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715년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사망 | 1794년 3월 8일 (향년 79세) | |||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 부왕령 헤르손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770년 6월 ~ 1771년 10월 |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788년 5월 11일 ~ 10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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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유프로시나 루세트 어머니: 지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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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루세트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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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80대 보이보드, 몰다비아 공국 제83대 보이보드.2. 생애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유프로시나 루세트와 지아니의 아들로 출생했다. 1755년 키시너우의 세르다르(Serdars: 기병대 사령관), 1755년 대 세르다르, 1757년 스카를라트 기카의 스파타르(Spătar, 왕실 궁정 청지기), 1760년 대 포스텔닉, 1765년 오르헤이의 세르다르, 1769년 부쿠레슈티의 세르다르를 역임했다. 1770년 제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도중에 올테니아의 튀르크 영주에게 고용되어 크라이오바를 관리했다. 1770년 6월 러시아군이 부쿠레슈티에서 철수한 뒤, 그는 질서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부자우 주교의 소환을 받아 부쿠레슈티를 탈환하고 오스만군이 부쿠레슈티를 약탈하는 걸 막았다.이후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를 칭했지만 러시아군이 1770년 11월 24일 콜렌티나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하자, 그는 올테니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안가 러시아군에게 축출되어 트란실바니아로 피신했다. 이후 비딘으로 가서 바바다그에서 오스만군과 합세했다. 이후 왈라키아로 복귀하려 했지만 러시아군에게 2차례 저지되었다. 하지만 1771년 5월 다뉴브 강을 성공적으로 도하했고, 6월까지 크라이오바와 올테니아를 탈환했다. 이후 크라이오바에서 통치를 행사했지만, 1771년 10월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왈라키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이후 바나트에 거주하던 그는 1772년 3월 그곳을 떠나 니코폴리스로 가서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간의 전쟁이 1774년에 종결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전쟁이 끝난 뒤 자기가 없는 동안 보이보드가 된 알렉산드루 입실란티를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1776년 발각되어 낙소스로 추방되어 1781년까지 그곳에 살았다. 1788년 5월 18일 오스만 제국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된 뒤 합스부르크 제국이 점령하고 있는 몰다비아를 탈환하기 위해 왈라키아 보이보드 니콜라에 마브로게니와 오스만군, 크림 칸국과 손잡았다. 1788년 여름 오스만 제국군이 몰다비아로 진격했을 때 참여해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1788년 10월 튀르크인들이 그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소규모 병력과 함께 러시아군에 귀순했다. 이후 헤르손으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약간의 연금을 받으며 지내다 1794년 3월 8일에 사망했고, 헤르손 대성당 인근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