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마르쿠스 아풀레이우스 (Marcus Appuleius) |
출생 | 기원전 55년 |
사망 | 기원전 15년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
부모 |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1세 대(大) 옥타비아 |
형제자매 |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2세 |
배우자 | 소(小)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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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정 말과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초기의 원로원 의원, 로마 제정 시기의 집정관이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복누나 대(大) 옥타비아의 아들이다.어머니의 이복동생 아우구스투스의 후원 아래, 아우구스투스 휘하의 장군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와 함께 기원전 20년 집정관에 올랐다.
2. 생애
원로원 의원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1세와 그의 아내인 대 옥타비아의 두 아들 중 한명으로 태어났다. 외조부는 소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 남매의 아버지인 신참자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이다.어머니 대 옥타비아가 이복동생인 소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 남매와 큰 교류가 없었지만, 일찍부터 아버지, 삼촌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따른 원로원 의원이자 카이사르파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혈연상 외조부 옥타비우스를 통해 이어진 어머니의 이복동생 아우구스투스와도 일찍부터 교류했다.
기원전 23년 혹은 기원전 22년부터 트리덴툼 파견 특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그 이름이 로마관보상 등장한다. 이를 통해, 여러 학자들은 그가 이 시기 아버지의 의석을 잇거나 그 전에 별도의 의석을 어머니의 동생 아우구스투스에게 받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시기,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부친 옥타비우스의 피를 이어 어쨌든 조카인 그를 후원했고, 다음 해에 기원전 20년 집정관에 입후보시켜 선출시킨다. 이때 그가 함께 취임한 이는, 아우구스투스를 따른 장군으로 아우구스투스를 진심으로 따른 열혈 추종자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였다.
집정관에서 물러난 뒤, 몸이 좋지 않아 다른 직책을 맡은 기록이 없다. 그는 기원전 15년경 대략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 이는 기원전 12년 아우구스투스와 그 형제자매 및 친인척이 모두 참석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장례식 명단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형제로는 기원전 29년 집정관을 맡은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2세가 있다. 형제인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2세는 마르쿠스 아풀리우스처럼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로 대우받으며, 히스파니아 총독, 아시아 총독을 역임하고 기원전 23~22년 사이에 벌어진 군사적 충돌 해결 문제로 아우구스투스에게 직접 개선식에 준하는 영예를 수여받았다. 이후에도 그의 형제 섹스투스 아풀리우스 2세는 승승장구했는데, 그는 티베리우스에 이어 일리리쿰 총독이 됐다.
조카로는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3세, 아풀레이아 바릴라가 있다. 이중 남조카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3세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의 총애를 받았고, 티베리우스의 제위계승 당시 현직 집정관으로 있으면서 자발적으로 먼저 충성을 맹세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반면 여조카 아풀레리아 바릴라는 서기 17년, 티베리우스 황제와 그 모후인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서거한 아우구스투스를 모욕한 혐의와 반역 모의 혐의로 기소돼 큰 곤욕을 치렀다. 그녀는 다행히 반역 모의 혐의에선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리비아 드루실라에 관해 불경스러운 말을 한 것은 사실이라서 죽을 때까지 로마에서 200마일 떨어진 곳에 살아야 되는 추방형에 처해졌다.
영국, 뉴질랜드의 로마사 권위자 로버트 사임에 따르면, 그는 이복이모 소 옥타비아의 차녀 소(小)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 주장은 사실로 보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