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힙사이우스 라틴어: Marcus Plautius Hypsae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미상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25년 |
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
동기 |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후임 |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가이우스 섹스티우스 칼비누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플라우티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하지만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그의 조부와 아버지에 대한 인적사항이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가족 관계는 알 수 없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웅변가에 대하여>에서 그를 민법 전문가라고 평하면서도, 연설 실력은 '옹알이'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근거해 기원전 128년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이후 그는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아게라스투스가 판사를 맡고 전임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가 검사를 맡은 양육권 문제를 둘러싼 재판에 변호인으로 참석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소리를 크게 지를 뿐 장황하고 두서 없는 주장을 늘어놓았고, 그에게 변호를 맡겼던 의뢰인은 절망에 빠져 법무관 크라수스에게 패소를 받아들일 테니 재판을 끝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기원전 125년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플라쿠스가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로 파견되었을 때, 그 역시 다른 지방으로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이탈리아 도시 프레겔라 시가 로마에 반기를 들었을 때, 이를 진압하는 임무는 법무관에게 부여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아시아에서 돌아온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를 대신해 아시아에 부임했을 거라 추정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