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라틴어: Lucius Manlius Torquat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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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증조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조부)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아버지)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5년 |
전임 |
마니우스 아우렐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
동기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후임 |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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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에서 가장 고귀한 파트리키 가문으로 손꼽히는 만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기원전 480년 첫 집정관을 배출한 걸 시작으로, 수많은 집정관 및 고위 행정관이 그의 집안에서 배출되었다. 증조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는 기원전 16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티투스와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조부는 이름 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아버지는 기원전 98년에 재무관을 역임했다는 사실만 알려졌다.그는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함께 그리스에서 유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대 사료에는 술라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술라에 가담하고 그리스에서 주화 주조를 담당한 재무관 '루키우스 만리우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이자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에게 패배한 '루키우스 만리우스', 그리고 콜리네 성문 전투 때 술라 휘하에서 삼니움족과 맞붙었던 '루키우스 만리우스'가 언급되었다. 이 중 누가 기원전 65년 집정관 토르콰투스와 동일인물인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집정관과 다른 고위 행정관 사이의 최소 재임 간격을 설정한 법에 의거한다면, 그는 기원전 68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이다. 밀레투스에서 발견된 그리스 비문에는 그가 아시아 지방의 총독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로 볼 때 기원전 67년에 히스파니아 해안에서 해적을 상대로 맞서 싸운 해군 지휘관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는 다른 인물일 것이다.
기원전 66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그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푸블리우스 아우트로니우스 파이투스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낙선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함께 아우트로니우스와 술라가 유권자들을 매수했다고 고발했다. 법원은 고발이 정당하다고 판단하고 아우트로니우스와 술라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고, 두 사람의 당선은 무효 처리되었다. 이후 열린 재선거에서 그와 코타가 당선되어 기원전 65년도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66년 집정관 임기 마지막 날, 카틸리나가 포로 로마노에서 무장했다는 보고가 원로원에 보고되었지만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재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훗날 카틸리나가 그날 집정관을 살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카틸리나가 이듬해 집정관으로 선임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이라고 보지만, 일부 학자들은 현직 집정관 레피두스와 툴루스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야기라고 본다. 하지만 키케로의 이 주장은 카틸리나가 오래 전부터 무장 봉기를 꾀했다고 몰아가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이후 그가 집정관으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마켄도니아 총독에 부임한 그는 상당한 군사적 성과를 거뒀던 듯하다. 기원전 63년, 원로원은 집정관 키케로의 제안에 따라 그의 군사적 성공을 기념해 그에게 임페라토르 칭호를 수여하기로 했다. 이후 로마로 귀환한 그는 그 해 12월 5일 카틸리나 추종자들을 어찌 처결할 지를 논의하는 원로원 회의가 열렸을 때 병에 걸린 상태에서도 참석했다. 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도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음모자들이 크라수스의 권위를 빌려 추종자들을 늘리려고 수작을 부렸다고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58년 키케로가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정치 공세로 위기에 몰렸을 때 집정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와 폼페이우스에게 키케로를 선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키케로가 끝내 망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후 키케로의 복귀를 강력하게 주장해 키케로가 1년만에 복귀할 수 있게 해줬다. 기원전 56년 마케도니아에서 속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피소를 로마로 소환하자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의 제안을 키케로와 함께 지지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의 아스쿨룸 시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 귀족과 결혼해 아들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낳았다. 아들 루키우스는 기원전 49년 법무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