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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0:44:37

반자이 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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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이 돌격
Banzai attack/charge | バンザイ突撃
파일:EY3YlDBU4AAPcOY.jpg
총검을 장착한 소총을 들고 돌격하는 일본군의 모습
1. 개요2. 돌격의 전술성3. 반자이 돌격의 역사
3.1. 초기 화력주의3.2. 러일전쟁 이후3.3. 전면적인 오인3.4. 정신력 집착3.5. 몰락
4. 실전에서의 반자이 돌격
4.1. 성공한 경우4.2. 실패한 경우
5. 문제점 및 비판6. 결과7. 미디어8. 일본군의 유사 전술9. 농담삼아 비교되는 것10. 타국의 유사한 행태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즐겨 사용한 보병의 대규모 착검돌격을 지칭하던 연합군 장병들의 속어. 즉, 총검이나 군도를 갖추고 돌격하여 백병전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ruby(天, ruby=てん)][ruby(皇, ruby=のう)][ruby(陛, ruby=へい)][ruby(下, ruby=か)][ruby(萬, ruby=ばん)][ruby(歳, ruby=ざい)]!
천황 폐하 만세!(텐노 헤이카 반자이!)

'반자이'라는 말은 만세(萬歲)의 일본 독음이다. 즉, 단순히 흔한 '~~ 만세' 돌격일 뿐이다. 일본군들이 돌격할 때마다 "천황 폐하 만세!(덴노 헤-카 반자이~!)"라고 배틀 크라이를 외치며 돌격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당연히 매번 질리도록 "반자이!" 소리를 들은 미군과 영국군, 영연방 호주군이 반자이 공격(Banzai Attack) 또는 반자이 돌격(Banzai Charg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작 일본군은 반자이 돌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간혹가다 일반인이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용어가 다소 오남용되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반자이 돌격이라는 이름은 우라 돌격과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구호와 극단적인 돌격 양상을 보고 적국(혹은 후대인들)이 붙여준 별칭일 뿐 본국에서는 이러한 용어를 쓴적이 없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일본에서는 딱히 이름을 붙이지도 않은 평범한 돌격이라는 인식이었으며[1] 실제 돌격 양상도 좀 극단적인 '약진 앞으로'에 가깝다. 그러나 이 용어를 일본이 정식으로 사용했는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승전국인데다 파급력이 큰 영미권 문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경우라 일반적으로 용어의 뜻은 통한다.

이 문서에서 후술하듯 이러한 극단적인 돌격 전술은 잘만 써먹으면 적의 사기를 무너뜨려 승기를 점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압도적인 화력이 뒷받침 되거나 지휘관의 절묘하면서도 과감한 전술적 판단력이 모두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장병들을 무의미한 개죽음으로 내몰아버릴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극단적 돌격은 마지막 수단이 필요할 때 외에는 잘 쓰이지도 않는다.[2] 문제는 일본 육군 지휘관들이 이러한 극단적인 돌격 전술을 남용했고 본래의 전술적/전략적 의의가 무색해질 정도로 더욱 극단적인 패배를 맞이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일본 해군에서도 카미카제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시마즈의 결사돌격 정신이 잘못 이어진 사례

반자이 돌격은 이후에도 매우 황당한 전술로 두고두고 조롱받는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반자이 돌격을 ' 옥쇄를 전제한 돌격(玉砕前提の突撃)', '자살 돌격(自殺的突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バンザイ突撃

꼭 전투 상황이 아니더라도 일본인의 애국심을 유발하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 행사에서도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1943년 도조 히데키가 연설 후 만세를 외치는 모습

황족은 반자이를 외칠때 두 팔을 들지 않는다.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의 반자이

2. 돌격의 전술성

'천황 폐하 만세'라는 구호는 일본군 수뇌부가 부족한 화력( 반자이 돌격이 처음부터 생각이 없어서 무작정 돌격한 것이 아니다. 이미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님들이 사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총알로 털어버리면 군세가 우세한 게 소용없다는 것을 이순신 오다 노부나가의 선례로 이미 알았다. 알고도 그짓거리를 한 것.)과 보급을 총검 돌격으로 메꾸기 위해 강구해 낸 방법으로 병사들로 하여금 천황에 대한 광신적 충성으로 두려움을 잊게 해서 빠르게 적진으로 돌격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를 위해 돌격 전 메스암페타민, 즉 필로폰을 투여하는 일도 흔했다.[3][4]

반자이 돌격 따위와는 다른 제대로 된 돌격 자체는 지금도 전술 중의 하나다. 전장식 소총이 주력이던 시절까지는 각종 투사 무기에 의해 받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아군의 사기를 고취하고 적의 사기를 깎아내릴 수 있으며 적의 전열을 돌파 또는 맞돌격을 강요하거나 측면을 칠 수 있었다. 시대가 지날수록 자동화기가 보편화되면서 연사력이 높아져 기존의 볼트액션, 반자동 소총보다 같은 시간에 다수를 살상할 수 있는 능력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현대전에선 돌격이라는 개념은 엄폐 기동을 하며 이동간 사격을 동반한 돌격을 의미한다. 당장 대한민국 국군 각개전투 훈련에서도 '약진 앞으로' 상황에서는 1.분대가 2개 조로 나뉘어서 엄호/기동을 교대로 하며 2.최소한 소대 이상 단위로 화기반 지원이 붙을 걸 당연히 전제한다. 엄폐물 끼고 이동하며 조끼리 엄호사격을 해 주고 조금 심화 전술로 기동조가 우회해서 적의 사각을 칠 수도 있다.

현대의 돌격 전술은 보병으로 한정해서 봐도 박격포 사격과 동시에 돌격하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사용되었던 후티어 전술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돌격은 상대의 곡사화기에 큰 타격을 입기 전에 빠르게 적에게 접근할 수 있으며 적에게 고속유탄발사기가 있거나 적 포병들이 환영파티를 미리 준비하지 않은 이상 적들을 상당히 난감하게 만들수 있다. 특히 포사격은 절차가 길고 좌표값 계산에 시간이 필요하며 착탄에도 시간이 걸려 예상사격을 하면 아군 경로의 앞이나 뒤에 떨어지기 쉽기에 숙련된 FO가 아니라면 제대로 포격 요청을 하기 힘들기에 적에게 빠르게 근접하는데 성공하고 적과 거리를 더욱 붙일수록 감수해야 하는 아군 피해가 커져서 포사격을 멈추거나 같이 죽자고 자기네 위치로 포격을 요청하는 참담한 상황이 생긴다. 지금도 드론을 통한 박격포 유도 및 폭탄 투발, 더욱 튼튼한 방탄복, 더욱 휘두르기 편해진 돌격소총 등 세계대전 시기보다 발달한 기술에 힘입어 보병돌격 및 근접전은 세계 어디에선가 이루어지고 있다.

때문에 방어측은 시간이 허락하면 공격당하기 전에 사격구역을 미리 준비해놓고 이동조에 사격을 하거나 화력과 보급이 충분하면 일단 차단사격 후 효력사를 요청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마저도 악천후로 변수가 생기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현대 군대는 돌격당하는 사태 자체를 막기 위해 지뢰, 철조망, 참호선 등을 복잡하게 깔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적군이 아군과 뒤엉킨 채로는 그 무슨 화기를 쏴도 아군 오사가 되지만 아군과 살짝 떨어진 철조망 라인에 엉켜버리면 그냥 그 자리에 온갖 화력을 퍼부으면 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해 21세기에도 포병, 공군 등 화력자산이 부족하거나 방어측이 오합지졸이라면 멀쩡한 총기나 장비를 들고도 돌격에 후루룩 털릴 수 있다. 돌격은 그만큼 위력적이며, 돌격이 위력적이기 때문에 현대 병기와 전술은 정교하게 발달했다. 보병 전술에 한해서만 이 정도이고 기갑, 기동부대를 위시한 기동전이라면 공세가 전략적인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경우 한국인에게는 중공군의 모습이 익숙하다. 아무리 총알을 갈겨대도 독주에 취한 중공군이 꽹과리 치며 수류탄 던지러 마구 달려온다는 낭설이 퍼질 정도다. 실제로 당시 중공군은 국공내전이나 중일전쟁처럼 화력이 자신들보다 우세였던 적들과 계속 싸우며 많은 경험을 쌓았기에 기동전에 있어선 스페셜리스트였다. 중공군은 노리기 좋은 목표(주로 훈련과 장비 수준이 UN군보다 떨어졌던 국군)를 선정 및 집중해 포위섬멸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끌어오고 예측을 넘어선 속도와 경로로 은밀히 침투해 포위한 뒤 어떻게 방어선을 벗겨낼 지 준비한 후 돌격하는 식으로 지원 화력 열세를 극복하면서 수적우세를 잘 활용했기 때문에 국군과 UN군은 하나씩 각개격파 당하며 한때나마 서울을 다시 내줘야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당시 중공군은 제공권도 없던 상황에서 독일식 기동전을 기갑 대신 머릿수 많은 보병으로 실행한 거라고 보면 된다. 국공내전으로 단련된 야간 잠행 행군으로 전체 규모와 이동방향을 철저히 숨기면서 진격해 전선의 취약점을 대규모 병력으로 공략하고 상황파악도 못한 채 두 동강 난 적군은 그대로 포위섬멸해 버렸으니 당하는 국군과 UN군 병사들 사이에선 죄수들을 몰아넣는다거나 달아나면 가족을 쏴죽인다던가 하는 공포와 절망에서 비롯된 과장된 소문이 퍼져나갔다. 이런 공포는 UN군이 무제한 포격과 항공폭격으로 대표되는 더 많은 화력의 위력을 보여주고 한국군이 재편성되며 장비의 양과 질이 높아지기 전까진 중공군은 국군과 UN군을 상대로 많은 실적을 쌓았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방어측은 공격측에 비해 대응 수단을 준비하고 변수를 최소화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고 기본적으로 공격측은 방어측에 비해 3배의 물량이나 화력,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공격이 방어보다 더 어려운 전술이긴 하다. 즉, 돌격(과 공격)으로 우세를 점하려면 공격측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적을 하나하나 초토화시키거나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적을 포위섬멸해야 한다. 국력에 여유가 없거나 아군이 열세인 전장 환경이라면 장기전 보다는 단기전을 노려야 하는데 단기전은 통상적으로 전력이 열세인 쪽이 추구하는 방향이면서도[예외] 병사와 지휘관들의 고도의 전술적 역량이 요구되며 적이 방심하고 있어야 한다는(빈틈이 있어야 한다는) 시기적인 전제조건이 붙는다. 게다가 공세종말점에 도달했음에도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혹은 인정하지 못하고) 무작정 병력을 축차투입하며 갈아넣기만 하면 공격이 실패함은 물론 방어할 여력마저 남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전술적 성과가 전략적 목표 달성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의 일본군, 미국 남북 전쟁의 남부군과 2차대전의 나치 독일군, 일본 제국군, 그리고 앞서 예시로 든 중공군 북한군도 이러한 이유로 단기전이 큰 전술적 효과를 보이긴 했으나 전략적 목표 달성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의 북베트남군도 여러 공세를 실패하면서 이러한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베트남 전쟁의 가장 주된 승리 요인 중 하나도 결국엔 지리멸렬한 방어와 유격전(게릴라전)이었다. 호치민과 북베트남측 지휘관들은 중일전쟁 시기 마오쩌둥이 확립한 유격전 교리들을 유연하게 보완하는 형식[6]의 유격전 교리를 확립했고,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저항한 끝에 미군을 철수시키는 결과를 이루어냈다.[7] 태평양 전쟁사의 사상자 수를 결과적으로 집계해 보았을 때도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처럼 일본군이 집요하고, 교묘하고, 방어적으로 저항했던 전투에서 미군의 사상자가 훨씬 더 많이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전쟁으로 악명 높았던 군사조직들은 하나같이 공격에 있어서 도가 튼 조직들 이었다. 방어는 기본적인 방위를 위해 누구나 배울 수 있고 비교적 빠르게 숙달할 수 있지만, 공격은 그보다 더한 용기와 노력, 역량이 요구된다. 농민들이 성에서 돌을 던지거나 활을 쏘는 건 쉬운 일이지만 공격적인 전투와 기동전에 이골이 날 정도로 숙달되고 백병전으로 악명이 높은 적을 상대로 선제공격(그것도 돌격)하는 건 보통 쉬운일이 아니다. 전국시대 다이묘들도 숱한 실전을 통해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하위 군인(무사) 계급인 아시가루들에게는 장창을 쥐어주며 방어적인 모루를 형성했고 사무라이와 베테랑 고참병 중심의 정예병으로 적 진형을 무너뜨리는 망치(돌격)를 구성했다.(충격보병, 기병) 그러나 2차대전 시기의 일본군은 16세기 조상들도 알고 있던 상식을 망각했다.(...)

한편 총검이 처음 개발된 시기는 머스킷이 주 무기였던 전열보병 시대다. 이 시절의 머스킷은 연사력이 크게 떨어져 현대의 전투와 달리 백병전이 수시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8] 백병전을 위한 창병의 역할을 총병이 겸해 백병전 수행능력과 화력을 모두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당시의 백병전도 입장에 따라 항상 주력 공격수단인 건 아니었다. 화력, 훈련 수준, 병력 수, 지형, 사기 등등을 복합적으로 따져보고 전술적으로 돌격하지도 않고 무작정 돌격했다간 접근하는 동안에 상대에게 일제사격을 지속적으로 쳐맞고 맞돌격당해 역으로 궤멸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기병도 큰 전력이긴 했으나 과거와 달리 잘못 투입되면 보병과 포병에겐 쏴맞추기 쉬운 큼직한 목표일 뿐이었기에 순식간에 죽어나가 이전만큼 활약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당시 백병전이 빈번했던 시기에도 영국군처럼 사격훈련이 잘 된 군은 사격전이 주력, 백병전은 보조로 여기는 장교가 많았다. 반면 사기가 낮거나 패색이 짙은 군대는 적이 돌격해온 것 자체로 와해되거나 항복해 역설적으로 치열한 백병전이 일어나지 않기도 했다.

총기는 신뢰성, 장전 속도, 명중률, 전장식으로 인한 장전 중 신체노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량이 거듭되었고 적이 돌격해오면 1명 당 사살할 수 있는 적군의 수가 조금씩 늘어나다 결국 후미장전식 소총이 개발되어 전쟁수행 양상이 격변했다. 빠른 장전 속도와 자유로운 장전 자세 덕에 아군의 사선을 막지 않아 화력이 급상승하고, 신체노출도 확연히 줄어 상대도 후미장전식 소총으로 무장하지 않았다면 사격전에선 엎드려 쏴로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돌격해와도 수가 비슷하다면 모조리 쏴 죽이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백병전의 시대는 끝났고, 돌격의 효용성은 크게 줄었다. 기관총이 나온 다음에는 단순한 돌격 전술은 거진 사장되다시피 했다.

그 예로 제1차 세계 대전의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인 솜 전투가 있다. 당시 영국군은 나름대로 사전에 포격을 가해서 방어구조물을 제거하고 방어 병력을 제압한 뒤 보병이 전진하며 보병의 전진에 맞춰 계속 포격지원을 해준다는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없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아직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 제대로 된 화력지원을 못 해 준 탓에 사상자만 엄청나게 늘어났다. 당시 독일군의 MG08 중기관총 소대 둘이서 십자포화를 퍼붓자 영국군의 진격은 그대로 돈좌되었을 정도로 협상국은 이 전투에서 11km를 전진할 수 있었지만 60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방어자였던 독일군에게 40~6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안겨주긴 했지만 11km 전진하는데 양측 합쳐 총 100~120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고 전후 한 걸음에 100명의 청년이 전사했다는 반전 문구가 유명해졌을 정도다. 그렇게 아군이 기관총 앞에 허무하게 쓰러지는 뼈아픈 교훈을 얻은 뒤로는 단순한 총검 돌격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작전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달하게 된다.

그렇게 들어온 현대에선 총검이 아예 쓸모가 없는 건 아닌데 애매한 무기 취급받는다. 현대 보병은 시가전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은데 좁은 공간과 코너에서는 길쭉한 소총은 거치적거려서 냉병기의 기습에 당할 위험도가 높으며 준비된 세팅, 훈련, 경계 상태 없인 10걸음(약 7m) 이내에서 총을 파지하고 있지 않았다면 당할 수도 있고 5걸음 안에선 총을 겨눈 상태에서도 당할 수 있다. 물론 잘 훈련된 대원이라면 이런 상황을 미리 방지할 수 있기 때문에 어설프게 칼을 들이대면 코앞에서 기습하더라도 즉시 제압당하거나, 저지 당함과 동시에 순식간에 뽑은 권총에 벌집이 된다. 특히 전장의 베테랑들은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미리 경계하다가 반사적으로 대응하기에 냉병기가 빛을 보기 더 힘들다.

하지만 이렇게 냉병기가 활약할 일이 생길 가능성은 낮다. 총검이 무섭기 전에 총에 당할 걸 대비해 서로를 철저히 지키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수류탄이나 섬광탄을 마구 까넣기에 검들고 달려들기 전에 수류탄에 당하거나 섬광탄에 제압당할 판이다. 차라리 방어자들 입장에서 부비트랩을 까는게 더 효율적이다. 대검을 들었거나 착검했다고 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을 썼으면 더 효과적일 텐데 굳이 그러는 건 절박한 상황에서의 자살적인 공격으로 주변의 다른 인원에게 사살당한다. 암습이 목적이었다고 해도 안 들키고 그걸 해낼 정도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특수전에 필요한 무기도 지급받지 못하고 냉병기로 그런 멍청한 짓거릴 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때문에 일반적인 정상적인 군이라면 대검과 총검술에 관심이 없다. 총검술을 중요시 여기는 미 해병대도 현대엔 총검술을 신병훈련소에서 자신감 고취 의의로 교육하는 선에서 끝이고,MCMAP에도 착검을 상정한 비중이 적어 본격적으로 격투술을 배우는 인원들도 그냥 총구로 팬다. 총검 없어도 뾰족하고 묵직한 쇳덩이를 내지르면 타격이 상당해 얼굴이나 목에 맞으면 뼈 부숴지고 그대로 쓰러질 수준이다. 과거 총검술이 착검 안 하고 그냥 총으로 때리는 동작 하나로 간소화된 것이다.

또한 총검은 비전투 상황에서도 민간인 저지에도 과잉진압 소릴 듣고, 점령지에선 무슨 돌발상황이 생길지 몰라 멀찍이서부터 경고사격을 하거나 총검 들이대기도 전에 빠르게 제압하고 케이블 타이 채우는 게 우선이다. 때문에 최후의 상황에도 쓸 수 있는 든든한 공구임과 동시에 사람한테도 쓸 일이 없고 공구로도 전문 공구에 비해선 살짝 부족한 애물단지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총검술에 대한 인식은 필히 배워는 두되 쓸 일이 없는게 좋은 것으로, 참호에 밀고 들어갈 때나 쓰는 것 수준이었다. 결정적 순간에 심리적 타격을 확실하게 주는 것이 아니라 총알이 다 떨어졌거나, 수적으로 우세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 피아 상황 구분을 하지 않고 총검돌격을 하는 전술이 바로 반자이 돌격(만세 돌격)이다.

3. 반자이 돌격의 역사

3.1. 초기 화력주의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만 해도 일본군은 오히려 원거리 화력에 의존하는 화력을 강조했다. 개항 초기 일본은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 과정에서 '보병은 화력으로 결전한다'라는 당시 독일군 교리를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보신 전쟁 당시 구 일본군의 전신이었던 신정부군은 수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에서 막부군 발도 돌격 후미장전식 소총 암스트롱포의 원거리 화력으로 격퇴한 사례가 많았는데 이는 이후 공식적으로 창설된 일본 육군의 성향에 큰 영향을 줬다.

한편, 세이난 전쟁 때는 원거리 화력에서는 정부군이 우세했다. 보신 전쟁 때는 사쓰마 무사들도 후미장전식 소총을 썼지만 전후 신정부에서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총기를 죄다 수거하는 바람에 서남전쟁 때는 전장식 소총 같은 구식 총기나 검 같은 근접무기를 주무장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사쓰마 군이 발도 돌격을 걸어오면 오히려 정부군이 패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인은 주로 2가지였다. 첫째는 간략하게 프랑스식 검술을 배운 상비군이 일본식 검술의 달인이었던 사쓰마 무사들에게 근접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는데 검술의 차이가 아니라 훈련 수준 차이의 문제였다. 말 그대로 적어도 10년에서 평생 검술을 배운 사람을 군 복무기간 동안 고작 몇 년 얼치기로 검술을 배운 사람이 근접전에서 이길 리가 없다. 둘째로 상비군이던 정부군이 사쓰마군보다 사기 및 전의가 모자랐던 것도 한 몫 했다. 여기에 효과적인 대보병 화력투사 무기인 기관총이 아직 발명되지 못한 것도 컸다. 사쓰마 번 하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유파는 바로 그 유명한 시현류다. 단순하고 투박하지만 그 특유의 내려베기를 막아낼 수 없어 당시 사쓰마 번의 병력을 근접전에서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실제로 서남전쟁 2년 뒤인 줄루 전쟁에서도 대포 하나 없이 대부분 칼과 창으로 무장한 줄루군은 전쟁에선 졌지만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개틀링건과 야포 등으로 중무장한 영국군 레드코트에게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적이 있었다.

이에 정부군은 일본도 검법에 적합한 형태의 양손세이버를 도입하거나 검술이 뛰어난 자들을 모아 발도대를 창설하는 등 부족한 근접전 능력을 극복하려고 했다. 다만 발도대는 경찰에서만 창설했을 뿐 전군에 걸쳐 시행된 조치는 아니었다. 아예 전후에는 상비군에게 일본식 검술을 가르치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평생 걸려서 배우는 일본식 검술을 군 복무 기간 안에는 못 익힐 게 뻔하니 기각시켰다.[9]

대신에 고질적인 사기 부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훈련 과정에서 정신교육을 중시하고 천황 일본 제국 육군, 해군의 대원수로 앉혀 군의 사기 고양을 도모했다. 사실 이런 경향은 군대 구조를 징병제 바탕의 상비군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한 다른 근대 서양 열강도 비슷했다. 애국심과 정신력 강화(곧 정신전력교육) 및 국가 최고 원수에게 군 통수권을 부여하는 등 서남전쟁도 근접전에서의 열세를 화력으로 이겨낸 것이므로 오히려 일본군이 채택한 독일식 화력주의에 대한 신뢰는 오히려 강해졌다.

3.2.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발도 돌격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게 된 것은 러일전쟁을 겪은 후였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것이지만 일본군은 보급 및 근본적 국력 문제로 거의 패전의 위기에 몰렸었다. 육상전에서 위기에 몰린 일본군은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고 외교전에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승전할 수 있었다. 이런 속사정 때문에 청일전쟁 때와는 달리 일본은 승전하고도 러시아에게 배상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자세한 사항은 러일전쟁 문서로.

일본군은 종래의 반란군처럼 한 수 아래인 상대와 달리 러시아라는 제대로 된 적을 상대하면서 독일식 화력주의는 허리가 휠 정도로 너무나 많은 포탄을 소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맞상대한 러시아 제국군이나 일본이 군사교리를 배껴왔던 독일 같은 서양 열강들은 공업 능력이 뛰어났으므로 포탄을 많이 사용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산업화 후발 주자였던 일본의 공업 능력으로는 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러한 포탄 부족 문제는 강력한 요새를 장기간에 걸쳐 공략한 뤼순 공방전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났다. 오사카 포병 공창의 하루 포탄 생산량이 900발이었다고 하며 한번 제대로 공성을 하기 위해선 한 달 치 포탄을 모아야만 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이때부터 탄약 소모에 대한 병적인 우려가 무기체계의 개발과 배치까지 이어지는데 스트로블랑식 박격포가 지지부진하게 도입된 이유도 바로 빠른 발사속도를 가진 박격포의 탄약소모량이 부담된다는 이유였다. 일본군은 스트로블랑식 박격포는 커녕 대대급 야포를 축소시킨 형태의 보병포도 버거운 수준이었다.

여기에 당시 뤼순 공방전에 참전했던 3군 자체의 실수까지 겹쳤다. 1회 공격에 필요한 포탄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이자마자 공격을 감행한 결과, 매달 같은 날에 공격이 진행되었다(...). 다만 뤼순항은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태평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부동항으로 요새로 구축된 곳이였다. 독일에게 있어서 그때까지의 가장 큰 적이 프랑스로 도로망 구축이 잘 되었고 비교적 인접한 곳이였으나 일본이 러시아와 싸운 곳은 드넓은 벌판에 도로망이 구축되지 못한 곳이였다.

총력전에 이렇게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을 깨달은 일본군은 후술할 수많은 교본의 평가들처럼 나름대로 타개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구식 군사 제도로는 미래 전장에서 이기기 힘들다는 요상한 결론에 내린데다가, 1차대전 승전국인 프랑스의 엘랑 비탈적 교리를 들여오고 중일전쟁에서 중국군을 상대로 백병전을 걸어 큰 성과를 맛 본 강렬한 경험이 짬뽕되면서 착각과 확증편향이 중증 수준이 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1차대전 이후 열강인 프랑스에서 엘랑 비탈이나 청년학파 같은 교리, 사상들에 착안하여 나름대로의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원인이 정신력이라고 결론 내리고 본격적으로 무사도 정신[10]과 군인 정신을 강조하며 이것이 하나의 교리가 되었다. 이에 따라 탄생한 일본군 보병 교범인 보병조전(步兵操典, 1909)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최근의 전쟁(러일전쟁)에서 무형전력 즉 군인정신의 중요성이 입증되어 이로 적을 이기는 것을 증명되었다. 보병은 전투의 중심이며, 승리를 위해선 공격 정신을 고취해야 한다. 이것의 결정체가 총검 돌격이다. 사격만으로 적을 격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최후에는 역시 백병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사격은 백병전을 위해 적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며 특히 백병전은 일본 전통의 묘기(妙技)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립한 이 교리는 전열보병시대의 근대적 전술사상을 그나마 잘못 이해한 것 뿐이었다. 전열보병 시절에도 사격전만으로 얼마든지 회전에서 승리를 가져갔다. 그 유명한 레드 코트 씬 레드 라인이 바로 그 증거. 그럼에도 백병전이 자주 발생했던 이유는 주무기인 머스켓이 아직 충분한 성능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연사력이 좋지 않아[11] 돌격해 오거나 도망 가는 적을 사격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사격전에서 이기고 있는 쪽은 적이 도주 후 후방에서 재집결하여 다시 회전에 나서는 것을 막고 확실하게 끝장내기 위해 화력전의 마무리로 백병전을, 사격전에서 밀리는 쪽은 적의 우월한 화력투사를 막고 쪽수로 밀어붙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교전 초반부터 백병전을 선택했다.

그러나 전자의 백병전은 전과 확대를 위한 옵션일 뿐이고, 후자도 궁여지책으로 하는 것이지 더 좋은 방법이라서 쓰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머스켓의 연사력 문제로 돌격 중 죽어나가는 숫자가 그나마 견딜만 했던 당대에나 가능한 일이었는데, 일본은 이걸 완전히 잘못 이해하여 주객이 전도된 상태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1차대전부터는 총기 성능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기 때문에 엄폐도 산개도 없는 돌격전술은 그냥 자살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도 모자라서 백병전=정신력이라는 정신나간 논리를 전개해 버린다.

1차대전 이후 과학 기술의 진보와 변혁이 전략 전술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을 봤으면서도 '제국의 장차 작전을 예상해보면 최근의 유럽 전역에서와 동일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유럽 전역에서 실례에 나타난 무기의 위력을 과대평가하여 제국 고유의 공격 정신에 결함을 발생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같은 정신승리로 현실을 부정해 버린다. 이는 1920년 당시 참모부 정보부장이었던 타나카 쿠니시케(田中国重)의 평가다.

연합군 지상군의 주력이었던 프랑스군의 군사 교리들을 매우 높게 평가해서 그것들을 자국군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애초에 일본 육군이 독일식 전략 전술을 도입한 이유가 '나폴레옹 이래 유럽 최강의 육군을 가졌다는 프랑스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이 꺾었으므로 육군 최강은 독일'이라는 논리 때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쨌든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으므로 이들의 전략 전술을 도입하자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어느 정도 구색이 맞기도 했다. 물론 그 속내는 어떻게든 포탄을 덜 소모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이렇게 모델로 삼고자 한 프랑스군도 아랫문단에 자세히 서술했듯 포탄 확보를 위해서 국가의 모든 역량을 쥐어짜냈음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다.

3.3. 전면적인 오인

여기서 문제는 그 프랑스군의 교리는 일본군이 오인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는 점이다. 프랑스군이 전통적으로 백병전 총검술을 중시한 것은 사실이다. 나폴레옹 전쟁부터 6.25 전쟁까지 총검술을 애용한 군대가 프랑스군이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으로 돌격만능주의가 아니라 화력전의 마무리나 최후의 수단으로 백병전을 중시한 것이다.

혁명전쟁을 승리로 이끈 나폴레옹부터 포병 출신이었고 그가 남긴 어록 중에는 “신은 가장 강한 포병을 가진 쪽의 손을 들어준다“ 라는 말까지 있다. 프랑스군은 화력을 중시했고 사격전만으로도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격전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여느 국가들처럼 명사수들로 조직된 경보병을 적극 활용해 성과를 톡톡히 보기도 했고 자신들이 영국 레드 코트에게 자주 화력전을 당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도 프랑스군은 총검술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고 총검돌격을 자주 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영국군을 제외하면 화력전을 위한 실탄훈련을 할 돈이 없었다. 당시 머스킷과 화약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영국군만이 당대 최고의 부국이니 재력이 뒷받침되고 인도에서 초석을 대량으로 가져올 수 있으며 육군을 크게 키울 이유도 여유도 없어 소수정예를 지향해 훈련비가 타국보다 적었기 때문에 실탄훈련을 충분히 했다. 이런 마당에 영국군과 화력전을 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으니 영국과 프랑스의 전투는 초반에 총탄을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간을 보다가 제자리에 서서 지속적으로 사격을 퍼붓는 영국군을 향해 프랑스군이 쪽수를 믿고 돌격하여 포위섬멸하거나 중앙돌파로 전열을 와해시킨 후 섬멸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프랑스군도 총기와 화포 개발에 예산을 아낌없이 썼기 때문에 화력이 우수했다. 포는 조준기를 개량해 조준시간을 줄이고 경량화 및 표준화했으며 포대마다 말을 붙여주어 기마포병대를 큰 규모로 조직했다. 타국에서 신형 병기가 개발되어 전력이 벌어지면 비슷한 수준의 병기를 금방 개발 및 배치해서 금방 차이를 메꾸거나 아니면 아예 신형 컨셉의 병기를 먼저 개발해 선점했다. 전자는 샤스포 소총, 그라 소총, 호치키스 기관총 등이 대표적이고, 후자는 MAS 1873, 르벨 M1886, 1897년식 75mm 야포, 155mm 화포, 르노 FT-17등이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은 자타공인 화력덕후이자 세상에서 가장 기계화가 잘 된 군대였다. 보병 기준으론 20발들이 개인용 자동화기인 쇼샤도 1915년부터 종전까지 26만정 가까이 찍어내서 투입시켰고[12], 전쟁 후반기엔 세계 최초로 대량 양산된 반자동 소총인 RSC 소총까지 투입시켰다.

또한 보병을 투입시키기 전에는 대포병 사격, 기관총 진지 제압 등을 위한 정밀 포격도 아낌없이 퍼부었다. GPF 194mm 야포, 슈나이더 M1917C 155mm 곡사포, GPF 155mm 야포, Canon de 105 mle 1913 Schneider, De Bange 155 mm cannon, Canon de 155 L modèle 1877/14 Schneider 등 다양한 중포들이 19세기 후반~1차대전 시기 내 프랑스에서 개발된 물건들이다.

1차대전 물건 주제에 75mm가 달려 있는 괴물인 생샤몽, 1차대전 판 T-34-85라고 불릴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생산된 르노 FT-17 등 최전방의 화력과 참호 돌파를 책임지던 탱크는 독일보다도 압도적으로 물량이 많았던게 당시 프랑스다. 또한 뉴포르, 스패드 등 전투기들은 우수한 성능을 입고 종전하는 그날까지 프랑스의 영공을 수호했다.

그 유명한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탄생 배경도 포병 병과의 특성상 사격은 제원을 계산해줘야 실시가 가능해 수학이 중요한데 그 시대엔 컴퓨터가 없으니 당연히 계산은 직접 해결해야 해서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들을 보내 포병장교로 육성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프랑스의 포병장교는 두뇌 회전이 빠름과 동시에 군인의 기본적인 미덕인 체력, 강인함까지 함께 지닌 엘리트 취급을 받았다.[13]

얼치기 밀덕들이 반자이 돌격의 원조인것마냥 착각해서 비난하는 엘랑 비탈이란 개념은 독일과의 총력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고안된 고차원적인 군사전략을 일컫는 말이지, 무슨 기합을 넣고 총검을 쓴다는 중2병 사상따위가 절대 아니었다. 예시를 하나 들어보면, 1차대전 당시 프랑스군 내부에서 야전지휘관 암살, 적군 납치, 위력 정찰, 거점 타격등 전략적인 목표를 위해 근접전 역할을 수행하던 부대인 코흐 프랑은 이미 창설 당년인 1916년부터 전체 전투 사상자 중 총검에 의한 사상은 1% 내외라는 통계적 자료에 근거해 근접전 병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총검을 비롯한 근접무기를 지급 장비 목록에서 제외시켰고, 그 대신 권총[14], 수류탄, 자동소총 등을 지급했다. 특히 수류탄은 최고의 화력을 내는만큼 인당 10개 가까이 지급했다고 한다.[15] 특히 1917년부턴 운용 노하우가 쌓이며 해당 전술이 훨씬 정교해져 상황에 따라 항공대와 새로 배치된 중포를 동원해 대포병 사격을 포함한 화력지원을 받아가며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16]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화력 퍼붓기를 위해 짱박혀 있기만 했고 뻔히 약점을 드러낸 프로이센군의 기동 측면을 구경만 하다가 당했던 역사적 경험에 의거한다. 보불전쟁 당시의 프랑스 제국군은 무기의 카탈로그 스펙에 의지하여 수동적으로 적군에게 화력을 쏟아붓는 군사과학론, "푸 드 바타용"이 대세가 되었지만 보불전쟁에서는 고속 기동을 통해 전선을 분단한 후 각개격파 하는 직접접근-섬멸론의 프로이센군에게 약점을 노출하고 돌파 당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이 선보였던 기동을 벤치마킹해 고속기동과 전선돌파를 위한 보병 정신을 강조하는 형식이 되었는데 이것이 한국 넷상에서 오인 된 엘랑 비탈의 실체이며 프로이센의 보병 정신론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았다. 포슈가 했다는 말로 알려진 "나의 중앙은 무너지고 있고 우익은 철수 중이다. 그야말로 상황은 최고이다. 나는 공격할 것이다."라는 말도[17] 역시 적군이 기동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으면 결국 적군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고 아군의 방어선은 돌파 당하게 되니 방어에만 급급하여 짱박혀 있을 게 아니라 상대방의 기동에 맞서 아군 측도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다. 1914년 국경 전투에서 독불 양측은 철도, 차량을 통한 고속증원/기동으로 전선 돌파에 주력 했고 발전한 프랑스군은 초반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병력을 투입하여 역으로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틈을 파고 들어 섬멸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기관총과 발사속도와 정확도가 비약적으로 화포의 등장 이후 생겨난 화력 인플레때문에 공자보다 방자가 훨씬 유리해지는 상황이 펼쳐지고, 보병들이 무턱대고 진격이라도 했다간 순식간에 몰살당했기 때문에 너도나도 살기위해 참호를 파고 짱박히기를 시전했으며, 서부전선 자체가 참호전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거대한 공성전마냥 흘러가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이 일종의 공성전 공략에 있어서 굉장히 유능한 군대였다. 후티어 전술 또한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나온것이었으며, 이동탄막사격을 바탕으로 한 포병과 보병의 정교한 협동을 통해 참호를 돌파하는 전술을 개발했고[18] 이 전술은 실제로 솜 전투에서 영국군이 첫날에만 6만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며 별 성과도 못 내고 있을때 프랑스군은 5천명 내외의 사상자로 일주일 내로 8.5km를 돌파해 독일군의 방어선에 크게 구멍을 뚫는 성과를 냈다. 순식간에 방어선이 뚫린 독일이 크게 당황해 베르됭 전투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예비대를 솜 전투로 돌려서 막아냈고 이는 베르됭에의 압력을 줄인다는 솜 전투의 원래 목적을 달성하는데 성공시켰다. 또한 이 보병과 포병의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이 전술은 포병의 사거리 내에서만 유효하다는 점, 포병 자체의 부족한 기동력과 대규모 포격을 받은 지형에서 방렬이 오래걸려 진격 속도가 둔화될때 적이 예비대를 끌고와 카운터를 치는 등 한계가 들어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는 포병의 탄막 형성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직접적안 화력지원이 가능한 전차와 공중포격과 기총사격이 가능한 전투기도 동원시키는 전술을 채택했으며, 기존 이동탄막사격에 전차 전투기 운용까지 추가된 전술은 말메종 전투에서 제대로 먹혀 결정적인 승리를 얻었다. 이 모든 유기적인 기동전 노하우를 총 집합시켜 실시한 백일전투는 기어이 힌덴부르크 선을 돌파하고 독일제국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이른다. 그리고 백일전투의 중심에는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자 이 모든 교리의 노하우가 담긴 브레인의 소유자인 페르디낭 포슈 원수가 있었다.

즉, 이미 전장에서 적을 굴복시키는건 결국 화력이었다는건 다름아닌 그 일본군이 벤치마킹했다는 프랑스군이 증명해준 셈이다.

일본군은 슐리펜 계획을 매우 높게 평가하면서 섬멸전 개념을 받아들인다. 당시 일본군에게 있어서 슐리펜은 군사적 천재로 평가받았으며 이 작전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평가했으며 실패 원인은 전부 小몰트케 때문이라고 보았다. 일본이 이렇게 슐리펜 계획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당시 일본은 유사시 독일과 같은 양면전쟁 상황에 처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육군은 소련을 잠재적 적국으로 보고 일본 해군은 미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보고 있었다. 이에 더해 타넨베르크 전투가 단기결전 전략 채택 및 수행을 고취시켰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다. 이것들이 기존에 백병전을 중시한 일본의 교리와 결합하면서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냈다.

1920~1930년대를 지나면서 이는 교리화, 경직화된다. (이상의 내용은 三野正洋의 <日本軍の小失敗の硏究>에서 인용.) 특히나 이 시기에 일본군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식 백병전이 중국군과 군벌세력을 상대로 제법 통하는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되고 편향적 피드백까지 겹치며 해가 지날수록 더욱 미쳐간다.
◎ 총검술, 특히 백병사용에 익숙해야
이번 사변(※제1차 상해사변)에 있어서 아군이 항상 적을 물리치고 도처에 용전분투하며 그 공방 중 언제든, 혹은 탄약 소진시에 불시에 적습을 당한 적이 무수히 많았지만 수배 내지 십수배의 적에게 태연히 적을 지근거리에 끌어들이고 최후에는 총검을 신뢰하여 마침내 이를 격파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는데 실로 아군에 백병전을 벌일 자신이 있는데 반하여 그럴 자신이 없는 적군에게 우월함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偕行社記事第六百九十七号附録』,1932,p.8)
1.근대전과 검술의 관계여하

근대에 있어서 과학병기의 눈부신 발달은 옛날의 일기토(一騎討ち)와 같은 개인적전술을 기계적집단전술로 일변시켜, 그에 의해 일시 검술 등은 경시되는 풍조가 있었으나, 유럽전쟁의 말기즈음에 이르러 다시 중시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공격병기의 놀라운 발달은 오히려 전선의 고착을 유발하여 주간에 양쪽이 거리를 두고 엎드려 사격하게 되었으며 쉽게 적에게 육박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야간이 되면 과연 공격병기도 위력을 줄어드는지라 적과 아군 모두 참호에서 뛰어나와 서로 적진지를 탈취하려 한다. 그리하여 야간의 백병전이 되면 대포나 소총으로는 너무 늦으므로 서로 도검으로 싸우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다시 검술의 중요성이 재확인됨에 이르른 것이다.

그리하여 황군에서도 군의 기계화에 즈음하여 더더욱 검술의 연마에 임하며 우리나라 전통의 무덕을 함양하고 체력을 단련하여 건강한 기력과 담력을 양성하여 드디어 국군만의 독특한 위력이 된 것이다. 만주사변은 특히나 이번 사변에 있어서 수많은 혁혁한 위훈을 발휘한 것은 실로 검술연마의 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즉 옛 무사들의 무용을 잇는 적병 수십명을 베어버린 수훈담이나, 혹은 단신으로 적전차 격파등의 근대과학전에는 볼 수 없는 기적을 낳은 것이다. 이것은 바로 크게 진보한 기계화전쟁에 있어서도, 최후의 승리를 결정하는 비결은 백병전에 있으며, 따라서 백병전의 요결은 무도의 통달에 의한 강건한 기백과 담력의 양성에 의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육군각종병과 모범군인교전 전술』 제7 편 1934
실제로 지금 다음의 지나사변에서는, 적의 사상 원인의 6할이 백병전인 것으로도 그 필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아오키 야스시, 『병기 독본』, 1937, p. 15)
"보병은 타병종과의 협동이 부족하지만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고, 마지막으로 총검으로 재삼재사돌격을 감행하여 적을 섬멸할 의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보병의 본령이다.(사이토 시 히라저, 1941, 『군대 정신교육의 참고』, p.114)

종합하면 반자이 돌격은 2차대전은 커녕 전열보병 시대에도 전혀 안 먹힐, 생각이라는게 없는 전술이었다.[19] 위에 서술했듯 프랑스군은 포병, 전차, 항공기 등 유기적인 화력을 바탕으로 한 작전으로 독일군의 방어선과 공세를 극복했고, 엘랑 비탈의 일부인 정신론은 적에게 패배하면 모든게 끝장이니,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한다를 의미했지, 부족한 화력을 기합과 정신력으로 극복이 가능하다 를 의미한게 전혀 아니었다. 1차대전 프랑스군을 모방했다는 일본군은 정작 엘랑 비탈의 핵심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러일전쟁 시기에도 막대한 인명피해를 낸 전술을 2차대전 종전시까지 별 개량 없이 사용했고[20] 이는 당연히 대참사로 이어졌다. 거기서 그친게 아니라 에리히 루덴도르프, 파울 폰 힌덴부르크 같은 명장들이 이끄는 독일 제국군 상대로 늦어도 베르됭 전투 중반 이후론 동등한 교전비, 때로는 그 이상의 교전비를 교환하며 선전하고[21]결국 승자가 되어 항복을 받아내는데 일조하고, 독일쪽에서도 번역해서 전간기까지 연구했을 정도로 정상적인 군사 교리였던 엘랑 비탈의 명성에도 단단히 먹칠하는 결과까지 불러왔다.[22]

3.4. 정신력 집착

' 총알이 없어도, 무기가 없어도, 기합을 넣고 돌격하면 어떻게든 된다!' 라는 게 사령부의 판단이었지만, 그건 무리였지요.
- 임팔 전투에 참가한 한 일본군 참모
일본군은 총검술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베르됭 전투에서 처럼요. 결과도 베르됭 전투와 같았습니다. 대학살이었죠. 일본 병사들은 테나루강 전투에서 몰살됐습니다.
- NGC 2차 세계 대전 4부 전쟁의 절정 中

제1차 세계 대전 프랑스를 포함한 서부 전선의 주요 참전국들도 일본군마냥 참호에 정면 돌파를 시도했던 적은 있다.

물론 그들은 어마어마한 인명 손실이 일어나자 경악하여 이를 당장 때려치웠다. 문제는 당시 참호를 돌파할 효율적이고 안전한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의의로 참호는 전장에서 생각보다 오래 존재한다. 전차, 장갑차의 발달로 그 효과가 떨어진 했으나 참호를 돌파하려면 여전히 포병의 포격 이후, 전차와 장갑차가 전진하는 방식이 무려 최근까지 살아남았었다. 참호는 각종 공병장비의 발달과 높아진 보급률, 이에 따른 더 쉽고, 빠르고, 나은 진지 구축 수단들로 대체되나 모든 전쟁 및 분쟁에서 모든 전투에 중장비를 투입할 순 없으므로 최근까지도 참호는 유용하다. 삽과 인력만으로 구축하니 병사들의 불만이 많을 것 같다고 생각해도 전쟁 통의 병사들은 가족과 영원히 이별하는 것보단 훨씬 나은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 욕은 나와도 불만은 없을 정도로 아주 유용하다.

이건 비단 프랑스만의 문제도 아니고 독일 영국도 똑같이 겪은 고충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프랑스 군인들은 140만 명, 영국군은 80만 명, 독일 제국군도 200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전체 인구의 4.3%, 전체 청년층의 27%에 이르는 140만명이 전사한 프랑스 쪽의 피해는 200만명을 상실하고도 전체 인구 손실은 3.4% 수준에 그친 독일보다 더 심각했다. 그래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부 전선은 참호전이라고 불린다. 서부 전선이 주 전선으로 여겨지고 매체에서 가장 많이 묘사되어서 그렇지 동부 전선은 되려 열차를 이용한 기동전이 주가 되었다.

이것은 전쟁 이후에 프랑스가 다시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데 엄청난 손해를 끼쳤고 결국 이것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의 위협적인 행보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즉, 괜히 공격해서 인명손실 내지 말고 독일군을 실컷 죽인 다음에 밀어붙이자는 심산으로 소극적, 방어적인 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이후 라인란트 진군과 그 이후 벌어지는 가짜 전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전후에 밝혀진 사실은 프랑스(와 영국)가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던 이 순간이야말로 아돌프 히틀러가 '내 인생에서 가장 피말렸던 시간이었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독일군이 준비가 제대로 안 됐던 때였다는 점이다. 당시 독일군이 얼마나 지리멸렬했는지 아직 병사들의 피로도도 높지 않고 정찰 결과 주변에 매복 중인 적도 없고 도하 수단도 충분히 많았던 대대가 진격 중 강을 마주하자 '어? 강이네? 여기에 주둔지 설치하고 후속부대나 기다리자.' 하고 주저앉아 버린 경우도 있고 한참 진격 중인 부대를 별 이유도 없이 정지시켜 해당 부대의 어느 중위가 분노한 나머지 수송기를 잡아타고 발터 모델을 직접 찾아가 하소연한 일도 있었다. 즉, 오히려 적군인 독일군을 도와줘 버린 셈이다.

여기에 대해 일본군이 내린 결론은 먼저 기습을 가해서 참호전이 벌어지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단기 결전 사상이다.

러일전쟁 때부터도 일본군은 기본적으로 장기전에 가면 국력이나 자원이 부족한 자국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끝낼 요량이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실제로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두 전쟁과는 규모가 완전히 다른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역시 그렇게 끝낼 수 있겠거니 했다는 것이다.
끝으로, 많은 일본인이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 미국은 개인주의와 향락에 찌든 나약한 자들이라고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인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부심이 높다. 이것은 방심을 하지 말라는 충고가 아니다. 이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사실이다.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미국은 일본의 가장 막강한 적이 될 것임을 명심하라.
- 도라 도라 도라, 야마모토 이소로쿠

장교든 부사관이든 병사든 이런 교리가 철저하게 주입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경직화하면서 어떠한 비판, 수정도 가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이는 정치적인 선전 문구로도 표방하면서 민간인들도 이런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일본군이 세운 작전이라는 것들이 죄다 아군의 승리를 전제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패배할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황군으로서 자질이 없는 패배주의자'라고 보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나구모 주이치가 상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에 의해 기동함대 대장에서 잘린 것도 이것과 관련 있다.

게다가 그걸 사용해 본 결과 당연히 매번 환상이 와장창 깨졌지만 이미 경직되었기 때문에 작전은 변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패전을 겪어도, 상급 지휘관들은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필승 불패의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린 후 하급 지휘관들에게 최소한의 명예라도 지키라며 배를 가르게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이 진행되면서 화력, 경제력 등에 있어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오히려 이 사상이 더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즉, 화력과 경제력으로 이길 수 없으니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일본군은 정신력을 무기보다 위에 올려놓는 어처구니없는 자세가 되었다.

일본의 주적인 미군도 유럽 전선에 배치되는 신병을 대상으로 교육영상에서 미국 독일의 자동화기의 집탄률을 조작했다. 실제로는 생산성을 배제하고 비교하면 MG34, MG42가 M1919에 비해 무게와 총열교환 속도에서 우위였으며, MP40은 사용탄 자체가 다른 관계로 위력은 미군의 기관단총들보다 낮지만 집탄률이 더 좋았으며 M3 기관단총은 잦은 고장과 가늠자의 좁은 시야로 악명높았다. 하지만 미군이 우위에 있는 점은 미군 분대원의 주 무기였던 M1 개런드는 독일군 분대원의 주 무기였던 볼트액션 소총에 비해서 연사력이 우월하고 분대지원화기이자 연사력은 자동소총급인 M1918 브라우닝 2정 이상이 배치가 되었지만 독일은 독소전쟁 중반 이전까지 MP40을 분대장에게만 지급했으며 전쟁 중후반에 가서야 적극적으로 보급을 시도했지만 미군과 같은 분대당 SMG 2정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미군의 영원한 친구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은 웬만한 장비에 몽땅 장착되어 있었다.

어쨌든 이는 미국과 독일의 무기 체계, 전술 차이를 간략히 설명하며 병사들을 더 납득시키고 결론인 '그러니까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지휘관의 지시에 따르며 대응하십시오.' 를 역설하기 위함이었지 '독일군은 오합지졸 겁쟁이들이니 우리 미군이 우렁차게 포효하며 돌격하면 베를린까지 도망칠 거다!' 하고 우기기 위함이 절대로 아니었다.
실제 영상.
2:33부터 침착하게 분대장의 지시를 받아 싸우라고 해설이 들어간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런 과정은 싹 다 생까고 정신력이라는 결과 하나만 강조했다. 상술했듯 전략, 이념 수준에서 정신력이 좋다고 하면 될 걸 정신력만 있으면 백병전에서 다 이길 수 있다고 엉뚱하게 해석해 총검 돌격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었다. 서글프게도 진정으로 전투에서의 정신력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일본군 수뇌부처럼 반자이 돌격을 지시하는 대신 자살 돌격을 엄금하고 촘촘한 방어망을 바탕으로 농성전을 벌일 것이며,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는 돌격을 줄이고 이런 방법을 활용해 미군이 고생깨나 하기도 했다.

3.5. 몰락

초기에는 훈련이 덜 된 중국군을 상대로 나름 성공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냈으며 만주 침략이나 중일전쟁 초까지 기습 공격과 정신력을 강조하는 돌격 정신으로 연일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일본은 병력 면에서 열세인 경우는 있었지만 중국군과 비교할 때 화력이나 경제력면에서 우위였다. 당시의 중국은 전체 GDP에서는 일본을 초월할 정도로 규모상 거대했지만 혁명과 내전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실제 세수는 일본 제국에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었다. 국력에서 일본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즉, 일본군이 구상했던 '국력 면에서 열세에 있지만, 순전히 정신력만으로 이겨내는 승전'이라는 건 없었다. 실제로 제2차 상하이 사변 당시 독일 군사고문단이 설계하고 체코와 독일제 기관총으로 보강된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한건 보병의 착검 돌격이 아니라 수백문의 야포와 독가스탄, 그리고 항공폭탄이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는 진주만 공습, 남방작전 등에서 승기를 잡는 것처럼 보였고 순전히 운과 임전 태세가 좋았을 뿐인 초반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군 군부는 이 보병 교리에 대한 의심이나 이의를 허락하지 않게 된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수를 이겨내지 못하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력을 강조하며 정신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견지했다. 외교 관계자들은 '대체 높으신 분들의 체면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당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일본군을 잡아 족치자는 분위기였다. 예로 전쟁 끝나기도 전에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작심한 제독도 있었을 정도다. 최후에는 1억 옥쇄를 운운하며 식민지인과 민간인들에게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다가 수도가 네이팜탄 융단폭격을 맞아 불지옥이 되고도 모자라 역사상 최초로 핵폭탄을 맞은 국가로 전락했다.[23]

사실, 정신력이라는 것조차도 없고 무조건 명령만 따르는 무인병기라고 해도 자체 성능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있어서 지장이 있으면 당연히 임무수행이 불가능하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조차도 아시아에서 가장 잘 먹고 가장 화력이 출중하며 가장 잘 싸운다는 인식이 전 세계적으로 있었고 이 말 자체는 100% 사실이다. 이미 군사력 면에서 일본이 제공권에 우위를 점하고 있고 해군력은 기껏해야 전간기에 일본에서 수입한 순양함과 그 순양함을 복제한 함선이 최신 주력함의 사실상 전부였던 빈약한 중국 해군에 비해서 일본 해군은 너무 강력한 나머지 다른 열강들이 제제를 가해서 더 이상 배를 건조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상황까지 갔었던 일본과의 비교는 애초에 무리다. 당시 태국 해군조차도 국부군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산 잠수함까지 몇 척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일본군은 전체적인 지휘가 중국보다 훨씬 수월했고, 기본적으로 보병도 전부 소총, 수류탄으로 무장했고 분대마다 기관총이 있었으며 사단급부터는 차량도 굴려서 기동타격도 독립적으로 가능하고 일부 사단에는 장갑차 전차도 있었다. 총류탄부터 박격포, 포병의 화력지원, 육/해군 항공대의 화력지원까지 가능했다. 현대에는 기초적 사항이다 보니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당시 아시아를 포함한 비서양국의 군대는 서양식 군대의 기본적인 틀만 갖춰도 지역강국 취급받았는데 태국이 대표적이다.

식단도 총력전 이전에는 동양에 이렇게 밥을 잘 줬던 군대의 전례가 없었을 정도로 호화식단이었으며 자연히 영양 상태나 사기면에서 적국인 중국군보다 월등했다. 물론 전쟁이 진행될수록 중국군의 장교들도 어느 정도 지휘역량을 갖췄지만 일본은 물량/자질을 동시에 갖춘 전술공군과 화학무기가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사기나 전투력 측면에서 일본군 쫄병 하나와 중국군 쫄병 하나를 비교해 본다면 격차가 굉장히 컸다. 일단 든든히 먹었다. 이 링크에 들어가면 난징 대학살 때 지급된 도시락을 볼 수 있는데 흰 쌀밥과 정어리, 채소조림, 단무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말, 자동차, 정찰기를 적극 이용한 정찰대를 믿고 편히 잔 일본군이었다. 반면 지난 이틀 동안 먹을 것도 없고 계속 일본군 기동대 야습을 받고 지난밤에는 포격까지 당한 중국군의 싸움은 당연히 일본군이 유리할 수밖에 없고 이런 요건이 충족되어서 반자이 돌격은 상당한 효과를 봤다. 애초에 적군이 보이기도 전에 전의가 꺾여 버린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전선이 점차 확장되면서 일본군 역시 보급 문제에 시달려 급식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지만 중일전쟁 내내 일본군의 질적 우위는 분명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군은 개전 초기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압도적인 해군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해군보다 더 강한 미 해군을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선빵(진주만 공습)으로 쪼그라들게 만들고 나서 잠시 동안 일본 해군이 태평양에서 호랑이 행세를 하게 된다. 공군도 연합군이 아시아에 배치한 노후기체와는 비교가 안 되고 연합군의 1급 전투기하고 비교해야 겨우 스펙상 동등 또는 부분적 열세였던 상황에서 일본은 확장을 통해 동아시아 거의 전체를 함락시켰다. 역시나 전술적인 우위가 확실한 상황에서의 공세였다. 하지만 미국을 분노하게 만든 대가는 역사상 소련의 분노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견주어 볼 상대도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미국은 말 그대로 구축함을 찍어내기 시작했으며 순양함 전함 항공모함도 일본이 격침시키는 수보다 많이 찍어냈다. 이런 해군을 상대로 야마토급 3척 취역시키는 데도 돈이 부족해서 쩔쩔맸던 일본이 싸운다는 것조차도 말이 안 된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판이 뒤집힌 일본은 그 사실을 인지를 못하고 계속 백병전을 선호했다. 문제는 백병전에서조차 일본군이 우위를 점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일단 기본적인 보병 무장조차 미국은 반자동 소총을 제식으로 운용하고 있었고 기관총이 소대마다 2대씩이나 있었다. 거기다가 미국인들은 평균적인 신장이 현재 한국군과 맞먹는 172cm인 것에 비해 일본군은 이보다 약 10cm나 작은 161cm이었다. 평균 신장이 10cm 작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우 불리한데 전쟁이 진행되면서 일본 해군이 열세에 몰리자 군수물자 보급 상황도 나락으로 떨어져 신체적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장비 면에서는 그 격차가 더욱 현격한데 일례로 기갑장비는 M4 셔먼 같은 중형전차는 말할 것도 없고 M3 스튜어트 경전차도 일본군 입장에서는 온갖 포들을 동원해서 겨우 잡아내는 형편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조합하면 뒤떨어지는 신체 조건+수준 미달의 전투 장비+기약 없는 보급이 완성된다. 이런 상황에 내몰린 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살적인 돌격을 감행하게 되고 결국 모두가 죽는 엔딩으로 흐르게 되었다.

4. 실전에서의 반자이 돌격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이건, 러시아 제국군이건, 소련군이건, 미군, 영연방군과 네덜란드군, 중화민국군, 태평양 전선의 ABCD 연합군이건 간에 언제나 자살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이미 무너졌고, 초기의 소련은 전쟁 준비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고, 연합군은 초기 세계 대전의 주요 전선이 유럽 쪽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그리 주의깊게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쟁 초기 네덜란드군과 영연방군, 미군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이나 반자이 돌격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그로 인해 일본군에 대한 데이터가 쌓여가면서 이러한 기습이나 반자이 돌격은 전혀 소용이 없어졌고 오히려 미군, 네덜란드군, 영연방군의 ABCD 연합군에게 도리어 반자이 돌격으로 역공격당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결과도 이긴 것 치고는 어째 뒷맛이 찝찝한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203고지 전투조차도 노기 마레스케가 민간신앙에 맞먹는 되도않는 논리를 들이대며 개뻘짓을 하는 바람에 6개월 가까이 병사들과 재정만 왕창 갉아먹었다. 러일전쟁 역시 러시아 제국 내부에서 터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하여 내부 문제가 다급해진 러시아의 속사정 때문에 전쟁을 다급히 끝낸 것이었으며 일본이 배상금을 운운하자 러시아가 '그렇게 나올거면 다시 붙어볼까?'라고 하자마자 미국 운운하며 할 말이 없어졌다. 즉, 일본은 장기전을 수행할 만한 자본력부터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습을 바탕으로 단기전에 전쟁을 끝내려는 양상을 자주 보였고 이게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유지되었다.

결국 태평양 전쟁이 중반에 접어들 때쯤이면 야음을 틈타서 공격을 했지만 낮에 돌격하다가 미군의 우수한 화력에 밀려 도무지 가망이 없어 보이니까 야간작전에 매달린 것 뿐이다. 근데 문제는 한밤중에 조용히 진입해서 소탕하기는커녕 대놓고 저 멀리서부터 "천황폐하 만세!!!!"를 목 터져라 외쳐대며 접근했기 때문에 오십보백보, 아니 그냥 효과 없음 수준이라는 거다. 야간에는 주간보다 소리가 훨씬 더 잘 들리며 결정적으로 소리나는 쪽으로 조명탄을 쓰면 볼 것도 없이 위치가 들통나서 게임 오버.

게다가 이 때는 미군, 네덜란드군, 중화민국군, 영연방군도 일본군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탓에 조명탄+ 기관총의 십자포화 등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기관총의 존재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적들이 무더기로 몰려올 때 포격지원이나 항공 지원이 없거나 부족할 경우를 대비하는 물품이 바로 기관총이다.

4.1. 성공한 경우

총검만 들고 돌격하면 중국군은 도망갑니다. 아니, 도망쳐준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도망가버리는 겁니다.
- NHK다큐멘터리 '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고' 과달카날 편 -

청일전쟁에서 중일전쟁 초기까지의 청나라 군대와 중국군에게는 이게 아주 잘 통했다. 아무나 병사로 모아서 쓰던 청군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힘겨워했고 청조 붕괴 이후 상황이 더욱 막장으로 치달은 1930년대의 중화민국군은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자 노력했다.

당시의 중화민국군은 사관학교, 부사관학교, 육군훈련소를 통해 양성된 정규 군인이 아니라 장교라고 해본들 전체 중국군의 75%가 '군사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니 나름대로 훈련을 받고 엄격한 규율을 유지한 일본군이 칼 빼들고 '반자이!' 돌진하면 알아서 도망치거나 무너져 버렸다.

장쭤린- 장쉐량 부자가 지배하던 만주는 중국에서 가장 공업화가 잘 되었고 상태가 좀 멀쩡한 곳이었지만 일본군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장학량(장쉐량)의 소극적 대응 때문에 앉아서 망했고 이후 기찰정무위원장 쑹저위안을 비롯한 많은 군벌이 이런 이기적이고 소극적 태도로 자멸했다. 그도 아니면 산동 군벌 한푸쥐나 광동 군벌 위한머우처럼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거나 옌시산처럼 자기 영지에 틀어박혀서 단독 협상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허수아비 같은 오합지졸을 상대로 계속 이겨대던 일본군은 당연히 반자이 돌격에 재미가 들려서 청일전쟁 이후로 30년간 지겹도록 써먹었다. 당시의 중국군은 청조가 멸망한 후 지역 군벌들이 날뛰었기 때문에 한 나라의 군대로 보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초기에는 동남아시아의 미군 및 네덜란드군, 영연방 식민지군은 본진에 신경 쓰느라 '조그만 섬나라 황인종쯤이야'라는 생각을 가졌고 남방작전에서 최소한의 장비와 인원만을 갖췄을 만큼 준비가 부실했던 병력들을 상대로 이기며 정신력으로 귀축영미를 처단하는 무적 황군의 기분을 잠시나마 만끽했다. 다시 말해서 2선~3선급 부대나 치안유지용 준군사조직, 식민지군, 식민지 민병대들을 상대로 정예부대를 투입해서 이겨 놓고 정신승리를 한 것이었다.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로 인해 징집된 일본계 미국인들도 독일군에게 반자이 돌격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짓을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던 나치 독일군이 매우 놀랐다고 한다. 물론 엄연한 미군의 일원이었던지라 돌격 중 반자이를 외쳤을 뿐이지 미군 교리대로 싸웠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 말 한마디에 독일군들이 모랄빵이 날 정도로 기겁했다는 소리.[24]

4.2. 실패한 경우

여기까지는 "사기가 낮고 훈련도가 낮은 오합지졸 적군을 상대할 때 번뜩이는 총검은 말 그대로 적군에게 멘탈붕괴를 준다"는 연구 결과를 증명하는 사례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사기도 충천하며, 보급도 잘 되고, 훈련도 잘 받은 데다가, 병력까지 많은 군대를 상대한 결과다.
[이미지(시신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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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역, 핸더슨 비행장 공격을 위해 마타니카우 강변에서 반자이 돌격 후 몰살당한 일본군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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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3~4일 필리핀 전역
158연대 부쉬마스터스 전투단이 '자살적인 반자이 돌격'을 격퇴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Cuidado”–Take Care–Bushmaster with Bolo!(“Cuidado” -조심해-[25] 마체테 든 부쉬마스터다!), H. Charles McBarron 작)

사실 미국은 이미 남북 전쟁 때부터 개틀링 기관총, 가드너 기관총을 전쟁에 도입했다. 조지 S. 패튼은 "알량한 용기 따위 훈련된 총알 앞에 무력하다"라는 말을 했으며 미군은 전선에 기관총 등 중화기를 최대한 동원했다.

중화민국군 상대로 반자이 돌격이 잘 통하던 것도 중일전쟁 극초반까지고 당장 전선이 상하이로 확대되면서 얘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합지졸로 매도되는 군벌군이지만 광서군벌 리쭝런, 바이충시 등 능력 괜찮은 군벌들이 지휘하던 군벌군은 우수한 전과를 자랑했고 일본의 오랜 침략과 만행으로 중국 전체도 반일 감정으로 투철한 정신무장을 한 상태였다. 더욱이 장제스가 애지중지 키운 독일식 사단의 전투력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당시 독일식 훈련을 받고 독일식 무기로 무장한 장제스 직속 독일식 4개 사단과 중앙군 30만명은 개인무장으론 일본군보다 나았다. 게다가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등의 독일 나치 정권 고문들을 초빙하여 군대를 강화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고 일본군이 공격 대상으로 삼은 상하이는 그런 장제스의 국토수호 노력의 결정체였다.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지뢰밭, 철조망, 토치카, 참호, 체코제 경기관총 등으로 촘촘히 중무장된 우쑹 해안에 자신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일본도와 총검을 들고 상륙했던 일본군들은 삽시간에 십자포화 앞에서 도륙났고 상륙 3주 후에는 상륙부대의 96%가 전투불능이었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상하이로 이어지는 뻘밭들을 자신들의 피로 메워가면서 처절하게 전진해야 했다. 상하이 전투 자체는 '중국군 중에 어느 누구도 80만 대군을 한꺼번에 지휘해본 적 없다'는 지휘 능력의 부재로 인해 결국 일본군이 이기긴 했으나 일본군은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3차례나 증원군을 파병해야 했다. 흔히 손쉽게 함락됐다는 난징도 중국군은 처절히 저항하면서 일본군을 상대로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일본은 창사 공략전을 3차례나 실패했고 타이얼좡, 짜오양, 쉬저우에서는 중국군에게 참패하기도 했다. 중국 전선에서 무모한 일본군 지휘관들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할 때까지 돌격하다가 중국군이 미리 짜놓은 팔(八)자 포위망에 걸려들어 고전하거나 엄청난 출혈을 강요받고 도로 후퇴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그때마다 전황을 뒤집어준 것은 반자이 돌격이나 그들의 중화기가 아닌 일본군의 항공기, 군함, 독가스였다.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하고 역습한 연합군, 특히 미군과 영연방군과의 대결에서는 대부분 접근은 커녕 적 보병 얼굴도 보기 전에 중화기를 앞세운 우세한 화력에 태반이 쓸려나가고 그 다음에는 오히려 일본군이 멘탈붕괴하여 도망가서 어떻게 손써 보지도 못하면서 대부분 전멸했다. 보병 개인의 화력은 전쟁 내내 큰 차이가 없었지만 분대지원화기 등 중화기에서 한참 열세였던 일본군은 중화기의 화망 앞에는 걸어다니는 표적지에 불과했다.

개전 초기엔 성과가 있었다. 미군 네덜란드군, 영연방군은 치안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과 중화기만을 두었다. 일본군 또한 최소한의 상식은 지켜가며 야간에 경기관총이나 보병포, 척탄통 등으로 엄호하며 돌격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야습이 아닌 데다 엄연히 정규군이었던 만큼 밀리더라도 일본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며 밀려났기 때문에 교전비는 좋지 못했으며 순식간에 수복당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착검돌격이 중국 전선에서 잘 먹힌 가장 큰 원인은 그 외에도 다른 교착화된 전선을 돌파할 수단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적던 시기였던 만큼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에 비해서 무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국군과의 교전에서 고전하게 되면 그 즉시 독가스를 활용한 화학 공격을 개시하거나 기갑장비를 동원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화학탄 사용이 금기시되었고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보복이 두려워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중국은 일본이 아무리 화학 공격을 해대도 자체적으로 화학탄을 활용한 반격을 할 능력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화민국도 화학공장에서 독가스와 방독면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같은 화학무기로 대응하는 것이 가능하긴 했고 실제로 중일전쟁 당시 여러 번 사용했다.

다만 이는 전선이 화북과 상하이에 국한되었던 극초반의 일이고 이후 전쟁 전반에 걸쳐 중국이 화학 공격을 시도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전체적인 산업 능력의 열세로 인해 방독면은 물론이고 소총도 딸랑딸랑하는 상황에서 화학 공격을 했다가 일본이 이를 빌미로 대규모 독가스 보복을 시도할 경우 이에 제대로 대응하거나 보복하는 것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전쟁 초반 이후 화학공장을 포함한 주요 공업 지대인 동부 해안이 일본군에 넘어가 버리자 중화민국은 화학무기로 대응하는 대신 일본의 국제법 위반을 규탄하여 외교적 우위를 점하고 열강의 지원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선회했다. 다만 이후에도 윈난성 안닝시에 위치한 주요 포탄 생산 공장인 제21병공창을 중심으로 백린탄과 화학제를, 쓰촨성 루현시의 제23병공창과 구이저우성 쭌이시의 제42병공창에서는 방독면을 지속적으로 생산했다. #

대전차전 능력도 매우 부실했으므로 일본군이 1920~30년대 기준으로 제작한 기갑장비로도 전선 돌파가 충분히 가능했다. 이 때문에 돌격시 보병을 지원해야 할 기갑부대 역시 이 시대 수준에서 끝났다. 이것이 훗날 일본군이 진짜 강력한 상대와 교전시 교환비가 커지는 원인이 된다. 소련이나 독일 등 타 국가들은 돌격시 기관총이나 화포를 활용한 지원도 지원이지만 진짜 전선 돌파용 무기인 기갑장비가 충실했던 반면 일본은 중일전쟁 관동군 정도가 그나마 장비가 주어졌고 그마저도 무기대여법으로 왕창 공여된 소련의 기갑전력에는 열세인 상태였다. 여기에 정신력 교리까지 합쳐져서 그야말로 자살이나 다름없는 짓이 되었다.

즉, 일본군은 전선 돌파용으로 독가스와 기갑장비를 사용했지만 독가스는 미국은 충분히 화학전을 벌일 능력이 되므로 서로에게 지옥이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대미전에서는 사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중일전쟁에서 화학무기를 신나게 썼지만 ABCD 조약 연합군과 싸웠던 태평양 전쟁에서는 영혼까지 털리는 와중에도 오히려(!) 화학무기를 쓰지 않았다. 한 술 더 떠서 일선부대들에 배치된 화학무기를 스스로 회수하면서 화학전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 구체적으로는 화학전이 개전되도 연합국 측은 화학전에 대한 보호수단이 충실했고 더 강력한 화학무기들의 투사가 가능했지만 일본군은 보통 수준의 화학무기에 대 화학전에 대한 보호대책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미, 영, 호주, 네덜란드군 포로에게 온갖 인체 실험과 식인을 일삼았던 일본군의 실체를 떠올릴 때 이런 이성적인 대처는 매우 아이러니하다.

기갑장비는 현실에 안주하느라 1920~30년대 수준에서 멈췄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게 그냥 알보병의 돌격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화포와 기관총을 이용해서 제압하자니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화포나 기관총은 어느 나라나 있었지만 결국 전선 돌파용으로 전차가 만들어졌듯이 총포만으로 진지를 구축한 적을 격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거기다가 백병전 상황을 굳이 강요하려면 소총보다는 기관단총이나 산탄총, 하다못해 단축형 소총 근접전에서 유용한 무기를 잘 활용해서 피해나마 최대한 더 늘리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는데 일본군은 그런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건 일본군이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이 핀란드군의 수오미에 당했던 것처럼 근접전에서 피본 상황을 겪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김상옥 선생의 쌍권총으로 근접전에서 일본군은 큰 피해를 본 적이 있지만 조센징의 테러라며 교훈을 얻기는커녕 잊어버리기 급급했다. 게다가 여기서 피를 본 경찰은 육군과 대립하는 관계라서 이런 경험을 공유해 줄 리가 만무했다. 1차대전 당시 참호전을 직접적으로 겪거나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칭다오 공략전은 사실상 완전한 화력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각종 반자동 소총, 톰슨 기관단총, M1911, 산탄총 등 근접전에서 아주 유용한 무기들을 훌륭하게 써먹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환상적으로 박살나면서 일본군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해서 대전 후반쯤 가면 100식 기관단총을 보급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것도 공정부대나 해군 육전대 등 특정 부대 한정이라는 게 대다수였다는 것이다. 소총은 난데없이 잘 쓰고있던 38식 소총을 냅두고 사용탄이 다른 99식 소총을 혼용해 보급라인을 꼬아 가면서까지 교체하면서 기관단총을 하나라도 더 만들려고 발악하진 않았다. 남방작전 당시의 일본군의 기관단총 부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의 팔렘방 유전을 방어하는 네덜란드군을 공략하기 위해서 공수작전을 펼쳤는데, 100식 기관단총의 보급이 딸리는 관계로 팔렘방 전투 이전에 격파한 연합군에게서 노획한 톰슨 기관단총을 지급하거나 심지어 권총 1자루 주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당시 네덜란드군의 무장 상태가 열악하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수작전 자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중 공수부대가 들이닥쳤기 때문에 성과는 분명히 거뒀지만 일본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어떻게든 그나마 미군에게 피해를 준 대전 말기 반자이 돌격을 굳이 찾아보자면 사이판 전투의 1944년 7월 6일에 벌어졌던 습격(The Raid)을 찾을 수 있다. 당시 3,000여명 가량의 대규모 일본군 부대가 최후의 옥쇄 돌격을 시행했고 미군의 허술했던 방어와 경계를 뚫고 나름대로 미군에게 꽤 큰 피해를 입혔다. 영상에서는 날이 밝았을 때 옥쇄 돌격을 한 걸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새벽에 습격이 벌어졌다. 다만 이 그나마 성공한 습격에서도 일본군은 3,000명 전원이 사망한 반면 미군의 사망자는 500명 가량으로 교환비는 6:1, 다만 3,000여명의 일본군에 맞선 것이 미군 2~3개 대대 뿐이었던 데다 영상에서도 체험할 수 있듯 파리 떼마냥 몰려오는 일본군의 돌격에 당시 미군들의 심리적 충격이 엄청났다고 한다.

총검돌격을 했으니 당연히 전투 후 상대의 사상자 대다수가 총검에 발생했음에도 이를 보고받고 '성과가 있다'로 판단해 이에 고무된 상부에서 더욱 권장했고 '성과가 없다'면 부사관들이 군기가 빠졌다며 병사들을 두들겨 팬 뒤 지휘관은 '지난번엔 실패했으니 이번엔 애들이 바짝 정신차려서 제대로 하겠지'하는 마인드로 대충 넘기며 또 돌격을 지시하는 패턴의 무한반복에 전쟁이 중후반으로 접어들면 일선 병사들은 보급이 모자랐고 영양상태도 아주 나빴는데 "이렇게 굶어죽을 바에는 쟤랑 함께 죽자"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제히 "반자이!"를 외치며 기합을 넣고 총검, 군도를 앞세워 돌격했다.

그러나 대개는 이미 체력이 한계에 달하고 피로가 극에 달해 지친 상태였으니 아무리 기합을 넣고 백병전을 시도해도 미군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여기에 일본군이 아리사카를 들고 근대식 총검술로 덤비면 미군은 반자동 소총에 착검후 장전하고 권총, 산탄총, 기관단총, 화염방사기 등의 다양한 화기와 역시 냉병기인 필리핀식 마체테인 볼로와 블랙잭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가면서 맞섰다. 미군 병사들은 볼로와 블랙잭을 매우 좋아했다고 하며 블랙잭으로 주물럭 고기 두들기듯 일본군 병사들을 다져버린 사례도 있다.

게다가 미군은 남북 전쟁이나 의화단 운동, 그리고 치열한 참호전이었던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지독하고 처참한 백병전을 하도 겪다 보니 잘 정립된 현대식 총검술 나이프 파이팅은 물론이고 권투, 레슬링, 그 외 지저분하지만 매우 효율적인 격투술들을 정식으로 교육받았다. 당시 교육필름에서는 낭심 차기, 촛대 까기, 군화 뒷굽으로 발등 찍기, 엄지로 눈 후벼파기 등 이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 기술들이 다양하게 나타나며 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병사들을 위해 '가장 훌륭한 병사는 살아서 계속 적을 죽이는 병사'임을 수차례 강조한다.


미 육군의 1943년 영상으로, 백병전은 그냥 막싸움이나 다름없고 어떤 방식으로든 적을 죽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분 50초대를 보면 적에게 총검으로 덤비다가 권총에 역습당해 쓰러지는 걸 보여주며 총이 필요할 때는 총을 쓰라고 말하기도 한다.

육군에선 총검술이 사라지고 있지만 미 해병대는 신병훈련코스에 총검술이 포함되며 MCMAP 단증 따기를 적극 장려하며, 총검술도 비중은 낮지만 포함된다. 대검도 살상능력을 주안점으로 개발된 Ka Bar가 아직도 쓰인다. 물론 소위 다목적 나이프보다 오히려 더 유용한 이유도 있다. 지정사수소총에도 굳이 착검돌기가 달렸다.

덤으로 깡다구 있는 대공황 세대라 기본적인 주먹질은 할 줄 알던 경우가 많아 가르친 걸 흡수도 활용도 잘 했으며 병사간의 교육도 활발했다. 이러니 어떻게든 운 억세게 좋게 총알 한 발 안맞고 자기들이 상상했던 대로 맞붙어도 이지선다 뿐이기에 다지선다로 솜씨좋게 덤벼오는 미군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미 해병대는 이미 의화단 사건 이후 격투술과 총검술을 다듬고 집중적으로 교육시켰다.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은 전술적으로는 거의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일선의 미군들이 비상식적인 돌격을 되풀이한 일본군에게 적개심과 공포심을 품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같은 인간이 승산도 없는 싸움에 나 죽여주쇼 하면서 돌진하는 광경은 본능적인 공포감을 불러 일으켰는데 더 퍼시픽에서 이걸 아주 잘 묘사했다. 문제는 이 때문에 일본군의 광기를 이해하지 못한 미군 병사들은 일본군의 바람대로 "반자이!"라는 한 마디만 들어도 떨어서 사기를 잃기는커녕 반대로 "야아, 저 개새끼들 또 온다. 저놈들 놔두면 다음엔 또 무슨 미친 짓을 할지 모른다!"며 더욱 더 확실하게 일본군을 쓸어 버렸다는 거다. 특히 총포 관련 에피소드는 과달카날 전역 당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런 일본군의 공격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미군이 똑같은 마인드로 '너 죽고 나 죽자'며 상당한 피해를 각오하고 과달카날 전투에서 반자이 돌격을 본뜬 육박전 공격을 펼친 적이 있었는데 매번 착검 돌격을 구사해서 본인들도 돌격질에 철저하게 대비할 줄 알았던 일본군은 미군의 제대로 된 착검돌격과 빵빵한 M2 기관총, M1919, BAR과 화염방사기에 싹 전멸했다. 이것은 상기된 미군과 일본의 차이가 복합되어 나타난 결과로, 이는 때와 장소를 안 가리는 일본군과는 달리 적이 가장 취약할 새벽대를 노렸고 일본군은 미 해병대가 이런 작전을 할 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피골이 상접해서 제대로 싸울 상황도 아니었다.

1943년 11월의 타라와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일본군 병사들이 좌초한 수송선 잔해에 숨어서 공격을 퍼붓자 미 해병대 1개 소대가 폭탄을 몸에 묶고 뛰어들어 수송선을 부순 적도 있었다. 결국 이 병력은 거의 전원 전사했다. 이에 대한 일설에 의하면 일본군은 전선에 투입되기 전에 '미군은 겁이 많아서 오직 원거리 사격만 한다는 교육을 받았는데 정작 미군들이 돌격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소련군 독소전쟁 초기엔 대숙청으로 일본군처럼 전술의 격차를 무지막지한 인력으로 메웠고 큰 인명 피해를 봐야 했다. 다행히 미국이나 영국 등 다른 연합국이 독일의 한쪽 팔을 잡아주던 형국이었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나마 사람 보는 눈은 좀 있고 부족하더라도 최소한의 상식은 있어 빠르게 숙청된 장교들을 복직시키고 게오르기 주코프 등 능력 있는 지휘관을 적절히 기용하며 지휘관들의 의견도 그럭저럭 잘 들어줬다. 일본군이 황당한 아집을 일방적으로 부하 탓으로만 돌려버리며 밀어붙인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독소전쟁 초기 모스크바까지 밀리는 데 대한 책임을 통감하여 장군들에게 일정 부분의 지휘권을 인정해 주었고 이후 독일의 공세를 막아내자 한 번 나서볼까 하다가 또 한 번 털리면서 전쟁에서의 직접적인 간섭을 전쟁이 끝나갈 때까지는 참았다. 스탈린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당시 소련의 인재층의 능력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우수한 무기와 개선된 전략전술로 질이 뒷받침되는 숫적 우세를 앞세워서 독일군을 쓰나미 앞의 조각배 신세로 만들었으나 일본군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소련군처럼 패배를 반면교사로 삼지도 않았고 우수한 무기도 없었으며 전략전술을 개선할 생각조차 없었으니 그냥 답이 없다. 이 쪽은 2차대전 말로 가면 기갑, 차량은 생산량이 오히려 늘어나면서 찍어내는데 보병은 전쟁 내내 소모가 누적된 데다 나치 독일의 민간인 대학살 정책으로 징집할 청년이 없어 결과적으로 연합군 중 미군 다음으로 기계화가 잘 된 군대가 됐다는 웃픈 상황이 되었다.

이건 영국군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독일하고 전쟁 때문에 영국 본토와 아프리카 식민지에 신경쓰느라 태평양 식민지 군대를 지원하기 힘들어서 밀렸지[26] 전쟁 후반부에도 일본군 최정예를 2선급 부대로 맞서는데도 화력부터 열세인 데다 마틸다 II 보병전차가 쓰러지지 않아서 밀렸다. 마틸다 II 전차는 초창기 영국군의 주력 보병전차답게 전면 장갑 75mm, 측면 장갑이 70mm로, 대전 초기 기준으로썬 심히 단단하여 변변한 대전차포라고는 PaK 38 정도밖에 없던 당시 독일군은 8,8cm FlaK이나 그걸 올린 티거 쯤을 가져와야 겨우 상대할 수 있었다. 더 장갑이 얇은 M3 스튜어트를 상대로 쩔쩔맸던 일본군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간신히 육박전을 벌일 거리까지 다가와도 이를 대비해 전투종족인 구르카를 세워 놨으며 실제로 싸우지는 못했지만 2차 대전에 등장한 진짜 검객도 있었다.

전쟁 최후반부라서 별로 부각은 안 되지만 소련군을 상대할 때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때는 일본 치고 이례적인 대형 요새포들이 포격 지원을 해 주긴 했으나 잘 무장한 엄청난 수의 병력과 T-34-85 등 강력한 기갑부대의 기동전으로 일본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다.

김영옥이 지휘했던 일본계 미국인 2세로 구성된 미군 부대 제442보병연대 제100보병대대(442nd Infantry Regiment, 100th Infantry Battalion)는 유럽 전선에서 반자이 돌격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 비퐁텐(Biffontaine)에서 당시 소대장이었던 김영옥이 수류탄을 들고 독일군 기관총좌에 돌격하다 부상을 입고 쓰러지자 이에 분노한 소대원들이 반자이를 외치며 돌격해 독일군 기관총좌를 박살냈다. 다행히 김영옥 본인은 가벼운 부상만 입은 덕분에 쓰러진 자리에서 수류탄을 던지며 부하들의 돌격을 지원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사건 이후 한동안 100대대는 유럽의 미군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해졌다. 이 돌격은 유럽 전선에서 실행된 유일한 반자이 돌격으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은 김영옥과 그의 상관이 100대대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두고 설전을 벌이던 중 독일군 기관총좌가 기습적인 사격을 가하자 상관이 무턱대고 착검돌격을 지시했고 결국 대원들이 공격한 물체는 나무 울타리에 불과했다고... 분명 김영옥의 회고록에도 적혀 있다.

김영옥이 수류탄을 들고 돌격하던 걸 보고 울컥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며 정확히 말하자면 돌격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김영옥이 혼자 몰래 기어가 수류탄을 까 넣은 것이다. 기관총 진지를 교란시키고 그 사이에 적은 인원이 기어가 수류탄을 까넣는 건 1차대전 초기는 물론 이전에도 있었던 상식적으로 누구나 시도할 전술이다. 일본계 미군의 유럽에서의 첫 총검 돌격이라 대서특필하여 군과 민간의 사기진작을 목적으로 미국 언론에서 이를 대서특필한 것이고 실제로 성과도 있긴 했지만 돌격 자체는 전술적으로는 실패한 것이었다.

5. 문제점 및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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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결과

포로를 심문해서 알아낸 사실이 있었습니다. 항복하지 말라는 교리를 주입시킨 이유는 바로 이런 식으로 무모한 돌격을 하게 만들려는 준비였다는 점입니다. 즉, 돌격할 때 도망칠 궁리를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싸워봐야 명예만 남는 이상,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NHK 다큐멘터리, 태평양 전쟁 <적을 모른 채, 나를 모른 채 ~과달카날> 편
주코프 曰 "일본 군인이라면 반자이를 외치면서 용감하게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할힌골 전투 후 수풀 속에서 매복 중 방충망을 받지 못해 만주 전투모기를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 일본 병사에게
반자이 돌격의 가장 전형적인 예로는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가 지휘한 과달카날 전투가 있다. 하지만 역시 미군의 기관총 십자포화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군 병사들처럼 말 그대로 학살했다. 1년여 뒤 동남아시아 임팔에서는 무타구치 렌야가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다" 라는 말을 하며 아군을 아사시켰다. 그러나 무타구치 렌야는 끝까지 '내 잘못이 아니야, 부하 잘못이지!\' 라고 박박 우겼으며 죽은 부하들의 장례식에 가서 나는 무죄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돌리다가 유족들한테 죽을뻔 했다. 그러니 죽은 부하들의 유족한테 뭇매를 맞았지... 그러나 그나마 살아남기라도 했고 적어도 이런 짓까지 명령하진 않았다.

실제로 저런 짓을 명령한 다치바나 요시오는 무려 무타구치 렌야 밑에서 개고생한 사람에게 "야이 미친놈아 무타구치도 식인하라고는 안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무타구치가 얼마나 끔찍한 지휘관이었냐면 과달카날 전역에 있었던 병사가 임팔 작전에도 투입되었는데 그 병사가 "과달카날보다 끔찍하다!" 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무타구치는 지휘관 자격이 없을 만큼 무능한 인간이었을 뿐이지만 다치바나 요시오는 아예 인간 자격이 없을 만큼 심각한 케이스라 그냥 무능했던 무타구치 정도로는 따라갈 수가 없는 악질이었다. 지휘관으로서 최악인 인간과 그냥 인간이기를 포기한 쓰레기의 차이다.

태평양 전쟁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는 오히려 미군 쪽에서 일본군이 반자이 돌격을 하기를 원했다. 당시 일본군은 야간전에도 기도비닉을 잘 수행하기 위해 사격을 금하고 총검을 준비한 채 미군의 진지로 접근했지만 정작 자기들이 야습을 시작할 때는 반자이를 외치면서 돌격했다. 기다리고 있던 미군한테는 반자이가 사격 신호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일본군이 야간에 반자이 돌격을 감행할 때가 오히려 최대의 기회로 이때 일본군을 많이 죽여야 나중에 동굴이나 참호 등에서 농성하는 일본군을 소탕할 때 훨씬 적은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들이 돌격할 때 달아나 숲에 숨어서 지내면서 저격이나 기습으로 미군을 공격하던 일본군들의 손에 죽어나간 미군이 반자이 돌격 과정에서 죽은 미군보다 훨씬 많았다. 모든 일본군이 이런 식으로 싸워왔으면 상황이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른다. 실제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은 미군에게 그런 방식으로 그나마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27] 몰락 작전이 실행되었더라면 일본 측에는 홈그라운드라는 이점까지 생기는 셈이었으므로 피해가 더 생겼을 수 있었다.

전쟁 후반 들어 전세가 완전히 연합군 측으로 넘어가고 일본의 최우선 목표가 본토방위로 바뀐 뒤로는 전력보존 차원에서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 사용빈도가 극단적으로 줄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끝내 반자이 돌격은 안 그래도 걸레짝이던 일본의 패망을 더 앞당긴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19세기 이전에나 통했던 전법을 현대화기가 발전하는 가운데 "안 되는 억지"를 "정결을 지키는 죽음"으로 미화시켜 만든 일본 군부의 가장 멍청하면서도 바보같은 전법 중의 하나로 남았다.

손자병법 모공편의 결구는 이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좋은 예시라고 하겠다.
知彼知己(지피지기) : 저편의 사정을 알고 이편의 사정을 알면
百戰不殆(백전불태) :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不知彼而知己(부지피이지기) : 저편의 사정을 모르고, 이편의 사정만을 알면
一勝一負(일승일부) : 한 번은 승리하고 한 번은 패배한다.
不知彼不知己(부지피부지기) : 저편의 사정과 이편의 사정을 함께 모르면
每戰必殆(매전필태) :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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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도 이런 일본군의 전술은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 대거 유입된 창군기 한국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모양이다. 당시 미 고문단의 평가항목에 따르면 'Was there a "BANZAI" Charge? (반자이 돌격을 했는가?)'라는 항목이 보이는데 위에서부터 11번째 문항이다. 1차, 2차, 3차 모두 'No.'라고 기재되어 있다. 사진은 1949년 5월 7여단 1연대의 검열보고서로, 다행히 1연대는 합격했다.

김석원은 허구한 날 반자이 돌격을 하며 일본군 물이 안 빠졌다고 미 고문단이 씹어댔다. 다만, 이건 해당 문서에 들어가서 확인할 수 있듯 미국 측의 악의적인 평가라고 밝혀졌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전술이지만 일단 근접전을 상정하고 만든 전술이라 그런지 2차대전 시기 서양에서는 총 대신 활과 검으로 전쟁터를 누비던 양반이 있었는데 근접전 마니아답게 일본군이 반자이 돌격을 한다는 것을 알고 일본군과 싸워보고 싶었으나 그 전에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아쉬워했다고 한다.

7.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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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출처
카미카제와 반자이 돌격이 함께 이루어지며 각종 대전차총검술 비슷한 것은 덤이다.

특히나 후반부로 가면 더 몰려오는 BT-7 무리에 대부분이 겁을 집어먹는다. 물론 영화적 연출 상 병력 밀집도가 너무 높아서 소련군 피해도 꽤 크게 나온 것을 감안하더라도 충격적이게도 저 영화에서는 일본군이 실제보다 훨씬 괜찮게 나왔다. 실제 일본군은 트럭도 없거니와 트럭을 굴릴 연료도 없어서 드럼통 실은 차량으로 자폭을 하는 전술 같은 건 제대로 쓰지도 않았고 대전차지뢰 들고 눕는 것 역시 성공률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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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온 일본의 장관이 야쿠자 일당에 납치당했다가 주인공 다니엘 일당의 활약으로 구조되어 도망친다. 이때 쫓아오던 야쿠자들이 주인공 일당을 쫓아가다가 싱싱한 생선과 에펠탑 미니어처에 감탄하는 개그를 보인다. 그리고 야쿠자 차량 한 대가 택시를 보자 "반자이!" 하고는 반자이 돌격을 시전. 그 위력은 주인공 일행을 추격해오던 파리 경찰들을 한 곳에 모조리 전복시키는 위엄을 보였다. 물론 그 야쿠자들은 다니엘 일당의 유인책에 걸려 미리 대기하던 베르티노 장군이 동원한 전차들에 포위되어 일망타진. 창작물 대다수에서 반자이 돌격의 대접은 처참하기 그지없는데 이건 제법 흔치 않은 케이스다.

8. 일본군의 유사 전술

9. 농담삼아 비교되는 것

10. 타국의 유사한 행태

반자이 돌격은 태평양 전쟁 때 벌어진 비상식적인 행태를 부르는 말이고 여기에 서술된 건 겉보기엔 유사하지만 그래도 정식 전략, 전술 소리를 듣는 것들이라서 그 급이 다르다.

[1] 전근대 시대 일본 무장조직(군벌, 막부군 등)에서도 '반자이'가 돌격 구호로 쓰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들의 후신인 일본군이 이러한 구호를( 천황 폐하라는 구호를 추가해서) 쓰는게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현대에는 자위대같은 무장조직에서도 잘 쓰이지 않지만 간혹가다 민간 조직에서 의기투합, 사기증진, 응원 등을 위한 구호로 쓰이기도 한다. [2] 예: 아군의 탄약이 다 떨어졌거나, 아군의 핵심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최고 지휘관 보호, 전략적 요충지 보호) 결사적인(희생) 지연전을 펼쳐야 하거나, 적의 화력이 너무 압도적이라 죽을 각오로 먼저 선수를 쳐야 할 때 등. [3] 당시에는 어느 진영이든 전쟁 전부터 민간인, (격무에 시달리는 노동자, 스포츠 선수 등) 군인 가리지 않고 메스암페타민의 위험성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서 많이 쓰였다. [4] 원래 히로뽕은 일본에서 발명했는데 2차대전 당시 양 진영 모두 남용했다. [예외] 방어자의 역량이 형편 없거나 공격자의 수준이 너무 뛰어나서 전력이 우세한 공격자가 단기전으로 승리한 사례는 예외다. [6] 모였다가 흩어지고, 규모를 늘렸다가 줄이고, 요란하게 때리다가 쥐 죽은 듯이 잠복하고 등을 반복하며 게릴라와 정규군을 오가는 전술. 유연하고 유동적인 편제 [7] 마오쩌둥의 유격전 교리, 베트남 전쟁 관련 참고문헌 - 현대의 전쟁과 전략 1장~2장.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엮음. [8] 백병전이 수시로 발생하는 이유는 전열보병 문서 참고. [9] 일본의 고류 검술은 완전 습득에 10년 정도 걸린다. [10] 정통 무사도와 다르다. 하가쿠레 문서 참고 [11] 역사적 기록물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당시 숙련병의 연사 속도는 분당 4발 정도로 보인다. 이는 오늘날 자동, 반자동 총기에 비해 느려터졌다는 소리를 듣는 볼트액션, 레버액션, 펌프액션 총기들과 비교해도 한참 느린 속도. [12] 1차대전 기준으로 가장 많은 수량이 생산된 개인용 자동화기이다. 그 다음이 15만정 가량 생산된 루이스 경기관총. 쇼샤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조병창에서 만든건 충분히 쓸만했다. 그래서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로도 유럽 각국과 중국에 수출되어 전간기 시절 벌어진 크고작은 전쟁들부터 2차대전 초반까지 잘만 쓰였다. 쇼샤의 악명은 야드 파운드법 변환 과정에서 설계가 어긋난 미군용에서 비롯된 낭설이다. [13] 뿐만 아니라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이공계 특화 고등교육기관 특성상 엘리트 포병장교 뿐만 아니라 민간 분야에서도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 앙리 푸앵카레, 니콜라 레오나르 사디 카르노, 브누아 망델브로 등 인류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우수한 수학자,과학자들도 많이 배출했다. 여담으로 에바리스트 갈루아도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지원했다가 탈락했다. [14] MAS 1873, 르벨 리볼버, 루비 권총 등. [15] 즉, 백병전이 난무하는 1차대전의 모습은 영화 게임의 연출에 불과하며, 당시에도 일반적인 교전에서 근접전을 치룰만큼 적과 대면하는일은 극히 드물었고 그 대면하는 상황조차도 거의 총을 든 쪽이 이겼다. 절대다수의 사상자는 포격과 기관총 사격에서 나왔고 사상 원인이 백병전에 의한 경우는 극히 드물어 통계에선 아예 논외로 집어넣었다. 이해가 어렵다면 저니스 엔드를 보는것도 좋다. [16] 정황상 슈나이더 M1917C 155mm 곡사포로 보인다. 기존 곡사포 대비 정확도와 사거리, 발사속도가 향상되었다는 언급과 1917년부터 배치가 시작된 중포면 이것밖에 없다. [17] 실제로 한 말은 아니며 당시 포슈의 적극적인 반격을 표현하기 위해 언론에서 만들어낸 말이다. 포슈의 부관이었던 막심 베이강은 "실제로 한 말은 아니지만 그의 에너지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말이다."라고 그 말의 실존 여부는 부정했지만 맥락은 긍정했다. [18] 포병들이 적 장애물, 기관총 진지 등을 제압하는 탄막을 형성시킬동안 선발대를 투입시켜 재빠르게 1차적으로 점령한 직후, 포병은 다음 방어선을 향해 재방렬한뒤 재포격, 1차적으로 점령한 선발대들은 다시 탄막을 따라가고 점령하는것을 반복하고 선발대가 제압해둔 참호를 뒤따르는 보병대가 완전히 적의 참호를 점령하는 전술이었다. [19] 나폴레옹의 대육군 가운데서도 철저히 고르고 골라 뽑은 인간병기 프랑스 제국 근위대에게 패배를 안겨준건 다름아닌 레드 코트의 특기였던 집중사격이었다. 활강 머스켓 시대에도 안 먹힐 전술을 기관총 기관단총이 판치는 2차대전에서 써먹었다는 소리. [20] 참호전이 왜 탄생했는지를 생각하자. 기관총과 대포에 맞아죽기 싫어서 탄생한것이다. [21] 1915년까지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교환비에서 밀린건 프랑스 제3공화국의 산업화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당시 산업시설의 원동력은 다름아닌 석탄이었고, 불행히도 프랑스는 영국, 독일 대비 석탄 매장량이 크게 낮은 국가였는데 그나마도 철강과 석탄이 풍부했던 알자스-로렌 마저도 빼앗겼다. 이는 곧 석탄값 상승을 불러와 본격적인 산업화를 진행시키는데 발목을 붙잡았다. 그 결과 1차대전 개전 직후엔 독일군의 중포가 최대 3000문에 달할때 프랑스군의 중포는 600문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고 독일은 우월한 화력을 바탕으로 전쟁 초중반까진 교전비에서 앞서는 모습을 보였다. 즉, 프랑스가 1916년부터는 교전비에서 밀리지 않기 시작한건 말 그대로 프랑스의 산업 역량을 영끌하고 우방국인 영국과 미국에게 대량의 군수물자를 아웃소싱 맡겨 독일군과 동등한 수준으로 화력을 높였던 결과지, 무슨 정신력과 근성따위로 이룬 성과가 절대 아니다. [22] 물론 1차대전때 서부전선 탱킹하며 활약했던 그 프랑스군이 맞나 싶을정도로 허무하게 패배한 2차대전의 프랑스군의 자체적인 졸전도 엘랑 비탈의 명성에 크게 먹칠하긴 했다. 물론 프랑스 침공 문서의 프랑스를 위한 변명 항목에서 나오듯,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졸전인 2차대전 프랑스군도 당연히 일본군보다는 훨씬 상식적으로 싸웠고 프랑스군 수뇌부도 훨씬 상식인들이었다. 고작 6주 사이에 전사한 독일 국방군 전사자가 4년 내내 일본군과 맞선 미 해병대 전사자 수와 맞먹는다. 또한 복합적인 원인을 가진 단기간 패배의 모든 책임을 다 뒤집어쓴 모리스 가믈랭도 실상은 독일도 주목해서 배워갈만큼 능력있는 장군이었다. 애시당초 프랑스가 6주만에 서렌친것도 냉정하게 생각하면 주력군을 다 잃어서 승전 가능성 자체가 없어져 더 이상 인적자원을 무의미하게 소모시키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일단 사람을 최대한 살리고 봐야 다음 기회를 모색할 수 있지 않은가. 승전 가능성이 없어졌는데도 가미카제, 대전차총검술, 자돌폭뢰, 가이텐, MXY-7 오카, 1억 총옥쇄 등 온갖 헛짓거리로 수많은 인적자원을 의미없이 낭비시킨 일본군 수뇌부에 비하면 당연히 훨씬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23] 일본 본토 공습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군 방공체계는 정말 끔직하게 허술했다. 영국의 아브로 랭커스터와 미군 육군항공대의 B-17 등에게 골고루 얻어맞던 독일군은 1945년 패전까지 무려 5만대에 달하는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는데 이놈의 일본군들은 레이더와 같은 신기술 도입의 거부, 고질적인 정신 우선 교리로 인한 전황 기만으로 B-29가 들이닥쳤을 때 일반적으로 두들겨 맞으며 고작 300여대의 B-29를 격추하는 데 그쳤다. [24] 부연하자면 '유럽 전선에서 반자이 돌격을 실행'한 소대가 바로 김영옥이 지휘하던 부대로, 소대장이 스스로 기관총 진지를 무력화하려다 총에 맞고 쓰러지자 자발적으로 돌격했다고 한다. [25] 연대 모토 [26] 그나마도 대부분은 영국군의 자멸이었다. [27] 말 그대로 그나마다. 이 두 전투는 미군이 생각보다 피해가 컸을 뿐이지 결국은 일본의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