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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08:52:13

김종서(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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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나위 활동 중 군에 입대, 군 복무 중 사고로 사망했다. [2] AC/DC의 브라이언 존슨 스타일의 보컬리스트로, 헤비메탈에 최적화된 보컬이었다고 한다. [3] A.F.A.의 리더이며 2013 ~ 2015년까지 시나위 10집 미러뷰 앨범의 작사에 참여 했고 투어기타를 맡았다. [4] 달파란 [5] 신대철과 자유에서도 활동했다. 간경화로 사망. [6] 칵스의 보컬 & 기타 [7] 칵스의 멤버이며 2012 ~ 2014년까지 키보드 세션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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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6ACF><colcolor=#fff> 부활 초대 보컬리스트
김종서
金鍾書, 金钟书 | Kim Jong Sheo, Gim Jongseo
파일:김종서 윈윈프로필.jpg
출생 1965년 2월 23일 ([age(1965-02-2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김해 김씨 (金海 金氏)
신체 166cm[1], 58kg, AB형
가족 7남 2녀 중 여섯째
배우자 구정옥(1968년생, 1991년 결혼)
딸 김민주(1992년생), 아들(1999년생)
학력 서울아현초등학교 (졸업)
동도중학교 (졸업)
한성고등학교 (졸업)
대유공업전문대학 (기계학과)
종교 무종교
병역 전시근로역[2]
데뷔 1987년 시나위 2집 ' Down and Up'
소속사 윈원엔터테인먼트
사이트 파일:다음 카페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싸이월드 아이콘.svg [3]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4]

1. 개요2. 활동
2.1. 밴드 활동
2.1.1. 시나위 1기2.1.2. 파고다 레전드의 시작, 부활2.1.3. 시나위 2기2.1.4. 카리스마2.1.5. 시나위 3기
3. 솔로 활동
3.1. 성악과 함께한 노래
4. 평가5. 음반6. 방송 활동7. 가족 관계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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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5528EB46-7806-4055-AFB0-AEF1F8E5CAA0.gif

대한민국의 가수.

2. 활동

2.1. 밴드 활동

2.1.1. 시나위 1기

학창 시절부터 하드록, 헤비메탈을 무지 좋아하고 아름다운 미성의 목소리를 가진 소년으로 유명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첫 밴드 생활을 당시 커버밴드로 명성이 높던 시나위에서 했다.

본인이 배기성, 이세준과 함께 진행하는 팟캐스트 라디오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고교 졸업 후[5] 밴드 활동을 하고 싶어하던 김종서는 시나위 드러머였던 친구의 소개로 시나위에 들어가[6] 첫 밴드 생활을 했는데, 그 동안 혼자 집에서 연습하던 아마추어였던 본인과 이미 프로 수준이었던 시나위 멤버들과의 실력 차이가 상당히 컸다고 한다. 결국 첫 라이브 때 자기는 도취되어서 열심히 불렀는데 알고 보니 박자도 안맞고 모니터링이 하나도 안 되고 있어서 신대철에 의해 해고되었다고 한다.[7] 그 충격으로 시나위에 재합류하는 1년 동안은 잘 때도 음악을 들으면서 자며 낮에는 산이나 마포대교 아래에서 발성 연습을 하면서 절치부심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목에서 피비린내가 날 정도였다고.[8]

신대철의 증언과 엇갈리긴 해도 첫 공연 이후 다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밴드를 본인 위주로 장악하고 싶어했던 신대철과 연장자 보컬인 김종서와의 다툼은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발생해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2.1.2. 파고다 레전드의 시작, 부활

해고된 후에 김종서는 피가 나도록 연습을 했고, 결국 당시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대유공전 스쿨밴드 '로거스', '검은진주'라는 밴드를 하며 종로 파고다 연극관, 이태원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사실상 김종서의 데뷔시기는 이즈음으로 1984년에서 1985년으로 보는 게 맞으나 본인 스스로 시나위 2집을 메이저 데뷔 시기로 잡았기 때문에 1987년으로 알려져있다.

이에 탄력을 받아 1980년대 초중반, 서울 파고다 중심의 록 뮤지션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결국 언더그라운드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가지 않아서 그는 이 계통에서 가장 유명한 보컬리스트가 되었다. 언더그라운드 시절의 그는 워낙 전설적이어서, 당시 그 씬에서 김종서보다 유명한 보컬리스트가 없었을 정도였고, 그를 선망해 록 보컬을 꿈꾸던 이도 많았다고 한다.[9] 그때 당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가 바로 김태원. 김태원은 김종서가 레드 제플린의 ' Black Dog'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면서[10] "한국에도 이런 보컬이 있구나" 하며 바로 자신의 밴드 보컬 자리를 제의했고 그 밴드가 바로 현재의 부활의 전신인 'The End(디 엔드)'다. 그 당시 김종서는 앨범도 안 낸 밴드가 매니저까지 두고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는데, 디 엔드는 이미 강북에서 속칭 가장 잘 나가는 인디밴드[11]였고 강남의 시나위에 대적할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김종서와 디 엔드가 통합하며 1985년 부활이 결성되었다. 김태원이 훗날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서 말하길 당시 김종서가 스카웃을 받아들이는 조건이 '검은진주, 디 엔드 둘 다 아닌 새 팀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검은진주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탈퇴/이적이 아닌 새 그룹의 결성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싶었던 듯 하다. 이로서 김종서는 대한민국 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밴드인 시나위와 부활의 (초대) 보컬을 모두 맡게 된다.[12] 부활은 자작앨범을 내기도 전인 카피밴드인데도 파고다 연극관 전석매진을 달성하는 등 소위 대박을 터트려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이 당시 부활의 무대는 김종서를 제외한 이태윤, 김태원 등 나머지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보컬을 맡는 약간 심심한 1부, 그리고 김종서가 보컬로 짜잔 등장하여 레드 제플린 레퍼토리로 임팩트를 주는 2부의 특이한 구성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이때 팬 겸 스탭 겸으로 구경하던 사람들이 이승철, 신해철 등이었다.

하지만 김종서는 정규앨범을 내기 바로 직전 부활에서 매니저와의 불화로 탈퇴했다. 결국 시나위와 부활 두 밴드가 모두 다른 보컬로 1집 앨범을 발매한 것에 대해 김종서는 굉장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불행의 아이콘이라고 볼 수 있는데, 김종서는 임재범이나 이승철에 비해 당시까진 분명 더 유명한 헤비 록의 기대주였고, 사실상 부활의 경우는 기반을 다 닦아놓고 이미 성공이 확정되어있는 앨범 출시 준비를 하는 와중에[13] 베이시스트 이태윤과 보컬 김종서의 탈퇴로 이승철로 보컬이 교체된 것이었다. 물론 이때도 김종서는 매니저와의 불화나[14] 음악적 견해차 때문에 떠난거지 멤버들과 큰 불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태원과도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2.1.3. 시나위 2기

부활 탈퇴 후 김종서는 여러 밴드를 거치게 된다. 이근형, 강기영( 달파란), 이호규와 파고다의 슈퍼밴드 ' 작은하늘'[15]을 결성해서 활동했고, 이 시기에 이미 자신의 이름을 딴 '김종서 밴드'로 활동했다.

당시 다른 헤비메탈 밴드들의 보컬리스트는 가요에 샤우팅을 첨가한 충분히 관객이 예상할 수 있었던 (당시의 이승환, 이승철 같은) 보컬들 아니면 임재범 같은 중저음(?) 보컬들이었다. 김종서와 같은 하이톤 보컬이 없지는 않았지만 음색과 음역대 면에서 비교 될만한 수준의 보컬은 보이지 않았다. 김종서의 음색은 레드 제플린 로버트 플랜트, 러시 게디 리, 그리고 머틀리 크루 빈스 닐을 연상시켰다.[16] 음색 자체는 게디 리와 가장 유사하지만 창법(기교)에 있어서는 로버트 플랜트를 많이 의식하고 연습하여 그와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며 보컬 사운드의 칼칼함이나 가벼운 느낌(이건 프로듀싱의 문제지만)은 빈스 닐을 닮았다. 거기에 비음에 의해 특유의 '소년' 같은 목소리[17]가 되어 서구권 보컬에게서도 잘 없는 특이한 스타일의 락 보컬이 된 것.
시나위 - 새가 되어가리 [1987]

어쨌든, 결국 신대철이 다시 불러 시나위 2집 앨범 녹음에 참여했고 드디어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첫 앨범을 내게 되었다. 시나위에서의 첫 앨범[18]인 2집 새가 되어가리 는 상당히 호응이 좋았고 현재까지도 한국 헤비메탈의 기념비 적인 작품으로 여겨졌다. 사실상 완성도 면에서는 김종서가 활동했던 2집이나 4집이 더 뛰어나다는 평이 당대에 다수였으나 이후에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앨범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에다가 10년도 전후에 임재범의 성공적인 재기와 맞물려 1집이 시나위 전체 커리어를 대표해서 올라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당시 시나위 라인업은 4집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라인업으로 평가 받을 뿐만 아니라 카리스마 앨범과 더불어 한국 헤비메탈 음반의 최고 명반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김종서는 새가 되어가리뿐만 아니라 빈 하늘, "시나위" 와 같은 곡에서 무시무시한 초고음대역을 보여주었으며 다만 라이브 때는 너무 고음역대다 보니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준 적도 있다. 그 뒤 신중현 Remake라는 2.5집까지 참여 후 신대철과의 갈등으로 탈퇴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대급 명반이 탄생했다. 신중현의 한국적 락 멜로디에 김종서의 샤우팅 창법, 신대철의 연주가 만나 기묘한 합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앨범은 소속사와의 계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조한 앨범이었기 때문에 앨범의 존재가 잘 알려져있지 않다.

2.1.4. 카리스마

시나위 탈퇴 후, 백두산을 그만두고 매니지먼트 사장으로 변신한 유현상이 기획하고 있던 ' 카리스마'라는 밴드에 합류했다.

카리스마는 유현상이 락계의 슈퍼밴드[19]를 키워볼 생각으로 김종서와 이근형[20]을 불러모아 만든 밴드였다. 때문에 당대 헤비메탈씬에서도 톱 클래스의 연주가 뽑혔다고 소문이 자자했으며, 보컬 김종서는 그 실력이 정점에 오르기 시작해, 'Warning' 이란 곡에선 강력한 성량을 뿜어내며 최고음 3옥타브 라를 찍는가하면 '빛 바랜 옛 사진속'에서라는 곡에선 저음과 초고음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완벽히 소화해내는등 무지막지한 실력을 뽑냈다.[21]

하지만 1980년대 잠깐 불타오르던 락의 불씨는 꺼져가고 있었고, 특히나 록의 불모지로 여겨지는 대한민국에서 밴드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결국 공연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같은 소속사의 당시 최고 인기 여가수였던 이지연의 백밴드 대우를 받기도 하는 등의 굴욕을 겪으면서 팀은 해체되었다. 어느 정도로 나쁜 대우를 받았는가 하면, 해체 후엔 지급받았던 악기도 소속사로 다시 반납하라고 지시했다고. 김종서와 카리스마 멤버들은 이때의 기억 때문에 유현상을 상당히 증오했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는 모두 응어리가 풀어졌다고 한다.

파일:external/img.maniadb.com/123696_b_2.jpg

이 앨범은 나중 김종서가 솔로 데뷔후 김종서의 폭발적인 인기를 틈타 '김종서 IN 카리스마'라는 앨범으로 재발매되었다.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실 이 앨범과 카리스마는 오히려 김종서가 1집으로 대형가수가 된 이후 그 이름값에 기대려는 상술로 인해 주목을 받은 편이다.

2.1.5. 시나위 3기

카리스마가 해체 될 시점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메탈 옴니버스 프로젝트중 하나인 ROCK IN KOREA 앨범에 보컬로 참여한다. 이후 또 다시 신대철의 연락을 받고 시나위 4집 앨범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때 당시까지 김종서의 팬이자 그의 커리어를 동경해왔던 서태지와 만나게 되었다.

이 앨범부터 김종서는 고음을 조금 절제하는 대신 이전보다 훨씬 뛰어난 강약조절과 깔끔한 음정 처리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4집 앨범은 2집에 비해 급락한 판매량을 보여 당시엔 실패한 앨범이라는 이야기가 많았으나 완성도로만 보자면 2집못지 않은 완성도를 보여주고있다. 때문에 시나위 역대 최고 앨범으로 치면 일반적으로 상징적인 1집을 제외하고 2집 또는 4집을 언급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Farewell to Love, Set My Fire, 김종서 솔로 2집에 수록된 겨울비 원곡이 수록되어 있다. 겨울비엔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에 김종서가 적어놓은 멜로디를 우연히 신대철이 보고 "괜찮네?? 같이해보자"라는 말을하고 직접 작사해서 4집에 수록했다는 것이다.

파일:external/www.chahongardor.com/1161.jpg
시나위 4집 시절[22]

하지만 이내 신대철과의 갈등으로 시나위를 세번째로 탈퇴하게 되는데, 갈등의 가장 큰 문제는 대중성 있는 곡을 하고 싶어했던 김종서와,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연장선에 남고 싶어하는 신대철의 음악적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또한 신대철은 밴드 내에서 강한 장악력을 보이고 있고, 이에 연장자이기도 한 김종서와의 갈등이 커졌으며, 4집 때 들어온 어린 베이시스트인 서태지가 김종서의 편을 들었는데 신대철 본인은 서태지를 짜를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이러한 인간적인 갈등 역시 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서태지와 김종서는 동반 탈퇴하게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적으로 시나위 역시 매맞는 아이 이후 희망가 등으로 대표되는 대중성 노선으로의 변화를 꾀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김종서와 신대철은 매우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고, 음악적 교류도 하고 있다. 방송에서 김종서는 항상 자신의 음악적 고향으로 시나위를 언급하고 있다.

다음은 신대철의 김종서 탈퇴에 대한 인터뷰다.
기자: 김종서 씨와는 84년에 헤어졌다가 87~90년 다시 작업했고, 또 갈라섰습니다. 굉장한 애증관계인데요.

신대철: 밖에서 보기엔 치고받고 싸웠나 보다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스무살 언저리의 애들이었으니 인내, 배려는 없고 타협을 모르잖아요. 그렇게 헤어졌다가도 ‘이번 건 그 친구가 하면 좋겠는데?’ 그러면 또 같이하고 그랬어요. 바닥이 좁으니까요.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방법은 나이 들면서 배우는 거죠.

이로써 소위말하는 대한민국의 3대 또는 4대 기타리스트와 모두 밴드를 했다는 진기록을 세웠다. (신대철, 김태원, 이근형) 이 후 연예계에서 깡통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가수 장혜진의 남편 강승호를 만나 솔로 데뷔를 준비하게 된다.

3. 솔로 활동

대답 없는 너

1992년에 솔로 가수로 전환, MBC 특종 TV연예[23]에서 솔로 데뷔곡인 대답 없는 너[24]를 불러 패널들과 방청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차트를 휩쓸었다. 이는 포크락을 제외한 락장르가 메인스트림에서 거의 최초의 기록을 세운것으로 그 뒤 후속곡인 지금은 알 수 없어가 1위 수상의 영예를 안게 해 준 뒤 자신의 음악인생 최고의 인지도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히트에 힘입어서 김종서의 솔로 데뷔 앨범은 당시 94만장, 도합 총 1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량을 기록한다.

1집의 성공에 힘입어 소속사는 그의 차량을 교체해주는 등 대중적인 성공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에 탄생한 2집은 1집을 뛰어넘는 판매량을 보여줬다. 공식 기록으로 134만장을 기록함과 동시에 김경호가 한국 락 역사상 손가락에 꼽을 만한 베스트 락 발라드라고 언급한 겨울비가 재탄생한 것이다. 원래 소속사와 김종서 본인은 그래도 이제는을 타이틀로 활동을 했었지만 1집에 비해 큰 호응을 얻지 못했으나 라디오 등 매체에서 겨울비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중간에 급하게 타이틀 곡을 교체해서 활동했다고 한다. 앨범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자 소속사는 앨범 재고가 없어 급하게 공장 4개를 가동시켜 수요에 맞춰 판매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앨범 팬매가 정지된 순간이 있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서태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앨범 수록곡의 히트는 계속 진행형이었고, 93년엔 또 정규 앨범 활동 이외에도 외도(?) 아닌 외도를 잠깐 하기도 하는데 바로 MBC에서 방영했던 애니메이션 내일의 죠(국내 방영시 제목은 '도전자 허리케인')의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었다는 것.

이후 3집에서는 악몽, 세상의 눈물 마를 때까지, 남겨진 독백이 좋은 호응을 받으나 방송 출연 제한과 방송국과의 약간의 갈등 속에서 홍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2집에 비해서는 주춤한 판매량을 보였다. 그럼에도 라디오나 입소문을 타고 전해져 앨범과 수록곡이 꽤 인기를 끌었다.

한편 호평을 받은 여균동 감독의 영화 세상 밖으로의 영화 음악을 맡기도 했다. 영화와 동명의 곡인 세상 밖으로를 불렀으며 사랑과 평화, 블랙신드롬, 터보[25] 등과 함께 앨범이 나왔다.

그러다 김종서가 꾸준히 시도해온 실험작이자 서태지와의 교류 속에서 탄생한 4집이 발매되는데 수록곡인 플라스틱 신드롬이 주목할 만하다. 임진모는 이 곡을 락 정통에 머물면서 대중성을 확보한 곡으로 김종서의 헤비메탈로 단련된 보컬이 어우러져서 탄생한 곡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 늦지 않았어, 다시 난 사는거야, 서태지와 함께했던 Free Style이 수록되어 많은 사랑을 받으며 당시에 83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Free Style은 서태지와의 친분으로 서태지와 김종서가 공동 작사, 공동작곡을 해서 김종서 4집 서태지와 아이들 4집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지금도 서태지가 Free Style 라이브를 할 때는 종종 게스트로 나온다. 이 외에도 ' Rock’n Roll Dance'의 헤비믹스 버전에 나오는 ‘락엔롤~ 락엔롤 댄~~스~’와 ' 환상 속의 그대'[26]와 ' 하여가'[27]에서 들을 수 있는 특유의 고음 백보컬이 바로 김종서의 목소리. '93 내일은 늦으리에서는 '상실'이라는 곡을 같이 부르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마지막 히피인 블루스의 전설 한대수의 마지막 꿈이라는 곡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이 4집을 통해 꽤 오래간만에 락 장르가 대중들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서태지와의 빅쇼가 성사되어 KBS에 방영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95년 대한민국 락커 역사상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다만 이 시기 목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발매된 실황 앨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김종서 본인은 4집에 이어 5집에서는 좀더 실험적인 곡을 선보이길 원했고 서태지와의 교류 속에서 힙합락을 선보이려고 했다. 이에 탄생한 곡이 바로 추락천사였다. 그러나 대중들의 관심은 이 곡 보다는 영원과 아름다운 구속에 반응을 보였고 또 다시 급하게 활동곡을 교체해 활동하게 된다. 아름다운 구속은 TV 방송 차트 1위를 차지하지는 못했으나, 인기는 엄청났고 스테디셀러로서 김종서를 대표하는 곡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시기부터 김종서의 목 상태에 무리가 보다 더 도드라져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방송에 출연해 한 곡을 소화하는데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으나 목소리에 힘이 과거보다 많이 빠져보였고 더욱 불안한 목상태를 자주 보였다.
김종서 - 아름다운 구속 [1997]

1996년-97년 아름다운 구속의 성공에도 김종서는 휴식기 없이 곧바로 1998년 6집을 발매한다. 이 앨범에 타이틀은 당시 유행하던 락 발라드에 맞춰 작곡한 에필로그였다. 에필로그는 락 발라드 팬들을 비롯한 마니아 층에 호응을 얻는데는 성공했으나, 아름다운 구속에 이어 대중적 관심을 충족시키기에는 실패했다. 심지어 앨범 커버도 구매 욕구를 이끌어내기엔 무리수였다.

1999년 김종서는 7집을 선보이며 플라스틱 신드롬에서 시도했던 실험을 이전보다 좀 더 강하게 시도했다. 브라스 세션과 함께한 빠른 템포의 스카 펑크 장르인 실연을 선보였다. 스카 자체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너무 낮았던 탓에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뮤직비디오에서 코믹한 컨셉을 잡는 바람에 일각에서는 코믹송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신비주의 락커의 무리수라는 부정적 평가와 역시 새로운 실험이라는 평가가 엇갈렸다. 심지어 김종서는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부분적으로 이 노래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사실상 이 6~7집 시기부터 김종서의 커리어는 정점에서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001년 8집 Odyssey가 평단의 호평과 기대 속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의 Starry Night은 팬들과 마니아층이 선호하는 곡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절대사랑이 당시 대중적으로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일본 그룹으로서 한국대중들에게도 많은 팬층을 보유했던 '안전지대'의 'Friend'와 유사하여 표절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시기부터 방송 출연을 자주하기 시작했으나 아직까진 개그적인 컨셉을 보이지는 않고 뭔가 독특한 매력의 뮤지션 정도로 자주 비춰졌다.

김종서는 8집의 예상 밖 부진에 2005년까지의 4년 동안 음악적 방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40대에 접어든 나이도 나이지만 나이에 따라 떨어진 보컬 능력에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슬슬 MP3로 인해 본격적인 실물 음반의 부진이 시작된 시기였다. 김종서는 더 이상 자신이 설 무대가 없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다는 인터뷰를 자주하고는 했다. 이미 김종서 본인의 커리어는 80-90년대를 점령했던 락계의 전설이었지만 본인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음악적 욕구에 따라 이미 만들었던 40여곡을 폐기 처분하고 다시 앨범을 새롭게 제작해 9집을 발매했다.

그러나 김종서에게는 충격적이게도 9집의 부진은 8집보다 훨씬 더 심했다. 사실 8집만 해도 일반적인 가수라면 만족할 만한 성적이었다. 절대사랑이나 Starry night이 라디오에서 꽤 많이 들렸고 가요프로그램에서도 10위권, 20위권 안으로 들어가 한동안 유지하다가 상당히 천천히 떨어지는 등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즉 당시 이 노래는 인지도도 적당히 있고 노래는 좋지만 팬덤이 안 따라주는 노래였으며 동시기 1위는 GOD가 쓸어가고 있었다. 음악 시장 역시 실물 음반에서 점차 음원으로 전환되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이런 것들이 김종서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던 모양인데, 이 4년의 공백기가 김종서의 존재감을 더욱 흔들었다. 특히 이 앨범의 수록곡 중 은 멜로디의 전환이나 전개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곡이었지만, 가사 측면이나 당시 유행하던 발라드 풍의 곡으로 어느정도 성적을 기대해볼만 했지만, 결과는 충격적인 흥행부진이었다. 4년이나 방황하던 김종서는 80-90년대 락 장르에서의 정상의 위치에 있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린 세대를 보며, 심지어 본인 보고 김종서 닮았다고 하는 등의 인지도를 겪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부진은 90년대 가수들이 모두 겪었던 시기다. 아이돌 시장으로 빠르게 전환하면서 기존에 아티스트를 지향하던 90년대 스타들의 슬럼프가 공통적으로 찾아왔다.

3.1. 성악과 함께한 노래

김경호나 박완규 등과 유사하게 80년대 초중반 언더시기부터 시나위 카리스마 시절 김종서는 무리한 고음을 여러차례 소화하였고 이미 그 당시부터 성대결절의 증상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평도 존재한다. 솔로로 전향하면서 상대적으로 힘을 뺀 곡들을 소화 했지만 여전히 일반 가수들이 소화하기엔 고음곡들이 다수였고 이 때문에 특히 95년 전후부터는 목상태가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그래서 90년대 중후반부터는 시나위 곡을 소화하기 힘겨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고 2000년대 초반에는 심지어 자신의 솔로곡들도 소화하기 힘들어했다. 이에 다른 락커들처럼 호흡 조절 및 발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한 동안 침체기에 있다는 평을 들었다. 특히 라이브에서 심각한 불안감을 노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충격적이게도 그동안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저 타고난 목소리를 독학으로 익혔기에 목에 무리가 가는 발성을 지속해 왔던 것이다. 그는 이후 지속적으로 성악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게 된다. # 성악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성량이 풍성해지고 저-중-고음 처리가 능숙해지며 '역시 김종서' 라는 반응을 다시 회복했다. 싱데렐라에서 체리필터 낭만고양이를 원키로 소화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언급하기로는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 했기 때문에 라이브의 기복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심해졌고, 결국 벽에 부딪쳐 한동안 음악을 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우연히 성악인들이 노래를 하던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스토킹 수준으로 그들을 쫓아다니면서 발성법을 체득했다. 과거만큼 시원하고 뻗는 음색은 찾기 힘들지만, 대신 안정적이고 원숙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08년에는 드라마 행복합니다에 출연하였다. 연기력에 대한 평가는 어색하다는 반응도 일부 있으나 대체로 본인의 실제 직업인 가수를 그대로 극중에서 연기한데다 캐릭터 성격까지 실제와 비슷한 덕에 연기력 평가는 제법 좋다. 이 드라마에서 <아버지>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하는데, 드라마 밖에서도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 듣기

여러 OST 등을 커버한 영상을 유튜브를 활용해서 올리고 있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새가 되어가리는 평이 좋다.

김태원 박완규 등과 뭉쳐 부활 콘서트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0대 보컬 김동명이 합류한 이후 콘서트에 출연했던 보컬들은 정동하, 박완규, 이성욱, 정단, 그리고 김재기의 동생 김재희. 사실상 음악을 접은 6집의 김기연 이승철을 빼면 전부 출연한 셈. 부활 멤버들은 언젠가 그 모든 보컬들이 다 모여서 노래를 해보고 싶다고 한다.

2023년 1월 27일 뮤직뱅크에 출연하여 7년만에 신곡 'In my life'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SBS 인기가요에도 출연하여 신곡을 불렀다.


2023년 1월 31일에는 딩고 킬링보이스에 출연하였다.[28] 무려 전곡을 원키로 부르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4. 평가

김종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가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실력이나 명성으로도 1980-90년대 한국 락계에서 대표적인 보컬 중 한명이었고, 92년 솔로 활동 시작 이후 1990년대 중후반까진 대중적인 인기 면에서도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 국내 락발라드씬에 많은 영향을 줬다. 파고다 언더그라운드 출신의 록 보컬 리스트로서 거의 유일하게 장르 안에 머무르면서 성공했기 때문. 솔로 시절 락발라드곡으로 차트 1위를 여러 번 만들어내며 항상 대표적인 락커 중 한 명으로의 무게감이 있었다. 90년대 초중반 한국에서의 록의 기준이나 표준은 김종서, 댄스락 또는 틴락으로 대표되는 서태지 등이 이끌어나가고 있었다.[29]

락 발라드 장르에서 김종서의 공헌은 절대적이었다. '대답 없는 너',[30] '지금은 알 수 없어', '겨울비' 이 3곡이 연속적으로 히트하며 사실상 이후 등장하는 김경호 박완규[31], 김정민, 김민종 등 많은 락발라더들이 이 커리어를 모방했다. 게다가 그 후에도 '다시 난 사는 거야', '에필로그', '영원', '절대사랑'처럼 1990년대 중후반까지 발표된 곡들이 좋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무대에서 장발을 휘날리며 멋있게 노래하는 모습은 당대 패션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줬다.

이 시기 날카로운 고음, 장발, 락발라드 이미지가 겹쳤던 김경호와 라이벌 플래그가 세워지기도 했다.[32] 대중적으로 커다란 인기를 끌었던 락발라드 장르의 가수가 얼마 없는데 그 중에서 김종서와 김경호는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비교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일단 성도 같은 김씨기도 하고 하지만 김경호가 뜨기 시작했을 땐 김종서는 이미 전성기가 꺾이면서 록발라드를 벗어나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던 시기였다. 창법도 날카로운 샤우팅에서 이미 많이 상해버린 보컬로 절제된 느낌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음색 역시 김경호는 날카롭고 꽂히는 고음을 선사하는 김종서에 비해 좀 더 화려하고 어떻게 보면 과장되게 극적으로 구사하는 편이다.[33] 스트레이트 장발[34]이나 신비주의 컨셉도 그렇고 김경호는 김종서에게 상당히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세대차이부터 당시 추구하던 음악이나 창법의 차이까지 해서 서로가 라이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김종서가 구축한 락 장르의 대중화를 김경호 등의 가수가 이어받아 풍부하게 했다고 보는 게 바람직하다.

창법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1980년대 초고음을 난사하며 헤비메탈의 샤우팅 창법이 주를 이뤘던 것과 달리 1990년대는 1980년대 이후 다소 상한 목으로 절제되면서도 여전히 시원시원한 느낌으로 활동했다. '플라스틱 신드롬' 같은 곡이 김종서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발라드 곡에서도 김종서 특유의 시원한 느낌이 있었다. 자신의 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시나위와 함께 공연을 했으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자신의 뿌리를 지켜나가기 위해 애썼다.

최정상급의 실력을 지닌 굴지의 보컬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유독 저평가되는 뮤지션 중 하난데, 보컬 능력이 최정점이던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지상파 방송보다는 주로 언더에서 활동했었기 때문이다. 인기 면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1992년부터는 솔로로 전향해 인지도를 쌓았으나 이미 나이로는 28이었고 보컬기량도 1980년대에 비해 비교적 떨어진 상태였다.[35] 그 시기에 실제로 목에 문제가 있어 의사가 1995년 겨울부터는 노래부르지 말고 쉴 것을 강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속사와 김종서 본인은 스케줄을 강행했고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라이브에서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다. 이후 김종서 본인의 목상태가 1990년대 중후반부터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이다 00년대에 들어서 눈에 뜨일 정도로 성량도 떨어지고 비음이 강해지고 음정도 불안해진다.

또한 김종서의 전성기 시절 음색과 창법이 한국보다는 북미의 헤비메탈 팬들이 좋아할법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36], 스콜피온즈 클라우스 마이네처럼 고음 발라드 넘버에 잘 어울리는 서정적인 미성 보컬을 선호하는 한국 대중들의 취향과 맞지 않은 부분도 크다.

5.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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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방송 활동

방송 출연의 양과 빈도에 있어 서태지와 아이들과 시기와 성향이 겹치는 부분이 많다. 데뷔 앨범의 발표시기가 1992년 초반으로 같고, 그 해 최고의 스타로 온갖 매체에서 그들을 원하고 그만큼 많이 출연했던 서태지와 아이들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김종서도 TV와 라디오 출연이 많았다. 둘 다 몰래카메라에도 출연했으며 서태지와 아이들과 김종서 모두 2집이 나온 1993년부터 TV와 라디오 출연이 많이 줄었다. 전자는 대형 콘서트 준비와 일본 진출 시도가 겹친 것이 큰 이유였지만, 김종서는 1993년에 갑자기 강화된 장발가수의 출연 규제가 원인이 되어 타의 때문에 방송 출연이 막혔다고 보는 것이 맞다.

1993년~1995년에 공중파 방송국들은 가수들의 장발, 염색, 피어싱(귀걸이)에 대해서 사회질서와 청소년 교육을 이유로 전보다 강한 규제를 벌였고, 김종서는 그 중 장발 연예인의 대명사로 여겨지며 TV출연이 막혀버리다시피 했다. 실제로 가요순위프로는 기본에, 예능에서 이 시기에 TV로 김종서를 보고 노래를 듣기는 거의 불가능했고, 연말 가요대상에도 나오지 못했다. 내일은 늦으리 2회와 3회의 공중파 방송(모두 MBC)에서도 이는 문제가 되어서, 녹화 방송한 2회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김종서의 합동 무대는 아예 자르고, 마지막 합창 부분에선 김종서 독창 부분마다 다른 공연 영상을 삽입해 그의 출연을 막았다. 3회는 당시 음반 판매량 1위를 이유로 김건모 측이 피날레를 요구하자, 서태지와 아이들과 김종서는 김건모 피날레-주제가 합창 뒤에 진짜 피날레무대를 가지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MBC는 생중계하면서 주제가 합창에서 방송을 끝내 역시 김종서의 TV출연은 없었다.

TV 출연은 막혔지만, 음반은 상관 없이 잘 나갔고 공연도 많이 하고 관객도 변함 없이 많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매체 출연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 싶다. 이후 규제가 약해진 이후에도 흔히 얘기하는 '신비주의'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다 9집 실패 이후 자신만의 락을 할 수 있는 무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현실 인식에 따라 2007년 즈음부터 개그 컨셉을 바탕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신비주의 록커 컨셉을 버리고 다가가기 쉬운 대중적 연예인 컨셉을 택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많았으나 본인은 그런 비판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이런 식의 방법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인터뷰했다.[37]

록커라는 특수성을 떠나서라도 뮤지션으로서만 살아 온 그가 예능계에서 잘 해낼 수 있을지 우려되었지만, 실제 방송을 타 보니 의외로 성격이 매우 유쾌하고 입담도 괜찮아서 예능계에서 상당히 먹히는 바람에, 여러 예능 프로에 출연하게 되면서 이 당시에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2008년에는 SBS 드라마 행복합니다에서 비중있는 조연을 맡으며 연기자로 도전해 괜찮은 연기력을 선보이긴 했으나 이후 다른 작품에 출연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단발성 출연으로 만족하는 듯하다.[38]

그러나 이러한 예능 출연이 2010년 나가수를 비롯한 많은 가수들이 예능으로 쏟아져 나오기 이전이라 너무 시기상조가 아니었나하는 견해가 있고, 장기적으로는 잦은 예능출연, 개그 컨셉이 커리어에 큰 데미지를 입힌게 아니냐는 우려스러운 주장도 다수 존재했다. 실제로 9집 이후 본업이라 할 수 있는 가수 활동이 뜸했기 때문에 마냥 부인하기만은 어려워 보인다.

2009년 이후로는 예능 출연이 다시 뜸해졌다. 스타킹 출신의 김일병이라는 별명을 가진 짹킴과 REI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2010년 말에는 연기자로써 오랜 공백(?)을 깨고 김태원의 자전적 드라마인 락 ROCK 樂에 특별출연하기도 했다. 2014년 추석 특집 나는 가수다에 출연해 김광석의 '일어나'를 선곡해 좋은 평가를 이끌어 냈다.

6.1. 불후의 명곡

2014년 2월 8일에 방송된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주현미편의 경연에 참가했다. 전설로도 섭외가 왔었는데 자신은 아직 전설로는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데다가[39], 더 뛸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수로 출연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네번째 순서로 나와 '눈물의 부르스'를 열창하여 무려 442점을 받으면서 종전 최고기록인 정동하의 439점을 경신하여 클래스를 증명했으나, 다음 가수로 나온 거미에게 단 3점 차이로 패했다.

본인도 기록 세운지 5분 만에 바로 깨졌다면서 아쉬워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주에도 출연했으며 이번에는 후아버지에게 밀리며 2주 연속 콩라인. 하지만 그 다음주인 2월 22일 정미조 편에서 '휘파람을 부세요'를 부르면서 세 번의 도전 끝에 드디어 우승을 거머쥐었고, 무대 외에도 관록있는 입담으로 대기실에서도 맹활약했다. 2014년 4월 12일, 불후의 명곡에서는 이글스 Hotel California을 선곡했다. 그 무대의 신대철 김태원의 트윈기타는 그야말로 레전드. 정말 다시는 안 나올 것만 같은 역대급 무대를 선보였다.

그 뒤 경연자가 아닌 전설로 출연했으며 2016년 2월 22일에 녹화를 한 뒤 2016년 3월 5일에 방영되었다.
부른 노래
전설 곡명 승패 점수
주현미 눈물의 부르스 1승 1패 442
박건호 무정부르스 (강승모) 1승 1패 398
정미조 휘파람을 부세요 1승 412
3.1절 특집 내 나라 내 겨래 (김민기) + 발해를 꿈꾸며 (서태지와 아이들) + 조국찬가 3승 423
내한가수 특집 Hotel California (이글즈) 1승 1패 411
3주년 특집 애모 (김수희) 1패
트로트 특집 허공 (조용필) 2승 1패 378
왕중왕전 창밖의 여자 (조용필) 1승 1패 414
조수미 Champions 1승 1패 391
기네스 특집 겟세마네 (Gethsemane) 1패
불후의 스타 7인, 서로를 노래하다 내 생애 봄날은() 2승 1패 421

6.2. 보이스킹

6.3.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1급 특수요원 - 무대모음.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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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가요 프로그램 1위

총 17회 1위
<rowcolor=#fff> 날짜 방송명 곡명 비고
1992년
9월 29일 SBS 인기가요 대답없는 너
(2회)
1위
(2주연속)
10월 6일

7. 가족 관계

90년대는 신비주의에다가 인터넷이 활발하던 시기가 아니라 그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했었지만, 2000년대부터 미디어가 발달하고 김종서 본인도 예능프로 활동을 늘리며 이목도 더 집중되는 와중에 조금씩 그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발굴되기 시작했다. 특히 밴드를 탈퇴하고 솔로로 전환하여 활동할 당시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이제껏 가족들을 공개한 적이 없다. 다만 부인과 자녀들이 일본에서 학업을 하고 있어 기러기 아빠라는 점 등이 알려진 사실이다.[40][41] 부인 구정옥은 재일교포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 혼혈 일본인으로 한국국적이었고 자녀들도 일본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대부분 보냈다 한다. 한국으로 와서 적응을 못해 일본에서 계속 생활하는게 낫겠다 싶어서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다.

여담으로 구정옥은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잠시 서태지의 스타일리스트도 맡은 적이 있다.[42] 서태지가 김종서와 친분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형수(?)인 구정옥과도 친분이 있다. 결혼식 때 서태지가 본인 소유 차량을 몰고 와 운전 기사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 일본에서의 구정옥의 출산 시기에 김종서는 공연 스케줄을 소화해 내고 있었던 때라 집에 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 때마침 일본에서 활동하던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들이 먼저 찾아가서 아이의 출산을 축하해줬다고 한다. #

8. 여담



[1] 포털 프로필은 172cm이지만, 2005년 드라마 하늘이시여에 출연할 때 박예진과 비슷한 걸 감안한 키다. 참고로 박예진은 165cm. [2] 환청과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질환으로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았다. [3] 다만 이 링크로 들어가면 싸이월드는 전혀 하지 않고, 트위터로 놀러오라는 문구가 뜬다. [4] 2019년 7월 9일 첫 영상이 업로드 되었다. [5] 김종서가 다니던 학교는 엄한 학교라 밴드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현재까지도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6] 당시에는 레드 제플린 등의 고음역대 곡들을 소화할 수 있는 보컬이 매우 드물었는데, 오디션에서 외국 하드록 음악을 너무 쉽게 소화하는 김종서의 모습을 보고 시나위 멤버들이 바로 합격 통보를 내렸다고 한다. [7] 하지만 신대철은 라디오에서 "실력 부족으로 해고됐다고 표현한 건 종서씨가 겸손하셔서 그런 거고, 그냥 다들 젊을 때니까 의견이 안 맞아서 헤어지게 된 거였어요. 그리고 나중에 뜻이 맞는 때가 오면 다시 같이 하고 그랬죠."라고 밝혔다. [8] 그들이 날 다시 부를 때까지 연습했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9] 언더그라운드 시절부터 김종서의 공연을 쫓아다니며 그를 선망했던 대표적인 보컬리스트 중 한명이 바로 박완규다. 시나위 1집부터 4집까지 모두 소장하고 있었을 정도로 김종서의 팬이라고 한다. 또한 그 당시 공연하는 김종서를 보고 락커의 꿈을 접은 게 이승환이다. [10] 여담으로 박완규도 같은 곡을 부르다 김태원에게 픽업 되었다. [11] 당시는 인디밴드라는 단어가 없었고 보통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렸다. [12] 물론 시나위는 얼마 안가 바로 잘려서 초대라고 하기도 좀 애매하긴 하다. [13] 다만 보컬 색깔 자체가 바뀐만큼 김종서로 준비하던 앨범과는 분명 방향이 달라진 것은 맞아보인다. [14] 이 불화라는 것도 보컬 김종서 보고 담배 피지 말라는 충고 등 서로간 견해차에 의한 다툼도 있었다. [15] 이근형은 나중에 김성헌을 받아 들여 작은하늘 1집 앨범을 발표. [16] 신대철은 한 인터뷰에서 ‘그 당시엔 김종서 씨처럼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 아예 없었어요’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7] 당시에는 동요 같다고 까이기도 했다고 한다. [18] 시나위 1집 당시 임재범이 탈퇴한 후 김종서가 바톤 터치하게 되었고, 김종서가 녹음한 시나위 1집이 LP판으로 있고 매우 레어한 소장품이라는 루머가 있으나 이병문이 녹음한 초판 1집이 와전된 소문인 듯 하다. [19] 당시 멤버가 보컬 김종서, 기타 이근형, 드럼 김민기(동명이인), 베이스 박현준(훗날 김영진으로 교체). [20] 밴드 작은하늘의 기타리스트였으며 당시에도 엄청난 실력의 기타리스트였으나, 이후 실용음악쪽으로 선회하여 한국 굴지의 세션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21] 보통 메탈 보컬 김종서의 최전성기를 이야기할때 이 때나 시나위 4집 때가 많이 이야기된다. [22] 좌로부터 오경환, 서태지, 김종서, 신대철 [23]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데뷔 방송이자 굴욕을 줬던 방송이다. [24] 1집 앨범 녹음이 모두 마친 다음 프로듀서인 강승호가 뭔가 부족한 느낌이라고 지적을 하자 본인도 이에 수긍하여 머릿속에 있는 멜로디를 우연히 조합하여 15분 만에 작곡한 곡이다. 그리하여 1집에 맨 마지막으로 녹음된 곡이다. [25] 댄스그룹과 같은 이름의 메탈밴드이다. [26] ‘환상 속엔~ 그대가 있다~’ 부분에서 나오는 ‘하하하아~ 부분’ [27] 예이예이예이 야이야 [28] 참고로 대부분의 곡 반주가 20주년 기념 앨범 편곡 버전을 사용하여 2007년으로 띄웠는데 일부 팬들은 그냥 원곡 발매년도 기준으로 표시해주는 게 더 좋았을 거라며 아쉬워 하기도 한다. [29] 서태지 시나위 시절 인연으로 친했기에 김종서가 서태지와 아이들 피쳐링이나 서태지의 보컬 트레이너를 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서태지의 창법엔 김종서와 비슷한 느낌이 어느정도 느껴진다. [30] 록발라드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친 일종의 모델 같은 노래기도 하다. 사실상 1990년에 발표된 겨울비 시나위 버전이 더 본래적인 록 발라드에 속하지만 히트는 대답 없는 너보다 늦게 히트했다. [31] 부활 시절만 해도 론리나잇, 마술사 등 신나는 곡 위주로 불렀고, 락발라드는 솔로 데뷔하면서 천년의 사랑처럼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32] 실제로 김경호가 남부러울 것 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당시에 듣던 말 중 제일 달콤했던 말이 김종서와 비견된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비교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으며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계신 분이다, 그런 분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스스로 건방져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며 존경심을 표했다. 사실 김종서는 대중적인 성공 이전에 이미 시나위 시절 커리어만으로도 수많은 락 지망생들에게 전설로 자리잡았다. [33] 사실 김종서 특유의 앵앵거리는 창법이 호불호가 있긴 했다. [34] 김종서 이전엔 록커들이 머리카락을 기르더라도 생머리가 아니라 퍼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김종서 본인도 커리어 초반엔 퍼머를 했었다. [35] 한 방송에 나와서 얘기하길 김종서는 부활 초기 멤버 시절에 김태원과 갈등을 빚었던 가장 큰 이유가 지각을 많이 해서였는데, 교통비도 없어서 편도 2시간 왕복 4시간 길을 걷다 뛰다 보니까 지각이 잦았고 리더인 김태원에게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루 한 끼 정도 먹는 생활이라 어쩌다 돈이 생겨도 교통비보다는 먹는 거에 더 썼고 담배는 정류장에서 장초를 획득해서 피웠다고 한다. 1980년대 초중반에 언더 생활을 시작해서 1992년에야 히트가수가 됐으니 고생을 오래 했을 것이고, 목관리를 비롯해서 건강이 좋았을 수가 없다. 해당 방송에서 가난했을 시절에 못 먹어서 피부병이 났다고 말하기도 했고. 1987년 시나위 2집으로 그나마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후에도 저런 극빈층 생활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나아졌다고 해도 썩 넉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6] 당시 김종서의 목소리는 1980년대를 풍미한 글램 메탈 밴드 머틀리 크루의 보컬 빈스 닐의 스타일과 흡사했다. 날카롭고 거칠면서 얇은 음색과 정돈되지 않은 직선적인 창법 등이 트레이드 마크다. [37] 장르는 다르지만, 공일오비 객원가수로 출발해서 솔로가수로 자기 자리를 굳힌 윤종신의 경우 초기의 가녀린 미성을 잃고 이후 IMF 사태로 돈까지 잃은 뒤 본격적인 버라이어티 예능계로 뛰어들었고 이후 한 손에 예능, 다른 손에는 노래(월간 윤종신)를 쥐고 있다. 부활 리더 김태원의 경우는 마약 후유증 등으로 인해 골골거리다가 남자의 자격 등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건강진단을 받아 건강회복에 도움을 얻기도 했고 예능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올려 부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백두산의 기타리스트 김도균 역시도 놀러와, 나 혼자 산다, 불타는 청춘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대중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38] 재밌게도 이 드라마에 평창댁이 같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서태지의 버뮤다 트라이앵글 MV에서 주연배우 선정 때 직접 평창댁을 추천한 것. (그 당시 경쟁자가 서우였다고 한다.) [39] 사실 김종서의 짬과 커리어면 당연히 전설로 나오고도 남아돈다. 그냥 겸손의 표현. [40] 사실 그 지역 재일교포나 일본 거주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다. 자세한 지역이나 정보는 생략하나, 딱히 숨기거나 한 건 아니었고 관심을 못받았다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실제로 김종서가 기러기 아빠라는걸 그동안 수차례 언급했으나, 항상 당시에만 마치 숨겨진 사생활이 밝혀진것처럼 잠깐 화제가 되고 잊혀진다. 그리고 다시 밝히고 잊혀지고의 반복이었다. 원래 김종서는 매체에서 가족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한 편인데, 가족 예능 같은 걸 한 적이 없으니 잘 알려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41] 데뷔 초 '대답없는 너'로 한참 잘나가고 있을 때 연예정보프로그램에서 첫 아이를 낳은 김종서(물론 김종서가 출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득녀의 의미다.)를 만나기 위해 공항에서 인터뷰한 적도 있다. 당연히 총각일줄 알았던 여성팬들은 방송을 보며 경악했다. 보도 내용은 충격! 김종서 알고보니 유부남!! [42] 6집 앨범 발매 후부터. 이 때의 썰을 이야기하면서 당시 서태지의 입국 사진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나왔으나 김종서는 본격적으로 앨범 활동을 하면서부터 스타일리스트를 맡은 거라고 정정해줬다. [43] 이승환과 김종서는 파고다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특히 그 시절에는 이승환도 록 밴드 활동을 했기에 미묘한 경쟁의식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이 좀 사는 편이었던 이승환은 당시 아마추어에서는 드물게도 집에 연습실과 녹음시설이 갖추어진 편이라 같이 녹음을 해본 적도 있다 한다. [44] 마그마 조하문이 3옥타브의 음역대를 소화하긴 했지만, 김종서 등 후대 헤비메탈 씬의 보컬리스트들만큼 높은 음을 내진 않았다. 로니 제임스 디오처럼 중고음의 음역대를 유지하면서 3옥타브대 초반의 고음을 조금씩 섞는 식으로 노래했지(대표곡인 해야 역시 이런 구성이다), 김종서처럼 여성의 음역대를 가진 보컬은 당시에 없었다. 디오의 경우는 rainbow in the dark같은 곡을 들어보면 알 수 있듯이 도입부부터 하이톤으로 시작해서 하이톤으로 끝나는 곡도 꽤 많다. Holy diver같은 곡도 도입부부터 굉장한 고음이고. 조하문은 분명 대한민국 음악사에서 굉장한 보컬이지만 디오와 비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45] 그의 데뷔작인 시나위 2집을 들어보면 She's Gone, 18 and life에 버금가는 음역대의 곡들로 도배되어 있다. 특히 빈 하늘은 정말 극악의 고음들로만 구성된 무시무시한 난이도의 곡이다. [46] 똑같이 로버트 플랜트를 동경했던 임재범은 그의 미성을 엄청 부러워했다고 전해진다. [47] 심지어 잘 모르는 노래인데도 즉석에서 불렀다; 이 모습은 싱데렐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48] 김종서에게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고음형 보컬들은 박완규, 김경호, 김종국, 임창정, 김지훈, 박기영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서태지, 유승준, 이승환, 이승철, 신해철 등이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49] 이때 1라운드에서 김경호가 4번은 절대 김종서가 아닐 거라고 말했는데 4번에서 김종서가 나오자 김경호가 싹싹 빌고 김종서가 저도 강아지 한 마리 살거에요. 김경호라고 이름 지을거에요.라고 말했다. [50] 여담으로 김경호는 히든싱어 2 윤도현 편에서 한번이라도 틀릴 경우 도현이형이라고 하겠다고 하여 2라운드에서 틀린 바람에 도현이형이라고 했다. 김경호와 윤도현은 친구이기는 하지만 윤도현이 빠른 72년생으로 나이로는 한 살 어리다. [51] 강원도 장칼국수 집에서 먹은 국수 맛에 반해 창업했다고 수요미식회에서 후일담을 털어놓았다. [52] 누가 들어도 김종서였지만 선곡된 곡이 겨울비라(복면가왕은 본인 곡을 불러선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기 때문이다.) 다들 아닌 줄 알았다. [53] 패널로 있던 신봉선 김장훈은 진짜 김종서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은 했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어서 확실하게 김종서로 여기지는 않았다. [54] 투표율 3위로 탈락했다. 당시 출연자가 4명이였는데 3위가 김종서, 2위가 이 사람이였다. 1위는 이 사람이다. [55] 80~90년대 당시 일부 가수들이 마약의 유혹에 많이 빠져서 언론에 이슈가 되었다. 실제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검색을 해 보면 인지도 낮은 밴드들의 히로뽕 사건도 검색이 될 정도다. 심지어 김태원의 경우도 본인의 마약에 대한 원인에 대해서 들국화와 같은 아티스트들의 마약문제와 더불어 당시 있지도 않았던, 정부에서 퍼뜨린 조용필의 마약루머까지 굳건히 믿고서 그게 필수적인 루트인 줄 알았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다. [56] 다만 인터뷰에 의하면 김종서 본인은 워낙 배고픈 무명 시절 부른 것이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데 이 주제가가 들어간 2기는 MBC에서 1993년에 방영되었고 당시 김종서는 1992년에 낸 1집이 히트해서 이미 유명한 스타였다. MBC에서 과거에 가수들의 일대기를 라디오 드라마식으로 한 적이 있었을 때 MBC 측에서 '아무래도 좋으니 취향대로 만들어주십시오' 라고 했던 내용이 김종서편에 나온 적이 있었다. 아마 잊고 싶은 기억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