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라일리우스 라틴어: Gaius Lael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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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평민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아버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아들)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0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
후임 |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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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약한 고대 로마의 평민 출신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친구로, 이베리아 원정과 아프리카 원정에 활약했다. 특히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를 격파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이후 스키피오의 후원을 받아 정계에 진출하여 집정관까지 역임하였으며, 말년에 폴리비오스에게 포에니 전쟁에 관한 주요 정보를 제공했다.2. 생애
아버지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이며, 어렸을 때부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절친한 친구였다는 것 외에 그의 유년기에 대해 알려진 건 거의 없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는 부유하지도 않았고 고귀한 신분도 아니었지만,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의 친구로서 유년기부터 죽을 때까지 그의 모든 행적에 동참했다고 한다. 스키피오도 그런 그를 무척 소중하게 여겨서, 그가 없을 때 중요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아 했다고 한다.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 이래 스키피오와 함께 군대에 배속되어 친구의 곁에서 적에 맞서 싸웠으며, 기원전 210년 스키피오가 히스파니아 총독이 되었을 때 동행했다. 스키피오는 그해 겨울 장성들에게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연이어 격파하는 걸 작전 목표로 삼을 거라고 밝혔지만, 오직 그만이 실제로는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 공략한다는 걸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는 스키피오의 비밀 지시에 따라 극비리에 군대를 함대에 태워 이동해 같은 날 카르타고 노바에 도착했다. 다음날, 스키피오와 라일리우스는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 공격하였고, 카르타고 노바는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카르타고 노바 공방전). 스키피오는 친구의 공적이 자신과 동등하다고 선언하고, 그에게 황금 화환을 수여했다. 이후 귀족 포로들을 대동한 채 스키피오의 동생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함께 로마로 가서 원로원에 승리를 보고하였고, 가능한 한 빨리 히스파니아로 돌아가라는 명령에 따랐다.
기원전 208년 하스드루발 바르카와의 바이쿨라 전투에서, 그는 절반의 병력을 이끌고 카르타고군이 점령한 언덕을 우회하여 공격을 감행해 대승에 크게 기여했다.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에서는 먼저 상대 기병 지휘관 마고 바르카를 무찌른 뒤 보병을 이끌고 카르타고 주력군과 맞붙어 대승에 일조했다. 이리하여 히스파니아를 평정한 뒤, 스키피오는 그를 누미디아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에게 보내 로마와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고, 시팍스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라일리우스는 히스파니아에 돌아와서 스키피오에게 협상 결과를 보고하였고, 이후 스키피오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기원전 205년 스키피오가 집정관을 맡아 시칠리아 속주로 가서 아프리카 침공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는 언제나처럼 친구를 따라가서 아프리카 해안을 급습하여 약탈하는 한편 적의 방비를 정탐했다. 또한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를 만나 동맹을 맺고, 스키피오가 상륙할 때 기병대를 이끌고 합류하도록 했다. 그러나 마시니사는 시팍스와 카르타고의 협공으로 나라를 잃고 얼마 안되는 기병과 함께 스키피오에 가담했다.
기원전 204년 로마군이 스키피오의 인도하에 아프리카에 상륙했을 때, 그는 대 카토와 함께 좌익 편대를 이끌었다. 로마군은 우티카 인근에서 겨울을 보낸 뒤, 봄에 카르타고와 시팍스의 누미디아 연합군을 상대로 야습을 감행했다. 그는 마시니사와 함께 일부 병력을 이끌고 야습을 성사시켰고, 적병을 모조리 살육했다.( 우티카 전투) 이후 스키피오의 지도하에 동부 누미디아로 진군하여 시팍스-하스드루발 기스코의 연합군을 다시 한번 격파해( 바그라다스 전투), 마시니사가 동부 누미디아를 회복하고 왕으로 복귀하게 했으며, 연이어 서부 누미디아로 진군해 시팍스를 다시 한번 격파하여 포로로 잡고 누미디아 전체를 공략했다. 그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황금 화환을 받았다.
그는 시팍스 외 고위급 포로들과 마시니사의 사절단과 함께 로마로 가서 승리를 보고한 뒤, 마침 로마로 와서 평화 협정을 맺은 카르타고 사절과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한니발 바르카가 돌아오자 평화 협정을 취소하고 다시 한번 일전을 벌이기로 했고, 그는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의 지도하에 좌익의 이탈리아 기병대를 이끌고 상대 기병대를 물리친 뒤, 마시니사와 함께 카르타고군의 후방을 강타하면서 승리에 일조했다. 자마 전투의 패배로 카르타고는 더 이상 싸울 여력을 잃고 비로소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다시 한번 로마로 가서 승전보를 알렸다.
기원전 202년 스키피오가 집정관을 맡았을 때 재무관에 선출되었고, 기원전 197년에 평민 조영관이 되었으며, 기원전 196년 시칠리아 총독을 역임하였다. 기원전 193년 친구의 지원에 힘입어 집정관 선거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기원전 191년 다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스키피오의 동생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이후 벌어진 일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원로원은 라일리우스가 동방 원정을 맡아야 하고 루키우스 스키피오는 그리스에 남아서 물자를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에 라일리우스는 제비뽑기를 하지 말고 원로원에 결정을 맡기자고 제안했다. 그때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나서서 항의하자 민심이 격앙되었고, 원로원은 어쩔 수 없이 루키우스 스키피오에게 원정을 맡겼다고 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제비뽑기 결과 라일리우스가 동방 원정을 맡게 되었지만,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의 설득에 따라 루키우스 스키피오에게 원정을 넘겨줬다고 한다. 키케로에 따르면, 제비뽑기 결과 루키우스가 동방 원정을 맡게 되었지만, 원로원은 그를 군사적으로 무능한 인물이라 여겨 반대했다. 그때 푸블리우스가 나서서 동생을 옹호했고, 결국 그의 뜻대로 관철되었다고 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결국 절친한 친구보다 동생을 우선시했던 셈이다.
이후 스키피오 형제가 동방 원정을 떠난 동안, 그는 이탈리아에 남아서 북이탈리아의 켈트족 문제를 처리했다. 크레모나와 플라켄티아에 이주할 이들을 모집했으며, 보이족의 영역에 두 개의 새로운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다. 이 일대에 대한 그의 권한은 이듬해까지 연장되었다. 스키피오 형제가 몰락한 뒤에는 정계에서 이렇다할 활약을 하지 않았지만, 포에니 전쟁의 영웅으로서 대중의 존경을 받았다. 기원전 160년경 폴리비오스를 만나 포에니 전쟁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들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는 기원전 140년에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절친한 친구였다. 대를 이어 스키피오 가문의 충실한 클리엔테스였다. 아이밀리아누스의 후원을 받아 농지개혁 법안을 추진했으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곧 그만두었고, 현명하다는 뜻의 '사피엔스'라는 아그노멘을 얻었다. 사피엔스의 두 사위 또한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둘째 사위인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는 키케로의 스승이기도 했다. 키케로는 스승을 통해 라일리우스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신의 작품의 영감으로 삼은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