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라틴어: Lucius Valerius Flacc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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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5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시아 속주 니코메디아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증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조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아버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형제)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86년 |
전임 |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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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아 동방으로 파견되었지만 부하들의 배신으로 피살당했다.2. 생애
고대 로마에서 가장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발레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 중에서도 플라쿠스 지파는 메살라 지파와 함께 기원전 2세기부터 발레리우스 씨족 중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쳤다. 증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95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대 카토와 함께 감찰관을 맡았다. 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52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형제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93년 집정관을 맡았다. 사촌으로 기원전 100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있었다.기원전 99년 조영관을 역임한 그는 기원전 99년 12월 10일 호민관에 선출된 가이우스 아풀레리우스 데키아누스로부터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지지자들을 학살할 때 가담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재판 결과는 전해지지 않지만 이후에도 경력을 이어간 것을 볼 때 무죄를 선고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93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연설 도중에 스카우루스라는 재무관이 직속 상사인 플라쿠스를 법정에 회부하려 했으나 원로원으로부터 금지되었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이 플라쿠스가 법무관으로서 아시아 속주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훗날 아시아 도시들은 그를 기리는 경기를 개최할 비용을 지불했다. 이 돈을 트릴리 시에서 모였고,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이것을 소유했다.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추종자들이 장악한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에 가담하여 로마에 입성하는 데 일조했다. 기원전 86년 1월 대숙청을 단행한 뒤 7번째 집정관에 선출된 후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방으로 출정한 술라를 토벌할 준비에 착수하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킨나는 수 개월간 단독 집정관을 맡다가 여름에 플라쿠스를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했다. 그는 집정관으로서 막대한 빚을 진 로마인들이 심각할 정도로 늘어난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은이 아닌 구리돈으로 빚의 1/4만 지불하면 부채를 탕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원전 86년, 2개 군단을 이끌고 동방으로 출진했다. 이 원정의 목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와 아피아노스는 그의 공식 임무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 수행이지만 실제 임무는 술라를 토벌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헤라클레아의 멤논에 따르면, 그는 술라와 협조하기를 원하는 원로원의 뜻에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브룬디시움에서 출항할 때 폭풍우를 만나 큰 손실을 입었고, 뒤이어 지중해 해상에서 미트리다테스 함대에게 요격당해 또다시 큰 손실을 입고 일부 분견대가 술라 편으로 넘어가버리는 등, 원정은 초반부터 안 좋게 흘러갔다.
당시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이던 술라는 플라쿠스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그 쪽으로 돌렸다. 양군은 테살리아의 메이테아 시 인근에서 조우했다. 양측은 얼마 동안 대치하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플라쿠스는 북쪽의 마케도니아로 갔고, 술라는 남쪽의 보이오티아로 향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두 사령관이 미트리다테스 6세에 대한 공동 대응을 하기로 합의했거나 병사들이 술라 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한 플라쿠스가 일부러 술라와의 결전을 미루고 미트리다테스 6세부터 치기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플라쿠스는 마케도니아를 통과하여 비잔티움으로 이동한 뒤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칼케돈에 진입했다. 그러나 그는 비잔티움에서 부관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와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핌브리아는 상관이 칼케돈에 먼저 건너는 것을 지켜보다가 남은 병사들에게 플라쿠스가 전리품 일부를 숨기고 있다고 선동해 그들을 자기 편으로 삼았다. 이 소식을 접한 플라쿠스는 도로 비잔티움으로 돌아가 핌브리아를 처단하려 했지만,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마저 핌브리아 편으로 귀순해버리자 칼케돈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니코메디아로 이동했다. 그 후 그곳의 우물에 숨었다가 핌브리아 추종자들에게 체포된 뒤 참수되었다. 잘린 머리는 바다에 던져졌고, 남은 시신은 매장되지 않고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방치되었다.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63년에 법무관을 맡았으며, 카틸리나 탄핵을 주동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