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 라틴어: Quintus Fabius Maximus Servili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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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친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양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친형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친형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이복 형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에부르누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42년 |
전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 |
동기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퀸투스 폼페이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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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세르빌리우스 씨족의 일원이었다. 친아버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기원전 169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친아버지 그나이우스는 세 아들 중 장남인 그를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손자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양자로 보냈다. 이 때문에, 그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로 개명했다. 친형제로 기원전 141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기원전 140년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있었으며, 이복 형제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친아들이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형제로 기원전 145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가 있었다.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기원전 150년 원로원 의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고대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하기로 합의한 비밀 결의안을 3년 전에 재무관을 맡았지만 원로원 의원이 아직 아니었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누설했다가 집정관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파비우스가 기원전 142년 집정관이거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일 거라고 추정한다.
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180년 최고 행정관 간의 취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따라 기원전 145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기원전 142년, 그는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루시타니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먼 히스파니아 속주로 향했다. 그러나 전염병이 로마를 강타하는 바람에 병력 모집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군사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후 원로원은 그에게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루시타니아 반군 지도자 비리아투스를 토벌하게 할 지, 아니면 새 집정관을 파견해 군대를 이끌게 할 지를 놓고 논의한 끝에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
기원전 141년 먼 히스파니아 총독이 된 그는 2개 로마 군단과 적절한 규모의 보조군을 규합해 보병 18,000명과 기병 1,600명을 확보했고, 누미디아 국왕 미킵사로부터 전투 코끼리 10마리, 누미디아 기병 300명를 받아냈다. 이후 루시타니아인들이 포위한 이투카를 구원했다. 행군 도중에 6,000명의 병사를 거느린 비리아투스의 습격을 받았지만 격퇴했다. 이후 전 병력을 이끌고 루시타니아로 진격해 비리아투스와 맞붙었다. 루시타니아인들은 처음에는 후퇴했지만, 로마군이 추격하면서 전투 대형이 혼란스러워 진 것을 간파하고 반격해 3,000명을 사살했다. 그는 패잔병들을 수습한 뒤 숙영지로 들어가서 농성했다.
비리아투스는 숙영지에 틀어박힌 로마군을 끈질기게 공격했다. 로마군은 처음에는 진영을 사수했지만, 거듭된 공격에 지쳐 이투카로 퇴각했다. 비리아투스가 루시타니아로 돌아가자, 세르빌리아누스는 그를 추격하는 대신 바이투리아로 가서 5개 마을을 급습하여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후 비리아투스의 행방을 추적하던 중 쿠리우스와 아풀레우스가 이끄는 10,000명의 루시타니아군의 습격을 받았으나 격파했고, 쿠리우스는 전사했다. 세르빌리아누스는 루시타니아의 도시들인 에스카디아, 게멜라, 오볼콜라를 연이어 공략하여 10,000명의 병력을 포로로 잡고 500명을 참수한 뒤 나머지는 노예로 팔았다. 이후 적 분견대 3,000명의 항복을 받아낸 뒤 양 손을 잘라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세르빌리아누스는 이 시기에 루시타니아 상당 부분을 정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비리아투스가 여전히 저항을 이어갔기 때문에, 원로원은 세르빌리아누스의 친형제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를 새 사령관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퀸투스는 병력 모집이 잘 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렀고, 세르빌리아누스가 그 사이에 전쟁을 이끌었다.
기원전 140년, 세르빌리아누스는 에리사나 시를 포위 공격했다. 이때 비리아투스가 야밤에 에리사나에 잠입했고, 다음날 포위 공격을 퍼붓고 있던 로마군을 공격해 패주시켰다. 그는 군대를 재정비한 뒤 재차 맞섰으나 또다시 패배했고, 탈출할 길이 없는 가파른 경사면에 몰렸다. 하지만 비리아투스는 그들을 섬멸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했다간 로마가 보복을 위해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비리아투스는 평화 협상을 제안했고, 그는 군대가 궤멸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협상 결과, 로마는 루시타니아인의 주권을 존중하며 루시타니아인이 로마인의 친구임을 인정했다. 그 대신, 비리아투스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는 히스파니아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세르빌리아누스가 비리아투스와 맺은 협약을 알리자, 원로원은 승인했다. 그렇게 전쟁이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로마 민중은 수많은 로마군을 살육한 비리아투스와 협약을 맺은 것에 분개했고, 신임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역시 원로원에 비리아투스와 맺은 조약은 로마인의 존엄에 합당하지 않다고 불평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원로원은 카이피오에게 루시타니아인들을 도발하여 전쟁을 일으키도록 했고, 이로 인해 전쟁은 재개되었다.
그 후 로마로 돌아온 세르빌리아누스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학문에 전념했다. 4~5세기의 문헌학자 마크로비우스에 따르면, 세르빌리아누스는 적어도 12권의 책으로 구성된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방법에 관한 저서를 집필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에부르누스는 기원전 116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