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 라틴어: Lucius Calpurnius Best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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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칼푸르니아(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11년 |
전임 |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
후임 |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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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마의 전설적인 두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 칼푸스를 시조로 둔 평민 귀족( 노빌레스)이다. 그러나 베스티아 지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기원전 111년 집정관의 가족 관계 역시 알려진 바 없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120년 호민관을 맡은 뒤 2년 전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압력으로 추방되었던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레나투스를 복귀시키자는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한다.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180년 최고 행정관 간의 취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따라 기원전 114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11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시기에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했다. 제비뽑기를 한 결과, 베스티아가 전쟁 지휘권을 얻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따르면, 유구르타는 로마군이 곧 누미디아에 쳐들어오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재빨리 아들 옥시타스와 몇몇 사절을 로마로 보내 막대한 뇌물을 또다시 건네려 했다. 베스티아는 이 사절들을 영접하려 했지만, 원로원은 유구르타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전에는 어떤 사절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자국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베스티아가 누미디아에 상륙하여 여러 마을과 요새를 공략하자, 유구르타는 베스티아에게 찾아가서 30마리가 넘는 코끼리와 상당한 양의 금화를 건넸다. 이에 베스티아는 그와 평화를 이뤘다고 주장하며 로마로 귀환했다. 이에 호민관 가이우스 멤미우스는 베스티아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었다고 규탄했다. 원로원은 진상 조사를 위해 법무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특사로 보냈다. 유구르타는 카시우스의 조언에 따라 로마로 와서 재판을 받기로 했다. 재판 분위기는 유구르타에게 지극히 적대적이어서, 유구르타가 유죄 판결을 받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는 이 재판에서 유구르타를 신랄하게 공격해 민중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유구르타가 처음 발언하려는 순간, 호민관 가이우스 베비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했다. 시민들은 그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었다는 걸 눈치채고 격렬한 야유를 퍼부었지만, 재판은 그대로 무산되었다. 그 후 유구르타는 유유히 본국으로 돌아갔다.
기원전 110년, 원로원은 베스티아가 체결한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고,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휘하의 로마군을 파견해 유구르타를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유구르타가 싸움에 응하지 않으면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집정관 선거가 다가오자, 스푸리우스는 선거를 주관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면서 군대를 동생 아울루스에게 맡겼다. 아울루스는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나중에 이 사실이 고발될까 걱정하다가 공적을 세워 만회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유구르타가 보물을 보관해뒀던 수흘 마을을 공격했다. 그러나 유구르타의 첩자들이 사전에 이러한 적의 움직임을 간파했고, 유구르타는 군단병들을 매수해 숲으로 유인했다. 그 후 누미디아군이 로마군을 포위했을 때, 리구리아와 트라키아 출신의 기병대가 적에게 매수되어 탈주했다. 누미디아군의 뒤이은 공세로 막심한 피해가 속출하자, 이제 싸워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아울루스는 항복했다. 유구르타는 패배한 지휘관과 병사들이 멍에 아래로 지나가게 한 뒤 2주 안에 누미디아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로마군이 그런 굴욕을 당하고 쫓겨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인들은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로마 귀족들이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당했다. 이때 베스티아 역시 추방되었다가 모종의 시기에 로마로 귀환했다. 그러나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탈리아인들이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한 자들을 처벌하자는 호민관 퀸투스 바리우스 세베루스 히브리다의 법안이 통과된 뒤 이탈리아인들을 옹호한 혐의로 기소되어 재차 추방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딸 칼푸르니아는 기원전 88년 호민관이며 당대의 저명한 웅변가였던 푸블리우스 안티스티우스와 결혼해 안티스티아를 낳았다. 안티스티아는 훗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첫번째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82년 술라의 내전 때 안티스티우스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한 마리우스파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다마시푸스에게 살해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칼푸르니아는 남편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원수에게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 자결을 택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또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폼페이우스가 술라의 의붓딸 아이밀리아 스카우라와 결혼하기 위해 안티스티아와 이혼하자, 칼푸르니아는 딸의 명예가 손상되었다고 여겨 자결을 택했다고 한다. 안티스티아가 어찌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나, 한 기록에는 어머니와 함께 자결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