가 따로 주머니를 차고 각자 관리했다. 조선 초기건 조선 후기건 상관없이. 그래서 조선 양반가 안주인들은 반드시 경영, 출납관리 능력을 갖춰야 했다. 공녀는 고려나 조선이나 똑같이 바쳤다. 애초에 중국 왕조의 압력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당시 여성의 권리라는 측면이, 고려나 조선 뿐만 아니라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인식되었나 하는 점이다. 이는 여성의 성씨를 다루는 점에서 살펴야한다. 성씨라는 것은 원래 '집안(家)'로 표현되는 혈연 집단의 한 표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원래 속했던 또는 출신 가문의 위상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24] 고려가 조선과 다른 점은 외척 또는 여성의 가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 또한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의 경우도 딸을 족보에 넣어주는 등 고려와 별 다를게 없었다.
게다가 조선 여인들이 무조건 부당한 대접만 받은 것은 아니다는 의견도 있다. 조선 후기에는 남편을 가르치는 여성인 현처가 등장했으며 임윤지당, 강정일당처럼 성리학을 자기화하는 여성 성리학자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남성 양반들에게서도 자신들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대접 받았다.
어차피 고려나 조선이나 대부분의 전근대 국가 특성상 여권(女權)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동시기 유럽에서도 마녀사냥이 일어났으며 중국에서는 전족이 있었고 인도에서는 사티가 있었던 게 전근대 시기 여권의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경제권과 가정 내 영향력이라는 점에서는 고려의 여권이 조선보다 더 높았다.
하지만 고려의 여권은 대중들에게 알려진것보다 과대평가된 면이 있는데 흔히 고려는 일부일처제로 알려져있으나 고려도경에서는 고려도 부자들은 처를 여러 명 뒀다는 기록이 있다.[출처] 당장 조선의 국조인 태조 이성계부터가 향처 한씨, 경처 강씨와 불법적으로 중혼을 한 사람이었다. 단지 자기 나라의 국조가 불법 중혼을 했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기가 껄끄럽다보니 '신의왕후께서 붕어하신 후 태조대왕께서 신덕왕후를 계후로 들이셨다'라고 시간대를 은근슬쩍 조작해 실록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나마 향처 한씨가 조선 개국 전에 죽어서 왕비가 동시에 2명 생기는 일은 없었다.
6. 기록문화
조선은 고려 뿐만 아니라 한민족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록 문화를 이루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고려 또한 그 이전 시절 때 보다 기록 문화가 발전하기는 했지만 조선이 역대 한민족 국가들 중에서 기록 문화가 가장 많이 발전했었던 나라라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다.[26] 실제로 조선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등 굉장히 세분화되고 쓰는 방법이 체계화된 방대한 양의 기록물들을 편찬했으며, 거기다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고 객관적인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 한다. 또한 전대인 고려 시대 때보다 더 발전한 인쇄 기술력을 바탕으로 서적 편찬 또한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조보 같은 세계 최초의 신문 또한 발행되었다.7. 신분차별
고려시대의 귀족층이라고 할 수 있는 호족은 아비가 호족이면 자식도 호족인 반영구적 세습직이었지만, 조선시대 양반은 아비가 양반이라고 자식도 무조건 양반인 것이 아니었고, 반대로 아비가 양반이 아니어도 자식이 양반 직위를 획득할 수 있는 나라였다.
조선시대에는 문과에 합격하는 서민층의 비율이 많이 늘었을 뿐만 아니라 무과도 시행되어 양인들이 양반이 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늘어났다. 그덕분에 귀족적인 요소가 강했던 전대 고려왕조에 비해 신분차별이 상대적으로 많이 완화되었으며, 또한 전대에 비해 훨씬 합리적인 관료체계가 완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생각되는 양반은 건국 초엔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조정에 녹을 받고 일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다.[27] 사실 조선 초기의 계급은 전대 고려와 유사한 양천제(양인 + 천민)였다. 초기만 놓고 보면, 전대 고려의 귀족적 요소들[28]이 상당부분 제거되었기에 고려를 포함한 전대 어느 시대보다도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많이 완화된 사회로 볼 수 있다.[29]
그리고 후기에는 신분간의 상하 이동도 전대에 비해 한층 '개방적'이 되었는데 몰락 양반이 많아지고 보다 좀더 자본주의적으로 바뀐 사회상 때문이다. 이 때 부터는 양반이 아니더라도 양인인 경우,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30] 과거 제도는 결국 양반층의 계급 세습을 합법화시킨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상민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 이런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31]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출처 기사1 기사2 추가로 한영우 교수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4권으로 완결지은 뒤, 4권 말미에 남긴 글 '나가면서'에서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시험 제도로 부단히 하층 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사
8. 상업
조선 초에는 지방 장시가 열리지 못해서 고려 때보다도 국내 상업이 부진했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는데 물론 조선 초기의 억상정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잉여 재화와 재화 순환이 일어나야 생길 수 있는 전근대 상업의 여건 상 당장 먹고살 것도 없을 정도로 총체적으로 붕괴한 여말선초의 경제 상황에서 시장이나 상인집단은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조선의 개국은 철저히 원명교체의 시류에 영합한 것이었고, 이는 이전 수당 통일제국의 등장과 삼한일통, 5대10국 체제의 등장과 후삼국시대 개막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 후기신라도 고려도 그 세계무역을 이끌었던 당과 원이라는 대제국의 붕괴와 이로 인한 국제무역의 파탄 속에 무너졌음을 보면 명과 조선의 농업 기반 향촌사회 지향은 당시로서는 매우 당연한 귀결이었고, 실제로 조선을 둘러싼 당대 동아시아의 환경 자체가 대규모 교역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32]하지만 이후에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조합(경강상인, 유상, 만상, 송상, 내상 등), 어음, 계로 대표되는 초보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다. 놋그릇[33], 자개, 칠기 등의 생활 용품이 시장에 출시돼 대중화되었다. 교역 역시 이전 고려 시대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다. 화폐가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쓰이던 시기 역시 조선시대다.[34] 이전 시기였던 고려는 물물교환, 현물화폐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제한적인 무역만 이뤄졌었다.
고려의 장시가 외견적으로 활발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지역 내 물자 교환 차원이었지 전국에 걸친 물자 유통의 단계는 아니었다. 이 시기 국내의 잉여물자는 대체적으로 권력층에 의해 수취되어 대외무역으로 반출되는 쪽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소액권인 동전의 유통은 실패했고 은병 같은 고액 화폐는 꽤 오랜 기간 쓰였다는 것이다. 즉 고려의 상업을 주도한 건 민간이 아닌 국가와 귀족들의 대규모 거래였다. 반면 조선은 양란을 겪은 후 대동법 시행을 거쳐 민중들이 전국적으로 동전을 사용하게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너무 고액인 은병도 너무 소액인[35] 상평통보도 제대로 된 화폐로 기능하기엔 문제점이 많았고 두 왕조 모두 끝내 현물 경제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결론적으로 국제 무역은 고려가 전반적으로 활발했으나 국내 민간 거래는 조선 후기가 더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역시 후기로 가면 청일간 중계무역으로 수백만냥의 은을 쌓아두기도 했다.
9. 외교: 국가의 자주성의 측면에서
자주성에 있어선 고려 쪽이 조선보다 모화사상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고려는 소위 외왕내제, 즉 나라 안에서는 황제국을 칭했다. 고려 때 보이는 연호라던지, 절일(節日)[36], 짐, 폐하, 태후, 환구단, 오등작, 조서, 자황포, 황성(皇城), 7묘제 종묘, 묘호 등 수많은 예가 있다. 또한 관직명을 의정부 - 영의정 - 육조판서 - 승정원 - 성균관 - 대군 - 왕자군이 아니라 문하성 - 문하시중 - 육부상서 - 중추원 - 국자감 - 공 - 후으로 썼다.
또한 고려는 북방 왕조와 중원 왕조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필요에 따라 교류하고 때로는 단절하기도 하는 등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자국의 국익을 우선시하여 실리적인 외교를 추구했던 것이다. 반면 조선의 경우 성리학적 질서를 우선시하여 사대의 대상을 정했으며 그러한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국가적 위기도 감수를 하였다. 즉, 고려는 나라의 강하고 약한 "형세"에 따라 형식적 사대를 했다면 조선은 의리와 "명분"에 따라 실질적 사대를 했다는 차이가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이러한 외교를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었는데 고려가 이토록 자주적인 실리외교를 추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외적과 싸워 크게 이긴 자신감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르기를, ‘적이 만일 침범하여 짓밟는다면 겸손한 말과 후한 선물로써 한때의 환란을 면할 수 있다. ’고 하오나, 신이 전조(
前朝: 고려)를 보건대, 원(元)나라를 섬긴 뒤에도 살례탑(撒禮塔)·차라대(車羅大)·홍다구(洪茶丘)의 침략하는 군사가 없는 해가 없었사오니, 이것들은 예절과 신의로써 상대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만약에 우리 병력이 부족하다면 달달(達達)이 어찌 우리를 사랑하는 자이겠습니까. 부득이하여 권도(權道)에 좇아 수호(修好)하는 것이오니 모름지기 한번 대승(大勝)하여야 옳을 것이옵니다. 저들이 우리의 병력이 서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야 감히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여 봉강(封疆)을 가히 지킬 수 있습니다. 전조(前朝) 때에
요(遼)와
금(金)에게 한 것이 이것이옵니다."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15일 신묘 1번째기사』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15일 신묘 1번째기사』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 우리 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일을 망칠 것이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66권, 광해 13년 6월 6일 병자 4번째기사』
『광해군일기(중초본) 166권, 광해 13년 6월 6일 병자 4번째기사』
한편 연호나 칭호를 가지고 고려와 조선을 나눈다면 고려도 500년 역사에 연호를 쓴 왕은 단 두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조선도 고종 때 연호를 썼다. 고려는 두명인데 조선은 한명이니 고려가 우위라는 건 너무 편의적이며 그런 논리라면 고려-조선의 1000년 역사 중 3명의 시대를 제외하면 전부 사대주의적이었다는 논리도 성립된다. 조선도 황제들에게만 허락된 칭호[37]를 쓰거나 제사[38]를 지냈다. 조광조 같은 근본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이를 딱히 반대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조광조의 제사 트집은 숙청 이유가 되기도 했다. 또한 고종황제는 서구열강은 물론 청나라에게조차 황제임을 인정받았는데, 외왕내제와는 확연히 다른 진짜 황제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저 중화질서가 무너지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면, 고종 시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시대도 시대적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조선의 경우에는 이미 건국 초부터 명나라의 속국임을 자처했다. 특히 조선의 경제적, 제도적 역량이 명백히 우위라고 인정하는 쪽에서도 자주성에서만큼은 조선의 사대주의 경향을 비판하고 외왕내제를 취하며 내부적으로는 중국의 속국이 아닌 자주국의 격을 유지한 고려를 높이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고려사를 저술할 때 고려시대에 썼던 용어가 참람하다고 태클을 걸어서 바꾸려고 했던 게 조선의 사대부들이다. 하지만 세종의 제한적 직서주의에 따라 전부 고치진 못했다. 세종처럼 사대주의를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대중 외교 방식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조선에 친중파들이 많아서 중국에 지나칠 정도로 사대를 했던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조선의 경우 건국 초기의 잠깐을 제외한다면, 생존이나 외교적 이득을 넘어 중국의 인문, 문화를 지나치게 숭상한 면이 있었기에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고려와 조선의 차이는 두 나라가 직면한 외교적 환경을 함께 살펴야 한다. 즉 당이라는 통일제국이 붕괴된 5대10국 체제에서 건국하고 무려 4세기 가까이 중원-북방-관서-해동의 4파전 체제 속에서 발현된 고려의 자주성과, 개국 이후 내내 명-청의 절대1극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이 추구할 수 있었던 자주성을 동일선상에 놓고 바라보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1극 체제로만 한정해서 비교하자면 원제국 체제의 고려는 자주성은 고사하고 국왕이 스스로 몽골식으로 머리를 깎고 원나라 맘대로 국왕을 갈아치우던 판이었다. 오히려 명나라 1극 체제에서도 국초부터 꿋꿋하게 천자식 묘호를 쓰고 자국 문자와 역법을 만들고 명목상 명의 영토인 압록강 너머까지 군사원정을 단행하고 기자 뿐만 아니라 단군까지 숭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 '황제국'이라던 고려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반대로 19세기 말 중화 천자국 체제가 붕괴되는 국면이 명백해지자 조선은 고려식 외왕내제도 아니고 완전한 황제국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고려가 건국 초에 요나라나 송나라, 금나라에게 제후국을 자처하지 않은 건 할 필요가 없어서일 뿐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행한 조치가 아니다. 실제로 후삼국 통일과 발해 멸망, 요나라의 여진족 제압 등 요나라를 의식해야하는 상황이 오자 얼마 안가 사대하였고, 송나라도 조공 무역이 이루어지자 알아서 사대하였으며, 금나라가 요나라를 제압 후 고려에 신하의 예를 요구하자 군말없이 번국을 칭했다. 원나라 시대까지 가면 외국에선 한반도까지 원나라 영토로 분류할 정도로 종속적이었다. 연호를 조선은 고종 한명만 썼고 고려는 두명이나 썼으니 자주적이라는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 두 국가에게만 사대했으나 고려는 네 국가에 사대했으니 더 사대주의적이라는 논리도 성립한다.
사실 조선도 초기에는 명나라와 여차하면 싸울 준비를 하거나 순장 풍습에 대해서 왕과 신하들이 뒷담화를 까는 장면( 세종 재위시의 기록)이 있었다. 세종도 주자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드러낸 적이있다. 특히 조선 초기에 명나라 사신이 무례하게 굴자 화가 난 조준이 살수대첩을 빌어 시를 지어 사신을 데꿀멍 시킨 일화도 있다. 즉 고려 말 조선 초기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하면서 모화 사상을 가진 동시에 국가의 자주성도 매우 중요하게 추구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선 또한 고려와 같이 묘호를 사용했고, 독자적인 종묘 운영 방식이 있었으며, 매우 일시적이나마 환구단도 운영했다. 게다가 조선이 명나라의 반대를 무시하고 국경을 넘어 군대를 파견해 여진족을 토벌해도 명에서는 어찌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기부터는 맨손으로 나라를 일구어낸 창업자들이 하나둘씩 은퇴하고 사림층이 집권하면서 모화 사상이 팽배해지고 이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정점을 찍는다. 만동묘 같은 건 일제 시기까지 제사가 이어지기도 했다.[39]
물론 고려는 원 간섭기로 인해 충렬왕 때 부터 많은 제도의 격하를 거쳤으며, 국가의 자주성에도 매우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국가의 위세만을 따지면 원 간섭기 고려와 다를 바 없었다는 견해도 일부 있지만 조선이 병자호란 이후에도 묘호를 계속 사용하였던 데 반해 고려는 원 간섭기 이후로는 다시는 묘호를 부활시키지 못했다. 더군다나 원 간섭기 당시 원나라는 정동행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의 내정에 매우 깊숙히 간섭을 행했지만 청나라는 임오군란 이전에는 그런 적이 전혀 없었다. 이는 왕실이 원 황실과 혼인 관계가 되면서 대륙의 정치판과도 밀접해져 원나라에 깊숙히 간섭 당하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왕실이 청나라와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았고 청나라도 무관심으로 대했기 때문에 내치의 자주성을 비교적 잘 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대라는 것이 그 이전 한반도에 존재한 모든 왕조들의 공통된 생존 전략이었고, 고려는 물론 현대 한국인들이 요동의 패권국이라고 생각하는 고구려조차도 분열기이든 통일기이든 중국 왕조에게 사대는 했었다. 이는 사대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사대라는게 단순한 상하 관계가 아니라 복잡한 외교 관계였기 때문으로,[40] 고려는 송나라와 요, 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무조건적으로 사대하지 않는 눈치있는 외교를 했던 것은 요, 금이 송나라와 장기간 대치하고 있는 2강 체제가 안정적인 상태여서 가능한 것이었다.
고려도 후에 몽골의 부상으로 인해 기존의 조공-책봉 관계 수준을 넘어서 원의 속국이 되었으나 이는 고려 사직 474년 중 86년에 불과하며, 1356년 공민왕 대에 자주를 쟁취하였다. 그리고 조선도 17세기 조정에서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했음에도 자결한 충신이 없는 것에 대해 인조가 탄식하자[41][42] 석윤이라는 자가 말하길,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지조와 절개있는 자들이 떠나서 그런 일이라고 은근히 명나라를 디스하는 기록이 있으니 명나라를 그렇게까진 섬겼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처
사대주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대의 개념은 명나라나 한족 왕조를 섬기는게 아니라 말그대로 큰(大)나라를 섬긴다는 의미이고, 대국에게 예스맨이 되라는 의미도 아닌 공연히 미움받을 짓해서 어그로 끌지 말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가 명나라의 산해관도 못 넘고 있었을 때라 청나라를 사대할 대국으로 여기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고, 때문에 병자호란으로 피해를 입은 부분도 어느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한 이후 조선이 사대해야할 대상은 명이 아니라 청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영조 시대에 사대부들이 명나라가 망했고 청나라는 야만국이니 조선은 소중화가 아닌 대중화이며, 영조가 능히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동아시아에서 문화적 정점이라는 자긍심[43][44]에 매몰되어 대국인 청나라를 무시하는 똥고집을 부렸다. 사대를 하지 않은 것이다. 조선이 청나라를 무시하며 일어난 부작용은 사대를 해서가 아닌 사대를 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며, 조선의 명나라와 만력제에 대한 호의는 사대와는 무관하게 왜란 당시 군대는 물론 식량까지 베푼 것에 대한 호의에 불과하다.[45]
10. 과학 기술과 문예, 의학
조선 시대에는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거북선, 화차와 신기전 등등 전대인 고려 시대 때보다 한층 더 과학기술이 발전했으며 한민족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한글 창제와 홍길동전 같은 한글 소설의 발달 그리고 형태가 확립된 한국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시조의 발전과 궁중 악기인 편경 제작, 궁중음악인 종묘제례악과 악보인 대악후보 같은 문예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동의보감 같은 의학의 발전 또한 이루어졌다.그리고 지도 제작 기술 또한 계속 발전해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 지도나 대동여지도 같은 훨씬 더 정확한 지도들이 제작되었으며, 천문학 또한 발전해 칠정산 같은 한국계 국가 최초의 역법이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세계 최초의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또한 제작되었으며, 선조대에는 인류 역사에 남은 우리 은하 마지막 초신성인 SN 1604(케플러의 초신성)을 관측해 실록에 기록했는데 이는 현대에 와서 이 초신성이 la형 초신성이었음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일 정도로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대에는 은광석에서 순수한 은을 추출하는 첨단 회취법인 연은분리법이 개발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계속 발전이 이루어졌다.
11. 미술
미술적으로는 고려의 불교를 기반으로 한 섬세하고 화려한 건축, 예술, 공예가 대중들에게 더 어필을 한다.조선의 미술은 대중들에게 검소함으로 박혀버려서 전 왕조들에 비해 소박하고 초라한 조선 시대 유물, 유적으로 편견이 박혔다. 따라서 대다수의 대중은 조선의 미술 작품에 대해 문화적 가치가 낮거나 취향을 타는 마니아적인 것으로만 깨워맞추어 인식한다. 아무리 좋게 평가하더라도 조선에도 청화백자처럼 화려한 유물이 있으나 섬세함은 고려 때보다 확연히 떨어진다고 무의식적으로 치우쳐 생각한다. 역시 조선에 대한 이미지로 유명한 것이 이전 시대에는 귀족 중심의 화려한 예술 위주지만 조선 시대는 청렴과 소박함 같은 유교적 가치를 중요시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미의식이 청자의 비색보다 백자의 흰색 같은 것을 더 선호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백자를 구워내려면 청자보다 더 뛰어난 기술과 비싼 재료가 필요하다. 조선 시대는 민화 등 서민 미술이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조선은 소박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의 유물 자료에 대한 지식이 굉장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중이 알 수 있는 정보는 기껏해야 백자나 서민 유물 정도인데, 이것만 가지고 평가하면 자연스럽게 평가도 일반화되게 된다. 조선에도 화려한 유물은 당연히 존재한다.
12. 군사
12.1. 외침 대응
12.1.1. 고려
(전략)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백 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장수에 있어서도 고려 때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휘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는 사람의 수효가 전조(
前朝: 고려)보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사천(公私賤)은 날로 번성하는데 반해 군졸의 액수는 날로 감축되기 때문이니, 호령과 군정 또한 전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의(私意)로 헤아려 보건대 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46]
··· 옛사람이 부국 강병(富國强兵)이라고 하였으나 부강만을 위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축적이 있은 후에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 前朝: 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 그런데 왜국은 몇 개의 도로 나뉘었는지 모르겠다. (후략)
선조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 옛사람이 부국 강병(富國强兵)이라고 하였으나 부강만을 위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축적이 있은 후에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 前朝: 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 그런데 왜국은 몇 개의 도로 나뉘었는지 모르겠다. (후략)
선조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이양이 상소하기를 ··· 고려(高麗)의 군제(軍制)는 6위(六衛)와 8령(八領)으로 되어 있었는데, 1령이 각각 1천 인이니, 도하(서울)의 군대만 모두 합쳐 4만 8천 명 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훈국(訓局)을 새로 설치한 뒤로 5영(五營)의 군대를 제외하면 곧 오합지졸(烏合之卒)이니, 이것으로 적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비답하기를, 이 이야기가 한번 전파되면 백성들이 동요되는 사단에 크게 관계가 되는 것이고 연교(筵敎)에서 이미 다 하유하였다."
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1월 2일
외세 침략을 격퇴한 점에선 고려를 조선보다 높이 평가하는 의견이 많다. 이는
거란의
3차례의 침략을 시작으로,
여진 정벌,
산업 혁명 이전에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를 확보했던 국가였던
몽골 제국에 맞서 쉽게 무너지지 않은 점 때문이다. 또 고려 말에는 서쪽에서는
원나라의 군벌들과 군대, 명나라의
홍건적이 북쪽에서는
여진족들이 끊임없이 남쪽에서는
왜구까지 공격해왔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 격퇴하였다.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1월 2일
고려는 외침의 횟수도 조선보다 전반적으로 많았는데, 결과와 평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칭 | 결과 | 평가 |
여요전쟁 | 승리 | 긍정적[47] |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 섬멸 | 복합적[48] |
여몽전쟁 | 패배 | 부정적[49] |
카다안의 침입 | 섬멸 | 복합적[50] |
홍건적의 침공 | 섬멸 | 복합적[51] |
나하추의 침공 | 격퇴 | 긍정적[52] |
기황후의 공격 | 섬멸 | 긍정적[53] |
고려 말 왜구의 침입 | 격퇴 | 부정적[54] |
호발도의 침입 | 섬멸 | 긍정적[55] |
(
거란의 침입은) 고려판
병자호란이었거든요. 초반에 실수도 있었죠. 처절한 패배도 있었고. 하지만 고려는 침착하게 대처해 나갑니다. 침착하게 제도를 정비해 나가고. 중요한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더 중요한 건 이 이후, 고려와 요나라, 송나라 간의 삼강 체제가 확립된다는 겁니다. 고려는 (귀주 대첩 이후) 120년에 달하는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죠.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 ##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 ##
"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
《 금사》 외국열전 고려조 천회 2년(1124년)
특히 거란전의 승리는 고려의 국격을 높여 이후 이어지는 황금기의 밑바탕이 되었고,
고려의 여진 정벌은 신흥 강국
금나라한테 고려가 대군을 동원할 역량이 있는 만만치 않은 나라라는 인식을 줬으며[56], 몽골에게 항복했을 때는
원종이 외교 감각을 발휘해 자치권만큼은 지켜냈다. 고려와 싸웠던 국가들의 국력을 감안하면, 고려로서는 최악의 전쟁이었던
대몽항쟁조차도 상당한 선방을 거둔 셈이었던 것이다.《 금사》 외국열전 고려조 천회 2년(1124년)
12.1.2. 조선
반면 조선은 세종대왕 시절에 4군 6진을 개척하였고 이후 임진왜란에선 승리하긴 했지만 그전까지 있던 방어전에 있어서 쉽게 정복당하지 않는 강국이라는 평가를 죄다 깎아먹고 명나라 군의 참전으로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명, 청 교체기에 명나라에 이리저리 끌려다녔다.[57]병자호란은 외교적, 군사적으로 온갖 실수를 반복하다가 청나라에 처참하게 패하다가 삼전도의 굴욕으로 대미를 장식한 패전이었다.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의 행적으로 암군으로 평가가 떨어졌고, 인조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보면 답이 나온다.[58]
임진왜란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던 조선을 두고 "고려는 전 아시아를 제패했던 거란과도 대등하게 겨뤘는데 조선은 수도를 잃고 밀려났다"고 평가하는 기류가 잦은데, 결론부터 말한다면 틀렸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방어선 설정을 확실히 했고, 실제로 물리적으로 섬멸된 군대는 탄금대 전투에서 무너진 기병전력이 전부였으며, 선조는 정부 요인과 행정체제를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파천했다. 반면 2차 여요전쟁 당시의 고려는 글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30만의 군대가 대회전으로 크게 패했고 정부는 와해되었으며 현종은 개경이 떨어지기 직전에 말도 못 타고 혈족 몇과 호위병 40여 명 정도만 거느린 채 왕후의 고향인 나주까지 몽진을 떠나야 했다.[59][60]
또한 임진왜란기에 조선이 맞닥뜨린 일본군은 여요전쟁기의 거란의 위상보다 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군은 본대 17만에 예비대 13만, 각종 치중병을 합쳐 40만에 육박하는 군대를 집결시켰고, 2,300여 척의 병선과 수천 필의 군마, 그리고 최소한 3만 정에 이르는 조총으로 무장한 군대를 일시에 투입할 힘이 있었다. 당시 지중해 최강이었던 오스만 튀르크가 전군을 총동원해도 15만을 넘지 못했고, 명나라가 보유한 군선은 포작선이나 거룻배까지 합쳐도 천 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 병력들 역시 단순 징발병이 아니라 절대다수가 아시가루로 전국시대로 단련되어 백만대군을 동원했던 수 양제의 어중이떠중이 다 긁어모은 군대와 질적인 궤를 달리했다.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일본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엄청난 국가였다. 당시 일본의 총생산은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갔고, 인구는 2,000만에 이르러 중국, 인도, 오스만 튀르크 외의 어떤 국가도 일본보다 체급이 크지 않았다. 오다 노부나가 이래 확대된 일본의 무역 규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분적인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이미 당시 명나라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동원한 일본군은 과장 없이 몽골 제국 이후 동북아 역사상 최강, 최대의 군대였으며, 단순히 그 전력의 수준과 국력 격차만 놓고 본다면 사실 조선은 밀리거나 고전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몇 달 만에 전토가 박살나고 굴복했어야 했다.[61]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그 이전 고려가 경험한 적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북방으로부터 10만 규모의 군세가 쳐들어온다 해도 이들은 보급 문제로 인해 작전 수행 기간이 1년 남짓에 불과하지만, 일본은 경상도 해안에 왜성을 쌓고 무려 7년을 버텼을 뿐만 아니라 정유년에는 재북진으로 한성을 재차 위협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수년에 걸쳐 우리 영토에 주둔하며 전시체제를 강요한 사례는 나당전쟁(만6년)과 몽골의 3차 침입(만4년) 뿐이다.[62] 심지어 이걸 바다를 건너 유지하고 당대 패권국이던 명군의 직접 개입에도 버텨내기까지 했음을 본다면 이런 미증유의 재난에도 국체를 유지한 원동력에 더 집중해야 할 판이다.
또한 저 엄청난 전력을 끌고 온 일본군 역시 조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전과가 한국 넷상에선 좀 과대평가 당하는데,[63][64] 실제 당시 일본군의 전과는 상술한 엄청난 전력을 고려한다면 졸전에 가까웠다.
조선은 초반인 2개월 ~ 3개월만 고생했지 바다에서 어느 먼치킨이 무쌍을 찍고,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관군도 전열을 재정비하여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는 등 서서히 일본군을 몰아내며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보다 많은 인구, 전국시대로 단련된 15만 이상의 대군, 신무기 조총 등의 우세가 있었지만 조선도 수준 높은 행정력, 홈그라운드의 이점, 꾸준히 발전된 막강한 화력이 있었기에 무조건적으로 일본에 불리하지 않았다.[65][66][67] 게다가 원의 간섭 때문에 행정도 막장에 북방에서 계속 외침에 시달리다 보니 만 단위 왜구한테 털렸던 고려 말기와는 다르게 조선은 당시까지만 해도 내치에선 후일 목릉성세라 불렸던 안정된 시기였고, 당시 동아시아권의 강대국인 명의 지원도 있었다.
그래서 조선은 분명 국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신을 천대해서 무신정변까지 겪은 고려와 달리 무과를 실시해서 무관을 어느 정도 대접을 했고, 화약 무기 개발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왜란이든 호란이든 전쟁 대비에도 나름 열심히 노력했다. 거기다 조선이 마냥 평화롭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틈만나면 쳐들어오는 여진족을 대비해야 했으며 니탕개의 난, 왜란과 호란 같은 대규모 외침을 겪으면서 군사적 폐단을 고치려는 시도도 해봤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천, 지, 현, 황 등의 각종 화약 무기들과 판옥선의 발명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크게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고 비격진천뢰의 발명은 일본군에 점령된 경주성을 탈환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문종 때 개발된 화차는 행주 대첩 때 큰 활약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조선은 비록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승리하여 왕조를 300년 더 유지했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군이 고려군과 달리 막상 실전 상황에서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같이 시궁창인 경우가 많은 게 문제였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 크게 두드러지는 것이 군사 반란을 두려워한 중앙 정부의 과도한 지방군 통제와 안일한 군사 운용이었다. 특히 제2의 이성계가 등장하는 걸 막고 싶었던 조선은 왕실과 조정이 대군의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변방에 있는 걸 용납하지 않았기에, 제승방략 같은 허점 많은 제도를 운용하며 고치지 않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철저하게 박살난다. 물론 감사나 병사가 지방의 대군을 모아서 근왕군을 꾸리기도 했지만 이들은 그냥 자기 도내의 수령들을 모은 것에 불과했기에 지휘 체계도 일원화되지 않았고 손발도 전혀 안 맞았다. 이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조선군이 패전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한 실책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와 달리 대군을 제대로 지휘할 역량이 부족했다. 조선군 대부분은 하급 지휘관이 없거나 숫자가 매우 부족했다.[68] 전 왕조인 고려가 중앙군과 양계의 진에 중랑장부터 대정까지의 하급 지휘관들을 군대의 규모에 맞게 배치했고 이들은 효과적으로 외적과 싸워 이겼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고려보다 퇴보한 셈이다. 하급 지휘관이 없다보니 대군이 모이면 제대로 통제가 안되었고, 아예 적을 앞에 두고 일부가 겁 먹고 튀기 시작하면 군대 전체가 그냥 붕괴되어버렸다. 그 결과가 용인 전투를 비롯한 임진왜란 초 지리멸렬한 전투들이다.
그 후에도 병자호란 전에 야심차게 군제를 개혁해서 전국 각지에 군영을 두고 하급 지휘관도 대대적으로 보충하지만, 그마저도 이괄의 난이 터지면서 망해버렸다. 이괄의 난 이후는 장만과 정충신을 홀대하고 김자점을 중용한 인조의 인사 실패로 전쟁에서 참패하면서 모처럼의 군사 개혁은 흐지부지해졌다. 그래도 완전히 무의미했던건 아닌게, 병자호란 당시 조선 육군의 질은 임진왜란 때보다는 훨씬 우수했다. 쌍령 전투의 임팩트 때문에 묻혔지만[69] 김화 전투와 광교산 전투에선 승리를 거뒀고, 다른 지역군도 패배하긴 했지만 그냥 무너진 게 아니라 제법 치열하게 싸우고 무너졌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조선 인조의 경우가 문제였는데, 조선의 선조나 앞전 고려의 현종처럼 일찍이 피신하여 뒷일을 도모하는게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고는 하지만 청군의 진격 속도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보다 훨씬 더 빨랐다는게 문제였다. #1 #2 청군이 한양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에 파발이 당도해서 인조가 도망갈 시간이 없었다. 물론 선조가 한차례 몽진을 해서 민심이 나빠졌고 국경인의 난이 터졌다는 점에서 보면 반란의 위험이 컸고, 적군에게 사로잡힐 위험성이 제법 컸다. 그리고 인조가 무리하게 실권을 되찾는 것보단 고려의 고종이나 조선의 중종처럼 나가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몰랐다. 대신에 이로 벌어질 반란이나 정치적 격변기가 더 앞당겨질 가능성이 크다는게 함정이다.
또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면, 고려가 확고하게 밟아 이겨서 패퇴시킨 거란의 경우 끝까지 중국 전체를 통일하지 못했다. 반면 조선을 굴복시켰던 청나라는 중국 전체를 통일하는 것도 모자라 천하의 몽골족까지 복속시키고 300년 가까이 영위되었던 건실한 국가였다.[70] 병자호란은 거란의 침입보다는 몽골의 침입과 비교해야 할 정도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강화도로 넘어오지 못한 몽골과 달리, 청나라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이었던 조선 수군을 철저한 기만작전과 기상을 사용해 완전히 농락하며 강화도를 무너뜨렸다.[71]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분명 조선이 고려가 거란을 상대로 화려한 전과를 거두었던 것에 비해 일본이나 청을 상대로 통쾌한 승리를 거둔 것은 비교적 없다.[72] 그러나 총론적으로 보았을 때, 조선은 당대 동아시아 최강이었던 일본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그 여파로 일본의 막부가 갈아치워질 정도였고, 비록 청을 상대로는 오래 항전하지 못하고 항복했지만 원의 간섭 체제 때와 달리 묘호도 자유롭게 사용했고, 청의 신신당부를 무시하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등 자주권을 충분히 지켰다.
조선도 초기시절인 태종 ~ 문종 때에는 군사력이 꽤나 강할 때였고[73] 세조 시절에는 군사가 무려 43만이나 되었던 데다가 그중에서 활을 쏘는 병사는 30만 정예는 10만에 용맹한 군사는 3만[74]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또한 20만 대군을 모았던 공민왕 시절 고려 때보다 농업 생산량도 높았던 초기 조선이 그때보다 국력이 위축되었을 가능성도 적고, 이시애의 난 진압 과정을보면 조선 초기때는 훗날 임진왜란 시점에 비해 조선군의 군기가 살아 있었다. 만약 초기 시절 대규모 외침이 있었다면 조선군도 여수전쟁, 여당전쟁 당시 고구려나 여요전쟁 당시 고려처럼 강한 모습을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조선 초기에는 무려 32만이 넘는 병력이 동원되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75]
게다가 조선만이 군사력의 약화가 특이하게 나타났다는 주장은 성립이 안되는데 이는 바로 직전 왕조인 고려 또한 고려 중기 즉, 무신정변 이후로는 국가의 파탄과 조정의 무능함이 겹쳐 여몽전쟁 당시에는 겨우 최대 3만명 미만의 몽골군들에게 온 국토가 수십년 동안 초토화되었고 이후에도 군사력을 회복하지 못해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에도 비정규군인 왜구들에 의해 온 국토가 수십년 동안 초토화되는 등 이전 왕조인 고려에게서도 초기 이후의 중-후기의 국방력의 약화는 똑같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고려 말에도 공민왕 시절 10~20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자 고려군도 20만 대군으로 물리쳤다는 반론이 있는데 당시 고려군 20만 역시 과장된 기록이거나 설령 사실이어도 대부분은 그저 급하게 머릿수만 채운 농민 징집병 즉, 오합지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은것이 자체적으로 20만 정예 대군을 양성할 수 있는 나라가 왜구들과 홍건적에게 국토를 그토록 유린당했을 리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저 머릿수만 채우는 것이라면 임진왜란 시기 조선도 용인 전투 직전 단기간에 수만 병력을 뽑았다.
이런 군사력 약화는 무신정변 이전에도 조짐이 있었다. 당장 묘청의 난만 봐도 고려의 여진 정벌로부터 30년이 지난 시점이라 아직 고려 정규군이 건재하던 시점임에도 묘청이 죽고 포위된 서경성 하나를 토벌하는 데 무려 1년이 소요되었다. 무신정변 이후 벌어진 조위총의 난 때에는 아예 반란군이 개경 인근까지 내려왔을 정도다. 애초에 고려 조정이 군을 제대로 관리하고 대우했다면 무신정변 같은 게 벌어졌을 리도 없고, 국가 행정을 맡아야 할 문신들이 도륙당했는데 군대만 독야청청 멀쩡히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조선군의 문제점이라고 지적되는것들은 알고보면 조선이 영향을 많이 받은 명나라도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이라 조선에게만 뭐라하는것도 부당한 면이 크다. 당장 조선을 비웃은 명나라만 해도 토목의 변에서 대군을 동원하고도 2만의 몽골군에게 참패하여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으며 1555년에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했을 정도로 처참했다. 출처: https://www.instiz.net/pt/6009168?frompc=1[76] 게다가 명나라도 조선처럼 장군들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지나칠 정도로 심했으며[77] 황제들과 대신들이 군사적 역량이 모자라는데도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장수들에게 무리한 전쟁을 강요했다가 토목보의 변, 정난의 변, 송산 전투처럼 우세한 상황인데도 열세인 적군에게 참패하는 참사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또한 왜구가 가장 활개를 치던 1555년 명나라는 고작 72명의 왜구들을 한명도 죽이지 못하고 900명이 전사하기도 했는데 동시기 조선은 제주도에서 벌어진 2차 을묘왜변때 74명으로 13배가 넘는 1000명의 적을 무찌른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다.[78][79]
또한 국난을 극복하는데는 지도자의 역량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당장 여요전쟁도 당시 지도자가 현종(고려)이었기에 극복할 수 있었던 점도 크다. 반면 카다안의 침입 당시 충렬왕이 보여준 행적은 선조(조선)보다도 훨씬 미흡했으며 만약 현종(고려)가 아니라 충렬왕이 2차 여요전쟁 당시 국가 지도자였으면 고려는 그때 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12.2. 원정
12.2.1. 고려
예종의 여진 정벌이나 공민왕의 요동 정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고구려 계승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대외원정을 나갔을 정도로 고구려 계승 의지는 고려의 건국 이념이자 치세 내내 매우 중시되는 사항이었다. 이것 또한 후대에서 조선과 평가가 갈리는 이유 중 하나이다.고려의 영토 확장 의지를 막연한 이상만을 위해 실시했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압록강 일대는 여요전쟁에서 유리한 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한 지역이었고 고려의 여진 정벌은 금나라의 침략에 대한 예방 전쟁의 성격도 겸했으며, 고려의 요동 정벌도 원명 교체기라는 현실적 여건을 참작한 무력 행사이기도 했다. 고려는 조선에 비해 자국에 유리한 조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으며, 여기에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부가한 것이었다. 즉 고려의 북진 정책은 고구려 계승 의식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며, 고려가 영토 확장에서 현실적 여건을 완전히 배제하고 공격만을 외쳤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고려의 대외 정복활동에 대한 결과와 평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례 | 결과 | 평가 |
강동 6주 점령 | 성공 | 긍정적[80] |
고려의 여진 정벌 | 실패 | 부정적[81] |
요동정벌 | 실패 | 복합적[82] |
고려의 여진 정벌은 17만의 대병력을 쏟아붓고도 지휘부의 오판과 무능으로 인하여 결국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1896년의 13도 체계를 기준으로 평안북도[83]와 함경남도 그리고 함경북도는 조선시대 때 4군 6진을 개척하기 전까지 모두 야인들의 영토로만 남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려의 요동 정벌은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긍정적으로 주장하는 것과 달리 근본적으로 가치 없는 싸움이자 어떤 학계 중론도 인정하지 않는 무모한 전쟁이었다. 세 명이나 되는 각각 다른 학교의 역사 교수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영상. 애초에 요동 정벌 자체가 직접적으로 요동을 점령하여 자기 땅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던 것이 아니라, 명나라에 대한 벼랑 끝 전술과 같은 외교전략이었다는 것이 201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 학계의 중론이다.
다만 원정이 민중을 고난하게 하며 지도자의 그릇된 이상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모든 원정이 그러한 야욕에서만 비롯된다고 전제할 수는 없다. 원정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감행하는 이유는 감수할 만한 분명한 국익이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그 원정으로 인해 그 자손들이 더욱 부유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고려의 요동 정벌은 결코 수 양제나 풍신수길의 침략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12.2.2. 조선
조선은 고려에 비해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물론 세종 시절에 4군 6진을 개척하기는 했지만 맞닿아있는 나라라고는 조선에서 떠받들던 명나라뿐이었고,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조선이 군사를 강성하게 기르지 못하도록 군마(軍馬)를 요구하는 등 견제를 가했다. 군사적 열세를 인정하고 문화적, 외교적 실리를 얻으려 한 조선이었지만 문제는 이런 조선의 대(對)명 외교가 명나라가 세가 기울자 조선의 국방이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조선이 대외 문제로 인해 가장 많이 무력(武力)을 행사한 일은 오늘날 만주 지역에 살던 여진족에 관한 일이었다. 당시 여진족은 조선 입장에서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아야하는 잠재적 위협이었고, 여진족이 북방의 조선 백성들을 노략질하기도 하였기에, 조선은 노략질을 위해 남하한 여진족을 격퇴한 것 이외에도 예방전쟁적 측면으로 여진족 마을과 부족을 습격해 소탕하기도 했다.조선은 고려 때와 달리 과거에서 무과를 시행하는 등 고려보다는 무관들을 더 대우해주고 무관(武官)을 좀 더 중시하는 행적을 보였으나, 무관들에 대한 통제를 중시하던 송(宋), 명(明)의 제도를 본받고 실정에 맞게 고쳐 쓰고자 했으며, 전반적으로 무(武)를 문(文)보다 천시하는 나라였다. 물론 무신정변의 사례에서 알 수있듯이 무(武)를 천시하던 경향은 고려가 조선보다 좀 더 심하기는 했었으나, 잦은 외침으로 인해 고려 군사들의 기강과 실전 경험이, 오랜 평화를 유지해 지방의 군사체제가 허술했던 임진왜란 초기와 이괄의 난 등의 영향으로 북방 방어선이 붕괴되어 있었던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 군사들과 비교하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4군 6진을 개척하며 군사적 자주성을 과시하던 조선 초기와 달리 임진왜란 초기와 병자호란 때의 좋지못한 행보를 보이며 후대에 이 부정적인 인상이 단단히 박힌 조선은, 당시 동아시아 패권국들을 상대로 대첩을 벌여 외교적 위상을 높히고 자주성을 지켜낸 고려와 더욱 비교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도 충무공 이순신같은 불세출의 영웅들이 있었으며, 나선정벌 당시 청나라도 조선의 조총 부대를 높게 평가한 것 등을 생각하면 조선시대의 외침 극복, 군사적 행보는 고려 때와 비교할 때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런 경향은 백성들의 저항( 의병 활동)과 군인들의 결사 항전이 저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고려 현종과 조선 선조[84]의 행적이 너무 대조됐듯 당시 군주와 지배층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써 말미암은 것이 크다.
선조실록에까지 사신( 史 臣)에 의해 직접 기록된 "우리나라가 일본에 대해서는 만세 불공 대천의 원한[85]이 있다. 그러니 하루라도 복수할 것을 잊는다면 이는 조종(祖宗)을 하루 잊는 것이다.[86]"라는 표현과 조선 사대부들의 격양된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치욕을 겪은 조선에서는 일본을 정벌하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일본 에도 막부의 창건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힘쓰고 조선 내 체제 정비 문제와 후금(훗날의 청나라)의 위협 문제로 인해, 조선은 광해군 시기에 일본과 기유약조를 체결해 국교를 재개하고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17세기 초에 여진족이 만주족을 자칭하고 세력을 규합해 후금을 세우고, 머지 않아 청(淸)을 국호로 하여 조선을 침략( 병자호란)한 이후 조선에서는 효종 치세에 북벌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청나라의 중국 대륙 지배가 확고해지자 민생(民生)을 우선으로 두기로 하여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강희제 당시 청의 국력과 위세를 생각하면, 전쟁으로 체제가 붕괴된 조선 입장에서 청을 치는 것은 당연히 재검토하고, 숙고할 사항이었다.
12.2.2.1. 조선의 대외 무력행사에 소홀했던 것은 비판점인가?
12.2.2.1.1. 그렇다
혹자는 어떤 나라가 전쟁을 일으켜 땅을 빼앗는, 혹은 획득하는 것을 " 침략"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 정벌"이라 말하며, 진출, 침공, 난(亂), 변(變) 등 전쟁을 시작한 사람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다양한 입장에 따라 같은 전쟁 행위도 많은 단어로 정의되었다. 이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무력 충돌에 앞으로 더 나은 인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윤리적 비판과 직결해있다.그러나 오늘날은 국제법이 확립된, 과거와 완전히 다른 사회다. 오늘날 국제질서의 체계성과 국제법으로 드러나는 성문화된 규율은 과거와 같게 견주기 어렵다. 그렇기에 조선의 영토 확장 문제를 현대 기준의 침략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조선이 영토를 확장하는데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을 고려해야함과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는 말은 백번 옳으나, 주변국들이 대외 원정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는 반면 조선이 대외 원정,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고, 못해서[87] 한번도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지 못했다는 점은 후대에 부정적으로 여길 수 있는 사실이다.[88]
12.2.2.1.2. 아니다
정복활동으로 인한 소수의 장점만 바라보아서는 부족하고, 그 부작용에 대해 두루 살펴보아야 한다.- 어차피 정복활동도 쉬이 정복할 땅이 있어야지 그런 곳도 없으면 다 소용 없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개척사를 보면 우연히 발견한 아메리카는, 철기시대도 못 이뤄 대규모 개간도 못해 인구도 적고 가축이라는 원시적 기계도 없어 문명의 이기도 적고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없는 토착 문명만 있어서, 비싸게 군대 원정 갈 필요 없이 유럽 대륙 귀족들의 착취, 종교 탄압, 그걸 타파하려고 반란을 일으키다 실패한 패배자들과 하층 민간인들이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점령가능한 땅이, 대륙 단위로, 그것도 2개씩이나 있었다. 콜롬버스가 도착한 곳이 정말 본인이 가고 싶었던 인도였다면, 서인도제도에서 사람들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버리는 짓을 데칸 술탄국, 바흐마니 술탄국이 위치한 남인도나 로디 왕조 체제의 델리 술탄국, 구자라트 술탄국, 말와 술탄국이 위치한 북인도, 벵골 술탄국이 위치한 동인도에서 그대로 했다간 본인이 범죄자로 체포되어 노예[89]로 부려먹히거나 처형되었을 것이다.
- 조선은 정복이 아니라 향화인 이라고 다른 방식을 썼다.외국인이 한반도로 평화롭게 이주해서 나라의 법도를 따르고 사는 건 수천년 동안 잃어났던 일이다. 신라시대 때 중동 혹은 서역 출신의 상인이 귀화한 경우나, 일본 전국시대를 피해 투항한 항왜나, 명청교체기의 혼란을 피해 한반도로 이주한 중국인들이거나[90], 난파된 뒤 외인부대장으로서 만주족과 싸우고 조선인으로 인정받거나. 그리고 이 사람들은 아무 문제 없이 동화되어 살고 있다.
- 이 문제에 있어 조선에 대한 비판은 애초에 고려의 북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일종의 오해 내지 환상에 바탕을 두는 모습을 보인다. 고려의 북진은 언제나 상대 북방왕조의 통제권 바깥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암묵적 혹은 명시적 동의 하에서 진행되었지 상대 북방왕조를 정면으로 들이받으며 진행한 것이 아니다. 즉 강동6주나 동북9성의 경우는 내몽골 지역에 근거지를 둔 거란 입장에서 통제하기 힘든 압록-두만강선 이남에 대해 고려의 통제권을 용인(혹은 묵인)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거란과의 전면전으로 획득하거나 한 게 아니다.[91] 공민왕대 철령 이북 동북면에 대한 북진과 요동 공략도 어디까지나 원제국의 붕괴 국면에서 나하추나 기사인테무르 같은 이 지역 군벌들과의 싸움이었지 몽골 중앙군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즉 고려든 조선이든 한반도 국가에게 허용된 북진선은 해봐야 압록-두만강선이었고, 그나마도 동북면-동만주 기반의(즉 더 이상 고려의 북진을 용인할 수 없는) 금나라가 들어서자 고려의 북진은 딱 멈춰선 것은 물론이요 아예 쌍성과 탐라총관부는 대놓고 원의 직할령으로 뜯기기까지 했다. 반면 조선은 요동까지 장악한 통일제국 명나라 체제에서도 압록-두만강선까지의 북진을 완수했고 이는 공민왕 이후 고려의 북진영토에 맞먹는 규모다. 여기서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한다는 것은 명/청과의 전면전을 치르라는 소린데 이게 가능한 이야기인지는 제3차 요동정벌 문서에서 자세히 검토하고 있다. 사실 검토할 것도 없이 고려는 통일왕조도 아닌 북방왕조 상대로도 엄두도 못 냈던 일이다.
- 토벌활동과 정복활동은 같은 게 아니다. 수십년 동안 변경을 들락날락 거리면서 백성을 납치하고 죽이고 다니는 도적들을 토벌하는 건 정복 활동이 아니다.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식민지 개척에만 심혈을 쏟으면서 수백년 동안 자국민 납치해가는 바바리 해적에게는 공식적 조약 맺고 주기적으로 자기나라 배는 좀 봐달라고 상납금 냈던 시기가 있었고 결국에는 19세기 초 유럽도 아니고 대서양 건너 미국 해병대가 솔선수범해서 파괴했다. 조선이 고려와는 차원이 다른 중앙집권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전기조선 2세기에 걸쳐 별 다른 대규모 전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기 고려가 성종 대 12목 설치 이후 수십년간 지방통치 체제를 강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현종의 그 피난길 수난사를 겪게 된 가장 큰 이유가 1차 여요전쟁으로 인한 국방비 폭증이었고, 끝내 그 재정 부담을 해결하기 위한 미봉책으로 반란까지 터지고 말았다.
당장 조선으로서는 꼭 필요했던
4군 6진 개척때만 해도 백성들은 엄청난 피눈물을 흘려야했다.
당시 백성들이 피눈물을 흘려도 장기적인 국익만 있으면 괜찮다는 식의 주장은 크게 잘못됐다. 더구나 대외 원정을 통한 영토 확장이 장기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다.
4군 6진 개척만 해도 백성의 고통이 이 정도인데
민본주의 사상을 중시한 조선을 땅 더 안 넓혔다고 폄하하는 것은 당시 시대 상황과 백성들의 눈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조선의 상황에서 만주 등에 관한 대규모 대외 원정은 무리한 것이었으며, 대외 원정을 벌일 여유가 있었더라도 조선의 지배층들은 왕조를 안정적으로 이끄는 것과 백성들의 삶을 지키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기에, 대외 원정에 국력을 쓰고 싶지 않아하는 경향이 짙었다.
게다가 고려가 북진 정책을 펼칠 당시에
만주는 원•명 교체기로 한창 혼란한 상황이었는데, 조선 시기에는 강대한 통일 왕조인 명나라나 청나라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 원정을 함부로 펼쳐봤자 곧바로 중국 측의 견제가 들어올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92] 영토를 확장해서 패권을 차지해봐야하지 않겠냐는 것도 너무 지나친 생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훗날 온갖 외세의 압박에 조선이 시달린 것은 대외적인 문제 대처와 내치(內治)를 제대로 못해서지, 세력 확장을 못해서가 아니다.
일단 무리한 원정은 백성들에게 고통만을 안겨주며, 정치 체제에도 큰 위협과 불안정성을 준다.
수양제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이를 생각해보자. 무리한 대외 원정을 벌인 영향으로 세력이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토를 획득하기 위한 원정은 어떻게 미화, 포장하더라도
침략 전쟁이다. 일본을 예시로 들자면, 메이지시대 당시 일본은
정한론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을 정벌하자며 온갖 핑계로 그들의 "정벌"시도를 합리화했지만, 그 본질은 한국을 강제 합병, 정복하여 영토를 넓히기 위한 침략적 행위 지향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영토 확장을 위한 대외 원정이라는 침략 전쟁을 안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을 책망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종종 고구려의 정복전쟁을 들어 조선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경우도 보이는데, 조선과 달리 애초에 고구려는
전쟁 자체가 경제 활동이었다. 조선이 고구려처럼 되고자 했다면 농경이 아니라 대규모의 목축을 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규모 목축으로 주변국을 약탈하고 정복하며 깡패처럼 군림했어야 하는데, 자기들 먹을 것도 없어서 약탈로 눈을 돌린 여진족들을 약탈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대규모 기병으로 어떻게 일본을 약탈할 것이며, 그렇다면 북방으로 진출해 중국을 약탈하다가 고구려가 그랬듯이 격노한 중국왕조가 1억에 이르는 중원의 인구를 쥐어짜서 백만 대군을 몰려보내는 꼴을 봐야 한다. 전쟁을 대하는 가장 현명한 태도는 전쟁이 터지게 방치해놓고 싸워서 이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전쟁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 천하의 고구려가 망한 것도 결국 전쟁으로 망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은 당대 세계 총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던 거대국가를 앞에 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팽창정책을 취한 것에 가까웠다.
12.2.2.2. 조선의 예방전쟁 성과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극균이 아뢰기를,
"들으니, 올적합(兀狄哈)[93]은 항상, ‘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94]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평안도 도원수 이극균을 인견하다. #[95]
특히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군이 중점으로 뒀던 토벌전만 놓고 보면 명나라와 비교해도 조선군의 전과는 나쁘지 않았다.[96]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군의 5분의 1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군보다 병력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으며[97], 예상치 못했던 럭키샷이 터져 예전부터 골칫거리였던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조선군이 직접 죽여 복수하기도 했다.[98] 조선군이 건주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가
세조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99]"들으니, 올적합(兀狄哈)[93]은 항상, ‘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94]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평안도 도원수 이극균을 인견하다. #[95]
13. 국교
후대의 국가인 조선에서는 성리학에 기반하여 건국된 국가인 만큼 고려의 멸망 원인을 조선 시대에는 전적으로 불교에서 찾았으며 경연에서 국왕에게 고려사를 강독할 때면 거의 모든 결론이 '그렇게 고려는 바로 그 불교 때문에 망했습니다'식의 기승전불로 끝났다. 당시 불교는 성리학자 입장에선 타파해야 할 것, 낡은 시대의 유물 같은 것이었으며 그에 기반한 고려도 낡은 국가, 개혁해야할 국가로 여겼던 것이다. 즉 유교(성리학)를 현대의 관점에서 타파해야할 것으로 여기듯이, 당대의 불교는 현대인이 유교를 보는 시선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예외로 조선 7대 왕인 세조는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고 하며 그때 지은 절이 지금은 터만 남은 원각사. 또 조선의 4대왕 세종 역시 말년에 불교에 심취해 경복궁 내에 불당인 내불당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물론 조선의 불교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이 결코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는데, 고려는 특히 말기로 갈수록 부패한 승려들의 백성 착취와 각종 불교 행사들을 위한 과세 등으로 백성들의 원한을 강하게 사고 있었다. 신진사대부 세력이 유교를 떠받들며 불교를 미워했던 것도 다 그 때문.
종교나 사상의 자유를 보자면 불교를 국시로 삼으며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활용하고 무슬림의 이주도 신라 때처럼 수용했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주자학을 받들고 연구하면서 다른 학문은 홀대하는 경향이 후대로 갈수록 심해졌다. 불교의 폐단을 문제 삼아 권력에서 멀어지게 하고 선과나 도첩제를 아예 없애면서도 서원 건립은 날로 증폭되고 사문난적이라 해서 비주자학을 배척하는 등 성리학이 새로운 교조적 구악이 될 수 있음을 고려치 않았다.
14. 인구
일단 대략적인 추론을 싣자면 고려의 경우 12세기 즈음에 대략 500만 명 정도로 추정이 된다고 하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전성기 고려의 인구를 1000만 명 가까이 육박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실 고려가 한참 전 시대인데다 고려역시 많은 기록물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몽전쟁으로 인해 많은 문화재와 건축물, 기록물들이 소실되어 남아있는 것이 많지도 않은 탓에 정확한 인구 추산에는 어려움이 있다.조선의 경우에도 학자마다 다르긴 하나 중종 시기에는 약 1000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구한말 시기에는 1600만명 ~ 170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100]
어찌되었든 조선시대에는 오랜 평화와 낮은 세율, 농업 기술 발전(농업 생산량 증대)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조선의 인구는 14세기 말 약 5,500,000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18세기에는 약 18,700,000명으로 전근대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3배가 넘게 인구수가 말그대로 폭증하였다. 서기 2020년이 된 지금에도 전 세계에서 국력의 펀더멘탈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인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101]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당시 조선의 인구 밀도는 중국, 이집트,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제일 높았으며, 인구의 절대적인 수치 역시 순위권이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높은 인구 부양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1]
다만 고려도 국력이 약화된 후기에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고,
카다안의 침입 당시
쿠빌라이 칸에게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는가?"라고 디스당했다.
[2]
다만 이 국제교역은 지배층들 사치품을 대기위한 관무역위주로 발달한 것이라 일반백성들의 삶과는 큰 관련이 없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3]
다만 당시에는 아시아 국가중에 식민지 신세를 면한 나라가 거의 없다는 것과 조선도
광무개혁등 근대화를 위한 시도 및 막판에 고종이 정신을 차리고 나라를 뺏기지 않기 위해 본인 나름대로 동분서주 하긴 했다.
[4]
정작 그시기에는 과거 강성한 모습을 보여줬었던
명나라,
청나라도 온갖 추태를 보여주며 몰락해가던 시기였기 때문인 것도 있다.
[5]
서구권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임진왜란 시기까지 조선을 고려로 불렀고 이후에 발흥한 청 역시도 한동안 고려로 불렀다. 다만 명의 경우에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승인했기 때문에 경우가 다른데, 봉금정책에 의해 한족이 19세기까지 정착하지 못했던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을 고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6]
다만, 고려라는 국호를 계속 쓴 것은 고려의 임팩트도 물론 있었지만
고구려의 영향 또한 지대했다. 송나라에서 고려의 역사를 개략할 때 "본래 국성이 고씨인데 이후 왕씨가 덕이 있어 물려주었다"고 적었고, 쿠빌라이 칸 역시 "당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한 막리지의 나라가 종복했다"고 말했다. 즉 당시 중국왕조의 보편인식은 자신들이 고구려를 멸망시켜 없애버린 뒤 그 정통성을 따라서 세워진 나라라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라는 국가가 자신들의 공격으로 중간중간 흔들렸을 뿐 고구려-발해-고려로 그 국체를 실효적으로 유지해 갔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이"라고 하면 중국이 곧 고려를 떠올리는 것은 단지 고려가 조선으로 이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전에 백만대군을 물리친 임팩트를 가졌던 고구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7]
특히 왕권의 혼란으로 인한 정부의 방치 및 능력 부족으로 심화되었다.
[8]
뿐만 아니라 정말로 조선이 고려보다 국가재정이 빈약했을지는 의문을 표하는 의견도 분명히 있다. 또한 고려에서 표준으로 쓰는 석(15말)과 조선에서 표준으로 쓰는 석(20말)이 달랐기 때문에 단순히 곡식의 석값만 가지고 따지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통일해서 본다면 요동성 하나에만 50만 석의 곡식을 쌓아두었고 그런 성을 300개 넘게 거느리고 있던 고구려는 한민족 역사상 최고로 부유했을 뿐 아니라 후대의 송나라나 명나라를 압도했던 나라가 되어버리는데, 물론 실제로 고구려의 경제 규모가 당시 중국왕조의 기준에서도 경악스러울 정도로 강대했던 건 사실이고 고구려의 경제 규모가 후대의 고려나 조선과 대등 이상이었다고 보는 학자도 분명히 있지만, 어쨌든 절대적인 국부에서 고구려가 고려나 조선을 능가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전근대의 도량형은 값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기이한 수치의 차이가 날 수 있다.
[9]
이러한 매관매직, 세금에 대한 착복 등 망국적 상황에 대해서는 19세기부터 쓰여진 외국인의 지방 여행기를 보면 실감나게 다가온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록들은 소위 가진자들에 의해 쓰여져 민생을 정확히 반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0]
이는 조선이 모방한 국가인 명나라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가지게 된다.
[11]
이들이
천민인지 양인인지는 논쟁이 있다. 최근에는 이들이 국가에 각종 역을 부담했기 때문에 양인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조선 시대
백정들도 법적로는 양인이었으나 실질적인 대우는
천민이었기에 일반적으로
천민으로 분류되듯이 향소부곡민들도 법적으로는 양인일지 몰라도 실질적으로
권리는 없으면서
의무만 많았기에 대우는
천민과 다를바 없었으니
천민으로 봐도 틀린건 아니다. 특히 무신정권 시기에는 향소부곡민들도 불만이 커져 민란을 일으키는 일이 많아졌다.
[12]
노비는 면천받아 양인이 될 수도 있으니 계급 이동까지 따지면 더 낫지 않냐는 말도 있지만 향, 소, 부곡도 항쟁과 군공을 통해 군현으로 승격받았다.
[13]
양란 이후 군사력이 부족한 조선은 속오군 체제를 통해 노비에게도 군역을 부과하려고 했지만 이를 탐탁지 않아하는 사족들이 많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링크
[14]
이를 유외잡직이라고 불렀다
[15]
다만 궁녀나 의녀 같은 직업은 일이 고되고 사회적 취급도 좋지 않아 보통은 기피되었다.
[16]
이런 노비들은 주인들과 친분이 깊은 경우도 있어 양반들도 주인들한테 보복당할까봐 함부로 못 건드렸다.
[17]
게다가 면세층인 노비가 늘어난 만큼 양인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18]
특히 조선에서는 고려의 노비제를 특별히 손보지 않고 그대로 답습했다. 즉 고려와 조선 모두 노비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몇 가지 빼고는 큰 차이가 없이 비슷하다는 것.
[19]
대표적인 사료로는 용재총화를 지은 성현(1439년 ~ 1504년)이 조선 사람의 절반이 노비라고 언급한 바고 있고, 17세기 단성호적대장엔 전체 주민 중 노비 비율이 64%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 학자들은 이런 사료들을 통해 조선의 노비 비율이 대체적으로 인구의 30%~40%, 많았을 땐 50%를 넘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 인구나 호구조사는 조세 및 수탈의 대상이 되기에 평민들은 인구와 호구조사에서 빠지려했고 그런 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노비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아보인다는 설도 있다.
[20]
고려 시대 노비 비율을 가늠할만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중기까지의 제도나 사회상이 노비 수의 꾸준한 증가를 초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과거엔 더 적었을 거라고 추측된다.
[21]
"옛적에 우리 태조는 후손들에게 훈계하기를, "무릇 천인의 무리들은 그 종자가 별다르니 이들을 양인으로 삼지 말라. 만약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면 뒷날 반드시 관직에 나아가게 될 것이고 차차 요직을 차지하여 국가를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니 만약 이 훈령을 어기면 사직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법은 8대 동안의 호적이 천인의 무리와 관계가 없어야 비로소 벼슬을 할 수 있다. 무릇 천인의 무리에 속한 자는 아비나 어미 한 쪽이 천인이면 자기도 천인이 된다. 비록 본주인이 놓아 주어 양민이 되더라도 그가 낳은 자식은 도로 천인이 된다. 또 본주인이 후손이 없이 죽더라도 주인 가문의 노비에 속하게 된다. 이것은 노비가 끝끝내 양민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출처:
https://m.cafe.daum.net/histown/Mhzh/111
[22]
출처:
https://www.fmkorea.com/best/5382580618
[23]
실제로 조선시대 때는
최씨음식법,
음식디미방 등 여성이 한글로 직접 남긴 기록들도 꽤 있다.
[24]
물론 자식들이 성을 선택할 자유는 없었다.
[출처]
https://kisslog.tistory.com/m/1327
[26]
단, 조선 이전의 경우 소실된 기록이 많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고려 역시 실록을 편찬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27]
양반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신 관료를 일컫는 무반(武班)과 문신 관료를 일컫는 문반(文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28]
고려도 제도적으론 양천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 내에 권세와 지위에 따라 귀족, 향리 등이 지배계층으로 존재했다.
[29]
고려가 귀족 사회로 일컬어지지만 전대의
통일신라나
삼국시대처럼 귀족이라는 계급이 확고불변한 계급은 아니었다. 사실 고려도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신분간 상하 이동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세한 건
고려 문서 참조.
[30]
이는 고려도 보장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면에서는 조선시대의 유연성이 더 높았다. 고려의 지배층들(후대에 문벌귀족이라 불리는)의 결집도가 높았던 데다 고려의 직접적 행정력과 법제적 기반이 조선처럼 전 국토에 미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31]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상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
[32]
왜구의 침입으로 상업의 핵심인 해양 네트워크는 강 하류조차 맘대로 나가기 힘들 정도로 틀어막혔고, 수없이 많은 식량이 왜구에게 빼앗겼으며 이를 토벌하기 위한 고려군이 군수물자를 징발하기까지 하고 나면 민가는 거의 초토화되었다.
[33]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릇’의 용도로 도자기가 아닌 놋그릇을 썼다. 화려한 도자기가 적은 것도 역시 이 때문. 정교한 도자기 수요가 전멸해버리니 도자기 기술이 화려해지길 기대하기 어렵다.
[34]
임진왜란 시점까지는 조선에서 화폐경제가 돌아가지 않아, 명나라가 조선에서 식량을 사먹으려고 했더니 은전을 받지 않아 강제로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이제 유명하다. 그러나
숙종의 치세에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상인 교역 문화가 강성해지며
상평통보는 물론 은자와 금까지 유통되었다.
[35]
상평통보에는 2전 이상의 고액 화폐가 없었다. 이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도 꾸준히 고액 화폐 발행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지만 화폐 제도에 대한 미성숙한 이해와 여러가지 제반 사정 때문에 실패했다. 게다가 나중에
흥선대원군이 섣불리
당백전을, 고종이
당오전을 발행하면서 조선의 경제는 말그대로 폭망했다...
[36]
황제의 생일에 붙이는 명칭. 예를 들어 고려 덕종(德宗)의 절일은 응천절(應天節)이라고 하였다.
[37]
왕이 아닌 조, 종으로 끝나는 시호는 황제에게만 부여되는 시호다.
[38]
하늘을 향한 제사는 천자인 황제만이 지낼 수 있는 제사였다고 보면 된다.
[39]
다만 조선이
재조지은이라고
만동묘를 지으며 제사 지내주긴 했으나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조선 조정 역시
만력제가 암군인 건 인지하고 이 점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천계제는 원망할 수 없으나 만력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은 점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경고하는 기록이 있다.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사십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ra_10912017_002)
[40]
조공•책봉은 한민족이 중화에 비굴하게 고개를 숙인 게 아닌 국익을 위한 실리적 면이 강한 외교라는 면이 최근 들어 부각되기 시작했다. 바치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었으니 일종의 무역 기능도 했던 셈이다.
[41]
이민족왕조에 존속기간도 짧던 원나라마저 홍건적의 난으로 무너질때 한족 충신들이 자결한 기록이 있었으니 명나라는 자결한 충신이 없는 것은 충분히 탄식할만했다.
[42]
반대로 명나라의 사대부들이 청나라에게 대거 항복한 사례는 있는데 청나라는 항복해 온 명나라 사대부들을 우대했다. 당장 이름이 높던 명나라의 학자이자 조정 대신이었던 전겸익도 한 때는 청나라에 맞섰으나, 남명의 수도인 남경이 함락되자 자진해서 청나라에 항복했고, 심지어 "이제 명나라는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모두 청나라에 항복하라."는 글을 쓰면서 청나라에 적극 협조했다. 물론 그 대가로 전겸익은 청나라로부터 예부우시랑(오늘날의 교육부 차관)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얻었다.
[43]
당시에 중화는 지금의 문명화와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 여러 이민족 왕조들이 중화식 국명을 쓴 것도 비슷한 이치다.
[44]
근대에 러시아, 일본, 터키 등의 나라에서 근대화를 시도할 때 서구를 따라한다는 의미가 굉장히 컸고, 현대에도 문명화라는 개념에 서구화라는 의미가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특이한 일은 아니다.
[45]
한국에 비교하면 6.25전쟁 당시 한국을 구원해준 미국에 대한 호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며, 미국이 멸망한 상황에서 미국을 멸망시킨 나라와의 외교관계에 미온적인 거라고 할 수 있다.
[46]
송나라는 문치주의에 치우쳐 군사력이 약해졌기로 유명한 케이스다.
[47]
고려의 국제적 위상 상승, 전성기 도래
[48]
중앙정부의
최충헌은 비판받고,
김취려 등 일선 장수들은 좋은 평가를 받음.
[49]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항목 참고.
[50]
중앙정부의
충렬왕은 비판받고,
원충갑 등 일선 장수들은 좋은 평가를 받음.
[51]
승리했으나 고려의 사회적 혼란 심화
[52]
나하추가 다시 침공하지 못함
[53]
기황후가 다시 공격하지 못함
[54]
왜구의 노략질로 고려의 민생이 악화
[55]
호발도가 다시 침입하지 못함
[56]
비록 총력전에 가깝긴 했지만 고려는 전근대 한반도 역사에서 고구려와 함께 전쟁에 3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단 2개의 국가 중 하나였다.(고구려- 수&당 전쟁: 약 30만/ 고려- 거란 침공: 1차: 약 30만, 2차: 약 20만) 이후에도 6.25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한민족은 전쟁에 2차 여요전쟁 만큼의 병력을 동원하지 못했다.
[57]
사실 그 보다는 당대 조선에서는 명나라가 망할 확률보다 청나라가 망할 확률이 훨씬 더 높아보여서 그런것이었지만 문제는 명나라의 경우 명 4대 암군들의 실정과 그로 인한 부정부패, 국가 경제 파탄과 민생 악화등으로 명나라 내부에서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국가 멸망이 진행되고 있는 당시 정세를 감안하면
명나라가 망할 확률이 청나라가 망할 확률보다 높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58]
특히 죄도 없는 며느리
민회빈 강씨를 누명을 씌워 처형하고 그녀의 집안을 멸문시켰으며 손자들까지 귀양보내서 손자 2명이 죽고 막내손자
경안군은 10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었는데도 절대 귀양살이를 풀어주지 않았기에 인조에 대한 평가가 더욱 나쁘다.
[59]
몽진(蒙塵) 자체는 현명한 처사였다. 다만 안위를 확보한 후 전시행정체제를 침착하게 이끌어 나간 고려의 명군 현종과는 달리 조선의 선조는 아예 넋이 나가 요동으로까지 넘어가려했다는 점에서 큰 비판을 받는다.
[60]
사실 선조도 왜란 이전까지 그런대로 괜찮은 군주였다. 왜란시기와 그 이후의 행보로 평가를 다 깎아먹어서 그렇지.
[61]
물론 현대 한국인의 인식과는 달리 조선도 그렇게까지 체급이 작은 나라는 아니었다. 동시기 국가중에 조선보다 인구, 경제력 면에서 큰 나라 역시 별로 없다. 당장 왜란시기동안 조선도 17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동원한 적이 있다.
[62]
그 수양제의 113만 대군으로 유명한 제2차 여수전쟁조차 만 1년을 못 넘겼다.
[63]
이런 풍조를 만든 원인은 바로
용인 전투.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3도에서 올라와 용인에 집결했던 삼도근왕군 약 7만이 와카자키 야스하루의 단 1600명에게 모랄빵이 나서 참패했던 사실 때문에 조선군, 특히 육군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64]
다만, 재차 강조하지만 일본군의 "군사력"과 "규모"는 오히려 과소평가당하는 편이다. 당시 일본군의 규모와 위력은 과장 없이 당대 세계 최강 중 하나였다.
[65]
병력 수를 조선이 더 많았다고 하는 입장도 존재하나, 이것은 누적병력을 보지 않은 수치이며 개전 초기 17만에 이르던 조선의 대군은 전쟁 후반으로 가면 4만 5천까지 줄어들었다. 반면 일본군은 지속적으로 병력이 보충되고 순환배치되어 항상 12만 이상의 대군을 개전 초기부터 종전시점까지 유지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동원한 병력은 40만을 초과한다. 물론 민간인 피해를 제외하고 순수한 병력 손실만 놓고 본다면 그 역시 일본이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66]
사실 조선군의 병력이 줄어든건 싸움에서 잃었다기보다 전황상 대군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더 컸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인류역사를 통틀어도 견줄 상대가 없는 대승의 행진이었고, 그덕에 일본군의 보급과 병력유지 및 군대의 사기진작에 큰 애로사항이 생겼다. 그래서 조선은 징집한 병력을 다시 생업에 복귀시켜 보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란기간동안 일본이 전라도를 꾾임없이 노렸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오히려 전쟁 막바지에 갈수록 조선이 공세였다.
[67]
또 조선 수군을 비롯해 조선군 역시 초기의 졸전을 극복하고 정예화되어 백병전이라 불리는 근접전투에서도 일본군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68]
현대 군으로 따지면 무과를 통해 장교 육성에는 나름 관심을 기울였으나 부사관 양성에는 소홀했다는 소리. 장교와 병사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중 하급 부대의 지휘를 맡아야 할 부사관 계급의 부족으로 사령부에서 결심한 큰 전략에 맞춰 유연하게 움직여야 할 말단 부대들의 통솔이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어진다.
[69]
다만 쌍령 전투도 청나라측의 기록에 의하면 청군의 피해가 심했던
피로스의 승리 급의 졸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70]
단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는 강건성세의 전성기에 비하면 매우 미약한 국력이었으며 11세기 북방을 제패한 거란의 요나라는 물론 12세기 여진의 금나라와 비교해도 오히려 약세였다.
[71]
내륙 초원에서 시작해 수군 전술에 취약했던 몽골과 달리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은 해적집단도 있을 정도로 수전에 완전히 문외한은 아니었고 원숭환의 모문룡의 주살 이후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명의 잔여 수군이 대거 후금으로 넘어가 나름 괜찮은 수군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간과했다.
[72]
귀주 대첩과 비슷하게 도주하는 적을 붙들어 거의 전멸에 이를 때까지 몰살시킨 전투로서는
노량 해전이 비견될 수 있으나, 하필이면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사망하는 바람에 한국인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승리"보다는 "성웅이 전사한 비극적인 전투"로 인식되고 있다.
[73]
문종 때는 3군의 12사를 5사로 재정비하여 병력이 증강되었다.
[74]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211002_003
[75]
도성(都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003) 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 【곧 동소문(東小門). 】 ,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 【곧 수구문(水口門). 】 ,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 【곧 남대문. 】 ,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 【곧 서소문(西小門). 】 ,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今上) 4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
[76]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척계광이
원앙진 전법을 개발하면서 해결되었다는 반론이 있지만 척계광은 왜구에 특화된 전술을 이용해 척가군이라는 정예병을 양성했을뿐 당시 명나라군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77]
이로 인해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이
웅정필과
원숭환이다.
[78]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고려나
척계광의
원앙진 전법을 도입한
명나라군조차 13:1이라는 숫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긴적은 없었다. 출처:
https://www.newsn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60120
[79]
일본, 특히 왜구와의 싸움에선 명나라가 오히려 더 큰 졸전과 추태를 보였다. 차라리 조선은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대규모 침공에 전투 경험이 부족한 장수들과 백성들이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는게 당연하다는 변론이라도 가능하다.
[80]
여요전쟁 승리의 토대
[81]
고려에 막심한 피해
[82]
가능했다는 설과 불가능했다는 설이 공존
[83]
평안남도는 고려시대때 가서야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태조 왕건이
삼국통일전쟁 이래로 황폐해진
평양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 백성들을 이주시켜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처음에는 평양 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삼았다가 이어
서경으로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 이전에는 사실상 버려진 땅이었다.
[84]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선조도
신립이
니탕개의 난에서 공을 세우자 친히 마중나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오늘날 흔히 선조의 인상이 '임진왜란 때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 '이순신을 시기하던 무능한 임금'으로 여겨지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사실이다. 똑같이 피난 갔는데 현종은 혈혈단신으로 몸을 피한 채 국난을 극복한 명군으로 인식되고, 선조는 백성 버리고 도망간 암군으로 취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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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의 시간이 흐르고도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원한이라는 뜻이다. 오늘날에도 쓰이는 '불구대천의 원수'와 뜻이 통한다. 본 내용을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 말하자면, "일본은 우리나라의 원수인데 복수할 걸 잊으면 매국노나 다름없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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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史臣曰 我國之於此賊 萬世不共戴天之讎也 一日忘復讎 則是一日忘祖宗也".(
#,선조실록 200권, 선조 39년 6월 10일 정미 3번째기사, 1606년
명
만력(萬曆) 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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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능력 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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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한국사에서 유이하게 대왕으로 불리는 국왕 중 하나인
광개토대왕부터가 시호 그대로 정복전쟁의 업적으로 대왕이라 불릴 정도로 현대 한국인들에게도 숭상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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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문화권에서 노예 남성들 중 흑인 남성일 경우 성욕이 과해 정상적으로 일할 수 없다는 핑계로 그들에게 거세가 행해진 점이 대부분임을 감안하면 콜롬버스 역시 노예로 잡혔을 때 실존 역사와 달리 백인이 아닌 흑인일 경우 거세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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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던
진린 제독 직계 후손 일가도 조선으로 피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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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거란은 이후 강동6주의 영유권을 요구하며 침공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려가 이 지역의 영유권을 획득한 이후의 방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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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에 조선 초에 명나라가 조선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며, 역사적으로도 한반도 국가들이 대외확장을 적극적으로 한 시기도 주변국이 한창 혼란스러울 때였다. 당장에 그 고구려조차 중국의 통일 제국을 목전에 두자 영토 확장은커녕 방어에 전념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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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어로는 우디거(숲사람)라고 하며 조선시대 두만강(豆滿江) 일대에 살던 야인 여진의 분파이다. 비록 명나라 아래 있었던 건주 여진이나 몽골에 가까웠던 해서 여진에 비해 문명 수준은 낙후되었으나 호전성만큼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명나라 세력권에 속해 있어 조선이 공격할 땐 명나라 눈치를 봐야 했던 건주여진, 너무 멀어서 당시엔 부딪힐 일이 없는 해서여진과 달리 조선과 직접적인 충돌을 가장 많이 일으켰던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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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적합은 당시 야인여진 중 가장 강하고 호전적인 세력이었으니 그런 올적합을 털어버린 조선군이 두만강 일대 여진 부락들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로 여겨지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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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는지 이후 해당 올적합 토벌에 대해 귀화한 여진족인 동청례가 강성하던 금나라도 못한 일이라며 여진족들을 회유했던 근거로 써먹은 기록이 있다."대금(大金)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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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당시 명나라는 비록
토목보의 변이후
영락제시절에 비해서는 국가위상이 낮아졌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여전히 높은 위상을 가진 강대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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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명나라군은 1만명당 128명의 여진족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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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html?dbGubun=SD&category=Report&m201_id=10038483&local_id=10052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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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품이 하도 많아서
세조(조선)가 "우리 나라는 작은 공(功)으로써 천은(天恩)을 우악하게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가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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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 학파에서는 1654만명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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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의 인구란 농업이란 국가 기간산업을 지탱하고 군사력에 동원될 수 있는 인구란 개념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고급의 기술과 고도의 숙련된 인재들, 다시 말해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인적 구성원의 개념을 통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