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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베이(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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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인도 공화국의 최대도시 · 마하라슈트라주의 주도 | ||
뭄바이 मुंबई · मुम्बई Mumbai (Bom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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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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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서부 | |
면적 | 603㎢² | |
인구 | 12,852,000 명 | |
광역권 인구 | 20,748,000 명 | |
기후 | 열대 몬순 기후(Am) | |
종교 |
힌두교 65.99% 이슬람 20.65% 불교 4.85% 자이나교 4.1% 기독교 3.27% 시크교 0.49% 기타·무종교 0.65% |
|
시간대 | UTC +5:30 (IST) | |
지역전화번호 | 022 | |
우편번호 | 400001 ~ 400107 | |
웹사이트 |
뭄바이시 지구정부 홈페이지 뭄바이 무역관(KOTRA) 주 뭄바이 대한민국 총영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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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 최대도시이자,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의 주도.
지명은 현지 힌두 여신인 뭄바에서 유래되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 개칭된 명칭인 봄베이(Bombay)로도 알려져 있다. 1995년 뭄바이로 환원했으나, 인도인들은 물론이고 뭄바이 현지인들조차 여전히 '봄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국인들이 되려 뭄바이로 많이 불러주고 인도인들이 외국인과 대화하느라 뭄바이라고 부르는 양상이다.[1] 그러나 현재에는 갈수록 뭄바이라는 명칭이 정착하여 뭄바이로 부르는 현지인도 늘어나고 있다. 어린이들이 뭄바이로 부르는 것도 늘어나니 십수 년 뒤에는 정말로 봄베이가 옛날 표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에서는 여전히 '봉바잉'이라 부른다.
2. 인문 지리
뭄바이의 7개 군도 | 18~19세기의 간척 후 현재 | 살세테 섬 속의 뭄바이 |
섬 동북부에 위치한 다른 대도시인 타네는 본래 뭄바이 시와 산제이 간디 국립공원, 비하르 호를 사이에 두고 15㎞ 가량 떨어져 있었으나 도시화로 인해 연담도시화가 되어 시가지가 연결되었다. 타네 시가지는 다시 50m 간격의 지협 건너편까지 확장되어 있고, 후자의 남쪽의 또다른 대도시 나비뭄바이와 연결되어 있다. 뭄바이, 타네, 나비뭄바이까지 삼각 구도의 세 대도시를 중심으로 인근 위성도시들까지 합하여 뭄바이 광역권(Mumbai Metropolitan Region, 약칭 MMR)이라 부른다. 광역권의 면적은 6355㎢로, 서울특별시 면적의 10배에 달하고 인구는 마하라슈트라 주 인구의 약 20%인 2300만 명에 달한다. 일대의 개발은 뭄바이 광역권 개발청(Mumbai Metropolitan Region Development Authority, 약칭 MMRDA)이 담당한다.
3. 역사
산제이 간디 국립공원의 칸헤리 석굴 |
3.1. 고대
뭄바이는 남쪽의 7개 섬들과 북쪽의 거대한 살세테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대의 고대사는 베일에 싸여 있고, 현대 도시의 명성에 비하면 비교적 늦은 시기인 기원후 무렵에서야 역사에 등장한다. 1세기부터 10세기까지 살세테 섬 북부 보리갈리에는 마우리아 왕조와 쿠샨 왕조의 주도로 칸헤리 석굴이 조성되었다. 수행처이자 불교 대학으로 기능했던 칸헤리 석굴은 같은 마하라슈트라 주에 위치한 아잔타 석굴과 함께 인도의 주요 불교 유적지 중 하나이다. 150년에 편찬된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에서 뭄바이는 '일곱 섬들의 군집'이란 의미인 헤프타네시아로 표기되었다.쿠샨 왕조 이후 뭄바이 군도는 사타바하나 왕조, 서사트라프, 압히라, 바카타카 왕조, 칼라추리 왕조, 콘칸 마우리야, 찰루키아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 등 주로 중인도 계열 왕국들의 지배를 받았다. 6세기경 뭄바이 군도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550년경에는 그리스 상인 코스마스 인디코플레우스테스가 방문하였다. 6-7세기에는 살세테 섬 중부의 조케쉬와리 석굴, 인근 엘레판타 섬의 석굴 등이 조성되었다. 610년 찰루키야 국왕 풀라케신 2세, 750년 라슈트라쿠타 국왕 단티두르가가 일대를 정복하였다.
3.2. 중세
말라바르 언덕의 방강가 저수조
810년부터 일대는 살세테 섬 동북쪽 타나(현재의 타네)를 수도로 토착 세력이 세운 실라하라 왕조에 포함되었다. 수도에서 멀지 않은 뭄바이 군도는 실라하라 왕조의 지배기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0세기경 뭄바이 본섬 서부의 말라바르 언덕에는 힌두교의 시바 신을 모시는 왈케쉬와르 신전이 세워졌고, 1127년에는 신전의 부속 시설인 반강가 저수조가 건설되었다. 그러다 1260년경 야다바 왕조 국왕 크리슈나의 동생 마하데바가 수륙 양면으로 살세테 섬을 침공하였고, 실하라 조의 마지막 군주 소메쉬바라는 해전 도중 익사하였다. 이로써 일대는 야다바 왕조에 귀속되었는데, 1290년대 들어 야다바 조는 북인도에 기반한 이슬람 세력인 할지 왕조의 침공에 쇠퇴하였다. 그리고 1294년 야다바 왕공 비마(빔데브)가 술탄국의 침공을 피해 뭄바이 군도 북단 마힘 섬의 마히카바티를 수도로 삼고 자립하였다. 1292년 9월에는 마르코 폴로의 중국 선단이 지나갔다.
3.2.1. 비마 왕조
1298년 비마는 구자라트 사우라슈르타 반도의 힌두교도들을 일대로 이주시켰다. 파타레 프랍후라 불리는 뭄바이의 힌두 공동체는 이때 처음 형성되었고, 뭄바이의 도시화 역시 개시되었다. 그들은 말라바라 언덕에 바불나트 신전을 세웠다. 1303년 비마가 사망한 후 계승한 아들 프라탑빔바는 살세테 섬의 마롤에 프라타푸르를 세워 천도하였다. 그러던 1318년 할지 왕조의 섭정 무바라크 칸이 해군을 이끌고 마힘, 살세테 섬을 점령하였다. 뭄바이 본섬으로 피신했던 프라탑빔바는 이후 실지를 회복였고 1331년사망하였다. 사후 그의 매부 나가르데브가 통치했는데, 1348년 투글루크 왕조 휘하 구자라트의 무슬림들이 침공하여 일대를 점령하였다. 반세기가 지나고 티무르의 델리 원정으로 투글루크 조가 분열된 후 구자라트 술탄국의 영토가 되었다(1407년). 구자라트 술탄들은 마힘 섬에 총독들을 파견하여 다스렸고, 반다리 반란으로 마힘 섬이 8년간 자립하기도 했으나 라즈 쿠틉이 진압되었다.3.2.2. 구자라트 술탄국
뭄바이 무슬림들의 구심점인 핫지 알리 다르가
무역 거점으로 성장한 마힘 섬에는 기존의 타네를 대신하여 구자라트령 콘칸 해안의 총독부가 위치하게 되었다. 그러던 1430년 라즈 쿠틉이 사망한 후 이듬해 바흐마니 술탄국의 아흐마드 샤 알 왈리가 침공하여 마힘과 살세테 섬을 점령하였다. 이에 구자라트 술탄 아흐마드 샤 1세가 아들 자파르 칸을 파견해 일대를 회복한다. 마힘 섬의 총독 쿠틉 칸이 사망한 후 아흐마드 샤 알 왈리가 재차 침공했지만 다시 자파르 칸에게 격퇴되었다. 한편 15세기 초엽 부하라 출신의 상인 사이드 피르 핫지 알리가 뭄바이에 정착하고 가산을 털어 이슬람 선교에 나섰다. 그가 사망한 후 제자들은 유언에 따라 바다에 흘려보낸 스승의 겉옷이 멈춘 뭄바이 본섬 서북쪽의 암초에 무덤을 조성하였다(1431년). 후일 이곳은 순례객들이 몰리는 성지가 되었다. 한편 1491년 바흐마니 술탄국의 장수 마흐무드 가반이 마힘 섬을 점령했으나 1494년 구자라트 장수 바하두르 샤 길라니가 수복하였다.
3.3. 포르투갈령 봉베잉(1534 ~ 1661년)
살세테 섬 서부의 마드 성채와 성 세례 요한 성당 |
1498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후 포르투갈 인들은 매년 인도로 향하였다. 그러던 1508년 말, 칸누르에서 발진한 프란시스쿠 다 알메이다가 이끄는 포르투갈 선단은 맘루크-구자라트 해군과 맞서기 위해 디우로 향하던 중 뭄바이 근해에 나타났다. 이듬해 구자라트 선단을 나포한 포르투갈 인들은 마힘 섬에 상륙하였다. 다시 항해하여 디우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포루투갈 측은 구자라트 술탄 바하두르 샤에게 마힘에 성채 건설을 요구했으나 거절되었다. 그러자 1517년 주앙 다 몬로요의 선단이 마힘에서 구자라트 함대를 격파하며 무력 시위에 나섰고, 1524년까지 수 차례 뭄바이 근해에 출몰하여 구자라트 선박들을 습격하였다. 1526년 포르투갈 인들은 울하스 강 하구 북안의 바사이에 공장을 세웠고, 1528년 구자라트-차울 전쟁을 틈타 마힘 요새를 빼앗았다. 1531년 디우 점령 시에도 포르투갈 인들은 마힘을 거치는 등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무굴 제국과의 전쟁에 집중해야 했던 바하두르 샤는 결국 1534년 12월 바사이(바자잉) 조약을 통해 뭄바이 군도를 할양하였다. 따라서 이듬해 뭄바이는 공식적으로 포르투갈령 고아 총독부에 소속되었다. 포르투갈 인들은 일대를 현지 발음인 뭄바이에서 음차한 봉베잉(좋은 소년)이라 불렀다. 뭄바이 군도가 상업적으로 최적의 거점이라 여긴 그들은 여러 요새들과 성당을 세웠다. 본래 뭄바이 군도의 중심은 서북쪽의 마힘 섬이었는데, 16세기 후반 일대를 임차받은 그라시아 다 오르타가 뭄바이 본섬 동남쪽에 봉베잉 요새(카사 다 오르타)를 세운 후 그곳이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뭄바이 본섬은 동서로 길게 이어진 만으로 보호받는 천혜의 항구였기에 포르투갈 뿐만 아니라 영국 역시 그 전략적 가치를 파악하고 탐내었다. 1580년 이베리아 연합의 성립으로 사실상 스페인에게 병합된 포르투갈의 해군력과 식민지 경영 능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1583년 첫 영국 상선들이 뭄바이 군도를 방문하였고, 1612년 영국 해군은 수라트 인근에서 벌어진 수왈리 해전에서 포르투갈을 격파하고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626년 영국 해군은 봉베잉 요새의 총독궁에 방화하였다. 식민지 당국은 1640년 살세테 섬 서남쪽, 마힘 섬과 접하는 곳에 아구아다 요새를 세워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1648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에 있어 영국의 지원에 의존했던 포르투갈은 더이상 인도양에서 영국과 경쟁할 명분도 의지도 없어졌다. 결국 1661년 영국은 막 스페인에게서 독립을 되찾은 포르투갈과 혼인 동맹을 체결하며, 지참금 형식으로 탕헤르와 함께 뭄바이 본섬을 할양받았다. 따라서 1662년 가을, 신임 총독 아브라함 쉬프먼의 영국 함대가 당도하여 뭄바이 & 살세테 섬의 양도를 요구했으나 포르투갈측 총독은 인수를 거부하였다. 결국 1664년 영국 측은 뭄바이 섬만의 할양에 약속한 후에야 그를 양도받을 수 있었다.
3.4. 영국령 봄베이(1661 ~ 1947년)
1731년 봄베이 항구 전경 | 1771년 완공되어 1864년에 철거된 포트 조지 |
뭄바이 섬을 중심으로 영국은 1666년 마힘 섬까지 할양받으며 군도 전부를 얻었다. 다만 살세테 섬은 여젼히 포르투갈령으로 남았다. 영국인들은 포르투갈식 발음인 봉베잉(bombeim)에서 와전된 봄베이(bombay)로 일대를 지칭하였다. 그러던 1668년 왕실 칙령으로 찰스 2세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매년 10 파운드의 임차료를 대가로 뭄바이 소유권을 양도하였다. 동인도회사는 1640년부터 시작된 파르시들의 뭄바이 이주에 힘입어 섬을 개발하였고, 세관을 건립하였다. 특히 조지 옥슨든 총독은 파르시 뿐만 아니라 고아인, 유대인, 다우디 보흐라(쉬아 소수파) 신도 등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그 결과 1661년 1만이었던 인구는 1670년 6만으로 늘어났다. 비슷한 시기 화폐 주조소와 인쇄소가 세워졌고, 항구는 20척의 선박이 왕래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한편 뭄바이의 번영은 인근 세력들의 탐욕으로 인한 반복된 침공을 야기하였다.
1672년 10월, 무굴 제국의 해군 제독이자 뭄바이 남쪽 60㎞ 지점 무라드-잔자라에 기반한 해적 야쿠트 칸이 뭄바이에 상륙해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듬해 2월에는 3차 영란전쟁의 일환으로 네덜란드령 실론 총독 릭로페 판 고엔이 뭄바이를 침공했으나 격퇴되었다. 167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의 체결로 네덜란드의 위협은 사라졌고,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 서해안의 중심지를 수라트에서 뭄바이로 이전하였다. 이미 '봄베이'는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얼마 간의 평화 후 1689년 야쿠트 칸이 재차 습격하였고, 이듬해 6월에는 섬 동북쪽의 마자곤 요새를 파괴하였다. 영국 당국은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에게 15만 루피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강화를 맺었고, 이에 야쿠트 칸은 철수하였다(1690년 6월 8일). 이어진 평화기에 뭄바이는 인도양 최대의 무역 도시로 발전하였고, 1710년에는 항구의 보호를 위한 봄베이 성채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1715년에 부임한 총독 찰스 분은 뭄바이 섬의 동부를 두르는 성벽을 쌓았고, 해군을 창설하였다. 같은해에는 16세기 포르투갈에 의해 파괴되었던 말라바르 언덕의 왈케쉬와르 신전이 현지 상인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1718년에는 기존의 가톨릭 성당들을 대체할 첫 성공회 예배당인 성 토마스 성당이 세워졌다. 1728년에는 재판소가 세워졌고, 서북쪽 워를리 섬과 본섬 사이를 시작으로 군도에서의 매립 작업이 시작되었다. 1735년에는 조선소가 세워졌고, 왕립 해군의 부두도 설치되었다. 그러던 1737년 마라타 연맹의 바지라오 1세가 여전히 포르투갈 령이던 살사테 섬을 점령하였고, 1739년에는 바사인 역시 양도되며 뭄바이 일대에서 포르투갈 인들의 영향력은 일소되었다. 이에 영국 당국은 1748년 성벽 밖의 집들을 부수고 주민들을 성내로 이동시키며 수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다만 양측의 충돌은 없었고, 반세기 이상 평화가 이어졌다.
18세기 중반 서부 인도에서 마다가스카르에 이르기까지 인도양 곳곳에서 뭄바이로 이주민들이 몰려왔다. 1769년에는 조지 요새가 지어졌고, 1774년 12월 영국군은 마침내 살사테 섬과 엘레판테 섬등을 점령하여 일대에 대한 장악력을 공고히 하였다. 1775년 수라트 조약으로 이를 확인한 영국 당국은 더 나아가 마라타 내전에 개입하여 푸네로 진격하였으나 와드가온 전투에서 패하였다. 1782년 살바이 조약으로 영국은 내륙의 점령지를 모두 포기했으나 수라트 조약 당시 얻은 섬들은 영유하였다. 같은해 총독으로 부임한 윌리엄 혼비는 자연·인공 간척이 진행되던 일곱 섬들에 대한 연결 작업에 착수하였고, 1802년 살사테 섬과 뭄바이 섬이 연결되었다. 1789년에는 첫 신문인 봄베이 해럴드가 간행되기 시작하였고, 마라타 연맹의 점령을 피해 망명한 하이데라바드 장인들에 의해 문화적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3.4.1. 근대
1803년 뭄바이 대화재
번영을 거듭하던 뭄바이는 1803년 2월 17일에 대화재를 겪었다. 이로써 성채(포르) 구역이 전소되었고, 당국은 더 넓은 도로의 새 시가지를 계획하였다. 이듬해 5월에는 기근이 닥쳤고, 영국 지배 후 처음으로 많은 주민들이 떠나갔다. 한편 1817년 영국군이 마라타 연맹의 바지라오 2세를 격파하며 봄베이는 외부 위협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다만 고난은 이어져 1824년에는 가뭄이 닥쳤다. 그럼에도 1819년 엘핀스톤 고등학교가 세워졌고 1830년에는 육지와의 도로가 개통하여 육상 교통이 활성화되었다. 같은해 영국과의 정기 연락선이 다니기 시작하였다. 1832년 7월에는 보균자 억제를 위한 파리아 견종의 퇴치에 반발한 파르시들의 시위가 있었다. 1838년에는 콜라바 섬을 마지막으로 간척 사업이 완료되었고, 1840년과 1845년에는 각각 봄베이 은행과 그랜트 의대가 설립되었다. 1851년 10월에는 무함마드에 대한 신문 기사를 두고 무슬림과 파르시 공동체 간의 충돌이 있었다.
19세기 후반 뭄바이 지도 | 1880년대 뭄바이 시가지 |
3.4.2. 독립 운동기
20세기 초엽 뭄바이 중심가(시청 & 빅토리아역) | 1948년 2월, 인도의 문을 통해 철수하는 영국군 |
한편 1893년 8월 무슬림과 힌두 공동체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전자가 시바 신전을 공격하였고, 75명의 사망자와 350명의 부상자를 내었다.1896년에는 역병이 엄습하여 매주 2천 명씩 죽어나갔고,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85만 명이 도시를 떠났다. 많은 면화 공장들이 노동자 부족으로 경영난에 시달리기도 하였다.이에 대한 당국의 과한 조치로 1898년 3월 부두와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고, 도시는 며칠간 마비되었다. 이러한 문제의 재발 방지를 위해 각종 도시 개선 조직과 교외 지방 계획이 세워졌다. 그러던 1908년 뭄바이의 스웨데시 운동 지도자 로크마냐 틸라크가 6년형을 선고받자 대대적인 시위가 일었고, 1915년 초에는 마하트마 간디의 방문이 있었다. 1918년 12월 이번에는 스페인 독감이 엄습하여 매일 수백 명씩 사망하였다. 1919년부터 뭄바이는 샤티아그라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1922년까지 수차례나 도시가 마비되었다.
1920년대 말에는 파르시를 포함한 많은 페르시아인들이 야즈드의 가뭄을 피해 이주해왔다. 1927년의 전기 기관차 도입에 이어 1932년에는 카라치와의 비행기가 다니기 시작하였다.1930년대에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침체와 함께 전국적인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 일었다. 2차 대전기에 뭄바이는 중동과 동남아 전역의 병력과 물자 보급을 맡으며 다시 성장하였다. 한편 1942년 8월 인도 철수 운동과 1946년 2월 봄베이 항에 주둔하던 왕립 인도 해군의 반란은 마침내 1947년 8월 인도의 독립을 이끌어 내었다. 1948년 2월 인도군이 '봄베이'의 상징이던 인도의 문을 지나가는 퍼레이드를 통해 287년에 걸친 영국 지배의 종식을 표명하였다. 한편 파키스탄의 독립과 함께 일부 무슬림들이 그곳으로 이주하고, 반대로 신드 지방에서는 10만에 달하는 힌두교도들이 이주해온 결과 뭄바이의 무슬림과 힌두교도 비율은 후자의 우세로 고정되었다.
3.5. 현대
2008년, 뭄바이 연쇄 테러 사건 당시의 영화 호텔 뭄바이 배경이 된 타지 호텔.
독립 후에 뭄바이는 봄베이국을 거쳐 마하라슈르타 국의 중심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1958년, 중부 지역과의 분리를 주장하는 삼유크타 마하라슈르타 운동의 시위 도중 경찰이 발포하여 105명이 사망하는 참사도 있었다. 1972년에는 인도 최대의 과학 단지인 네루 센터가 세워졌다. 뭄바이 성장으로 1979년에는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한 자매도시 나비뭄바이가 성립되었다. 1982년 1월에는 직물공장의 25만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였고, 1984년 5월에는 뭄바이-타네-비완디에서 폭동이 벌어져 278명이 사망하고 1118명이 부상당하였다. 1992년 12월 ~ 1993년 1월에는 아요디야의 바브리 모스크 철거에서 유발된 무슬림과 힌두교도 간의 유혈 충돌로 1천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고 도시가 마비되었다. 1993년 3월에는 인도 마피아 두목 다우드 이브라힘이 주도한 13번의 차량 테러로 257명이 사망하고 7백 명이 부상당하였다. 한편 독립 이후에도 봄베이로 불리던 도시는 1996년 시정부의 의결로 현지 유래 지명인 뭄바이로 개칭하였다.[2]
21세기에도 혼란은 이어졌다. 바브리 모스크 철거 10주년인 2002년 12월에도 차량 테러로 2명이 죽고 28명이 부상하였다. 2003년 1월에는 자전거 테러로 1명이 죽고 25명이 부상하였고, 3월에는 기차 테러로 10명이 죽고 70명이 부상하였다. 7월에도 버스 테러로 4명이 죽고 32명이 부상당했으며, 8월에도 두 차례의 폭발로 44명이 죽고 150명이 부상하였다. 테러 외에도 2005년 7월에는 하루만에 94㎝의 비가 쏟아지는 폭우로 도시가 마비되었고, 83명이 사망하였다. 2006년 7월에는 7차례의 폭탄 테러로 209명이 죽고 7백 명이 다쳤다. 2008년 11월에는 영화 호텔 뭄바이의 배경이 되는 뭄바이 연쇄 테러로 195명이 죽고 350명이 부상하였다. 2011년 7월에도 폭탄 테러가 발생해 26명이 죽고 130명이 다쳤다. 한편 같은해 뭄바이 완케데 스타디움에서 열린 크리켓 월드컵에서 인도 대표팀은 1983년 이후 두번째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4. 인구
세계적인 대도시로 인구는 엄청나게 많아서, 2018년에 1,287만 8,447명으로, 한국의 수도인 서울특별시보다 많다. 면적은 603㎢로 서울특별시(605.25㎢)보다 약간 작은 수준이나 인구밀도는 20,694명/㎢로 서울특별시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물론 행정구역 크기가 모자란 관계로 뭄바이 시 밖으로 시가지가 펼쳐져 있어 실제론 더 크다. 대도시권으로 넓혀보면 그 수는 더욱 더 커져서 콘칸 주를 합치면 3,700만 명이 넘어간다.인구밀도는 지역별로도 차이가 심한데, 다라비(Dharavi) 같은 슬럼가는 면적 1.7㎢에 100만여 명이 모여사는 그야말로 가관인 인구밀도를 보여 주기도 한다. 이는 구룡성채가 철거된 이후로 현 인류 최대의 인구밀도이며, 인구밀도로 환산하면 59만 명/㎢이 된다. 사실 구룡성채의 인구밀도는 190만 명/㎢이었으니 구룡성채보다는 훨씬 널널한 셈.
거기다가 행정구역으로 따져 보면 남 뭄바이(south mumbai)가 면적 67㎢에 320만으로 인구밀도가 47000명/㎢가 넘어간다. 쉽게 말하자면 서초구+ 용산구만한 면적에 부산만한 인구가 산다는 것이다.
4.1. 난개발
뭄바이의 난개발을 보여 주는 사진. 참고로 이 사진은 매우 양호한 축에 드는 곳이다. 뭄바이의 난개발은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계속된 인구 증가에도 영국 식민통치 때 만들어놓은 백년 묵은 고도제한 규제가 상황을 급격히 악화시키고 있다. 심지어 2006년 기준으로 세계은행이 뭄바이 인구의 54%가 슬럼가에 살고 있다는 통계를 본다면 뭄바이의 상황이 최악임을 알 수 있다.[3] 인도 및 서구 경제학자들은 용적률 규제를 풀어서 전면적인 도심 고층 재개발을 통해 스프롤 현상을 억제하라고 촉구하고 있으나 인도 정부는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고도제한 규제는 공항 일대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풀려서 뭄바이에도 임페리얼 타워(256m)를 시작으로 고층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고,[4] 최고층 건물 높이도 빠르게 갱신되고 있다. 2023년 12월 기준 인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 1~10위를 모두 뭄바이가 차지하고 있으며, 2018년에 준공된 팔레 로얄[5]을 제외하면 모두 2020~2022년의 3년동안 준공된 건물들이다.
5. 언어
마라티어와 영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마라티어를 모어로 쓰는 사람은 뭄바이 전체 인구의 35% 정도에 불과하며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온 외지인들이 많은 지역의 특성상 여러 언어가 도시에서 쓰이고 있다. 뭄바이 내에서 많이 쓰이는 언어는 마라티어를 포함해 힌디어, 구자라트어, 우르두어 크게 4가지가 있는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어로 쓰는 언어는 마라티어이나 힌디어도 무려 전체 인구의 25%나 모어로 사용할 만큼 사용자가 많고 구자라트어(20%)나 우르두어(11%)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이 네 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90% 가량을 차지한다. 그러다보니 밤바이야(bambaiya)라고 불리는, 이들 언어가 뒤섞인 피진도 존재한다.6. 경제
뭄바이 도심의 야경
인도 최대의 경제 도시로, 이곳에 있는 봄베이증권거래소(BSE)[6]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업이 상장되어 거래되는 증권거래소이다. 인도 최대의 영화 산업 도시이기도 해서 발리우드라는 말이 있다. 발리우드는 뭄바이의 이전 이름 봄베이와 할리우드를 합친 말.
▲ 2014년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조사한 뭄바이 대도시권의 경제 규모. GDP(국내총생산)가 1,509억 달러로 총 89위를 차지하였다. 충칭과 자카르타처럼 인구는 많아서 경제력은 적지 않지만 그 반동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은 1만 달러도 되지 않는 저조한 경제력었으나 인도의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뭄바이의 GDP도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어서 2022년 기준으로 뭄바이의 1인당 GDP는 10,600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 실제로 뭄바이 대도시권의 경제 규모는 2022년 3,100억달러에 달해 2014년의 두 배로 늘었다.
바다와 접해있는 만큼 대규모 무역 항구도 있다. 뭄바이 항이 포화상태에 이르며 인근 나비뭄바이에 신항을 지었는데 그 이름이 자와할랄 네루 항이며, 역시 뭄바이에 지어진 차트라파티 시바지 국제공항도 포화상태인지라 나비뭄바이에 신공항을 짓고 있다. 이름은 딘카르 파틸 공항으로 마하라슈트라 지역에서 활약해온 정치인 이름을 따왔다. 2024년 말 개항 예정이며 2032년까지 3단계에 걸쳐 확장해 무려 9,000만 명을 수용할 계획이다.
7. 교통
대한항공이 인도 직항으로 뉴델리의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과 이 동네의 차트라파티 시바지 국제공항 두 곳을 운항하고 있었으나 코로나 때 차트라파티 시바지 노선은 단항되었다. 이후 위드코로나가 되었음에도 인천-뭄바이 재운항 소식은 없는 상태. 따라서 현재 한국에서 뭄바이를 가려면 무조건 경유를 해야 갈 수 있으며, 방콕이나,싱가포르,하노이 등을 경유해 갈 수밖에 없다.뭄바이의 교통문제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라 교통체증에서도 뭄바이형 교통체증이라는 분류가 따로 생길 정도로 심각하다. 단일 노선으로는 세계 최다인 하루 330만 이용객의 위엄을 보여주는 역이 이곳에 있다. 그리고 뭄바이를 가로지르는 모노레일 노선도 있다.
다만 엄청난 교통체증에 비해서 도시철도망은 잘 구축되었다. 뭄바이 메트로와 뭄바이 교외철도라고 부르는 광역전철이 있다. 광역전철은 영국 식민지 시대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가 깊은 노선으로 아시아 최초의 광역철도 시스템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고, 노선은 4개, 지선까지 합치면 7개 정도이지만, 몸바이 내의 주요지역을 통과하고 표값도 싸며, 버스나 릭샤로 출퇴근하는것보다는 월등히 빨라서 뭄바이 시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그러나 출퇴근 시간대에는 한중일이나 홍콩, 싱가포르, 방콕 등 동남아시아의 지옥철 따위는 뛰어넘는 수준의 미칠 듯한 혼잡도를 보이며, 안전관리 또한 미비해서 출퇴근 시간대에는 아예 열차 문을 열고 운행하고, 사람들이 열차 위까지 몰려오기까지 했었기 때문에 사망자가 속출하였으며, 지금도 매년 수백명씩 사람들이 열차사고로 죽고있다는 통계가 나올정도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2천만명이 넘는 뭄바이 광역권 곳곳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철도 노선이 달랑 4개에 불과한데다가 외곽지역에서 시내로 오토릭샤나 오토바이,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려면 수요시간이 몇시간 단위로 잡아먹기때문에 전철로 몰려들수밖에 없는 환경인지라 과포화는 당연한 결과다.[7] 때문에 수요 분산 목적을 겸해 메트로를 짓고있다. 대한민국 수도권에서도 각종 우회노선의 개통으로 300%에 달하던 경인선의 혼잡도가 많이 완화된 사례가 있듯, 장차 뭄바이의 답이 없는 철도 혼잡도 메트로가 계속 개통됨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있는 추세이기는 하다. 한편 출퇴근 시간 이외에는 그런대로 이용할 만할 정도로 혼잡도가 떨어진다.
뭄바이 메트로는 2014년에 처음 개통되었기에 비교적 깨끗한 모습을 보이지만 노선망이 불충분하며 그마저도 위낙 교외철도의 혼잡도가 심했다보니 지하철로 몰려드는 이용객이 많아서 메트로도 출퇴근 시간대에 제대로 이용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교외철도에 비하면 안전관리는 잘 되어있다.여기에 2024년에 2호선 연장과 3호선 개통, 2025년에는 4,5,6호선과 7호선 연장이 개통 예정이라 상황은 어느 정도는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8. 관광
1903년에 건설된 타지호텔과 인도의 문
인도의 문(Gateway of India)은 영국 군주이자 인도 제국의 황제인 조지 5세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1911년에 세워졌다.
뭄바이 시청
1888년 건설된 뭄바이 역(빅토리아 테르미누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칸헤리 석굴
현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히려 뉴델리보다 뭄바이가 훨씬 더 치안이 좋고 '사람이 사는' 동네라고 한다. 단적인 예로 델리의 경우 현지인 기준으로도 여성이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고 번화가에서 소매치기도 기승을 부리지만, 뭄바이는 그 정도 까지는 아니라고. 다만 어디까지나 '인도인들의 치안 의식'기준이니 완전히 안심은 금물이다. '상대적으로' 그나마 좀 낫다는 것. 실제로 방문해보면 의외로 보도가 잘 되어있어서 구르가온이나 델리보다 '걸어다닐' 경로가 많다.
9. 매체에서의 등장
- 80일간의 세계일주: 필리어스 포그 일행의 중간 기착지였다.
-
도미네이션즈:
부두 원정 목적지 중 하나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뭄바이(도미네이션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 무한도전: 해외극한알바 특집에서 유재석과 황광희가 빨래 알바하러 여기로 왔다.
- 빛으로 상상하는 모든 것: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 소공녀: 런던에 오기 전까지 세라 크루와 가족이 살았던 곳으로 언급된다.
- 테넷: 닐이 요원으로 활동하는 지역이자 산제이 싱을 만나기 위한 장소로 나온다.
- 히트맨 2(게임): 4번째 미션의 배경 도시로 나온다.
- BBC 드라마 맥마피아: 시즌 1의 주요배경 중 하나로 나온다.
10. 관련 문서
[1]
6년 후에는 캘커타도
콜카타로 환원되었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이 오히려 '콜카타'라고 많이 불러주는 편이다.
[2]
빅토리아 테르미누스 역시
마라타 연맹의 군주 시바지의 이름을 따서 차하트라파티 시바지 테르미누스로 개명되었다.
[3]
http://infochangeindia.org/poverty/news/54-of-mumbai-lives-in-slums-world-bank.html
[4]
뭄바이 내의 150m 이상 건물은 2009년까지 겨우 16개에 그쳤지만(그나마 8개도 2009년 당해 개장한 건물이었다.) 2023년 현재는 250여개를 넘는다.
[5]
320m. 건물 자체는 2018년에 준공되었지만 아직 개장하지는 않았다. 개장된 건물을 기준으로 한다면 뭄바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2022년에 개장한 Piramal Aranya이다.
[6]
Bombay Stock Exchange의 약자이다.
[7]
사실 이건 뭄바이가 한쪽으론 해변, 한쪽으론 산을 끼고 있어서 인구가 주요 축선에 몰려 사는 탓도 있다. 평지 위에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
델리 광역권과는 정반대의 환경인 셈. 대충 부산과 대구의 도시구조 차이를 생각하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