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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군단 갈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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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삼두정치,( 로마 공화정의 삼두정치),
사건 · 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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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egio III Gallica. 상징은 황소.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된 후 4세기까지 활약한 레기오이다.

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기원전 49년 내전을 감행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다. 갈리카라는 별칭으로 볼 때, 이 군단에 처음 소집된 장병들은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와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 출신이었을 것이다. 3군단은 기원전 48년 디라키움 공방전에 투입된 것을 시작으로 파르살루스 전투, 문다 전투 등 카이사르의 모든 원정에 함께 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휘를 받았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제2차 삼두정치파의 지휘를 받았으며, 이후 많은 베테랑 장병들이 퇴역하여 페루시아에 정착했다. 그러다 기원전 41년 페루시아 내전이 발발했을 때, 페루시아에 정착했던 퇴역병들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편에 서서 옥타비아누스를 대적했다가 전세가 갈수록 불리해지자 결국 기원전 40년 3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한편 3군단은 안토니우스가 통제하는 지중해 동방으로 이동했고,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당시 파르티아군에 일시적으로 넘어간 유대 왕국을 탈환하기 위한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의 원정에 동참해 승리에 기여했다.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원정이 실패한 뒤 원정군이 시리아로 철수할 때 이들이 추격해오는 파르티아군을 상대로 영웅적으로 싸워 많은 아군을 구했다고 한다. 그 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이 발발했을 때 안토니우스의 휘하에서 활동했다가 기원전 31년 9월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이집트로 도피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안토니우스는 그들을 6군단 페라다, 10군단 페레텐시스, 12군단 풀미나타와 함께 시리아로 돌려보냈다.

3.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

기원전 20년,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변에 주둔해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와 협상한 끝에 양국의 경계를 유프라테스 강으로 확정하고 파르티아가 노획했던 로마군 깃발을 돌려받았으며, 안토니우스를 따랐다가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을 돌려받았다. 이때 이들도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3군단은 수십년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시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가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사망한 후 메시아를 자칭한 히스기야의 아들 유다, 페레아의 시몬, 아트론게스의 반란을 진압할 때 시리아에 주둔한 3개 군단을 동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중 3군단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티베리우스 통치 기간 동안 활동했던 3군단 소속 군인이 키프로스에 묻힌 사실이 고고학자들에게 발견된 비문에서 확인되었는데, 이는 3군단이 키프로스에서 모종의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45년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는 프톨레마이스(현재 아크레)를 재건하고 시리아에 주둔한 4개 군단의 퇴역병들을 그곳에 정착시켰는데, 이들 중에는 3군단 출신도 있었을 것이다.

58~63년 파르티아-로마 전쟁에서, 3군단은 6군단 페라타, 10군단 프레텐시스와 함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지휘를 받으며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 티그라노케르타를 공략하고 친로마파 아르메니아 왕인 티그라네스 6세를 아르메니아 국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역습이 매서웠던 데다 아르메니아인들이 티그라네스 6세보다 파르티아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의 동생인 티리다테스 1세를 지지하는 것을 알게 되자, 코르불로는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했다. 그 결과 로마는 티리다테스 1세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로마 수비대를 소펜에 영구적으로 주둔하도록 했고, 티리다테스는 로마로 찾아가서 네로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이후 3군단은 아르메니아의 지아타에 성채를 세우고 아르메니아 국왕의 동태를 감시했다.

66년, 유대 총독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유대 반란을 진압하려 했을 때 3군단 소속 분견대가 이에 참여했다. 그러나 갈루스는 반란군에게 패퇴했고, 반란군의 세력은 갈수록 팽창했다. 하지만 당시 로마 황제였던 네로는 3군단을 하 모이시아 속주의 도나우 강변인 오에스쿠스로 배치시켜서 5군단 마케도니카를 대체하게 했다. 그 후 3군단은 68년~69년 겨울에 8군단 아우구스타의 분견대와 힘을 합쳐 사르마티아 계열 유목 종족인 로쏠라니 족을 물리쳤다.

4. 네 황제의 해 플라비우스 왕조 시기

69년 1월 라인 전선 로마군이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며 갈바 황제를 상대로 반기를 들자, 3군단을 비롯한 도나우 전선 로마군은 이에 대응해 갈바를 시해하고 제위에 오른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를 지지했다. 그들은 오토를 돕기 위해 이탈리아로 진군했지만, 미처 도착하기 전에 오토가 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패배한 뒤 자결했다.

비텔리우스는 3군단을 포함한 도나우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크레모나 시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강제 투입시켰다. 이에 원한을 품은 채 도나우 전선으로 돌아간 그들은 유대 반란 진압을 도맡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며 반기를 들었다. 3군단은 7군단 클라우디아 군단장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지휘 아래 다른 도나우 군단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그들은 69년 10월 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비텔리우스를 지지하는 라인 군단병들을 격파하고 크레모나를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로마로 진격해 그해 12월 시가전 끝에 로마를 공략하고 비텔리우스를 처단함으로써 복수를 마무리했다.

내전이 마무리된 뒤, 3군단은 카푸아로 보내져서 겨울 숙영을 하면서 비텔리우스에게 끝까지 충성했던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공출했다. 70년 봄 시리아로 파견되어 유대 반란 진압에 투입되어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시리아에 주둔하면서 파르티아의 침공에 대비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다키아와 전쟁을 치렀을 때 3군단 소속 분견대가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에 관한 기록이 없어서 불확실하다.

5.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기

서기 101년과 105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 전쟁을 2차례 감행했다. 그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제국 각지에서 대규모 병력을 소집했는데, 3군단 역시 분견대를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이 없어서 불확실하다. 그 후 트라야누스가 113년부터 117년까지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했을 때 시리아에 본부를 두고 있던 이들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이 역시 기록이 없어서 불확실하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비문에 따르면, 132년 제3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했을 때 3군단이 투입되었고, 이 군단에 소속된 많은 장병들이 유대 반란군을 상대로 영웅적인 행동을 선보여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3군단은 161년부터 166년까지 이어진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에도 참여했다. 이들은 군단장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지휘하에 에데사, 니시비스, 셀레우키아, 크테시폰을 잇따라 공략했다. 175년 카시우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붕어했다는 헛소문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지지를 표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살아있다는 게 밝혀지자 카시우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카시우스와 그의 장남을 살해하고 두 사람의 수급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낸 백인대장은 3군단 소속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이들은 2세기 중반에 안토니니아나(Antoniniana)라는 칭호를 얻었고, 2세기 후반에는 펠릭스(Felix)라는 칭호를 얻었다.

6. 다섯 황제의 해 세베루스 왕조 시기

다섯 황제의 해 시기, 3군단은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다 니게르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패사하자 세베루스에게 충성을맹세했다. 그 후 그들은 세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195년, 197~198년)에 참여했다. 그 후 시리아의 방위를 계속 책임지던 그들은 217년 카라칼라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카라칼라가 시해된 뒤 새 황제가 된 마크리누스 휘하에서 니시비스 전투를 치렀다.

그 후 마크리누스가 파르티아에게 굴욕적인 평화 협약을 맺은 것에 반감을 품은 그들은 218년 율리아 마이사의 선동에 넘어가 엘라가발루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마크리누스는 반란 소식을 듣고 근위대장 울피우스 율리아누스를 파르티카 제2군단 부대와 함께 남쪽으로 보냈지만, 율리아누스는 린치를 당해 쫓겨났고 파르티카 제2군단 군인들 역시 새 황제의 편을 들었다.

이에 마크리누스는 안티오키아로 달아난 뒤 그곳에서 새 병력을 규합해 반란군과 대적하려 했다. 218년 6월 8일, 안티오키아 외곽에서 마크리누스의 군대와 새 황제의 군대가 맞붙었다. 3군단은 율리아 마이사의 심복인 간니스의 지휘에 힘입어 마크리누스를 물리쳐 엘라가발루스가 로마의 단독 황제로 군림하는 데 일조했다.

제위에 오른 엘라가발루스가 무능한 통치로 일관하자, 3군단은 자신들이 속았다고 여기고 219년 백인대장 베루스를 황제로 추대하여 엘라가발루스에 대항했다. 그러나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엘라가발루스는 베루스를 처형하고 3군단을 해산시켰으며, 군단 본부가 있던 티레의 대도시 지위를 박탈했다. 222년 엘라가발루스가 살해된 뒤 황위에 오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치하에서 '3군단 갈리카 세베리아나 알렉산드리아나'가 재건되었다. 이들의 새 숙영지는 다마스쿠스 인근의 다나바에 있었고, 팔미라로 가는 길목을 경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231~233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향한 원정을 단행했을 때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기록이 미비해 확실하지 않다.

7. 군인 황제 시대와 이후

3군단은 243년 고르디아누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다. 원정은 처음에는 고르디아누스 3세의 근위대장이자 장인인 티메시테우스의 지휘하에 순조롭게 흘러갔지만, 티메시테우스가 급사한 후 전세가 불리해졌다. 결국 고르디아누스 3세가 암살 또는 사산 왕조군과의 전투 도중 전사한 뒤,[1] 제위에 오른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사산 왕조 샤한샤 샤푸르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물러났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3군단은 데키우스 황제의 고트족과의 전쟁에 참여했으며, 발레리아누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가 3군단 사령관을 역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3군단은 발레리아누스의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한편, 포스투무스가 창건한 갈리아 제국이 주조한 동전에서 3군단이 거론되었는데, 이로 볼 때 3군단의 일부 부대는 갈리아에 배속되었고 포스투무스의 반란에 동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군단은 오다에나투스 갈리에누스 황제로부터 동방을 총괄하는 사령관으로 선임되었을 때부터 오다에나투스를 따랐을 것으로 추정되나, 오다에나투스가 사망한 뒤 실권을 잡은 제노비아 팔미라 제국을 창건했을 때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 제국을 정복하는 데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298년 갈레리우스의 페르시아 원정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315~316년 1군단 일리코룸과 함께 이집트로 보내졌고, 321년에는 제국 남쪽 국경의 시에네에 머물렀다. 이후 3군단은 기록상에서 더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1] 전자는 로마 측 기록, 후자는 사산 왕조 측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