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라틴어: Marcus Plautius Silv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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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조부?)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아버지) 우르굴리나(어머니)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형제?) 라티아(아내)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아들)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풀케르(아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우르굴라니우스(아들)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딸)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 |
동기 | 아우구스투스 |
후임 |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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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플레브스 가문인 플라우티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51년 법무관을 역임한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가 그의 조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현대에 발견된 라틴어 비문에 따르면, 그는 알려지지 않은 해에 법무관을 맡고 원로원 의원이 된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의 아들이라고 한다. 기원전 1년 집정관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는 그의 형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 우르굴리나가 리비아 드루실라 황후의 절친한 친구였기에, 그는 그 덕을 받아 기원전 2년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그 후 4~5년간 아시아 총독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서기 6년 갈라티아 총독을 맡았고, 이사우리아인의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일리리쿰 속주에서 일리리아 대반란이 발발했다. 서기 7년 초, 실바누스는 반란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선임된 티베리우스로부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오라는 지령을 받았다. 그는 즉시 군대를 소집한 뒤 일리리쿰으로 진군하다가 사파이 왕국의 국왕 로메탈케스 1세가 파견한 트라키아 기병대와 합세했다. 실바누스는 진군 도중 시스키아(현재 크로아티아 중부 시사크) 인근 습지에서 일리리아 반란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지만 격파했다.
이후 기원전 1년 집정관을 맡았던 아울루스 카이키나 세베루스의 군대와 합세한 뒤 시르미움 인근에서 반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이에 대해 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가까스로 적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수많은 트리부누스 밀리툼, 켄투리오 등을 잃어서 패배나 다름없는 손실을 입었다며, 두 장군이 티베리우스처럼 정찰병을 보내 적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은 까닭에 이토록 큰 손실을 입었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전투의 승리는 두 장군의 지휘가 아닌 군인들의 투지 덕분이었다고 기술했다. 이후 카이키나와 함께 시스키아로 후퇴하여 티베리우스와 합류했다. 티베리우스는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눈 뒤 카이키나를 모에시아로 보내고, 실바누스와 동방 군단을 시르미움으로 다시 보내 겨울을 보내도록 했다.
이후 실바누스는 반란이 진압될 때까지 그곳에서 작전을 지속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브레우키족을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고, 다른 일리리아 부족들을 전투 없이 복종시켰다고 한다. 반란 진압 후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개선 훈장을 받았다. 이는 이탈리아 티볼리에 있는 실바누스의 무덤에 새겨진 비문에 기술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실바누스는 그나이우스 라르티우스와 클로디아 풀크라의 딸인 라티아라는 여인과 결혼해 세 아들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풀케르,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우르굴라니우스, 딸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를 낳았다. 아들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는 모종의 시기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처음에 파비아 누만티나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뒤 서기 8년 집정관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의 딸 아프로니아와 결혼했지만 서기 24년 아프로니아를 창밖으로 던져 살해한 혐의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사를 받게 되자, 할머니 우르굴리나가 보낸 단검으로 자살했다. 또다른 아들인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풀케르는 시칠리아 총독을 맡았다. 세번째 아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우르굴라니우스는 9살에 요절했다.
딸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는 클라우디우스 1세의 첫번째 아내였지만, 어릴 적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다리 한쪽이 불편해 제위서열이 크게 밀린 클라우디우스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해방노예들과 바람을 피우고 임신 후 낳은 딸을 일방적으로 클라우디우스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등 물의를 벌이다가 형제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가 아프로니아 살인 사건에 연루되자 클라우디우스 1세와 이혼했다. 그녀는 클라우디우스 1세와의 결혼 생활을 영위하면서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아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는 세야누스의 딸과 약혼했지만 배를 입에 던져 먹다가 목이 막혀 죽었다. 딸 클라우디아는 우르굴라닐라가 해방노예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는데, 클라우디우스 1세는 자기 딸이라고 우기는 아내의 주장을 묵살하고 그녀를 우르굴라닐라의 문 앞에 눕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