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이수빈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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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글로벌리서치 상임고문
이수빈 李洙彬 | Lee Soo-bin |
|
|
|
출생 | 1939년 1월 16일 ([age(1939-01-16)]세)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1][2] | |
거주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퍼스티지 |
본관 | 성산 이씨[3] |
호 | 정암(正岩) |
현직 | 삼성글로벌리서치 상임고문 |
학력 |
성주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 / 학사) 세종대학교 ( 경제학 / 명예박사)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삼성생명 대표이사 회장, 삼성전자 회장 직무대행, 삼성글로벌리서치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삼성글로벌리서치의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2. 상세
삼성그룹 내에서 샐러리맨부터 시작해서 오너일가를 제외하면 최초로 회장단에까지 오른 전설적인 인물.[4] 삼성 비자금 특검 수사 당시 회장직에서 잠시 물러났던 이건희를 대신해 삼성의 대외적 대표를 맡기도 했다. 50년 넘게 삼성에 몸 담고 있으며 2019년까지만 해도 삼성 내에서 단 둘 뿐인 회장직함을 가진 사람이었다.[5] 그 사이에 이수빈 회장은 만 80세를 넘기면서 삼성생명 회장직도 2019년을 끝으로 내려놓았다.1939년 1월 16일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서 아버지 이건석(李建錫, 1916. 6. 27 ~ 2005. 5. 15)과 어머니 풍산 류씨(豊山 柳氏) 류두루(柳斗縷, 1918. 3. 18 ~ ?)[6]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5촌 당숙으로 천석꾼이던 이완석(李完錫, 1904. 8. 6 ~ 1950. 6. 29)에 입양되었다. 성주중학교와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7],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삼성그룹에 입사하여, 입사 12년 만인 1977년 2월 제일모직 사장에 올랐다.
제일제당, 삼성증권 등 주요 계열사 사장을 거쳐 소병해의 후임으로 1991년 삼성그룹 회장실 비서실장이 되었다. 이후 1993년 10월에 티스푼 사건으로 인해 비서실장(부회장) 직에서 경질되었지만 회장으로 승진하여 삼성증권 회장으로 이동했다. 1995년부터 7년간 삼성생명 대표이사 겸 회장을 맡았다. 2002년 삼성생명 대표이사(등기이사)직을 그만둔 뒤에도 회장 직함을 가지고 있었고[8], 그룹 주요 행사의 좌장 역할을 하며 주로 경영 자문을 해오고 있다. 2019년 삼성생명 회장직 또한 내려놓고 삼성경제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3. 경력
- (2020년 1월 ~ 현재) 삼성글로벌리서치 상임고문
- (2019년 1월 ~ 2020년 1월) 삼성글로벌리서치 회장
- (2008년 4월 22일 ~ 2010년 3월 24일) 삼성전자 회장 직무대행
- (2003년 3월 ~ 2017년 12월) 삼성 라이온즈 프로야구단 구단주
- (2000년 4월 ~ 2018년 2월)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 (2002년 3월 ~ 2018년 12월) 삼성생명 회장
- (1996년 9월 ~ 2012년 5월) 삼성생명 공익재단 이사장
- (1995년 5월 ~ 2002년 2월) 삼성생명 대표이사 회장
- (1993년 10월 ~ 1995년 4월) 삼성증권 대표이사 회장
- (1991년 2월 ~ 1993년 10월) 삼성그룹 회장실 비서실장 · 부회장
- (1991년 1월) 삼성생명 대표이사 부회장
- (1985년 5월 ~ 1991년 1월) 삼성생명 사장
- (1985) 미국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 (1984) 삼성항공 사장
- (1980 ~ 1984) 제일제당 사장
- (1978) 제일합섬 사장
- (1978 ~ 1983) 제일모직 사장
- (1974) 제일제당 이사
- (1965) 삼성그룹
4. 이야깃거리
이수빈과 이재용 당시 전무
- 이건희의 고등학교 3년 선배이다. 이병철이 경상북도 대구부 수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서 삼성물산의 모태가 되는 미곡상 삼성상회를 경영하면서 천석꾼의 부자이던 이수빈의 양아버지 이완석과 자주 거래하며 인연을 맺었는데, 이 때문에 이수빈 또한 이건희와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있었던 '양과 질'의 논쟁에서 품질 경영을 위해 서든스톱을 도입하자던 이건희에 반대해 생산량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점진적인 품질향상을 주장하다가 이건희가 티스푼을 내던지게 만드는 날벼락(일명 티스푼 사건)을 맞은 탓에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나 삼성생명 회장 자리로 이동했다.[9]
- 일각에서는 이수빈이 2002년 삼성생명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이유가 삼성그룹의 자동차사업 실패인 것으로 보고 있다.
- 2008년 4월 23일 이건희가 차명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등기이사에서 퇴진하고 일선에서 물러나자 그를 대신해 삼성그룹의 수장을 맡았다. 이후 2010년 3월까지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다만 대외적인 부분에서 삼성그룹을 대표했으며 실제 경영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2017년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의 은퇴식에서 이승엽이 그를 보자마자 은퇴식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승엽의 삼성 복귀도 그와 김인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 노력한 끝에 이루어졌기에 눈물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회장자리까지 올랐다는 점, 오너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그룹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현대건설의 이명박과 비견될만한 인물이다. 다만 이명박이 김영삼과 연을 맺고 정계로 진출하면서 현대家와 멀어진것과 달리 이수빈은 현재까지도 삼성에서 회장직함을 유지하고 있다.[10]
5. 관련 문서
[1]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2]
대산리 422번지에 있는
대산동월곡댁(大山洞月谷宅)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고택은 이수빈의 증조부인 이전희(李銓熙, 1862.6.20. ~ 1930.1.25.)가 1911년 건립했고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에서 시집 온 자신의 아내
경산 이씨(京山 李氏, 1861.2.7. ~ 1945.12.3.) 이탁하(李鐸夏)의 딸의 고향 마을 이름을 붙여 '월곡댁'이라고 했다는데, 현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3]
정언공파(正言公派)-성주(星州) 대포(大浦)·중포파(中浦派) 33세 수(洙) 항렬.
[4]
삼성 일가가 아닌 사람들 중 최초로 회장이 된 인물이라고들 흔히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과거
삼성전자가
김준성 전
경제부총리를 회장으로 영입하는 등 전문경영인을 회장으로 선임한 역사가 있다. 또
이건희의 장인인
홍진기 전
내무부장관은 옛 삼성 계열사였던
중앙일보·
동양방송 회장을 맡은 바 있다. 다만 삼성 오너 일가 출신이 아니면서 삼성에 입사해 이사, 사장, 부회장 등을 거쳐 회장에 오른 것으로는 이 사람이 최초 사례가 맞다. 두 번째는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이고, 세 번째는
권오현 전 삼성종합기술원 회장, 이후 네 번째는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장인 김기남이 있다.
[5]
이건희가 2014년에 쓰러져 와병하다가 사망한 이후 실질적인 총수 역할은
이재용이 담당하지만 아직까지는 회장직에 오르지 못했다. 이건희가 사망하고 2년이 지나서야 이재용 부회장이 회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6]
류시환(柳時煥)의 딸로,
류성룡의 후손이다.
[7]
이건희의 선배다.
[8]
그래서
현명관이 회장으로 승진한 이후에는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오너),
삼성생명 회장
이수빈,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까지 회장이 3명 있었다. 삼성물산이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었고, 삼성전자가 핵심계열사라는 점과 삼성생명이 삼성그룹 내의 금융권 계열사들의 본산 역할을 하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높은 인물이었던 셈. 이후 현명관과 이수빈이 물러나고 이건희가 사망하면서 전부 떠나게 되었지만.
[9]
이 일화는 이건희가 직접 당시 상황을 녹음하면서, 사장단에게 돌렸다고 하는데, 저때 양과 질 논쟁에서 이수빈의 양과 질은 동전의 양면이니 점진적으로 가자는 말을 듣고 아 저게 진정한 충언이구나, 그래. 회장님 앞에서 저렇게 말해야지.라고 칭찬했다가 이후 티스푼 집어던져 찻잔깨지는 소리를 들었던게
현명관 삼성물산 부회장이었다고 한다.
[10]
왕회장과
그의 아들이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어 대권에 도전하자 김영삼이 그들을 견재하기 위해 14대 총선 당시 이명박을 민주자유당 국회의원으로 영입했다. 이후 14대 대선을 거치며 왕회장의 꿈이 물거품이 되고 초원복집 사건, 국세청의 세무조사 보복 등으로 현대그룹이 위기를 맞이하게 된 반면 이명박은 정계에서 승승장구하게 되자 왕회장이 굉장히 고까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