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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6:25:04

세케이 모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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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5대 공
세케이 모제시
Székely Mózes
파일:세케이 모제시.jpg
이름 세케이 모제시
(Székely Mózes)
출생 1553년
트란실바니아 공국 세켈류드바르헬리
사망 1603년 7월 17일 (향년 49~50세)
트란실바니아 공국 브라쇼브
재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1603년 4월 15일 ~ 7월 17일
아버지 세케이 야노시
배우자 코르니스 안나
자녀 세케이 이슈트반, 세케이 모제시
종교 유니테리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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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 제5대 .

2. 생애

1553년경 트란실바니아 공국 세켈류드바르헬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세케이 야노시는 우드바르헬리셰크 지역의 서기로 활동하다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치세에 세케이인 대리 통치자로 군림했다. 세케이 모제시는 일찍이 소팔브 소금 광산의 시종, 우드바르헬리셰크의 최고 대장, 최고 왕실 판사를 잇따라 역임했다. 바토리 이슈트반이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임된 뒤, 그는 바토리 이슈트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575년 가스파르 베케시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지원을 받고 트란실바니아 내 친 합스부르크 파벌을 결성해 반기를 일으키자, 그는 이를 토벌하려는 바토리 이슈트반의 군대에 가담했다.

1575년 7월 9일, 양자는 케렐뢰센트팔 전투를 벌였다. 이때 세메이 모제시는 입에 칼을 물고 마로스 강을 헤엄쳐 건너간 뒤 적의 후방을 급습했고, 이에 전의를 상실한 가스파르 베케시의 추종자들이 도주했다. 바토리 이슈트반은 그의 공적을 인정해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호위대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또한 그는 바토리 이슈트반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등극할 때 폴란드로 가서 대관식에 참석했고, 이슈트반이 리보니아 원정에 착수했을 때 트란실바니아군을 이끌고 가담했다. 이슈트반은 그의 공적을 기려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1576년부터 1582년까지 세케이 여단 사령관을 맞아 모스크바 대공국과 맞서 싸웠고, 1582년 이반 4세와 바토리 이슈트반이 평화 협약을 맺은 뒤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갔다. 바토리 이슈트반 사후 트란실바니아 공이 된 바토리 지그몬드의 치세에도 세케이푈드(Székelyföld)[1]의 대리 통치자로 인정받았으며, 상당한 영지를 사들였다. 1599년 바토리 지그몬드가 퇴위한 뒤 바토리 언드라시의 군 사령관이 되었다가, 바토리 언드라시가 패사한 뒤 미하이 2세의 트란실바니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1600년 9월 18일 미라슬라우 전투에서 미하이 2세가 조르조 바스타가 이끄는 황제군에게 참패하자 조르조 바스타에게 귀순했지만, 황제군이 트란실바니아 각지를 철저하게 약탈하자 깊은 반감을 품고 폴란드로 망명했던 바토리 지그몬드의 복위를 꾀했다. 1601년 3월, 폴란드군이 바토리 지그몬드를 앞세워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했을 때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황제군을 몰아내고 바토리 지그몬드의 복위를 이뤄냈다. 그러나 1601년 8월 3일 구루스라우 전투에서 조르조 바스타와 미하이 2세가 이끄는 황제군이 바토리 지그몬드를 격파하고 트란실바니아를 장악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황제군을 몰아내고 바토리 지그몬드를 복위할 계획을 세웠다.

1601년 10월, 몰다비아 공국으로 망명했던 바토리 지그몬드가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고 트란실바니아로 돌아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대다수 지역을 공략했다. 하지만 조르조 바스타는 전력을 재정비한 뒤 반격을 가해 여러 전투에서 바토리 지그몬드를 물리쳤다. 이에 지지자들이 조만간 자기를 배신할 거라고 의심한 지그몬드는 1602년 3월에 조르조 바스타와 퇴위에 대한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다. 1602년 7월 26일 퇴위가 확정된 뒤 조르조 바스타의 군대에 합세했고, 이후 프라하로 가서 루돌프 2세에게 자비를 구해 보헤미아에서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받아냈다.

이리하여 바토리 지그몬드가 퇴위한 뒤, 조르조 바스타는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서 개신교 세력을 트란실바니아에서 근절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칼뱅파 헝가리인과 세케이인, 정교회 왈라키아인과 세르비아인, 루터교 색슨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고, 이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했다. 이에 분노한 세케이인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황제군을 이끌고 퇴비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세케이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여기에 트란실바니아 각지에서 기근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아사했다.

유니테리언 신자였던 세케이 모제시는 조르조 바스타의 행보에 위협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그를 어떻게든 타도하기로 마음먹었다. 1602~1603년 겨울, 그는 베틀렌 가보르와 함께 반(反) 합스부르크 연맹을 조직한 뒤 티미쇼아라에서 거점을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3세의 지원을 받으며 조르조 바스타에 대적했다. 세케이 모제시는 1603년 4월 15일 하체그 인근의 숙영지에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추대되었고, 5월 9일 트란실바니아의 중심지인 줄러페헤르바르에 입성한 뒤 대관식을 거행했다. 조르조 바스타는 적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오스트리아로 퇴각했다.

1603년 여름,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라두 10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사주를 받아들여 트란실바니아로 진격했다. 게오르게 라슈와 바실라 마르자가 지휘하는 왈라키아군 선봉대는 텔레아제눌루이 계곡을 건너 브라쇼프 인근 펠디오아라에 숙영지를 세웠고, 라두 10세는 본대를 이끌고 루카르-브랜 고개를 통해 카르파티아산맥을 등반해 선봉대와 교차점을 이루었다. 세케이 모제시는 이에 대응해 헝가리인 4,000명, 타타르인 2,000명, 경대포 25문을 이끌고 브라쇼브 인근에 도착했다. 모제시는 왈라키아군과 정면 대결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라쇼노프 인근에서 요새를 세운 뒤 방어 전술로 적에 맞서기로 했다. 7월 17일에 벌어진 라쇼노프 전투에서, 왈라키아군은 맹공격을 퍼부은 끝에 방어선을 뚫고 적군을 패주시켰고, 라두 10세는 친히 기병대를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때 세케이 모제시는 탈출을 시도하다 추격대에 따라잡혀 전사했다.

그 후 라두 10세는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 국경지대의 여러 요새를 자기 수중으로 삼은 뒤 왈라키아로 철수했다. 세케이 모제시의 수급은 브라쇼브 시장 광장에 전시되었다가, 브라쇼브 판사인 바이스 미하이에게 수습되어 바이스의 집 정원에 묻혔다. 훗날 유로파 호텔이 이 자리에 지어졌고, 안뜰에 그의 무덤을 나타내는 명판이 세워졌다.
[1] 헝가리인의 친척뻘인 세케이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헝가리 왕국 시절부터 존재하여 현재 루마니아에도 남아있다. 현재 루마니아의 하르기타 주, 코바스나 주, 무레슈 주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