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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2:16:53

광교산 전투

<colcolor=#000> 광교산 전투
光敎山 戰鬪
장소
시기 1637년 1월 30일 ~ 31일
( 인조 15년 음력 1월 5일 ~ 6일)
장소 조선 경기도 용인현 광교산
원인 전라도 근왕병의 남한산성 구원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청나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전라병사 김준룡 호쇼이 어르커 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도
초품 1등공 슈무루 양구리
병력 2,000여 명 3,000여 명
피해 전라도 근왕군 와해[1] 초품 1등공 양구리 전사
결과 조선군의 전술적 승리

1. 개요2. 전라도 근왕병과 양구리의 움직임3. 전투 전개4. 결과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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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교산 전투
조선 병자호란 때 벌어진 전투이자, 김화 전투와 함께 병자호란의 대표적인 승첩이다.

이 전투에서 홍타이지의 매부인 ' 슈무루 양구리'[2]가 전사했다. 양구리는 당시 청나라에서 전투 경험으로는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의 숙장으로, 험천 전투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하기도 했다. 당연히 양구리의 전사는 청군에 큰 충격을 줬다.[3]

2. 전라도 근왕병과 양구리의 움직임

1636년 12월 20일(이하 음력), 인조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 이시방과 전라병사 김준룡은 급히 전라도 각 고을에서 병력 6천 명을 모았다. 이때 화엄사의 승려인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이끌던 승병 2천 명도 합류하여 총 8천 명의 전라도 근왕병이 남한산성을 향하여 북진하기 시작했다.

1637년 1월 2일, 양지에 도착하자 이시방은 김준룡을 선봉장으로 삼아 병력 2천 명을 주고 먼저 남한산성에 진군하게 했다.

한편, 아이신기오로 도도의 청군은 1월 2일 험천 전투에서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했다. 전투가 끝난 후 도도와 양구리는 김준룡의 2천 명의 선봉대의 소식을 들고 곧장 병력을 광교산 동쪽에 배치하여 남한산성과 김준룡 부대의 연락을 차단하고, 3천여 명을 인솔하여 광교산으로 향한다.

3. 전투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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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전역도[4]
1637년 1월 7일에 조선의 전라, 충청 양도의 순무와 총병이 병력을 합쳐 구원하여 와서 남한산성에 영을 세웠다.

상(홍 타이지)이 듣고는 화석예친왕(호쇼이 어르커 친왕) 다탁(도도, 누르하치의 #15남)과

초품공 액부 양고리(양구리)을 보내 병력을 인솔하여 기회를 보아 반격하게 하였다.

다탁과 양고리 등이 명을 받들어 가서 보니 때마침 눈이 와 하늘이 흐리고 어두워 적의 군영을 보지 못 하였다.

마침내 병사를 풀어 진격하여 깨트렸다.

그 산 아래에 진을 친 군대를 추격하여 산 정상의 적의 군영에 이르렀다.

다탁이 뿔피리를 불게 하여 병력을 모으고 양고리를 소환하여 산에 오르게 하였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양고리가 가다가 때마침 석굴에 매복한 한 명의 조선의 패잔병과 마주하였다.

은밀히 조총으로써 양고리를 쏘아 명중하니 중상을 입어 졸하였고 이때 나이 66세였다.

양고리는 무릇 앞장서서 적을 격파하고 승전한 것이 공적록에 있었고

국가에 뛰어난 공훈을 세움에 있어 열심히 노력함이 많다 하였다.
- 청실록 태종문황제 1637년 1월 7일 출처(조선의 반격 광교산 전투와 양고리 전사!)
1636년 12월에 태종이 친히 조선을 정벌하였는데 양고리가 종군하였다.

1637년 1월에 군대가 한강을 건너 강기슭에 주둔하였는데

조선 전라, 충청 2도의 병력이 구원하여 와사 한성 남쪽에 영을 세웠다.

이달 7일에 태종이 예친왕 다탁(도도)과 더불어 양고리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는데

마침 눈이 와 흐리고 어두웠는데 적이 산 아래에 진을 치니 병사를 풀어 진격하였고 산기슭으로부터 그 산꼭대기에 이르니

다탁이 뿔피리를 불어 양고리를 불러 산에 오르게 하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양고리가 장차 내달려 다다렀는데 조선의 패잔병이 언덕 옆에 매복하였다가

조총을 몰래 발사하니 양고리가 명중하였고 상처가 중하여 마침내 졸하니 이때 나이가 66세였다.

다음날에 다탁이 병력을 인솔하여 적의 영에 육박하였는데 조선군은 이미 밤에 달아났다.

양고리의 시신을 얻어 이로써 돌아왔다.

태종이 친림하여 제사를 지내고 곡하였으며 어용(임금이 쓰는 물건)과 관복을 하사하여 이로써 염하게 하였다.

상여가 돌아오자 태종이 교외에서 맞이하였고 명하여 복릉(태조 누르하치의 능)에 배장(시신을 임금의 능 곁에 묻음)하였다.

장사를 지내는 날에 태종이 다시 친히 제사를 지냈다.
- 清史稿/卷226 출처(태조의 돌격대장 조선에서 전사하다!(광교산 전투))

1월 4일, 광교산에 도착한 김준룡은 병력을 배치하고 군수품을 진영 중앙에 비축하여 태세를 갖추며 남한산성과 연락을 시도한다.

1월 5~6일, 마침내 호쇼이 어르커 친왕 도도가 지휘하는 청군이 광교산 부근에 도착한다. 산 기슭에 주둔한 전방 부대를 발견한 청군은 수차례에 걸쳐서 공격을 시도하나, 조선군은 청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미리 진영 주변에 목책을 세우고 진형을 잘 정비해놨다. 청군이 공격해 들어오면 총포로 집중 사격하여 타격을 입히고, 청군이 퇴각하면 궁병과 등패수가 청군의 배후를 가격하여 타격을 입혔다. 수차례 청군의 공격을 막아낸 조선군은 총포를 쏘고 불을 지피는 등 자신들이 왔다는 걸 남한산성에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며, 승전 소식을 전하여 패닉 상태의 조정을 안정케 했다.[5]

김준룡과 함께 근왕대를 이끌고 왔던 전라도 중영장 우상중(禹尙中)의 증언에 의하면 양 군은 동틀 때부터(平明) 밤 9시 ~ 11시(二更)까지 싸웠다 하니 매우 치열한 접전이었을 것이다.

1월 7일, 이 날은 특히 눈이 많이내리고, 안개도 낀 날씨라 피차간 시야가 매우 좋지 않았다. 광교산 기슭에서의 전투는 결국 근왕군의 패색이 짙어져 조선 병사들이 흩어졌는데, 당시 도도는 안개로 시야가 흐린 탓에 청병을 풀어 이들을 추격하고 본영을 찾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산 정상에 위치한 김준룡의 본영을 탐지하자, 도도는 소라고동을 불어 흩어져 있는 청군을 집결시켰다. 산 기슭에 있던 양구리 소라고동 소리를 듣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나, 그 과정에서 석굴에 숨어 있던 조선 병사에게 저격당해 숨졌다.

밤이 늦도록 양구리의 행방이 묘연하자, 아이신기오로 도도는 김준룡의 본영을 공격하지 않고 대치했으며 결국 산 기슭으로 철군했다. 김준룡은 이 틈을 타서 횃불을 켜두고 야영하는 것처럼 속이고 천여 마리의 말을 매어둔 채 수원 방면으로 퇴각했으며, 1월 8일 날이 밝자, 도도는 조선군 본영을 총공격하나 허탕을 치고 양구리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날 양구리의 시신을 확인한 홍 타이지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통곡을 멈추지 않았으며 양구리에게 자신의 어복과 흑색 초피 갖옷 등을 내주어 염하고 초상을 치렀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盎葉記)〉에 따르면, 홍 타이지가 슬퍼하는 것을 정탐하다가 달아난 조선 졸병을 양구리를 해친 자라고 하여 우야 어선(esen)[6] 으로 하여금 잡아 죽여 수급을 취했다고 한다.[7] 한편 이시방은 김준룡이 수원을 향한 게 패퇴했기 때문이라 판단하고 흩어진 병사들을 모은다며 공주로 도망가 금강의 다리를 끊고 머무른다. 이시방이 후퇴함으로써 본대와 연락이 끊긴 김준룡의 선봉대도 수원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청군의 무응답 속에서 재차 사신을 청 군영에 보내고자 하던 인조에게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수성군의 사기를 올리고자 한 대사간 김반은 김준룡을 구원하지 않아 광교산에게 패배를 당하게 한 이시방을 처벌하여 군율을 세울 것을 청하지만, 인조는 이것을 당장 실행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 1월 13일, 인조는 결국 홍서봉·최명길·윤휘 등을 보내 관온인성이라는 홍 타이지의 존호를 찬미하고 소방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 글을 받들고 청 군영에 가게 하였으며, 잉굴다이에게 즉시 회보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

4. 결과

광교산 전투에서 조선의 전라도 근왕군은 전술적으로 승리했다. 다만 광교산 거점을 포기하고 철군했고, 치열한 혈전을 벌이며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전라감사 이시방은 추가보급에 실패했으며,[8] 철군 도중에 이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인내심의 한계에 달해 자연스레 부대가 와해(탈영, 이탈)되었다. 다량의 화력을 기반으로 놀라운 전투력을 선보인 부대라 할지라도 결국 보급이 떨어지자 마자 와해된다는 점에서 보급의 중요성을 다시 상기시킬 수 있는 대목. 그만큼 후기 조선은 유독 조총병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광교산 전투는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청나라군에게 제대로 한방 먹였다고도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이들은 다른 근왕군들처럼 농민 징집병 위주로 구성된 부대로, 본래라면 오합지졸의 전투능력을 보여주어야 했으나 넉넉한 화력과 화력집중, 일부 뛰어난 포수들의 사격술을 바탕으로 광교산 전투에서 청나라군의 고위급 장수들을 사살하기까지 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것도 일반적인 장수들이 아닌, 슈무루 양구리를 포함해 명청 전쟁에서 큰 전과를 올렸던 베테랑 지휘관들이다.

전라도 근왕군의 노련한 방어 위치선정은 청나라군을 고전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삼각의 방어고지를 향하는 길은 좁은 산길 외에 마땅히 없는 상황이었다. 산길로 쏟아지는 화망을 돌파하기 어렵다면 숲과 산을 뚫고 올라와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공격 방향과 기동수단(기병)이 제한 되었고, 조선군은 이들에게 화력을 집중하기 용이했다. 즉, 청나라군의 강점인 기동성(기병)과 백병전을 모두 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비록 도중에 청나라군은 '더 높은 고지'로 우회해 아래로 타격하는(명청 전쟁기에 써먹던 특기)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으나, 조선군 지휘관들의 침착한 사격 통제와 유연한 예비대 투입으로 격퇴했다. 명군과의 실전경험으로 다져진 청군의 백병전은, 적어도 광교산 전투에서 만큼은 조총의 화력과 지형의 불리함에 압도당해 그것이 무의미했다.

전라병사 김준룡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은 용감하고 유연한 진두 지휘를 펼쳤으며, 이는 아군의 전투효율과 사기를 극대화 시켰다. 눈과 안개로 인해 시야가 제한되자 병사들은 자연스레 사격통제 원칙을 어기지 않게 되었다.뭐가 뵈야 쏘지 않겄냐 본래 눈과 안개는 조총병 입장에서 그리 좋은 환경이라 볼 수 없는게 일반적이다. 안개로 인해 고지 확보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넓은 관측거리 또한 확보할 수 없었고, 습한 안개와 눈은 비올때 만큼은 아니지만 조총의 불씨를 관리하기가 까다로워진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광교산 전투에서는 이것이 장점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 근왕군들의 전투에서는 멀리서 접근하는 청나라 기병대와 보병대를 보고 긴장한 나머지 조총의 유효사거리 바깥에서 성급하게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나 광교산의 전라도 근왕군은 안개로 인해 적이 근접할때까지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고, 지휘관들이 침착하게 사격통제를 지휘했기 때문에 근접한 적 보병들을 일제히 녹여버리고 사기를 꺾이게 만드는 사격이 가능했다.

이렇듯 다방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치열하게 저항하던 조선군이 보급의 한계로 자발적으로 철군하기 전까지, 청나라군은 마땅한 대안없이 계속해서 보병들을 갈아넣어야만 했다.

5. 여담



[1] 전라감사 이시방이 보충병과 물자를 보급해줘야 했으나 실패했고, 치열한 혈전으로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병사들이 대거 이탈(탈영) 했다. [2] 음차해서 한자로 양고리(揚古利)가 되는데 대개 이 음차로 많이 알려져있다. [3] 명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이 정도의 고위급 장수가 전사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청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4] 지도의 오른쪽에 나와있는 정세규는 충청 감사로, 광교산 전투 3일 전에 벌어진 험천 전투를 뜻한다. [5] 전라병사(全羅兵使) 김준룡(金俊龍)이, 광교산(光敎山)에 도착하여 여러 차례 접전을 벌여 승리하는 일이 꽤 있었고 바야흐로 기회를 보아 헌릉(獻陵)으로 전진할 계획이라는 일로 올린 장계가 들어왔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 1월 5일 [6] 이 공로로 어선은 홍타이지에게 남작 작위를 받게 된다. 참고로 이 사람은 옹정제와 순군왕 윤제의 어머니 효공인황후의 할아버지로 옹정제가 즉위한 후 외가를 챙겨주고자 작위를 남작에서 1등승은공으로 올려준다. 이것 때문인지 몰라도 양구리 역시 1731년에 공작에서 추봉군왕으로 작위가 올라간다. 참고로 어선의 고손자인 조혜는 건륭제 당시 준가르 정벌전에서 부항, 반제, 아규, 책릉 등과 함께 공을 세워 1756년 공작 작위를 받는다. [7] 청사고》 도도 열전에도 양구리 저격병을 사살했다고 하는데 이 일을 가르킨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8] 전세가 청나라 쪽으로 기운 것은 물론이고, 조선은 본래 고질적인 보급역량 부족 문제에 시달렸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명군이 제공해준 대량의 보급을 한반도 이남 지역에 충분히 해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조선은 대부분이 산악지형으로,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뚫려있던 것도 아니다 보니 교통(및 물류)을 강과 산길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산길이 험준해 마차가 다니기도 어렵다. 그나마 평시에는 강이라도 있으니 물류와 보급이 조금은 사정이 나았지만, 전시에 전략적 목표가 되는 강은 언제나 적군이 도사리고 있는 구역이 많기 때문에 보급이 쉽지 않다. 결국 철저히 산길에 보급을 의존해야 했는데, 산길에서도 적을 만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전근대 시대에 물류 인력이나 상인들이 산길에서 산적을 만나는 경우는 흔했으며, 전시에 보급 행렬을 급습하는 것은 그보다도 더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이다. 위험한 지역을 우회해서 돌아가는 것은 산맥이 빽빽하다보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보급이 늦어지는 건 당연지사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의병들이 이런 전술을 이용해 왜군들의 보급로를 지속적으로 교란하는 성과를 거두었던 만큼, 왜군도 충분히 이러한 전술 구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조선 의병들이 훨씬 지형에 해박하고 익숙하다는 것 정도. [9] 군사작전 중에 병영으로 창기를 불러들였다. [10] 강진 전라병영성에서 광교산까지는 통상 9일이 걸리는데, 김준룡의 전라도 근왕군은 교지를 받은지 13일되는 시점에서 이미 광교산에 도착해 진영을 꾸렸으니 기일이 늦지 않았다는 것. [11] 화성의 건축을 위해 석재를 구하던 인부들에 의해 전해들었다고 한다. [12]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비로봉 남쪽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