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오피미우스 라틴어: Lucius Opim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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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그리스 속주 디라키움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퀸투스 오피미우스(아버지) 루키우스 오피미우스(아들 또는 손자)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21년 |
전임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이우스 판니우스 |
동기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 |
후임 |
푸블리우스 마닐리우스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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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추종자들을 원로원 최종 권고에 따라 몰살시킨 인물이다.2. 생애
플레브스 출신이었다가 기원전 154년 퀸투스 오피미우스가 집정관에 선임되면서 로마 정계에 진출한 오피미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는 퀸투스 오피미우스의 아들로, 기원전 125년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이 해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로마 시민권을 라틴 시민권자들에게 개방하는 것을 제안하는 법안을 제시했으나 무산된 뒤 원로원에 의해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로 보내졌다. 라티움과 칼파니아 사이의 국경지대에 있는 프레겔라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분배되는 안건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해 반란을 일으켰다.오피미우스는 법무관의 자격으로 진압군을 이끌고 출진해 내부의 배신자가 성문을 열어준 덕분에 도시를 빠르게 공략한 뒤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프레겔라 시에 속한 영토 일부는 로마의 직할 통치를 받았고, 나머지는 이웃 도시들에 배분되었다. 그 후 그는 로마로 귀환한 뒤 개선식을 개최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원로원은 외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로마에 속했던 자들을 되찾은 것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기원전 123년 말, 오피미우스는 기원전 122년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공공연히 가이우스 그라쿠스에 적대적인 발언을 쏟아냈기에, 그라쿠스 측은 그가 집정관이 되면 곤란하다고 보고 가이우스 판니우스를 지지했다. 이어진 선거에서, 그는 그라쿠스의 지원을 받은 판니우스에게 낙선했다. 그러나 판니우스는 정작 집정관이 된 뒤 그라쿠스의 개혁에 일일이 제동을 걸었다.
이듬해 재차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그는 이번에는 기원전 121년도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동료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에서 켈트족과 전쟁을 치르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그가 단독으로 로마에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기원전 121년 1월 1일 취임식 직후부터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는 작심한 듯 선거운동때처럼
"그라쿠스의 법안을 폐기하겠다."
고 떠벌리고 다녔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두 번 호민관 경력을 체험하면서, 이를 간 원로원 의원들 역시 세를 꾸려 이에 합세했다. 하지만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자택에서 칩거한 채,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연초, 아프리카에서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이를 빌미 삼아 그라쿠스가 추진했던 '카르타고에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정책을 폐지하는 안건을 민회에 상정했다. 이에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열혈 지지자로 세력을 이끈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사방에서 지지자를 소집해 세를 불리고 항의 집회를 열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집결한 그라쿠스 지지자들은 곧 항의하면서 격한 움직임을 내보였고, 로마 시가지는 혼동에 빠졌다.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이는 봉기로 이어지고, 격투가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를 호위하는
릭토르 25인 중 한명인 퀸투스 안틸리우스가 살해당했다. 이때 안틸리우스가 살해된 이유는 그가 릭토르의 임무 그대로 이렇게 외치면서 자진해산 속에서 길을 열어 달라고 한 발언 때문이었다. 그는 이때"불량배들아! 선량한 시민들에게 길을 터라!"
고 했다가, 격분한 그라쿠스 열성 지지자에게 맞아 죽었다. 이 내용은 플루타르코스가 전하고 있는데, 같은 사건의 원인을 기록한
아피아노스의 기록은 다르다.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풀비우스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선동 연설을 시작했고,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지지자들과 경호원들을 대동해 나타나, 그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했다고 한다. 가이우스와 풀비우스는 이후 회랑에서 다른 곳에서 무리를 규합할 계획을 의논하면서, 시기에 대해 입을 맞췄다. 그런데 그때 안틸루스라는 한 로마시민권자 평민이 이를 듣고
"제발 우리 나라를 위하여 그러한 일들을 저지르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간청했다. 이에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는데, 이때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충직한 경호 담당 시종이 들고 있던 철필로 안틸루스를 때려 죽였다고 한다.플루타르코스, 아피아노스 주장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 모르지만, 이후 이야기는 똑같다. 안틸리우스인지 안틸루스인지 모르는 사람이 가이우스 그라쿠스, 풀비우스 지지세력에게 맞아 죽은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이 죽자, 난리가 났고, 시신이 실려 나갈 때, 소나기가 내리면서 모임이 해산됐다. 그리고 이튿날, 집정관 오피미우스는 그라쿠스 지지자들에게 맞아 죽은 남성의 시신을 정중히 포룸에 안치한 뒤, 원로원 의원 전체를 소환해, 만행을 폭로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끔찍하고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며 대성통곡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한심하게 생각했다가,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고, 원로원은 희생자의 죽음을 추모한 뒤, 평소 열리는 회의장으로 복귀해, 다시 회의를 열었다.
이 날, 원로원은 릭토르를 살해한 그라쿠스 일당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오피미우스에게 무제한의 권한을 주고 그라쿠스 추종자들을 척결하라는 내용의 원로원 최종 권고를 선포했다. 그는 즉시 크레타 투석병들을 모으고 모든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에게 무장을 갖추고 무장한 노예 2명과 함께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정상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에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그라쿠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이에 맞서 아벤티노 언덕에 그라쿠스 추종자들을 집결시키고 자기 집에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나눠줬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시가전을 벌이기를 원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원로원에 출석하면 더 큰 유혈사태가 없을 것이라며, 플라쿠스에게 원로원과 협상하자고 설득했다. 플라쿠스는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데 협상은 어불성설이라며 반대했지만, 그라쿠스가 뜻을 굽히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막내 아들 퀸투스를 포로 로마노로 보내 오피미우스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오피미우스는 무조건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퀸투스가 돌아와서 이 소식을 알리자, 플라쿠스는 이전 제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조건을 담은 제안을 담아 퀸투스를 다시 보냈다. 오피미우스는 퀸투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하고, 군대를 이끌고 아벤티노 언덕으로 진격했다.
젊은이가 자신 때문에 체포됐다는 소식에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절망해 자살하려고 했다.[1] 그렇지만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지지자들은 이를 막고,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언덕 너머의 강 건너 성스러운 숲으로 피신시켰다. 이런 가운데, 곧 스블리키우스 다리에서 양측은 맞붙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이어진 격전은 초반에는 팽팽했지만 오피미우스가 동원한 크레타 투석병들이 날린 돌멩이를 얻어맞은 그라쿠스 지지자들이 달아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어졌다고 한다. 플라쿠스는 버려진 목욕탕이나 누군가의 집에 숨어 있다가 장남 마르쿠스와 함께 발견되어 즉시 살해되었다. 오피미우스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 그라쿠스와 플라쿠스의 수급을 베어서 가지고 온 자에게 그의 머리 무게와 같은 금을 수여하겠다고 선언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중 플라쿠스의 머리를 가지고 온 사람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보상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오피미우스에게 체포된 퀸투스는 처형되거나 자살을 강요당했다.
한편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테베레 강 반대편으로 탈출했지만 추격대가 근처에 이르고, 지지자들이 다리 위에서 무참히 학살됐다는 이야기에 절망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고, 소꿉친구였으며, 평소 본인이 친절히 대한 시종이자 비서인 노예 필로크라테스에게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그는 자신이 귀족답고, 명예롭게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명했고, 지니고 다닌 단검을 건넸다. 필로크라테스는 정중히 인사를 한 뒤,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단번에 찔러 죽인 다음, 자신 역시 주인의 단검으로 목을 찔러 죽었다. 이후, 두 사람의 시신이 발견됐는데, 전투 전부터 가이우스 그라쿠스 머리를 원한 셉티물레이우스라는 자가 신원확인을 하자마자 그라쿠스의 머리를 베었다. 그는 머리 무게를 늘리기 위해,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머리 안에 납을 잔뜩 넣은 뒤, 이를 루키우스 오피미우스에게 바쳤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날 250명이 아벤티노 언덕에서 사망했고 3,000명이 이어진 학살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들의 유해는 테베레 강에 던져졌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후 그는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그라쿠스 일당으로부터 공화국을 구한 것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콩코르디아 신전을 건설했다. 기원전 120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수볼로는 오피미우스를 재판 없이 로마 시민을 처형한 혐의로 고발했다. 하지만 현직 집정관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그의 변호를 맡아 "그라쿠스 일당의 학살은 합법적으로, 그리고 조국의 이익을 위해 행해졌다"고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지면서,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기원전 116년, 오피미우스는 누미디아를 유구르타와 아드헤르발에게 각각 분할하는 문제를 다룬 10명의 특사로 구성된 위원회를 이끌었다. 위원회는 누미디아의 서쪽 부분을 유구르타에게 동쪽 부분을 아드헤르발에게 넘기기로 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따르면, 그는 처음에는 유구르타를 적대했지만 나중에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고 누미디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지역을 유구르타에게 넘겼다고 한다.
수 년 후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하고 로마군이 수툴라에서 참패한 뒤, 누미디아 문제와 관련된 귀족들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이때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되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이에 대해 그라쿠스를 심적으로 지지하는 재판관들이 오피미우스에게 편견을 갖고 추방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오피미우스는 가난에 시달리며 망명 생활을 이어가다가 디라키움에서 사망했다.
로마 제국 후기에 활동한 로마 학자 루키우스 암펠리우스는 기원전 102년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휘하에서 킴브리족과 맞서 싸운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를 언급했다. 현대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121년 집정관의 아들 또는 손자라고 추정한다.
3. 후대의 평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오피미우스를 로마를 군주정으로 몰고 가려던 그라쿠스 일당으로부터 구해낸 뛰어난 시민이었지만 결국 적들에게 희생되어버린 비운의 인물로 치켜세웠다. 그는 여러 연설에서 디라키움 인근 해안에 있는 그의 무덤과 포로 로마노의 기념물을 언급하며, 나라를 구했으나 정적들의 비방에 의해 잊혀져버린 그를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와 그의 지지자들의 처형을 주장했을 때 오피미우스의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다.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키케로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그를 완벽하고 진지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반면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오피미우스가 자기들이 저지른 범죄를 조사하기 시작하는 그라쿠스를 막으려는 귀족들의 사주를 받았다고 주장했으며, 플루타르코스는 릭토르가 정적들에게 살해된 것을 기회로 삼아 수많은 동포들을 학살해버린 선동가이자 위선자라고 비판했다.
[1]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여러 면에서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다른 모습을 선보였다. 그는 원로원 최종권고가 통과되고, 오피미우스가 그 대권을 수여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반쯤 멍해 있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돌아가신 아버지 전신 동상 앞에서 눈물만 흘렀다. 반대로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어차피 벌어진 일이라며, 집에서 술을 취할 때까지 마신 뒤, 뜻을 굳혀, 지지자 집결과 동시에 무장 준비를 명했다. 이런 모습처럼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풀비우스와 달리 다음날, 원로원의 출석 요구에 변론을 위해 가려고 했었다. 이유는 자신과 플라쿠스만 책임을 지면 지지자들까지 몰살될 이유가 적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풀비우스와 지지자들은 출석하더라도 결과가 똑같다며 이를 만류했다. 따라서 그라쿠스는 생각을 바꿔 이를 거부 후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도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