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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수스 전투 영어: Battle of Thaps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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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46년 4월 6일 | |
장소 | 북아프리카 탑수스 | |
원인 | 카이사르의 내전의 일부 | |
교전 세력 | 카이사르 |
폼페이우스 누미디아 |
지휘관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시티우스 |
티투스 라비에누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 가이우스 콘시디우스 롱구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유바 1세† 사부라 |
병력 |
총원: 50,000 ~ 70,000명 기병: 5,000기 |
총원: 70,000 ~ 90,000명 기병: 14,500기 전투 코끼리: 60마리 |
피해 | 1,000명 | 10,000명 |
결과 |
카이사르의 승리. 북아프리카의 폼페이우스 세력 소멸. |
1. 개요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인 기원전 46년 4월 6일 북아프리카 탑수스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와 원로원파-누미디아 연합군이 맞붙은 대규모 회전. 이 전투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북아프리카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배속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그에게 대항했던 대다수 원로원파 인사들은 이 전투 패배 이후 전사하거나 자살한다.
2. 배경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한 원로원파는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일부는 폼페이우스를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폼페이우스와 함께 살해되었으며, 메텔루스 스키피오, 카토, 라비에누스 등은 북아프리카로 도주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귀속된 옛 카르타고와 누미디아, 그리고 마우레타니아로 나뉘어 있었다. 누미디아의 국왕 유바 1세는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원로원파를 지지하고 군사 원조를 제공했다.이때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확인한 뒤 클레오파트라 7세와 손을 잡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내전을 벌이느라 몇 달 동안 이집트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원로원파는 그 틈을 타 북아프리카에서 기반을 다지고 대규모 병력을 육성했으며, 우티카와 하드루메툼에 강력한 수비대를 두고 카이사르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이집트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쟁취한 카이사르는 소아시아로 북상해 당시 소아시아의 절반을 점령하며 로마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던 폰토스 왕국의 파르나케스 2세와 젤라에서 맞붙어 완승을 거두고 폰토스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내정을 정비한 뒤 북아프리카에서 활개를 치는 원로원파에게 관심을 돌렸다.
기원전 47년 12월, 카이사르는 로마를 떠나 12월 중순에 시칠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며칠 안에 6개 군단을 소집한 뒤 아프리카로 출항했다. 하지만 그의 함대는 출항 직후 악천후로 인해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카이사르가 해안에 도착했을 때 그의 곁에 있는 병력은 보병 3천 명과 기병대 150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주둔지를 마련하기 위해 남하하기로 결심하고 클루페이아와 네아폴리스를 지나 하드루메툼 근처에 상륙했다. 그는 하드루멘툼에 주둔한 2개 군단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하루 동안 하드루메툼 근처에 주둔하다가 루스피나로 남하했다. 이에 하드루메툼 수비대가 그를 추격했으나 카이사르의 역습으로 패퇴했고,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1월 1일 오후 늦게 새로운 기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흩어진 병력을 규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동시에 적의 예상되는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루스피나의 요새를 강화하고 루스피나 시와 그의 진영을 방어선으로 삼았다. 카이사르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로원파는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사령관으로 하여 8개 군단과 3천 명의 기병을 루스피나로 파견했다. 이에 앞서 라비에누스와 페트레이우스가 식량을 확보하러 원정간 카이사르를 요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카이사르의 노련한 대응으로 섬멸에 실패했다( 루스피나 전투). 여기에 누미디아의 국왕 유바 1세도 합류하기로 했지만, 이웃 국가인 마우레타니아의 국왕 보쿠스 2세와 푸블리우스 시티우스의 군대가 수도 키르타를 함락시키고 사로잡은 시민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사태가 벌어지자 어쩔 수 없이 30마리의 코끼리만 스키피오에게 보낸 후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결국 스키피오는 원로원파 군대만을 이끌고 카이사르와 몇 차례 소규모 전투를 치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라비에누스도 기병대를 이끌고 방어선의 빈틈을 노려봤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게다가 카이사르의 추가 병력이 루스피나 시에 꾸준히 도착하자, 스키피오는 우티카로 철군한 뒤 누미디아군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적군이 우티카로 후퇴하는 것을 목격한 카이사르는 즉시 추격에 나섰다. 이후 양측은 몇 차례 소규모 전투를 치렀지만 전력이 완비될 때까지 회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에 정면 대결을 회피했다.
이 무렵 부하에게 본국 수비를 맡긴 유바 1세가 3개 군단과 누미디아 기병대, 30마리의 코키리를 이끌고 스키피오와 합세했고, 카이사르 역시 제9 군단과 제10 군단을 맞이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력에서 열세였던 카이사르는 우티카 공략을 포기하고 본영으로 돌아갔으며, 스키피오는 그를 추격했다. 이후 제타 마을 주변에서 양군은 대치했으나, 스키피오는 카이사르와 회전을 벌이는 걸 기피했다.
카이사르는 추가 병력을 규합하는 동시에 스키피오에게 회전을 제의했으나 그가 끝까지 거절하자 강제로 싸우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원로원파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도시인 탑수스를 포위했고, 스키피오는 탑수스를 상실하면 북아프리카의 원로원파에 대한 지지도가 추락할 것임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카이사르와 회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46년 4월 6일, 양측은 탑수스 평원에서 격돌한다.
3. 전개
4월 6일, 카이사르는 스키피오가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2개 군단에게 탑수스 포위를 지속하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스키피오의 진영으로 향했다.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스키피오는 즉시 평원에 대열을 갖추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중앙에 보병대, 양익에 기병대를 배치했으며 코끼리 60마리를 각각 두 부대로 나누어 최좌익과 최우익에 배치했다.
카이사르는 군대를 세 개의 대열로 배치했다. 우측에는 10군단과 2군단을, 좌측에는 8군단과 9군단을 배치했으며, 중앙엔 5군단을, 양익엔 기병대를 배치했다.
궁수, 투석병, 그리고 경무장 부대는 따로 적의 코끼리 부대를 상대하게 했다. 그런 후 카이사르는 군대를 돌아다니며 그의 베테랑 부하들에게 그동안 그들이 경험해온 수많은 승리를 상기시키며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프리카 전쟁기>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부하들은 얼른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공격 명령을 내릴 생각이 없었고, 병사들은 점점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러던 중 10군단 병사들이 나팔수에게 공격 신호를 보내도록 강요했고, 나팔수는 강요에 못 이겨 나팔을 불었다.[1] 이후 10군단이 단독으로 적을 향해 뛰어드는 걸 목격한 카이사르는 그들을 제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전투 개시 직후, 궁수, 투석병, 경무장 부대는 적의 코끼리들에게 공격을 퍼부어 수많은 상처를 입혔다. 이에 성난 코끼리는 이리저리 날뛰며 아군의 진형을 흩트려 놓았다. 그 직후 우익의 10군단과 2군단이 적군을 순식간에 격파한 후 방향을 틀어 적의 중앙을 강타했다. 결국 스키피오가 이끄는 원로원파 군대는 완전히 무너졌고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기병대 역시 패주했다.
스키피오는 아군이 완패하자 도주했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만여 명의 병사들은 카이사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 끈질기게 맞서는 원로원파에게 분노한 카이사르의 병사들에게 학살당했다. <아프리카 전쟁기>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군대의 손실은 50명 전사, 수십 명 부상에 불과했다고 한다.
4. 결과
탑수스 전투는 원로원파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소 카토는 탑수스 전투의 생존자들을 규합해 카이사르와 맞서려 했으나 병사들이 따라주지 않자 절망에 빠져 자살했다. 또한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다른 여러 원로원 인사들과 함께 간신히 함대에 다다랐지만 히포 레기우스에서 마우레타니아 용병대장이자 카이사르파 인사인 푸블리우스 시티우스의 함대와 마주쳤고, 이후 벌어진 히포 레기우스 해전에서 패하자 목숨을 끊었다.유바 1세는 누미디아로 귀국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더 이상 그를 왕으로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자살했다. 라비에누스와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은 스페인으로 피신해 재기를 도모했으나 이후 벌어진 문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완전히 몰락한다.
카이사르는 탑수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자신에게 사면을 구걸하는 적들을 기꺼이 사면해주고 기원전 46년 9월에 로마에서 갈리아족과 이집트의 승리, 파르나케스와 유바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1]
10군단 병사들이 이토록 전투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데에는 과거 그들이 이탈리아에서 파업을 벌이다가 카이사르에게 '시민 여러분'이라고 불리며 퇴직 처분을 받았다가 카이사르의 측근들이 간곡하게 만류한 덕분에 간신히 퇴직당하지 않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카이사르에게 다시 신임받으려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전투 명령이 내리기도 전에 독단적으로 전투를 개시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