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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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3년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사망 | 1821년 12월 24일(향년 48세) | |||
오스만 제국 볼루 | ||||
재위기간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806년 8월 24일 ~ 10월 26일 | |||
2차 | 1807년 8월 4일 ~ 1810년 6월 13일 | |||
3차 | 1812년 9월 17일 ~ 1819년 6월 |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821년 2월 ~ 6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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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알렉산드루 칼리마치 어머니: 엘레니 기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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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랄루, 에프로시네, 이오안니스 | |||
자녀 | 알렉산드루 칼리마치스 | |||
가문 | 칼리마치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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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89대 보이보드, 왈라키아 공국 제91대 보이보드.2. 생애
1773년경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몰다비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칼리마치와 스카를라트 기카의 딸인 엘레니 기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랄루[1], 에프로시네[2], 이오안니스[3]가 있었다. 그는 1801년부터 1806년까지 오스만제국 궁정의 대 드라고만을 역임했으며, 1806년 8월 24일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가 되었다. 하지만 그해 10월 26일 오스만 제국이 그를 알렉산드루 모루지로 대체했다.1807년 8월 4일 알렉산드루 한제를리를 대신하여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지만, 1810년 6월 13일 제9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에 러시아군에 생포된 뒤 하르키우로 이송되었다. 1812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간의 전쟁이 종식된 뒤 풀려났고, 그 해 9월 17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그는 정권을 재편하고 질서를 회복하며,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의 처지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보야르들에게 세금을 면제하고 일반 백성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감면했다. 또한 1813~1814년에 왈라키아에서 유행한 페스트가 몰다비아로 확산하는 걸 막기 위해 방역 조치를 취했으며, 도로 공사와 포장도로 공사를 실시했다. 또한 몰다비아 내 그리스어 교육을 지원했다.
1819년 6월 러시아 제국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되어 폐위된 뒤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가 심문받았지만, 광기에 걸린 모습을 연출해 사형을 모면했다. 1821년 2월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지만,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봉기로 인해 실제로 통치하지 못했다. 그해 6월 왈라키아 반란을 진압한 오스만 제국군은 군정을 실시하기로 하고 그를 물러나게 했다. 이후 그리스 독립 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자, 오스만 당국은 그가 그리스 독립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고 볼루로 이송했고, 1821년 12월 24일에 독살했다.
아들 알렉산드루 칼리마치스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 러시아로 피신한 뒤 유럽을 여행하다가 1829년 오스만 당국과 화해하고 코스탄티니예로 돌아간 뒤 외교관으로 발탁되었고, 파리 주재 오스만 제국 대사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