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2:31:09

김재춘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전직 프로게이머에 대한 내용은 김재춘(프로게이머)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전 교육부 차관에 대한 내용은 김재춘(교수)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8px" <tablebordercolor=#06377a><tablealign=center><tablebgcolor=#06377a>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73A3C,#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중앙정보부장 (1961~1981)
<nopad> 장도영 내각 <nopad> 김현철 내각 <nopad> 박정희 정부
초대
김종필
제2대
김용순
제3대
김재춘
제4대
김형욱
<nopad> 박정희 정부
제5대
김계원
제6대
이후락
제7대
신직수
제8대
김재규
<nopad> 최규하 정부 <nopad> 전두환 정부
제9대(서리)
이희성
제10대(서리)
전두환
제11대
유학성
국가안전기획부장 (1981~1999)
<nopad> 전두환 정부
제11대
유학성
제12대
노신영
제13대
장세동
제14대
안무혁
<nopad> 노태우 정부
제15대
배명인
제16대
박세직
제17대
서동권
제18대
이상연
<nopad> 노태우 정부 <nopad> 문민정부 <nopad> 국민의 정부
제19대
이현우
제20대
김덕
제21대
권영해
제22대
이종찬
국가정보원장 (1999~현재)
<nopad> 국민의 정부
제22대
이종찬
제23대
천용택
제24대
임동원
제25대
신건
<nopad> 참여정부 <nopad> 이명박 정부
제26대
고영구
제27대
김승규
제28대
김만복
제29대
김성호
<nopad> 이명박 정부 <nopad> 박근혜 정부
제30대
원세훈
제31대
남재준
제32대
이병기
제33대
이병호
<nopad> 문재인 정부 <nopad> 윤석열 정부
제34대
서훈
제35대
박지원
제36대
김규현
제37대
조태용
}}}}}}}}}}}}}}}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7px -10px"
{{{#!wiki style="margin:-6px 0px; display:inline-table"
<tablebordercolor=#8b623e><tablebgcolor=#8b623e> }}} {{{#!wiki style="margin: -5px -2px; display: inline-table;" <tablebordercolor=#8b623e><tablebgcolor=#8b623e>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파일:Lieutenant General_white.png
특무부대장
초대 2대 3대 4대 5대
김형일 백인엽 이한림 김종면 김창룡
6대 7대 8대 9대
정인택 김재현 하갑청 이소동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육군방첩부대장
10대 11대 12대
박창록 이철희 김재춘
13대 14대 15대
정승화 박영석 윤필용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육군보안사령관
16대 17대 18대 19대
김재규 강창성 김종환 진종채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국군보안사령관
19대 20대 21대 22대 23대
진종채 전두환 노태우 박준병 안필준
24대 25대 26대 27대
이종구 고명승 최평욱 조남풍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국군기무사령관
28대 29대 30대 31대 32대
구창회 서완수 김도윤 임재문 이남신
33대 34대 35대 36대 37대
김필수 문두식 송영근 김영환 허평환
38대 39대 40대 41대 42대
김종태 배득식 장경욱 이재수 조현천
43대 44대 군사안보지원사령관 국군방첩사령관
이석구 남영신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무임소장관 (1948~1975)
<nopad> 이승만 정부
초대
지청천
이윤영
제2대
윤영선
이윤영
제3대
이윤영
허정
<nopad> 이승만 정부
제4대
이윤영
제5대
박현숙
제6대
손도심
임영신
<nopad> 장면 내각
제7대
김선태
제8대
김선태
신현돈
제9대
오위영
<nopad> 박정희 정부
제10대
조시형 (정무)
김재춘 (경제)
박원빈 (경제)
제11대
김홍식 (정무)
김용식 (경제)
제12대
윤주영 (정무)
원용석 (경제)
<nopad> 박정희 정부
제13대
윤주영 (정무)
원용석 (경제)
제14대
김윤기 (정무)
원용석 (경제)
제15대
김원태 (정무)
황종률 (경제)
<nopad> 박정희 정부
제16대
김원태 (정무)
김윤기 (경제)
제17대
길재호 (정무)
이병옥 (경제)
제18대
오치성 (정무)
이병옥 (경제)
<nopad> 박정희 정부 <nopad> 1975년 제1무임소장관 제2무임소장관으로 분리 개편
제19대
이병희 (정무)
이병옥 (경제)
제20대
이병희 (정무)
구태회 (경제)
}}}}}}}}}
대한민국 제3대 중앙정보부장
김재춘
金在春|Kim Jae-choon
파일:김재춘중정부장.jpg
<colbgcolor=#06377a><colcolor=#FFFFFF> 출생 1927년 6월 4일
경기도 김포군 (現 경기도 김포시)
사망 2014년 1월 2일 (향년 86세)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 묘역-269호
본관 의성 김씨
인산(仁山)
재임기간 제12대 육군방첩부대장
1961년 6월 10일 ~ 1962년 7월 12일
제3대 중앙정보부장
1963년 2월 21일 ~ 1963년 7월 11일
제10대 무임소장관
1963년 7월 23일 1963년 9월 3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6377a><colcolor=#ffffff> 배우자 김희방
자녀 슬하 5남 1녀
학력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육군기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건국대학교 정경대학 정경학부 (경제학 / 학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박사)
종교 불교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8, 9
경력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육군 방첩부대장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
제3대 중앙정보부장
제10대 무임소장관
자유민주당 최고위원
한국사회연구소 이사장
한국배합사료협회 회장
국민대학교 경제학과 초빙교수
한국산업기술개발연구소 소장
제8대 국회의원 (김포군·강화군)
한국삼업조합연합회 회장
제9대 국회의원 (고양군·김포군·강화군)
한국축산단체연합회 회장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전임교수
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
군사 경력
임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5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4년 ~ 1963년
최종 계급 소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육군 제6군관구사령부 참모장
참전 6.25 전쟁 }}}}}}}}}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에서5. 선거 이력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군인, 중앙정보부장, 정치인, 국회의원.

2. 생애

1927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입교('47년)해 이듬해인 48년 졸업 후 소위로 임관했다. 그가 생도였을 당시 박정희는 중대장 겸 교관으로서 김재춘과 인연을 맺었다. 6.25 때도 9사단에서 박정희의 부하로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김재춘은 6관구 참모장으로 당시 이승만 경무대로부터 시위 무력 진압 명령을 받는다. 고민에 빠진 그는 당시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이던 박정희에게 연락해 조언을 구했다.
김재춘 참모장: "사령관님, 실탄 지급해서 출동하라는 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박정희 사령관: "야! 그건 절대 안 돼! 실탄을 지급하는 순간 참변이야!"
직후 항명죄로 체포돼 형의 언도를 기다리는 동안 이승만 하야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그는 6관구 참모장에 복귀해 박정희와 술잔을 기울이며 더욱 관계를 돈독히 해나갔다.

1961년 제6군관구사령부(현 수도군단) 참모장으로서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다. 반란군은 제6군관구사령부를 지휘소로 정해두었는데 김재춘은 5.16 군사정변 당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고 쿠데타 지휘부를 체포하러 출동한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 이하 헌병대 병력을 설득하여 체포를 저지하고 반란군으로 끌어들이는 공로를 세웠다[1]. 그 덕분에 5.16은 무혈 쿠데타가 되었다.[2]

김재춘은 육군사관학교 5기생의 리더로서 김종필, 김형욱을 위시한 육사 8기생과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후 방첩부대장을 역임한 후 곧바로 1계급 진급하여 소장으로 예편한 김재춘은 1963년 제3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했다.

김재춘의 위세는 2인자 김종필도 몇 수는 접어야 할 정도였으며 심지어 박정희 의장마저 한 수 접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와 혁명 동지들이 혁명 공약을 지켜 군으로 돌아가는 것이 대의명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육해공 참모총장들과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등 장성들을 규합해 박정희에게 대통령 출마 포기를 협박해서 일시적으로나마 군정 연장을 포기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낸다. 너무나 정론이다 보니 박정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여러 조건을 붙인 상태에서 군 복귀 성명까지 발표해야 했다.

중앙정보부장에 오르자 중정을 만든 김종필과 그의 수족을 모두 자른다. 직후 박정희와 독대를 해 비선 조직 재건동지회를 몰래 만든 책임과 창당 비자금 마련을 위한 증권파동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김종필 외유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김종필도 군말없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청구동 자택에서 칩거한다.

김재춘은 중정부장을 맡은 와중에 박정희로부터 이상한 명을 받는다. 가칭 '범 국민당'을 조직하는 김재순 박준규를 도와 창당 작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선거 컨설턴트 이재만이란 사람에게 '군정을 종식시키고 대통령 출마를 하라'는 조언을 받은 상태였다. 이재만은 공화당은 그대로 두고 제 2의 여당을 만들어 재야 세력 중 중진들이나 새 인물들을 포섭해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 이용하라는 조언을 했다. 사실 김재춘은 박정희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중이었는데 박정희가 신당 발기 준비를 김재춘에게 맡겨 슬슬 중정부장을 내려놓게 하려는 면도 있었다.

범국민당 창당의 산파 역을 맡게 된 그는 그러나 당시 재야 세력들의 창당 붐으로 범국민당 인사 영입은 물론 창당 준비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원래의 공화당은 윤치영을 당의장으로 영입하는 등 안좋은 여론 속에서도 착착 나아가고 있었다. 박정희는 대통령 출마를 하면서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정계 구축을 완성했고 범국민당과 김재춘은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그즈음 심란한 김재춘에게 더욱 심란한 일이 벌어졌다. 소위 '7.6 친위 쿠데타 미수 사건('63)'이라 명명된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영남 출신 육사 11기들이 부패한 혁명위원들을 몰아내고 박정희 의장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시도였다. 김재춘은 그들을 달래고 모르는 척 봐줬는데 이는 16년 뒤 12.12 군사반란이라는 어마어마한 대형 산불로 재발하였다. 이 때 사건을 담당한 방첩대장이 정승화 준장(육사 5기)으로, 16년 후인 79년 육군참모총장 재직 중 12.12 군사반란으로 체포돼, 모진 고문 및 17계급 강등과 불명예 제대라는 인격 모독을 당해야 했다.[3]

김재춘은 끝내 중앙정보부장직을 내려놓고 범국민당을 공화당과 백지 합당시키라는 박정희의 명령에 거역한다. 끝내 자유민주당(1963)을 창당시켜 송요찬 전 내각수석[4]을 대통령 후보로 내려고 했다. 결국은 후임 중정부장인 김형욱에게 납치돼 이후락에게 외국으로 나가라는 굴욕적인 말을 듣고 자유민주당의 모든 당직을 내려놓고 브라질로 떠난다. 재밌는 건 이 때 정적 김종필과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만나 마치 절친처럼 회포를 나누기도 했다. 김종필 역시 브라질에 유배를 와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김재춘 때문에 거기 있는 것이었지만.

이후 김재춘은 권력의 핵심에서 사라진다.

1964년 6.3 항쟁에 연루돼 당국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중당 후보로 경기도 김포군- 강화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으나 결국 1972년 5월 집권 여당인 민주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유탁과 민주공화당 복수 공천을 받아 경기도 김포군-강화군- 고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오홍석 후보와 민주공화당 김유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자 정치 규제를 당하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의 군 보좌역으로 지지를 했는데 이 일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과천시의 농지를 정부과천청사 부지로 강제로 뺏기다시피 하는 굴욕을 당했다.

2014년 1월 2일 향년 86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

3. 여담

김종필, 김재춘, 김계원, 장세동 씨 등 역대 안기부장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전두환 씨(10대 중정부장 서리 역임)는 불참.
국회가 화제가 되고 얘기는 80년 광주 문제로 옮아갔다.
장세동(육사16기,13대 안기부장) 씨가 광주 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80년 5월의 광주 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러자 김재춘 씨(육사 5기,3대 중정부장)가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당신네들이 총칼 들고 정권 잡아가지고 저지른 짓을 무슨 홍경래 반란이라고?" 하며 내쏘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은 웃으며 일어서면서 "국회에서 특위 조사할 것도 없이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군" 하여 웃고 헤어졌다. (당시의 한 참석 인사)
동아일보 1992년 10월 10일자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글) 112회 - <전두환 '대권 각본' 밀어붙이다>

4. 대중매체에서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선여부 비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김포군- 강화군)

[[민중당(1967년)|]]
33,874 (45.01%) 당선(1위) 초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김포군-강화군- 고양군)

[[민주공화당|
파일:139.png
]]
48,532 (39.11%) 당선(1위) 재선[7]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김포군-강화군- 고양군)

[[무소속(정치)|
무소속
]]
23,797 (16.20%) 낙선(3위)

6. 둘러보기

파일:구 경기도 휘장(백색).png 경기도 제8대 국회의원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인천 동·중 인천 남 인천 북 수원 의정부·양주
유승원 김은하 김숙현 이병희 이윤학
이천·광주 포천·연천·가평 여주·양평 용인·안성 평택
차지철 오치성 천명기 서상린 최영희
화성 파주 고양 강화·김포 시흥
김형일 박명근 김유탁 김재춘 이택돈
부천·옹진
오학진
}}}
}}}}}}

파일:구 경기도 휘장(백색).png 경기도 제9대 국회의원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인천 수원·화성 의정부·양주·파주 여주·광주·이천
김은하
유승원
이병희
김형일
박명근
이진용
차지철
오세응
평택·안성·용인 부천·시흥·옹진 김포·고양·강화 연천·포천·가평·양평
유치송
서상린
이택돈
오학진
김재춘
김유탁
김용채
천명기
* 여주·광주·이천 차지철 사퇴 (1974.8.20.)
* 수원·화성 김형일 사망 (1978.6.3.)
}}}
}}}}}}

{{{#!wiki style="margin: -7px -10px -10px;"
{{{#!wiki style="margin: -6px 0px -1px; display: inline-table;"
<tablebordercolor=#835B38><tablebgcolor=#835B38> }}} {{{#!wiki style="margin: -5px -2px; display: inline-table;" <tablebordercolor=#835B38><tablebgcolor=#835B38>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장덕진 김임식 양찬우 류승원 김숙현
이병희 이윤학 차지철 오치성 서상린
최영희 박명근 김유탁 김재춘 오학진
김용호 최돈웅 이교선 장승태 김재순
한병기 이우현 김진만 민기식 육인수
김원태 정구중 이정석 이해원 김용태
김제원 이병주 김종익 이상익 최종성
장영순 박승규 김세배 김종철 박성호
유기정 전휴상 길병전 이정우 이병옥
장경순 김상영 김중태 고재필 문형태
박준호 길전식 윤재명 정간용 임충식
정판국 오중열 박종진 윤인식 손재형
강재구 김병윤 정무식 백남억 박준규
김봉환 김상년 문태준 오준석 정진화
박숙현 김인 고우진 김창근 권성기
구태회 최재구 이학만 최세경 엄기표
정우식 김영병 신동관 민병권 홍병철
현오봉 김종필 정일권 백두진 김형욱
권오병 이동원 이종우 유봉영 홍승만
모윤숙 최용수 이해랑 강병규 강성원
문창탁 권일 김성두 신광순 박태원
박철 전정구 장덕진 이도선 김현숙
편정희 김옥자 노진환 }}}
}}}}}}

{{{#!wiki style="margin: -7px -10px -10px;"
{{{#!wiki style="margin: -6px 0px -1px; display: inline-table;"
<tablebordercolor=#808080><tablebgcolor=#808080> }}} {{{#!wiki style="margin: -5px -2px; display: inline-table;" <tablebordercolor=#808080><tablebgcolor=#808080>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오제도 강상욱 이진용 오세응 김재춘
홍창섭 김명윤 박찬 손주항 김택하
박삼철 강길만 박귀수 한병채 권오태
이영표 김윤하 박주현 김원규 홍병철
양정규 }}}
}}}}}}



[1] 그냥 공로도 아니고 쿠데타는 보통 사상자가 최소 수십에서 수백은 무조건 발생하는데 양측 피해자가 아예 전무한건 전적으로 김재춘이 말빨로 체포 진압 병력들을 설득했던게 매우 컸다. [2] 물론 미군의 개입을 막았던 윤보선 대통령이나 곳곳에서 다시 한 번의 동족 상잔은 피하자는 여러 사람들의 덕이 더 컸다. [3] 육사 개교 후 최초의 정규 4년제 교육을 받은 육사 11기는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육사 1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육사 선배들을 무시했던 반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하는 친위 그룹으로서 자리매김했다. 박 대통령이 금일봉도 많이 내렸다고. 육사 11기가 군내 최대 사조직이 되고 실전 경험을 갖춘 갑종간부후보생 출신 간부들도 하나둘 군을 떠나면서 12.12 군사반란의 토대는 착착 놓여지고 있었다. [4] 당시 송요찬은 김형욱 중정부장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구속된 상태였다. 송요찬은 소위 4대 의혹 사건 때 재무부 장관 천병규와 싸우고 사표를 던진 이후 박정희 욕을 계속 해왔었다. [5] 이후 제6군관구사령관 서종철과 헌병감 조흥만이 들이닥치자 김재춘은 안전 장치가 풀린 권총을 들이대며 위협했고 투스타와 원스타였던 둘이 기세에 눌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한다. [6] 김용태가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함께 닭을 먹으며 이 얘기를 꺼냈더니 박정희가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닭도 김재춘이 보낸거다"라고 하여 서로 웃었다고 한다. [7] 민주공화당 김유탁 후보와 동반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