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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1:31:25

재조지은

1. 개요2. 시대적 상황3. 대중적 인식과 반박4. 기타
4.1. 번외: 신해혁명에 가담한 몇몇 조선인들
5. 같이 보기

1. 개요

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 '거의 망하게 된 걸 구해준 은혜'라는 뜻이다. 한국사에서 재조지은은 임진왜란 명나라 조선 파병을 주로 일컫는다.

2. 시대적 상황

만력제가 조선에 원군을 보낸 것은 사실이고, 조선으로서는 원래의 사대성향에 부채감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피해가 심각했었기 때문에 조선이 대륙에 할 수 있는 건 딱히 많지 않았다. 단지 모문룡 일파의 횡포를 눈감아주거나 사르후 전투에 1만 3천 명의 원군을 보내는 정도가 할 수 있는 최대였다. 후금이 강성해지면서 명 자체와는 거리를 두는 편이 안전했다.

물론 조선의 후대 임금들은 대보단을 지어 망한 명의 황제들 제사를 지내주고, 특히 만력제의 휘(諱)를 피해 공신 이름이나 왕자들 이름을 정하는 등 예우를 다했다. 조선의 마지막 정공신 지정인 영조 임금때의 분무 공신을 양무 공신으로 바꾼 것이 좋은 예다. 만력제의 휘에 떨칠 분(奮)자가 들어간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은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려가면서까지 명과의 의리를 지키려는 미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성리학 탈레반이란 욕을 먹는 송시열조차 '시세를 헤아리지 않다가 패배하면 선왕( 인조)이 수치를 참고 종사(조선)를 연장시킨 보람이 없을 것이다'라며 기다리라고 주문한 바 있고, 명나라 잔존 세력 토벌도 했다. 차라리 청나라가 주도했다면 덜 잔혹했겠다고 여길 정도로 철저히 학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는 건 아닌 게 모문룡이 가도에 주둔해 있던 시절의 패악질이 매우 대단해 심지어 정묘호란 때는 청군의 목이랍시고 청군에게 변발당한 조선인들을 죽여 그 수급을 명나라 조정에 공로로 바쳤는데 그 숫자가 1만이었다. 조선은 모문룡이 명 실세들과 줄이 대져 있고 인조반정의 명분이 약해 모문룡에게 약점까지 잡혀 모문룡이 조선에 대해서 명나라에 나쁘게 얘기하면 좋지 않았기에 참고 있었을 뿐 패악질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사대부 정치가들은 경세가로서 사직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청국에는 사대까지는 아니어도 상국으로서 조공하고 사신도 맞이했다.

북벌론으로 유명한 효종 대에 김집,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들이 북벌을 제창하고 대동법 확대도 전비 확보를 이유로 막아서는 등 청에 반기를 드는 듯했다. 그러나 도중에 북벌 계획이 청나라에 새 나가면서 청국에서 힐문 사신이 왔다. 그러자 산당들이 죄다 쫓겨나고 영의정 이경석과 남인 당수 예판 조경 등이 스스로 백마산성에 들어가는 등 청나라를 달래기에 안간힘을 썼다. 이후 권세를 잡은 김육 등은 친청 노선을 걷는다. 러시아의 만주, 연해주 공략 때 청나라에 원군을 보내기도 한다.

심지어 구한말 무렵엔 청나라의 힘을 빌려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들을 축출하는 등, 국내 정치에 청나라의 개입을 용인했다. 아울러 청나라식 개혁을 단행해 정부 기구의 이름들도 `~아문'같이 청나라식으로 바꾸고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등 개혁 고문을 직수입하기도 한다. 청나라가 화폐 개혁을 조언하자 그대로 하다가 경제 위기를 겪고 나라가 더 곤핍에 빠지거나, 영약삼단 같은 자주 외교권 포기(조선은 청을 통해서만 대외 교류를 한다는 내용) 등을 용인하는 등 청에 대해 사대한다. 결국 명나라 신종에 대한 의리나 명분론은 거의 희미해진다. 물론 이 시기에는 청나라에서 한족들에게 고위직을 퍼주는 일이 많아진 탓에 만주족이 명목상의 지배민족 자리만 간신히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대한제국 황제관 중 서양식 제복을 입을 때 쓰는 황제관[1] 또한 청나라 황제관을 본뜬 형태였다.

3. 대중적 인식과 반박

대중적으로는 사대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자주적 중립외교'를 행했다는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 및 병자호란 전쟁 과정에서 조선이 보여준 추태 등으로 인해, ' 사대부들이 같잖은 사대 하겠다고 망해가던 명나라나 빨아대고 청나라는 무시하더니 또 전쟁 내서 나라 말아먹었다'는 부정적 인식을 대변하는 용어로 인식되기도 한다.

현대에도 과격한 숭미 의식을 비꼬려고 가끔 재조지은을 언급하기도 한다. 한홍구 교수는 저서인 대한민국史에서 한국 전쟁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기려 동상을 세웠던 일을 조선에 파견된 이여송에 빗대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2]

그러나 재조지은에 관한 당대의 논의는 의리론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임은 물론이고, 현대인의 기준에서 봐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나 그들의 은혜를 강조한 것은 딱히 이상할 것 없는, 충분히 할 만한 행동이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 대한 비전문가나 대중의 인식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은 조선의 지배층이 공리공론에나 치중하는 쓰레기였다는 것과, 조선이 전쟁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참패를 당했다, 재조지은이 실체 없는 사대주의 사상이라는 것인데 모두 부당하다.

임진왜란은 실제로도 명이 만력 3대정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준의 엄청난 전비를 쏟아부어 전폭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쟁이었고, 만력제가 자국에서는 '고려[3] 황제'라는 비웃음을 받아 가면서까지 조선을 적극 지원한 전쟁이다.[4]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조선을 위기에서 건져 준 동맹국에 대해서 인간적인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5] 조선에서는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굴복하기 전에는 광해군 때 강홍립과 군대를 보내서 도와 줬다. 이때 깃발을 바꿔단 것도 명이 도와주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청에 저항할 수 없게 됐다는 점과 명나라가 모문룡의 횡포를 방치했다는 정당한 근거가 있었다. 그마저도 명의 멸망에 협조했을지언정 이후 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명조 유민들의 망명을 받아줌으로써 최소한의 신의를 지켰다.

재조지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근현대 한국인들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일 뿐, 재조지은이 거론되던 시대의 인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립외교로 유명한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나 사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은 구한말 일제강점기 이래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가들에게서 많이 거론되었는데, 여기에는 식민지 상태로서 자주독립을 강조하던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의 영향도 컸다. 일본은 조선의 사대를 조롱하면서 자국의 식민 체제를 옹호했고, 더불어 일본은 만주를 지배하면서 만주와 당시 일본이 지배하던 한반도의 역사를 하나로 묶어 설명하고자 했다.( 만선사관) 그 과정에서 과거 '청나라와 친하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부족했다'고 여겨진 광해군을 높게 평가했다. 만주를 기반으로 했던 청나라와 조선의 '밀착 관계'(라고 여겨진 것)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듯 만주를 지배하는 정당성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광해군/평가 병자호란 문서로.

4. 기타

4.1. 번외: 신해혁명에 가담한 몇몇 조선인들

비록 조선의 후신인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 몇몇 대한제국 유민들이 한 일이지만, 훗날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때 예관 신규식, 범재 김규흥, 춘교 유동열 등 몇몇 조선인들이 국민당의 신해혁명에 가담하여 한족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동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재조지은과는 무관하고, 중국에서 전제군주정을 타파하고 민주공화정을 세워 그 여파로 조선의 독립에 지원을 얻기 위함이었다. 쑨원을 따르던 조선인들 대부분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재조지은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성리학적 세계관을 가진 유생이 아니며 조선에 민주공화국을 세우려던 독립운동가였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굳이 말하자면 이들은 딱히 재조지은에 대한 보답을 추구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의도치 않게 재조지은에 대한 보답을 실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같이 보기



[1] 한족 왕조 스타일 황룡포를 입을 때는 명나라식으로 익선관을 썼다. [2] 한홍구, 한겨레출판, 대한민국史(2003년) 1, p201~211 '맥아더가 은인이라고?' [3] 당시 중국, 일본에서는 조선을 부를 때 삼한, 고려, 조선이 모두 통용되었다. 용법은 조금씩 달랐는데 "땅"을 가리킬 때는 주로 삼한을 쓰는 편이었고, "문명"을 가리킬 때는 고려가 많이 쓰였으며, "정권"을 가리킬 때는 분명하게 조선을 주로 사용했다. 이 외에도 "위치"를 가리킬 때는 "해동"이, "종족"을 가리킬 때는 "동이"가 사용되었다. 명에게 비유하자면 삼한은 "대륙"이고, 고려는 "중화"이고, 조선은 "명"이고, 해동은 "중원"이고, 동이는 "한"인 셈이다. [4] 비록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군이 지상군의 주력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5만~7만 4천 명 가량, 정유재란 때 파견된 명나라군 규모가 무려 9만~11만 7천 명이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 [5]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명(明)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조회를 40년간이나 보지 아니했기 때문에 마침내 천하의 혼란을 초래하여 멸망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분명한 근래의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게으름의 폐해가 나라를 망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라고 현종(조선)에게 충고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걸 보면 당대 조선인들도 만력제와 명나라를 마냥 칭송한건 아니며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만력제가 암군인건 인지하고 반면교사로 삼아야한다고 여긴듯 하다. [6] 상이 이르기를,"3백 년을 지켜온 종묘 사직이 일조에 빈 터가 되어 버렸으니, 의당 순절한 신하들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하니, 석윤이 아뢰기를,"만일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반드시 모두 그들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반드시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고, 예의가 쓸어버린 듯이 흔적도 없고, 염치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지조와 절개 있는 사대부들이 이미 먼저 자리를 떠나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pa_12208023_002 [7] 사실 이 때문에 일본 제국에서는 아라이 하쿠세키에 대한 평가가 영 좋지 않은 편이었다. 일본 제국을 세운 세력들이 무너뜨린 에도 막부를 조일관계와 관련해서 높이 평가한 것이니 말이다. 무엇보다 일본 제국에서는 자신들의 팽창주의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위대한 정복자로 미화했으며, 아라이 하쿠세키는 에도 막부 쇼군의 대외적 칭호를 일본국 국왕으로 격상시킬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일본 제국의 입장에서는 아라이 하쿠세키를 좋게 평가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