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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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30년 | |||
사망 | 1803년 (향년 73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783년 7월 17일 ~ 1786년 4월 6일 | |||
2차 | 1791년 3월 ~ 1793년 1월 10일 | |||
3차 | 1801년 10월 9일 ~ 1802년 5월 22일 |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793년 1월 10일 ~ 1795년 5월 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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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콘스탄틴 드라코스 수추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오라 로세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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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세바스티타 칼리마치 | |||
자녀 | 알렉산드로스, 마리오라, 그리고리오스 | |||
가문 | 수추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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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83대 보이보드, 몰다비아 공국 제85대 보이보드.2. 생애
1730년경 콘스탄틴 드라코스 수추와 마리아 마리아오라 로세티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가 속한 수추 가문은 17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등장했는데, 이 이름을 가진 용기병대장 한 사람이 코스탄티니예의 물 공급 개선에 기여한 뒤, 튀르크인들이 그에게 배관공을 의미하는 ΄΄수치스(Soutzis)΄΄라는 성을 부여했고, 이것이 그리스어로 "수초스(Soutsos)"로 변형되었으며, 다시 루마니아식의 수추(Suțu)로 변형되었다. 미하이는 1782년부터 1783년까지 오스만 궁정의 대 드라고만(Dragoman: 유럽 등 타국 사절단의 통역자, 번역가, 공식 가이드를 맡은 궁정 직위)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도중에 불경죄로 테네도스 섬으로 추방되었다가 사면되었다.1783년 7월 17일 니콜라에 카라제아를 대신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학교와 병원 설립을 주도하는 등 왈라키아를 나름대로 잘 다스렸다. 그러나 제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임박하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1786년 4월 6일 오스만 함대 사령관 가지 하산 파샤의 추천에 따라 군사적 역량을 갖췄다는 평을 받은 니콜라에 마브로게니를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이후 수년간 야인 생활을 하다가, 1791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종식된 뒤 니콜라에 마브로게니가 반역죄로 처형된 후, 그 해 3월에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1793년 1월 10일 몰다비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모루지와 교체되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부임한 뒤 1795년 5월 6일까지 다스리다가 알렉산드루 칼리마치로 대체되었다. 1801년 10월 9일 알렉산드루 모루지가 반항적인 비딘 보야르인 오스만 파즈반토글루와의 무력 충돌에서 번번이 피해를 입자 퇴임한 뒤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3번째로 부임했다. 하지만 미하이 역시 이 반항적인 보야르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고, 1802년 5월 15일에 반란군이 부쿠레슈티에 접근하는 걸 허용했다. 부쿠레슈티의 대다수 주민은 도시를 떠나 브라쇼브로 이주했다.
1802년 5월 18일, 부루레슈티 수비대의 튀르크와 알바니아 용병들이 급료 지불을 요구하자, 미하이는 디틀 후에 지불하겠다고 약속한 후 농민으로 변장하고 도시 외곽에 있는 기카 가문의 영지인 콜렌티나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던 보야르들이 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다비아로 피신한 걸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그는 한동안 보야르들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다가 트란실바니아로 망명했다. 이리하여 보수를 받지 못한 용병대는 분노해 부쿠레슈티 궁전을 약탈하고 도시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했지만, 오스만군이 현장에 도착해 이를 막았다. 오스만 당국은 그가 트란실바니아로 피신했다는 걸 알게 되자 분노해 보이보드 직위에서 폐위하고 콘스탄틴 입실란티를 새 보이보드로 세웠다. 그 후 미하이는 오스트리아에 머물다가 1803년경 코스탄티니예에 돌아온 뒤 가난에 시달리다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미하이는 생전에 몰다비아 보이보드 이오안 테오도르 칼리마치의 딸 세바스티타 칼리마치와 결혼해 알렉산드로스, 마리오라, 그리고리오스를 낳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대 드라고멘을 맡았지만 1807년 오스만 당국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마리오라는 1812년부터 1817년까지 대 드라고멘을 맡았으며 페르시아에 관한 역사서를 집필한 학자 이아코보스 아르기로풀로스의 아내가 되었으며, 그리고리오스는 1819년부터 1821년까지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역임한 미하이 수추 2세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