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라틴어: Publius Cornelius Cetheg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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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73년 이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1년 |
전임 |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
동기 | 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
후임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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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알프스산맥에 거주하는 갈리아인을 굴복시키고 삼니움에 정착시켰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고대 사료에서 언급된 코그노멘 케테구스(Cethegus)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은 기원전 204년 집정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기원전 197년 집정관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였다. 그가 이 인물들과 어떤 관계인지는 전해지는 바 없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푸블리우스, 아버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행적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기원전 189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패배한 뒤 로마와 평화협약을 맺기를 희망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를 만나 소아시아 국경을 재정립하는 문제를 논의하러 찾아간 사절단 10인 중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도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당시 렌툴루스는 기원전 203년 법무관을 역임하면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프리카 원정 때 함대를 통솔하여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워서 위상이 드높았는데, 리비우스가 언급한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가장 낮은 행정관인 재무관 뒤에 적혔으니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며, 실제로는 케테구스가 참여했는데 리비우스가 오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원전 187년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와 함께 조영관을 역임했다. 두 조영관은 대규모 서커스를 개최했는데, 도중에 서커스에 참여한 배의 돛대가 여신 폴렌티아의 동상에 떨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로원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간주하고 서커스를 하루 연장하고 쓰러진 조각상 대신 새로운 조각상 2개를 설치하게 했다. 기원전 185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181년 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 후 리구리아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했으며, 기원전 180년 리구리아 총독을 맡아 알프스 산맥에 거주하는 갈리아 부족들을 복종시킨 뒤 삼니움에 이주시켰다. 그 로마로 귀환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큰 전투를 치르지 않고도 개선식이 거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73년 리구리아와 갈리아 키살피나로 이주한 이주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임무를 맡은 10인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