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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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28년 | |||
사망 | 1675년 (향년 46~47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660년 9월 1일 ~ 1664년 11월 | |||
2차 | 1672년 2월 ~ 1673년 11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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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게오르게 기카 어머니: 스마라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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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마리아 스투르자 | |||
자녀 | 마테이, 룩산드라, 크리스티나 | |||
가문 | 기카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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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62대 보이보드.2. 생애
게오르게 기카와 스마라그다의 외아들이다. 1600년 9월 1일, 아버지가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폐위된 뒤 직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전임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 치세 때 포스텔닉을 맡는 등 왈라키아에서 강력한 보야르로 군림하던 콘스탄틴 칸타쿠지노의 지원에 힘입어 거듭된 내전으로 극심한 혼란과 기근에 시달리던 왈라키아를 어느정도 안정시켰다. 또한 1662년 오스만 제국의 지시에 따라 봉신으로서 트란실바니아 공 케메니 야노시에 대한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합스부르크 제국과 비밀 우호 조약을 맺었다.그러나 스트로에 레우르데아누와 두미트라슈쿠 칸타쿠지노가 콘스탄틴 칸타쿠지노가 보이보드 직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발하자, 그리고레는 이를 믿고 1663년 12월 그를 스나고프에서 목졸라 죽이게 했다. 이에 콘스탄틴 칸타쿠지노의 가족 및 추종자들이 분노해 봉기를 일으키면서 왈라키아가 혼란에 빠지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1664년 11월에 그를 폐위하고 라두 12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세웠다. 이후 몰다비아 공국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피신한 뒤, 얼마 후 합스부르크 제국에 망명하여 오스트리아에서 7년간 지냈다.
그는 왈라키아 보이보드 직위를 되찾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교황, 베네치아 공화국에 찾아가 자신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오스만 제국 궁정 내 관료인 파나이오타케 니쿠시스에게 뇌물을 바친 끝에 오스만 제국의 용서를 얻어 1672년 2월 안토니에 딘 포페슈티를 밀어내고 두 번째로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 후 칸타쿠지노 가문 인사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둬서 고문하는 등 박해를 가했고, 칸타쿠지노 인사들은 코스탄티니예로 달아난 뒤 그가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 계획을 품고 있다고 고발했다.
1673년, 그리고레 1세는 왈라키아군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의 편에 서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상대했다. 하지만 그는 호틴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완승을 거두자 폴란드-리투아니아군 사령관 얀 3세 소비에스키와 손잡아 오스만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얼마 후,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국왕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1673년 11월 10일에 르부프 궁전에서 위장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귀족들은 새로운 왕을 선출하기 위해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했다.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지원을 얻을 수 없게 된 그리고레 1세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폐위되었고, 게오르게 두카가 그 대신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 후 그리고레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되었고, 1675년경에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보야르 마테이 스투르자의 딸 마리아와 결혼해 마테이, 룩산드, 크리스티나를 낳았다. 이중 장남 마테이의 아들이자 그의 손자인 그리고레 2세 기카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공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