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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군단 알라우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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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egio V Alaudae.[1] 상징은 코끼리. 갈리아 전쟁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고,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라인 전선에 배치되었다. 70년 바타비아 반란에 휘말려 해체되었다.

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기원전 5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암비오릭스의 난으로 큰 손실을 입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에서 자신의 비용으로 5군단을 창설했다. 이 군단은 비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최초의 군단이었다. 그래서 갈리아 트란살피나에 흔한 종달새라는 뜻의 알라우다에가 부대 별칭이 되었다. 원로원은 자신들의 승인 없이 창설된 5군단을 인정하길 꺼렸지만, 결국 그들을 합법적인 군단으로 인정했고, 군단병들은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 이 일은 속주민들이 로마를 위해 싸우는 대가로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음으로써 속주의 로마화가 가속화되는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5군단은 베르킨게토릭스의 갈리아 대봉기에 맞서는 카이사르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특히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선배 군단들과 함께 알레시아 성내와 포위망 외곽에서 동시에 협공해오는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굳건히 버텨서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다. 그 후 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5군단은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카이사르를 따라 이탈리아로 진군했고, 이후 아풀리아에 머물면서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 원정에 착수하는 동안 발칸 반도에 있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이탈리아를 급습하는 것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가 발칸 원정에 나섰을 때 동행했으며, 디라키움 공방전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고대 사료에서 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확실하다. 그 후 기원전 47~46년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고, 탑수스 전투에서 중앙 대열에 배치되었다. 이때 그들은 적의 전투 코끼리 60마리를 효과적으로 격퇴해 승리에 일조했고, 이후 코끼리를 군단의 상징으로 삼았다. 기원전 46~45년 카이사르의 2차 히스파니아 원정에도 참여했고, 문다 전투에서 3군단 갈리카와 함께 좌익을 맡아 결정적인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편에 서서 무티나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 맞서 싸웠고, 2차 삼두정치가 결성된 후에는 삼두파 군대의 일원이 되어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해방자파 로마군을 상대로 격돌해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지중해 동부로 옮겨져서 안토니우스의 지휘를 받았고,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도 참여했다.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서도 안토니우스를 따랐지만 기원전 31년 9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패주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3.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

기원전 26년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지시에 따라 히스파니아로 보내져서 칸타브리아 전쟁에 참여했다. 기원전 19년 칸타브리아 전쟁이 마무리된 뒤 갈리아 벨기카 속주로 이전되어 3군단 아우구스타, 21군단 라팍스, 22군단 프리미게니아와 함께 라인 강 전선을 방위했다. 기원전 18/17년 수캄브리족, 우스페테스족, 텐크테리족 연합군이 갈리아로 쳐들어와 국경 지역을 약탈하자, 갈리아 총독 마르쿠스 롤리우스는 이들을 진압하러 출진했으나 격파당했다. 이때 5군단은 독수리 깃발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이 깃발은 훗날 트라야누스 다키아 전쟁을 단행하던 중 발견되어 로마로 회수되었다.

그 후 5군단은 대 드루수스에 의해 베테라(오늘날 크산텐)로 이전되었고, 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전쟁을 감행했을 때 참여해 수많은 전투에서 승승장구한 끝에 기원전 9년 엘베 강에 도달했다.이후 라인강 동쪽 기슭의 전진 기지에 주둔했다가 서기 6년 티베리우스 마르코만니 족장 마로보두스를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을 때 가담하여 엘베 강을 따라 이동하며 마르코만니족을 위협했다. 그러나 도중에 일리리아 대반란이 일어나면서 작전은 취소되었다. 이후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17군단, 18군단, 19군단이 궤멸되는 참사가 벌어지자, 갈리아 사령관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는 1군단 게르마니카와 5군단 알라우다에를 동원해 벨기카 속주에 대한 게르만족의 습격을 저지했다. 그 후 5군단은 21군단 라팍스와 함께 베테라로 이전되어 쿠게르니족이 라인강과 리페강의 교차점을 도하하는 지 여부를 감시했다.

14년 아우구스투스가 붕어한 뒤 티베리우스가 새 황제에 등극했다. 5군단은 21군단 라팍스, 1군단 게르마니카와 함께 열악한 급료, 혹독한 군 생활 등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티베리우스의 의붓아들인 게르마니쿠스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라인 전선으로 달려가서 이들을 달려려 애썼다. 1군단 게르마니카는 협상에 응했지만, 5군단과 21군단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고, 오히려 요구를 완전히 관철시키기 위해 게르마니쿠스를 황제로 내세우려 했다. 게르마니쿠스가 황제를 배신하느니 죽겠다며 자살하려 하자, 군단병들은 심한 야유를 퍼부었고 어떤 이는 단검을 내밀며 이걸로 목을 찔러 죽으라고 독촉하기까지 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이런 상황에서 가족을 지키기 어렵다고 여기고 어린 아들 가이우스를 갈리아의 어느 도시로 보내려 했다. 이를 알게 된 병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가이우스를 무척 귀여워했고, 아이에게 군화인 '칼리가'를 씌워주고 '작은 군화'라는 뜻의 칼리굴라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제 가이우스가 자신들을 피해 갈리아인들에게 맡겨지게 되자, 그들은 깊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어떤 병사들은 마차를 붙잡아 세운 다음 게르마니쿠스에게 간곡히 용서를 빌었다. 게르마니쿠스는 이 기회를 틈타 병사들을 설득했고, 상당수의 병사들이 게르마니쿠스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병사들은 반란을 지속하려 했다. 이에 갈리아 벨기카 총독 아울루스 카이키나는 게르마니쿠스에 충성을 바치기로 한 병사들과 함께 야간에 반란군이 취침 중이던 숙소로 쳐들어가 모조리 참살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로마군끼리 처참한 살육이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고 군심을 회복하기 위해 5군단을 포함한 라인 전선군을 이끌고 게르마니아로 쳐들어갔다. 15년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잃어버린 3개의 독수리 군단 깃발 중 하나를 탈환했으며, 서기 16년 휘하의 부장이자 아르미니우스의 친동생이었던 플라부스 등과 함께 이디스타비소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앙그리바리 방벽 전투에서 재차 격돌해,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 동맹군을 와해시키고 두번째 독수리 깃발을 되찾았다. 그러나 얼마 후 티베리우스 황제로부터 원정을 중단하라는 명령서가 도착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원정을 지속할 의사를 표명했으나 티베리우스가 강력하게 명령하자 어쩔 수 없이 점령한 영토를 친 로마파 게르만 부족들에게 나눠주고 철군했다. 이리하여 게르마니아 전쟁이 막을 내렸다.

28년 군단장 케테구스 라베오의 지휘하에 프리기아 반란 진압 작전에 투입되어 큰 공을 세웠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5군단 병사들은 궁지에 몰린 아군 군단병과 기병대를 구하기 위해 앞장서서 적진에 뛰어들어 적군을 몰아냈다고 한다. 39년 칼리굴라의 게르마니아 원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에 관한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세한 활약상은 알 수 없다. 그 후 그들은 베테라에 계속 주둔하면서 게르만족을 상대로 간간히 소규모 접전을 벌인 것 외에는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4. 네 황제의 해 바타비아 반란

69년 1월, 5군단은 다른 라인 강 방면 로마 군단들과 함께 갈바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기를 거부하고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 비텔리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이후 5군단 내 다수 병력이 비텔리우스를 따라 이탈리아로 진격했고, 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갈바를 시해하고 제위에 오른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군대를 격파하고 로마에 입성했다. 그러나 오토에게 지지를 표했다가 비텔리우스에게 큰 수모를 받아 원한을 품은 도나우 전선군이 유대 반란을 진압하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내세우며 반기를 들었다. 5군단은 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 참여했으나 참패를 면치 못했고, 살아남은 장병들은 로마에서 버텨보려 했지만 그해 12월 로마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궤멸되었다.

한편, 베테라에 잔존한 5군단 장병들은[2] 가이우스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일으킨 바타비아 반란에 직면했다. 5군단은 라인 방면군 사령관 마르쿠스 호르도오니우스 플라쿠스의 지령에 따라 15군단 프리미게니아, 3개의 보조병 부대와 함께 반란 진압에 착수했으나 울피아 노비오마구스 바타보룸(네이메헌)의 북쪽에서 반란군과 교전하던 중 보조병들이 대거 키빌리스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패배했다. 이후 베테라에서 무니우스 루페르쿠스의 지휘하에 15군단과 함께 농성해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반란군을 상대로 분전했다. 그러나 플라쿠스가 군영 내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하면서, 구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결국 식량이 바닥나 말과 노새는 물론이고 돌 사이에서 자라는 관목, 뿌리 풀잎을 뜯어먹으며 버티던 병사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여기고 루페르쿠스에게 항복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페르쿠스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70년 3월 진영 문을 열고 나와서 키빌리스에게 항복했다. 키빌리스는 갈리아 제국의 황제인 율리우스 사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했으며, 그들은 이를 따랐다. 그후 감독관을 임명해 진영에 돈, 술병, 짐이 남아있는 지 확인하고 궁핍한 상태로 행군하는 수비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그런데 베테라에서 약 8km 떨어진 곳에서 게르만인들이 습격했다. 많은 이가 죽거나 달아났고, 나머지는 숙영지로 도로 후퇴했다. 키빌리스는 곧바로 숙영지로 쳐들어가 모조리 불태웠고, 진영으로 달아났던 이들 다수가 불타 죽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장병들은 군단 사령관인 무니우스 루페르쿠스와 함께 여성 예언자인 벨레다의 노예로 전락했다. 키빌리스는 텅 비어 있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쾰른)에 입성한 뒤 자신의 본부로 삼고, 5군단과 15군단 섬멸을 기념하는 동전을 주조했다.


[1] 고전 라틴어 발음은 '알라우다이'. [2] 대부분 주력 병사들은 로마에 가있어 로마까지 가기 어려운 몸 상태가 안좋은 병사들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