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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1 12:50:03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Quintus Sertorius
생몰년도 기원전 123년 ~ 기원전 72년
출생지 로마 공화정 사비네 주 누르시아
(現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노르치아)
사망지 로마 공화정 히스파니아 속주
(現 스페인)
지위 귀족
법무관/히스파니아 총독
국가 로마 공화정
가족 레아(어머니)
복무기간 기원전 105년 ~ 기원전 72년
계급 에퀴테스(equites)
참전 킴브리 전쟁
동맹시 전쟁
술라의 내전
세르토리우스 전쟁
직업 장군,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창기2.2. 히스파니아의 총독2.3. 세르토리우스 전쟁2.4.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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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로마 진군에 맞서 싸운 민중파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으며 로마에서 축출된 뒤 히스파니아에서 발호해 민중파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의 군사적 역량은 매우 훌륭하여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붙이는 진압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심지어 고대 로마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히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조차 그를 상대로는 고전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히스파니아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되었고 결국 부하인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에게 암살당했다.

2. 생애

2.1. 초창기

기원전 123년 이탈리아 사비네 주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잃었지만, 어머니인 레아(Rhea)의 각별한 애정을 받으며 양육받았다. 레아는 그가 최대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 이렇게 헌신적인 양육 덕분인지, 그는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은 소년으로 자라났고, 웅변가나 법학자가 되고자 하는 큰 꿈을 품고 10대 중후반에 로마로 이주했다.

로마에서 변호가이자 연설가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20대 초반 때부터 군대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킴브리 전쟁에서 전직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군단에 배속되어 아라루시오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전멸하였지만 그는 말을 잃고 부상당한 상태에서도 론 강을 헤엄쳐 건너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후 기원전 102년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 휘하에 들어가 아쿠아이 섹스티아이와 베르켈라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게르만족을 격파하는데 한 몫을 톡톡히 했다.

기원전 97년,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 티투스 디디우스 휘하 군단의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으로 배속되었다. 그는 카스툴로에서 켈티베리아인의 습격으로 도시가 함락당하자 탈출 후 병사들을 규합한 뒤 켈티베리아인의 복장으로 꾸며 성으로 접근했다. 켈티베리아인들이 동료인 줄 알고 성문을 열자, 그는 사방으로 공격해 그들을 섬멸하고 살아남은 자들을 모조리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후 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에서 신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전투를 수행하다가 한쪽 눈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용기와 명예를 증명하는 표식이 언제나 몸에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용기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기원전 88년에 호민관 선거에 출마했다. 그런데 집정관 술라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훼방을 놓았고 결국 낙선했다. 마리우스를 북아프리카로 축출한 술라가 폰투스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로마를 떠나자, 그 직후 킨나가 이끄는 민중파는 추방당한 마리우스를 불러들였다. 세르토리우스는 마리우스가 지나친 복수심으로 일을 그르칠 거라며 마리우스의 합류를 반대했지만, 결국 마리우스는 로마에 입성하여 세르토리우스가 우려했던 대로 대규모의 숙청을 단행하고 7번째 집정관에 취임한 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2.2. 히스파니아의 총독

기원전 83년,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치르던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와 다르다누스 평화 협정을 맺은 뒤 브룬디시움에 상륙했다.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면서 민중파와 이에 가담한 동맹시들을 상대로 격렬하게 맞붙었다. 세르토리우스는 술라에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했고 히스파니아로 달아났다가 다시 아프리카로 도피했다. 그후 그는 잔여 세력을 끌어모은 뒤 히스파니아로 쳐들어가 아나스 강 전투에서 총독인 마르쿠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를 죽이고 스스로 히스파니아 총독을 자칭했다. 이에 메텔루스 피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히스파니아에 도착했지만 세르토리우스는 게릴라전으로 메텔루스 피우스를 격퇴하였고 그에게 희망을 건 민중파는 앞다투어 세르토리우스에게 가담했다. 또한 히스파니아인들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그를 ' 한니발의 재림'이라 여기며 존경했다.

세르토리우스는 군사적으로 유능할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상당한 역량을 갖췄다. 그는 로마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 사이에서 300명의 원로원을 구성하고 이들과 함께 히스파니아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또한 자신에게 협조하는 히스파니아인의 자녀들을 위해 우에스카에 학교를 짓고 로마식 교육을 받게 했다. 또한 독자적으로 동전을 주조하고 군대 편제를 자신의 뜻대로 구성해 노골적으로 옵티마테스 파가 장악한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2.3. 세르토리우스 전쟁

메텔루스 피우스가 세르토리우스의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에 고전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집정관 레피두스와 에트루리아의 반란을 진압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휘하 군단을 이끌고 메텔루스 피우스와 합류했다. 폼페이우스는 적의 본거지로 진격하기 위해 연안 도로를 개척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3만의 보병과 1천의 기병을 지휘한 폼페이우스는 라우론에서 세르토리우스의 공격을 받고 1만의 병력을 잃는 등 메텔루스 피우스와 마찬가지로 세르토리우스에게 패전한다.

기원전 75년, 세르토리우스는 수크로에서 다시 폼페이우스와 맞붙었다. 이 때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은 다른 곳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부하들과 싸우고 있는 메텔루스 피우스가 합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투를 감행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이 전투에서 적의 한쪽 측면을 돌파하고 폼페이우스가 도주하게 만들었지만, 그 사이에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또다른 측면이 폼페이우스의 부관인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에게 격파되는 바람에 철수한다.

그 후 메텔루스 피우스가 세르토리우스의 부하인 루키우스 히르툴레이우스를 격파하고 폼페이우스와 합류하자, 세르토리우스는 사군툼 근방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히르툴레이우스가 전사하는 등 전세가 불리하자 퇴각했다. 이 패배로 히스파니아에서 그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기원전 74년,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는 압도적인 군세를 활용해 세르토리우스를 압박했다. 세르토리우스는 게릴라 전법을 활용해 몇번의 소규모 승리를 거뒀지만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2.4. 최후

세르토리우스는 히스파니아의 지배자로 군림한 이래 토착민들을 고위 계급에 임명시키는 등 토착 세력의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의 밑에서 복무했던 로마 장교들은 이베리아인들과 켈티베리아인들을 중용하는 세르토리우스에게 반감을 품었고 결국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의 선동을 받은 군단병들이 우에스카에서 연회에 참석한 세르토리우스를 암살한다.

페르페르나는 세르토리우스의 세력을 물려받았으나 그의 군사적 재능은 세르토리우스만 못했고 폼페이우스의 매복에 걸려들면서 세르토리우스와 같은 해에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