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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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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fff><rowbgcolor=#fff> 파일:freddiemercurydarksillouette.png ||<color=#000>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
]]

[ 정규 앨범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tablecolor=#000,#fff><width=50%> ||<width=50%> ||

1985

1988
[ 컴필레이션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tablecolor=#000,#fff><width=20%> ||<width=20%> ||<width=20%> ||<width=20%> ||<width=20%> ||

1992

2000

2006

2016

2019
[ 관련 문서 ]
||<tablebgcolor=#fff,#191919><width=1000> 생애 ||<width=25%> 솔로 활동 ||<width=25%> ||<width=25%> 추모 콘서트 ||
프레디 머큐리 관련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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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folding [ Studio Albums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ablewidth=100%>

1973

1974

1974

1975

1976

1977

1978

1980

1980

1982

1984

1986

1989

1991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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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ve Albums ]
||<tablebgcolor=white,#191919><tablewidth=100%><width=20%><rowbgcolor=#ffffff,#191919><tablecolor=#000,#fff> ||<width=20%> ||<width=20%> ||<width=20%> ||<width=20%> ||
Live Killers
1979
Live Magic
1986
At the Beeb
1995
Live at Wembley '86
1992
Queen on Fire – Live at the Bowl
2004
Queen Rock Montreal
2007
Hungarian Rhapsody: Queen Live in Budapest
2012
Live at the Rainbow '74
2014
A Night at the Odeon
2015
[ Compilations ]
||<tablebgcolor=white,#191919><table color=#373a3c,#ddd><tablewidth=100%><width=20%><rowbgcolor=#ffffff,#191919> ||<width=20%> ||<width=20%> ||<width=20%> ||<width=20%> ||
Greatest Hits
1981
Greatest Hits II
1991
Classic Queen (미국 한정)
1992
The 12" Collection
1992
Queen Rocks
1997
Greatest Hits III
1999
Stone Cold Classics
2006
The A-Z of Queen, Volume 1
2007
Absolute Greatest
2009
Deep Cuts, Volume 1 (1973-1976)
2011
Deep Cuts, Volume 2 (1977-1982)
2011
Deep Cuts, Volume 3 (1984-1995)
2011
Icon (미국/캐나다 한정)
2013
Queen Forever
2014
Greatest Hits in Japan (일본 한정)
2020
[ Box Se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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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mplete Works
1985
Queen CD Single Box
1991
The Crown Jewels
1998
The Platinum Collection
2000
The Singles Collection Volume 1
2008
The Singles Collection Volume 2
2009
The Singles Collection Volume 3
2010
The Singles Collection Volume 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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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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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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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songwriters-hall-of-fame-logo_770_441_90_s.jpg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름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입성 연도 2003년 출처 참조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0 Voices of the Century
※ 2001년 영국 BBC 방송이 약 44,756명의 대중들과, 현직 가수들, 음악 전문가를 상대로 조사한 투표를 바탕으로 '20세기의 목소리'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냇 킹 콜 엘라 피츠제럴드 빙 크로스비
6위 7위 8위 9위 10위
존 레논 아레사 프랭클린 빌리 홀리데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프레디 머큐리
출처 }}}}}}}}}

{{{#!wiki style="margin:0 -10px"
{{{#000,#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5px"
※ 2015년 빌보드 직원들이 차트 성적이나 판매량 기준이 아닌 영향력, 음악적 유산 등을 고려하여 Top 25를 선정했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브루스 스프링스틴 프레디 머큐리 지미 헨드릭스 엘비스 프레슬리 재니스 조플린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폴 매카트니 믹 재거 척 베리 데이비드 보위 패티 스미스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커트 코베인 스티비 닉스 짐 모리슨 조니 미첼 로버트 플랜트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오지 오스본 액슬 로즈 밥 딜런 보노 데비 해리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로라 제인 그레이스 조 스트러머 캐슬린 한나 스티븐 타일러 존 본 조비
같이 보기: 가장 위대한 알앤비 가수 · 가장 위대한 래퍼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파일:NME 로고.svg 선정 가장 위대한 가수(보컬리스트)
{{{#!wiki style="margin: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6px"
※ 2011년 영국의 대중음악 전문지 NME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가장 위대한 가수 Top 20' 투표를 진행. 1,000만 표 이상이 모여 순위를 정했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마이클 잭슨 프레디 머큐리 엘비스 프레슬리 액슬 로즈 존 레논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데이비드 보위 로버트 플랜트 폴 매카트니 스티비 원더 아레사 프랭클린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매튜 벨라미 레이 찰스 짐 모리슨 밥 말리 엘튼 존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커트 코베인 스티븐 타일러 믹 재거 마빈 게이 티나 터너
출처 }}}}}}}}}

파일:cos 로고.jpg 파일:cos_로고_다크.png 선정 가장 위대한 가수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2016년 영화/음악/TV를 주제로 다루는 컨시퀀스 잡지 스태프들이 '가장 위대한 가수 Top 100'을 선정했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마이클 잭슨 빌리 홀리데이 프레디 머큐리 아레사 프랭클린 제임스 브라운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휘트니 휴스턴 로이 오비슨 에이미 와인하우스 로버트 플랜트 비요크
11위부터는 문서 참조.
같이보기: 사운드트랙, 힙합, 이모, 인더스트리얼 }}}}}}}}}

파일:롤링 스톤 로고.svg 선정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 (2008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000,#ddd ※ 롤링 스톤이 2008년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아레사 프랭클린 레이 찰스 엘비스 프레슬리 샘 쿡 존 레논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빈 게이 밥 딜런 오티스 레딩 스티비 원더 제임스 브라운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11 - 50위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폴 매카트니 리틀 리처드 로이 오비슨 알 그린 로버트 플랜트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믹 재거 티나 터너 프레디 머큐리 밥 말리 스모키 로빈슨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조니 캐시 에타 제임스 데이비드 보위 밴 모리슨 마이클 잭슨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재키 윌슨 행크 윌리엄스 재니스 조플린 니나 시몬 프린스
<rowcolor=#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하울링 울프 보노 스티브 윈우드 휘트니 휴스턴 더스티 스프링필드
<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브루스 스프링스틴 닐 영 엘튼 존 제프 버클리 커티스 메이필드
<rowcolor=#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척 베리 조니 미첼 조지 존스 보비 밴드 커트 코베인
<rowcolor=#fff>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패스티 클라인 짐 모리슨 버디 홀리 도니 해서웨이 보니 레이트
51위부터는 문서 참조.
}}}}}}}}} ||
같이 보기: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1/ 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롤링 스톤이 2011년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록 리드 싱어 10인"을 선정한 것이다.
록 음악이 아닌 재즈, 소울 등 다른 분야의 가수들은 투표에서 제외되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로버트 플랜트 프레디 머큐리 보노 믹 재거 짐 모리슨
6위 7위 8위 9위 10위
로저 달트리 에디 베더 존 레논 크리스 코넬 커트 코베인
같이 보기: 롤링 스톤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투표 사이트 The top tens가 투표를 통해 선정한 가장 섹시한 남성 록 가수 순위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커트 코베인 액슬 로즈 크리스 코넬 자레드 레토 브루스 디킨슨
6위 7위 8위 9위 10위
존 본 조비 짐 모리슨 프레디 머큐리 M. 섀도우스 빌 발로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엘비스 프레슬리 빌리 조 암스트롱 코리 테일러 제리 캔트렐 데이비드 리 로스
16위 부터는 출처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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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파일:230426101346-freddie-mercury-file-1986-restricted.jpg
<colcolor=#000,#fff> 본명 파로크 불사라[1]
Farrokh Bulsara
출생 1946년 9월 5일
잔지바르 술탄국 스톤타운
(現 탄자니아 잔지바르 스톤타운)
사망 1991년 11월 24일 (향년 45세)[2]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국적
[[인도|]][[틀:국기|]][[틀:국기|]] →
[[영국|]][[틀:국기|]][[틀:국기|]][3]
직업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소속 (1970 - 1991)
서명 파일:프레디 머큐리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부모님 아버지 : 보미 불사라 (1908년 12월 14일 - 2003년 12월 26일)
어머니 : 제르 불사라 (1922년 10월 16일 - 2016년 11월 13일)[4]
형제자매 여동생 : 카쉬미라 쿡 (1953년 - )
파트너 메리 오스틴 (1970 - 1976)
바바라 발렌틴 (1984 - 1985)[5]
짐 허튼 (1985 - 1991)[6]
학력 세인트 피터스 스쿨 (졸업)
아이즐워스 공예 대학교 (졸업)
일링 미술 대학교 (졸업)[7]
종교 조로아스터교[8]
신체 177cm[9], 50kg대 중반~70kg대 중반[10]
활동 기간 1969년 - 1991년
장르
악기 보컬, 피아노
레이블 팔로폰, 할리웃, EMI, 폴리도르, 콜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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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

1. 개요2. 생애3. 뮤지션으로서의 재능
3.1. 보컬리스트로서3.2. 프론트맨으로서3.3. 작곡가로서3.4. 연주자로서
4. 여담

[clearfix]

1. 개요

나는 록 스타가 아닌, 전설이 될 것이다.
I won't be a rock star. I will be a legend.

― 1984년, 데이비드 위그와의 인터뷰 中

영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의 리드 보컬이다.

대중적으로도 매우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보컬리스트이기에, 롤링 스톤이 선정한 “최고의 보컬리스트 100인”에서 18위에 들었고,[11] 동일 잡지에서 독자들의 투표로 선정한 “최고의 록 가수”에서 2위를 차지했다.[12]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프레디 머큐리/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뮤지션으로서의 재능

프레디 머큐리가 생전 소속되어 있던 퀸은 리스너와 평론가의 평가가 갈리는 밴드이지만, 프레디 머큐리의 재능만큼은 평론가든 청자든 모두가 인정하며, 보컬부터 키보드 연주와 작곡까지 모든 부분을 소화한 불세출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3.1. 보컬리스트로서

1981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의 Bohemian Rhapsody 라이브
폭발적인 가창력의 소유자이자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다. 물론 록 보컬계에서는 여러 밴드들의 보컬리스트들이 높은 평가를 받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프레디 머큐리는 로버트 플랜트, 로니 제임스 디오 등과 더불어 가창력 부문에서 본좌급에 위치해 있는 아티스트이다. 특히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록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폭넓은 소화 능력을 보유한 보컬이라는 사실이다. 당연히 기라성 같은 재능의 소유자들이 즐비한 록 음악사에는 '프레디보다 훨씬 큰 성량과 넓은 음역대를 가진 보컬'도 있고 특정 스타일의 노래에서는 프레디를 능가하는 소화력을 지닌 '전문성이 프레디보다 투철한 보컬'도 있었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처럼 록 음악 외의 다양한 음악 장르[13]의 감성을 록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소화해낸 보컬은 그 외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퀸의 음악이 당대의 전문가들에게 '슈퍼마켓 음악'이라고 폄하당한 것도 역설적으로 이런 다양함에 있었는데, 이토록 폭넓은 퀸의 음악 세계를 이음매나 빈틈 없이 완전무결한 형태로 표현해낸 프레디 머큐리의 다채로운 보컬은 그야말로 불세출의 경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4] 애초에 쿵쿵따 드럼 소리뿐인 We Will Rock You나 기타 사운드 거의 없이 베이스 리프로 진행되는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같은 곡을 빈틈없이 완벽한 노래로 만들었던 건 프레디의 보컬과 라임, 리듬 감각 없이는 불가능했다.[15]

대중들에게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테너 성종의 보컬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테너가 아닌 바리톤 성종일 가능성이 높다. #[16] 실제로 같이 작업한 적이 있던 몽셰라 카바예는 이를 간파하고 프레디 머큐리에게 "당신의 성부는 바리톤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 굳이 고음을 부르지는 말아요. 고음역대는 소프라노인 내가 할게요."라고 했고, 이에 프레디는 "하지만 테너가 아닌 바리톤 성부로 부르면 사람들이 저인지 모를 것 같다."며 걱정했다고 한다. 또한 대표적인 테너 보컬 중 한명인 로버트 플랜트가 전성기 시절 컨디션이 좋지 않은 공연에서도 3옥타브 초중반의 고음을 쉽게 뽑아냈던 것과 달리[17] 프레디 머큐리는 컨디션이 최상인 공연에서도 3옥타브 초반의 곡들은 대부분 2옥타브 후반대로 낮추어 불렀는데, 이것의 이유가 프레디 머큐리의 성부가 바리톤이기에 여러 번 녹음할 수 있는 스튜디오가 아닌 라이브에서는 3옥타브 대의 초고음을 한 번에 깔끔하게 내지르긴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다만 성부라는 것이 칼로 무 자르듯 정확하게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고, 프레디 머큐리처럼 성부가 애매한 사람들은 그날의 컨디션마다 테너일수도 바리톤일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프레디 머큐리는 바리톤이라기엔 음색이 얇기에, 흔히 말하는 ‘테리톤’일 가능성이 높다.[18][19]

보컬로서 역량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20대 초의 대학 시절부터였다. 단 그때에는 천하의 프레디 머큐리도 실력이 다듬어지기 전이라, 목소리 기복이 심하고 다소 거친 면을 보였다고 한다.[20]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무척이나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목소리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라고 말했다. 그 뒤로 혼자 엄청나게 연습을 했는지 퀸이 결성될 즈음에는 이미 테크닉적으로 거의 안정된 보컬이었다.[21]

프레디 머큐리는 어릴 적 합창부 시절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정식으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었다. 이는 대다수의 록 보컬리스트들의 특징으로, 이들은 정석적인 발성이 아닌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창법을 썼기 때문에 금방 목이 상하고 컨디션의 기복이 큰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본인이 존경한 보컬리스트들에게 영향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 로버트 플랜트, 로저 달트리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에서는 엘비스의 느낌으로 곡을 소화하며, It's Late에서는 로버트의 느낌으로 곡을 소화해낸다. 가끔씩 맑은 가성으로 성량이 풍부한 오페라적 창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만큼 엘비스 풍의 로큰롤부터 레드 제플린 풍의 하드 록, 심지어 오페라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그에 걸맞는 보컬을 소화할 수 있었기에, 대중들과 평론가들 모두 프레디를 보고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폭넓은 소화 능력을 보유한 보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22]

프레디 머큐리는 젊을 적에 엄청난 미성이었다가, 나이가 들자 창법을 바꾸어 그 특성을 많이 잃은 케이스이다. 성대 질환이 생기고 담배를 피워 피치가 조금 떨어지고 음색이 변한 감이 있지만 그보단 창법의 변화로 내츄럴 보이스를 내지 않고 먹는 소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차이점을 도드라지게 한 이유이다. 주로 연대별로 그 차이가 크게 드러나는데, 70년대 보컬은 자신의 미성을 십분 활용해 모험적인 발성은 최대한 삼가며, 성대가 벌어지지 않게 노력한 상태에서 고음이 되면 후두가 크게 올라가는 형식의 벨팅 창법을 주로 사용했다. 80년대에 들어서는 전체적으로 인골라에 빠져서 노래했으며, 성대가 벌어지고 갈라지는 탁성을 주로 썼다. 소리도 조심스럽게 가리던 취향에서 가성이든 쥐어짜는 탁성이든 되는 대로 뽑아내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사실 프레디 머큐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목소리는 다수가 1980년대 스타일이다. 미성이었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굉장히 중성적인, 야누스적인 미성이었다.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혼재된 듯한 그 마성의 목소리는 지금도 경탄의 대상.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 전성기는 1979 말 ~1982년 중반 정도이다.[23] 하지만 1982년도 후반으로 접어 들수록 계속되는 공연으로 점점 목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프레디의 지속적인 흡연으로 인해 목소리가 두터워지기 시작했다.[24]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발매한 Hot space 앨범이 실패했으며 1983년도에는 아예 공연을 하지 않고 휴식기를 가졌다.[25] 1984년도에 The Works 앨범과 함께 다시 투어를 했으나 이 시기는 프레디의 컨디션 기복이 엄청나게 심했던 시기였다. 목 상태는 지난 투어로 인해 나빠져 있었고 흡연으로 목소리도 두터워져 본 고장 런던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눈물 날 정도로 삑사리를 냈다.[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변화된 목소리에 적응된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았던 날에는 두터워진 목소리로 고음을 지르는데 전성기만큼 올라가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 두터운 고음이 전성기 고음보다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27]

1984년도 마지막 공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반투스탄들 중의 하나인 보푸사츠와나의 선 시티[28][29]에서 가졌는데[30] 변화된 목소리에 완벽히 적응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총 9일간의 공연[31] 에서 10월 19일 공연에서 프레디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Live Aid급으로 불러냈다.[32]

1985년도는 브라질 리우에서 역대급 관중을 데리고 공연을 했는데 이는 유로 공연 최다 관중 콘서트로 알려져 있다. 이 때 첫째날 콘서트에서는 그 어렵다는 Somebody to Love를 전성기급으로 불러냈다.[33] 일본에서 가진 콘서트에서도 2옥타브 라#(A#4) 고음을 5초 동안 흔들림 없이 부르는 등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34] 그리고 찾아온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2옥타브 후반대의 고음을 너무나도 편한 표정으로 내지르며 역대급 무대를 생중계로 보여주어 퀸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이끌었다.[35]다만 여기서 사람들이 잘못 알고있는 것이 라이브 에이드에서 프레디가 최악의 컨디션에서 공연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목에 혹이 난 상태랑은 별개로 이 공연에서 프레디의 컨디션은 정말 최상이었다. 1985년도에 프레디는 여전히 기복이 심했고 아무리 컨디션이 좋아도 최대 고음이 2옥타브 라#(A#4) 였지만 이 날 We Are the Champions를 부를 때 3옥타브 도(C5)를 찍고 후렴부분을 전부 높혀서 불렀으며 Radio Gaga 역시 낮춰부르는 일 없이 깔끔하게 소화했다.[36] 일부 사람들은 아무래도 라이브 에이드 때 부른 노래들은 퀸의 단독콘서트에서는 공연 후반부에 나오는 곡이라 프레디의 컨디션이 낮아져 있는 상태인 단독콘서트와는 컨디션 비교가 힘들다곤 하지만 1985년 콘서트 곡리스트 초반부에는 프레디가 부르기 힘들어했던 Somebody to Love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곡이 워낙 고음이 많이 들어가있는 곡이라 해당곡을 들어보면 프레디의 컨디션을 가늠할 수 있고 훌륭한 공연도 많지만 라이브 에이드 만큼의 가창력이 나오긴 힘들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37] 아무쪼록 그렇게 라이브 에이드에서 최고의 공연을 펼쳐 전성기를 다시 연 후 1986년도에 가진 Magic 투어는 전반적으로 그리 좋았던 컨디션은 아니었지만[38] 엄청난 관객을 동원하며 관객들과 함께하는 공연들은 명장면을 연출한다.[39] 이렇듯 프레디는 전문적인 보컬 수업은 받은 적이 없지만 아름답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나이를 먹고 계속되는 투어로 1980년대 중, 후반의 공연에서는 목을 좀 사리는 모습이 종종 보이지만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몇몇 사람들이 웸블리 둘째 날 라이브를 보고 프레디의 가창력에 의심을 가지는데 전날공연에서 비까지 맞으면서 불러서 해당 콘서트는 최악 중 최악의 컨디션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한다.[40] 보통 라이브에서는 3옥타브 대의 진성 고음을 잘 보여주진 않지만[41][42][43], 가성 고음은 의외로 많은 편이다. 3옥타브 후반대~4옥타브 초반대의 고음을 자유자재[44]로 낼 수 있다. 로버트 플랜트의 가성이 날카롭다면, 프레디 머큐리의 가성은 굉장히 부드러운 느낌.[45]

굳이 단점을 꼽자면 라이브 기복이 있다는 것이다.[46] 다만 이는 로버트 플랜트, 이안 길런 등 당시 고음형 록 보컬리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단점이었다. 이는 정석적인 발성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닌 본인들만의 고유한 창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훈련받지 않은 목을 혹사시키는 창법을 사용한 이들이 세계 투어를 다니면서 성대에 피로가 쌓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컨디션이 좋을 때의 라이브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며, 라이브 기복이 있다는 이유로 이들이 위대한 보컬리스트임을 절대 부정할 수 없다.

프레디 머큐리의 진성 음역대는 0옥타브 파(F2)[47]에서 3옥타브 파(F5)[48], 가성 음역대는 5옥타브 미(E7)[49]까지 선보인 적이 있다. 곡 중에서는 아니지만 0옥타브 도♯(C♯2)까지 내린 적도 있다. 한 인터뷰에서 로저가 말하길, "난 프레디의 최고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에 범접하는 음역대를 가진 남자 보컬리스트는 레드 제플린 로버트 플랜트,[50], 건즈 앤 로지스 액슬 로즈[51]밖에 없다.

프레디 머큐리의 성대가 약했다는 추측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에서 순간적으로 성대근육을 조으고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호흡을 폭발시켜 벤딩없이 피치를 높이는 창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음성학이 발달하고 보컬트레이닝이 보편화된 지금은 절대 권장되는 창법이 아니다. 일반인은 비슷하게 따라하기도 힘들며 숙련된 보컬리스트도 몇곡 부르고 나가 떨어질정도로 목에 무리가 간다. 그런데 프레디 머큐리는 이런 창법으로 거의 대부분의 곡을 소화하며 끝까지 기복없이 공연을 마친 사례가 다수 존재했다. 프레디의 성대가 유난히 약했다기보다는 다른 가수에 비해 성대에 무리가 가는 창법을 써야하다보니 기복이 심해질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프레디 머큐리가 음악활동을 하던 70-80년대에는 컴퓨터 기술이 그렇게 발전했던 때가 아니고, 이를 감안하면 스튜디오에서 그의 가창력은 왜 그가 록 역사상 최고로 불리는지를 느낄 수 있는데, 라이브에서는 안 나오는 고음을 마구 난사하기도 하고, 저음도 굉장히 안정적이며, 발음도 정확하다.[52] 추가적으로 프레디 머큐리는 가성을 라이브에서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프레디가 세상과 작별을 해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진성에서 가성으로 넘어가면서 부르면 템포가 처질 것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표적으로 보헤미안 랩소디나 Somebody to Love가 그렇다. 원곡엔 가성이 많이 포함되어있지만 거의 모든 부분을 진성으로 처리했다. 거의 모든곡을 진성으로 처리하다보니 컨디션 좋은 날과 안좋은 날의 차이가 더욱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프레디가 가성을 못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컨디션 안좋은 날에도 가성 고음을 뽐내는 경우가 많아 이유를 추정하기 힘들 뿐이다.

자신을 포함한 퀸 멤버들 모두의 곡을 앨범에 싣다보니 장르도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다. 퀸은 발라드[53], 디스코[54], 성악[55] 등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선보였다. 70년대에는 미성 위주였지만, 70년대 후반부터 탁성까지 쓰면서 80년대 중후반부터는 미성과 탁성을 자유자재로 쓴다.[56] 가성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데, 아름다운 가성[57]을 보여줄 때가 있는가 하면, 이게 샤우팅인지 뭔지 분간이 안가는 괴성[58]을 보여줄 때도 있는데, 이게 다 곡에 있어서 어색함이 없다.

1990년대 들어서는 1970년대보다도 더 가볍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1980년대의 폭발적인 성량과 노련한 발성 테크닉에 흡연 이전의 1970년대의 음색이 더해지며 소리가 더욱 날카롭고 명확하게 들린다.

퀸의 곡은 그렇게 어려운 곡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막상 약 2~3시간 진행된 프레디 머큐리를 추모하기 위한 콘서트에서 많은 유명 가수들이 퀸의 곡을 불렀지만, 원곡만큼 해냈다고 평가받는 무대는 조지 마이클의 Somebody to love, 씰(Seal)[59]이 부른 Who Wants To Live Forever, 익스트림의 퀸 메들리 정도 뿐이다. 사실 이는 절대적인 난이도 자체가 엄청 높은 게 아니라 프레디만큼 올라가는 보컬은 찾아보면 많지만 프레디처럼 올라가는 보컬이 없기 때문이다.
Exercises In Free Love
80년대에 낸 솔로 싱글에는 자신의 음역을 과시하는 Exercises In Free Love란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에서는 그야말로 여성과 남성의 음역을 넘나드는 마성의 음역을 보여준다. 최고음은 3옥타브 파(F5). 여성의 두성을 구사했다.

또한 당시 레드 제플린이 보급했던[60] 보컬과 기타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방식을 퀸 또한 받아들여서 프레디 머큐리는 보컬과 피아노만 담당했다.[61] 그래서 퀸이 처음 데뷔했을 때, 보컬과 기타가 철저하게 분리된 퀸을 보고 평론가들이 레드 제플린의 짝퉁이라고 많이 깠다고 한다. 물론 프레디는 애초에 밴드의 시작점부터 다르다면서 평론가들의 억지 주장을 반박했다.

3.2. 프론트맨으로서

Did rock and roll ever have a better showman than Freddie Mercury?[62]
(로큰롤 역사에 프레디 머큐리를 능가하는 쇼맨이 있었는가?)
빌보드, The 25 Best Rock Frontmen of All Time
세상에 나타난 모든 프론트맨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은 프레디 머큐리가 분명하다. 그의 음역대, 카리스마, 존재감 그 모든 것이 프론트맨 그 자체였다.
디스터브드 데이비드 드레이먼, 플래닛 록과의 인터뷰 중에서 #

프레디는 단순한 가창력 좋은 보컬리스트란 평가를 넘어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프론트맨중 한 명이자 라이브 공연계의 본좌로 평가받는다.[63] 퀸이 같은 록 밴드, 아니 대중음악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뮤지션 가운데 하나라는 평을 받는데는 프레디의 폭발적인 무대 장악력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 프레디는 더 후의 어마어마한 팬이었기에, 더 후가 추구하던 파괴적인 무대 매너에 영향을 받아 무대 위에서 온갖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하면서 관중들을 조련하였다.[64] 또한 프레디 머큐리는 레드 제플린, 특히 로버트 플랜트의 광팬이었기에, 프레디 사후 브라이언 메이의 인터뷰에 따르면 프레디는 라이브 공연에서 언제나 로버트 플랜트처럼 행동하려고 했다고 한다.[65] 그 외에도 롤링 스톤스의 프론트맨인 믹 재거의 영향 또한 받았다고 한다. 특유의 연극적이고 화려한 동작들과 관객 유도 기술을 바탕으로 퀸이 수만의 관객을 아우르는 스타디움 공연을 해나가는 데에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무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연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로, 그는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총출동한 자리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로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기획자인 밥 겔도프[66]는 '그날 공연한 밴드 중에서 그냥 퀸이 최고였다'라고 평했고, 같은 공연에 출연한 엘튼 존이 퀸의 공연 이후, 프레디의 트레일러로 가서 'You bastards, you stole the show[67]'라고 항의 아닌 항의를 하며 농담했다.[68] 당시 라이브 에이드 공연 특성상 모든 아티스트에게 20분의 시간만 주어졌고 퀸의 콘서트에 평소 사용하는 조명, 특수효과 장치 같은 것은 전혀 쓸 수 없었기에, 이 날의 공연은 오직 프론트맨인 프레디의 무대매너로 관객들을 매료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프레디는 그걸 해냈다. 당시 U2 듀란 듀란과 같은 신진 세력들에 밀려 슬슬 동력이 떨어진 듯 보이던[69] 퀸을 다시금 정상으로 올려놓은 공연이었다.

특히 밴드의 피아니스트[70]라는 특성 때문에 세션 피아니스트를 고용하기 전인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프레디는 공연 거의 대부분을 피아노 앞에 앉아 있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휘어잡고 조련하는 능력이 출중했다는 것은 얼마나 그가 비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프레디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받침대 없는 마이크[71][72]는 무대 위에서 지휘봉이나 에어 기타 등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프레디의 퍼포먼스에 볼거리를 더해주었다.

오늘날 그를 존경하는 많은 후배 뮤지션들은 서있는 것 조차 부담백배인 10만명 청중 앞에서 쫄기는 커녕 확 제압해버리는 무게감과 그 열정적인 무대 매너를 존경의 요인으로 뽑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그 임팩트 때문에 대형 공연의 교과서처럼 여러 뮤지션들에게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퀸에 뒤늦게 빠진 팬들은 무대에서 마치 거인과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프레디가 그처럼 인상적인 무대 매너와 쇼맨쉽을 보일 수 있었던 건, 단지 퍼포먼스 면에서의 기교와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내는걸 좋아하고 그들과 같이 호흡하는 걸 즐길 줄 아는 타고난 무대체질이었다는 점이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뛰어난 록 뮤지션이라 해서 모두가 청중앞에서의 공연을 좋아하는 무대체질인 건 아니다. 프레디와는 정반대로,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고 많은 청중 앞에서의 공연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록 보컬리스트의 대표적인 예로 커트 코베인이 있다. 그는 유서에서 자기는 프레디 머큐리처럼 공연에서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을 즐길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즐기는 것처럼 연기하며 사람들을 속이는 것도 싫으니 어찌하면 좋냐는 내용의 비통함을 적어 놓기도 하였다.[73][74]

프레디는 공연이란 하나의 '쇼'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퀸 초기 때부터 적자를 보더라도 공연 조명과 의상에 예산을 가장 많이 쏟아부었다고 한다. 7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는 알록달록한 조명부터 후기에 사용하던 거대한 조명 장치 등 화려한 조명이 퀸 공연의 또다른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70년대 초반에 멤버들이 입고 있는 괴상한 날개옷과 강렬한 화장도 모두 프레디의 취향이며, 다른 멤버들이 밝히길 프레디가 계속 이상한 옷들을 입으라고 강요해서 어쩔 수 없이 입게 되었다고. # # # # #

공연 중간에 목을 풀 겸 독특한 소리[75]를 내며 관중들과 호흡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라이브 에이드때 시전한 관중 조련.[76] 말이라곤 Alright! 한 마디만 하고 전부 의미를 알 수 없는 허밍만 하는데도 10만 관중이 아주 자연스럽게 프레디를 따른다. 이렇게 프레디가 관중을 조련할 때 치는 "Eh~Oh!"는 프레디를 상징하는 멘트 중 하나.


1986년 웸블리 공연 도중 관중을 지휘하는 영상. Under Pressure 시작 전의 그 유명한 관중 조련. 위에서 서술되어 있다시피 웸블리 공연 당시 프레디의 컨디션은 최악이었음에도 전설의 장면을 연출한 것을 보면 그가 최고의 프론트맨으로 평가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관중 조련은 78년 재즈 투어때부터 시작되었고, 심지어 그가 죽은 이후에도 추모공연이나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 등에서 스크린에 나온 그의 생전 공연 음성을 관객들이 따라부르는 장면을 연출했다.

3.3. 작곡가로서

1975년 발매한 ' Death on Two Legs'의 피아노 트랙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선율을 마음대로 만들어 낼까 감탄하게 만드는 천재 작곡가로, 퀸의 히트곡들 중에서도 프레디 머큐리의 작품이 많다. 퀸 결성 때부터 브라이언 메이와 더불어 많은 곡을 작곡했으며, Bohemian Rhapsody Don't Stop Me Now,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77], We Are the Champions,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78], I Was Born to Love You 등 퀸의 수많은 대표곡들이 프레디의 작품이다. 위 노래들은 현재 한국에서도 아직까지 광고 음악이나 예능 프로그램 배경 음악으로 잘 쓰이고 있다. 노래 제목은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음악 최소 한두 곡은 알고 있을 정도다.

다양한 장르의 시도 및 혼합이 송라이터로서의 프레디 머큐리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로, 퀸 초창기(1, 2집)에는 보통 알려진 퀸과 프레디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헤비 록 작곡에 치중했고, 그 이후 각종 발라드를 통해 피아노 발라드 스페셜리스트로도 자리매김했다. 그 외에도 프로그레시브 록, 가스펠, 팝, 디스코, 로커빌리, 오페라 등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다. 디스코 쪽은 기존의 퀸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던 <Hot Space>나 본인의 솔로앨범인 <Mr. Bad Guy>에서 두드러진다. 다양한 장르가 융합된 노래의 가장 대표적 예시가 바로 대표작 Bohemian Rhapsody로 이 노래는 여러 장르를 합쳐 프로그레시브 록과 비슷한 전개를 주어서 1970년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79]

대중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를 뽑아내는 솜씨 또한 아주 일품이며,[80] 그러면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대중음악에 비해 특이한 전개, 수 차례의 조바꿈 등 복잡한 구성을 음악에 녹여내곤 했다.[81] 반면 폴 매카트니, 지미 페이지 등의 선배 록스타들이 그러하듯 프레디 머큐리 또한 음악을 정식적으로 배우지 않았기에 악보를 거의 볼 줄 몰랐다.[82] 퀸 멤버 및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프레디는 자신이 만든 곡을 일반적인 악보 형식이 아닌 그만이 알아볼 수 있을 법한 이상한 기호로 종이 여러 장에 적어 스튜디오에 가져왔다. 대부분의 노래는 피아노로 작곡했는데[83], 작곡하는 것도 좀 특이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거나 고뇌하는 게 아니라, 멜로디가 떠오르면 녹음하지 않고 머릿속에 넣어둔 후 나중에도 그 선율이 남아있으면 그제야 녹음하고 작곡을 시작한다. 선율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는 건 그 선율이 허접해서 기억할 가치가 없어서라고 한다.

작곡가로선 70년대 중후반기[84]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80년대엔 밤놀이에 빠져서 음악 작업에 매우 소홀해졌고, 게이클럽의 음악에 영향받은 가벼운 댄스음악으로 일관하다 보니 70년대 곡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았다.[85] 하지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80년대 후반기부터 다시 창작열을 불태워 <Barcelona>나 <Innuendo> 같은 명곡들을 써낸 거 보면 마지막까지 재능은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다.

본인이 작곡을 하고 나서도 로저이 작곡을 할 때면 으레 곁에서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86] 다만 브라이언은 작곡에 관한 본인만의 확고한 신념과 방식이 있어서 프레디의 도움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서로 같이 의견을 통일시키려고 하다 보면 꼭 싸움이 터졌다고 한다.[87]

3.4. 연주자로서

1986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Seven Seas of Rhye 라이브
퀸에서 리드보컬 포지션 외에 피아니스트로도 활약했는데, 정확한 리듬감이 그의 연주에서 보여지는 차별적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브라이언 메이에 따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 후 녹음을 할 때 피아노 연주를 처음 깔고 시작하는데 메트로놈도 없이 그냥 자기 맘대로 한큐에 녹음하는데 그 박자가 메트로놈을 놓고 친 듯이 한 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해서 마치 드러머가 피아노를 치는 듯했다고 설명하였다.[88]

건반악기 신디사이저를 주로 활용하는 록 밴드에서 그랜드 피아노는 그다지 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의 사운드를 선호해서 스타인웨이앤드선스를 스튜디오나 공연에서 활용했다. 존 디콘이 You're My Best Friend를 작곡했을 때 프레디에게 월리처 일렉트릭 피아노의 연주를 부탁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 놔두고 왜 그런 악기를 쓰냐고 거절해서 결국 디콘이 직접 연주해 녹음하기도 했다.[89]

한편으로 머큐리는 개인적으로 특히 야마하의 G-2 베이비 그랜드피아노를 애용했다고 한다. 해당 그랜드 피아노는 머큐리가 1975년 자신의 음악을 위해 이상적인 악기를 찾겠다며 약 6개월 간의 철저한 조사 후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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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머큐리 본인은 스스로의 연주 실력을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80년대에 들어서부턴 본인이 직접 연주하는 대신 프레드 멘델, 마이크 모란과 같은 세션 뮤지션들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91] 또한 후기 라이브에서도 피아노에 앉아있는 대신 무대를 돌아다니며 관객을 이끌어가는 방침을 택함에 따라 공연에서의 건반 연주도 라이브 한정 세션맨이었던 스파이크 에드니에게 거의 떠넘겨지다시피 하게 되었다.[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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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는 주로 피아노를 다뤘지만 기타도 쳤다.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때만 연주하는데 공연 때 코드는 3개밖에 칠 줄 모른다고 했지만 실제론 6개를 친다.[93][94] 참고로 82년 Hot Space 투어까진 12현 통기타[95]로 연주했으나, 84년 The Works 투어부터 펜더 텔레캐스터로 변경했다.[96] 기타 실력은 본인 스스로 밝혔듯이 수준급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브라이언 메이의 말에 따르면, 프레디가 머릿속에서 떠오른 기타 아이디어를 그에게 설명할 때 기타를 붙잡고 안되는 연주를 시도하다가 피아노로 뛰어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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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의 생전 영상을 따라 관중들이 가락을 따라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프레디 머큐리는 성악가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Barcelona'라는 곡을 부른 적 있는데, 이 곡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주제가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전에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로 사망하자 올림픽 측에서는 에이즈로 죽은 사람의 노래를 주제가로 쓸 수가 없다며 호세 카레라스, 사라 브라이트만의 "Friends for Life"(영원한 친구)로 바꾸어 빈축을 샀다. BBC는 꿋꿋이 'Barcelona'를 틀었다. 이 점을 알고 폐막식의 장면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의 20년 묵은 한풀이 같다는 생각도 든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eddie_Bronzestatue_rueckansicht.jpg * 스위스 몽트뢰[126][127]에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 생전 프레디 머큐리는 몽트뢰를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흔히 프레디 머큐리 하면 생각나는 A Kind of Magic 투어의 모습[128]을 담아냈다. Made in Heaven의 앨범 자켓이기도 하다.[129]


[1] 단, 프레디 머큐리도 가수 활동 시에만 사용한 예명은 아니었고, 실제로 개명을 해 법적으로 등록된 이름이다. [2] 사인은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인 폐렴이다. [3] 1964년 영국으로 이민을 가며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탄자니아에서 태어났으므로 탄자니아 국적도 있어야 하나 이중국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4] 프레디 본인이 에이즈 감염으로 인해 단명한 것과 반대로, 부모님은 두 사람 모두 90대까지 장수하였다. [5] 오스트리아의 여배우. 프레디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이성 파트너로 알려져 있다. [6] 마지막까지 프레디와 함께했던 동성 연인으로 2010년에 사망하였다. [7]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인 피트 타운젠드도 이 학교를 나왔다. [8] 부모가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도였다. 프레디 본인은 크게 종교적인 삶을 살지 않았으나 신앙 자체를 버리지는 않은 듯하다. [9] 보이는 것에 비해 키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다. 퀸 멤버 중 가장 단신이었는데 다리가 어마어마하게 길어서 비율이 좋다보니 키가 더 커보이게 느껴지는 것이다. [10] 데뷔 후 30대 초반까지 저체중의 호리호리 하고 섹시한 몸매를 유지하며 타고난 미성과 더불어 중성적인 매력을 발휘했지만, 이후 체중이 늘고 상체에 근육이 붙어 파워풀 한 성량과 함께 역동적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11] 이는 록 가수로만 한정하면 8번째로 높은 수치다.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 밥 딜런, 폴 매카트니, 리틀 리처드, 로버트 플랜트, 믹 재거 다음. 게다가 해당 리스트는 롤링 스톤이 다른 리스트랑 비교해봐도 확연하게 소울이나 R&B 쪽에 유리하게 줄세우기를 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20위권 안에 들었다. [12] 1위는 로버트 플랜트, 3위는 보노. [13] 오페라틱, 소울, 디스코, 흑인 음악 등. [14] 당장 퀸이 평론가들에게 한창 까일 때에도 멤버들의 세션 실력으로 까인 적은 없었다. [15] 이 노래의 작곡가인 존 디콘은 프레디에게 흑인스러운 느낌을 담아주기를 원했고, 실제로 발매 후 이 노래를 들은 미국 흑인들은 퀸이 흑인 밴드인 줄 알았다고 한다. [16] 프레디 머큐리와 마찬가지로 하드 록 계열에서 바리톤인 보컬리스트로는 로저 달트리, 액슬 로즈, 데이비드 커버데일 등이 있다. [17] 유튜브에 영상으로도 풀려있는 1970년 로열 앨버트 홀 라이브가 대표적인데, 이 공연 당시 로버트 플랜트는 컨디션이 매우 나쁜 상태였음에도 원키 그대로 곡을 무리없이 소화했다. 여담으로 로버트 플랜트가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안 그래도 높은 원곡보다 더욱 더 높게 부른다. [18] 이와 비슷한 보컬로는 프레디 머큐리가 영향을 받은 가수인 로저 달트리가 있다. 로저 달트리 또한 성부는 바리톤이지만 음색이 다소 얇은 편이었으며, 이쪽은 당대 기준 매우 안정된 발성을 바탕으로 라이브에서도 3옥타브 대의 고음과 샤우팅, 스크리밍을 원키로 구사하였다. [19] 사실 바리톤이나 테너란 용어 자체가 성악에서 나온 용어인데, 성악가들은 소화하는 음역에 따라 저음은 굵은 음, 고음은 얇은 음으로 나뉘지만 대중가수들은 발성법이 각자 천차만별로 다르기에 이런 식으로 딱 나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목소리가 굉장히 얇은 G-DRAGON은 테너라고 보기엔 음역대가 지나치게 낮고, 베이스 음역대는 아니다. 그렇다면 비슷한 음역대를 소화하는 김동률과 마찬가지로(물론 김동률이 더 넓다) 바리톤인가? 이처럼 성악 용어를 대중음악에 대입하면 딱 들어맞진 않는다. [20] 로저의 말을 빌리자면 "양이 시끄럽게 우는 것 같았다"정도의 목소리였다. https://youtu.be/E0syedBikcE?si=ltjJ_PdPCVxgG86t [21] 종합해 보면, 프레디는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만들어낸 괴수인 셈이다. [22] 보통 로저 달트리, 로버트 플랜트와 같이 “ 카멜레온같은 보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3] 라이브 투어로 치면 Crazy 투어부터 유럽 Hot Space 투어까지. [24] 사실 이런건 록, 특히 고음 위주로 노래를 부르는 하드 록 헤비 메탈 보컬리스트들이 예외 없이 겪는 현상이다. 대표적으로 목 관리를 잘 하지 않고 전성기 시절 역량을 다 소화해서 현재는 제대로 된 보컬조차 보여주지 못하는 이안 길런, 액슬 로즈 등이 있다. 굳이 하드 록으로만 국한시키지 않더라도 리암 갤러거 역시 목을 갈아마시는 창법으로 인해 목이 많이 상해서 한때는 액슬 로즈 급으로 보컬을 소화하지 못하다가, 꾸준한 관리와 창법 변경을 통해 현재에는 제2의 전성기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회복하였다. 오히려 프레디 머큐리는 기복은 있었어도 커리어 말기까지 보컬 기량 자체는 거의 떨어지지 않은 케이스다. [25] 사실 이때도 남미에서 Hot Space 공연을 하려 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불명이나 취소되었다. [26] 그런데 9월 5일 런던 공연에서는 Under Pressure3옥타브 라(A5) 파트를 4옥타브 파(F6)로 올려서 불렀다. 사실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도 Under Pressure만은 잘 불렀다. [27] 선시티 라이브나 슈가르트 공연에서 느낄 수 있다. [28] Sun City, 현 남아공 노스웨스트 주에 있는 대규모 콘도, 카지노 시설이다. 남아공 법에서 카지노를 영업하면 걸리지만, 반투스탄인 보푸사츠와나에서는 남아공 법이 적용되지 않는 점을 이용해 법을 우회하여 만들어졌다. 이 시설을 이용해 백인들한테 돈을 어미무시하게 벌었다고 한다. [29] 참고로 공연은 썬 씨티 내부의 공연장인 슈퍼 보올에서 진행했다. 실내 공연장치곤 규모가 커서 현재까지도 많은 뮤지션들이 공연을 가는 곳이다. [30] 하지만 그때 당시의 뮤지션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발하여 남아공에는 공연을 하러 가지 않았는데, 퀸은 그걸 무시하고 더군다나 아파르트헤이트의 최대 병크인 반투스탄까지 가서 공연을 했으니... 그리하여 언론에서 인종차별 밴드라고 지탄을 받게 되었다. [31] 단, 10월 7일의 공연 도중, 4번째 곡 Somebody to Love를 부르다 목에 생긴 혹으로 인해(이 혹 때문에 그 전설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없없을 뻔 했다.)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프레디가 백스테이지로 뛰쳐나가고 조명이 전부 꺼진 후에, 프레디가 나오길 기대하던 관중들이 발구르기로 쿵쿵따 리듬을 만들며 We Will Rock You를 떼창하던 도중, 썬시티 라이브 기획자인 Hazel Feldman이 라이브가 취소되었다고 관중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때 프레디는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고 한다.이 공연을 제외하면 총 8일간의 공연이다. [32] 슬프게도 10월 19일 공연만 음원자료가 남아 있다. 19일 컨디션도 좋았는데 이 전 9개의 공연은 자료가 없다는 게 참 아쉬울 따름이다. [33] 지역 방송국에서 유출된 화질과 음질이 나쁜 영상은 존재하지만, 공식 발매된 앨범에서는 이 부분이 포함되지 않았다. [34] 여담으로 퀸은 일본만 가면 Sheer Heart Attack 투어와 대부분 일본 투어의 첫 날을 제외하면 컨디션이 늘 안좋았다. 하지만 이 때는 퀸의 마지막 일본 공연인 오사카 공연만 제외하면 아주 컨디션이 좋았다. 그런데 하필 도쿄에서는 3번 공연을 가졌는데 그 중 가장 컨디션이 좋지 않은 마지막 날 공연만 영상자료가 남아있다.(물론 도쿄 공연 중 에서지, 실제로는 최악의 컨디션을 자랑하는 다른 The Works 투어에 비하면 꽤나 좋은 컨디션이다.) [35] 라이브 에이드는 사실 프레디가 의사와 상담한 결과 프레디의 목에서 혹이 발견돼서 의사조차 공연을 말렸으나, 프레디가 강행한 것이다. 그런데도 목에 혹 난 상태로 3옥타브 도(C5)를 지르는 프레디는 그야말로 괴수가 따로 없다. [36] 참고로 프레디 머큐리는 We Are the Champions 후렴 부분 고음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의 라이브를 제외하면 다 낮춰불렀다, Radio Gaga 역시 가사 중 "You had your time" 을 거의 모든 라이브서 낮춰 부른 것을 생각하면 역시 좋은 컨디션이었음을 알 수 있다. [37] 그나마 근접한 공연이 리오 1차, 도쿄 1,2차 공연 정도다. [38] 7월 2일의 취리히 공연과 7월 12일의 웸블리 공연 때 컨디션이 굉장히 안좋았다. 그래도 84년도의 The Works 투어에 비하면 컨디션이 좋은 편이다. [39] Radio Gaga나 프레디의 에롭타임이 그렇다. [40] 이렇다보니 목소리를 덧붙이는 오버더빙이 많은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실제 공연에서는 삑사리나 갈라짐이 거의 모든 곡에서 나왔다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관객과의 에롭타임에 이어서 부른 Under Pressure는 레전드로 남게되었고 의외로 낮춰부르긴 했지만 보헤미안 랩소디도 무난하게 잘 불렀다. [41] Bohemian Rhapsody (Queen-Live In Newcastle: 12/4/1979) 3분 21초 3옥타브 도 라이브 영상. [42] 컨디션이 매우 좋은 공연에서도 원곡의 3옥타브대의 고음을 대부분 2옥타브 후반대로 처리하는 편인데, 못 낼 것 같아서 못 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로 컨디션 조절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43] 컨디션 조절을 할 필요가 없을 경우엔 이 정도이다. 저 애드립을 빼면 죄다 립싱크를 한 날이었기 때문. [44] 컨디션이 상당히 안 좋았던 웸블리 2번째 날 공연에서도 3옥타브 라#(A#5)의 엄청난 고음을 냈다. [45] 다만 프레디 머큐리도 로버트 플랜트처럼 샤우팅스러운 가성을 못 냈던 것은 아니다. It's Late에서의 가성을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로버트 플랜트 또한 부드러운 가성을 못 냈던 것은 아니었다. Kashmir 같은 곡들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46] 1986년 웸블리 공연 첫째날 밤(7/11)과 이튿날 밤(7/12)의 차이에서 볼 수 있다. 첫째날도 최상의 컨디션은 아닌지라 목소리 갈라짐이 꽤 있었지만 둘째날처럼 탈진된 목소리는 아니었고 파워풀한 고음을 뿜어내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47] <All dead, all dead>, <Somebody to love>, <Don't try suicide>, <Bijou> [48] <All god's people> [49] 공연 중 최고음은 1981년 2월 16일 공연 <Get Down, Make Love>의 5옥타브 미#(E7)이다. 이 노래에서만 4옥타브 솔# (G#6), 4옥타브 레(D6)를 추가로 선보였다! [50] 0옥타브 도 ~ 4옥타브 시 [51] -1옥타브 파 ~ 4옥타브 라#으로 음역대가 알려진 모든 가수들 중에서 가장 넓다. [52] 이는 Jazz에 수록된 Dead on time을 들어보면 알 수 있는데, 속도가 거의 랩 수준인데도 발음이 완벽하다. [53] 대표적으로 Love of my life, 프레디 머큐리의 감성적인 보컬이 돋보이는 곡으로 유명한 곡이기도 하다. [54] Hot Space에 수록된 몇몇 곡들. [55] 솔로 활동곡. [56] Innuendo에 수록된 Don't try so hard에서는 70년대의 보컬이 되돌아왔다고 봐도 될정도의 미성을 내며, A Kind of Magic에 수록된 Gimme the prize에서는 굉장히 강한 하드 록 분위기에 맞는 탁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57] Under Pressure 등. [58] One Vision에서의 3옥타브 솔(G5)부분, It's Late에서의 4옥타브 미(E6)부분 등. [59] 흑인 팝가수로 항상 대머리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는 걸로 유명한데 프레디 추모공연에선 레게 스타일을 하고 나왔다. 히트곡으론 Crazy, Kiss from a Rose, Fly Like an Eagle 등이 있다. [60] 레드 제플린 이전에도 더 후 로저 달트리 피트 타운젠드라는 보컬-기타 듀오가 있긴 했지만, 이를 대중화시킨 것은 플랜트-페이지였다. 또한 애초에 피트 타운젠드는 거의 서브 보컬에 가까울 정도로 보컬에 많이 참가했다. [61] 그 외에 다룬 악기는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에서 기타를 연주하거나 일부 곡에서(대표적으로 Keep Yourself Alive, Liar) 탬버린을 두들기는게 전부. 하지만 둘 다 그의 주 악기는 아니었다. [62] 프레디 머큐리를 최고의 록 프런트 맨 2위로 선정하면서 남긴 코멘트. 록 역사상 최고의 프론트맨을 꼽을 때 절대로 순위권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다. 여담으로 1위는 브루스 스프링스틴. 출처 [63] 보통 ‘최고의 프론트맨’을 꼽지면 믹 재거, 로저 달트리, 재니스 조플린, 브루스 스프링스틴,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로버트 플랜트, 리암 갤러거 등과 함께 절대 빠지지 않는다. [64] 그래도 더 후처럼 악기를 부수거나 하지는 않았다. Sheer Heart Attack을 연주할때 스피커를 쓰러뜨리는 정도. [65] 다만 프레디의 실제 성격은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았기에,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가 로버트 플랜트처럼 행동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불안감과 수줍음이 묻어나오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66] 라이브 에이드의 기획자로, 핑크 플로이드의 벽에서 주인공 핑크를 연기한 사람이기도 하며, 사실 이 사람도 그리 히트를 치지 못했지만 엄연한 뮤지션이다. 아일랜드의 펑크 밴드 Boomtown Rats의 보컬리스트로 활동했었다. [67]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이 자식들아, 니들끼리 다 해먹냐?' 정도. [68] Queen’s Live Aid Performance: How Rock’s Royalty Stole The Show [69] 실제로 퀸은 Hot Space을 기점으로 나름의 하향세를 타고 있었다. [70] 키보드가 아닌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하므로 키보디스트로 서술하지 아니하였다. [71] 이 마이크의 유래는 다분히 우연적이었다. 프레디의 퀸 이전 소속 아마추어 밴드였던 Wreckage 공연에서 마이크를 스탠드에서 분리하던 중 스탠드가 부서지며 마이크에 막대기가 달린 채 분리되어 버렸고, 프레디는 얼떨결에 생겨난 이 새 유형의 마이크를 마음에 들어해 이후 공연에서도 계속 쓰게 된 것이다. [72] 이는 후대에도 전승되어 후배 밴드인 건즈 앤 로지스의 보컬 겸 프론트맨 액슬 로즈가 받침대 없는 특이한 형태의 마이크 스탠드를 쓰기도 했다. [73] 유서 중 해당 부분: "나는 당신들 누구도 속이기 싫다. 내가 공연할 때 100% 즐기는 척하며 속이는 건 (뮤지션으로서) 최악의 범죄라고 생각한다. 무대 위로 올라가기 전에 난 그것이 억지로 가야만 하는 직장 출근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I can't fool you, any one of you. The worst crime I can think of would be to rip people off by faking it and pretending as if I'm having 100% fun. Sometimes I feel as if I should have a punch-in time clock before I walk out on stage." [74] 본인도 빌보드 선정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 순위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이건 사실 너바나라는 이름값으로 올라간 것이고 커트 코베인은 유능한 프론트맨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75] 통상적으로는 Ay-oh,에-오라고 표기되며 부틀렉 등에선 Day-oh로 표기가 되곤 한다. [76] 이어지는 곡은 Hammer To Fall [77] 이 곡은 독일의 호텔에서 목욕하다가 악상이 떠올라서 만들었다고 한다. [78] 피아노에 앉은 뒤 약 5분 만에 만들었다고 한다. [79] 이 노래를 구상한 것은 1960년대, 즉 20대 초반부터라고 한다. [80]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는 프레디의 노래 중 가장 대중적이고 단순한 노래로 꼽힌다. [81] 대표적으로 Bohemian Rhapsody나 Bicycle Race, Queen II에 수록된 곡들이 그러하다. [82] 관련 인터뷰. 끝부분에 자신은 악보를 거의 읽을 줄 모른다고 밝힌다. [83] 후기에는 방식이 조금 달라져 80년대 한 인터뷰에서 피아노와 기타 중 무엇으로 작곡하냐는 질문에 '요즘은 머릿속으로 작곡한다'고 대답했다. [84] 대략 1974년 ~ 1979년. 프레디가 수많은 퀸의 히트곡을 만들어낸 시기다. [85] It's A Hard Life 같은 곡들이 이례적으로 80년대 중반에서 작곡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70년대에 비해서는 약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86] 퀸의 대 히트곡 중 하나인 Radio Ga Ga도 아이디어와 시작, 그리고 진행은 로저가 했기에 크레딧은 로저의 이름으로 올라가 있으나, 후반부에 정식 발매 전에 프레디가 로저 몰래(로저는 휴가를 갔었다고 한다.) 곡을 좀 변형시켰고 로저가 그 편집본을 마음에 들어해서 낸 것이 현재의 라디오 가가이다. [87] 그렇게 싸우다보면 주변에서는 다들 '브라이언이 싸울만했네..' 라는 반응이었다고. [88] Bohemian Rhapsody 메이킹필름 참조. [89] 이후 인터뷰에서 프레디는 그 전기 피아노를 꺼리는 수준을 넘어서서 이름을 말하는 것도 질색하는 수준의, 거의 경멸에 가까운 반응(전기 피아노라고 부르지도 않고 "그 망할 것"(That damn thing)이라고 그냥 뭉뚱그려 말했다.)을 보였다. 해당 곡은 라이브에서는 프레디가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한다. [90] 이 피아노는 2023년 경매에서 팔려나가서 174만2000 파운드(약 30억원)에 팔렸다. 뉴스 [91] 정확히는 1982년 Hot Space 투어 공연부터. [92] 가령, 70년대의 공연에선 거의 공연의 절반을 피아노에 앉아 보냈지만 마지막 투어였던 매직 투어의 경우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는 곡은 단 4곡뿐이었다.<In the Lap of the Gods...Revisited>, <Seven seas of Rhye>, < Bohemian Rhapsody>, < We Are the Champions>. 다만 이는 후반부로 갈수록 셋리스트에서 피아노 연주곡이 점점 적어진 탓도 있다. 매직 투어에서는 위의 곡들도 포함해서 피아노 연주곡이 <Tutti Frutti>,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까지 해서 고작 여섯 곡이었다. [93] 라이브에서 브라이언 메이가 아니라 프레디가 직접 친 이유는 스튜디오 버전의 해당 파트를 녹음한 사람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프레디 사후 공연들에선 브라이언이 프레디 파트까지 모두 연주한다. [94] 1982년 Hot space 투어의 일환으로 열린 밀턴 케인스 보울 공연에서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연주하기 전, 프레디는 "10년 전 내가 기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코드 3개밖에 없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내가 기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코드 3개뿐이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95] Ovation 사의 Pacemaker 12-Strings 기타. [96] 텔레캐스터는 본인 소유의 기타로 추정된다. 그런데 프레디 사후 도둑맞았다고 한다. [97] 해당 사진에는 욱일기의 백적 욱광 무늬가 그려진 티셔츠가 걸려 있는데, 본 문서에 서술되어 있는 대로 일본은 퀸이 유일하게 투어를 간 아시아 국가로서 프레디 역시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저런 티셔츠를 가지고 있어도 정황상 이상할 게 없는 셈.일본은 욱일기에 대한 이미지를 오래 전부터 미디어 문화을 통해 미화시켰기 때문에 2010년대에 이르러 서양권에서도 어느정도 알려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서양 국가 인물들은 욱일기에 대한 별다른 인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또한 1980년대는 일제의 피해자인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욱일기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잡혀있는 편은 아니었다. 일장기와 욱일기를 동일시하거나 혼동하여 현재 욱일기의 이미지 상당수를 일장기가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 다만 2000년대에 이르러 일본 정치계가 극우화되고 욱일기 역시 일본의 극우단체가 극우집회에서 자주 쓰게 되면서 욱일기가 일본군의 군기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재발굴되어서 비판받기 시작했다. [98] 프레디 머큐리의 전기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영화)에서도 해당 티셔츠가 등장한다. 다만 영화 제작진들도 논란을 인지한 것인지, 보헤미안 렙소디의 국내 상영판에서는 욱광 무늬가 들어간 티셔츠 장면이 CG로 처리되어 개봉되었다. [99] <Victory>, <State of shock>,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 이 중 <State of shock>은 마이클이 프레디의 권유로 롤링 스톤스 믹 재거와 마무리 작업을 거쳐 공개되었다. [100] 2014년 발매된 Queen Forever 앨범에는 프레디 머큐리와 마이클 잭슨의 데모곡을 합친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를 담아 발매했다. [101] Lesley-Ann Jones가 쓴 프레디 머큐리 바이오그래피 참조. [102] 로버트 플랜트는 프레디 머큐리를 향해 Great Voice라며 칭찬했으며, 한창 퀸이 평론가들에게 대차게 까이고 있을 때 본인은 퀸을 좋아한다고 했다. 또한 프레디 머큐리에 따르면 개인적인 친분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레드 제플린의 리더인 지미 페이지와 퀸의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는 같은 동네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동향이기에 이를 통해 친분을 맺었을 수도 있다. [103] 그러나 밴드 대 밴드로서 레드 제플린과 퀸이 비교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 레드 제플린의 음악적 영향력이 워낙 거대하며 퀸 또한 레드 제플린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밴드이기 때문이다. 레드 제플린은 동시대의 거대한 밴드이자 똑같이 영향력이 막대한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와 자주 비교되며, 그 외 동시대 밴드로는 딥 퍼플, 블랙 사바스와 자주 엮이는 편. [104] 퀸이 데뷔한 1973년 당시 레드 제플린은 5집 Houses of the Holy를 발매하며 당시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발매한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진출에 성공한 The Game 시기를 퀸의 전성기로 본다면, 퀸이 한창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을 당시 레드 제플린은 드러머 존 본햄의 죽음으로 인해 해체했을 때였다. 그러나 A Night at the Opera 시기로 따지면 당시 레드 제플린은 Physical Graffiti로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려가던 시기였다. 즉 주 활동 시기는 고작 5년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 셈. [105] 두 보컬 모두 넓은 음역대를 바탕으로 저음과 고음에서 탄탄한 보컬을 보여준 것은 맞다. 그러나 로버트 플랜트는 주로 3옥타브 초중반대의 고음역대에서 허스키하면서도 중성적인 미성 샤우팅을 구사하는 하이 테너의 대명사로 꼽히는 반면, 프레디 머큐리는 주로 2옥타브 중후반대의 중고음에서 폭발적인 두꺼운 미성을 구사하는 로우 테너 혹은 하이 바리톤에 가깝다. [106] 의외로 당시 영국 음악 씬은 굉장히 좁았기에,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뮤지션들이 알고보면 상당히 친한 사이인 경우가 많다. [107] 다만 이런 프레디에게도 절친한 음악가가 있었으니 바로 엘튼 존 로드 스튜어트. 엘튼의 콘서트에 프레디가 게스트로 참여한 적도 있다. [108] "So you're this Freddie Platinum bloke that's supposed to be bringing ballet to the masses." [109] 뜬금없이 발레 이야기를 하는건 프레디가 초기에 콘서트에서 입었던 발레의상같은 의상들을 비꼰 것이다. [110] "Ah, Mr. Ferocious, we're trying our best, dear.'' [111] 사실 프레디 머큐리도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만약 거기서 치고 받으며 싸웠다면 이기든 지든 결국 손해보는 건 잃을 게 없는 시드 비셔스가 아닌, 이미 톱스타인 프레디 머큐리쪽이다. [112] 언론들의 질문 공세에 자기는 그냥 자신일 뿐이라고 일갈했었다. [113] 메리 오스틴과의 연애가 대표적인 사례이며 80년대 중반에도 바바라 발렌틴이라는 여배우와 사귄 전적이 있다. [114] 남녀 상관없이 애인 관계가 복잡했던만큼 바람 핀 애인들도 많다. 프레디 동성애인 중 한명인 '토니 바스틴'이 프레디가 미국투어를 하고 있을때 바람피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그를 미국으로 오라며 비행기표를 보냈고 도착해서 프레디를 만나자마자 헤어지자고 한뒤 바로 영국으로 돌려보냈다. [115] 메리 오스틴 역시 나중에 결혼을 했지만 이혼을 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프레디는 그 아들들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116] 국내에 정식 출판되지는 않았다. 인터넷에 비공식적으로 번역된 평전이 있으니 흥미가 있는 사람은 읽어보는 것도 좋다. [117] 짐 허튼은 아일랜드계이다. 아일랜드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는 9명이다. [118] 쫓겨났지만 자신보다 메리를 더 믿은 프레디나 메리를 그다지 원망하지 않았고 상속받은 50만 달러로 아일랜드로 돌아가 편히 살다가 사망했다. [119] 메리는 프레디 전재산의 절반과 모든 저작권, 집 등을 상속받았다. [120] 로저 테일러가 책에 대해서 '짐 허튼을 잘 알고 출판계가 어떤 곳인지 알기에 이 책을 반대하진 않지만, 프레디라면 이런 책의 출판을 반대했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121] 공식적으로 로저가 179cm, 존이 180cm, 브라이언이 188cm다. 그러나 사진만 보면 로저나 디콘과 비슷하거나 커 보이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122] 아직 수염을 기르지 않았을 때 동료 뮤지션이 프레디의 이를 보고 드라큘라 같다고 농담삼아 말했는데 프레디가 정색하면서 욕을 해서 주변 분위기가 싸해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123] 프레디는 뻐드렁니가 심했다. 특히 어린 시절 사진은 튀어나온 앞니만 보일 정도이다. 치의학적으로는 상악이 과다 발달한 2급 부정교합에 해당한다. 거기에다 아랫니들의 치열은 덧니가 울퉁불퉁하게 나있기도 했다. 그러나 프레디는 치아 교정을 권유하는 지인들에게 혹시라도 발성에 지장이 있을까봐 교정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124] 정확히는 1987년 The great pretender 커버 당시 밀었는데 위선자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밀었다 한다. [125] 첫 번째 솔로 앨범도 자신의 고양이와 전 세계의 애묘인에게 바쳐졌다. [126] 이곳에는 퀸의 옛 녹음 스튜디오이자 퀸 박물관이 있다. 퀸의 매니저 짐 비치(Jim Beach)가 여기에 거주하고 있다. 카지노 안에 위치해있기때문에 처음 방문하는 경우 입구를 찾기 어려운 편이다. [127] 딥 퍼플의 명곡 Smoke on the water에 나오는 그 장소가 맞다. 딥퍼플 보컬 이언 길런은 영어식으로 몬트럭스라고 발음한다. [128] 위에서 세번째 사진 속 모습. [129] 다만 브라이언 메이는 이 동상에 대해 탐탁치 않아했다고 한다. 프레디는 단순히 기념동상 하나로 끝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었다. [130] 다만 평소에 원음으로 부르던 No time for losers cause we are the champions파트는 낮춰불렀다. [131] Crazy 투어때부터 Hot Space 투어 중반까지 전성기였다. [132] 로저 테일러는 중년이 넘어갈 때까지도 괜찮은 목상태를 유지했고, 선천적으로 높은 성부에 창법 상의 이점이 더해져 고음에서는 불안한 느낌이 거의 없었다. 물론 목소리의 전체적인 완성도나 파워는 프레디에 비하면 다소 부족하지만. [133] 1984년의 남아프리카 투어 당시 녹음되어 전해지고 있는 유일한 공연인 Sun City 에서의 공연은 몹시 유려한 가창을 들려준다. [134] 공연마다 20곡을 넘게 연주했고 그나마 쉰다해도 이동하고 2~4일만에 공연을 다시진행해 때마다 2시간이 넘는 공연을 진행했다. [135] 투어 중반을 넘어가면서 피로도가 극에 달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이지, 에이즈나 질병의 조짐이 보였다 판단할 만큼 극단적인 건강상태는 아니었다. [136] 이때의 보헤미안 랩소디 라이브는 컨디션에 비하면 정말 잘 부른 편. 사실 흉성의 완성도와 활용도가 높아진 매직 투어의 프레디는 이 곡과 Tear It Up 등을 이전 투어에서보다 수월하게 소화해낸 경우가 많다. [137] 이게 어떻게 보면 참 웃긴 이야기다. 둘 다 같은 성소수자이면서도 롭 핼포드는 자신은 마초형 성소수자라서 나름 가죽옷을 걸치면서 터프한 이미지를 연출한 반면 프레디는 발레복 등 여성형으로 화려하게 꾸몄던 것을 조롱했던 것이다. 후반부에선 프레디 역시 가죽옷을 걸쳤을 뿐만 아니라 콧수염 기르고 무대에서 수시로 웃통을 벗으면서 마초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138] 롭 핼포드는 프레디를 조롱한 것과는 별개로 퀸의 음악성이나 프레디의 역량은 인정했다. 퀸의 공연을 처음 본 날을 회상하면서 엄청났다고 말하거나, "내가 아이팟에 전곡(全曲)을 넣어 다니는 아티스트는 주다스 프리스트 뿐이다."라는 말도 남겼다는 일화가 있다. 참조 [139] 기모노를 꽤 좋아하는지 이후 76년 9월 Summer Gigs 공연들과 77년 북미 Races 투어에서도 입었다. [140] 그렇다고 레오타드를 그만 입은 것은 아니었다. 1978년 영국 공연, 북미 재즈 투어 일부 공연, 1979년 일본 공연이나 몇몇 크레이지 투어 공연에서도 공연 후반에 반짝이 레오타드를 입었다. [141] 빨강과 검정을 번갈아 가며 입었다. [142] 12월 4일 뉴캐슬 공연 때는 흰색이었다. [143] 바지가 빨강일 때는 파랑, 검정일때는 빨강 무릎 보호대를 찼었다 다만 리버풀 12월 7일 공연에서는 리버풀과 에버튼 축구팬들을 위해 두색의 무릎 보호대를 각각 두 개 다 찼다. [144] 가끔 맨발 핫팬츠도 입었었는데 영상으로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연 후반부와 81 몬트리올 공연 후반부에서 볼 수있다. [145] 나시티의 디자인이나 백바지는 플래시 고든 투어에서 입던 것들과 다르긴 하다. [146] 주로 노란 재킷이었으나 완전 하얀색이거나 흰색과 빨간색이 섞인 경우도 있었다. [147] 노란줄이거나 하얀줄인 경우도 있다. [148] 공식 석상에서는 로우탑도 많이 신기는 했는데, 오니츠카타이거나 아디다스 삼바 등을 주로 신었다. 그러나 공연에서는 대부분 하이탑을 신었다. [149] 공연에서 신었던 레슬링화는 나이키 블레이저 미드 '77과 디자인이 비슷했다. [150] 다만 1985년 호주는 예외였다. [151] 참고로 스포츠에서도 이 영화의 흥행으로 프레디 머큐리 패러디가 등장했다. KBL 올스타전에서 전태풍이 콧수염에 민소매를 입고 등장해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V-리그 올스타전에서도 팬 최다 득표자 서재덕 역시 덕큐리라는 별명으로 출전, 민소매를 입고 마이크까지 들고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리고 서재덕은 2021-22시즌 올스타전에서도 돌아온 덕큐리라는 별명으로 출전해 2018-19시즌 올스타전을 재현했고, 카일 러셀 역시 특유의 콧수염으로 인해 해당시즌 올스타전에서 러큐리라는 별명으로 출전, 서재덕과의 배틀을 펼쳤다. [152] 1980년 12월 9일 런던 공연부터 12월 18일 뮌헨 공연까지만 불렀는데, 1980년 12월 8일 마크 채프먼의 총격으로 세상을 떠난 존 레논을 추모하기 위함인 듯하다. [153] 자고로 퀸과 프레디 머큐리가 다시 화제가 된 것은 1년 전인 2018년 말 보헤미안 랩소디의 개봉 이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