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군사정부가 정치 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큰 의혹을 받은 대한민국의 4가지 부정부패 사건. 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회전당구기( 파칭코)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을 가리킨다.이 사건들로 인해 군사정권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받았으며, 군사정권이 주장했던 '구악' 에 빗대 '신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를 통해 구축한 막대한 불법 자금은 대부분 민주공화당 창당 자금 및 정치 자금 등으로 동원되었다.
2. 상세
2.1. 증권 파동
1961년부터 정부의 적극적인 육성책과 국영기업체의 배당률 상승 전망 등으로 주식시장은 활발해진 반면 주식의 공급은 적어 투기자금이 증권시장에 집중되면서 주가가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중앙정보부는 증권계에서 이름난 투기꾼 윤응상과 결탁하여 통일증권, 일흥증권, 동명증권[1] 등 3개의 증권회사를 설립하여 증권거래소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주식을 사들여 주가를 폭등시켰다. 1962년 5월 과열투기 사태가 빚어져 결제일에 주식거래대금을 결제하지 못하자 증권파동이 일어났는데 군사정부는 금융통화위원회를 통하여 대출을 승인해 주는 등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결국 사태를 초래한 증권회사를 비롯하여 5,300여 명에 이르는 영세한 일반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재산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5.16 군사정변이 터진 지 4일 후인 20일경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이었던 강성원 육군 소령은 윤응상을 방문하였다. 윤응상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주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해방 후인 1958년부터 경희증권 고문으로 활동을 시작한 증권업 유경험자였다.
1961년 11월 초 중앙정보부의 지령을 받은 윤응상은 중정 소속 정진호 소령으로부터 3차례에 걸쳐 9억환을 받아 증권 시장 조작에 나섰다. 윤응상은 1961년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공공사업인 한국전력공사의 주식을 사들여 한전주의 시가를 올렸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한전의 대주주로 있던 농협에 압력을 가했으며 이때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이영근, 관리실장 정지원 등이 농협중앙회장인 오덕준[2] 과 부회장인 권병호를 찾아가 한전주를 시가보다 싸게 매각하라고 협박하였다. 결국 농협은 한전주를 시가보다 8백환 싼 주당 1만 5천 8백환의 가격에 불하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농협은 정부의 요청해 의해 보유하고 있던 한전주 12만 8천주를 헐값으로 불하하였고 윤응상은 그 중 5만 주를 사들여 약 8억 6천 환의 폭리를 취했다. 정부는 이 금액을 윤응상에게 자본금으로 운용하록 하였고 윤응상은 <통일>, <일홍>, <동명>의 세 증권 회사를 설립해 공공기관인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인사권 등 각종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정부는 이때 윤응상을 도와 그의 심복인 서재식을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세웠다. 윤응상의 대증주(대한증권거래소주식) 70% 매입과 더불어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자금조달을 위해 증권시장을 적극 육성하겠다는 박정희 정부의 발표가 뒤따르자 주당 5전에 거래되던 대증주는 1962년 4월 18일에는 21환 10전까지 폭등했다.
1962년 4월 말 윤씨는 대증주의 가격이 폭등하고 거래량이 폭증하는 시점에 40억환의 증자(주식 수 증식)를 추진했다. 이때 액면가 50전인 대증주를 29배인 14환 50전으로 뻥튀기하여 투자자들로부터 청약을 받았는데 이때 수탈한 금액은 무려 136억환에 달한다. 그러나 청약 결과는 예상 외였다. 극심한 주가 폭등을 의심한 투자자들의 청약률이 67%에 그치는 부진을 보인 것이다. 또 주가가 갑자기 폭등하게 되자 투자자들은 본격적인 주식 매도(현금화)를 시작했고 이로써 주가는 매도 물량이 많아져 급락하기 시작했다. 윤씨측은 주가 유지를 위해 매수를 거듭했으나 이는 결국 자금부족으로 이어져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현금으로 바꾸어 줄 수 없는 '수도결제 불능사태'에 직면하였다. 이에 윤씨 계열의 증권사들은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중앙정보부는 곧바로 < 한일은행>에 압력을 가하여 4월 30일, 윤응상이 50억 환을 한일은행으로 부터 융자받아 수도케 하고 남은 금액은 전액 현금 없이 연수표로 발행하여 5백 27억환을 지불케 하였다. 그러나 주가는 계속 떨어졌고 주식을 현금화하려는 투자자들로 인해 수도자금 부족 현상은 계속되었다. 한편 주식 폭락에도 불구하고 이를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5,340명의 투자자들은 연일 자살 소동을 벌이는데 이들의 피해 금액은 무려 138억 6천만 환(현재가 약 60조)에 달했다.
1962년 5월 24일 윤씨 계열의 증권사들이 진 투자자들에 대한 미결제자금은 무려 3백 52억환에 달해 이로써 윤씨는 다시 정부와 중앙정보부 정진호 소령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6월 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 유원식과 정진호 소령 등이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에 압력을 넣어 2백 80억 환을 융자받아 겨우 난국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2백 80억환은 남한 총 통화량의 8%, 화폐발행고의 16%나 되는 거액으로서 대한민국의 경제에 인플레이션을 몰고 오는 등 그 폐해는 대단했다.
윤응상은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경영하던 <영화증권>과 <범일증권>에서 고객들로부터 위탁받은 돈 10억 환을 횡령하여 고객들이 고발했으나 중앙정보부는 검찰총장에게 압력을 가하고 담당검사를 좌천시켜 이 사건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이때 중앙정보부는 피해 고객들인 황인섭 씨 외 12명을 중정으로 불러 변상해 준다고 설득(혹은 협박)했으나 투자자들은 결국 돈을 못 받고 말았으며 윤응상은 검찰 진술에서 67억환(현재가 약 30조)을 중앙정보부에 제공해 주었다고 말했다.
증권파동이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이것이 여론에 불을 지피자 6월 13일 최고회의 특별감사단장 유양수가 진상조사에 나섰으며 이듬해 2월 중앙정보부가 '4대 의혹사건 수사팀'을 구성하면서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됐다. 이 결과에 따라 윤응상, 서재식, 유원식(최고회의 재경위원), 천병규(재무장관), 강성원 등 14명이 구속되었고 검찰과 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 등 전원 유죄 구형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군법회의에서 '의혹의 원인 없다.'는 판시가 내려져 전원 무죄를 선고받아 증권파동은 형식적으로 매듭지어졌다. #
위의 글에서 인용된 신문기사에서 추측하기는 공작을 했으나 돈을 못 벌었기 때문에 공화당에 전달된 돈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지만 그때 관여했던 인물들의 기록물을 살펴보면 20억 환[3]을 벌어들인 것으로 나오며 이것을 기획한 김종필의 발언을 보면 주식시장을 투기장으로 이해한 것이 드러난다.
정치적으로 돈을 쓸 데가 많은데 그런 정치자금을 국고금으로 쓸 수는 없으니 그래서 증권시장에서 조달하였습니다. 원래 증권시장은 투기꾼들이 모이는 곳 아닙니까. 재미 보는 사람도 있고 손해 보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죠. 이 방법은 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정보기관이 부족한 공작비를 보충하는 방법으로 썼는데.. 우리도 그 방법을 모방한 겁니다.
훗날 김형욱은 ' 박정희에게 일부 상납되고 민주공화당 창당자금, 야당 교란 등의 공작자금으로 쓰였다.'고 폭로했다.[4]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의 주식시장은 투기장이며 위험도가 높다는 인식이 자리잡아 10년 정도 정상화되지 못해 기업들의 성장세가 상승세일 때 기업들의 자금조달을 은행대출, 사채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학자들이 평가한다.
2.2. 워커힐
중앙정보부가 외화 획득의 방편으로 UN군의 휴양지를 건설하기 위해 1961년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장동에 워커힐 호텔을 지으면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호텔건립공사가 자금난에 허덕이자 정부주금(政府株金) 5억 3,590여 만원을 빌려주어 호텔을 짓도록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막대한 공작자금을 유용하였으며 공권력을 휘둘러 교통부장관과 각 군에 여러 장비를 제공하게 하고 인력을 동원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1961년 9월, 군사정권은 워커힐을 짓기 위해 성동구 광장동 부지 18만 평을 수용했다. 워커힐 부지는 당시 10대 재벌 중 하나로 유명했던 '대한전선그룹' 설경동 회장의 땅이었지만 나는 새도 눈만 깜빡이면 떨어뜨리는 게 군사정권이었고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는 국가 명의로 설경동의 부지를 헐값으로 사들였다.
워커힐 건설사업에는 중앙정보부의 석정선(중앙정보부 제2국장), 김용태(중앙정보부 경제고문) 등이 개입했다. 이들은 교통부가 워커힐 건설을 주관토록 조처했는데 교통부 장관 박춘식은 워커힐 건설공사가 자금난으로 부진해지자 워커힐 이사장인 임병주(당시 중앙정보부 제2국 1과장, 중령)에게 정부주식 출자금 5억 3천 600만 원을 건설자금 명목으로 빌려주었다. 정부가 아직 공사에 드는 비용도 책정되지 않은 시점에 가불 형식으로 거액을 빌려 준 것은 야당 의원들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건설을 위해 투입된 비용은 2억 8천만 원(220만 달러)에 불과했으며 이는 형무소 죄수들과 각 군의 공병들의 무상 노역으로 가능한 것이었으며 부족한 장비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에서 지원받아 문제를 해결했고 워커힐 공사에 필요한 일본제 수입품에 대하여 관세를 물지 않았는데 그렇게 무대 장치로부터 시멘트에 이르기까지 일제품을 수입하면서 중앙정보부는 무관세 무검사로 도입하여 150만 달러(2억여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5]. 그런 까닭으로 애초에 서울대 공대 교수나 외국 건축가들이 800만 달러에서 1000만 달러가 소요될 거라고 예상한 워커힐 건축을 불과 220만 달러로 완성할 수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4,158대의 각종 장비와 연인원 24,078명을 무상 노역하게 했으며 건설비 명목으로 책정한 5억 3천 600만원 중 실제 공사에 투입된 2억 8천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2억 5천여만원을 착복했다. 참고로 1963년 한 해 국가 예산이 768억원이었다. 한 해 국가 예산의 0.6%인 5억원의 거액을 투입한 것이니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350조(2014년도 국가 예산)의 0.6%인 2조원을 투입한 셈이다.
2.3. 새나라자동차
중앙정보부가 자동차공업을 육성시킨다는 명목으로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제 자동차[6] 400대의 수입과 판매를 담당하게 하였으나[7] 수입허가 과정에서 공권력이 남용되어 횡령 등 부정행위가 행해진 사건이다. 결국 한국산 자동차 공업의 발전은 이루지 못하고 막대한 예산만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8] 이 사건들은 정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1964년 초 제3공화국 국회에서 국정감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 진상이 명백하게 규명되지 않은 채 부정적인 정치유산으로 남게 되었다.2.4. 회전당구기
군정하에서 1961년 12월 재일교포 김태준(金泰俊) 등이 파칭코라고 하는 도박성을 띤 회전당구기 100여 대를 재일교포 재산을 반입하는 것으로 속여 한국에 들여온 사건이다. 이후 계엄 상황에서도 파칭코 도박이 성행하여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영업허가를 취소하고 김태준 등을 관세법 위반으로 체포하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3. 사건 이후
1963년 4대 의혹 사건으로 인해 외유를 떠나는 김종필의 마지막 모습. 오른쪽은 후임인 김재춘 부장이다.
상기 사건들은 당시 의혹이 불거진 뒤 엄청난 정치 스캔들로 비화되었지만, 이후 정권 차원에서 대충 적당히 조사하고, 별 처벌도 없이 유야무야 넘어가는 식으로만 조치되었다. 실제보다 훨씬 추잡한 내막이 있으리라 예상은 되지만,[9] 박정희 정권이 진상을 덮었다. 이 사건에 대한 본격적이고 상세한 폭로 및 증언은 5.16 군사정변의 핵심 세력이자 훗날 중앙정보부장까지 지낸 김형욱 등의 입에서 터져나오게 되었고, 특히 1995년 공개된 '한국의 부패 문제'라는 미국 국무부의 비밀 보고서를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특히 이 사건은 87년 민주화 이후 쏟아져 나온 과거 군사 정부 관련 정치 비화 르포 및 탐사보도 시리즈의 단골 주제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사건의 핵심 책임자였던 김종필은 당시 '4대 의혹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외유를 떠나게 된다.[10] 이것을 김종필의 '1차 외유'라고 부른다.[11] 참고로 당시 유행어가 되었던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표현은 이 1차 외유 때 김종필이 "이번 여행은 나의 희망 반, 외부의 권유 반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오"라고 했던 것이 신문 기사로 옮겨지면서 나온 말이었다.
4. 여담
- MBC 금토 드라마 수사반장 1958 7화에서 1962년 증권 의혹 사건을 모티브로 한 스토리가 나온다. 또한 10화에선 회전당구기 의혹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친다.
5. 참고
- <군정의 주가조작, 1962년 증권 파동>, 서울경제 #
- <한국사회 부패의 발생구조와 변화트렌드 분석(II), 2016, 황지태, 김경찬, 서울시립대학교,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1]
동아그룹 계열의 증권회사. 이 사건의 여파로 1969년 폐업하여 금융업에 손을 뗐다가 1982년에 고려투자금융을 설립하여 13년만에 다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91년에 동아증권으로 사명을 변경했고 1998년
세종증권을 거쳐 2006년
농협금융지주에 인수되었다.
[2]
오덕준도 1960년에 예편한 육군 중장 출신이었다. 혁명군이 함부로 대할수 없는 인물이었던것.
[3]
당시 정부예산의 10%에 가까운 금액
[4]
조갑제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5권,
김형욱 회고록
[5]
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대왕사 1993, 251쪽
[6]
1세대 수입 계획이 있었다. 여담으로 후속인 블루버드 실피는
르노삼성 SM3 1세대의 베이스 모델이 된다.
[7]
초기에는 KD(Knock-Down, 완제품 수입), 후기에는 SKD(Semi Knock-Down, 부품 수입, 조립 생산) 방식으로 수입했다.
[8]
물론 이것보다
더 심한 일들도 일어나긴 했지만...
[9]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자 마자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1963년 말에
제5대 대통령 선거와
제6대 국회의원 선거를 연달아 치렀는데, 금권선거가 난무하던 당시 양대 전국선거에 천문학적인 선거 자금을 동원했으리라 짐작된다. 이 막대한 불법 정치자금의 기반이 바로 '4대 의혹 사건'을 통해 조달된 것이다.
[10]
이 시점에 김종필은 육군 대령 신분에서 준장으로 진급한 뒤 곧바로 퇴역하는 것으로 군인 신분이 정리된다. 즉, 김종필의 최종 병역은 예비역 준장이다.
[11]
공교롭게도 김종필은 1년 뒤 다시 반강제적으로 외유를 떠나게 되는데, 이는 1964년
6.3 항쟁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