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 라틴어: Quintus Pompeius Ruf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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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8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피케눔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아울루스 폼페이우스(조부) 퀸투스 폼페이우스(아버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아들)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손자) 폼페이아 술라(손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88년 |
전임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
후임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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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개혁을 지지했고, 동료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로마 진군을 지원했다. 이후 이탈리아 북부 피케눔에 주둔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군단의 지휘권을 부여받았지만 스트라보의 사주를 받은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2. 생애
노빌레스 가문인 폼페이우스 씨족 출신이다. 이 가문은 베수비오산 인근의 폼페이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은 기원전 141년 집정관 퀸투스 폼페이우스를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로마 정계에 진출하여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아울루스 폼페이우스이고 아버지는 퀸투스 폼페이우스였다. 일부 학자들은 아버지 퀸투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141년 집정관 퀸투스 폼페이우스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활동한 시대 간격이 크기 때문에, 다수의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북부 피케눔 일대에서 광대한 세력을 구가하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와는 먼 친척이었다.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토벌하기 위해 "모든 폼페이우스 일족"이 집결했다고 한다. 그 역시 여기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카토"와 "폼페이우스"는 사투르니누스와 대립하다 추방당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를 귀환시키는 법안을 제시했다. 오로시우스는 이 법안을 제시한 카토와 폼페이우스의 전체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다른 기록에서는 "원로원과 민회에서 메텔루스의 귀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라고 기술할 뿐이기에, 이 폼페이우스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기원전 91년, 루푸스는 '시법무관(praetor urbanus)'을 맡았다. 그가 시법무관으로서 행한 것으로 알려진 것은 기원전 121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의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명성을 먹칠하는 것을 규탄하고 그가 아버지의 유산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사실 뿐이다. 한편, 그는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에퀴테스가 주도하는 사법부를 원로원 의원이 주도하는 것으로 개편하는 법안, 농지를 빈민들에게 분할하는 법안,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분배하는 법안 등 일련의 개혁을 지지했다. 그러나 개혁은 당해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법무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이 자기들과 같은 시민권을 누리는 걸 원하지 않은 로마 시민들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쳤고, 드루수스는 개혁을 밀어붙이던 중 암살당했다.
이로 인해 개혁이 중단되자, 격분한 이탈리아인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면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90년, 호민관 퀸투스 바리우스 세베루스 히브리다가 동맹시들이 로마에 반기를 일으키도록 선동한 자들을 처벌하자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따라 드루수스를 지지했던 인사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많은 이들이 망명해야 했다. 루푸스 역시 전직 집정관 필리푸스에게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 16세였던 키케로는 재판을 구경했고, 훗날 "루푸스의 증언은 열정이나 힘 또는 풍부한 언변에서 기소자보다 열등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재판의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별다른 장애를 받지 않고 정치 활동을 이어간 것을 볼 때 무죄를 선고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89년,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비티니아 왕국과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순식간에 소아시아 전역을 석권하고 발칸 반도로 진출해 고대 아테네 등 여러 도시 국가의 호응을 얻었으며,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8만 명을 학살했다. 이에 원로원은 그를 응징할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했고, 야심가들은 동방으로 출진해 막대한 군공과 전리품을 획득할 기회가 주어질 집정관이 되고 싶어했다. 그는 이 선거에 출마했는데, 상대 후보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가이우스 마리우스 등이었다. 그는 동맹시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지원을 받는 파트리키인 술라와 정치적 동맹을 맺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 아들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를 술라의 딸 코르넬리아 술라와 결혼시켰다.
치열한 선거 결과 술라와 루푸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이후 원로원 회의에서 제비뽑기를 한 결과 동방으로 출정하는 임무는 술라에게 맡겨졌고, 그는 이탈리아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곤경에 처했다. 당시 로마 정부는 동맹시 전쟁에서 귀순한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분배하기로 했다. 이제 이들에게 선거구를 어떻게 분배할 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엔 로마 포럼에 모인 시민들을 주거지 별로 35개 부족으로 나눈 뒤, 이 35개의 부족의 과반수로부터 지지를 얻어낸 이가 당선되는 방식으로 선거가 진행되었다. 원로원은 새로운 로마 시민들에게 8개의 부족을 할당하려 했다. 하지만 이 무렵 호민관에 당선된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이탈리아인들에게 모든 선거구를 나눠줘야 한다고 여기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민회에 법안을 상정했다. 그러나 원로원이 강력히 반대했고, 로마 시민들 역시 정치적 특권을 새로운 시민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술피키우스는 술라에게 자신의 법안이 통과되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마리우스를 찾아갔다. 마리우스는 술피키우스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동방 원정 지휘권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요구했다. 술피키우스는 이 거래를 받아들이고 마리우스의 지지자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한편 놀라에서 동방으로 출진할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던 술라는 로마에서 분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포룸으로 이동한 뒤 동료 집정관인 루푸스와 함께 카스토르, 폴룩스 신전의 로스트라 연단에 서서 종교적 권한을 이용해 페리아이(feriae: 모든 공무가 중단되는 휴일)을 선언했다. 그러자 술피키우스의 선동을 받은 군중이 폭동을 일으켰고, 술라는 팔라티누스 언덕 기슭에 있던 마리우스의 집으로 도주했다. 마리우스는 술라에게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휴일 선언을 철회하고 술피키우스의 법안에 대한 표결 진행을 허락하라고 권고했고, 술라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술피키우스는 민회를 소집해 이탈리아인의 선거권에 관한 그의 법안을 통과시킨 뒤, 며칠 후에 술라의 동방 총사령관 지명을 철회하고 그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긴다고 선포했다.
마리우스의 요구에 따라 술피키우스의 법안 통과를 허용한 뒤 굴욕감을 간직한 채 놀라로 돌아간 술라는 전령으로부터 지휘권이 마리우스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그는 병사들을 선동하여 자기 편으로 삼은 뒤, 마리우스가 인수인계를 하려고 보낸 장교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그는 동료의 거사에 가담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루푸스는 처음부터 술라와 함께 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로마 인근에서 동료와 합세했다고 한다. 술라와 루푸스는 7개의 로마 성문 중 하나인 포르타 콜리나(Porta Collina)를 돌파한 뒤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가 급히 끌어모은 검투사와 해방노예 부대를 격파했다. 마리우스 등은 도주했고, 두 집정관은 원로원을 압박해 술피키우스의 모든 법을 폐지하고 마리우스, 술피키우스를 포함한 12명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술피키우스는 곧 노예의 배신으로 살해되었고, 그의 수급은 포로 로마노의 연단에 전시되었다.
그 후 북방에 군림하던 스트라보의 지휘권을 회수하고 루푸스에게 넘기는 조치가 내려졌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원로원이 그렇게 결정했다고 기술했고, 아피아노스는 민회가 그렇게 결정했다고 밝혔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호민관 가이우스 헤레니우스가 술라가 귀국할 때까지 법안 통과를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패했다고 기술했다. 술라는 스트라보의 지휘권을 빼앗는 결정의 배후에 있었다. 그는 동방으로 떠나기 전에 잠재적 경쟁자인 스트라보를 배제하고 루푸스에게 강력한 군대를 맡겨서 로마의 질서를 잡아주길 희망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엇나갔다. 스트라보는 군영에 찾아온 루푸스에게 지휘권을 넘기겠다고 밝혔지만, 루푸스는 다음날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스트라보는 병사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했기에 명령 없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도 누구도 처벌하지 않고 지휘권을 계속 맡았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가 병사들에게 루푸스를 살해하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주장했고, 현대 학계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의 아들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는 술라의 딸 코르넬리아 술라와 결혼해 아들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 딸 폼페이아 술라를 낳았다. 손자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는 기원전 52년 호민관을 역임했고, 손녀 폼페이아 술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2번째 아내가 되었다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보나 데아 여신을 위한 여성들만의 제의에 몰래 참여했다가 들통난 일에 연루되어 카이사르와 이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