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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19:38:07

양진

후한서(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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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환제기(桓帝紀)」 8권 「영제기(霊帝紀)」 9권 「헌제기(獻帝紀)」
유지 유굉 유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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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성통 · 음여화 · 명덕황후 · 장덕황후 · 효화황후 · 등수 · 염희 · 양납 · 양여영 · 등맹녀 · 두묘 · 효인황후 · 효령황후 · 영사황후 · 복수 · 조절 · 무양장공주 · 열양공주 · 관도공주 · 육양공주 · 역읍공주 · 획가장공주 · 평양공주 · 융려공주 · 평지공주 · 심수공주 · 평고공주 · 준의공주 · 무안공주 · 노양공주 · 낙평공주 · 성안공주 · 무덕장공주 · 평읍공주 · 음안공주 · 수무장공주 · 공읍공주 · 임영공주 · 문희공주 · 무양장공주 · 관군장공주 · 여양장공주 · 양안장공주 · 영음장공주 · 양적장공주 · 만년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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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3><tablewidth=100%><tablebgcolor=#a11><width=50%> 11권 「유현유분자열전(劉玄劉盆子列傳)」 ||<-3><width=50%> 12권 「왕유장이팽노열전(王劉張李彭盧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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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권 「남흉노열전(南匈奴列傳)」 90권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
남흉노 오환 ·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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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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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공자(關西孔子)
楊震
양진
파일:양진.jpg
최종직위 태위(太尉)
성씨 (楊)
(震)
백기(伯起)
아버지 양보(楊寶)[1]
생몰 기간 54년 ~ 124년
고향 사례(司隸) 홍농군(洪農郡) 화음현(華陰縣) 
재임기간 사도 재임기간 120년 12월 21일 ~ 123년 10월 9일
태위 재임기간 123년 10월 9일 ~ 124년 3월 29일
1. 개요2. 생애
2.1. 관서의 공자2.2. 모야무지(暮夜無知)와 사지(四知) 2.3. 상소로 원한을 사다2.4. 다시 한번 상소를 올리다2.5. 바른 일을 하여 원한을 사다2.6. 상소가 몇 번 씩이고 거절당하다2.7. 간교에 당해 짐독을 마시고 죽다2.8. 죽은 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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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의 명신이며 자는 백기(伯起)로 사례 홍농군 화음현 출신, 전한의 공신 양희[2]의 8세손이다. 조상인 양창은 전한의 승상을 역임하고 아들 양사(楊賜)와 손자 양표(楊彪)도 태위(太尉)를 역임한 명문가다. 증손자가 바로 계륵의 고사로 유명한 양수.

2. 생애

2.1. 관서의 공자

양진은 어릴 적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해 태상(太常)인 환욱(桓郁)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양진은 곧 여러 방면에 통달하여 주위 사람들이 부르기를 관서(關西) 지방의 공자라는 뜻으로 관서공자양백기(關西孔子楊伯起)라고 불렀다.

양진은 호성(湖城)에서 살며 수십년 동안 각 주군(州郡)의 초빙에 응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양진이 나이가 들었으니 벼슬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양진의 불사(不仕)의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어느날 관작(冠雀)[3]이 3마리의 전어(鱣魚)를 물어다 놓고 강당의 앞에서 날아다니자 어떤 사람이 물고기를 잡고서는 풀이하기를 "사전(蛇鱣)은 공경대부(公卿大夫)를 상징하고 3마리의 물고기는 3대를 의미하니 선생(양진)은 이제부터 출세할 것입니다."[4]

2.2. 모야무지(暮夜無知)와 사지(四知)

양진은 결국 나이가 50이 되어서야 출사하였다. 당시 대장군이던 등즐은 양진의 소문을 듣고서 무재(茂才)[5]로 천거하였다. 4번을 더 승진하여 형주자사(荆州刺史)와 동래태수(東萊太守)를 역임하였다.

동래군(東萊郡)으로 가는 도중 창읍(昌邑)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는데 창읍의 현령(縣令)이던 왕밀(王密)[6]이 와서 반갑게 맞이하였고, 이야기가 무르익자 금 10근을 바치면서 자신을 무재로 천거해 준 은혜를 갚는 것이라 말하였다. 양진은 거절하였지만, 왕밀이 "지금은 한밤 중이라 아무도 아는 자가 없습니다."[7] 라고 하자 양진은 "하늘이 알고(天知), 귀신이 알고(神知), 내가 알고(我知), 자네가 아는데(子知),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8] 라고 하였고, 왕밀은 그 말에 부끄러워 하면서 떠났다.
어찌 보면 결국 아무도 몰랐을 것 같은 이 일도 200년이 지나서 쓰인 후한서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양진의 현명한 처세는 정답이었다.

2.3. 상소로 원한을 사다

양진은 탁군태수(涿郡太守)로 다시 발령받아 임지를 옮겼는데 사적인 청탁이 와도 응하지 않았다. 양진의 자식들은 채식을 하며 가마에 타지도 않았고 생활도 검소하였기에 양진의 친구들이나 집안의 어른들은 양진이 자식들에게 산업(産業)이라도 시키라고 하니 양진은 "후세에 청렴한 관리의 자손이라고 부름받는게 좋지 않겠는가" 라고 대답하였다.

117년 드디어 입조(入朝)하여 태복(太僕)을 거쳐 태상(太常)으로 승진하였다. 곧 양진은 박사(博士)자리에 명사 양륜(楊倫)을 천거하고 학문을 가르쳐 유생들의 찬양을 받았다.

120년 12월 21일 유개(劉愷)의 뒤를 이어 사도(司徒)가 되었다.

121년 3월 등태후가 죽자 안제가 리미트가 풀렸는지 후비(后妃)들을 총애하면서 거만하게 굴었다. 안제의 유모乳母)였던 왕성(王聖)도 황제를 기른 공으로 안제에 의지하며 제멋대로 굴었는데 그녀의 딸이였던 백영(伯榮)이 궁중에 출입하면서 뇌물을 받고서 법을 어기자 양진은 보고만 있기에는 속이 탔는지 상소를 올린다.
신은 군주는 예로부터 시정할때 덕과 재능을 겸비한 자들을 중용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관리들은 위법을 하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을 처벌하거나 죽인다는 말을 들었사옵니다. 그래서 당요 우순(唐堯虞舜) 시대에는 재능과 덕이 있는 자들은 모두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하고 악인들은 유배되거나 감금되었기에 천하백성들이 감복하고 나라가 번성하였사옵니다.

지금시대에서는 옛 사람들이 추앙하던 9가지 덕(德)[9]은 빛을 받지 못하는 반면 소인들은 조정의 안밖으로 넘쳐나옵니다. 유모(乳母) 왕성(王聖)은 본래 미천한 출신이라 오랜기간에 어려움 끝에 성상(聖上, 안제)을 봉양할 수 있었사옵니다. 비록 폐하를 정성것 부양하는 고단한 노력을 하였으나, 폐하가 주신 하사 품들은 이미 그녀의 공로를 넘어섰사옵니다. 그러나 그녀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조정의 관리들과 교제를 하고 뇌물을 받거나 부정청탁을 하니 조정의 명성이 훼손되어 마치 해와 달이 먼지를 뒤집어쓴 것과 같사옵니다.

상서(尙書)에서는 암탉이 우는 것을 불길한 징조로 보았고 시경(詩經)에서는 간사하고 꾀가 많은 여자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나라가 쇄하는 근원이라 하였사옵니다. 옛날 정장공(鄭莊公)은 어머니의 뜻에 굴복해 동생인 공숙 단(公叔 段)을 방치해두니 결국 모반을 준비하여 정장공은 동생인 공숙 단을 정벌할 수 밖에 없었사옵니다.[10] 춘추(春秋)에서는 이 일에 대해 "안 가르치고 죽였다(不敎而誅)"라고 폄하합니다. 예로부터 여자 소인은 사귀기 힘들면서도 친해지면 시시덕거리고 멀어지면 앙심을 품는다고 하였사옵니다.

역경에서 이르길 무유수 재중궤(无攸遂 在中饋)하였으니, 간사한 부인은 정사(政事)를 할수 없사옵니다. 따라서 빨리 아모(阿母, 유모)를 출궁시켜 밖에서 살게하시고 그녀의 딸도 궁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래야 조정의 은혜와 덕행은 끝없이 이어지고 폐하와 아모 모두에게 좋은일이 됩니다. 폐하께서는 대국(大局)에 지장이 있는 자녀들에 대해서는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소서, 나라에 유해가 가는 인물에 대해서는 인애(仁愛)와 우유(優柔)의 감정을 지우소서

조정에 업무에 집중하시옵고, 봉작(封爵)은 삼가시어 공물을 줄이시고 백성들의 부역징발을 줄이시옵소서. 덕과 재능을 겸비한 학명지사(鶴鳴之士)들을 폐하 곁에 두시어 조정을 위해 일하도록 하시옵소서 조정의 사대부들이 출사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만드시고 제후국들에게서는 가혹하게 대하지 않으시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만드셔서 조정을 원망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영명(英明)한 황제는 나라를 법에따라 다스리니 이것이 어찌 아름다운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양진의 이런 명상소에도 그러나 안제는 영명(英明)하지 못했는지 상소에 적힌 것을 행 하지 않고 오히려 왕성에게 상소를 들려주는 막장 짓을 해버린다. 결국 왕성은 이 일로 양진에게 앙심을 품었다.

2.4. 다시 한번 상소를 올리다

왕성의 딸 백영은 죽은 조양후(朝陽侯) 유호(劉護)의 먼 사촌인 유괴(劉瑰)와 불륜을 저질렀다. 유괴는 권력을 얻기위해 백영을 아내로 삼았다. 이로인해 안제는 유괴에게 유호의 작위인 조양후를 잇게 하였고 관직은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또 다시 보다못한 양진은 안제에게 반대 상소를 올린다.
신은 태조(太祖)께서 군신들에게 약속하시었던 말을 들었사옵니다. 그것은 '공이 없으면 후작에 봉할 수 없다.' 라는 말이였사옵니다. 작위를 계승하는 것은 예로부터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이으고 형이 자식없이 죽으면 동생이 이은다[11]는 것을 원칙으로해 다른 사람의 작위의 강탈을 예방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죽은 조양후 유호의 동생인 유위(劉威)가 아직 건재히 살아있는데 그러한데도 어찌 유위가 형인 유호의 작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유괴가 작위를 승계받사옵니까

신은 천자(天子)는 공로가 있는 신하만을 제후로 봉하고 제후들은 덕행으로 작위를 받는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러나 유괴는 아무런 공로도 덕행도 없이 단지 폐하의 아모(阿母, 유모)의 딸과 혼인했다는 이유로 시중의 관직을 얻고 후(侯)에 봉해졌사옵니다. 이는 고조께서 정한 제도와 다르고 의(義)에도 맞지 않아 조정의 문무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하고 백성들은 혼란해하옵니다.

폐하께서는 앞선 역사들을 거울삼아 제왕들이 따라야할 규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시어서 천하사람의 마음을 얻으시고 천하를 편안하게 하시옵소서.

양진의 간곡한 상소에도 안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2.5. 바른 일을 하여 원한을 사다

123년 10월 9일 전 태위였던 유개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태위가 되었다.

안제의 외삼촌인 대홍려(大鴻臚) 경보(耿寶)가 중상시(中常侍) 이윤(李閏)의 형을 양진에게 추천하자 양진은 거절하였다. 그래서 경보가 말하기를 "이상시(李常侍, 이윤)는 폐하와 가까운데 폐하께서 이상시의 형을 추천하여달라고 하여서 저는 폐하의 뜻을 전한 것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진은 조정이 삼부(三府)에 인물을 천거시키려 하면 상서(尙書)의 칙서가 필요하다 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이 일로 양진은 경보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황후의 오빠였던 집금오(執金吾) 염현(閻顯) 역시 자신의 친구를 천거하려 하니 양진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공(司空)인 유수(劉授)는 이 둘의 말을 듣고서 추천하여 열흘만에 발탁되니 둘은 더욱 양진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2.6. 상소가 몇 번 씩이고 거절당하다

안제는 유모인 왕성을 위해 집을 지으라는 명을 내리었는데, 중상시(中常侍) 번풍(樊豊)과 시중(侍中) 주광(周廣), 사운(謝惲) 등이 선동을 하여 조정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결국 양진은 또 다시 상소를 올리었다.
신이 듣기에 농사를 지은지 9년이면 3년치의 비축분이 있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요임금 때는 홍수와 재해가 일어나도 백성들은 그대로 먹고 입고 굶주리지 않았사옵니다. 신이 깊게 생각하고보니 지금 여러 곳에서 재해가 발생하고 규모가 계속 확대되니 백성들이 비축해 놓은 것은 없어지는 와중에 메뚜기떼가 발생하여 재해를 낳으니 강(羌)족은 계속 노략질을 해와 변방에서는 소란이 잦을 날이 없어 병마와 곡식을 계속 보급하기 어렵고, 국고는 궁핍하여 사직이 평안치 못하옵니다.

폐하께서는 조서를 내려 유모를 위해 집을 짓도록 하였사오나 신이 막 그 집을 보았는데 두개의 방(坊)을 하나로 합치고 산을 깍아서 돌을 캐고 조각과 장식은 지극히 정교하니 그 비용이 거억(巨億)에 달하옵니다. 지금은 여름이라 초목이 무성하여 농사에 관해 할 일이 많은데도 자연재해가 심각하여 국고가 텅 비었음에도 사람과 돈을 총동원하여 집을 짓도록하는 것은 시의에 맞지 않사옵니다.

특히 주광과 사운은 황실에 중요한 친척도 아니고 단지 황실의 친행에 기대며 살아가는 소인배일 뿐이옵니다. 번풍, 왕영(王永) 등에게 권력을 나눠주고 주군(州郡)에 두루 청탁하며 위세를 가해 신하를 동요시키니 재상의 부서에서는 인물을 천거하려하니 모두 이들의 눈치를 살피옵니다. 결국 불러온 사람들은 뇌물을 주어서 관직을 얻은 무능한 사람들이옵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과거에 횡령과 뇌물이 적발되어 벼슬이 금지된 자들도 있어서 흑백이 뒤섞이고 맑음과 더러움이 같은 곳에서 나와 조정이 결탁을 하였다며 천하가 떠들석해 하옵니다.

신은 스승으로부터 나라가 백성들의 것을 빼앗으면 백성들은 나라를 원망하고 결국에는 반란을 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나라와 멀어지면 나라는 백성들을 의지 할수 없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백성이 풍족하지 못하면 임금이 어찌 풍족하랴?" 라고 말하였사옵니다. 폐하께서는 다시 헤아려 주소서
그러나 안제는 또 말을 듣지 않았다.(...)

번풍과 안영은 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하였는데 조서를 위조하여 대장장이와 재목을 마음대로 가져가 각자의 집과 정원을 더욱 크게 지어 소비된 인력과 재물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양진은 이런 막장 짓을 보고 또 다시 상소를 올린다.
신은 태위(太尉)를 지내고 있사오나 능히 음양을 조화시킬 수 없어 작년 12월 4일 낙양에서 지진이 일어났사옵니다. 신의 스승께서는 땅은 음기(陰氣)에 속한다 하였으니 지진이 일어난 이유는 음기가 넘처나기 때문이옵니다. 그날은 무진(戊辰)일이오니 세개가 모두 토(土)이며 그자리는 중궁에 있아오니 이것은 중신과 가까운 관리인 환관이 권력을 잡고 농단하기 때문이옵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길 폐하께서 변방이 아직 평안치 못하오니 스스로 노력을 각고히 하시어 궁전에 담벽이 기울어져도 버팀목으로 괴어야 할 따름이라고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폐하의 측근들은 교만하고 분수에 넘치게 일을 하여 죄수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집을 성대하게 짓고 권세를 부리니 지진은 실로 이 때문에 발생하였사옵니다.

또한 겨울에는 쌓인 눈이 없고 봄에는 비가 없어 관리들이 하나같이 초조해 하는데 계속 건설을 하시오니 진실로 가뭄이 올 징조이옵니다. 폐하께서는 강건한 정신으로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신하를 내치시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 위복(威福)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소서

양진은 거듭된 상소로 점점 언사가 격렬해져 안제는 불편해 하였고, 번풍과 안영은 양진을 원망하였지만, 그가 이름난 유학자이였기에 감히 해칠 수가 없었다.

하간군에서 조등(趙騰)이란 자가 궁문에 책을 올리고 조정을 비판하자 안제는 격노하여 조등을 가두게 하고 고문 끝에 황제를 모함했다는 불경죄로 끝을 내었다.

양진은 조등을 구하기 위해 상소를 올리니
신은 요순시대 때 조정에 직간할 수 있는 북을 놓고서 관리와 백성들이 임금에게 비판을 할 수 있도록 장려하였사옵니다. 은주시대의 명철한 왕은 백성의 불만을 듣고서 자신의 치국 중에 결점과 잘못을 수정하여 덕으로 백성을 감화 시켰사옵니다.

지금 조등이 비록 격렬한 말로 조정을 공격한 죄를 지어도 살인이나 방화와의 죄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니 신이 엎드려 빌건대 죄를 감하여 조등의 생명을 온전하게 하여 나무를 하거나 수레를 끄는 사람조차도 말을 할 수 있도록 하여주소서
이쯤이면 다 알다시피 안제는 또 다시 양진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등도 결국 목이 베이고 말았다.

2.7. 간교에 당해 짐독을 마시고 죽다

124년 안제가 태산으로 순행하자 번풍은 황제가 없음을 이용해 저택을 더욱 크게 지었다. 태위부(太尉部)의 고서(高舒)란 자가 번풍등이 거짓으로 조서를 쓴 것을 알아내어 안제가 다시올 때를 대비해 상주문을 썼다. 번풍은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마침 태사(太史)가 별이 거꾸로 되어있다고 하자 번풍은 거꾸로 양진을 참소하였다.
조등이 죽은 후로 양진은 깊이 원망하고 분노하였사옵니다. 또한 등(鄧)씨의 옛 관리로써 원한의 마음을 가지고 있사옵니다.[12]
안제는 순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태학(太學)에서 길일이 될때까지 기다리고 밤에는 사람을 보내 양진의 태위 인수를 거두게 하니 양진은 문을 닫아 빈객들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번풍은 경보에게 참소하도록 하였다.
양진은 비록 대신(大臣)이오지만, 죄를 내린것에 불복종하옵고 원한을 품고 있사옵니다.
안제는 이에 양진을 파면시키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양진은 낙양 성 서쪽에 있는 기양정(幾陽亭)이란 곳에[13] 이르자 의분에 복이 받쳐 한탄하며 여러 아들과 문생들에게 말하였다.
죽음이란 것은 선비에게 있어서 항상 있는 것이다. 나는 은혜를 입어 높은 관직에 있었지만 간신의 교활함을 미워하면서도 죽이지를 못하였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여인이 나라를 기울이고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였지만 금하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해와 달을 보겠는가? 내가 죽으면 잡목(雜木)으로 관을 짜고 포(布)로 한번만 쌀 것이며 몸만을 덮고, 조상의 무덤 옆으로 운반하지도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러고서 양진은 짐독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이 때 양진의 나이가 70이었다.

2.8. 죽은 후

홍농태수(弘農太守) 이량(移良)이 번풍의 뜻을 이어서 섬현(陝縣)에 관리를 파견해 양진의 상(喪)을 멈추게 하고 관을 길가에 방치해 두는 막장 짓을 한다.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양진의 아들을 모두 좌천시키고 우편물을 나르는 사람을 대신하게 하니 도로의 사람들 중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자치통감에서는 태복(太僕) 정강후(征羌侯) 내력(來歷)[14]이 경보에 대해 평하는데 "경보는 황실의 기대어 영화와 은총이 후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의 보답할 생각은 안하고 간신들에게 기울어져서 충신을 해치니 하늘의 벌이 곧 이를 것이다." 라고 하였다.

125년 한순제가 즉위하고 번풍과 주광이 사형을 당하자 양진의 문하였던 우방(虞放)과 진익(陳翼) 대궐에 이르러 양진의 관한 일을 호소하였다. 조정에서는 모두 양진의 충성심을 칭찬하였고, 양진의 두 아들을 모두 낭(郎)으로 삼고 100만 전(錢)을 하사하였다.

예로써 동관현(東莞縣) 서쪽에 화음동정(華陰潼亭)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1장(丈) 정도되는 큰 새들이 날아와서 양진의 상(喪)을 부둥켜 안고 처량하게 울면서 눈물을 흘려 땅을 젹셨다. 군(郡)에서는 이 일을 기이하게 여겨 조정에 보고하니 순제는 양진의 충성에 감복하여 명하니 중뢰(中牢)의 예[15]로써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3. 기타

양진 본인 뿐만 아니라 아버지인 양보(楊寶), 둘째 아들인 양병(楊秉), 손자인 양표(楊彪), 증손자인 양수(楊修)까지 모두 고사성어 제조기다. 양보는 황작함환(黃雀銜環), 양병은 삼혹(三惑)[16], 양표는 노우지독(老牛舐犢)의 고사로 유명하고, 양수는 계륵(鷄肋)이란 고사를 만들어 내었다. 양진은 모야무지(募夜無知)와 사지(四知)의 고사를 만들었다.


[1] 다쳤던 꾀꼬리 하나를 구해주자 꿈에서 황의 동자가 나타나 서왕모의 심부름으로 옥환 4개를 주었다는 황작함환(黃雀銜環) 고사로 유명하다. [2] 해하전투 이후 항우가 추격해 온 옛 부하 여마동을 보고 자결하자 여마동, 왕예, 양무, 여승 과 함께 항우의 시신을 얻어 적천후(赤泉侯)로 봉해졌다. 고조공신열후 서열 103위다. [3] 새 이름으로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만주뿔종다리의 유의어라 나온다. [4] 주석에 의하면 관작(冠雀)의 발음은 황새를 뜻하는 관작(鸛雀)과 같고 전(鱣)의 발음은 선(善)과 같다. 한자(韓子)는 전(鱣)과 사(蛇)의 모습이 같다고 하였다. 산해경의 주석을 쓴것으로 유명한 곽박(郭璞)은 전(鱣)은 길이가 3장 정도된다고 한다. 사마표(司馬彪)의 속한서(續漢書)와 사승의 후한서에서는 '鱣'가 아니라 '鱓'( 드렁허리 선)라고 기록되어 있어 '鱣' 과 '鱓'는 옛날에는 서로 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양진은 태위가 되고 아들인 양사 양표도 태위가 되었지만 4대째인 양수가 그만 조조의 심기를 거스르다 죽으니 정확한 예언이다. [5] 전한(前漢) 때부터 생긴 각지방에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군태수(郡太守)가 관리후보로 조정에 추천하는 제도로 본래는 수재(秀才)였지만, 광무제의 이름이 수(秀)였기에 피휘되었다. [6] 양진이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내던 시절 무재로 천거한 인물이다. [7] 모야무지자(暮夜無知者) [8] 원문은 "天知, 神知, 我知, 子知, 何謂無知!" 여기서 신(神)은 하늘에 대응하는 지(地)로 대체되어 땅이 알고(地知)라고 표현되기도 하며, 발음 때문인지 너를 의미하는 부분의 한자인 자(子)를 여(汝)로 바꾸어 여지(汝知)로 설명한 글도 자주 보인다. [9] 충성 충(忠), 믿을 신(信), 공경할 경(敬), 굳셀 강(剛), 부드러울 유(柔), 화목할 화(和), 굳을 고(固), 곧을 정(貞)이다. [10] 정장공은 어머니인 무강(武姜)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무강은 동생인 단을 나라의 후계자로 삼게 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정장공이 이은다. 무강은 정장공에게 동생인 단에게도 분봉하라고 청하니 모사 채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장공은 어머니의 부탁이라며 단에게 경(京) 땅을 준다. 22년 후 무강의 부추김으로 결국 형제간의 전쟁을 하게 되고 패한 단은 위(衛)나라로 망명한다. [11] 부사지계 형망제급(父死子繼 兄亡弟及) [12] 등즐이 양진을 무재(茂才)로 천거한 것을 억지로 이어붙인 것이다. [13] 자치통감에서는 석양정(夕陽亭)이라 나온다. [14] 후한의 개국공신 내흡(來歙)의 증손자이자 사공을 지낸 내염(來豔)의 조부이다. [15] 제후들의 제사의 예로 돼지와 양을 바친다. [16] 양병은 평생을 술을 멀리 했고, 젊어서 아내가 세상을 뜨자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누군가 거금을 보내자 문을 굳게 잠그고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하길 나는 술, 색, 재물 세 가지에 현혹되지 않는다.(我有三不惑 酒 色 財也)