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아니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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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주의 역사를 다룬 문서2. 서구인의 도래 이전
원래는 4만-2만 년 전에 호주로 내려온, 애버리지니라고 칭해지는 원주민들이 부족별로 따로 따로 각자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니며 살아왔다. 원주민들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역사를 연구하는데 구전되는 신화나 설화, 아니면 고고학적인 유적을 보며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시기이다. 그러나 완전히 고립되었을 것이라는 통념과는 달리 외부와의 교류도 이루어졌고, 주로 인도네시아의 말레이계 민족들이나 폴리네시아인들과 교역을 했으며, 호주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인 기록도 인도네시아에서 기록되었다. 또한 1660년대부터 해삼을 매개로 한 무역이 활성화되었는데 해삼 무역이 어찌나 활발했는지 이때 중국인 상인들이 해삼 채집을 위해서 호주까지 왔다 갔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그 당시 중세 중국 한족들은 말라카 등을 전진기지 및 근거지 삼아 호주 북부와 가까운 곳에까지 진출해있었다.그러나 호주 북부의 원주민들도 부족국가 이상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으며, 한때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 일대를 차지하며 이름을 날린 제국인 스리위자야 왕국나 마자파힛 제국도 뉴기니 섬 일대에는 손을 댔어도 호주 일대를 차지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고, 원주민들과 무역만 하고 갔다. 인접한 북호주는 사막이 대부분을 차지한 황무지였고, 호주에서도 농사를 대규모로 짓는데 적합한 동남부 일대로 진출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1] 이 때문에 호주는 부족국가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문자와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가 전파되는 일도 없었다. 호주 북부 지역은 그나마 남은 기록으로 어떻게 사회가 돌아갔는지 정도의 추측은 할 수 있지만, 남부 지역은 구전으로 남은 신화나 설화 등으로 역사를 유추해볼 수밖에 없다.
3. 네덜란드의 호주 발견
최초로 유럽인이 이곳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1606년 네덜란드의 두이프겐 호가 북부 카펀테리아 항에 도착한 것으로, 이후 네덜란드 선박들은 가끔씩 이곳을 찍고 동쪽으로 이동하고는 했다. 이 시기의 네덜란드 인들은 이 대륙의 북쪽, 서쪽, 태즈메이니아 지역을 묶어서 뉴홀란트라고 불렀다. 1688년에는 최초의 영국인 항해사 댐피어가 도착하였으며, 제임스 쿡 선장이 뉴질랜드를 발견하고 이어서 동쪽해안을 탐험하여 영국에게 이 지역의 지배권을 넘기게 된 것은 1770년이었다. 사실 쿡 선장이 동쪽 해안을 탐방하기전에는 영 가치없는 땅 취급 받던 상태였다. 지리 항목에 있듯 호주의 북쪽과 서쪽은 지금도 살기는 힘든 동네라 그냥 스킵했다.4. 영국 식민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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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 왕국은 1923년까지 영국령 인도 제국 정부에게 외교권을 통제당하여 외무는 오로지 영국 통감(British resident)에 의해 행사되었지만, 다른 토후국들과는 달리 내부 행정에 대해서는 완전한 독립을 유지하였던 보호국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독립한 1923년 이전까지는 간혹 인도 제국의 토후국 목록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Imperial Gazetteer of India(19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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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디지아는 일방적으로 식민지 남로디지아가 자치령을 선포한 것으로, 영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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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왕국 · 이란 제국* | |||||||||||||||||||||
* 이란 제국은 1941년 대영제국과 소련의 페르시아 침공 협공으로 점령되어, 영소군 각각이 각 점령지에 주둔하였고 또한 각각의 점령지를 통치하는 분할 통치가 이뤄졌다. | |||||||||||||||||||||
군정 Military Administr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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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덴 · 에리트레아 · 소말릴란드 · 리비아 |
유럽인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영국으로부터 1788년 1월 26일 죄수 736명과 하급관리들을 태운 배 13척이 건너온 것이었고, 이들도 아메리카에 발을 딛은 청교도처럼 서쪽으로 개척해 나갔다. 당시에는 애버리지니(aborigine)라고 불리는 원주민들과 트러블이 많았으며 특히 태즈메이니아 지역에는 원주민과의 전쟁 및 전염병으로 원주민이 전멸했다.[2] 호주 원주민의 인구는 백만 명을 넘는 수준에서 1920년대 초반에 수만명 선까지 줄어들었다.[3]
호주의 초기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1861년도의 골드 러시 때문이었다. 호주라는 대륙 자체에서 풍화와 침식이 활발하게 일어나다보니 금광이 지하 깊숙히 묻혀 있지 않고 지표에 노출된 경우가 많았는데 서양인들 입장에서는 이런 노천광산 하나만 발견하면 그냥 길가다 돈줍기만큼이나 쉽게 돈을 벌었던 것이다.[4] 또한 호주 남부( 애들레이드 등)에서의 따뜻한 기후는 와인 생산이나 농장운영에 적합했기 때문에 이민자가 우르르 몰려왔다.
초창기 호주를 개척했던 집단으로는 영국계 호주인과 함께 다수 그룹으로는 독일계 호주인들이 있다. 이들 독일계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프로이센 왕국 출신의 지리학자 겸 탐험가였던 루트비히 라이히하르트였다. 당시 현 호주 정부와 뉴사우스웨일스 주 정부의 전신이었던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총독부는 아웃백으로 불리던 호주 내륙의 탐사에 막대한 상금을 내걸고 지원자를 받았는데, 라이히하르트는 1842년에 이 탐사에 지원하여 브리즈번에서 포트에딩턴 까지 이르는 긴 여정을 마치고 1843년에 시드니로 귀환한 바 있었다. 이 경험을 살려서 1848년에 재차 아웃백 탐사에 나섰으나 실종되었고, 동년 4월 3일에 사망선고가 내려졌다[5].
문단의 첫 부분에서도 볼수 있듯, 본격적인 호주의 최초 이주자가 1788년의 죄수 무리이다 보니 '죄수 이송지'로서의 이미지가 쉽게 부각되지만, '호주인들은 죄수의 후손이다' 따위로 비하[6]할 수는 없다. 당시 영국의 사법체계는 엄청난 엄벌주의를 채택해, 중범죄자는 기본이 사형에 경범죄 수준의 범죄에도 가차없이 중형을 내렸다. 빵 하나 훔쳤다고 몇 년씩 감옥에 집어 넣고, 판사가 기분 나쁘면 교수형에 처하던 시절이라 단순 절도죄나 생계형 범죄로 복역하던 죄수들이 많이 건너왔다.[7] 처음 유형보내졌던 죄수 그룹 중엔 오이 12개를 훔친 죄수와 책 한 권을 훔쳤던 죄수도 있었다. 20세기 초에는 영국에서 고아들을 여기다가 버리는 식으로 이주를 시키기도 하였다. 영국은 1718년 이래로 매년 천명 가량의 죄수들을 아메리카로 귀양 보냈는데, 1783년 미국의 독립혁명으로 기존의 아메리카 유배지를 상실하게 되자 새롭게 선택한 유배지가 제임스 쿡이 발견한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였다.
한 때 그냥 특이한 식민지 정도로 취급되던 호주는 고기를 냉동하여 철도와 선박을 통해 운송하는 인프라가 갖추어지면서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과거에는 주로 밀 같은 곡물 혹은 양털을 주로 수출하던 호주는 냉동선을 갖추게 된 이후 양고기와 소고기를 냉동하여 영연방 각지에 수출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게 되었다. 백인 농부들은 새로 농장을 개척하기 위해 꾸준히 호주로 유입되었고, 호주가 어느정도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서 호주인들 사이에서는 독립해도 문제가 없겠다 하는 자신감이 생겼던 것.
5. 호주 자치령
자세한 내용은 호주 자치령 문서 참고하십시오.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영국 영토였지만 영국 본토에서는 너무나 멀었고, 이민자들이 몰려들면서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고 폭동도 종종 터졌다. 주 원인은 영국이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에 청나라 출신 중국인 계약 노동자(이른바 쿨리)들을 데려온 데 있었다. 중국인 계약 노동자들은 성비가 매우 불균형했는데 1860년대 당시 기준으로 중국인 이민자 4만여 명 중 여성은 12명 정도에 불과했다. 호주에서는 중국인 쿨리들을 대상으로 한 여러차례 폭동이 빈발하게 되었다. 중국인, 인도네시아인 노동자를 포함한 아시아인 노동자 유입에 대한 반발은 결국 호주의 독립으로 이어진다.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발로 이후에 호주 자치령에서는 백호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아시아인들의 호주 이민을 제한하였다.[11] 물론 호주 자치령의 성립 배경에는 중국인들에 대한 호주 백인들의 반발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 제국이 북마리아나 제도를 스페인에서 사들여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등 타국의 위협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지 사정을 잘 아는 현지인들에게 외교권과 국방권을 제외한 내정을 위임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캐나다 자치령의 선례를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지정되어 있었던 6개 식민지[12][13]를 통합해 오스트레일리아 연방(Commonwealth of Australia)이라는 자치령으로 지정하고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했다. 이것이 1901년으로 사실상의 호주의 독립 및 건국이었다.
원래는 영국과 한 나라라는 의식이 강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은 호주의 국가 의식이 싹트는 계기로 작용했다. 영연방의 호주-뉴질랜드 연합군단( ANZAC)의 일부로 참전한 호주 군인들은 1915년 갈리폴리 전투에서 광부들과 함께 계속해서 실전을 치렀다. 전쟁이 끝났을 때에는 총 인구 500만 명 중 약 6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쟁에서 가족 중의 한 명을 잃었다. 특히 영국군의 패전사례이자 병크인 갈리폴리에서 전사자가 많았다. 케말 아타튀르크가 워낙 먼치킨 명장이기도 했고 윈스턴 처칠의 병크도 컸다. 어쨌든 이 일로 호주와 튀르키예는 악연이 좀 있다. 이를 계기로 호주 식민지인들은 다른 영국 식민지와 함께 본국 영국에 대해 더 많은 권한을 줄 것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제정되어 호주는 외교권과 군사권까지 가지게 되는 사실상의 독립국이 되었다.
또한 1930년대의 불경기와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전, 그리고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참전으로 국민들은 자신이 호주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본토의 다윈을 폭격당하는 쇼크를[14] 겪었던 호주인들은, 태평양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에도 호주 내 인구가 적어서 이웃 아시아 국가들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호주인들은 이를 계기로 이민 관련한 제한을 상당부분 철폐하고[15] 유럽 각지에서 이민 초청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비교하자면 미국과 캐나다의 경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유럽 전역에서 이민을 받았던 것과 다르게, 호주는 2차 대전 이전까지는 백인 대다수가 영국, 아일랜드, 독일계 출신이었다.
호주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20세기 후반까지도 남아있던 원주민에 대한 차별을 빼 놓을 수 없다. 아예 정책 수준으로 일어난 일인데, 과거에는 원주민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고 자연 유산으로 간주했으며 원주민 아이를 '문명화'해준답시고 백인 가정에 강제 입양시키는 일[16] 등을 통해 원주민 문화의 대부분을 의도적으로 소실시켰다. 그 대상이 된 이들은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라 불린다.[17]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점차 인식하면서 각종 화합 시도가 있었지만, 1990년대 정도까지도 정부 수준에서는 유감 표명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후 집권한 케빈 러드 총리는 2008년 2월 13일에 공식적으로 반성과 사과의 메시지를 전했다. 세계는 이를 주목했으며 20~21세기의 역사적인 연설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런 식으로 부끄러운 흑역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학교 등지에서 왜곡 없이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아직 처우 개선은 부족하다.
6. 완전 독립
자치령 시절 호주는 개헌을 할 때에는 영국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의 법적 예속 관계가 있었으나 1986년에 호주 의회와 영국 의회가 오스트레일리아 법(Australia Act)를 통과시킴으로써 호주는 영국과의 법적 예속 관계를 청산하고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현재의 호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건너온 유럽계 이민자나 이후의 유입인구가 거의 절반이고, 미국과 다르게[18] 아직도 영국계 호주인 등 백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며,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그 뒤를 잇는 나라다.오늘날 호주는 안전한 미래를 위해서 다른 나라와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스스로를 아시아 국가의 일원으로 강조하며 아시아 국가들과 연대를 강화 중이다.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이 아시아축구연맹에 가입한 것이 대표적이다[19] . 호주의 농산물을 수입해오던 영국이 1970년대 유럽연합에 가입하고, 소련 해체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해체 이후 동유럽이 개방되면서, 호주의 수출품 상당수는 영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하였다. 대신 동아시아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호주는 대체 수출 시장을 찾을 수 있다. 동아시아 경제의 급성장이 아니었다면, 아직 수출 대부분을 1차산업 생산품에 기대는 호주는 20세기 중반 이후 아르헨티나가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 몰락한 것처럼 심각한 경제침체를 겪었을 것이다.
21세기 들어서 호주는 신냉전 상황 하에서 호주-중국 무역 분쟁을 겪고 있다. 호주는 이미 제1차 냉전 시대 당시에도 파이브 아이즈의 일원이긴 했으나, 당시 냉전은 소련과 미국 사이의 대치였고, 호주의 역할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21세기 오바마 행정부 시대 이후 미중 대결이 본격화되고 제2차 냉전이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서방 제1세계 진영 내에서 호주의 지정학적 입지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1]
사실 향해술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기 500년 전후에
보르네오섬에 주거하던
말라가시인들이 자바섬을 걸쳐
마다가스카르에 대규모로 이민을 가서 나라를 세우는 일이 있었고, 그 이후로도 인도네시아는 인도와 중국은 물론이고 더 멀리 떨어진 중동과 무역을 활발히 진행하면서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향해술을 가진다 한들 대규모 개척을 진행하는 것은 단순히 향해를 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고, 이 당시 인도네시아는 굳이 호주를 노려야될정도로 인구가 많은 상태가 아니었다.
[2]
이 시기를 다룬 호주 영화로 2019년에 나온
나이팅게일이 있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학살의 참상을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3]
지금은 그나마 인구가 늘어서 60만 명 선까지 늘어났다지만 그래도 총 인구의 2~3% 오가는 수준으로 적다. 지금도 애버리지니들의 숫자가 적은 빅토리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등에서는 애버리지니들보다 아프리카 피난민들이 더 많이 보일 정도.
[4]
당시에 최초의 아시아 이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5]
루트비히 라이히하르트의 실종은 1967년에 있었던
해럴드 홀트 수상의 실종과 함께 호주 역사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힌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 당시
백인들에게 학살당하고 땅을 빼앗긴 것에 대한 원한에 불타있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설과,
아웃백 지역의 혹독한 자연 환경때문에 기갈과
일사병에 시달리다가 조난사했다는 설로 나뉜다.
이원복 교수의 저서인
가로세로 세계사의 4권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편에서는 두 가지 설을 모두 소개하고 있다.
[6]
아돌프 히틀러도 이를 언급한 바 있으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이후 호주에서 인종차별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올라오자
인터넷 뉴스 댓글창에 이러한 비하 댓글이 올라오는 일이 늘어났다.
[7]
옆의 뉴질랜드는 정치사범이 많이 갔다고 한다.
[8]
영국은 17세기 초반부터 죄수들을 통해 아메리카를 개척했고, 미국이나 캐나다도 호주와 마찬가지로 초기 개척민중 죄수들이 포함 되어 있다. 다만 1718년 이전에는 그 수가 적었고, 최초 이주자도 죄수가 아니라 호주에 비해선 덜 부각 되는 편이다.
[9]
여기에 대한 영국 개그가 있다. / 호주 출입국 관리국: 여권 좀 볼 수 있을까요? 마약이나 금지된 물품을 가져오지 않으시죠? 범죄 경력은 없으시고요? / 영국 관광객(웃으면서): 아직도 들어가려면 범죄 경력이 있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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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극초기 강제이주자들은 아무 인프라 없는 황무지이자 풍토적으로 전혀 다른 자연에 갑작스레 던져진 것이기에, 척박한 환경에 방치된 채로 거의 희생되다시피 살다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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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레바논인 같은
아랍인들 역시
아시아 대륙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종교가
기독교이건
이슬람이건 할 것 없이
이민이 막혔을 정도였다.
[12]
뉴사우스웨일스,
빅토리아,
퀸즐랜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태즈메이니아
[13]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의 영역이었던 현
노던 준주 포함
[14]
호주가 건국된 이래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겪은 본토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15]
2차 대전 이전에는
미국처럼
아일랜드 출신들을 차별했고,
이탈리아나
그리스,
포르투갈,
유고슬라비아 등
남유럽 출신 이민자들을 알프스 인종 등등 드립을 치며 차별하였다.
[16]
이때 강제로 입양된 원주민 아이들은 운이 나쁘면 백인 가정에게
노예 취급 받으며
학대당하기도 했으며, 심하게는 성적으로 학대받기도 하였다.
[17]
휴 잭맨이 출연했던 영화 오스트레일리아에도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다.
[18]
캘리포니아 등 남부에서
멕시코계 히스패닉의 유입으로 영어 대신에 스페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인구가 대폭 증가하고 있다.
[19]
물론 이쪽은 월드컵 32개국 체제 당시
OFC 쪽에서 월드컵 예선을 통과해봤자 어느 대륙 대표팀이 올지도 모르는 대륙간 플레이오프까지 이겨야 월드컵 본선행이 가능한 오세아니아축구연맹 가맹국의 불리한 현실도 적잖은 이유로 작용했다. 호주가 OFC 탈퇴 후 AFC 가입을 선택하고도 10년이 넘게 지나서야 48개국 체제 월드컵이 도래했고, 차기 월드컵부터는 OFC에서 한 팀은 월드컵에 직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